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걷고 싶은 아름다운 산책길 4, 경주 황남동 대릉원 지구(윤성의)-

 


* 2016. 7. 14(목)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 (시간이 보듬어준 경주의 듄, 대릉원의 곡선들.)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오늘 함께 걷고 싶은 길은 경북 경주 황남동 일대의 대릉원 지구입니다. 황남동은 황남빵으로도 익숙한 지명이죠. 대릉원은 신라시대 왕과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중에는 천마총, 오릉, 미추왕릉 익숙한 관광지 외에도 박해일 신민아 주연의 영화 경주 배경이었던 경주 노서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등도 있습니다.

대릉원은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대릉원은 제법 커다란 공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요. 이곳을 둘러싼 담백하고 야트막한 기와 담벼락, 그리고 너머 민가들의 수수한 기와지붕들이 잠시 시간감각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야트막한 언덕 같기만 무덤 하나 하나에는 각각 주인이 있고 어쩌면 무덤 안에는 여전히 찾지 못한 보물들이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눈에는 그런 귀한 유물들보다 무덤의 옆구리 곡선이 탐나게 느껴졌습니다.

사하라 사막에 갔을 반해버렸던, 바람이 만들어낸 모래언덕과 닮은 곡선이었습니다. 바람이 모래를 하릴없이 헤치고 깎고 부어내며 만들어내던 자연스럽고 우아하던 곡선, 아마 대릉원의 곡선들 역시 조금 시간이 걸렸을 , 자연의 손길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방이 온통 둥그스름하고 풍만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공간, 사이를 구비구비 휘감아 돌아가는 산책로의 모양새도 좋습니다. 딱히 어디를 찝어서 여기를 봐야겠어, 라거나 바퀴를 전부 걸어봐야겠어, 라는 욕심 부리지 않아도 그저 눈앞에 펼쳐진 곡선의 풍경들과 곡선의 길들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공간입니다.

노서리 고분군도 추천하고 싶은 곳인데요, 천년을 버텼던 왕국의 무덤에서는 어느새 세월을 먹고 자라난 나무들이 자리를 잡은 풍경을 있습니다. 누가 감히 왕들의 안식처에 올라가 나무들을 심고 키우고 손봐줬을 리는 없고, 그저 자연스레 바람이 옮겨다준 씨앗을 자그마한 언덕이 품고서 물과 양분을 주며 이만큼 키워냈을 거라고 상상하면, 오랜 세월을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됩니다.

대릉원에서부터 첨성대나 안압지, 계림숲이나 경주박물관까지도 설렁설렁 걸어서 닿을 있는 거리에 있구요. 오릉을 지나 포석정을 거쳐 경주 남산 아래턱을 가볍게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고분의 둥실한 실루엣과 너머 야트막한 산들의 실루엣이 겹쳐 보이는 풍경, 안에서 천년의 세월을 느끼며 걸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1. 아놔, 카메라가 갑자기 두동강 나서 바닥에 철푸덕. 이제 막 길을 나서서 해장국골목서

한그릇먹고 일어나려다가, 엉덩이가 그대로 붙어버렸다.


#2. 황남빵 한박스 사들고 가끔 꺼내먹으며, 비닐봉다리에 담긴 카메라 두조각 달랑거리며

걷고 있다. 대릉원, 첨성대, 계림, 월성과 안압지를 지나 황룡사지에서 잠시 휴식중.

#3. 걷는 것만큼 확실하고 단단하게 이동하는 방법은 없지 싶다. 내가 감내할 만한 속도로

주위사물들을 하나씩 만지듯 분별하며 뒤로 흘려보내고, 주위 분위기에 흠뻑 젖을만큼

스스로와 풍경을 동화시켜준달까.

#4. 경주 시내를 빠져나와 오릉, 박혁거세니 유리왕이니 소설속 인물같은 이들의 소설같은

무덤을 둘러봤다. 저 언덕들은 참 곱게도 잔디를 입혀놨단 생각만 들 뿐, 죽은 이들이 쉬는

공간에서 느껴져야 할 답답함이나 무거운 공기가 없다. 이천년 가까운 시간이 죽음의

무겁고 퀘퀘한 냄새조차 날려버렸다. (그나저나 안내판엔 온통 한자뿐. 그것도 손글씨.)


#5.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린 우물이라 신라의 우물, 나정인가. 예수보다 육십년쯤 먼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발견된 우물이 아직 남아있단 게 더 신기. 우물이니 알이니

동정녀니, 섹스(혹은 불륜)를 숨기거나 신성화하려는 전략이란 점에서 예수나 혁거세나

베들레헴이나 경주 나정이나 오십보 백보.


#5. 나정에서 포석정을 지나 삼릉골로 가는 길이다. 포석정 뒷길로 남산을 오를까 하다가

매표소 아줌마에게 추천을 청했더니 역시 삼릉골로 오르는 게 볼 것도 많고 길도 재밌다고.

남산은 당시 신라인들이 부처가 머물고 있다 생각했던 곳이라 했던가. 골짜기마다 잔뜩

조성된 석탑과 석불 따위 불교 유적들이 대단하다. 아마도 사람들은 산에 기대듯 부처에

기댔던 거다. 아니면 부처에 기대듯 산에 기댔는지도.

#6. 삼릉골이란 이름은 골짜기 입구에 세 개의 커다란 릉이 있어서라고 하지만, 막상

언덕만한 왕들의 무덤이래봐야 남산에 의탁하고 나니 그다지 위신이 안 선다. 왕이

자연에 귀의한 느낌이랄까, 산자락에 오체투지의 자세로 늘어붙은 것 같은 젖꼭지 세개.

#7. 워낙 삼릉골을 따라 조성된 탑이니 부처가 많은지라 이름모를 조각들도 뒹굴고 있었다.

그 중 문득 시선을 사로잡던 저 미묘하게 불룩한 위치와 모호한 손놀림.

#8. 선각육존불, 커다란 바위에 선으로 여섯 부처를 그려놓았던 곳이다. 그렇지만 바위

자체의 무늬와 오랜세월 깍이고 다듬어진 자취 때문에 선을 하나하나 식별하기가 이젠

쉽지 않아진 그림판. 군데군데 청동처럼 녹도 슬었다.

#9. 저 바위의 효용은, 그보다는 저 위로 좀더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해바라기했을 때다.

왕릉같이 부드럽지만 위엄있는 선을 그려내는 경주의 산들이 바라보였다.

#10. 돌아나오는 길에 어느 새로 짓는 듯한 전통음식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옥지붕위로

어벙벙하게 웃고 있는 저 표정, 조그만 눈과 헤벌쭉한 입이 그렇지만 굉장히 다정다감했다.

2010년에 다시 그린 경주인, 신라인의 얼굴일지도.


* 경주남산 가이드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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