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궁전의 야경을 보고 싶었다.

저녁을 든든히 먹으니 파리 시내 곳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쌀쌀한 밤바람이 한결 수월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더

매끈하고 조금은 더 시원하다는 느낌으로 바람을 등에 지고서는, 불쑥 치받은 생각을 따라 걸었다.

오...유리 피라밋을 밑에서부터 다시 지탱해 세우는 듯한 저 조명의 힘.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서도 궁전의 얼굴이

보인다. 자동차 앞모습을 보며 사람의 찡그린/화난/웃는/사념에 잠긴 모습을 쉽게 떠올리듯 건물의 전면을 보고

사람의 표정을 읽어내자고 한다면, 아마 루브르 궁전의 표정은 왜 영화 스크림에 나왔던 유령마스크 같다는 생각.

혹은 뭉크의 작품 '절규'의 표정을 살짝만 완화시킨다면 루브르 궁전의 표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유서깊은 루브르궁전의 삼층 창문은 속이 퀭하니 들어간 동공처럼 보이고, 일층의 입구는

ㅇ모양으로 모은 입술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옆에서 광선검 두 자루가 서로 챙캉대며 부딪히는 듯한 느낌의

유리 피라밋 실내 조명.

유리 피라밋 주위를 둘러싼 분수에 물결치는 백색의 불빛너울. 낮에 사람이 미어터질 듯이 많았을 때에는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분수였는데, 역설적이게도 어둠이 공간에 들이차고 나니 분수대의 조용한 반짝임이 멀리서부터

눈에 와 박혔다. 낮에 왔던 루브르 궁전과 유리 피라밋과는 영 다른 느낌.

루브르 궁전에서 튈를리정원 쪽을 아무리 눈여겨 보아도 불빛이 거뭇거뭇하니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생선 비늘같기도 하고 뭔가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름다운 유리 피라밋이 속이 비치도록 투명한 불빛에 힘입어

둥실 떠올라 있는 풍경은 정말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더랬다. 더욱이 루브르 궁전의 화려한 노란빛 조명이 백색의

유리 피라밋 조명과 마주 서 있는 풍경이란..
궁전의 앞마당에는 가로등 이외에도 다른 조명이 여럿 설치되어 분위기를 더욱 화사하게 만들고 있었다. 예컨대

위의 사진에서처럼, 마치 불을 켜든 청사초롱을 바닥에 내려놓은 것처럼 네모난 조명틀 속에서 빛나는 백열등 불빛.

사실 유리 피라밋은 단순한 사각뿔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위에 그보다 작은 몇개의 사각뿔

유리 피라밋이 호위하는 형태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분수대와 분수가 메꾸고 있달까.

이미 어둠이 꽤나 짙어진 시간이었음에도, 사진촬영을 온 신혼부부가 언뜻 눈에 띄었다. 응, 이런 곳서

사진을 찍으면 기억에 남을 만한 사진이 나올 듯 했다. 뭐, 장비가 꽤나 전문적으로 갖춰져야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올 것 같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내가 찍었던 사진들은 아무리 조리개를 넓히니 어쩌니 해도 시시각각 깊어지는 어둠의 힘을 못 이기고

하나둘 꺼먹꺼먹하게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저 뒤에 보이는 하얀 웨딩드레스의 시커먼 새신부.

이쯤되면 완벽한 반영이다. Reflection. 뒤집어서 놔도 금방 알아채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기야

찍고 나서 한동안은 이 사진이 대체 어디가 위일지 감도 안 잡혔었으니깐.

유리 피라밋의 반짝임에 혹해서 한동안 몰입해 있었지만, 사실 루브르 궁전의 화사하고 우아한 윤곽도

그에 못지않다. 바람결을 타고 어디서부턴가 들리는 바이올린 선율까지. 어느 거리의 악사가 고심해서

루브르 궁전의 어느 통로쯤에 서서는 소리의 반향을 맘껏 즐기며 켜고 있는 게다, 몇 번쯤 음정을

틀린다 해도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다시 반사되는 소리의 깊이와 울림에 쉽게 가려지기도 할 테고.

그러고 보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의 순간을 '현대'라고 규정짓고는 그 이전의 시간을

모두 '과거'라 해서 박물관 속 유물로 안치해 놓는 것들은 거개가 시각적인 것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

그 밖의 다른 감각들..청각이라거나 후각이라거나, 그런 것들에 대한 과거의 정보는 대부분 휘발되어

버렸고, 하다못해 불과 한달전에 다녀온 내 여행에서 기억해 왔던 바이올린의 선율, 한줄기 서늘한

바람에 느꼈던 한기, 빵집에서 맡았던 그 고소하고도 기분좋은 냄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싶다.

이제부터 바이올리니스트를 찾으러 루브르 궁전의 내외곽을 돌아다니는 짧은 탐색의 기록.

음악 소리는 ㄷ자 모양의 루브르 궁전 건물에 부딪히고 꺽이는 바람을 타고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지만, 막상

어디에서 나는지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구석 여기저기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나, 담배를

피우면서 우르르 몰려앉은 프랑스 청소년들, 아니면 나처럼 카메라를 한 손에 쥐고는 등에 가방을 둘러멘 여행자.

그리고, 마치 무도회라도 있는 양 불이 환하게 밝혀진 루브르 궁전.

조명의 질감이 이렇게 달라 보인다. 아마 찍은 시간대가 차이나서 이렇게 조명'빨'이 달라보이는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어둠이 내려앉음에 따라 변해가는 루브르 궁전과 유리 피라밋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은 놓쳐서는

안 될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저 안에는 '모나리자'가 있고, '성가족'이 있으며, 밀로의 비너스상이나 니케의 여신상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 작품이 한가득 전시되어 있댄다. 그치만 왠지 한밤에 바라본 루브르 궁전은, 그런 미술관 내지 박물관이라기

보다는 고관대작들이 화려하게 치장하고 무도회라도 벌일 것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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