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 미디어수업을 듣고 있는 그는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데다가 맨눈보다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이 더 편안할 정도로 영화찍기에 심취해 있다. 그가 주제로 잡은 건 자신의 자살, 자신의

자살 순간을 영화에 넣겠다는 그의 의지는 강력하다.


파괴되는 지구, 자본주의 시스템의 각박함, 비인간성, 어른 세대의 위선과 거짓말들, 그리고 반듯하고

모범적으로 자라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압박까지 그야말로 세상 온갖 것들이 전부 불만의

재료이자 불쏘시개인 거다. 뚜렷이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불만과 허무함, 간단히 '질풍노도'의 시기라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너무도 그 결들이 복잡하고 무늬가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지나간다.


그 미성숙하고 아름다운 젊음이 빚어내는 혼란스러움, 격정의 순간은 어느 영화인이고 담아내고 싶은

순간임에는 틀림없을 거다. 이미 수많은 감독들이 그 시절의 자신을 복기하거나 그 시절을 살아가는

젊음들에게 바치는 영화를 만들었었으니. 이 감독 역시 디지탈 문화에 익숙한 세태에 맞추어 감각적이고

경쾌한 화면과 스피디한 전개로 자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청춘에 대해 눈높이를 맞추는 것 같다.


미셀 공드리의 작품, '수면의 과학'과 비슷하게 영화와 애니메이션과 적나라하게 조악한 환타지가

지나가는 영화라는 점에서만 그렇다. 감독은 결과적으로 '자살은 나쁜 짓이에욤 뿌우'하는 공익광고를

세련화하는 데서 멈춘다. 갑작스레 그의 자살 충동을 제어하려는 움직임들이 준동하기 시작하고, 그다지

설득력도 흡인력도 없는 급전직하의 전개를 따라 '그래도 살자'라는 무책임하고 쉬운 봉합.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도 확인된 거지만, 그는 미국의 10대들이 자살률이 높다, 라는

현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젊음에 대한 아까움, 아쉬움만 있을 뿐 10대들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

날카롭고 깊게 통찰하거나 비판적으로 목소리를 내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의 영화 처음과 끝, 그 아이가

자살을 생각했던 처음과 자살을 포기한 끝의 장면에서 바뀐 건 아이의 마음상태 뿐, 문제는 그대로인데.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았단 게 포인트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자살'의 문제를

자살자 개인의 문제로 슬그머니 밀어놓은 채 멈춰버려서 문제라는 거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은 전부

차치하더라도, 자살하는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는 게 아니라 결국 훈계하고 바로잡는데 성급하게 몰두하고

있어 보인다는 게 문제라는 거다. 감독에게 묻고 싶었던 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10대의 사망원인 수위를

다투는 게 자살인데, 그렇게 자살을 택하는 아이들이 당신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위로를 받을 거 같냐고.


그렇지만 그는,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어릴 때와는 달리 디지털 매체에 친숙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부럽다고, 그런데 자살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자신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

일찌감치 이야기했다. 자살도 아니고 죽음에 대해서조차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살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고 영화를 만들어? 10대라고 얕보는 건가 지금. 답은 바라지도 않지만, 최소한

말하기 전에 먼저 많이 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 서울국제가족영화제, CGV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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