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게 작고 귀여운 게, 에스프레소 잔 하나가 저 스팀구멍 달린 물통 위에 올라앉은 느낌이다. 물을 끓여 고온의
수증기로 만들어, 커피가루를 투과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내는 기계라나.
에스프레소 잔만한 저 주전자를 빙빙 시계방향으로 돌려 꽉 조여준다. 뭔가 허술해보이지만, 작으니까 어쩔 수 없다.
불쑥 솟은 곳 끄트머리에서 뽈뽈뽈 에스프레소 커피원액이 쏟아진다는 거다. 뽈뽈뽈~*
기름져보이는 부엽토색, 흙색이 아니라 나름 안성기가 좋아라 한다는 아라비카 원두를 떠올리게 만드는 고운 갈빛이다.
밥숟가락만하게 보이게 만드는 니녀석의 왜소한 체구가 잘못된 거라구, 따위 변명은 어머니에게로.
비하자니, 뒤에 있는 뚜껑없는 주전자가 늠름하다. 플라스틱 손잡이가 지글지글 탈까 싶어 불은 최소한으로.
부글부글대는 심상찮은 소리를 무시하고 뚜껑을 살짝 열었을 뿐인데, 온통 사방에 커피방울이 튀고 말았다.
마치 원유가 터져나오는 유정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당황스럽고, 그러면서도 유쾌하고. 왠지 마구마구 커피가
올라와서 부엌을 채우고 집을 채우고 세상을 가득 채워버릴 거 같은 걸출한 기개와 박력.
전혀 상관없이 밑의 물이 거의 자중손실없이 위로 올라오는데 성공. 커피향이 왈칵 달겨든다 했더니 어느새 둔해졌다.
시꺼멓고 유유한, 쓰고 달고 맵싸하고 시큼한 에스프레소.
그렇지만 제길..뒷처리가 쉽지 않은 에스프레소 만들기. 주먹을 부르는 에스프레소. 아까 뚜껑을 무리해서 열었더니
이 녀석 정말 '뚜껑이 열렸는지' 온통 질질질, 퉤퉤퉤 사방에 뿜고 뱉고 장난 아니다. 행주님이 바빠지셨다.
이미 집안 가득 아낌없이 퍼져버린 커피향에 대해선 욕심부리지 않을 테지만, 마지막 한방울에 대한 탐욕스런 집착은
부끄럽지 않은 것. 다만 불편할 뿐.
생각보다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침마다 한잔씩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그건 도무지 쉽지 않고..왠지 마시는 시간대가 늘 한밤중이다.
커피를 마신다고 잠을 못자거나 그러진 않는데, 암만해도 일종의 알콜 대용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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