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을 다녀온 분이 선물로 사다준 수동식 에스프레소 기계. 내가 에스프레소 좋아라 하는 건 또 어찌 아시고.

무지하게 작고 귀여운 게, 에스프레소 잔 하나가 저 스팀구멍 달린 물통 위에 올라앉은 느낌이다. 물을 끓여 고온의

수증기로 만들어, 커피가루를 투과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내는 기계라나.

대략의 원리는 그런 거다. 밑의 물통에다가 물을 적당량 붓고, 저 깔대기처럼 생긴 걸 올려서 커피가루를 올리고,

에스프레소 잔만한 저 주전자를 빙빙 시계방향으로 돌려 꽉 조여준다. 뭔가 허술해보이지만, 작으니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가열해 주면, 밑에서 끓어오른 물들이 커피가루를 거쳐 위에까지 튀어올라와, 꽃의 수술처럼 생긴 저

불쑥 솟은 곳 끄트머리에서 뽈뽈뽈 에스프레소 커피원액이 쏟아진다는 거다. 뽈뽈뽈~*

구분동작 #1. 원두커피 갈린 가루를 꾹꾹 눌러 티스푼으로 떠올린다. 색감이 별로 안 살았지만, 저런 거무튀튀하고

기름져보이는 부엽토색, 흙색이 아니라 나름 안성기가 좋아라 한다는 아라비카 원두를 떠올리게 만드는 고운 갈빛이다.

구분동작 #2. 커피가루를 깔대기 위로 옮겨 붓는 와중에 꼭 저렇게 질질질 흘리곤 한다. 그치만 티스푼조차

밥숟가락만하게 보이게 만드는 니녀석의 왜소한 체구가 잘못된 거라구, 따위 변명은 어머니에게로.

구분동작 #3. 가스렌지의 가장 작은 화구에, 그것도 보조받침대를 동원해야 겨우 불 위에 엉덩이를 걸칠 수 있는 녀석에

비하자니, 뒤에 있는 뚜껑없는 주전자가 늠름하다. 플라스틱 손잡이가 지글지글 탈까 싶어 불은 최소한으로.

구분동작 #4. 파란 불빛이 파란 주전자를 순식간에 후끈 달구더니, 미친 듯이 용솟음치는 에스프레소 커피 원액.

부글부글대는 심상찮은 소리를 무시하고 뚜껑을 살짝 열었을 뿐인데, 온통 사방에 커피방울이 튀고 말았다.

마치 원유가 터져나오는 유정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당황스럽고, 그러면서도 유쾌하고. 왠지 마구마구 커피가

올라와서 부엌을 채우고 집을 채우고 세상을 가득 채워버릴 거 같은 걸출한 기개와 박력.

구분동작 #5. 불을 끄니 잔잔한 에스프레소의 호수가 거기 있었다. 밑엣돌을 빼어 위엣돌을 괸다던가, 따위 속담과

전혀 상관없이 밑의 물이 거의 자중손실없이 위로 올라오는데 성공. 커피향이 왈칵 달겨든다 했더니 어느새 둔해졌다.

시꺼멓고 유유한, 쓰고 달고 맵싸하고 시큼한 에스프레소.


그렇지만 제길..뒷처리가 쉽지 않은 에스프레소 만들기. 주먹을 부르는 에스프레소. 아까 뚜껑을 무리해서 열었더니

이 녀석 정말 '뚜껑이 열렸는지' 온통 질질질, 퉤퉤퉤 사방에 뿜고 뱉고 장난 아니다. 행주님이 바빠지셨다.

그러고 나서야 구분동작 #6. 따른다. 에스프레소 잔이 시급한 Must-Have 아이템으로 떠올랐음을 보여주는 인증샷.

이미 집안 가득 아낌없이 퍼져버린 커피향에 대해선 욕심부리지 않을 테지만, 마지막 한방울에 대한 탐욕스런 집착은
 
부끄럽지 않은 것. 다만 불편할 뿐.


생각보다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구분동작 #7. 뒷마무리가 깔끔해야 다음에 또 부엌을 쓸 수 있다. 빈틈없이 뽀득뽀득 설거지.



아침마다 한잔씩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그건 도무지 쉽지 않고..왠지 마시는 시간대가 늘 한밤중이다.

커피를 마신다고 잠을 못자거나 그러진 않는데, 암만해도 일종의 알콜 대용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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