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를 하겠다고 떠났던 군대 후임녀석 하나가, 어딜 가도 이미 왔던 곳만 같다고 투덜투덜거렸던 걸 기억한다.

이미 책과 미디어 등 온갖 매체를 통해 밟아보지도 않은 미지의 땅들의 이미지와 풍광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황이란 건 어떻게 생각하면 시청자들-잠재적인 방문객들-에 대한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출장으로

처음 발딛은 국가의 첫인상과 체류 기간중의 즐겁지 않던 경험이 맞물리면서, 그 나라를 다녀왔다고 할 수도

안 다녀왔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다가 다시 가기에는 왠지 꺼려지는 망쳐버린 첫 경험 같달까.


에펠탑이야말로 그렇듯 영화, 드라마, 책, 그림, 만화, 그리고 지금 내가 끼적이는 이런 블로그가 떠도는 인터넷을

통해 쉼없이 소비되고 있는 상징물이다. 현지에 가보지도 않고도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서, 눈여겨 본 적없는

옆집 대문에 그려진 문양이나 출근길에 마주치는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보다 낯익어 버린 것 같다고 표현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거다. 나 역시, 그러한 느낌으로 에펠탑을 찾았고, 별다른 기대없이 에펠탑을 바라봤으며,

이렇게 살짝 '숭악한' 마음으로 부유하는 이미지를 늘리고 있다. 다소 양해를 구하자면, 아무리 그런 기시감을

품고 나른한 눈빛으로 올려다본 에펠탑이라 해도 밤에 보면 좋더란 거. 낮에 봐도 뭐...난 나름 좋더란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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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에펠탑을 마주했던 건 샤요 궁전의 발코니 쪽에서였다. 물론 전반적으로 나지막한 건물들이 늘어선 파리

중심가 어디서든 대부분 에펠탑의 일부는 볼 수 있다지만, 에펠탑 자체를 목적으로 가장 가까이 근접했던 경로가

바로 샤요 궁전 발코니였다는 얘기. 에펠탑 전경을 막힘없이 볼 수 있는 곳인데다가, 파리 시내를 다소 서쪽서

중심부쪽으로 바라보는 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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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관광객뿐 아니라 파리지앵들도 많아 보였다. 1유로에 3개씩 판다는 에펠탑 열쇠고리를 파는 상인들도

보였고, 발코니에 다닥다닥 붙어서 자연스런 애정행각을 벌이는 커플도 두드러져 보였고. 그치만 역시 무엇보다

저 앞에 버티고 선 살짝 연한 구릿빛 뼈대를 드러낸 에펠탑이 한걸음한걸음 크게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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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의 녹지는 샤요궁전 자체의 정원, 그리고 에펠탑 건너편에는 샹드마르스 공원. 첨엔 어디에 뭐가 있는지

감도 잘 안왔었지만, 에펠탑을 기준으로 이쪽과 저쪽, 왼쪽과 오른쪽을 나누어 보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디서

어디까지 걸어서 얼만큼 걸릴지 가늠할 수 있는 영점을 잡아주기도 한다.

에펠탑의 별 12개. 애초 유럽연합을 구성했던 12개의 국가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왠지 탑 가운데 저렇게 노랑별,

아님 노란 야광별을 붙여놓았단 건 살풋 유치한 느낌도 없지 않다. 꼬맹이들 방 천장에 붙여놓는 그런 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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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서 상당히 거센 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해떨어지기 전에 에펠탑에 올라가서는 그 위에서

파리의 야경을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냉큼 내려와서는 에펠탑으로 서둘러 걷기 시작, 그 와중에도 뒤를

돌아보며 왠지 이집트 룩소에서 보았던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하고 외관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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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이 네이버에서 구한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 사진. 이집트 여행갔을 때에는 저기서 경비아저씨들 밥도

같이 먹고 잠시 까무룩 잠도 들고 그랬었는데.

그리고 서비스샷이랄까, 샤요궁전 앞의 분수대, 최근 코엑스 앞에 만들어놓은 피아노 분수에서 목욕물 넘치듯

흘러내리는 물과는 좀 다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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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역시 구글링을 통한 코엑스 앞 피아노분수의 사진. 너무 이뿌게 나온 감이 없지 않다.

이제서부터 에펠탑에 다가서면서 정신없이 찍어제낀 질풍같은 카메라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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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의 네다리에서 모두 위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가 운행한다. 1층, 2층, 그리고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동서남북 어느 다리에서 올라가던 모두 1, 2, 꼭대기 전망대 공간에선 같은 곳에 서게 된다.

엘레베이터는 일반 건물의 그것과 똑같은 원리, 비슷한 형태일 텐데, 다만 오르내릴 때 바깥 풍경이 가감없이

펼쳐짐으로써 약간의 울렁거림을 동반했다. 처음에는 다소 기울어져서 경사를 타고 오른다 싶더니, 어느 순간

위로 수직상승하는 느낌의 엘레베이터. 그것과 똑같이, 에펠탑의 뾰족한 상반신을 향한 완만한 기울기의 하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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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금방 지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늦게 떨어졌다. 거의 9시가 가까워서야 비로소 어둑어둑해지고, 에펠탑의

최초의 불이 들어왔다. 이미 2층에 올라와 있던 나는 저 위에 보이는 전망대까지 안 올라간 게 별로 아쉽지 않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살짝 겁먹을 만큼의 높이.


그런데, 그러고 보니 얜 갑자기 파랗게 물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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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 점점이 밝혀지는 주홍빛 가로등. 아까 내가 에펠탑을 올려다보던 샤요궁전이 조그맣게

보인다. 요란한 불빛을 뿜고 다니는 반딧불이같은 저건 세느강의 유람선. 

그리고 뒤켠의 괴물처럼 솟아있는 라데팡스 지구의 고층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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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는 고층아파트가 줄지어 서있어서 자기들끼리 조망권이니 일조권이니 싸우고 있지만, 세느강변에는

그런 고층건물은 별로 안 보인다. 덕분에 멀찍이 섰는 건물에서 퍼져나오는 불빛도 흐릿하지만 잔잔하게 감지된다.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파리. 그것도 이만큼의 거리를 격하고 보니 더욱더 평화로워 보이는 미니어쳐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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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드 마르스 공원과 왼켠의 앵발리드가 보인다. 멀찍이 불끈 솟은 검은색 건물은 몽파르나스..일 거다 아마.

조금씩 어두워질수록, 세련된 조명을 맞은 몇몇 유명한 건물들이 둥실대며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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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무덤이 바로 여기랜다. 앵발리드. 어떤 식으로 조명을 비추는 건지, 마치 건물의 벽면에서 불빛이

스며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꼬맹이때 잠잘 때 방에 켜두던 조그마한 전등 갓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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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느낌으로 가라앉은 건물들 사이를 잔잔한 가로등 불빛이 구획짓고 있다. 점점이 지나가는 붉고 노란

자동차의 행렬마저 무성영화처럼 아스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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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개선문에서 보는 야경이 에펠탑의 야경과 더불어 볼만하다고 하던데, 뜨기 전에 한번 가야겠다고 다짐.

순식간에 어둠이 감싸더니 더이상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깜깜해져버렸다.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해

주위를 둘러보니 많이 한산해졌다. 짠내빠진 바닷바람같이 윙윙 불어대는 바람이 불쑥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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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전망대 티켓. 7.8유로짜리였는데, 엘레베이터를 탈 때 한 귀퉁이를 이렇게 잘라서 표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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