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변에서 문득 마주한 교통표지판 하나를 보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온 건 표지판 아래
하늘거리는 갈대와 저 너머 헐벗은 나무 한 그루. 급커브길을 조심하라는 진지하고 열띤 낯빛의
표지판이 문득 푸근하고 너그러운 홍조를 띈 표정으로 바뀌며 가을에게 말해 준다.
조금 돌아가도 좋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떠날 필요 없다구요.
주렁주렁 매달렸다. 뭔가 풍선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으로 탱글거리는 열매들이 직선으로 쭉쭉 뻗고
날카로운, 그래서 조금은 거칠고 외로워 보이는 나무가지들을 사방에서 보듬어주는 것 같다.
오늘 수능을 치고 지난 12년의 교과과정을 한 큐에 검증받아야 하는 안쓰럽고 대견한 학생들을
볼 때 같은 느낌이랄까. 고생했어요, 토닥토닥 해주고 싶은 나뭇잎.
철벽수비라도 펼치듯 온통 하늘로 손을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얼기설기 보이는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파란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감빛 덩어리 하나.
버텨내며 이렇게 탐스런 꽃을 피워냈다는 게 대단하다. 화려한 색감이 남국의 뜨거운 태양을
연상시키면서도 어딘지 가을의 스산함을 채 숨기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널어두고 햇빛을 충전하고 있다. 축축 늘어진 채 아삭하고 풋풋한 생기 대신 햇빛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차곡차곡 쟁여두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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