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받는 정기건강검진을 위해 받아든 서류봉투에선 그리 길지는 않았던 문진표와 함께 작은 종이봉투가 나왔다.

변기에 설치하는 채취용 '편의도구'와 초록색 비닐백에 든 작은 플라스틱 키트, 뭐랄까. 어른을 위한 채변봉투.

어렸을 적에는 황토색의 거칠거칠한 종이봉투에 비닐봉지 하나가 고작이었던 것 같은데, 이만큼 세련된 '응가'봉투라니.


그래봐야 똑같다. 안에 똥을 품고 있다. 이녀석은, 내가 사진을 찍은 이녀석은 품고 있을까 없을까.

다소 심술궂고 악취미적인 질문이거나 상상력의 자극인지 모르지만, 어찌보면 이 플라스틱 통이나 사람이나 똑같다.

안에 똥을 품고 있다.(그렇다고 사진 속의 이녀석이 품고 있다는 건 아니다. 뭐..결과적으로는 품었겠지..만.)

우리가 그렇다고 사람을 마주하며 이녀석은 지금 뱃속에 응가를 품고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진 않는 것처럼,

이녀석도 마찬가지로 관대한 시각으로 봐줄 수 없을까.


두 가지의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을 듯 하다. 어차피 안에 들어있는 게 응가인데 똥색봉투에 대충 담던, 아님 이렇게

새끈하게 빠진 플라스틱 통에 담겨 초록색 봉투에 담겨 다시 종이봉투에 담던 내용물은 변치 않는다는..일종의

反Plastic Surgery스러운 방향. 또 하나는 아무리 안에 들어있는 게 응가라 해도 1980년대, 90년대 초의 그때와는

달리 이렇게 충분히 덜 혐오스럽고 위생적인 방법으로 관리하는 게 가능하다는, 다소 전향적이고 비위좋은 방향.


결국 진부한 '내용'와 '형식'의 문제로 치환될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똥'에 대한 입장이다.


"똥누는 순간은 하나님의 창조를 수락하지 못하겠다는데 대한 일상의 증명이다. 둘 중의 하나다. 똥을 수락하던지

아니면 우리들 자신이 수락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똥의 존재가 부인되는 미학적 이상은 키취라고 한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응가-똥에 대해 '수락'하며, 마음의 독재를 불러일으키는 '키취의 제국'을 거부한다. 이건 사람이다. 혹은

그 쓰임으로 인해 사람과 비슷한 면이 매우 많아진, 플라스틱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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