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까페에 갔다가 문득 발견한 책 한권. 제법 노래도 좋고 분위기도 괜찮았던 데다가, 한 쪽에

책꽂이가 걸려있고 책들이 십여권 꽂혀있어서 호기심이 동했던 내 잘못이다. 이럴 수가.


이런 책이 아직도 살아남아있으리라곤, 정신빠진 노친네들 책장도 아니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그런 류의 까페에 꽂혀있으리라곤 정말 생각도 못 했었는데, 완전히 똥 밟은 기분.

아, 눈이 썩는 듯한 느낌. 붉은 띠지까지 아직 살아남아있다니,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박정희를 다시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멸사우국 혼까지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랜다...하아...붉은 띠지는 온통 박정희 찬가,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 따위보다 백만배는 훌륭했고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다는 식이다.


제목 위에 저 촌스런 느낌표 붙은 문장은 또 뭐냐. "그대가 진정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대와

이야기하리라!" 그니까, 박정희 니가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언론과 이야기하지 않고

잡아가두고 탄압한 건, 그들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거구나. 교활한 말장난,

토할 것만 같다. 박정희 자신은 이미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있단 음흉한 전제.

표지랑 띠지에 이렇게 글자가 많은 책은 첨 보는 거 같다. 차마 안에까지 열어볼 엄두가 나지않아

무슨 폭발물을 조심조심 대하듯이 살짝 뒤로 돌려봤다. 아아...괜히 돌렸어.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거나 까페주인한테 태워버리라고 조언하거나, 여하간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더이상 손대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이런 평가. 참 대단하다.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을 합해 놓은 인물이라니. 그야말로 문무겸비,

성군 세종에 더해 충무공의 전설같은 무공과 애국심까지 한몸에 지닌 우리의 위대하고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님각하폐하대왕이신 거다.


...하아. 혈압. 사실, 이건 일종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같은 쿠데타 반란세력, 군대를 뒤집고

정치를 뒤집고 나라를 뒤집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두른 범죄집단의 수괴를 국민의 손으로

처단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혼란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고

그의 지도력, 그의 '조국근대화' 능력, 그의 카리스마, 그의 청렴함, 그의 인간미 따위에 대한

상찬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며 재구성되는 건, 그 독재자와 추종세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이다.


지들끼리의 자리다툼을 벌이다 자중지란에 빠져 붕괴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최소한

눈에 보이는 성과는 이뤄냈던 박정희 도당들보다도 못한 문어대가리 일파들이 다시 그 정권을

찬탈했으니. 제대로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고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더 나쁜 놈이 나타나버렸으니

기억이 왜곡된 건 아닐까. 때리던 놈 다음에 칼로 찌르는 놈이 나타난 셈이랄까. 칼로 찌르던

놈들 두 명은 법정에까지 겨우겨우 세웠다지만, 여전히 때리던 놈에 대해서는 요원한 거다.


게다가, 뭐어, 박정희 딸이 차기 대선후보 1위? 2012년에 지구가 망한다는 소리가 차라리

반갑달까. 박정희 책이 여전히 여기저기서 설설 기어나오고, 박정희 딸이 여전히 아버지를

그리는 정치인과 국민들 사이에서 먹히고 있다니 최악이다 정말.


책도 슬쩍 펼쳐보았지만, 뭐라고 논할 건덕지도 없는 찌라시 수준의 이야기들. 단언하건대

저런 책을 읽는 건 시간낭비 돈낭비 에너지낭비. 그냥 조용히 버려야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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