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한, 열한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중의 하나는 서울에서 파리까지 비행기로 날아가는 것.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베일리스도 마시고, 책을 보고, 밥을 먹고, 잡지도 보고, 자다가, 와인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꼬냑도 마시고, 옆사람과 수다도 떨고, 자고. 그러고 나니 러시아 하늘을 날고 시베리아의 툰드라 동토를 지나 지구의 삼분지일을 돌아버렸다.
참, KLM이나 에어프랑스는 중간에 컵라면을 간식으로 준다. 대한항공같으면 비즈니스석에만 제공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하늘에서 먹는 컵라면은 살짝 불었음에도 참 맛있었다. 먹고 난 뒤 기내에 꽉 차버린 라면 냄새조차 구수했으니.
잠시 당황했던 그녀는, 그렇지만 이내 예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레드와인을 잡더니 뚜껑을 돌려버리고는 다시 건네주었다. 덕분에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을 푸짐하게 얹어놓고 홀짝대는 호사를 누렸다. 넉넉히 달랬더니 정말 넉넉히 준 스낵과 함께.
역시 네덜란드의 출입문 암스텔담 공항. 공항 내 면세점에는 온통 튤립 생화, 튤립모양 장식품들, 전통 나막신들과 치즈, 초콜렛으로 가득했다.
사실 비행기에 열몇시간씩 꾸겨져 타고 있는 건 적잖이 비인간적인 일이다. 통로쪽에 앉지 않은 이상 화장실 가는 것도, 스튜어디스를 부르는 것도, 하다못해 몸을 한번 뒤트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그저 일직선으로 곧게 나아가는 비행기의 거대한 동체 안에서는 날고 있다는 실감 따위는 공기만큼 희박하다. 단지 가끔 돌부리에라도 걸린듯 비행기가 쿨럭이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묻어나는 공포감에서, 지금 여기가 지상 수천미터위 하늘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뿐.
특히나 화장실서 일보고 있을 때 비행기가 휘청대면 스릴 짱이더라. 어쨌든 두다리로 단단히 버티고 서있으니 왠지 비행기가 추락해도 이대로 땅위에 두다리로 내려설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기고.
그러고 보면 30일 오후 1시 비행기였는데 파리 현지시각은 30일 오후 10시어간이었다. 왠지 하루를 꽁짜로 벌은 것 같은 기분은 귀국할 때 슬몃 사그라들어 버리겠지만, 그래도 당장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된듯한 느낌이 산뜻하다. 근 일주일 동안의 기간동안 저 거리들을 내 두다리로 가위질하듯 걸어다니겠구나 생각하니 잔뜩 눌린채 떡진 머리, 딱딱하게 굳어진 근육세포들 따위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작년 가을쯤이었던가, 그가 잠시 서울에 왔을 때 밥한끼 먹고선 처음 만나는 순간을 찍어두고 싶었다. 그러나 출구에서 날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었고, 가장 먼저 짐을 찾아 일등으로 나왔던 나는 다른 사람들이 속속 일행을 찾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십분, 이십분, 삼십분..2001년 뉴욕 JFK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나오지 않아 하루 공항서 노숙했던 기억이 불길하게 떠올랐지만. 40분, 친구가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샤를 드 골 공항과 파리를 잇는 이 전철은 일종의 교외선, 파리 중심부부터 1, 2, 3..5 존으로 구분되는 요금체계에서 가장 먼 5존으로 설정된, 파리 외곽을 잇는 전철이다. 인천공항이랑 서울쯤의 관계랄까. 그러니 8.5유로였던가..그 비싼 요금도 대강대강 수긍해 줄 만하다.
샤를 드 골 공항(#2)에서 RER B선을 타고 15구에 있는 친구녀석의 집으로 향하는 길. 파리 중심가부터 시계방향으로 뺑글대며 달팽이 모양으로 감겨나가는 '구'의 구획상, 15구는 파리 남쪽 끄트머리다.
내 하루 일정의 알파요 오메가였던 12번 전철 Convention역(이라 쓰고 꽁방숑, 이라 읽는다)까지 고고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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