1. 삼형제의 탄생

  2006년 10월 2일 한 가족의 저녁식사를 위한 부식재료로 구매되어 냉장 보관되고 있던 고구마, 감자 그리고 무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깔끔하게 손질되어 음식으로 재탄생할 것을 기대하던 이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며 할 말을 잃어야 했다. 아랫도리가 잘려나간 채 수반에 얹혀지고는, 햇볕이 따뜻한 테라스에 놓였다.

  3일 후, 그간 따뜻한 가을볕을 쬐었던 감자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감자의 옆구리에서는 하얀색의 눈이 터져나왔고, 한번 터져나오기 시작한 눈은 불쑥불쑥 그 크기가 날로 커지고 있었다. 무 역시, 줄기가 뻗어나오면서 연두빛의 잎사귀가 움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고구마는 외로 돌아누운 채 미동도 없다.(10.2-5)



2. 감자와 무의 기(氣) 싸움

  큰형 고구마가 좀처럼 움직여볼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이자, 감자와 무 간에는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무는 연두빛의 여린 줄기가 두세개로 늘어나면서 쭉쭉 줄기생장하기 시작하더니, 잎사귀가 제법 풍성해졌다. 감자는 하얗고 약하게만 보이던 눈이 한두개가 아니라 이제 마치 덩어리처럼 잔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덩어리는 보랏빛과 연두빛이 섞여들어 조금은 성숙해보이기도 한다.(10.6-10.8)



3. 질풍노도(疾風怒濤) 시기의 무

  무가 뻗어올린 대궁이가 어느 순간부터 세기 쉽지 않아질 정도로 많아지더니, 잎사귀의 키가 10~15cm에 이르렀다. 가장 왕성한 발육을 보이고 있는 무가 계속 이렇게 자라게 되면 바싹 인접해 있는 감자와 고구마가 햇볕을 쬐기에 불편함이 예상되었다. 하루하루 체크할 때마다 키가 자라며 잎사귀의 색이 짙어지는 것이 실감날 정도로, 무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10.9-12)



4. 감자의 가출

  무의 잎사귀가 한껏 푸르러지고 사방으로 펼쳐지면서, 감자가 불평하기 시작했다. 감자의 눈이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고 방심한 사이, 녀석은 이미 흰 수염 세네 가닥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감자는 어느 순간 가출을 결심했고, 하얀색의 단조롭고 답답한 수반을 떠나서 화려한 무늬를 가진 도자기 접시로 분가해 버렸다. 고구마, 감자, 무가 꽉 찼던 수반은 이제 많이 여유로워진 모습이었고, 감자 역시 자신만의 발육 공간을 찾아 기쁜 모습이다.

  하지만 큰형 고구마는 감자와 무 간의 형제다툼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아누운 자세 그대로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있다.(10.13-17)



5. 조숙한 동생들

  가출해서 분가해버린 감자는 일주일도 안 지나서, 이만큼 무성한 뿌리를 만들어냈다. 수반에 넉넉히 차있는 물 때문인지 뿌리로만 너무 왕성하게 자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눈은 총 6개, 너무 많아서 영양분이 분산될 수도 있다는 조언을 듣고 조만간 눈이나 뿌리를 잘라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 중이다.

  무 역시 총 열세 개에 이르는 줄기를 뻗고 있는데, 줄기에 가득 달린 잎사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벌어져 있다. 이제 저렇게 풍성해진 잎새 사이로 꽃대궁이가 올라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역시 잎사귀가 너무 많아 영양분이 분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소 염려스럽기도 하다. 조금더 지켜본 뒤에도 꽃대궁이가 안 올라오면 마음 아프지만 솎아내야 할지도 모르겠다.(10.18-25)



6. 지진아 고구마

  고구마의 완강한 침묵에 질린 채, 웃자란 감자와 무에 신경을 온통 쓰고 있었다. 자연스레 카메라에 담을 때도 고구마는 항상 사진의 구석에서 돌아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구마가 하얀 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구마의 가느다란 쪽 끝에서 하얀 색의 실뿌리가 어느새 2-3cm에 달할 정도로 자라 있었다. 그 외에도, 연두색의 아주 조그마한 싹 같은 것이 그 위에 사마귀처럼 달려 있다.

  큰형이 이제야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싱싱하고 튼튼해 보이던 잎사귀와 줄기가 시들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무게를 못이기고 축축 처진다. 감자는 별다른 변화없이 묵묵히 큰형의 뒤늦은 기지개를 바라보고 있다.(10.26-31)



7. 역주(力走)하기 시작한 고구마

  고구마는 일단 싹을 틔우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자, 마치 예전의 무가 그러했던 것처럼 왕성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가냘픈 연두색의 싹은 고구마의 몸체와 비슷한 자주색으로 변화하면서 쉽게 알아볼 만큼 자라났다.(약 1.3cm) 그리고 이틀이 지나자, 그 싹은 좀더 자라나 끝에 잎사귀가 말린 듯한 모양의 망울을 달게 되었다. 그저 밋밋한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첨단부에도, 그리고 옆 켠에서도 가지가 생겨나고 잎사귀가 펼쳐지고 있다.(11.1-4)

 


8. 생식에 실패한 무와 남일같지 않은 감자

  무는 이미 너무 많은 양분을 잎을 자라는데 써버려서 꽃을 피울 능력을 상실한 것 같다. 좀더 일찍 손을 썼어야 하는 거였다고 후회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쪽의 줄기들을 전부 솎아 내었다.

  감자는 눈이 비대하게 자라났으면서도 더 이상 그로부터 무언가 생겨날 기미가 안 나타난다. 무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손속에 잔정을 남기지 않고 하나의 눈만 남긴 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이렇게 했으니 감자는 생식에 실패한 채 그냥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무와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할 텐데.

  고구마는 싱싱한 자주색의 줄기를 쭉쭉 뻗어올리더니 아주 정결하고도 예쁜 초록색 잎을 기어코 펼치는데 성공했다. 뿌리도 점차 굵어지면서 보랏빛이 물들기 시작하더니, 촘촘하게 실뿌리가 자라나고 있다. 잔뜩 시들어버린 채 줄기만 앙상하게 뻗은 무가 보기 싫어서 다시 한번 솎아내버리고 아직 덜 자란 줄기 세네 가지만 남겨놓았다.(11.5-11.10)



9. 무의 죽음

  무는 결국 아무런 자손도 퍼뜨리지 못하고, 최소한 생식을 위한 기관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버렸다. 젊었을 때 ‘위풍당당한 시래기’를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 버린 탓인 것 같다. 무를 만져보니 처음의 느낌과 조금 달랐다. 약간 푸석푸석해진 듯하면서 말랑말랑해진 것 같았다. 무가 다시 대지로 돌아가면 어딘가의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으며, 무를 수반에서 치웠다.

  고구마는 이제 상당히 볼만한 잎사귀를 다섯 장이나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잎은 가로 5cm, 세로 4cm에 이를 만큼 자라났으며, 뿌리는 이미 잔뜩 자라나있어서, 무가 떠난 빈 자리를 가득 채웠다.

  감자는 막내 무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하나만 남긴 채 모두 솎아버린 눈 끝에서 조그마한 싹이 돋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무엇인지 알 수 없다.(11.11-17)



10. 대기만성(大器晩成) 고구마

  고구마는 그동안 무 때문에 자신이 자라지 못했던 것이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떠나간 무의 빈자리를 순식간에 가득 자란 뿌리로 메꾸고는, 싱싱하고도 튼튼한 줄기를 힘차게 뻗어올렸다. 총 연장 23cm에 이르는 줄기에는 8장 정도의 잎이 달려있으며, 보라색 줄기에 짙은 초록색의 잎사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가장 큰 잎은 이미 가로 10cm, 세로 9.5cm 정도로 손바닥만하다는 비유가 알맞을 정도이다.

  감자는 눈의 첨단부위에 몽글몽글하게 털이 난 조그마한 망울이 생겨났다. 일주일을 매일같이 지켜보아도 별다른 변화가 없어서 혹시 겨울눈은 아닐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지만, 조금 더 지켜보면 무언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11.18-25)



11. 현재 상황(2006.11.26)

  2006년 11월 26일 현재 고구마는 12장의 건강한 잎사귀를 활짝 피운 채, 두툼하고 싱싱한 줄기를 뻗치고 있다. 조금 더 자라나면 꽃이 맺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한편 감자는 그 끝의 망울이 점차 커지면서 이제 육안으로 쉽게 식별이 가능한 정도이다. 솜털이 보송보송 나있으며, 그것이 계속 자라면 무엇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하다.

  앞으로도 계속 관찰을 지속할 예정이며, 고구마의 경우는 감자와 무의 선례를 통해 얻은 경험을 통해 싱싱한 초록색을 더욱 싱싱하게 피워올릴 수 있도록 주의깊게 돌볼 생각이다.



@ 2006. 2학기 '생활원예' 수업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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