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무키네 마을의 유일한 레스토랑에서 피자 한판과 맥주 두병으로 맛난 점심을 해치운 후에 슬슬 숙소를

 

찾으러 눈보라 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꽃이 만발한 작고 이쁜 민박집들이 열지어 서있어야 할 마을에는 온통 눈밭.

 

 그래도 용케 문 하나 열린 집을 발견하고, 사람이 지나지 않은지 엄청 오래 되었는지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지나 드디어 체크인.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입구는 두 개, 1번입구와 가까운 라스토바차 마을과 2번입구와 가까운 무키네 마을인 셈인데,

 

아마 공원이 폐쇄되었을 거라는 주인아저씨의 만류를 무릅쓰고 산책 겸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사람 하나 없는 길. 그래도 드문드문 제설차가 지났는지 큰 길에는 제법 눈이 치워진 흔적이 남았지만, 그 너머는 온통 눈이다.

 

 

 본격적으로 산길. 마을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카르스트 호수들이 이어지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이다.

 

 

 그렇지만 온통 눈. 어쩌다 만난 관광객 커플에게 앞의 상황을 물었더니 공원은 폐쇄되었고 사람 하나 없는데다가 길도 끊겼댄다.

 

그래도 일단, 풍경이 넘넘 이뻐서 무작정 앞으로 홀린 듯이 나가게 된다. 인적은 끊기고, 소복소복 쌓이는 눈에 소리는 모두 지워지고.

 

 

부지런히 길을 틔워놓는 제설차량의 바퀴자국. 그 위에 다시 소리없이 나려들며 흔적을 지우는 백배 더 부지런한 눈.

 

 

 

이윽고 도착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2번 입구. 폭설이 아니었어도 이미 입장시간은 아니었구나.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오픈.

 

내친 김에 다른 정보들도. 성인용 1일 티켓은 80쿠나, 아이는 40쿠나로 반값, 그리고 이틀짜리 티켓은 성인 130쿠나, 아이 60쿠나.

 

 

 

모른 척 하고 아무도 지키지 않는 입구를 넘어서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하얀 세상, 나만 혼자 남겨진 듯한 착각.

 

누군가의 발걸음을 희미하게 지워둔 채 허벅지까지 들어가는 눈폭탄이 그곳에 있었다.

 

 

찔끔 겁이 나 버려서, 어디선가 들리는 졸졸졸 물소리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다 말고 포기하기로 했다.

 

여기선 발을 헛딛고 추락하거나 눈밭에서 뒹굴다가 죽어버려도 한동안은 아무도 찾지 못할 거 같단 생각이 들길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전경이 담긴 안내판 위로 수북하게 눈을 이고 지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축축 늘어져버렸다.

 

 

 

 

 

그리고 이젠 더이상 뭐라 할 말도 없는 하얀 세상.

 

 

 

 

 

저 아랫쪽으로 보이는 데가 아마도 초록빛 신비로운 색감의 플리트비체 호수들이 웅크리고 있는 국립공원 내부.

 

 

 

 

 안내판도 온통 눈으로 하얗게 지워져 버려서, 대체 어디가 어딘지, 아까 밟아 내려왔던 길을 다시 그대로 찾아 올라가기도 힘든.

 

 

 그래도 불쑥 튀어나온 표지판에 의지해서 다시 찾아온 무키네 마을, 사실 2번 입구와 무키네 마을은 고작 2킬로 남짓

 

떨어져있을 뿐인데 이렇게 눈이 푸지게 내리고 길을 지워버려서야 도무지 거리감각이고 뭐고 없다.

 

 

아까 눈여겨보았던 그 슈퍼마켓. 와인을 한 병 사고, 700ml짜리 라키야를 한 병 사고, 일하시는 아주머니의 추천을 받아

 

안주로 제격이라는 치즈랑 오렌지, 올리브 좀 사들고 숙소로 돌아가 성찬을 벌이기로 했다.

 

이런 곳에 세워둔 차는 길고 지루한 겨울이 지나고 나서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으려나, 상태는 괜찮으려나 괜한 걱정.

 

 

 

 

'제설작업', 2004년에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좀체 입속에서 굴러다닐 일이 없던 단어, 심지어는 귓바퀴에
 
넣고 굴릴 일조차 없던 단어였는데, 무려 6년만에 제설작업에 동원되고 말았다.

장소 : 코엑스 밀레니엄광장

시간 : 200..아니 2010년 1월 4일, 13시 30분-14시 30분

작업목표 : 20센티 이상 쌓인 눈치우기(삼성역 5번출구서 코엑스몰입구까지)

회사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서는 눈삽과 빗자루를 들고는 눈이 발목넘게 쌓인 채 통제구역으로 띠둘려진

그 곳에 들어가 제설작업을 시작했다. 통로가 미어지게 지나가던 사람들은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심지어

외국인들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축축해지는 구두를 느끼며 구두와 양말이 합일되는

경지를 감촉하며 눈을 치우다가 급기야 후배 직원을 엎어뜨리고 눈사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부끄러웠다.


머리 위와 어깨 위로부터 김이 펄펄 오르기 시작할 때 쯤, 역시 머리보다 몸을 움직이는 체질은 아닐까

생각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어서 괜히 여기저기 눈삽 찔러넣다가 끌려가듯 올라왔다.


아침 9시부터 예정되었던 시무식, 누가 센스없이 9시부터 시무식을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미친 듯이

쏟아붓고 있는 폭설 덕에 회장님이 그만 늦어버렸다. 예정되었던 식순과는 달리 이런저런 즉석 신년사와

축복들이 오고 가다가, 도무지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는지 부회장님이 회장님한테 전화를 했다.


어이구, 어디신가요 회장님, 뭐라뭐라. 어이구, 안 되시겠네요. 뭐라뭐라. 어이구, 그럼 휴대폰으로라도

인사하시죠. (으응?) 마이크에 휴대폰 대고 있음 괜찮아요. (뭐라고?) 제가 노래방에서도 해봤거든요.

그리고 시작된 회장님의 신년사, 마이크 너머 휴대폰 너머 '세상의 끝'에서부터 들려왔다.


꽤나, 신선하고 재미있었던 시무식. 회장님이 늦게 온 덕에 이런저런 사람들도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도

해보고, 유례없이 휴대폰을 사용한 시무식도 경험해보고. 기자들도 재밌다고 생각했는지 기사로도 여기저기
 
난 것 같다. 역시 부회장님은 노래방에서 그런 경험이 있으실 만큼 고렙이신 건가.



* 오늘 눈이 삼엄하게 내리던 새벽에 수영장 가는 길, 마치 '더 로드' 위를 걷고 있는 느낌. 책으로 봤던

스토리를 영화로 보면 대개 실망하기 마련이라 영화는 안 볼 생각인데..이미 오늘 비쥬얼은 경험해버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