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갈피를 잃다.
취직하기 전엔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그 다음에 한숨돌리고 다음 길을 찾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루하루 그저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온세상 호랑이가 모두 녹아내려 버터가 되어버릴만큼.' 얼굴에 '장학퀴즈
출전자나 그럴법한 적당한 영리함과 발랄함'을 잔뜩 둘러친채 오전부터 오후까지 내내 대면해야 하는 사람들.
그것도 모자라 한기수 위 선배들이네 두기수 위 선배들이네, 게다가 노조네 어쩌구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들.
패턴인양, 저녁식사와 술 그리고 노래방과 3차 술집. '사람', '인간'관계가 중요한 고즈넉하고 고루한 협회라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람'이 아니라 '동기'란 걸로 묶여버려서, 노래방에선 우르르 앞에 몰려나와 방방 뛰며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템버린을 흔들어대고-혹은 목에 걸고 온몸을 흔들어대고-선배님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웃는 척, 즐거운 척 하고 있다.(적어도 난 그렇단 거다. 동기들은 어떻다..라고 묶어서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2. 술이 싫다.
술이 싫다. 정확히 말하자면, 술에 기대어 친한 척 환각에 빠지기도 싫고, 술에 기대어 인간적인 척 충고하고받고
그러는 것도 싫다. 바라건대 두 명, 최대한 네 명 이하의 술자리에서만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같아, 상대와
눈맞추며 열심히 얘기를 섞어보고 싶었다. 내 잘못도 있는지 모른다. 조용히 중간에 묻어있으려던 나는 어느새
'주량이 가장 세고' '말도 많고' '술도 좋아하는' 같은 라벨들이 덕지덕지 붙어버려서, 뺑끼조차 쉽지 않아졌다.
요약하자면, 요새 내가 느끼는 건. 선배들과 그런식으로 소모적인 술자리를 갖고 그다지 원치 않는 알콜을
반강제로 섭취하며,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한시간반이나 걸려 막차타고 집에 와야 하는 상황에 지쳐간다는
거다. 응. 신체적으로 힘들면 심리적으로 힘들어지는 법이다. 게다가 내가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내가 걸어갈
길의 막다른 끄트머리쯤에 몰린 건 아닌지 싶은 불안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책임질 수
있는 자리를 챙겨들었으니, 엉덩이만 비벼 주저앉는다면 마냥 늘어져 잠들지도 모르겠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한없이 무거워지는 발을 질질 게을리 끌면서 어느새 몽롱하고 탁해진 눈빛으로 재테크를 말하고, 부동산을
말하고. 그런 게 싫다는 게 아니라, 눈빛이 탁해지고 흐려진다고 스스로 느끼게 되는 상황이 싫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무엇 혹은 어디를 향하고 싶은지, 지금은 그래서 무얼 하고
있는지. 할 말이 없다.
#3. 고양강아지.
어느날 문득 세상 사람들이 개와 고양이 중 하나로 변신한다면, 난 틀림없이 고양이로 변신할 거라고 생각해왔다.
자존심강하고, 자신 고유의 영역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누군가에 매이는 걸 아주 싫어하는 그런 사람. 내가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자존심은 때로 영악한 이기심으로, 때로 소아적인 소심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모든 걸
다해줄 듯 배려하는 척하는 립서비스의 이면에는 정작 나 자신의 영역과 자존심을 털끝도 다치지 않으려는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 깃들어 있기도 했던 것 같다. 이는 미리 다칠 걸 두려워한다는 그럴듯한 핑계 이외에도,
감정을 판돈삼아 벌이는 '연애게임'에서 누구에게도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다는 다분히 실리적인 계산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 거..게임이었을 때나 가능한 거였다. 상대의 반응을 예민하게 잡아내며 밀고 당기고를
유희처럼 즐기는 것은. 상대의 자존심을 무장해제하고 숨김없이 감정을 표현하도록 하면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유치하고 치졸한 생각이었는지.
이제는 그렇다. 그녀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게 감싸주고 싶고, 그녀가 표현하기 전에 내가 먼저 표현해주고 싶고.
나 자신이 그녀에게 열려 있는 만큼 그녀가 훌쩍 다가와서 날 읽어주기를. 내 영역이라 할 것들을 풀어헤쳐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녀가 나를 확실히 길들여 우리의 소통을 방해하는 세상의 온갖 노이즈를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기를.
욕심이 큰 걸까, 때론 우리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남..이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너와 내가 우리라는
단어로 미끈하게 묶이기 위해서는, 피라밋이 바위산으로 변해버린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터무니없는 낙관이 좋을 때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요새 나는 그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란 게 손에 와닿지 않는
이러저러한 것들이 아니라, 그녀 한사람이면 차고 또 넘칠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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