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아룬, 새벽사원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곳은 첫날 일정을 위한 일종의 반환점이었다.

5년 전에 다녀갔던 그 곳. 그 때도 나름 똑딱이로 사진을 남기고 나름의 감흥을 남겼었다

"거대한 것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면, 적당한 거리잡기가 가장 중요하다.
얼마만큼 거리를 격해야 나와 당신의 그림이 이뿌게 나올 수 있을지..
당신의 위풍당당함과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고 내가 그 곁에 자연스럽게 설수 있는 사진은.

너무 멀면, 모든게 용서될 것 같다. 고작 한웅큼 흩뿌려진 저녁 햇살 만으로도
너무도 부드러워보이는 당신의 실루엣.

너무 가깝게 들이대진 말기. 그 오색찬란한 빛깔과 생생한 질감이 사실은
사기접시를 깨넣고 붙여넣은 재활용품처럼 보일 수 있으니.

고슴도치가 사랑을 하듯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바싹 다가가기엔 한 평생 호흡이 길다.
크레딧이 올라가도 삶은 계속되고, 한마디 말로 감정을 전달한다는 건 편집기술의 승리일뿐.

간격잡기는, 고수의 스킬. 당신은 내 간격 안에 들어와있어. 베인다.


p.s.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도, 삶도, 너무 거대해보이는 요즘이다.



정말이다. 이 커다란 사원의 그 오밀조밀하고 오톨도톨한 질감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어떻게 새겨넣었는지 일일이 눈으로 쫓으려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무늬들에 온통 둘둘

감겨 있는 거대한 탑, 그리고 요기조기서 탑을 온몸으로 (그리고 한쪽 무릎을 확 꺽어 바닥을

찍은 채) 받치고 있는 신들. 그저 탑의 굵은 윤곽만으로 섬세함과 장엄함을 던져준다.

그렇지만 역시나, 몇 걸음 가까이로 내딛으면 금세 드러나는 거다. 그 굵고 단호한 선 뒤에

가려있던 디테일들이란 게 얼마나 불규칙하고 마구잡이식으로 붙어있는 타일 조각들인지.

하나하나 정갈하게 붙어있다기보다는, 철퍽 접착제를 덧바른 후에 준비된 타일들을 꾹꾹

빠르게 붙여나간 게 아닐까 싶은 느낌으로 더러는 회칠 속으로 잠겨 있기도 하고, 조금은

들떠 있기도 하고.

원래 왓 아룬이 완공되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의도하진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태국의 왕에게 선물로 보내온 온갖 자기들이 있었는데 딱히 왕이 달가워하지 않아 그걸

이 곳의 사원을 꾸미는데 활용했다고 한다. 더러는 깨뜨려서 모자이크 타일처럼 썼지만

사진에서처럼 조그마한 자기는 통째로 붙여 장식하기도 했나본데, 하나가 쑥 빠졌다.

저건 누가 챙겨갔으려나. 괜히 손가락을 힘을 주어 옆의 자기도 슬쩍 건드려보고.

위로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중앙탑에는 사방으로 계단이 나있다. 위로 오르는 사람들은 점점

몸을 탑에 의지하며 파이프 난간을 굳게 잡고, 밑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거의 엉거주춤한

자세로 스물스물 계단에 붙어 기어내려오고.

탑의 중턱까지 올라와서 한숨 돌렸다. 짜오프라야 강이 내려다 보이고, 단정한 사원의 뒷끝있어보이는

뾰족한 부리들이 생생히 보이고, 온통 평지인 방콕 시내가 멀리까지 보이고. 남국의 햇살보다

바람이 더 힘센 공간이기도 했다. 따끈한 햇살을 시원한 바람이 산산조각낸 채 사방으로 날려보내는.


그렇지만 이미 상당히 좁아진 공간, 한바퀴 탑을 돌아보는데 좁은 통로를 비비적대며 사진도 찍고

바깥도 구경하는 사람들이 발에 걸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사방을 바라보는 각도와 시야가

몇 가지로 제한되어 버리는 곳이기도 했다.

다시 꾸역꾸역, 더이상 방문객에게 허용되지 않는 제한선까지 올라왔다. 조금더 높아졌고

그만큼 멀리까지 방콕을 바라볼 수 있었고, 짜오프라야 강 너머 꼬물대는 사람들이나 차들이

조그만 벌레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아까 중턱쯤에선 남국의 햇살과 바람 사이에 입을

오른쪽으로 벌린 부등호가 한 개 정도 끼어있었다면 여기는 한 두세개 쯤. 햇살<<<바람.


그만큼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워졌다. 공간이 더욱 좁아져서는 이미 올라와있는 사람들이

돌아보는 방향으로 일방통행밖에 가능하지 않았을 뿐더러, 보여지는 세상도 광각으로 잡힌

그저 작고 귀여워서 마냥 용서가 되는 듯한 사이즈. 그러고 보면 왓 아룬을 멀리서 볼 때의

느낌이나, 이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볼 때의 느낌이 같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솟아있는 탑의 나머지 상단부, 여기에서도 몇 명의 역사가 조금 졸린 눈을

하고서 탑을 떠받치고 있었다. 조금은 더 인상을 쓰고 있어야 실감이 더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탑을 떠받드는 것 자체가 굉장한 공덕이라 여겼으리라 생각하면, 저 나른하고

흐뭇한 표정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지만 가만 보면 탑 상단부에는 이렇게 코끼리들이 머리를 모은 채 커다랗게 휘영청한 상아 이빨과

길다란 코를 휘두르며 금방이라도 탑 밖으로 튀어나올 듯 육박하고 있는 거다. 조그마한 창문 하나를

완전히 꽉 메운 채 탑의 사방에서 돌진하는 녀석들, 그 무게만 해도..하며 어림짐작해보려다가 말았다.

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왓 아룬의 화려한 전경. 저렇게 길고 가늘게 뻗어있는 첨탑은 어떻게

위에 올렸을까. 길기도 길지만 무게도 무게일 텐데, 균형을 잡고 유지하기도 쉽지 않지 싶다.

언제 이 곳에 공양된 화환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낮을 버텨낸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비실비실 수분을 잃고 축 처져버리긴 했지만 아직 그 색과 향은 여전했다.

다시 내려왔다. 탑을 한바퀴 둘러보기에도 여유롭고, 탑의 위와 아래, 디테일과 실루엣을

내키는대로 올려보고 굽어보기에는 역시 아래에 내려와 있는 게 좋은 거 같다. 위에 오르면

아무래도 시각도, 시야도 특정하게 묶여버리고 마는 거다. 그렇게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발견한 저 일란성 쌍둥이 난간 장식들 틈의 미운 오리 한마리. 훼손된 장식을 회색 시멘트로

그냥 다시 붙여버렸나 보다.



그러고 보면, 역시나 태국 사람들은 참 꽃을 사랑하는 거 같다. 모든 장식문양은 결국 꽃.

넓은 꽃잎, 좁은 꽃잎, 긴 꽃잎, 짧은 꽃잎, 그렇게 왓 아룬 사원 전체를 꽃밭처럼 뒤덮은 꽃들.

탑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토끼 분수대. 금색 토끼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조각이 신묘년

토끼해를 맞은 사람들에게 나름 의미를 던지는 듯 하다. 근데 태국도 십이지신의 개념을

매년 적용해서 의미를 부여하려나, 그건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곳의 아이들에게 이 사원은 그저 잔디가 파릇파릇 깔려있는 폭신한 공원. 깔깔거리며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아이들이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바로 앞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 강 동안으로 넘어가는 길, 꽃 한송이 한송이를

묘사하던 타일 조각들, 탑의 구석구석 피어난 그 꽃송이들, 그것들이 그어내던 미묘하고 자잘한

떨림 같은 선들이 싹 걷혀버렸다. 그리고 다시 처음에 봤던 모습 그대로, 단호하고 기하학적인

굵은 선으로 강렬하게 그어진 탑 한덩이만 남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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