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언제부터 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1학년때 선생님이 안경낀 내게 늘 안경이 잘

어울린다며 박사님박사님 하고 불렀던 기억이 안경에 얽힌 첫 기억이다. 아마도 1학년 여름쯤부터

안경을 끼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안경과 함께 20년도 훌쩍 넘게 살아온 셈이다. 7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갔으니 에효,

정말 굉장히 오래 끼고 살았다. 이쯤 되면 불편한 줄도 모르고 거의 몸의 일부라고 하는 게 맞을 텐데,

물론 맞지만, 불편함은 여전하다.


이를테면 요새같이 추운 날씨에 갑자기 후끈한 실내로 들어서서 안경에 성에가 확 끼게 된다거나, 미용실에

가서 대체 아주머니가 어케 머리를 깍고 있는 건지 뵈는 건 없고 손길은 따사로와 곤히 잠들어버리고는 머리가
 
엉망이 된다거나, 안경의 도수가 높다 보니 렌즈따라 얼굴 윤곽이 일그러져 보인다거나 눈이 더욱 작아

보인다거나, 한번 삐뚤어진 안경테를 아무리 바로잡으려 해도 뭔가 이전보다 2% 부족한 느낌에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거나, 고글이나 물안경을 안경 위에 낄 수는 없는데다가 요즘처럼 고글형의 선그라스가

유행하는 때 도수가 안 들어가는 그런 것들은 낄 수 없다는, 그런 따위들.


왠지 불쑥 오늘은 기필코 내가 찢어지던 렌즈가 찢어지던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동했다. 무슨 행사 때 무료로

얻어두었던 소프트렌즈가 한벌 있었고, 몇 번 깨작깨작 시도하다가 속눈썹과 눈꺼풀의 굳건한 방어막 앞에서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던 터였다. 그다지 풍성하지도, 길지도 않은 속눈썹이 무슨 거미손도 아니고, 렌즈가

들어갈라 치면 완전 금성철벽이었다. (뭐 이나이 먹도록 여전히 겁많고 두려움 많아 그런지도 모른다, 인정..

그치만 혹시 렌즈끼다가 눈알을 손톱으로 긁으면 어떡하냐고, 아님 렌즈가 눈알뒤로 돌아가버린다거나. 혹은

아예 렌즈가 눈알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리면, 빼낸다고 호스 넣고 기구넣고 하다가 눈알마저 터져버리면.;; )


근 한 시간. 눈이 씨뻘개지고, 위아래로 잔뜩 벌린 눈가 위아래 두덩에서도 열감이 느껴질 즈음. 파닥파닥대며

발버둥치는 속눈썹과 눈꺼풀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는가 싶자, 한순간 손끝의 렌즈가 쑥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멍하니 손 끝만 바라보며 이게 지금 렌즈가 바닥에 떨어져버린 걸까 눈속에 들어간 걸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왼쪽과 오른쪽의 세상이 각기 다르단 걸 퍼뜩 깨닫고 말았다. 오...세상이 이렇게 밝고 맑았구나.


아마 내 시니컬함을 키운 건 팔할이 안경껴야 뭐가 보이는 저질 시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쪽 눈을 마저

업그레이드시키고 세상을 보니, 비록 딱 도수가 맞는 렌즈는 아니었으되 뭔가 뻥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안경 따위를 코끝에 걸치지 않고도 세상이 보이다니. 정말 편하다. 눈알 따위 터지지도 않을 거 같고, 렌즈는

든든하게 눈동자 위에 버티고 있을 거란 안심도 된다. 그러고 보니 렌즈는 그간 안경이 가려왔던 내 갈색

눈동자의 마력을 마구마구 발산시켜주지 않을까...이러고 있다.


이제 안경과의 타협이 조금 필요하지 싶다. 아예 안 끼자니 너무 얼굴 앞면이 심심할 거 같고, 뭔가 가려줄 게

필요하기도 하고, 렌즈가 없거나 보안경 수준의 도수만 가진 안경을 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좀더 익숙해지면

아예 벗어버릴까도 생각중이다. 어쨌거나 야호, 안경독립 만세. 역사적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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