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어서 대강 얼개만 써두었던 리뷰..다시 풀어서 쓰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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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후퇴

2007년에 8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으로 프레시안이 주최했던

좌담회를 모은 책. 당시 대선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서

나온 이야기들은 불과 1년도 안 되어 너무 멀어진 '얘기'거나 혹은

너무 섬뜩해진 '예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한국은 어느정도 민주주의가 고착되었노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농담삼아 MB가 되면 이민간다했었는데..이렇게 쉽사리

국내외 정치/경제/사회의 전분야에서 망가져버릴 줄은 몰랐다.

지난 20년을 조망하는 책을 보면서, 고작 지난 몇달간..그리고 향후

5년간 얼마나 '희망'과 '성숙'이라는 단어와 멀어져야 할지

답답한 마음에 몇번이나 책을 처박아두곤 했다.


#1.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역량 간의 갭

불꽃놀이 같은 열망의 폭발은 소진의 징후일지도. 예컨대 87년 5월항쟁의 폭발은

6,7,8월의 노동자대투쟁을 외면했다. 딱 그만큼의 각성에 알맞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그 소란스러움과 야단스러움을 감당할

준비가 된 '시민'을 키우지 않는 교육/매체. 오히려 시민 의식과

역량을 소진시키기만 하는 교육/매체. 타협과 협상, 소통을 모르는

이뭐병..MB는 어쩜 이 시대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그를 뽑은 '우리'라는 양비론으로 가고 싶지도 않고,

뽑았으니 닥치라는 놈은 너나 닥치시고, 정치적 상품으로서의 MB리콜운동을

말하며 정치를 경제적 메타포로 헷갈리게 하고 싶지도 않다.)


#2. 열망이 있기는 할까?

독재/군사정권/억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민주주의' 말고.

절차적 민주주의 말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선결조건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먹고 사는 데 도움 안되는 것들로 싸잡아 평가절하되는 것들.

'실용'이라는 단어에 매료당한(당했던) 사람들.


#3. 몇가지 내 생각

한국에서 민주적 문화의 성숙을 막는 몇가지 질곡. 군대/군대식

학교/군대식 기업/유교적 가부장제/되먹지 않은 어른들.

촛불든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 난 아무리 싫어도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이 사회에 이러저러한 빚을 지고 있으며

이러저러하게 사회를 변화시켜왔던 어른. 평생 아이인 척 살 수

없을 바에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보겠다고 비로소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하준식의 사회적 대타협이란...현상에 대한

문제의식과 우려, 그리고 지향까지 동의하지만 경로면에서

매우매우 불만스러운 이야기.

또하나, 비판만이 아닌 삶의 긍정을 말해야 하는-자본주의의

공포 문화/선망 문화를 넘어서기 위해-시민운동 혹은 문화운동이

사회나 삶의 모순, 질곡의 근본원인들을 지적해내는 까칠하고도

불만섞인 시각과 어떻게 엮일 수 있을까. 항상 궁금했던 문제..


지금 내 삶이, 사회가 이러이러하게 문제가 있다, 불만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지금 당신 삶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으니 괜히

경쟁의 논리와 박탈의 틀 내에서 시기하거나 좌절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한입으로 두말하기..의 위험을 벗어나야 할 텐데.

나만 그런 걸까. 두 사람의 관계는 대개 '넌 참 이기적이야'란 말, 그리고 '난 정상'이라는 암묵적인 말로 하는

땅따먹기같다. 어디까지가 과연 이기적인 건지..그리고 어디부터가 이타적인 건지 그 명확치 않은 경계설정과

의미부여는 당연히 어느 쪽이 더 약한지에 달려있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하다란 건, 그 사람에게 자신의 약점을 잡히고 있단 얘기. 투전판에서 패를 몽창 까보인

후에야 뭘 어쩌겠는가. 그래서 게임같은 연애를 즐기는 건, 상대와의 샅바싸움이기도 하고 꼬리잡기 게임같은

건지도 몰라. 상대보다 조금은 더 우월한 고지에서..내 마음은 보전한 채 상대의 마음을 뺏겠다는 그야말로

'이기적인' 경기규칙.


이번에는 그 이기적인 경기규칙을 넘어서서, '난 정상/넌 이기적'이란 자기중심적인 소아병을 이겨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와의 관계는 살벌한 투전판 위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봄볕에 갓 말린 보송한 이불 위에서 뒹굴듯

그렇게 다정하고 장난스런, 그치만 서로를 위한 긴 여정 위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엑셀로드의 게임이론이

망측스럽게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무한반복될 거라 믿는 게임에선 윈-윈의 가능성을 찾는 게 인간이니까..

약점을 처음에 누가 먼저 얼마나 많이 쥐어주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쥐어준 건 내 약점이지만, 그녀는 내 약점을 이해하고 고이 보듬어줄 보석함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협박하는 게 아니라 외려 약점에서 장점과 강점을 발견해내며..넌 약하지 않아,

혹은 난 너만큼 약해..라고 말해주는 것. 그런 게 가능할 거라 믿었다.


물론 모르지 않았다. 한발 밀리고 두발 밀리다 보면 과연 내가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질 뿐

아니라, 그녀 역시 '난 정상'이라며 강변할 영역 역시 한없이 넓어지게 만드는 거라고. 길들임..이라는 단어를

이런 때도 쓸 수 있다면, 최소한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을 그어놓고 그건 지켜내야 하는 거라고

그녀에게 알려야 했고, 나 역시 그녀와 함께 그 경계에 길들여져야 했다.


다만 여러가지 상황으로 난 그럴 수 없었고 한발 두발 밀려났다. 그저 밀려났다고 불안감만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한발 두발 밀고 들어왔다기보다는, 자신이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우린

그저 처음 우리가 그어놓았던 '이기적'이란 의미 그곳에서 한걸음도 밀리거나 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밀려났다고, 비참해지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눈물을 흘렸다.


다시 묻는다. 난 이기적이었나. 이기적으로 변해갔나. 자기애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연애놀음에서 한발짝이라도

멀어져서, 상대를 진정으로 생각하며 그녀의 입장에 서 본적이 있었던가.


운전을 할 때, 특히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면, 종종 앞차와의 추격전을 벌이곤 한다. 앞의 검은색 그랜저,

50m, 30m, 10m, 0m, 아싸..추월. 그리곤? 다시 앞에 차가 나타난다. 이번엔 흰색 카렌스, 50m, 30m, 10m, 0m,

다시 추월. 계속해서 내 앞의 차들을 넘어서고 도로를 장악하려고 한다. 거침없는 정복욕이랄까..

때론 추월하려던 목표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더욱 거리만 벌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일렁이는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상처입는 자존심. 비록 여전히 전반적인 도로의 흐름보다 앞서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여전히

앞서 뛰어넘었던 몇 대의 차들을 뒤에 두고 있다 할지라도 이미 먹어버린 것들은 기억하지 않는 나쁜 습관.


그런 습관의 발현인 걸까. 기억나지 않는다. 난...노력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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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티켓 두장, 그리고 최소 삼십분의 땡땡이 예상시간에 혹해서 집체 헌혈행사에 참여했다. 트레이드타워

정문에 늘어선 헌혈차들. 저혈압이라며 뺀찌먹고선, 이럴순 없다 하며 다시 신청서를 귀찮게 작성해선 옆 차에

올라 검사를 받았다. 10분전의 뺀찌..부적합 판정 기록이 어느새 내 발목을 잡아서 왠만함 이번에는 쉬시라는,

마음만 받겠다는 간호사 누님의 말에 투덜투덜대면서 기어코 피를 뽑았다. 가만히 누워서, 이마와 발끝에서부터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생각해 보았다.


일종의 가학? 그리고 피학의 동시만족? 나에 대한 as-is 분석과 to-be 분석..내가 가진 능력과 비전 내지

희망에 대한 매일매일의 새로운 분석은, 새로울 것없이 매일매일 우울하다.

현재 내가 가진 것들, 능력-소질-관심사-지식-자격증-점수-숫자..뭐하나 맘에 드는 것도, 깊이 벼리고 내세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갑남을녀, 장삼이사, 뭐 그렇고 그런 아무개. 그리고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들, ...난

뭘 갖고 싶은 걸까.라는 곰팡내 나도록 오래고 단물빠진지 오래인 질문.

내가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게 맞는지, 이게 내게 최선의, 아니 차선의 결과라도 되는 건 맞는 건지. 그리고

이곳은, 내게 맞는 최소한의 십원짜리 팬티라도 되어줄 수 있을지. 아니라면, 아니라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런데 지금 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모르겠고, 아무것도.

혹은 두렵고, 정말 모르겠고, 아무것도.


단순히 몇 개의 굵직한 행사가 거듭되어 쌓인 피로 탓일까, 성과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눈에 걸리적대기

시작된 탓일까, 회장/부회장의 개념없는 언행들에 진력이 난 탓일까, 아님 이 곳의 학교 선배들 모습을 보며

지레 질려버린 탓일까...혹은 이명박의 사진만 봐도 울화가 치밀고 욕지거리가 나온지 오래인 심리적 분격상태

탓일까, 그리고 얼마전 문득 떼거지로 만났던 대학원생들, 그리고 유학생들의 jargon에 양가감정을 느끼고

말았던 탓일까. 게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시간에 휩쓸려 대충대충 정신없이 지내는 하루하루.

무언가 쌓여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무언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만이 허하게 남는 탓일까. 대체 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요새 까칠해졌다. 지하철에서 고딩들이 떠들면 니들 안방이냐고 큰소리로 갈구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두줄타기하는 사람뒤에서 툭툭 쳐대는가 하면, 걸을 때 앞에서 느긋하게 걷거나 역주행하는 사람들에겐 감정실린

어깨를 날려준다. 그래, 사실은 내 앞에서 신경거슬리게 만드는 게 네온사인 간판이던 사람이던, 뭐가 되었건

있는 힘껏 한방 날려줬음 속이 다 시원하겠다. 이왕임 주먹도 덕분에 피칠갑 좀 했음 좋겠고.


밤늦은 지하철, 영등포구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멍하니 넋놓고 서있는 사이 두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댔다. 황급히 뛰쳐나와 반대편 플랫폼으로 가면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멍하니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오지 않았어도 될 길을 멍청하게 되밟아 가면서, 죽어버릴까 하고 사십번은 뇌까렸다.

이게 뭐하는 거냐..집에 가 쉬어야 할 몇분의 시간을 왜 이렇게 멍청하게 허비하는 거냐..아니 잠깐, 요새 넌

시간을 쓰는 거냐 시간을 지우는 거냐..죽어버릴까, 라는 구간반복 무한재생.


어제 엄마가 사왔던 정장바지는 엉덩이가 숨쉬기 힘들었다. 허리는 여전히 31-32정도에서 유지되고 있고 배도

그닥 변질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방심한 엉덩이에 살이 올라붙고 있었다.

우울해져서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래서그래서. 오늘 오후 두시간동안 헌혈이랍시고 땡땡이치고는 '죽음'을 타이밍좋게 체험했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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