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구분해보고 따져보는 거지, 누가 그걸 진지하게 고려하나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이라며 특정혈액형(특히 B형남자나 AB형여자..)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죠."


아침에 다니는 영어학원에서 각자 주제를 정해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해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한 친구가 ABO식

혈액형 분류법이 한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사람의 성격, 직업, 애정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있는지를

이야기하고는, 그게 얼마나 근거가 없고 우스꽝스러운 미신인지 역설하며 프리젠테이션을 끝냈다. 질문시간,

애초 혈액형에 따른 성격차라거나 적성 같은 것들을 들을 때 재미있게 듣던 사람들이 조금 말이 없어졌다.

싸이월드에 매일같이 뜨는 글들이 그런 것들이고,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익히 듣던 것들임에도 새삼 흥미롭고

말랑말랑하게 다가오던 것들에 대해 누군가 정색하며 그건 멍청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니 뜨악했던 걸까.


난 평소 혈액형에 따른 성향차나 성격차에 대해 믿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표현이 갖는 실용성에 대해서는

꽤나 호의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예컨대 "저사람은 O형같아"라고 하는 말 한마디로 말한 사람과 듣는 사람은

얼마나 쉽게 많은 뉘앙스와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그게 맞아떨어지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그래서 너무 정색하고 트집잡으려는 게 아닌가 싶어 저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거 재미로 하는 거잖냐."


그치만 사실 어떤 답이 돌아올지도 알고 던진 답이었다.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혈액형에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데었다며 손사래를 치거나, 어떤 혈액형은 분명 일정한 특징을 공유한다고 (과학적 근거없이) 나름의

경험칙에 근거해서 완강히 믿고 있는 거다. 나도 어쩌면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 느슨하게 끼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상했던 대답이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을 때보다, 영국에서 온 원어민선생님이 내게 반격했을 때 쵸큼

과장섞어 말하자면 한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라크에서 미군들이 총갖고 장난하는 거나, 혈액형과 관련된 미신으로 장난하는 거나 차이가 뭐죠?

당신은 인종주의자(Racist)군요."


인.종.주.의.자. 그래도 이주노동자에 대해 관심도 없지 않고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시스템에 대해 민감한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몇가지 항변을 하고 싶었다. 하루종일 생각해 본 결과 나온

그나마 유효한 항변.


=> 선생님의 비판은 혈액형에 대한 미신이 각 혈액형의 우열을 확실히 가르고 있을 때에야 적절한 것 같습니다.

예컨대 O>A>B>AB라는 식의 우열구조가 확고하다면, 혹은 최소한 (O≒A≒AB)>B라는 식의 우열구조라도 있다면

가장 '열등'하다고 믿어지는 혈액형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최근 "B형 남자친구"어쩌구 하는 영화로써 특정 혈액형에 대한..일종의 공식적 '경계경보'가 극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는 그다지 혈액형간 위계가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어렸을 적 다른 혈액형이 아닌 O형이라는 사실에 꽤나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 큰 이유 중 하나가

다른 혈액형의 피가 모자랄 때 누구에게든 줄 수 있다는 '통큰' 혈액형이라는 사실에 있었다는 유치한 사실은

숨기기로 하고- 솔직히 그게 그저 무작정한 자기애의 발로인지 특정 혈액형에 대한 선호인지 따져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고 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한국에서 사람을 처음 만나 혈액형을 묻듯이, 외국에서는 별자리를 묻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장점과 단점이

고르게 배치된 성향에 따라 사람들을 범주화하고 구분짓는 것은 인간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피치못할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MBTI니, 별자리니, 사주팔자니, 관상이니, 그런 것들은 새로운 인격을 만나고 조금이라도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항변에 선생이 어떤 식으로 반격해 올지 익히 예상된다. 네가지 혈액형에 따른 분류는

다른 12개, 16개, 혹은 그 이상의 그룹으로 나뉘는 것들과는 달리 너무 단순하고 무딘데다가, 이미 그 우열구조가

확고히 세워진 게 보이는 거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우열구조에 기대어 사람을 판단하고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게 일반화된다는 말 자체는 "인종주의"라는 일견 거창하고 무시무시해보이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히틀러가 아리안족의 인종적 우수성을 강변할 때 동원되었던 여러 사이비과학, 혹은 과학적

미신이 작동하는 방식은 우리가 ABO식 혈액형을 두고 이러네저러네 가르는 방식과 닮았다.


오바마가 백악관에 들어갔다. 아무리 미국이 부도덕하다거나 무능력하다고 비판할 지라도 인정할 건 해야 한다.

그들의 저력은 그렇게 환히 드러난 넓은 치부에 있다. 지난한 인종갈등의 시기를 거쳐 '인종주의'에 대해 이만큼

민감하고 섬세한 감각을 키워왔으며, 결국 흑인을 대통령으로 맞이하는 나라. 한국은 어떤가. 강건너 불구경하듯

미국내 인종주의와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바라보며 내심 '우리는 한민족'임에 그런 시험에 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덕분에' 우리는 전혀 그런 감수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혈액형 가지고 장난은 그만 쳐야 한다고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장난이 갈수록 심해져서는 어느새 누군가들은

가슴에 '다윗의 별'을 달았고, 그들 집단은 위축되고 있고 열등감을 강요받고 있으니 그만하자, 라고 어른스럽게

말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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