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시내 스카이라인의 트레이드마크인 텔레비전 송신탑, 삐쭉한 안테나처럼 생긴 그것을 따라 걷게 되면 나타나는 광장이 알렉산더플라츠.


밤마실 삼아 설렁설렁 걷던 길에 슈프레 강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연 같은 것도 잠시 앉아 즐겨주고.


주먹만한 대리석들로 박아둔 유럽 느낌 그득한 포석을 달각달각 밟으며.


그래피티가 몇겹씩 덧씌워져 있는 교각 아래도 지나고.


도착한 너른 광장이 알렉산더플라츠. 우리로 치면 명동쯤 되려나, 백화점이나 각종 샵들이 모여있는 곳. 그리고 텔레비전 송신탑이 비로소 우뚝 서서 굽어보고 있는 곳.


한쪽에서는 베를린 시내 곳곳을 연결하는 트램이 출발.


그리고 이미 셔터를 내린 어느 건물 외벽에는 베를린, 러브, 두 글자만 눈이 부시게 반짝거리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어느 오랜 성당 앞에서는 삼삼오오 모여앉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시원한 분수 소리가 뒤엉켜 있었다.


베를린 시내 곳곳에서 보이는 (아마도) 수도 파이프. 왠지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떠올리게 만드는 현대적인 느낌 물씬.


조그마한 개천을 건너는데 시꺼먼 개천 위로 불빛이 둥둥. 굉장히 고즈넉한 동네, 무섭다기보단 마냥 평화로운 느낌.


그렇게 설렁설렁 밤마실 삼아 산책을 다녀온 덕에, 극악의 시차를 극복하고 꿀잠을 잘 수 있었다나 뭐라나..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여러분이 <진보신당>입니다

13000개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에게 띄우는 편지

“시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휴식 시간, 이 시간은 의식意識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중에서


뒤늦은 새해편지

당원 동지 여러분.


설 연휴가 지난 지도 오래고, 2월도 중순을 넘어가고 있으니 새해인사를 전하기엔 새삼스런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디는 ‘신년사’라는 걸 통해 동지 여러분께도 말씀을 건넬 계획이었습니다. 오래된 관행도 그렇고, 새해의 첫걸음을 응원하고 희망어린 비전을 제시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는 사람들의 권고도 있었지요.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겠습니까만, 너나할 것 없이 강조하는 2012년의 중요성 때문에 더욱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숙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는 신년사라는 말이 싫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순간 과장되고 거짓된 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무렵, 이른 아침 집을 나와 경의선 기차역까지 걷는 동안 문득 신년사를 편지글로 고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에 쓴 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지 말라”고 어느 시인이 말한 적이 있지요. 결국은 못 부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경구를 이번에는 잊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절망이든 희망이든, 저는 제 속에 깃든 진심을 차라리 드러내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늦은 밤에 쓴 이 편지를 아침에 읽지 않은 채 여러분께 곧장 띄웁니다.



시지프스를 떠올리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거나 그 반대인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너도나도 ‘위기의 시대’를 입에 올리지만, 하나의 위기가 지나고 나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의 범주는 급속히 좁아지고 불행을 감내해야할 사람들의 그것은 같은 속도로 확대되어왔습니다. 23년 만에 영구 귀국한 2002년 1월로부터 지난 10년 동안 그 격차라는 것이 이 정도까지였나 하는 점을, 고백컨대 저는 최근에서야 비로소 깊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11월 당대표가 되고 나서 3개월 동안 저의 일상을 중요하게 차지한 것은 불안정 노동이라 부르는 비정규 노동자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투쟁 집회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3개월 동안 다닌 곳이 지난 10년 동안 갔던 곳보다 많지 않을까 싶네요. 그냥 다닌 게 아니었습니다. 발언 순서를 기다리면서는 왜 그리 긴장되는지, 또 마이크 앞에서는 다른 분들처럼 큰 목소리로 자신 있게 외치지 못하고 자꾸만 허둥대는 자신이 또 얼마나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세상에 이리 많은 싸움이 있는데, 세상은 왜 이리 조용한가를 생각하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의 끝을 대체 누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요? 네 번의 겨울을 맞으며 1500일 가까이 싸우고 있는 재능교육 선생님들의 거리농성장을 찾던 날이었습니다. 이 막막하고 외로운 싸움을 목도하고 나오면서 저는 문득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를 떠올렸습니다. 산꼭대기까지 무거운 바위를 끝도 없이 되풀이해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그래서 어쩔 건대?’라는 자본의 비정한 얼굴에 맞서 부르튼 두 손으로 기약 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부조리한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 어찌 이분들뿐이겠습니까 마는.


그러다 또 문득 저는 진보신당 당원 동지 여러분을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하루아침에 뒤로 하고 떠난 당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이 시대의 시지프스가 아닌가요? 냉소와 무관심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두 팔을 뻗어 당을 지탱하고 다시 산 아래로부터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있는 우리의 운명이 시지프스의 그것 아닌가요?


1% 대의 지지율, ‘통합’이란 이름표를 단 야당들의 틈바구니에서 소외된 원외정당의 설움, 언론의 외면, 고집불통이란 딱지, 명망 정치가들이 남기고 간 부정적 유산과 상처, 무정한 옛 동지들에게 ‘진보(신)당’이란 이름마저 도용당하는 비애, 이당 저당 가릴 것 없이 ‘좌클릭’이요 진보를 자처하는 현실, 조합원들의 민주적 선택권을 몰수하여 3자통합당에 대한 변형된 배타적 지지방침을 관철시키려는 민노총에 대한 울분……. 기나긴 지난 1년여의 통합논쟁으로 지치고 힘겨워 주저앉은 당원들과 지역당협이 적지 않다는 소식을 듣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왜 여기에 남아있는 것일까요?



자존감自尊感에 대하여


당원 동지 여러분.


13000개의, 저마다의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는 바로 여러분이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입니다. 알베르 까뮈처럼,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도,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만 한다”고도 차마 지금은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여러 글에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에 우리가 가야 한다.” 이 말도 지금은 잠시 유보해 두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는 반드시 해두고 싶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제 <진보신당>입니다. 우리에겐 13000 개의 진보신당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정치적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문명 자체의 위기가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작 자본주의 이후를 대비해야할 진보정당은 소멸의 위기에 처한 슬픈 역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여도 야도 ‘좌클릭’이 유행인데 우습게도 왼쪽에 있던 사람들마저 몸은 ‘우클릭’하는 이 역설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이 어처구니없는 자기분열의 시대에 그저 목이나 어루만지며 안심하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정치 혹은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자존감에 존립합니다. 자존감은 우선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지 않고 자기정체성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해 끊임없는 확인하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물음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질문이 누락된 정당은 누군가의 말장난처럼 ‘가설정당’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당일 수 없습니다.


정치가 자존감이 아니라 수數나 세勢에 존립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진보신당 13000 당원들은 불가사의한 존재들로 보일지 모릅니다. ‘끝없는 패배’가 두려운 이들에게 정치적 자존감이란 것은 그저 던져버리고 달아나고픈 거추장스런 시지프스의 바위로 비쳐졌을지 모릅니다. 두 가지의 아주 다른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산꼭대기만을 쳐다보다 바위를 버리고 달려가는 ‘상층연합’의 길이 있는가하면, 바위를 밀어 올릴 때나 바위를 찾기 위해 산 아래를 향해 걸을 때나 묵묵히 자신의 발끝이 향하는 길을 보고 걷는 ‘하층연합’의 길이 있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당대표가 된 직후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진보신당 당원들과 저의 힘겨운 노력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즉시 ‘하방下放’을 선택하여 새로운 진보정당의 밀알이 되겠다는. 처음부터 패배주의로 시작하느냐는 지적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사실은 이것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1926년 <리용 테제>를 떠올리며 했던 말이었습니다.


한때 사회당(PSI) 좌파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광풍 앞에서 반半합법적 존재로 탄압받으면서 궤멸의 위기에 처한 이태리 공산당(PCI)은 자국 내에서 당대회를 열지 못하고 프랑스 리용으로 당원들을 소집하지요. 그람시는 이 당대회의 테제에서 5만 당원에게 ‘하방’을 명령합니다. “북부의 노동자와 남부의 농민을 조직하고 그들의 혁명적 동맹을 공고화하라”는 이 테제에 따라 당원들은 민들레 씨앗처럼 공장으로 농촌으로 학교로 퍼져나가 삶의 근거지마다에서 진지를 구축하지요. 그리고 파시즘의 몰락 이후 당은 50만 당원을 가진 서유럽 최대의 대중적 좌파정당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동지 여러분.


벌써부터 머지않아 다가올 4월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살아남을 것인가 해산될 것인가를 놓고 말들이 분분합니다. 진보신당의 존재가 자신들의 뒷덜미를 잡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간절히 희구할지도 모르지요. 여기에 판돈을 걸어야 한다면 아마도 후자 쪽에 수북이 쌓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렵게 존속시키려던 당은 해산되고 우리는 다시 시지프스처럼 산 아래로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민들레가 뿌리째 뽑혀도 갓 털을 단 씨앗들이 흩어져 큰 숲을 이루듯, 당이 해체되고 진보신당이란 이름이 사라져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13000개의 진보신당으로 남아있다면 머지않은 시간에 13만의, 130만의 진보정당이 출현할 것입니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병사했지만, 그의 두뇌를 20년 간 작동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호언하던 파시즘 권력은 사라졌어도 그의 《옥중수고》를 우리가 지금 읽고 있습니다.


어떻게 져야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이겨야 할까요? “싸움은 승리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시라노>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입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13000개의 진보신당’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면, 총선이라는 한 번의 전투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의 씨앗과 한 알의 밀알에 우주가 있듯이, 여러분이 각각의 존재가 진보신당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자존감의 두 번째 비밀입니다. 씨앗과 밀알이 썩어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에서 보듯이, 자존감은 ‘자기다움’에 대한 치열한 물음이자 ‘자기해체’를 무릅쓰는 용기입니다. 이 두 가지는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다움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해체의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지난한 진보좌파연석회의의 과정은 바로 이 ‘찾기’와 ‘만들기’의 동시적 진행과정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품고 있는 밀알의 자존감이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이번 임시당대의원대회의 주요 안건 가운데 하나인 사회당과의 통합문제도 그렇습니다. 긴 시간을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분투해온 사회당과의 통합은 총선에서의 유·불리를 따지는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사안입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유사한 이웃 당은 소외시키면서 어제까지 한 지붕 아래 있을 수 없다던 정당과는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손을 잡는 정치공학을 끝내고 이제 자존감의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실천이며, 보다 넓은 진보좌파정당 건설로 나아가는 정치조직의 자기정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창당을 모색하는 녹색당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와 성장과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이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가치와 씨름해온 생태주의자들은 또 다른 시지프스들입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교리와 자본의 독재가 강요하는 삶이 결코 ‘올바르지도’ 않고, 앞으로 온전히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라면 자본주의 극복에 있어 좌파와 녹색은 전략적 동맹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까지도 사로잡아온 ‘성장의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우리에게는 과감한 자기해체의 모험과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녹색과 좌파가 서로의 보완재로 보지 않고 내적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가치의 연대’가 이 시대 한국의 진보좌파 앞에 놓인 가장 중차대한 숙제라고 인식된다면, 우리는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겸허하고 섬세한 선거연대를 시도하되, 일시적인 비대칭성이 주는 난관 때문에 비관하지 맙시다. 시간문제일 뿐 ‘녹색좌파’의 새로운 전망은 기어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배제된 자들의 서사전략


불과 얼마 전까지 평당원이었던 사람이 당대표의 역할과 업무를 파악하기에도 석 달이라는 시간은 넉넉지 못합니다. 그런 제게 총선과 대선이 있는 이 2012년의 초입은 일찍이 통과해 본 적이 없는, 캄캄한 입을 벌리고 있는 긴 터널의 입구에 서있는 것 같아 현기증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에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까지 겹쳐 어수선한 정국에서 집권 보수세력의 재집권이 어려워지고 자유주의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야당의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2013년 이후의 미래가 밝을 것으로 이야기하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이들의 말처럼 그런 상황이 노동자들의 처지에, 진보정당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가 거대한 파고로 밀려올 때 수구적 보수세력인 새누리당만이 야당인 상황이 우리 사회에 유리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람시는 파시즘을 가리켜 “사라져가는 옛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의 출현이 지체되는 위기 국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병적 징후들” 가운데 하나로 규정한 바 있지요. 과거 어설픈 당근과 가혹한 채찍 사이에서 사회적 격차가 오히려 고착되었던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처럼 자유주의 정권 주도의 위기관리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파쇼적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거듭 강조하지만, 진보정당은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고 말한 이도 그람시였지요. “선장은 배가 난파되었을 때 자신의 배를 떠난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사하게 된 후에만 배를 떠날 수가 있다”고 말한 이도. 기억들 하시는지요? 여러분께 드리는 첫 인사글 말미에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제가 인용했던 것을. 부조리한 운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그 말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고통과 번민에서 곧바로 어떤 의미든 찾고자 하는 것, 이것은 아마도 의미 없는 고통을 하루하루 끝도 없이 이어가야 하는 이들의 삶에 오래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지식인적 사고가 지닌 허영 아니었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눈물은 아래로 흐르고 숟가락은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천하를 논하는 ‘큰 정치’가 따로 있고, 삶의 고통을 다루는 ‘작은 정치’(혹은 민생 정치라 부르는 것)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정치’에서 말해지는 희망을 위해 목전의 삶의 불행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면 그것은 다만 거짓일 뿐입니다.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숟가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어야 하는 사람들의 생존의 최전선에서, 아래로 전가되는 불행의 크기를 가늠하고 그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보정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연대전략’입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여러 경로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저는 우리 당의 비례대표전략을 <배제된 자들의 서사 전략>이라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고 묵살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기업 노조 중심의 노동조직으로부터도 소외되거나 외면당해온 ‘배제된 노동’을 비례후보의 전면에 내세우고 이들이 만들어온 삶과 사랑과 투쟁의 서사를 무기로 이 시대의 자본권력과 지배이데올로기와 싸우는 것을 이번 총선의 중심전략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진보신당이 맞이했던 다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조건에서 치르는 선거가 될 것입니다. 명망정치인들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 이제 무명의 척탄병들이 서 있습니다. 초라한가요? 패배가 너무 불 보듯 빤한가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당의 지역후보가 13000명이라면? 무명의 척탄병들 옆에 13000명이 나누어 선다면? 그렇다면 이번 선거가 이 시대의 난장이들과 시지프스들이 오만한 권력과 물신을 향해 돌멩이들을 쏘아 올리는 싸움의 장, 축제의 장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시는지요?


여러분이 <진보신당>입니다. 우리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미리부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축소시키지 말아주십시오. 그저 부조리한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로 여겨지던 시지프스는 까뮈를 통해 끝없이 패배하면서도 운명에 저항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시지프스가 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려는 순간이고, 고뇌에 찬 얼굴로 잠시 정지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운명을 응시하는 시간이고 운명을 밀어 올림으로써 운명보다 한 뼘씩 우위에 서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알베르 까뮈로 편지를 시작했으니 그가 《시지프스의 신화》의 첫머리에 쓴 구절로 끝을 맺겠습니다.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애써 바라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진보신당 대표


프랑스 여행 갔을 때 빵을 참 맛있게 먹었었다. 바게트도, 크로와상도, 타르트류도. 동네의 빵집들도

굉장히 맛있었고 뽕드뺑이니 뽈(Paul)이니, 그런 베이커리 체인점도 엄청 맛있었던 거다. 늘 잊지 못하던

차에, 작년 상해 출장 중에 리츠칼튼 호텔 1층에서 '뽈'을 발견하고 완전 반가워서 잔뜩 빵을 사먹기도

했었고 남은 건 검정 봉다리에 뚤레뚤레 들고 다니며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었다. (그래도 맛만 좋더라는)

한국에서도 있다고 듣고만 있던 차, 여의도까지 갈 일이 쉽게 생기지 않아 항상 맘속에 위시리스트에

넣어두고만 있었는데 드디어, 드디어 한국에서 뽈 입성. 프랑스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매장의 인테리어는

똑같이 꾸며놓았구나, 클래식한 느낌의 어두운 색 철제 프레임 위의 하얀색 글자, PAUL. 주말 오전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대기자 리스트에 이름을 적어두고 몇분 기다리는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브런치 메뉴를 시켰더니 우선 검은깨가 잔뜩 박혀있는 바게트와 버터가 나왔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일회용 버터용기가 아니라, 도자기로 만들어진 용기 속에 버터가 꽉 채워져서는 저런

종이로 뚜껑삼아 덮여있었던 것. 원래 빵에 버터 발라먹는 거 안 좋아하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거칠딱딱한 바게트를 먹자니 속이 좀 부대끼겠다 싶어서 버터를 꼼꼼히 발라먹었다.


매장 안은 커다란 통유리창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고 천장도 높은 덕에 굉장히 개방된 느낌이었다.

은은한 파스텔톤의 색감이나 단정하고 우아한 느낌의 커튼, 그리고 따뜻해 보이는 백열등 샹들리에가

잘 어우러진 분위기. 파리에서도, 상해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였던 거 같다. 아마 전통적인 인테리어 컨셉을

고수하는 거겠지, 어설픈 현지화라거나 분위기 쇄신을 거부하는 게 왠지 프랑스스럽다.

뭘 먹었냐면, 이런 거. (아놔, 음식 포스팅은 이래서 못해먹겠다는. 제목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 맛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말이다.) 분명한 건, 내가 여태 뽈에서 먹어봤던 빵들이나 브런치 메뉴, 커피까지도

별로 실패다 싶었던 적은 없었다는 점. 특히 강추하고 싶은 건 크로와상, 아몬드 크로와상하고 타르트류.

메뉴판의 한대목. 벌써 120년도 넘은 역사를 가진 빵집이었구나. 메뉴판을 보면서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준의 문제일 수 있겠지만,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삼청동, 아니면 정자동

까페골목 같은 곳에서 브런치를 먹을 때보다 조금 싸거나 비슷한 정도랄까. 브런치가 아니라 빵을

먹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요새 베이커리집들 얼마나 빵값이 비싸졌는지, 그닥 차이가 없어 보인다.

브런치를 먹고 아쉬워서 빵 하나 더 골라서 맛나게 먹고 나서 한참 앉아서 창밖도 구경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 샹들리에(전등)와 샹젤리제(거리이름)를 내내 헷갈리다가, 파리에 다녀오고서 그 도시의

거리 곳곳을 걸으며 몸에 새기고는 비로소 그 두 단어를 제대로 구별할 수 있게 되었던 것도 기억나고.

그 이래로 파리와 상해, 서울의 추억을 이어주며 이렇게 어디서든 변함없는 퀄리티와 맛으로 반겨주는

빵집 하나를 서울에 갖게 되었다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다. 옆 테이블의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볍게

브런치를 먹고 오붓하니 이야기하는 걸 보며, 그네들의 추억은 어디에서부터 이어졌을까 괜한 상상도

해보게 되었던 시간.






* 추석 연휴에 파리에 다녀오는 가족들을 위한 깨알같은 선물.




1st Day

 

● 숙소 -> 뮈제 오르세 역

 

1. 루브르 박물관(3h) + 카루젤 개선문

 

(점심 : 마레지구 혹은 시테섬 인근)

 

2. 퐁뇌프 다리

 

3. 시테섬 : 콩시에르쥬리, 생샤펠 성당(1h), 노틀담성당(1.5h)

 

 

● 샤틀레 역 -> 프랭클린 디 루즈벨트 역

 

1. 샹젤리제 거리(1.5h) : 커피 한잔

 

2. 개선문(1.5h) : 전망대

 

 

● 샤를 드골 에투알 역 -> 트로카데로 역

 

1. 샤이요 궁전

 

2. 에펠탑(1.5h) : 전망대

 

3. 바토무슈 유람선 @ 퐁 드 알마 역

 

(저녁 : 표 사고 기다리며)

 

 

2nd Day

 

● 숙소 -> 뮈제 오르세 역

 

1. 오랑주리 미술관(1.5h)

 

2. 콩코드 광장

 

 

● 콩코드 역 -> 오텔 드 빌 역

 

1. 파리시청사

 

2. 퐁피두 센터(1h)

 

3. 생 메리교회(0.5h)

 

(점심)

 

 

● 샤틀레 레알(혹은 랑뷔토) 역 -> 앙베르 역

 

1. 몽마르뜨 언덕(1h)

 

2. 사크레쾨르 성당(1h)

 

3. 몽마르뜨 묘지, 물랑루즈

 

 

● 앙베르 역 -> 오페라 역

 

1. 오페라 극장(오페라 가르니에) : 가능하면 다음날 공연표 구매

 

(저녁)

 

2. 쁘렝땅 백화점 등 쇼핑

 

 

3rd Day

 

● 베르사유 궁전

 

 




* 기타 가볼만한 곳

- 앵발리드(나폴레옹 무덤)

- 오르세 미술관

- 몽파르나스(현대 건축물)

- 그랑팔레/쁘띠팔레/알렉산드르3세다리

 

씨엠립에서 프놈펜으로 이동하려는 참,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노 머니, 노 허니'의 격한 티셔츠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이 티셔츠가 작년 여름에 캄보디아에서 대유행이었던 게 틀림없다.

시엠립의 재래시장통을 옆으로 스쳐보내고, 이 조그마한 마을이 옆에 품고 있는 거대하고 웅장한 고대 유적들을

돌아본 기억을 차곡차곡 갈무리.

시엠립 시외버스터미널, 어딘가에서 모여 작은 미니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옮겨가는 식이었다. 처음엔

이런 미니버스를 태워서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지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얼마 달리지 않아 대형 버스들이

잔뜩 주차해 있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황량한 공터에 도착했다.

버스에 짐을 싣고, 아직 출발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6시간이나 시골길을

달려야 시엠립에서 프놈펜에 도착한다니 미리 좀 먹어두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다행히 우리네 버스터미널이 그렇듯 슈퍼가 있어서 다양한 간식거리나 음료도 많이 팔고 있었고, 요기거리가

될 만한 것들도 노점에서 많이 팔고 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저 소세지들은 딱 보기에도 위생상 뭔가 문제가

있어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름에 다시 지글지글 튀길 테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은근 맛있어 보이기도.

노점 말고도 건물로 된 음식점에서도 전부 이런 류의 소세지를 파는 게 왠지 안 먹으면 후회하겠다 싶어 주문.

칼로 잘라놓고 보니 꽤나 먹음직스러운 조리 예 시현, 무슨 고기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맛도 꽤 좋았다.

숙주랑 함께 볶아진 닭고기-아마도..?-요리도 간단히 맛보고,

닭요리처럼 보여서 시켰는데 왠지 뼈도 자잘하고 맛도 살짝 다른 것이, 주인 아저씨한테 몇번을 물어봤지만

영어도 손짓발짓도 (심지어) 한국어도 안 통한다. 결국 이게 무슨 고기인지 밝혀내는데 실패, 왠지 찝찝해서

다른 것들은 싹 먹어치웠지만 이 녀석은 조금 남기고 말았다는.

가게 한 켠에 놓인 평상에서 오수를 즐기고 있는 아저씨, 그리고 선풍기 앞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대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아이 하나. 시선은 티비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벌거벗은 가슴 가득 선풍기 바람을

부딪기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슬금슬금 가게를 빠져나가던 고양이 한 마리, 잘 못 먹었는지 바싹 야윈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 닭인지 비둘기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한 점을 던져주려 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버스 껍데기는 그래도 제법 깨끗하다. 더구나 내부에는 이렇게 화장실도 있었던 것. 여섯 시간쯤 달리니 필요하겠다

싶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아무리 그래도 중간에 휴게소도 설 테고 한국에서도 그정도 달려도 차에 화장실은

없는데 싶어 새삼스레 신기하게 바라봤댔다. 언제든 필요할 때, 급할 때 쓰라는 세심한 배려.ㅋ

그리고 뭔가 우스운 방석. 버스의 각 좌석마다 전부 이 알록달록한 핑크 톤의 방석이 매달려 있었다. 이건 뭐지.

버스 앞에는 그래도 티비도 달려 있고, 캄보디아의 대중 가요를 뮤직비디오랑 함께 쉼없이 틀어줬다. 뭐랄까,

80년대 한국 트로트 가요에 맞춰 성인 배우들이 80년대풍의 과장된 감정 연기를 하는 스토리다. 해변에서 함께

손잡고 하하호호 웃으며 뛰어다니다가, 어느 순간 그 해변에 홀로 앉아 눈물 글썽이며 옷을 쥐어뜯는.

바깥에서 휙휙 풍경이 지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복 2차선의 외길, 이대로 쭉 프놈펜까지 가는

길이라 했다. 엔간한 차 한대 보이지 않는 구간을 한동안 달렸고, 드문드문 스쿠터가 앞에서 알짱대기도 했고.

프놈펜에 거의 들어와간다 싶을 무렵, 똔레 쌉강인지 메콩강인지, 뜨겁던 태양이 한풀 꺽인 듯한 하늘 아래

강폭이 잔뜩 벌여진 수면 위로 배들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강변으로는 수상가옥스러운 가건물들이 비탈지게 세워져 있기도 하고, 양철판을 이어붙인 선박들이 쭉 정박해

있기도 하고. 목욕탕의 쑥탕같은 이벤트탕 색깔이랑 비슷한 강물 색깔이 묘하다.

프놈펜 시내에 들어섰다. 아줌마들이 열맞춰 서서는 쿵짝 리듬에 맞춰서 에어로빅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프랑스 식민지 시절 '인도차이나의 파리'라 불렸다는 이곳은 아무래도 시엠립 같은

시골의 조그마한 동네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비교적 높은 스카이라인도 그렇고 북적대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리고 웃통도 제대로 챙겨입은 꼬맹이들이나 아저씨들도.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쉽게 보이던 원숭이들도. 좀처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얼굴 표정이 역력하면서도

막상 가까이 가거나 관심을 보이면 슬금슬금 도망가 버린다. 뭔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떠나가는 듯.

어떤 면에서는 서울의 골목길에서 자주 보이는 길냥이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프놈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숙소까지 가는 길에 잠깐 들러본 왓 프놈, '언덕 위에 세워진 사원'이란 의미의

왓 프놈은 프놈펜 시민들의 도심 공원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위치도 딱 프놈펜 시내 중심쯤에-약간 북쪽에

치우친 감이 없진 않지만-자리잡고 있다.

얼핏 보면 세느강변 옆의 파리 시내 분위기도 얼추 느껴진다. 가로등과 건물들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렇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저녁의 어슴푸레한 풍경 속에서 촛불빛을 밝혀 바치는 걸로 보아 뭔가 종교적인

지도자 아닐까. 동상에 장식되어 있는 목걸이도 그렇고.

숙소, 호텔 캄보디아나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나니 객실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건 벽면에 찰싹 붙어있던

도마뱀 한 마리. 안뇽.

똔레 쌉강과 메콩강이 합류하는 지점쯤에 호텔 캄보디아나가 서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어디서부터가 똔레쌉강이고

어디까지가 메콩강인지 뚜렷하게 구분하는 거 자체가 좀 넌센스다. 두 줄기 모두 홍수로 잔뜩 탁해진 한국의

강들처럼 온통 흙탕물인걸 뭐. 그치만 조금 낡긴 했지만 꽤 괜찮았던 오성급 호텔에 걸맞는 뷰라고 해두기로.

저녁이나 아침에 해넘이, 해돋이 보기엔 딱 좋은 위치다.

메콩 익스프레스, 시엠립에서 프놈펜까지 여섯 시간 걸려 달리는데 요금은 USD 11$ 이었다.(09. 8월 기준)

버스 짐칸에 짐을 실어주면서 가방에 묶어 두고 식별하기 위한 표찰을 떼어주기까지 하니까 나름 체계는

갖추고 있는 셈이다. 짐표에 그려진 저 돌고래..는 메콩 익스프레스의 로고. 근데 메콩강에 돌고래가 사나.



일주일여 묵었던 친구녀석의 아파트 건물에 있던 빈티스 느낌 가득한 엘레베이터. 이중문으로 되어 있어

바깥문을 먼저 열고 안의 문을 열어야 엘레베이터에 탈 수 있고, 두개 문을 모두 닫아야 작동되는 형태.

마지막으로 돌아본 녀석의 집. 아침에 나와선 뒤도 안 돌아보고 멀어졌다가, 밤이 깊어 어둑해져서야 더듬대며

돌아왔으니, 이렇게 밝은 시간에 제대로 마주보는 것도 처음이다. 그치?

튈를리 정원 근처의 풍물시장이 있단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살짝 돌아보고 구경이나 할 셈으로.

터헛. 장화신은 고양이 3종세트가 저런 슈렉고양이스런 눈빛을 하고 내게 걸어오는 듯한 환상은 뭐지. 아..

저 애절하면서도 도도하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눈빛. 냐옹.

마침 고양이 인형 샵도 옆에 있어주시고, 냉큼 들어가서 할딱할딱대며 온갖 고양이들을 원없이 구경하다가

눈에 딱 들어온 저 녀석. 저 아이, 딱 보면 갖고 싶어지지 않나효.

고양이 말고도 이런 아리따운 자태의 소녀들과 요정들도 잔뜩 귀엽긴 했지만, 고냥이보단 못해, 라고 멋대로

생각하고는 더이상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고양이에 대한 절개..랄까.

암튼, 내가 샀던 건 요녀석들, 발을 늘어뜨리고 새근대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라니. 꺄아.

공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점심, 샹젤리제를 걷다가 역시나 발이 땡겼던 곳은 뽕드뺑. 뽈을 가줄까 하다가

그럴듯한 야외 테이블에 빈 자리가 없어서 여기로 와서 간단히 빵과 에스프레소로 요기.

왠지 파리지앵들은 휴가 마지막날 공항으로 가기 직전의 여행자보다도 여유로워 보였다. 휴가를 위해 일한다는

그들, 나도 그렇긴 하지만 그들은 조건부터가 다르다. 일년에 4주 휴가는 보통, 6주에서 8주 휴가도 전혀 드물지

않다는 삶의 질을 누리는 그들.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안다, 그건 축복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한 '상식'이다.)

거리 공연이 늘 벌어지던 지하철 역사 내 그 장소, 어김없이 어느 아티스트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고 행인들은

적잖이 발걸음 멈추고 구경중이었다. 파리의 마지막 이미지.




대학가가 밀집했던 동네에서 문득 마주쳤던 고풍스런 성당, 꽤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건물이었는데, 하늘로

솟은 첨탑에 가까울수록 대리석의 빛깔이 뽀얗게 살아있는 반면 아랫도리쪽은 꼬질꼬질 때가 낀 것 같았다.

성당 내부의 분위기는 늘 그렇듯 기침소리조차 조심스럽다. 부조에 집중된 조명이나, 공간축과 시간축을 순간

헝클어뜨리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배치된 조형들이 빚어내는 효과들이란 건,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왠지 재밌다.

바스티유 감옥이 있었다는, 1794년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바스티유 감옥에서의 대량 탈주가 있었다는

바로 그 곳이다. 바스티유 광장. 뭔가 당시의 분위기를 어림해볼 흔적이 당연히, 프랑스니까,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의외로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옆에 있던 건 바스티유 오페라관. 한때 정명훈이 지휘자로 활동하던 곳이라던가, 정치인들과의 친분이 돈독하다는

그는 작년이었던가, 여기까지 그를 만나러 와서 순식간에 정리해고당한 서울시향단원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학생들에 막말을 했다고 한다. 니들 좌빨이지, 뭐 그런 식이었다던가. 그 기사를 썼던 분은 나름 정명훈을

위대한 음악가로서 그에 걸맞는 감성과 도덕을 가졌으리라는 기대치가 있었나보던데, 사실 그런 거 없다.


지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나 고고하게 천상에서 독야청청하는 예술 같은 건 존재할 수 없을 텐데.

작게는 정부의 온갖 되도않는 공익광고에서 이뿌고 멋진 목소리와 이미지를 팔고 있는 사람들, 크게는 음악과

예술의 천분을 팔아 자리를 차지하고 완장질하는 온갖 또라이들. 정도의 차이지만, 다들 '부역'중이다.

오페라홀에서는 공연도 없었고, 그저 거리를 배회하다 보니 바닥이 냉큼 눈에 띄는 거다. 자전거 통행길이

참 꼼꼼하게도 그려져있다. 파리는 서울과 달리 구릉이 심하지도 않고, 사이즈도 한결 작으니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기에 참 좋을 거 같다. 그래서 아마 파리의 연인들에서 김정은이 그렇게도 자전거를 즐겼는지도.

반대편에 서 있던 쇼핑센터. 여긴 아무래도 주거지역이 가까운 탓인지 '오리지널' 프랑스인들 말고 아프리카에서

온 듯한 흑인들과 유색인종들도 많이 보였다. 퇴근시간이었던가, 직장인들도 많이 보이고 뭔가 입구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고.

미국식 패스트푸드에 대해 경멸에 가까운 무관심을 보이는 프랑스인들이라고 하던데, 정말 KFC니 맥도널드니

세계의 엔간한 도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을 보기가 쉽지 않았던 도시였다. 그런데 여기서

딱 발견한 KFC. 그리고 그 옆에는 다소 생경한 색감의 맥도널드까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버스 안의 쾌적한 공간에 앉아 바라본 파리의 시내 풍경.




스마트카가 곰실곰실 기어다니는 파리 시내, 엷은 잿빛의 대리석만큼 하늘이 우중충하던 날 거리를 거닐었다.

스마트카가 참 귀엽다며 서울에서도 저런 차들이 많아졌음 좋겠다고 생각하던 즈음, 거의 달구지 수준으로

낡은, 그렇지만 또 어찌 보면 굉장히 유니크하고 귀여운 녀석이 하나 지나갔다. 네모 반듯하게 각진 '월-E'의

캐릭을 처음 봤을 때 그 가공할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저런 투박한 생김에서도

뭔가 귀여움을 찾아낼 수 있게 되어 버렸다.

화려한 장식이 주렁주렁 꾸며져 있는 다리, 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위에, 구릿빛 주물들을 포인트마다 조금씩

얹어 놓고, 반짝반짝하는 금칠로 마무리. 밤에는 그 위에 주홍빛 불빛이 한겹 내려앉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느강변, 어느 아가씨가 둔덕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사과를 깨물어 먹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한참을

쳐다봤댔다. 그녀가 가버리고 남은 자리.

한강 고수부지와는 다른 느낌, 뭔가 좀더 풍경들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느낌이다. 바닥에 깔린 포석부터. 한강은

그냥 시멘트로 맨들맨들, 아무런 질감이나 요철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죽이 대부분인 거다.

가방을 앞에 앉힌 채 근처 까페에 들어갔었다. 까페 이름은 퐁뇌프. 바로 그런 이름의 다리 옆이었다.

잔이 넘치도록 찰랑찰랑 따라진 화이트와인을 홀짝홀짝. 빵을 담았던 종이봉투가 꼬깃꼬깃해지도록 손에

쥐고 다녔으니 여기서 저 와인의 마지막 한 방울이 사라질 때까지 같이 다 마셔버릴 셈인 거다.

일요일날에 나왔을 적엔 차들의 통행을 막은 채 거리 축제 분위기를 한껏 풍겼던 바로 그 거리, 평일의 찌뿌린

하늘 아래에선 왠지 살짝 쓸쓸한 분위기의 한적한 길가로 변해버렸다.

성 샤펠성당을 지나며 다시 한번 그 뾰족뾰족한 외양을 눈길로 슬쩍 쓰다듬어 주고.

관광객도 잘 눈에 띄지 않던 어느날 오후, 금세라도 비가 꾸물댈 듯한 날씨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

틈에서 왠지 나도, 여행자가 아니라 현지인인 양 무심하게 한번 올려다 보았다.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 삼색기에 담긴 그럴듯한 뜻도 그렇지만, 프랑스의 국가 역시 피 냄새가 가득하다.

피를 먹고 세워진, 자라난 그네들의 국가 이미지. 최소한 그 정도의 피값을 주고 기억해 내어야 나라의 기풍이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만한 건덕지가 생기는 걸까.

노틀담 성당. 프랑스 파리의 중심부는 딱히 랜드마크라 할 만큼 두드러지게 높은 건물이 눈에 안 띄지만, 그래도

단연 노틀담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이 시선을 잡아끄는 거다. 자연스레 시선을 붙잡아 두는 효과.

오르세 미술관 지나는 길. 철도역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오르세 미술관 옆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언뜻 옛 서울역의

풍취가 떠오르기도 하고, 그리 작지는 않은 사이즈의 도시에서 마주쳤을 법한 철도역사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었다.




개선문 근처의 야경을 보러 나선 길, 깔끔한 파리 지하철, 메트로의 좌석 배치는 마주보고 앉는 예전 기차와

전철의 여유공간을 합쳐 놓은 듯. 게다가 저 커다란 볼록거울은 버스 뒷문위에 달린 그것과 같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서자마자 파랑색 에펠탑이 하늘을 받치고 선 게 보인다. 이미 남빛 하늘은 무지근해졌다.

루브르 박물관으로 넘어가는 화려한 다리. 넘어갈 생각은 아니고 개선문으로 갈 생각이다.

파리의 국회의사당이었던가. 하얀 가로등 불빛이 담백한 대리석벽에 부딪혀서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개선문 올라가는 계단. 쉼없이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길이라 속도를 내다보면 순간 어찔, 한 순간이 있다. 살짝

내려다보면 무슨 달팽이관을 꾸역꾸역 말아올리는 느낌이기도.

개선문 내부를 장식한 금속제 문양들. 아마도 영광의 월계관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월계수잎이 빼곡히 꼽혔다.

그리고 야경, 거대한 ㅁ자 형태의 라 데팡스를 향한 직선대로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한껏 머금었다.

[파리여행] 새로운 신전, 라 데팡스

그리고 파랑색 거인. 다소 마른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파란 뼈대에선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리 높지않은

건물들 사이에서 뾰족, 튀어나와 내려다보고 있다.

[파리여행] 기시감이 덕지덕지, 에펠탑과 야경들.

남빛 하늘은 점점더 어두워져선 푸른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지만, 그러고 나니 파란 거인 에펠탑이 사방으로

파랑 불빛을 쏴대고 있다. 흡사 등대.

그리고 파리 시내. 프랑스정원식으로 네모박스모냥 손질된 가로수들이 열맞춰 늘어선 커다란 울타리가 있고,

어디론가 향하는 자동차들이 유유하다. 다정다감한 불빛이 돋을새김해주는 운치있는 건물들의 윤곽선.

다시금 꼬부랑꼬부랑, 달팽이보다는 오랜 암모나이트 정도의 거칠고 울룩불룩한 껍데기가 떠올랐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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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빛 대리석으로 지어진 카루젤 개선문, 늦은 오후에 기울어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과 루브르 박물관을

오가는 사람들로 그 앞의 잔디밭은 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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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하늘이 찌뿌둥둥하다는 이야기를 넘 많이 들었지만, 요새 한국날씨에 비기자면 저 하늘이 부러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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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를리 정원의 녹색 '포장마차'들. 집 모양으로 빈틈없이 정돈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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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당신들을 찍으려던 건 아닌데. 더헙, 남자 손 어디 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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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이엿뉘이엿뉘엿뉘엿녓녓. 순식간에 황금빛 석양 너머로 숨어버리는 햇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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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어둑어둑하게 찍혀나온 사람들, 그리고 노랑빛과 검정빛으로 가득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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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혹은 야경을 보러 에펠탑에 오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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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석양이 온통 잠식해버린 서쪽 하늘 말고 다른 쪽은 아직 낮의 느낌이 살아있다. 내 드림카였던 푸조307이

90년대 엑셀처럼 꼬리를 물고 달리던 파리의 차로. 더이상 드림카가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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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루젤 개선문을 다시금 일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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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마음이 흠뻑 담겼을 빨강장미꽃 한다발을 품고 가는 시크한 파리지앵 한 분의 긴 머리결에

살짝 설레어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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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를리 정원을 지키고 선 나신의 아가씨들에게로 눈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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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 넘흐 늘씬하시다~♡ 다리가 무슨 고무고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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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서니 비로소 아이들이 알록달록 눈에 띄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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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도 까먹었고, 찾아가는 방법 따위 기억하고 있지 않은 데다가, '맛집' 관련 포스팅은 안 하기로 맘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채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작금의 상황에서 몹시도 위장을 쥐땡기는 사진들, 그리고

그 때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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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학가 거리 한복판에서 여우비를 피해 친구와 들어갔던 곳. 거대한 잔에 따라주던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안주삼았던 감자튀김과 '맛좋고 소화 잘 되는' 고기. 무려 얼굴만한 잔을 강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 등장한 사람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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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도 나왔댔다. 초코렛 푸딩..꺄아. 어찌나 맛있었는지. 그리고 어찌나 순식간에 바닥이 보이던지. 해서

어찌나 아쉽던지. 다시 한번 들르고 싶단 맘만 굴뚝, 으레 그렇듯 다시 이 곳을 밟기란 쉽지 않았다.



교훈. 두번 다시 못 올 것처럼 먹어라.(여행 중이라면 더더욱)


그치만 문득 찾아내 버린 그곳의 명함.




노틀담 성당을 지나다가 우연찮게 구경하게 된 미사 집전 장면, 아마 파리 추기경이 직접 와서 집전하는 것

같던데 제법 볼만한 광경이었다. 아름다운 성당과 더불어 멀리부터 순례해 오는 듯한 사제들과 수사들이 

파리 시내 가운데서 압도적인 경건함을 피워올린다.
 
양쪽으로 쭉 늘어선 관광객들과 구경꾼들을 헤치고 노틀담 성당으로 스며들듯 빨려드는 하얀 옷입은 신의

대리인들. 이미 미사를 보려는 교인들은 성당 안에 만석이었다.

왠지 가톨릭교와 관련된 오리지널 버전의 이미지랄까,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벽안의 백인 (남성)신부다.

최근까지만 해도 하느님-혹은 신-의 이미지 역시 서양 백인남성의 그런 이미지 일색이었다가, 얼마전부터

그런 성상이나 성가에 대해 '한국적' 시즈닝이 가해졌다고 알고 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예수님, 국악풍의

성가라는 건 바람직한 변화인 거 같긴 하다.

사실 '신성함'의 외피를 두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은지도 모른다. 정숙하고 느릿한 발걸음, 신과 그 위엄을

상징하는 온갖 악세사리와 기호들, 그와 나의 공통 인식기반이 되는 문화적 컨텐츠들. 예컨대 천지창조니

부활이니 하는 신이 역사한 사건들에 대한 경외감.


그런 건 모두 거품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들의 외피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법정스님 선종 후 터져나온

봉은사 명진스님에 대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외압설에 대해 '종교인이 정치색이 심하다'느니, '모든 걸 버리고

조용히 하라'느니, 따위의 조언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종교적 신성함과 종교적 의미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법정스님이 4대강 사업에 강한 반대 입장을 밝혔던 건 어떨까. 세상에 뒹굴며 세속에서 힘쓰는 게 곧

'더러워지고' '신성함을 해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워낙 관광객이 많은지라, 앞에는 미사를 방해받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성당 가운데쯤 바를 쳐 두었다. 높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정숙하게 걸러진 햇살, 십자가에 집중된 조명, 파이프오르간의 장중한 선율과 울림까지

미사 참여의 목적이 아닌 '구경'의 목적으로 들른 사람들조차 위압한다.


미사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뭔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글로리아, 아멘, 이정도? 근데

말을 못 알아들어도 하울링 심한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신부님의 낮고 단정한 음색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혹은 신성한 느낌이었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그에 비하면 요새 나오는 더미 파이프오르간은 상당히 간소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이다. 애초 천장이 저리도

높고 공간이 넓은 성소를 짓기란 요새 세상에 불가능하니, 파이프 오르간의 성스러운 효과음 역시 시대에

맞게 바뀌어 연출되어야 하는 거다.




베르사유 궁전도 멋지고 중간중간 박혀있는 별궁들도 이쁘지만,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만화책 제목처럼 그

잘 다듬어진 정원이 가장 볼 만한 거 같다. 기하학적인 구조를 감안하고 좌우의 균형을 감안해 다듬어진 정원.

이런 광대한 정원을 돌아보려면 걸어서야 택도 없는 거고, 미니 트레인이던 뭐던 잡아 타야 하는 거다.

게다가 중간중간엔 사람들 발길도 뜸하고 폐쇄된 구역이 있어서, 나처럼 길 잘 잃는 사람은 자칫 어딘가 산속에

홀로 버려진 느낌으로 삼십분쯤 패닉상태에 빠져 사방에 대고 '헬프 미'를 외치기도 하는 거다.;

사람 하나 없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날씨는 어둑어둑해지고 추워지긴 하고, 사방으로 들뛰어보아도 대체

어디로 가야 베르사유 궁전이 나타날지 감도 안 잡히고, 무슨 덫에 갇힌 건 아닌지 계속 같은 곳만 돌고 있고.

길조차 어느 순간 끊어져 발목을 잡아먹는 높이로 잡풀떼기가 자라나 있단 걸 느끼면 문득 두려워지는 거다.

패닉 상태로 거의 울먹울먹한 지경에 이르러 숨이 턱에 차도록 한길로 달리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마주친

너무나도 한가로운 풍경. 저 아저씨는 내가 미쳤거나 누군가에 쫓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어딘가로부터 여기로 들어온 길, 대체 난 어딜 헤맸던 것일까. 아무리 지도를 봐도 각은 안 잡히고, 어쩜

18세기 어디메로 이어지는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그 비밀의 문을 들어섰다 다시 나온 건지도 모른다.

누구도 아니라고, 혹은 맞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순간 하나를 지나친 셈인 거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축축하게 흘러내린 머리도 좀 털고, 옷도 좀 털고. 잘못했음 베르사유에서 불귀의 객이

될 뻔 했다고, 또 인생의 위기 하나 넘겼다고 스스로 다독다독. 에구 대견해라.

벅찬 마음에 불을 질렀던 건 그렇게 삼십분 헤매다가 사람 사는 곳으로 다시 나와 두번째 만난 분이 한국말을

하시는 한국분이셨다는. 방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노라며 흥분흥분하다가 기쁜 맘을 몸으로 표현.

연못에서 노니는 오리들이야 날개가 있어서 여차하면 푸드득 날아오르면 끝이라지만 나야 어디 그런가.

좀 차분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살아나왔다는 기쁨에 급방긋. 여긴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반인이 사는 것을

체험해보겠다며 만들었던 농사짓기 테마파크,

옆에는 포도농장에서 품종별로 제법 기르고 있었다. 여긴 멜롯.

그러다가 마주친 나무들, 왠지 동양식 분재를 한게 아닐까 싶게 다복솔이 나뭇가지마다 얹혔다ㅏ.

그 옆에선 아슬아슬한 가지 하나가 기어이 하늘을 향해 잎사귀를 틔웠고.

베르사유 궁전까지 내처 걸으면서,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을 실감했다. 그래도 화사하기만 한 꽃송이들.

돌아나오던 길, 이렇게 베르사유 궁전에서 근 여덟시간 방랑하며 생명이 경각에 달했던 위기 한번을 무사히

극복하고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는.





베르사유 궁전 중 가장 화려하다는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전 2층에서 내다본 앞뜰의 모습. 반듯하게 각잡힌 연못과 정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14세가 쓰던 침실, 천장에서 길게 내려오는 커튼도 인상적이지만 생각보다 작은 침대 사이즈에도 살짝

놀랐다. 눈파랗고 머리노란 '색목인'들은 모두 몸집이 크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 사실 프랑스인들은 그리

크지 않은 사람들이다.

빗방울이 흩뿌리긴 하지만 화려한 정원 꽃밭의 색감과 조형미에 구질구질함조차 사라지는 느낌.

하악하악, 당대의 '요부' 마리 앙투아네트가 누웠던 침대. 국가간의 정략결혼으로 루이 14세에 '팔려와선'

앙시앙레짐의 마지막 한숨을 몰아쉬곤 프랑스대혁명을 맞아 단두대 위에 섰던 그녀. '요부'라기엔 모든 체제상

에러와 문제점들을 그녀 개인에게 몰아세우는 표현같고, 그저 꿈틀거리는 역사의 피해자랄까.

침실 뒤로 나있는 조그만 저 문을 통해 민중들이 궐기하여 궁을 에워쌌을 때 탈출을 기도했다고 한다. 물론

도망가다가 잡혀서 그들의 화만 더욱 돋운 셈이 되어 버렸지만. 빵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다는 백성들의 하소연에

빵이 없음 케잌을 먹으라 했던가, 그녀는 태생부터 일반인과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있던 고귀한 신분.

신분제가 살아있던 시절엔 딱히 화낼 것도 없는 일이긴 하다, 신분제 자체에 대한 불만이 없다면.

그녀의 방에 놓여있는 그녀 자신의 흉상. 도도한 왕비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는 표정.

어느 벽엔가 그려져 있던 나폴레옹과 그의 아내 조세핀의 대관식. 교황을 제끼고 직접 왕비의 관을 씌우던

나폴레옹의 모습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뭔가 테마전을 벌이는 듯 주렁주렁 매달렸던 빨간 하트. 여전히 미궁 속에 남겨진 저 하트의

정체. 누군가의 Heartbeat를 들려주려는 심장이었을까.

베르사유 궁전은 굉장히 넓어서, 안에서 이런 미니 트레인이 다닌다. 넓은 정원 곳곳에 산재해 있는 조그마한

부속 건물들과 '마리 앙투아네트 전용 농민체험 테마파크', 뭐 요런 것들도 있던 거다.

시간표와 노선도.

양털이 누덕누덕한 양떼들이 무더기로 방목되고 있던 한쪽 풀밭을 지나,

도착한 그랜드 트리아논(Grand Trianon). 루이 14세의 여름별장으로 쓰인 곳이다. 핑크빛 대리석이 화사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바람이 숭숭 통해서 여름에도 굉장히 시원할 듯한 긴 회랑에서 내다보는 정원의 풍경이 멋졌다.

좁고 길어 보이지만 은근히 넓으면서 길었던 회랑. 대리석에서 시원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탁트인 정경. 고풍스런 창문 걸쇠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지금이나 18, 9세기나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

The Grand Trianon을 요모조모 소개해둔 브로셔.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 전체를 소개해둔 브로셔. 마리 앙투아네트 참..어쩐지 병약해 보일만큼 하얗고

여리여리하게 생겼다. 정원이 저렇게 큰데 좀 달리기도 하고 삼림욕도 하고 그러시지 원. 맨날 케잌만 먹은 거다.




파리에서 베르사유 가는 법, 뭔가 여기 적힌 코스가 가장 싸게 먹히는 코스랬다.

이런 표딱지를 썼었는데, 지금은 또 어떨지 확인할 수 없으니 모르겠지만. 혹시 도움이 되려나 싶어서.

한적한 전철 역, 플랫폼 정지선에 맞추어 전철을 기다리는 파리지앵.

파리 외곽의 주택가인 듯. 전철 역 너머로 저런 풍경이 보이는 곳은 서울에도 많다. 국철 구간이라거나.

신기한 2층짜리 전철.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텅텅 비었던 전철 내부.

베르사유에 도착.

공사 중인 곳, 그래서 폐쇄된 구간이 조금 있어서 살짝 실망했지만, 사실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을 이용했던 프랑스 왕조의 복잡한 가계도.

궁전 안엔 알록달록 각기 다른 색으로 꾸며진 방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굉장히 멋진 색감.

베르사유 궁전의 창밖으로 보이는 프랑스식 정원. 빗발이 드문드문 흩뿌리는 흐린 날씨였지만 꽃밭엔 꽃이 가득.
이 곳에서 루이 14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던가. 앞에는 화려한 파이프오르간이 보인다.


2층 드농관

'사모트라케의 니케'. 이 천사는 땅위에 막 내려앉은 걸까, 아니면 막 떠나려는 걸까. 헬레니즘 조각 중 손꼽히는 걸작이라는 이 조각상은 명성에 맞게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밀로의 비너스 역시 넉넉한 공간을 확보한 채 독보적으로 우뚝 선 채 사람들에 포위당해 있었는데, 마찬가지다.

피사체로서 니케상과 적당한 거리를 격한 채 둥그렇게 포위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카메라로 기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살짝 든 생각..니케의 조각상이나 밀로의 비너스 모두, 그 오랜 명성에서 기인한 후광효과라거나, 혹은 전시 방식에 따른 효과, 그리고 정말 미적으로 작품 자체에서 우러나는 효과를 구분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이미 일련의 회로를 따라 미적감각이 유인되고 승인되고, 또 어떠한 감동을 느껴야 할지도 정형화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삐딱한 딴지를 걸고 싶었다. 과거의 가치를 전승하고 위계를 공고히 하는 박물관의 디스플레이 기법, 혹은 필연적인 보수성.

이런 식으로 해 보면 어떨까. 다른 유물들, 예술품들과 차별화되지 않는 식으로 함께 전시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명작으로서의 명성을 갱신하고 가치를 재평가받을 수 있도록 해 보는 거다. 사람들이 단순히 '걸작'이니까 아름답다라거나 뛰어나다라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도록. 스스로 그걸 발견해 내고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도록.

물론 이 작품이 다른 것들에 비해 달라보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별히 섬세하고도 자연스러운 저 옷자락의 율동감이라거나,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아름다운 몸을 가진 인간을 고대로 대리석으로 굳혀 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인체의 비례라거나,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어디로 떠나거나 혹은 막 어디로부터 떠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그 생생함. 힘있게 쭉쭉 뻗는 날개 역시 상상력의 소산이라기엔 너무도 그럴 듯 하게 리얼한데다가 묘한 느낌을 던진다.

사람들이 지쳐 간다. 사실 루브르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은 역시 2층 드농관에 있는 모나리자 등 회화와 3층 리슐리외, 쉴리관에 있는 프랑스 회화들일 텐데, 이들은 무엇을 보며 여기까지 와서 널부러진 걸까. 나 역시도 저기 한 구석에 앉아서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이 점차 뭉글뭉글 부풀고 있었지만 어차피 빈자리도 없다.

제리코가 그린 '메뒤즈호의 뗏목'같은 회화 대작들을 보며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나가다 보니 일종의 '정체 구간'에 들어섰다는 걸 느꼈다. 모나리자가 앞에 있다.

모나리자가 그다지 크지 않은 그림이란 건 알았지만, 저렇게 작은 그림인 줄은 몰랐다. 세로 77cm, 가로 53cm. 온통 모나리자를 위해 열린 공간에 사람들이 그득그득 몰려 있었다. 한걸음씩, 서둘지 않고 내딛으며 모나리자에게 눈싸움을 걸었다.

사람들을 뚫고 맨 앞까지 나아가 한참동안 요모조모 찬찬히 살폈다. 눈, 입술, 얼굴, 손, 좌우 높이가 살짝 다르다는 배경..뭔가 안개가 스멀스멀 신기한 느낌을 자아내는 기법 탓이라곤 하지만, 역시 신비로운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주위에 웅성웅성대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없다면, 좀더 깊이 그 느낌에 젖어들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그치만 굳이 내가 파리에서 봤던 것 중 가장 멋졌던 예술작품을 꼽으라면..역시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중인 모네의 '수련' 연작. ([파리여행] 빛과 바람, 시간에 희롱당하는 수련..오랑주리 미술관.)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의 기법도 신묘하긴 하고, 모델이 된 그녀/그의 웃음도 신비롭긴 하지만, 그냥 난 수련이 더 맘에 들었다.

이런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촛불 시위때 등장했던 '유모차 부대'의 어머니들의 이미지도 왠지 오버랩되었고-맥락이 동일하진 않고 역할 역시 다르다지만-, 가운데 여성의 단호하고 결연한 표정이 가슴을 흔들었다.

그런가 하면 이런 평화롭고도 달콤한 풍경..화환을 만들어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삼아 기대 쉬고 있는 아가씨에게 씌워주려는 남자. 여성의 분홍빛 뺨과 발뒤꿈치가 앙증맞다.

레오나르도의 또다른 그림, '두 명의 성녀와 아기 예수'.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이라는 논문에서 이 그림이 그의 성적인 배경이라거나 어릴 적의 기억, 보다 정확히는 어머니에 대한 금기된 욕망을 해소하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이 그림에서 발견된 '독수리'의 형체가 레오나르도가 종종 사로잡혔던 '독수리'의 환상이 반영된 것이라 말하며 이런저런 성적 욕망으로 읽어내는데, 저 그림 속 파란 옷자락이 바로 그 형체라 한다.
한참동안 그림 앞에 앉아 대체 어디에 독수리가 있는지 찾고 있을 때, 마침 옆에서도 유럽인 커플도 그 이야기를 하며 새를 찾고 있었다. 그들도 프로이트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 새를 찾아내려 하고 있었던 게다. 우리는 한동안 대체 새가 어디에 있을지, 머리가 어디고 꼬리가 어딘지 뚫어져라 그림을 바라보았었지만 결국 그들은 포기하고 모나리자에게 가버렸댔다. 난, 내가 찾은 저게 아닐까 싶은데..모르겠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어귀에서 바라본 루브르 궁전. 그 중에서도 팔레루아얄 뮤제 드 루브르 메트로 역과 인접한 리슐리외관. 사람드이 이제 조금씩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다들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다른 곳에 가서 파리의 야경을 감상할 생각이겠지. 난 이제 9시쯤까지만 3층 회화를 둘러보면 되니, 한결 여유로워졌다.

멀리 보이는 카루젤 개선문의 연한 핑크빛 대리석이 단정하고 따스한 느낌이다. 그림자가 잔뜩 길어진 저녁무렵.

3층 쉴리관

앗..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랬다. 이건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에 있던 도록에 포함되어 있던 그림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누나 또래라 생각하며 감상했었고, 조금 크고는 비슷한 나이대라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예기치 못하게 다시 만난 그녀는 이제 여동생이겠다 싶다. 하아....예술의 불멸성이란. (여전히 이 작품의 이름과 작가 명은 모르고 있다.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시길..ㅡㅡ;)

정말 발을 질질 끄는 수준이 되어 가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을 걷기 시작한 지 거의 8시간여..4층의 회화 중에는 익히 알고 있는 것들도 많았고,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대작들도 많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댈 기력이 쇠해가고 있었다. 사실 속으로는 얼른 다 보고 나가서 좀 쉬자, 란 느낌도 없지 않았고, 또 한켠으로는 좀만 더 버티고 여유롭게 보자..언제 또 루브르 오겠냐..란 오기도 있었고.

그 중 이 그림은 지친 발을 좀 오래 쉬게 할 만한 유인이 되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 파스텔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런지 색채가 부드러우면서 풍요한 느낌이 들고, 또 그러면서도 무지 세밀하고 섬세한 묘사를 해냈다는 점에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모델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루이 15세의 애첩이었고,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그녀는 당시 사교계의 여왕이었다고 한다. 그랬을 거 같다.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잃지 않았고, 정숙해 보이는 듯 하지만 일변해 요부스러움을 과시할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표정이다.(딱 내 이상형이다..ㅡㅡㆀ)

3층 리슐리외관에서는 루벤스의 대작들도 감상하며 파트라슈와 네로를 생각했고, 다른 고전파 화가들의 회화를 둘러보았다. 약간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지만 역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려면 오르세 미술관을 가야 한다는 말이 맞지 싶었다. 그리고 난 이제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보니 심각할 정도의 악취와 함께 거대한 물집이 생겨 있었다.

뭐...저렇게 아름다운 루브르 궁전의 야경을 앞에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이제 박물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고, 시간도 거의 9시에 육박해 가던 시간에 난 루브르 박물관 10시간 산책 대장정을 마칠 수 있었다. 아직 문이 닫히기 전까지 시간은 좀 남았고, 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을 다시 한번 찾아가 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으레 전시회 같은 곳에 가면 내가 취하는 코스가 그렇기도 하다. 우선 한번 쭈욱 둘러보고, 그다음엔 맘에 들었던 작품 몇 개를 찾아가 다시 한번 감상하는 것.

3층에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다시 만나고, 루벤스의 그림들을 다시 보고, 2층으로 내려오며 니케를 다시 만났다. 조금 사람이 적지 않을까 해서 모나리자를 만나러 갔더니 거긴 암만해도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빠질 생각이 없나 보다. 여전히 시끄럽고 웅성웅성 소리가 울려서 잠시 후에 나왔다. 소란스러움을 피해 제리코의 '메뒤즈호의 뗏목',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식', '나폴레옹 1세의 제관' 같은 것들을 다시 둘러보던 중, 박물관의 폐문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9시 반 루브르 OUT. 정말 지쳤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발에서 은은하게 떨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은 소슬한데 루브르의 야경은 왠지 눈물겹도록 따스해서, 왠지 미친듯이 센치해져서 순간 마음의 갈피를 잃었다.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그 공간의 넘치도록 풍요한 감성과 자극들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배가 차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없이 노틀담을 향해 걷다가 예술의 다리를 지나게 되었다. 사람들이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노는 걸 보고 있자니, 왠지 배도 고프고 가슴도 고프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완전 한국의 가을 날씨였고, 루브르를 나서며 순간 난 '가을'을 탔던 것 같다.





1층 리슐리외관

이 영악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그렇지만 뭐든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 그야말로 사랑의 신이 가져야 할 법한 눈빛이다. 날개달린 어린 아이로 표현되어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근방을 맴도는 사랑의 신, 큐피트는 수많은 그림과 조각에서 묘사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 내 맘이 쏙 드는 표정이다. 아이처럼 여리고 부드럽고, 순수한 몸이지만 그 눈빛과 입가의 웃음은 왠지 조금 악마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조용히 하라며 오른손가락을 입술에 대곤, 왼손으로 슬몃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아드는 순간. 큐피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빛으로, 혹은 뭔가 재미있는 일을 잔뜩 기대하는 장난꾸러기의 표정으로 '사냥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신화의 어느 대목인 걸까. 뭐...뒷켠에서는 옷을 벗고 있는, 혹은 입고 있는 여성의 조각상도 보이고, 이 남성을 보면 '크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온통 세계 최고, 최대를 지향하고 선전하기에 바쁜 못난 사람들도 좀 맘의 안식을 찾으려나.

2층 리슐리외관

리슐리외관 2층에는 나폴레옹 3세의 살롱과 회랑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나폴레옹 3세가 궁전으로 썼던 리슐리외관을 1993년에 미술관으로 바꾸면서 옛모습 그대로 남겨놓은 공간인 듯 싶다. 이런 화려한 '프랑스식' 궁전은 이미 터키에서, 또 태국에서도 봤던 거지만, 그 오리지널 버전인 거다.

샹들리에에서 노랗게 빛나는 불빛, 그 아래 반사광을 번뜩이며 가지런히 정렬된 소품들과 의자들. 원래는 이렇게 거무죽죽하게 죽은 색감이 아니었는데 아쉽다.

신기하게 생긴 의자. 세명이서 서로 뒷사람 등을 슬쩍 바라보며 앉아있을 수 있는 소용돌이식 의자라니, 서로 대화하기는 쉽지 않겠다. 셋다 목을 오른쪽으로 살짝씩 틀면 어쩜 셋이 마주보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으려나. 실제 앉아보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이녀석과 나 사이에는 출입을 금지하는 바가 설치되어 있어서 포기.

이런 색감인 거다. 화려하게 발색한 자줏빛 벨벳에, 황금빛이 은은하게 머금어져 있는 밝고도 따뜻한, 사치스럽지만 우아한 분위기.

비록 샹들리에에 꼽힌 초들이 전구꼽힌 짝퉁이라 해도, 그래서 바람에 펄럭이며 살아있는 듯 너울지는 불빛과 그림자의 신비로움을 머금고 있지는 못하다 해도, 온통 돋을새김된 조각들과 무늬들은 그 빛을 당당하게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살아있는 촛불과 달리 이렇게 멈춰지고 굳어져 버린 느낌의 전기불빛이 비춰진다는 건, 생활의 영역에서 떨어져나와 유리관 안에서 '보존'되는 박물관에 딱 어울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림과 조각으로 디테일한 공간마저 가득 채운 궁전.

2층의 리슐리외관이 끝나갈 무렵, 어느 방에 내려뜨려져 있던 본격 전기불빛 샹들리에. 만월들이 둥실둥실 떠있는 느낌.

2층 리슐리외관에 있던 자그마한 카페. 유리 피라밋 너머 드농관이 보인다. 애초 1980년대에 유리 피라밋의 건설을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토론을 불러일으켰다지만, 결국 루브르 궁전과 유리 피라밋의 안 어울릴 것 같던 조합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여기서 눈여겨야 할 것은 '결국' 끝이 좋지 않냐..라는 게 아니라, 그 건설을 둘러싸고 진행될 수 있었던 질긴 찬반토론, 혹자는 그 소란스러움과 유난스러움이 싫다고 할 지 몰라도.

작동을 멈춘 분수대 옆에서 서로 기댄 한 커플도 키스 상태로 멈춰 있었다. 오랫동안.

2층 쉴리관

대체 이집트인들은 얼마나 많은 유물을 남기고 있는 걸까. 이 곳의 있는 이집트 유물들도 카이로 박물관 못지 않게 많다. 물론 박물관 내에다가 디스플레이 따위 상관없이 빼곡히 좌판처럼 바닥에 벌려놓은 거기만 하겠냐만, 보면서 놀라게 된다.

관 안에 모셔진 망자가 여전히 밖의 세상을 지켜볼 수 있도록, 자신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도록 관 외부에 그려진 두 개의 눈동자. 이집트에 가서 만들어온 반지에 있는 '호루스의 눈', 바로 그거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아로새겨진 '절대반지'.)

아네모피스 4세, 아케나톤의 거대했을 인물상이 일부만 남았다. 다소 그로테스크하게도, 뒷머리 부분이 예리하게 떨어져나갔다. 표정이며 풍채가 뭔가 범상치 않다는 느낌을 한웅큼 안겨 주지만, 뱀처럼 길게 찢어진 눈에 뾰족함이 강조된 턱이 그다지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다.

이집트 미술이 전시된 공간을 허위허위, 그렇지만 쉼없이 내딛다가 여기서 비로소 한번 멈췄던 듯 하다. 저런 색감의 조각은 이집트에서도 못 봤었다. 무지 현대적이란 느낌을 주는 색감이면서 눈에 탁 띌만큼 청량한 색이라고 생각했다. 온통 칙칙하고 퇴락한 색만 드문드문 발려있던 유물들 사이에서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2층 드농관

2층 드농관에서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영국의 회화 및 19세기 프랑스 회화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워낙 유명한 대작들이 많아 루브르에서 가장 혼잡하다고 이야기되는 곳이기도 하단다. 그 곳에서 문득 내 눈에 들어왔던 회화가 한 점 있었다. 투구를 차려입은 신에게 알몸으로 달려가 뭔가를 호소하는 듯 간절한 여인. 그리고 그 뒤에 백발성성한 노인은 보디빌더처럼 근육이 잘 새겨진 몸뚱이를 갈색 날개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다.

이건...무슨 제스쳐지...? 님좀짱인듯? 니가 짱 먹어라? 이 무렵의 그림은 문자나 텍스트, 혹은 이야기를 직접 그림 속에 풀어넣었다고는 하지만, 저 번쩍 치켜든 엄지손가락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앞쪽에서 갑자기 출현한 일군의 관광객들이 무시무시하게도 거침없는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별로 반갑지도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아는 척 하고 싶지도 않아서 잠시 조용히 창밖의 프랑스 정원을 내다보며 앉아 쉬었다. 중간중간 앉아서 쉴 만한 곳들을 많이도 만들어놨다. 6시간쯤 넘게 계속해서 걷고 있던 상황이어서, 한번 앉으니 발가락들이 아우성친다.

저녁도 먹어야 할 텐데, 일단 2층까지 다 돌고 내려가서 카루젤 개선문 옆의 PAUL에서 빵이랑 에스프레소로 때우기로 했다. 따져보니 대략 예정대로 잘 오고 있다. 딱히 주마간산 격으로 대충 봤다는 느낌도 없고, 인상적이었던 작품 앞에서는 한참을 빙빙 돌며 구경도 하고, 잠시 앉아서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10분 이상 앉아서 쉰 적은 없으니 발이 완전히 욱신거리며 어딘가 물집이 잡혔노라고 항변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만족스럽다.

그리고 일어났더니, 발이 약간 질질 끌리는 느낌이긴 하다..

기다란 회랑, 그리고 천장과 벽면을 모두 모자이크하듯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회화들과 그림들 간의 구획을 지어주듯 구불구불거리며 온통 휘감고 있는 황금빛 장식들. 한 6시간쯤 계속해서 보다보니 이제 살짝 무감각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뭐 멋진 건 멋진 거다.

루이 15세가 대관식 때 썼던 왕관이라고 한다. 물론 왕관을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루비 같은 호사스런 보석들로 충분히 반짝거리기는 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뭘까 생각해 보니 그런 거다. 왕관만 덩그마니 있으니 좀 부족해 보이는 거다. 그 화려한 복식과 다른 장신구들, 왕홀 같은 것들이 함께 하지 않아서야 역시 좀 볼품이 떨어진다.





루브르 박물관에 입장하려는 관광객들이 하도 많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던 터였지만, 막상 오전 11시 반쯤 도착한 루브르 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다만 입장권 구매 창구를 몇 개 닫아놓은 데다가 느긋하기만 한 매표원들의 행동에 마음이 조금 답답했을 뿐이었다. 9유로의 입장권, 그리고 최근에 대한항공이 협찬하여 생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대여에는 5유로. 그냥 입장권만 구매했다.

# 루브르 박물관 "열시간 산책 대장정" 전략.

반지층 쉴리관

이곳부터 시작했다. 루브르 궁전의 역사적 변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전시물들이었다.

루브르 궁전의 원래 모습은 내성, 외성에 해자까지 파여있는 요새 모양의 성이었다고 한다. 윗 사진이 바로 그 때의 모습을 추정 복원한 것일 텐데, 작은 창문에 폐쇄적인 성곽 형태가 아주 단단해 보인다. 공사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는 이런 옛 자취들, 지금의 모습과는 영 딴판인 이런 모습을 보면 이곳도 꾸준히 전란이 이어졌고, 짓고 허물고 다시 짓고 허물어졌던 그런 땅이구나 싶다.

이 동서 1km에 이르는 거대하고도 우아한 궁전의 지하에서 발견된 과거 성벽의 유적들. 루브르 궁전, 아니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발견한 유물은 그래서 바로 루브르의 옛 모습이었다.

반지층 리슐리외관

이어진 길을 따라 리슐리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반지층이라곤 하지만 평탄한 하나의 공간을 쓰는 게 아니라 반층 높이만한 계단도 있고 해서, 길을 어찌어찌 좇다가 보면 어느새 리슐리외관 1, 2층까지 오르내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완전히 루트가 엉망이 되겠다 싶어서, 차분히 다시 바닥부터 훑기로 했다. 급하게 할 건 없고 아까부터 눈을 끌던 조각들이 보이던 탓이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건 내가, 혹은 상대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포즈로 서있는 사진을 찍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렇게 서로 마주보며 공이나 창이라도 던졌는지, 뭔가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는 이 두 조각상 사이에 내가 서 있다 상상하며 사진을 남겼다.

리슐리외관 천장, 그니까 루브르 박물관(혹은 궁전)의 천장은 일부 저런 식으로 자연채광을 위해 뚫려 있었다. 컴컴하던 쉴리관의 중세 루브르 유적과는 달리 화사한 햇살 아래 유백색 대리석 조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광경은 역시 루트 따위, 9시간 주파 의지 따위 잊어버리게 만든다.

이 청동조각은 아마도 큰 뱀을 잡아죽이는 헤라클레스? 제목을 유념해서 살피긴 했는데, 그걸 다 기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녀석은 저 뱀의 생생한 피부질감의 묘사라거나 눈알의 섬뜩함, 그리고 다른 박물관에서 보던 여느 대리석상들의 남근이 대개 애매하게 뭉개져 있는 것과는 달리 당당했어서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곳의 대리석상들은 상당수가 제대로 된 남근을 소지하고 있었던 게 눈에 띄었다.

'크로톤의 밀론'이란 작품이랜다. 작가는 피에르 퓌제. 관람 안내문에도 표기된 작품인 걸 보면 뭔가 대단한 작품인가 본데, 내가 굳이 이걸 사진으로 남긴 건 왠지 우스꽝스러워서였다.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

반지층 드농관

유리 피라밋을 중심으로 하여 세개의 건물동이 피라밋의 세 모서리를 바라보고 선 형태다. 매표소는 바로 그 유리 피라밋 아래에 있는데, 일단 티켓을 사고 나면 당일에는 몇 번이던 들락날락할 수 있다. 리슐리외관과 마주본 드농관으로 가기 위해 리슐리외관 출구로 일단 나와 매표소를 지나 드농관 입구로 들어갔다.
'성 막달라 마리아, 16세기 에르하르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 관련 예술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거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것일 텐데, 게다가 그녀의 성스러움과 고귀함, 거룩함을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게 상례라는 점에서 이건 특이하다 싶었다.

'거리의 여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라니. 게다가 저 새침하고 도도한 표정과 몸에 배인 듯 자연스러운 유혹적이고 도발적인 자태, 탐스럽고 구불구불한 긴 머리가 그녀의 벗은 가슴을 지나 음부에까지 교묘히 가려진다. 이뻐서 한참 이리저리 뜯어보았더니 살짝 우울해하는 듯한 그녀가 숨어있었다.

11-15세기 이탈리아 및 스페인 조각이 전시된 이 부근 공간에는 온통 그리스도교 관련 유물들이었다. 십자가상에, 피에타상에..처녀 혹은 아주머니와 아기 하나. 그 소재로 수세기 동안 무궁하리만치 다양한 표정과 구도, 자세를 표현하고 있었달까. 이 '성 막달라 마리아'만큼 인간적인 표정과 분위기가 어린 것 없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청순, 요염, 새침, 푸근, 센치한 '여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 이제 반지하층에서 1층의 드농관으로 올라가는 길. 계단 어디메쯤에 있는 궁전의 장식품이던가, 아님 반지하층의 전시품 중 하나던가, 흉상이 루브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긴 이 건물 안의 모든 것들은, 한때 궁전의 장식품이었던 것들을 포함해 모두 박물관의 전시품 아니겠는가. 이곳은 약 30만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 3대 박물관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궁전에 미술관이 처음 생긴 건 프랑스 대혁명기인 1793년, 왕실이 수집한 미술품들이 왕가만을 위한 소장품이라는 비판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비판이지 않을까. 그때의 혁명적 의식과 기풍이란.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왕'이 있었기에 왕의 목을 베었지만, 만약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이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대통령의 목을 베어냈을 거다.

1층 드농관

뭐더라..저 여자는 아마 월계수가 되고 남자는 그 월계잎으로 승자의 관을 씌워주는 아폴로였을 거다. 아폴로가 큐피드에게 잘난 척하다가 그의 화살을 맞고 저 강의 신 따님이신 여자를 죽도록 스토킹하게 되고, 그녀는 또한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무작정 피한다는 슬픈 어긋남의 이야기. 그녀는 싫다 하고, 그는 좋아한다 한다.(그렇다고 보기엔 남자의 눈빛이 열에 들뜨다 못해 잡아먹을 듯이 사나워져 버렸다. 욕정의 개입일까.)

그리스로마 신화란 게 생각해 보면 죄다 유괴, 강간,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그런 거다. 그만큼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날것의 이야기란 뜻일까. 에로스만 과잉확대시킨 에로스박물관이나 섹스샵이 아니라, 이런 감정을 담아낸 예술작품에서 더 제대로 에로스를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신의 키스로 소생된 프시케'란다. 카노바의 작품. 유백색 대리석의 매끈함과 찰진 느낌이 그대로 프시케라는 여인과 천사의 몸으로 이어진다. 저 절묘한 자세하며, 그럼에도 흐트러짐없는 인체의 비율이나 자연스러움하며.

하아..그냥 딱 보면, 딱 이뿌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오바스럽지 않을 만큼.

그리스의 신들을 나타내기 위한 표징으로, 대리석상에는 뭔가 그들의 스토리 중 한 장면이 연출되거나, 양손에 상징물을 쥐고 있거나 한다고 한다. 부엉이를 쥐고 있는 이 신은 그렇다면 아테네, 미네르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갯짓을 한다. 그치만 저 부엉이는 왜 저렇게 (귀엽긴 하지만) 엉성하게 조각된 느낌이 드는지. 동그란 원통형 몸에다 날개 두개 대충 만들어 꽂아넣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내려보고 있는 여신의 저 퉁명스럽고 냉소적인 눈빛. 미네르바를 잡아넣은 그들의 눈빛이고 그들의 움켜쥠처럼 느껴지는 건 과잉한 반응인 걸까.

1층 드농관에서 쉴리관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던 화려한 회랑. 천장화에 나온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감별하며 걷자니 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식의 무늬와 조각이 지금 생활에서 쓰여진 곳을 찾으라면 아마 뭔가 촌스럽게 키치화된 사진 액자나 그림 액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거 같다. 그렇지만 회랑의 천장부는 황금색의 현란함과 빼곡하게 채워진 문양들, 조각들에도 불구하고 과하다라거나 천박하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물론 그건 이 건물 자체가 이런 화려함과 과한 문양들로 그득한 일종의 '테마 파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1층 쉴리관

이건 뭔지 한눈에 알 거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렇지만 정작 실물은 처음 보는 '밀로의 비너스'. 뭐랄까, 초등학교 때 첫사랑을 나이 서른에 만난 느낌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반가우면서도 낯설고 어색하고, 내가 알던 그사람이 이사람 맞는지 싶기도 하고, 그런 느낌이었다.

역시 난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밀로'는 그녀가 발견된 지역의 이름, '비너스'라곤 하지만 사실 그녀의 양손이 부러져 있어서 특징을 밝혀줄 징표가 사라진 탓에 정체는 불확실하단다. 손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지, 그렇게 그녀는 어떤 포즈를 결국 취하고 있었던 건지, 살짝 주춤한 골반과 모델의 워킹인 듯 율동감이 느껴지는 두 발의 실루엣..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내 상상 속에서보다는 훨씬 남성스럽고 강인해 보였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오똑한 코는 살짝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고, 다소 심술스럽게 앙다문 입술이나 이마의 생김이란 건 왠지 '이터널 선샤인'쯤의 케이트 윈슬렛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그늘이 지면 식스팩이 살짝 비치는 저 배는 대체...남성의 배라고 해도 믿겠다.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 유물. 봉긋한 배와 다소 도식적이지만 끝이 돌돌 말린 머리모양에서 여성스러움이 묻어난다. 물론 좀 딱딱하고 엉성한 신체 묘사는 비너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왠지 비너스의 몸은 (이뿌지만) 거구의 여전사나 남성의 몸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더욱 대비되는 듯 하다.

이곳의 유물들은 역시 카이로 박물관, 혹은 룩소의 '왕의 무덤'이나 '귀족의 무덤'群을 따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볍게 돌아보곤 빠져나왔다.

고대 이란의 '아파다나 궁의 기둥머리'랜다. 이런 기둥머리가 수십개가 열을 짓고 늘어서 건물을 받치고 있었을 텐데, 그 규모가 얼마나 웅장했을지 모르겠다. 아마 거대한 기둥들이 백 몇개씩 빼곡히 늘어서 있던 이집트 룩소르사원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1층 리슐리외관

1층 쉴리관에서 리슐리외관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창밖으로 내다본 루브르의 프랑스식 정원. 깍듯이 정돈된 초록빛 덤불이 구획을 짓고 있는 사각 공간 정원이란 건 루브르 궁전의 반듯한 외양과 잘 어울린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에서 철푸덕 주저앉아 스케치 연습을 하고 있는 프랑스의 아이들. 이런 광경은 사실 어느 미술관에서나, 어느 박물관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아이들도 이런 식의 체험학습(이랄까)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익숙해 보였고, 비록 잘 그리진 못해도 뭔가 펜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이건 아시리아 제국의 사르곤 2세 궁전의 일부를 아예 통째로 복원해 놓은 전시관이었다. 궁전의 입구 한 면을 장식하는 유물들을 원래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드문드문 배치해 놓았고, 무엇보다 입구 양옆에 버티고 선 이 반인반마의 괴수 두 마리의 위압감이 대단했다. 잘못하면 저 뾰족하고 단단해 보이는 발굽으로 뻥, 하고 걷어차일 듯한 압박감.



'다빈치 코드'의 배경이 되었던 교회이자, '사디즘'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마르키 드 사드, 또 보들레르가 세례를

받은 곳이 바로 이 곳, 생 쉴피스 성당이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나. 그렇지만 그런 식의 사이즈 과시에는 별 관심도 없었고-사실 다녀온 후에야 알게 된 정보들이다-게다가

내가 갔던 작년 9월에는 한창 가림막으로 온통 둘러친 채 공사중이었다.


그래도 앞에 있는 거대한 분수 조각상이 꼭 맘에 들었었다. 묽은 초코렛이 흘러내리는 이층 케이크처럼, 보드라운

물살이 층층이 흘러내리는 그 멋진 광경, 그리고 그 소란스럽지만 유쾌한 분수대를 향해 둥그렇게 자리잡은 온갖

그림쟁이들. 그림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인지, 단순한 취미로 그리는 사람인지 일군의 사람들이 그렇게 분수를

꼬나보며 살짝 인상쓰고 있는 풍경에 나도 녹아들고 싶었다. 그림을 배워보고 싶단 생각이 살풋.

생제르맹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파리의 날씨란 게 워낙 햇빛도 귀한

데다가 날씨도 대개 꾸물꾸물하기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갑작스런 비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더러는

저렇게 의연하게 비를 맞으며 가던 길을 가고, 더러는 잠시 근처 까페에 앉아 비를 긋기도 하고.

비 내리는 풍경을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김한길의 소설에서 얼핏 본 구절인 듯 한데,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조금씩 더 착해 보인다는 느낌. 수천년동안 인류는 비를 맞아왔지만 여전히도 비를 긋는 장비라곤 얄포름한

비닐 조각 하나에서 크게 진보하지 못했다.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살짝 '어쩔 수 없다'는 체념어린 표정을 지으며 거리로 나선다. 서울에서도, 파리에서도.

부슬부슬 내린 비였는데, 친구와 맥주 한잔 하며 돌아본 거리는 어느새 흠뻑 젖어서 번들번들거릴 정도다.

생제르망 거리면 나름 한국의 대학로에 비길 수 있을까, 번화가라긴 뭣하지만 그렇다고 고즈넉한 교외라거나

외곽지역은 분명히 아닌데...쏴아 내리붓는 빗소리에 묻혀 외려 조용해진 거리.

나서기로 했다. 금방 그칠 비는 아닌 거 같아, 우리도 의연히 저 비맞고 다니는 사람들의 대오에 합류하기로 결정.

가게의 처마 끝에서 똑, 똑,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을 포착하고 싶었는데 왠 의식치 않은 아가씨의 뒷모습만

도촬해 버린 사진이 나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노프리(MONOPRIX)'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더랬다. 외국의 마트를 돌아보며

한국에서 못 본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당장 쇼핑한 물건들을 담는 바구니부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바퀴달린 바구니에서 길다랗게 손잡이가 당겨져 나오는 형태, 무식하게 큰 카트를 끌 필요도

없고, 무거운 바구니에 절절 맬 필요도 없고.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다가 설렁설렁 팡테옹까지 걷기로 했다. 가는 길에 마주친 프랑스

교육의 중심지라는 소르본 대학 건물群. 이젠 소르본대학이 아니라 파리 제3, 제4대학이라 불리는 것들이 이곳에

있다지만, 마치 두터운 성벽처럼 온통 외부인을 막아선 문들 뿐이다. 목이 말라 1.6유로짜리 맥주 캔 하나 사들고는

홀짝대면서 이리저리 빈틈을 찾다가 결국 청소부 아저씨들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일하는 곳을 찾아냈다.


마치 학생인양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더니 어라, 대략 통한다 싶다. 그렇지만 안마당에 들어서서 잠시 발걸음이

헤매는 걸 눈치챈 아저씨가 불러내길래 잠입 실패. 조용히 내부만 한번 둘러보고 싶었을 뿐인데, 방학 중에는

외부인에 닫혀 있댄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눈 앞에 덜컥 나타난 팡테옹. 소르본 대학이 자리한 거리인지라 대체로 건물들이 크고 높았기에

그다지 팡테옹의 커다란 돔이나 쭉쭉 뻗은 대리석 기둥이 위압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렇지만 이곳 역시 파리의

시내 전경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높고 유명한 곳이랜다.

마침 내가 갔을 때엔 에밀 졸라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양심으로 추앙받는 에밀 졸라,

그가 묻혀 있는 납골당이 바로 이 곳이다. 팡테옹, 고대 로마의 만신전을 의미한다는 이 이름에 걸맞게도

이 곳은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들이 안치되어 있는 거대한 납골당인 거다.

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공간이 하나 있고, 벽면에는 온통 대리석 조각들, 그림들, 그리고 벽화들이 즐비하다.

한면에는 마치 성당의 제단이나 모스크에서 메카의 방향을 나타낸 제단과도 같이 움푹 들어간 둥그런 공간에

누군가의 대리석 조상이 숱한 군상들에 떠받들려 있기도 했다. 천장의 돔에서 쏟아져내리는 태양광, 그리고

천장 주변에 그려진 황금빛 벽화들은 왠지 성당과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지만 이 공간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닌, 프랑스의 위인들을 위한 공간. 만약 한국에 이런 거대한 납골당을 만들어

한국의 위인들을 안치한다고 하면, 대체 누가 '입소'할 수 있을까. 여전히 뜨끈뜨끈한 현대사의 해석과 평가 문제도

문제려니와, 어떤 분위기의 납골당이어야 할지도 시비거리일 거다. 최근 들어 고조되고 있는 종교간의 갈등도

고려컨대, 그 납골당은 연꽃, 십자가, 만자, 혹은 '마늘과 쑥' 등등 온갖 종교적 상징과 이미지들이 몽창 소거된

두터운 콘크리트 벙커같은 이미지여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치명적으로 휑뎅그레할 '공실률'도 문제일 게다.

푸코의 진자 실험이 진행된 곳이 여기랜다. 실제 실험이 수행되었던 순간을 촬영한 영상이 한쪽에서 끊임없이

반복 상영되고 있었고, 저 금빛 진자는 계속해서 무언가 궤적을 종횡으로 그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푸코의 진자

실험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난 그저 그 실험이 진행되는 장면을 지키고 선 듯한 저 이집트틱한 고양이상이 반가웠을 뿐.

지하로 내려가면 온통 묘소 일색이다. 밝은 회색의 석재 관짝이 좌우로 즐비하고 다소 침침한 조명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터키에 갔을 때 거대한 기독교도들의 지하묘지를 봤었는데 거의 유사한 분위기다. 그러한

지하묘소를 카타콤(Catacombs)라 한다던가. 프랑스의 혁명가 마라, 철학자 볼테르, 루소 등 70여명의 학자, 군인,

정치가 등이 묻혀 있고, 아직 250여명은 더 묻힐 공간이 있다고 한다. 훗, 왠지 이곳도 공실률이 꽤나 높군.


꼭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용해야 할까, 사실 뭔가 경건한 분위기여야 했겠지만 그다지 난. 솔직히

좀 기괴하고 집요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프랑스를 위해 사후의 평안마저 갈취당했다면

심한 표현일까.

매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50여명씩 돔에 올라갈 수 있댔다. 바로 이 위가 파리의 멋진 시가를 조망할 수

있다는 거대한 돔이 세워져있다는 곳. 애초 파리의 온갖 전망대 중에서 에펠탑, 개선문, 그리고 팡테옹의 전망이

개중 훌륭하다고 들었던지라 얼른 돔 탐사조에 합류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꼬불꼬불 지나고 나니 어느새 팡테옹 옥상 쯤에 다다랐다. 돔에 훨씬 가까이 온 셈인데, 가까이

접근해서 바라본 돔은 한눈에 담기 버거울 정도로 거대했다. 살짝살짝 이가 어긋나 보이는 돔의 기둥들이 다소간의

긴장감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이미 옥상에서 바라본 전망만으로도 이렇게나 멋져서 돔까지 얼른 올라가고 싶었다.

팡테옹의 지붕과 근처 건물들의 옥상들이 그려내는 울룩불룩한 감촉의 마천루 위로 솟아오른 에펠탑과 앵발리드.

생테티엔 뒤 몽 교회라던가, 파리의 수호 성녀인 성 주느비에브를 기리는 성당이라고 했다. 우리를 안내했던

팡테옹의 담당자는 자신의 엉덩이에 코를 묻을 만큼 바싹 뒤를 쫓는 내게 쉼없이 파리의 풍경에 대해 설명해주고

싶어했다.

마침내 올라선 돔 내부는 한바퀴 빙 둘러 걸으며 파리의 전경을 360도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는데, 이 정도 높이면 에펠탑 2층전망대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저 멀리 야트막한 구릉이 아마

몽마르뜨 언덕이 맞나..잘 모르겠지만 만약 맞다면 그 위에 섰을 사크레 쾨르 성당의 하얀 빛까지는 안 보인다.

우뚝 선 몽파르나스 타워가 보이는 이 곳은 파리 시내의 남쪽 풍경. 지붕들의 독특하고 고풍스런 장식과 윤곽들을

시선 끝으로 하나씩 쓰다듬듯 따르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루브르 궁전이 늘어선 회랑이 보인다. 파리라는 도시의 오랜 역사를 실감케 해 주는 건 역설적이게도, 이런 식으로

고풍스럽고 장식적으로 보이는 지붕들인지도 모른다. 저 지붕들 자체야 몇백년이나 헤아릴 수 있겠냐만은, 저런

과거의 것들이 여전히 지금 현재에도 실생활과 함께 한다는 건 구호로만 요란한 600년짜리 도시네 어쩌네보다

훨씬 강력하게 '오랜 역사'를 증거하는 것 같다.

바싹 땡겨서 찍어본 에펠탑과 앵발리드의 금빛 돔. 낮에 바라보는 에펠탑의 저 갈색 빛깔은 왠지 맛있게 타진

프림커피 같기도 하고, 세련된 빛깔로 녹이 슨 황동제 장식품같기도 하고.

돔의 원형 통로. 50여명이 우르르 돌아다니는데도 전혀 인구밀도가 높다는 느낌 따위 없을 정도로 생각보다

폭도 넓고 길었다. 에펠탑이나 개선문 위의 전망대와는 달리 강건한 느낌의 기둥 사이로 내다보이는 파리의

전망이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내려오려는데 왠지 아쉽다. 조금 남아있다가 내려가면 안되냐고 물어보니, 안전상의 이유로 다함께 올라오고 또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못들은 척 미적거리다가 맨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등 뒤에서 잠기는 만만찮은 두께의

철문, 그렇게 팡테옹 돔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러고 보면 좀 찝찝한 감이 남았다. 거대한 납골당에 안치된 프랑스의 위인들을 밟고 서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굽어본 셈이랄 수도.

푸코가 1849년 이곳에서 진자를 매달고 흔들면서 수행했던 실험은 돔의 높이를 이용해, 지구의 자전을 세계 최초로

실증한 실험이라고 한다. 글쎄. 이과 쪽 학문에 약한 나로선 당췌 들어도 모르겠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랑주리 미술관은 한국인들보다 일본인들에 훨씬 유명하고,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실제 내가 갔을 때에도 한국인은 혼자인 듯 했고, 동양인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글쎄..한국어 가이드북에 오랑주리

미술관의 비중이 그리 크게 나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


나 같은 경우는 파리에 가면 끌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을 꼭 보라던 이야길 듣고 이미 잔뜩 혹해 있었어서, 한 번

문닫는 날 찾아가선 좌절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찾아갔댔다.

튈를리 정원 내에 있달까, 다른 건물들과 다소 외떨어져선 세느강변을 내려보며 서 있는 날씬한 느낌의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지하에 전시되어 있던 건 자그맣게 축소된 형태의 누군가의 서재. 책들이 가득한 방의 네면 그득

한눈에도 익숙한 혹은 전혀 낯선 그림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나도 나중에 저런 서재 하나 갖고 싶단 생각 뿐.

누군가의 서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한데, 누구였을까. 아마 오랑주리 미술관의 컬렉션이 원형이 되었다는

폴 기욤의 서재였을까. 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이자 화상으로 어마어마한 컬렉션을 모았다고 했는데, 난 굳이

진본 작품을 걸지 않고 복제판 작품을 걸어도 마냥 뿌듯할 거 같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 시뮬라르크가 대세다.)

나중에 내 방엔 르누와르, 수틴, 모네의 그림을 꼭 걸어놓아야겠다고 다짐다짐.

오오...1층에 올라가면서 왠지 모를 신비스런 느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얀빛의 정숙한 통로를 따라 오르는데,

무슨 현대식 신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그 통로 끝에서 나를 맞이했던 끌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들.

압도당했다. 루브르박물관에서 보았던 다빈치의 그것들, 심지어 모나리자보다도 감동적이었다.


타원형 방 안에 기이일~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네 장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타원형 방이 두개 서로

연결되어 총 여덟 장의 수련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해뜰녘, 해질녁, 그리고 계절감이 다른 수련의 그림들.

잔잔히 바람 한 점 없는 명경같은 호수, 살짝 이는 바람에도 산산히 쓸려져 내리는 물결, 그리고 흐릿하니 빼곡히

하늘을 메운 구름, 그 구름마저 품어버린 호수. 모네가 굳이 수련을 택해 그가 계속 그림을 그린 건 수상식물인

수련이 갖는 특수성 때문일까. 처음엔 수상, 물 위의 풍경들만 보였지만, 조금씩 수면, 호수 표면에 떠있는 풍경들,

그리고 수면 아래 수초나 다른 일렁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개의 층위로 구획되는 공간이 서로의

움직임을 따르고, 부추기고, 그런 게 춤이다.


게다가 빛과 시간. 공기의 일렁임에 더해 빛의 밝기와 농밀함을 변화시키는 시간의 손길이 더했다. 천변만화하며

수상의 하늘에서, 수면 위에서, 호수 아래에서 피어나는 수련의 움직거림들. 수련의 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에서였던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특징을 설명하면서 예로 들었던 게 바로 이 작품이었다.

가까이 코를 박고 보면 의미불명으로 굳어버린 물감덩이일 뿐이지만 한걸음씩 뒤로 물러나며 시선을 던질수록

수련들이 무수하게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다는. 정말이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입장권은 당연히 끌로드 모네의 '수련' 작품의 한 부분을 얼굴로 내세우고 있다. 기념품삼아

여전히 내 사무실 노트북 앞에 붙여놓고 있는 입장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7.5유로. 괜히 국제학생증도 없으면서 학생이라 우기면서 할인받으려는 꼼수는 꿈도

꾸지 말 것. 다른 곳은 몰라도. 그리고, 얼마를 주더라도 꼭 가 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금액이라도 모두 기꺼이 내겠다는 건 아니지만.) 지하의 인상파 화가들 작품도 그렇지만, 모네의 수련 연작

여덟점만 멍하니 보고 있어도 하루가 후딱 갈 거 같은 느낌.

(화요일, 국경일 휴무. 7.5유로. 09:45~17:15)

오랑주리 미술관 입구에 있는 이 작품, 로댕 미술관에서 본 적 있는 그 작품이다. 제목이 키스였던가..보고 있기만

해도 입술이 근질근질해지는 느낌.

오랑주리 미술관 앞에 잔디밭에 잠시 앉아서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어딜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경비원이 와서

쫓아낸다. 잔디밭에 앉으면 안 된다길래, 무안해진 김에 다짜고짜 바로 옆 세느 강으로 향했다.




세줄요약)

1. 난 굳이 전철에 시사인을 놓고 내린다.

2. 시사인을 보니 구 서울역사에서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을 한다더라.

3. 오르세 미술관보다 매력적인 공간이 생겨난 게 아닐까. 가보련다.



조금 안 좋은 습관인지 모르겠지만, 출퇴근길 오며가며 시사주간지를 읽고 나서는 꼭 머리 위 짐칸에 그 잡지를

얌전히 놓고 내리곤 한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있고, 5호선처럼 종점에서 차고에 들어갔다가

한번 싹 쓰레기를 치우고 다시 나오는 데 말고 2호선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만약 운이 좋다면) 최대한 수거하시는

분들 눈에 안 띌 수 있는 데로 나름 신경도 쓰고 있다.


조금은 사람들이 내가 보는 잡지를 함께 봐줬으면 하고, 그로부터 조금은 더 색다른 시각과 생각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어서 굳이 그러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잡지를 위에 올려놓자마자 누군가 덥썩 집어갈 때 참 기분이 좋다.


저번주 시사인 69호(09. 1. 5일 발행)에 나왔던 기사 중에, 구 서울역사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에

대한 내용을 읽고선 꼭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관련기사 : 옛기차역에 걸린 인간이 만든 풍경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80)



벽지가 너덜거리고 파이프 배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으면서도, 세월의 더께가 입혀져서 뭔가 미묘한 느낌과

함께 따뜻한 운치가 느껴지는 서울역사 건물은 굳이 뭔가 더 손대고 이뿌게 꾸밀 필요 없이 독특한 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옛 역사가 미술관으로 변신한 사례는 이미 파리에서 오르세미술관을

둘러봤기 때문에 별로 낯설거나 생뚱맞지는 않았다. 외려 무지 반갑기도 하고, 우리나라에도 저런 시도가

가능하다니 놀랍기도 하고, 그래서 꼭 가보고 싶어졌다.


오르세미술관처럼 구 서울역사도 이전에 특징적이던 전면의 커다란 시계를 여전히 작동시키고 있을까. 그리고

오르세미술관처럼 그곳의 높은 천장을 그대로 살린 채 정말 탁 트인 느낌으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을까. 어쩌면

금빛으로 번쩍거리며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의 오르세미술관 보다는, 약간 쇠락한 듯 하면서도 온기가 여전한,

서울역사의 때묻고 살짝 꾸질하기까지한 외관이 더욱 매력적일지도 모르겠다.

([파리여행] '오흐세미술관'이라고 읽어야 파리지앵?(http://ytzsche.tistory.com/174)




새롭게 메탈과 유리로 치장한 초현대식 서울역사가 생겨나기 전까지, 드문드문 기차를 타던 기억이나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누군가를 마중갔던 기억, 그리고 그 역사 앞에서부터 깃발든 단체들이 모이기 시작해 집회를 하고는

소공동 쪽이나 종로쪽으로 거리 행진을 함께 했던 기억들. 공식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원래 1월 15일까지 하기로

했던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을 2월 1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단다. 아마 생각보다 찾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그건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탓일 수도 있고, 또 이런저런 기억이 서려있을 서울역사에서 새로운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 탓일지도 모른다.


다만..계속 쓰면서 불편한 건데, 구 서울역사 구 서울역사 라고 되뇌이는 거 좀 바보같다. 뭔가 이뿌고 그럴듯한

이름이 있으면 좋겠고, 그전에 그 공간이 계속 예술과 문화를 위한 공간으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동대문운동장이나 서울시청 별관(..이던가)처럼 오래고 낡았다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능사는 아닐 테니까.


꼭 가야겠다.


말그대로, 티스토리의 탁상달력 사진공모를 빙자해서 올 한해동안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모처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 이전에 찍은 사진들은 왼쪽하단에 2004. 11. 1 이런 식으로 년도가 찍혀있는 필름사진이나

온통 인물이 배경을 가린 '증명사진'들 뿐이어서, 그다지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남는 사진들은 대개 혼자 다녔던 여행에서 찍었던 풍경들이거나, 최근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포스팅을

염두에 두고 찍은 사진들이다. 우선 7월.

#0. 몽마르뜨 언덕위 하이얀 사크레쾨르성당.

#1. 베르사유 궁전에서 내다본 18세기 프랑스 정원.

#2. 루브르 궁전에서 맞이한 석양.

#3. 루브르 궁전에서 맞이한 석양2.

#4. 고풍스러운 루브르 궁전과 현대적 미감의 유리 피라밋, 그리고 한결같은 하늘.

#5. 황금빛 튈를리 정원.

#6. 저녁 무렵의 에펠탑 전경.

#7. 앵발리드를 끼고 도는 세느강의 야경.

#8. 무성영화처럼 아스라히 고즈넉한 파리의 야경.

#9. 푸른빛 가득한 에펠탑의 야경.

#10. 리야드 알-파이잘리야 타워의 야경.

#11. 후쿠오카 고묘젠지의 연두빛 단풍나무.

#12. 콩코드광장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개선문.

#13. 뤽상부르 공원의 평온한 주말.


#14. 에펠탑에 내려앉은 별무리.

#15. 노틀담대성당에 기댄 거리의 악사.

#16. 생샤펠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화려하게 물들이는 7월의 햇살.



8월, 9월...전략적으로 생각했을 때, 8월은 뭔가 여름휴가하면 생각나는 작렬하는 태양, 눈부신 육체, 그리고 축제

같은 분위기가 질펀해야 할 텐데 별로 그런 사진을 찾기 쉽지 않았다. 9월 역시 추석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있으니만치 그런 사진들을 올려야 할 거 같은데, 별로 해당될 만한 사진이 안 보인다. 객관적으로 내 사진들을

따졌을 때에도 그닥 뛰어난 사진은 없으므로 틈새를 노려야 한다는 고려도 한 몫해서 사진들의 해당 월수를 찾아

주었던 것.


애초 사진공모를 '빙자'했다고 했으나...어느새 몰입하고 있다는.

#1. 8월 - 제주도의 어느 노천 수영장.

#2. 8월 -  샹젤리제 거리에서의 일광욕.

#3. 8월 - 축제의 도시, 파리의 휴일날 거리공연.

#4. 8월 - 아침고요수목원의 오래묵은 소나무.


#1. 9월 - 후쿠오카 유센테이 코헨의 가을 정취.

#2. 9월 - 김태희 허수아비가 지키는 남녘의 들판.

#3. 9월 -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웨이크보드가 응시하는 새벽안개 자욱한 남이섬.

#4. 9월 - 후쿠오카 유센테이 코헨의 이끼슨 석등.

#5. 9월 - 세느강변의 조금 이른 낙엽, 그리고 푸른 잔디밭.

#6. 9월 - 제주도 주상절리대의 검푸른 물결.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때였지만, 집으로 들어가기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이 짬에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마들렌 교회에서 방돔광장까지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았다. 딱히 목적지로 잡고 가기에는 뭔가

끌림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눈길 한번 안 주고 돌아가기에는 왠지 섭섭한 곳들.


마들렌 교회, 그리스 신전 같은 외양에 가슴속 십자가를 품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콩코드광장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개선문, 루브르궁전, 마들렌 교회, 앵발리드까지 파노라마처럼 360도로 펼쳐진 풍경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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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본 마들렌 교회의 옆모습, 부석사 무량수전이었던가, 아랫배 부분이 봉긋한 배흘림기둥.

그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가운데가 살며시 불룩한 이 도리스양식 기둥의 온화한 곡선이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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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는 안 들어가기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그스름한 금빛 석양이 잔잔히 배어나오기 시작한 남청색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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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이 청색으로 변해버린 시간, 노랑색 가로등이 켜진 때에 노천 까페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마실 것인가..하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와인을 한잔 가득 따라놓고 마시는

파리지앵들도 적지 않다. 우리처럼 와인을 격식 맞춰 마시는 분위기는 아닌 거 같다. 물론 그렇게 마셔야 할 와인도

있겠고 그런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도 있겠지만, 그저 편하게 마시는 술, 그런 와인/와인마시는 법도 수입한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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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높이가 44미터에 이른다는 방돔 광장 중앙의 탑. 맨 꼭대기에는 나폴레옹상이 파리 시가를 굽어보고

있다는데..이미 날이 너무 어두워져서 육안으로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잔뜩 녹이 슬어 에메랄드색으로

변해버린 청동 기둥의 둔중하고 거친 무게감이 왠지 시대를 거슬러 오른 과거의 향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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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문의 대포를 녹여 만들었다는 청동제 기둥. 뭔가 조각이 되어 있는 건지, 아님 그냥 울룩불룩하게 생겨난

무늬들인지 모를 정도였지만, 기둥을 둘둘 감고있는 띠 모양으로 그림이 가득한 거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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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었고, 튈를리 정원에 앉아 지친 발을 풀밭에 눕혔다.

저녁무렵이 되어서인지 루브르 박물관 쪽에서 여행객들이 꾸역꾸역 나오고 있었지만, 당연히 내게는 모두 얼굴

낯설고 이름 모를 타향의 사람들. 더구나 왜이렇게 모두들 삼삼오오 일행들과 함께 나오는 건지.

혼자 떠난 여행의 단점은 자신의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는 것 외에도..문득문득 이렇게 혼자라는 느낌이 치받아

올 때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때에는 나무가 느닷없는 일진광풍을 가만히 견뎌내듯,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며 외로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가 벌렁 누웠던 풀밭 옆에서 자기들끼리 열중한 채 놀고 있는 아이들의 발랄하고 경쾌한 웃음소리조차 그저

왁자한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그런 순간. 주홍빛 백열등처럼 변한 태양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HOME으로 돌아가는지 전부 떠나고 나자, 이번에는 한 커플이 그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사실 저 카메라를 잔뜩 의식한 채 경계심을 풀지 못한 커플을 꼭 찍으려는 게 아니라, 하늘의 갑작스런

뭉게구름을 찍고 싶어서 쳐든 카메라였다. 이곳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

살짝 센치해진 기분을 달래보려고 일단 일어서서 잠깐 걷기로 했다. 루브르 궁전 건물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또

길어지고 있었다. 사람들도 한결 덜어낸 공간이 다소 휑한 느낌이다. 차라리 한낮에 바글대던 그 공간이 낫겠다는

생각이 슬몃 고개를 쳐든 건 또 무슨 변덕일까.

카루젤 개선문도 왠지 분홍빛의 온기를 잃은 채 차가워져 가는 느낌. 모든 게 냉막해지고, 파리에 혼자 떨어져서

뭐하고 있는 건가 싶은 답답함이 울컥울컥해져 버렸다.

다시 돌아온 애초의 내 자리. 아까의 그 커플은 보이지 않고, 텅빈 녹색의 공간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뭉게뭉게 구름은 잘도 피어오르는구나. 잿빛 하늘보다는 그래도, 파란 하늘이 보이니까 맘은 좀 낫다.

이런 식의 센치함이 닥쳐 온 건 사실 어딜 가던 한번씩은 꼭 있는 일이었다. 이건 단지 일상으로부터 도피한 것

뿐이라고, 아니 도피한 척 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혼자 이렇게 다니는 거 하나도 재미없다고, 이제 누군가와

함께 다니고 함께 보고 즐기고 싶다고.

날 위로해 주듯, 문득 고개를 돌린 곳에서 황홀한 낙조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하늘에

찍찍 그어진 구름띠들, 그리고 어느 한점에서부터 엷은 금빛으로 물들여 나가는 다정다감한 햇살.

카루젤 개선문의 뒤로 돌아 서쪽을 바라보니 저멀리 노을이 은은하고 비치고, 해는 바야흐로 스물스물 기어내리고

있었다. 파리의 태양이 이제 서울로 떠나는구나. 6시간의 시차를 메꾸고 서울을 밝히러. 서울에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덥히러 가는구나 싶다.

하늘은 여전히 은은한 금빛이 흩뿌려져 있었지만, 지상의 사람들은 적당한 어둠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정도 어둠을 머금은 사람들의 어슴푸레한 윤곽은 왠지 정겨워졌다. 노랑빛이 풀어져 내린 흑백사진 속의 파리.

그래도 아직 대지는 고집스럽게 녹색을 움켜쥐고 있다. 저 운치있는 가로등과, 그림같은 가로수들의 형체들이

잔뜩 움츠러들고 옹송그려졌던 내 마음을 잔잔히 어루만졌다.

한국으로 가는구나. 엄밀한 과학적 상식으로야 내가 올라탄 이 지구라는 녀석이 팽팽 돌며 태양을 비껴나가는

거라지만, 그리고 태양이라는 거대한 불덩이가 고작 나를 위로하겠다고 세이 굳바이~ 할리야 없는 거라지만,

어쨌든 이제 맨눈으로 바라봐도 전혀 위협적이거나 아프지 않을 만큼 온화해진 태양은 조금씩 사그라들며

서울로 가노라고 했다.

해가 마침내 완전히 기울고, 서쪽 하늘만 조금씩 붉은 기운이 맴돌다가 사그라드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센치했던 기분과 왠지 처졌던 느낌들은 모두 이곳에 버려두고 가기로 했다.

룩소에서 봤던 오벨리스크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 룩소에서도 문득 예기치 못한 그리움에 사로잡혔을 때,

창밖의 나일강을 바라보며 달랬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힘내서 여행길을.

왠지 '드래곤라자'에서 나왔던 인사말이 떠올라 버린 타이밍.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아침에 빵을 사들고 오른 샤요궁전의 테라스. 사람없는 한적한 테라스 위에서 두발뻗고 앉아 에펠탑과 파리의

경치를 유유히 감상했다. 샤요궁전 앞 정원 분수에 비친 에펠탑의 윤곽이라거나, 그너머 샹드마르스 공원, 그리고

사관학교 뒷편의 앵발리드까지 하나하나 내가 가봤던 곳들을 눈으로 어림해가며, 고즈넉한 파리의 아침 풍경과

예상했던 것만큼이나 평화로운 샤요궁전 테라스의 분위기에 한껏 취했다.

에펠탑의 두 다리 사이로 보이는 샹드마르스 공원의 연두빛 풀빛이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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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들고 갔던 바게트 빵과 토르트를 테라스 옆 까페에서 파는 에스프레소와 함께 조금씩 뜯어먹으면서 생각했다.

호텔 조식 부페라고 해봐야 사실 먹을 것도 없고 금세 질려버려서 몇 접시 못 먹는데, 여기 이렇게 앉아서라면

빵이고 커피고 몇개고 몇잔이고 마시겠다고. 바게트빵이 눈에 띄게 줄어버리는 게 아쉬울 만큼, 그리고 다른 곳에

비해 많이 따라줬던 에스프레소 커피 한 방울이 아쉬울 만큼 맛있었던 파리의 아침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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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었지만, 에펠탑을 지나 샹드마르스 공원을 걸어보고 싶었다. 잠시 앉아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샤요궁전을

떠났다. 몇 걸음 걸어 분수를 지나고 세느강을 지나고 돌아본 에펠탑, 그리고 에펠탑의 딱 벌린 두 다리 사이로

보이는 샤요 궁전, 왠지 아이스께끼~ 가 생각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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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드마르스공원(Champs de Mars)은 샹젤리제거리처럼 '샹'(Champs)으로 시작한다. 정원이라는 뜻이라지만,

그러고 보면 프랑스어에는 샹, 샤..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많다. 자칫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렇게

글로 적었을 때의 느낌과는 영 딴판으로 프랑스인들의 매혹적이고 부드러운 발음으로 잘 넘어간달까.


샹드마르스공원은 이전엔느 군대의 연병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가, 대혁명 시대에는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겪기도
했단다. 파리 꼬뮌을 기념하는 탑이 공원 한켠에 조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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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은 사실 상당 부분 공사 중인 듯 했다.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공원에서 편안히 앉아서 쉴 만한

벤치는 많지 않아서, 그냥 공원 끝 사관학교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새로 산 신발이 아침이슬을 머금은 잔디에

젖는 걸 느끼면서, 드문드문 보이는 여행자나 노숙자들을 지나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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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드마르스공원 끝에 있는 조그마한 문..형태의 조형물이랄까. 뭔가 현재 진행중인 샹드마르스 공원 공사의 일환인

듯 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씌여진 평화라는 단어가 유리에 새겨져 있다. 한 십여개 언어로 씌여져 있었는데,

한국어는 용케 맨 밑단을 차지하고 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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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에 있는 올림픽공원의 '평화의 문'이랑 왠지 형태가 비슷하단 느낌을 받았다.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지붕하며, 두개의 두꺼운 기둥으로 버티고 선 저 포즈하며. 에펠탑 너머 멀리 샤요궁전이 보이지만, 기실 내가

걸었던 거리는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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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벗어나 큰길로 나왔더니 공사 현장에 대한 설명..인 듯 한 게 붙어있다. 프랑스어를 모르니 그냥 찍어만

왔지만, 뭔가 코스를 조성하는 걸까, 저 음표 모양의 기호가 수상쩍기는 하지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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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차 중의 하나인 푸조 308. 한국에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차이지만, 여기선 발에 채이도록 보인다.

좀더 희소하고, 좀더 고급스런 차로 내 '꿈의 차'를 바꿔야 하는 걸까, 왠지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샹드마르스공원을 지나 나타난 사관학교. 프랑스 국기가 펄럭이는 이 곳에서 지금도 사관생도들을 양성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흐릿한 아침인 데다 빗발까지 살짝 섞여들기 시작해서였을까, 건물이 왠지 침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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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번번이 깨어지곤 했었다. 팡테온 위 전망대에 올랐다가

굳이 함께 내려가야한다는 안내인의 고집때문에 팡테온서 오르세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뜀박질하다가 결국 십여분

늦기도 했고, 노틀담 성당에 잠시 갔다가 예기치 않은 대주교 집전의 미사를 구경하며 오분만, 오분만 하다가 또

십여분 늦어버리기도 했고. 메트로와 버스를 모두 무제한 사용가능한 프리패스를 사놓고는 왜 이용하지 않냐고

타박을 듣기도 했지만, 버스나 메트로가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건 서울이나 파리나 마찬가지인 게다.


옷 아래 옆구리 어간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리라 생각될 즈음 멀찌감치서 이 오르세 미술관 간판이 보이면 그래도

잠시 걸음을 늦춰 한숨 돌리곤 했었다. 나 자신만의 은밀한 안도의 상징이 되어버린 오르세 미술관의 간판.


애초 기차역사였던 공간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멀찍이 보이는 커다란 시계는 기차 역에 붙어있던 바로

그 시계라고 하며, 둥그런 천장 역시 역사의 외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공간 한복판에 불쑥불쑥 솟아나온

우윳빛의 대리석상들.

토마 쿠튀르의 "쇠퇴기의 로마인들(la Decadance)"라는 작품의 일부. 중앙 통로의 복판쯤을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는 대작이었는데, 총기와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술과 여자, 잔치로 점철된 로마문화의 말기적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술먹고 싸울 듯 인상을 찌푸린 녀석, 여자와 희롱하는 녀석, 술먹고 과장된 몸동작을 취하는 녀석..온갖

인간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왠지 지난 날의 내 음주생활과 그로 인한 온갖 사건사고들을 떠올리고 피식 웃음이

났지만, 대박은 이녀석. 술 취해서는 대리석상을 붙잡고 건방진 눈빛을 한채 술을 권하고 있다. 현대로 치자면,

술취해선 마네킹을 붙잡고 뒹군다거나 전봇대와 싸우는 정도..의 애미애비도 못알아본다는 개망나니 수준이 아닐까.

중간중간 앉아서 감상할 수 있도록 대리석 의자가 놓여있었다. 대리석의 선뜻한 차가운 느낌 때문에 오래 앉아있긴

힘들었는데, 그런 자리에 앉아서 몇시간이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도 꽤나 보였다. 너무 자연스러운 광경.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서서 한가지 이상했던 점, 왜 카메라를 찍도록 냅두는 걸까. 세계에서 손꼽힐만큼 크다던

이집트 카이로 미술관에 가서도 사진은 하나도 못 찍게 했던 것 같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안의 석상에 누워보게

하고 왕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에 손대고 플래시 터뜨리며 사진찍도록 냅두던 그들이었지만, 박물관에선 최소한

사진을 안 찍게 했던 거 같은데, 여긴 아니다. 오르세 만이 아니라 루브르, 오랑주르..다 그랬다.


덕분에 자유롭게 사진을 찍으며 구경했다. 스스로 정한 제한선은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기로.

참 오밀조밀하게 공간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오르세 미술관의 전경.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 같지만, 불어의

'R' 발음은 대개 'ㅎ'로 발음이된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 누군가 파리에 오래 있었다던 사람에게 그 친구가

오르세 미술관이 좋다며, 어쩌구 하고 물었더니 한동안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는 이야기. "오르세 미술관? 아~

혹시 오ㅎ세 미술관 이야기하는 거야? 오르세가 뭐니 촌스럽게." 라는 식으로 기어코 상대를 면박주고 싶었을까.

이 그림의 제목이 뭐였더라...파라다이스? 환타지? 남자의 로망? 꽃밭? 천국? 실낙원?

도무지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저 발랄하고 투명한 색감과 여인들의 말간 속살이, 그리고 저 은박지로 만든듯한

갑옷을 입은 남자의 살짝 흔들리는 표정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내가 너무 감정이입한 걸까. 사실 내가 떠올려낸

저 제목들은 모두 내 기호를 반영하고 있는 게다.

고개를 꺽은 채 허리를 뒤튼 여체. 대담하게 머리칼쪽에 던져둔 두 손 덕분에 농염하게 드러나는 젖가슴.

살집풍만한 허리와 허벅지를 보건대 분명 저 시대와 지금 시대의 미적 감각은 차이가 있지 싶으면서도, 저 조각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싱싱한 생명력과 리얼한 몸의 움직임 때문이다.

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라는 작가가 계속 눈에 띄었다. 아마 오르세, 혹은 오ㅎ세를 방문한 오늘

내가 건져갈 미술가는 이 사람인가 보다. 거친 몇 개의 선으로 날카롭지만 섬세하게 인물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여성의 누드가 단지 이상화된 여신을 묘사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던 기존의 풍조와는 달리 여성의 누드가

갖는 통속성이랄까, 그 자체로서 갖는 의미에 집중한 그림이란 느낌이다. 마치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혹은

'올랭피아'가 기존 화단이 고수하던 전통과 도덕적 금기를 깨뜨린 것처럼, 내가 본 그의 그림들은 모두 상당히

도발적이고, 동시에 현대적이란 느낌.

몇몇 보고 싶던 작품들이 전시되지 않고 있던 것은 아쉬웠지만, 얼마전 한국에도 왔다가면서 인사를 건넸던

부르델의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를 여기서 다시 만났던 거나, 요새 좋아라 하는 인상주의 작품들이 많았던 점은

정말 맘에 들었다.


참, 유의할 점 하나. 총 3층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는데, 층수로 치자면 0층, 2층, 그리고 5층 이렇게 세 개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 1층과 3, 4층으로 가는 길은 찾을 수도 없으니 행여나 찾으려 노력하는 건 내가 잠시 저질렀던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셈이다.




오르세 미술관의 티켓. 아마도 에드가 드가의 그림인 듯한 저 발레하는 소녀들의 모습, 그리고 그 뒷면에 선명히

찍혀있는 5.5유로의 입장료.

사크레 쾨르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시계가 녹아내리는 달리의 미술관도 있고, 몽마르뜨에 거주했던 숱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중인 미술관도 있다고 했다. 애초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보다는 좀 크게 원을 그리며

몽마르뜨 언덕의 정취를 맘껏 즐기다가 다시 앙베르(Anvers)역이나 아베스(Abbesses)역으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사크레 쾨르 성당 안에서 잠시 펼쳐본 가이드북에 의하면 아베스역의 지하철 역 입구는 누군지 처음 들어봤지만

여튼 '거장 기마르'가 디자인한 아치란 거다. 왠지 조금더 그 주변에서 한 바퀴 돌아보며 눈에 담아야 할 거 같은

부담감, 그리고 이런 걸 조금더 눈에 새기지 못하고 왔구나 하는 스스로의 안목에 대한 살짜쿵 부끄러움이 드는

순간이었다. 가이드북은 이런 식으로 종종 성가신 걸음을 걷도록 압박하곤 한다.

주변 골목을 아무길이나 쑤시고 들어갔다. 가파른 경사를 가늠컨대 사크레 쾨르의 방향과 내려가는 방향은 얼추

쉽게 잡겠다 싶어서, 그다지 거리 이름을 괘념치 않고 뭔가 이뻐보이거나 눈에 밟히는 게 있다 싶은 곳으로 향했던

게다. 그 골목에서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건 형형색색의 화려한 원색 컬러를 가진 저 티테이블들.
의자와 테이블이 꼭 같은 색으로 매치된 것도 아니다. 아마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배치되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자를 이쪽저쪽으로 끌어당기고 테이블도 몇번씩 들었다놨다 하면서 지금처럼 마구잡이식의

랜덤한 배치가 이루어진 게 아닐까, 근데 이뿌다.

그 풍경 속에 들어가 앉아 차를 한잔 하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풍경이

마주보이는 길건너편의 까페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여행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며 쉬거나, 그 무질서

하지만 경쾌한 색의 배합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지도를 보며 길을 정하고 있었다. 나는 안쪽에 들어가서 우선

에스프레소를 시키곤 지도를 펼쳐서 여기가 어딘지부터 확인. 이게 바로 내가 여행 내내 들고 다니던 지도책,

PARIS PRATIQUE, 거리 이름이 모두 나와있고 아무리 조그마한 골목길도 다 그려져 있어서, 파리지앵들도 길을

찾는데 쓴다는 그 책이다. 가이드북은 가끔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하다 싶거나, 뭔가 주위에 같이 볼만한 게 없을지

체크할 때만 펼쳐보았었다. 아마 나중에 파리 갈 일이 또 생긴다 해도 이 책이면 충분할 거 같다. 사실 이제 왠만한

거리나 방향은 다 익숙해져 버려서 따로 지도나 가이드북이 필요있겠냐 싶다만은.

에스프레소 커피의 쓴 맛은 솔직하다. 쌉쌀한 냄새와 함께 혀를 얼얼하게 만들 정도로 진한 커피 원액이 입안에

한모금 흘려넣어지면 정신이 바싹 긴장하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갈색빛 거품을 헤치고 그 쓰디쓴 맛을 가만히 혀로
분별해 나가보면 진한 단맛도 느껴지고, 순수한 쓴 맛도 느껴지고, 그리고 약간의 시큼한 맛까지 감지된다. 사실

파리지앵들은 아메리카노를 두고 에스프레소에 물탄 거라면서 다소 낮춰보는 느낌이 없지 않다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경사가 완연히 느껴지는 골목들. 저쪽 높은 곳에는 사크레 쾨르가 있을 테니 일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다 보면, 크게

방향이 틀리지 않는 한, 왔던 곳으로 쉽게 되돌아가겠거니 했다. 그치만 골목들이 얼기설기 만나고 있었던 데다가

몇번 모퉁이를 돌고 나니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었는지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든 패닉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저런 식으로 담쟁이 덩굴이 빼곡히 담을 치고 있는 공간 안에서 살면, 무지 맑은 공기를 이십사시간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한눈에도 무지 풍성하고 두꺼워보이는 녹색의 벽안에선 혹시 어떤 예술가가 21세기의 걸작을 예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저런 식으로 창문이 탁 트여서 바깥을 공간 안으로 품을 수 있고, 동시에 밖에서도 안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건...역시나 왠지 예술가와 어울린다 싶은 느낌인 게다. 몽마르뜨 언덕의 독특한 운치와 분위기가

계속 내 상상력을 그런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단정한 벽돌집. 올이 굵은 실로 짜여진 스웨터를 연상케 하는, 그리고 그 오돌토돌한 촉감이 선명히 살아나는

건물의 외관이 왠지 정겹다.

어떻게 돌았던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느 순간 생 피에르 교회가 다시 나타났다. 안 그래도 아까

사크레 쾨르를 반 바퀴 돌아서 정문쪽으로 가면서 왠지 오래되어 보인다, 싶던 건물이었다. 미처 그게 파리에서

오래된 성당으로 손꼽힌다는 생 피에르 교회인지는 몰랐던 게다. 그치만 사실 그런 정보를 알고 볼 때나 모르고 볼

때나, 이 오래고 낡은 성당이 주는 칙칙하고 우울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재빨리 스킵해서 테르트르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이곳에 나오면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이 모여있다더니 정말이다. 벌써 꼬맹이 두명이 거리의 화가들의

오브제가 되어 있었다. 이런 화가들을 일러 사기꾼 화가라거나, 돈벌려고 화가인척 한다고 비난할 수야 있겠지만,

글쎄...화가라는 게 기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가 사기꾼이고 누가 진정한 리얼 화가일까. 다만

저들의 실력이 다소 모자란다거나, 혹은 오브제이자 돈주머니의 심기를 맞출만한 센스가 부족하다거나 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가짜 화가'라거나 '사기꾼'이라고까지 폄하하는 건 좀 감정적인 거 같다.


살짝 들여다 본 그들의 화폭에 담긴 인물은 글쎄, 눈앞에 있는 오브제와 많이 닮은 거 같단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던 건 사실였지만, 그래도 그들 눈에 보인 오브제가 그렇게 보였나부지.

골목길을 종횡하고 다니다가 문득 마주친 상점. 찌그러져 들어가며 언제든지 기우뚱, 쳐져버릴 것 같은 찌푸린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반듯하고 반짝반짝 광이 나는 새것이었다면 이 골목에 어울리지 않았을 거 같았다.

실제로 저 휘어진 천막이 몇십년씩이나 됐겠냐만은, 그래도 나름의 시간이 배어있다는 점에서, 몽마르뜨 언덕위에

빼곡한 고풍스런 건물들과 반들반들한 포석들, 그리고 사크레쾨르와 생 피에르 성당과 잘 어울려 보였다.

아마도..화가의 집일까. 창문에 내걸린 저런 작품들을 한점 한점 구경하며 발걸음을 느릿느릿 떼어놓는 것도 이곳

몽마르뜨 언덕의 묘미인 거 같다. 맘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한 점 사갈까, 했지만 딱히 내 눈을 붙잡았던 그림은

없었다. 뭔가 그림들이 강렬하거나 인상적인 걸 의도한다기보다는, 잔잔하면서도 편한 느낌, 그러니까 가벼운

소품으로 쓰기 좋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려 가는 길에 저런 식으로 계속 눈길을 끄는 뭔가가 있었던 거다. 저건 또 무슨 뮤제..뮤지엄, 박물관일까.

이런 식으로 몇번 방향을 꺽는 사이에 난 점차 몽마르뜨 언덕을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가로질러 넘어가고 있었다.

막판에 도착한 역은 그래서, 12호선의 라마르크 콜랑쿠르(Lamarck Caulaincourt) 역.

짙은 녹색에서 누런색을 거쳐 붉은색으로까지 변색되어 있는 담쟁이덩굴은, 뮤제 드 몽마르뜨, 몽마르뜨 미술관의

표지판 만큼이나 금방 눈에 띄었다. 빨간 표지판과 녹색 담쟁이덩굴의 대비. 안으로 들어갔더니 조그마한 전시

공간이 있었고, 이곳에서 작업을 했던 화가들의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개 자그만 소품들이었고 그다지

인상적인 건 찾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건 이미 내가 파리의 여러 굵직한 미술관을 거치면서 터무니없이 눈만

높아져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어쨌든 아베스 역이던, 앙베르 역이던 만나리라고 쉽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몇번이나 지도를 확인한 결과, 이미 몽마르뜨 언덕을 오르내려서, 오를 때와는 영 다른 곳으로 떨어져

내렸음을 알아차렸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지나면서 가이드북에 소개되었던 이러저러한 '관광 포인트'들도

찍어볼 수 있었을 텐데, 라고 아쉬워했던 것도 잠시, 이미 난 골목을 뱅글뱅글 돌면서 몽마르뜨 언덕을 네다섯시간

여유롭게 완상했음을 깨달았다.
일정을 고민하다가 몽마르뜨 언덕을 오르기로 했다. 비가 주룩대는 날씨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는 없다

싶어서 애초 오랑주리 미술관을 갈라고 하다가 맘을 접었다. 좀 이유같지 않은 이유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왠지 햇살 눈부시고 풍경이 화사한 그런 날에 봐야 할 것 같았다.


일부러 살짝 돌아갔다. 메트로 12호선 아베스(Abbesses)역에서 내려서는 크게 에둘러서 사크레 쾨르 성당으로

오르기로 했다. 조금씩 가팔라지는 경사를 체감할 수 있던 그 길에는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주택들이 한채씩

나타났고, 특이한 상점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아침 시간이라서였을까. 문을 닫고 있던 한 가게 안에는 온갖 종류의 고양이 소품들이 쇼윈도우 밖을 흘끔대며

구경하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꼭 들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사크레 쾨르를 지나 몽마르뜨언덕 위의 골목길들을

이리저리 종횡하다가 깜빡 잊고 말았다.

조그마한 컴팩트카가 주차되어 있는 뒤에는 둥글둥글한 벽돌로 지어진 주택이 서 있다. 차도나 인도의 포석도 그런

벽돌로 깔려 있어서, 걸을 맛이 나는 골목이었다. 벽돌집 옆구리에 붙어있는 파란색 표지판은 거리 이름이 적힌

표지판인데, 저 건물의 정면과 측면의 거리가 뭐라는 것을 알려주어 길찾기가 정말 편하게 해 준다. 무슨 거리와

무슨 거리가 교차하는 곳에 놓인 건물, 이라고 하면 금방 찾는 이치다. 모든 건물에 저런 표지가 붙어 있어서

프랑스 현지인들도 거리이름이 빼곡히 적힌 지도 하나만 있음 어디든 잘 찾아다닌댄다.


창문 밖의 빨간 꽃들은 아마 제라듐일까, 비가 부슬거리는 날씨에 새빨간 꽃잎이 선연하다.

경사가 어느 정도 실감이 될 무렵, 나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언덕을 오르는 여행객들이 보인다. 아마 에둘러

크게 돌아 오르던 내가 다른 길에서 오르는 사람들과 합류하는 지점이지 싶기도 하다.

몽마르뜨가 애초 예술가들의 거리였다던가. 예술가들에 대한 고정관념이랄까, 왠지 담배를 즐기고 까페에서

에스프레소와 와인을 줄창 마셔댔으며, 돈이 떨어질 때면 화구를 들고 광기에 휩싸여 그림을 그리고는..

내다 판 돈으로 다시 술을 사 마시고 룸펜처럼 지냈을 거 같다. 글쟁이였대도 별반 다를 거 같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저런 까페 안에서 뿌연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으며 몇시간이고 죽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CAFE라 하면, 한국과는 달리 단순히 커피나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저녁이 되면 술도

파는 주점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좁은 길이 얼기설기 얽혀 있어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마구 갈지자로 흩어놓아도 어디선가 사크레 쾨르 성당의

하얀 돔을 마주치게 되었다. 아무리 여행이란 게 방향 감각을 내팽개치고 발길 닿는 대로 헤매면서 하는 거라지만

최소한 파리에서, 이렇게 길이 복잡하게 나 있고 미로 같은 곳은 처음 봤다. 올라갈 때야 사크레 쾨르 성당의

흰 빛을 따라 오르면 되었다지만, 기실 내려갈 때 영 헤매고 말았던 거다.

드디어 근접 촬영. 사크레 쾨르, 신선한, 아니 '신성한 심장'이라는 뜻이다. 어느 가이드북에서는 성심 교회..라던가,

그런 식으로 번역해 놓기도 했지만, 사크레 쾨르 성당이라고 하는 게 자연스럽지 싶다. '신성한 심장 성당'이라는

뭔가 영험할 듯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 역사나 착공 배경은 기실 그다지 신성하지는 않다.

빠리 꼬뮌의 비극이 있었던 1870년을 지나며, 아마도 비관적이고 삶에 대한 염세에 젖어 있었을, 그리고 프랑스

중앙 정부에 대한 거부감과 반감이 여전히 가슴 속에서 부글대고 있었을 파리 시민들을 종교적 차원에서 감싸안고

달래고자 했을 거다. 그걸 좀더 고상하게 얘기하건대, 불행한 시대를 거친 가톨릭 교도의 마음을 달래줄 목적으로

지어진 성당, 그게 바로 사크레 쾨르 성당이라는 얘기. 

정문을 마주보고 섰다. 알고 보니 내가 길을 어떻게 잡고 갔는지 사크레 쾨르 성당의 등덜미를 보고 왔던 게다.

사크레 쾨르 주위를 반 바퀴 돌아 정면에 섰더니, 내가 돌아온 길 말고, 정면을 보고 바로 올라온 여행객들이 이미

바글바글하다.

성당의 첨탑이나 하얀 빛의 벽 같은 부분들이 왠지 이슬람 사원을 연상케 했다. 성당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전형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둥글고 높은 돔이 터키에서 봤던 '아야 소피아

사원'이나 '블루 모스크'를 떠올리게 했다. 하기야 그런 터키의 건물들은 지배세력의 종교에 따라 그때그때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를 넘나들며 개축되고 변신했던 거니까 예외라고 쳐도, 사크레 쾨르는 왜 그럴까.

다소 고답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굳이 답을 하자면, 문명간의 교류를 통한 건축 문화의 융합?


옆에서 어떤 귀여운 일본 아가씨가 혼자 낑낑대며 셀카를 찍고 있길래, 말을 섞어 보았다. 매우 짧은 영어로 그녀는

힘겹게 몇 마디를 했는데, 회사원이고, 파리에는 그저께 왔으며, 내일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얘기만

좀더 잘 통했어도 같이 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같이 사진도 찍어주고 잘 돌아다녔을 텐데, 소통이 거의

불가한 지경이었어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는 여행 잘 하라며 안녕을 고했다.

사실 어줍잖은 영어 실력만 믿고 해외로 나서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하는 건 다소 만용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자용의 짧은 영어구문들을 주고 받는 것을 넘어서, 속을 터놓고 이런저런 깊은 이야기를 하려면,

영어가 되었던 두 사람 중 하나의 모국어가 되었던 서로를 서로에게 최대한 손실없이 전달할 수단이 절실하다.

당장 내가 영어 말고 일어를 좀 배워왔어도 훨씬 많은 이야기의 기회가 있었을 텐데, 아쉽다.

성당 안에 들어가 둘러 보았는데, 역시 성당은 쉬기에 적당치 않은 장소였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성함에 다들

스스로 압도당하거나 혹은 순응해 버린 채, 숨소리도 조심스런 그 갑갑한 분위기. 하물며 아침으로 먹겠다고 사온

빵을 꺼내 베어물기란 불가능한 공간이었다. 후딱 한바퀴 돌아보았지만, 사실 성당 내부는 거기가 거기다.

2유로짜리 초를 봉헌하라는 한 구석의 촛불잔치, 정면의 십자가상과 벽면에 늘어붙은 '십자가의 길'용 그림들,

세속의 햇살을 정제해서 들이려는 듯한 딱딱한 표정의 스태인드글라스까지.


성당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빵을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잠시 구경했다. 여기도 옥상 돔에 올라가 전망을

바라보는 코스가 있나보다. 사람들이 줄서서 티켓을 사고 있었지만, 어제 판테온도 가보고 그곳의 돔에 올라

전망도 보았던 나는 그냥 스킵, 차라리 몽마르뜨 언덕 주변을 헤매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이번에는 정면에 난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생각했던 길은 정면에 난 길로 쭉 내려가며 주변길을 더듬어 보다가,

가까이 있는 2호선 앙베르(Anvers)역으로 갈 생각이었다. 내려가면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 요 며칠 마주치지 못한

흔치 않은 한국인이라 어쩔까 생각하다가 그냥 조용히 모르는 척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내게

한국인이시죠, 하며 말을 거는 아저씨. 가족 사진 한 장 찍어드리고 나도 사진 한 장 부탁드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한 마음에 계속 뒤를 돌아보며 다른 여행객들을 분별해 보게 된다. 그치만 아무리 돌아봐도

잘 모르겠고, 오히려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건 사크레 쾨르의 세 봉우리. 뫼산 山자의 오리지널이 여기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고작 해발 130미터라는 이 몽마르트 언덕의 정점에 선 이 성당이 파리 코뮌을 속죄한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일까 자꾸 반감이 들기도 하고. 뭘까, 파리 코뮌을 세웠던 시민들의 반기독교적, 반종교적 '행태'에 대한

죄사함을 대신 빌어주겠다는 건가.


그게 좀 불분명해 보인다. 파리 코뮌을 프랑스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의 거울에

비춰보는 한국. 한국은, 멀리 갈 것도 없이 80년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녀석과

숨이 턱까지 닿도록 내달려 들어섰던 저녁무렵 광주 구 묘역의 황량하고 신산한 분위기가 떠올랐다.

하얀 빛을 머금은 사크레 쾨르 성당과 새초록의 잔디. 그리고 빗발이 오락가락하는 우중충한 하늘.

어쩌면 사크레 쾨르의 정면을 보면서 걸어 들어왔으면 더 멋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지나다가 어느 순간 나뭇가지에 살풋 가리워진 하얀 건물을 마주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불쑥 다짜고짜

흰 몸뚱이를 내팽개치듯 완전히 내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사크레 쾨르 성당과 희롱하며 다가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내가 온 길은 뒷통수를 갈기러 살금살금 까치발로 숨어들어온 뒷길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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