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상태 훌륭해보이는 400년전의 대포가 그랜드 리스보아 카지노호텔을 겨누고 있는 곳은 몬테 요새 위의 공원.

 

그야말로 마카오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포인트다.

 

길 찾기가 조금 쉽지 않았던 거 같기도 하지만, 대충 오르막길이겠거니 하고 어림짐작으로 밟은 길이 그대로

 

몬테요새로 올라가는 길이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대체 어떤 요구조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카오에는 유난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문화재들이 많다.

 

몬테 요새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건물 정면만 남겨진 벽면이 바로 세인트 폴 대성당.

 

그리고 이렇게 공원이란 쓰임에 걸맞게 이쁜 꽃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기도 한 이곳은 거의 마카오인들의 휴식처라고.

 

 

이 곳에는 총 22문의 400년전 대포가 성벽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데, 실제로 사용된 건 17세기에 딱 한번 뿐이라고 한다.

 

네덜란드 함대가 공격해왔을 때, 단번에 함대의 탄약고를 폭파시켜 승리로 이끌었다나.

 

 

 

 

 

 

 

 

홍콩에서 출발한 쾌속 페리 내부, 속초 대포항에서 울릉도갈 때 타는 고속 페리와 비슷한 실내 모습이다.

 

찜사쪼이의 차이나 홍콩시티 페리터미널을 출발한 배는 대략 한시간만에 마카오에 닿는다고.

 

 

 그리고 마카오 페리터미널에서 마카오 중심가까지는 리스보아 카지노의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해서 훌쩍 점프.

 

 

그러고 조금 걸으면 바로 마카오 시내의 중심부 세나도 광장.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답게 샛노란 파스텔톤이

 

은은하게 번지는 광장 바닥엔 온통 얼룩덜룩한 줄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카오 시내의 주요 볼거리들은 세나도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1.5km 이내에 몰려있다고 해서, 아예 처음부터 내처

 

걸어다니며 여기저기를 둘러볼 생각을 했었다. 다만 홍콩을 출발할 때부터 꾸물거리던 날씨가 끝내 발목을 잡을 줄은.

 

 

골목들조차 어디로 향하는지 뻔해보일만큼 조그마한 세나도 광장, 그리고 조그마한 동네 하나 같은 마카오 시내.

 

그래도 여전히 어딘가로 인도할지 모험심과 궁금증을 자극하는 건 어느 곳의 골목이나 같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온통 몰려있는 세나도 광장에서 눈에 확 띄는 이 샛노란 베이지색 건물, 상 도밍고 교회.

 

마카오를 다녀오고 느낀 점 중 하나, 포르투갈에 가서 오리지널 버전의 색감과 장식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

 

 

 

그렇게 세나도 광장을 크게 돌아보고는 사람들에 쓸려 발걸음을 옮기던 찰나, 반쯤 내려진 셔터 아래 조용히

 

숨어있는 나무 인형을 만났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크로아티아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굉장히 이름높은 곳이다.

 

게다가, 하루 전날 내내 폭설이 쏟아지고 난 다음날 쨍한 아침이 시작되는 댓바람, 그야말로 공원을 방문하기 최상의 타이밍!

 

 

민박집 주인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1번 입구에서 티켓을 사고 공원 안으로 입성! 2번 입구는 폭설로 임시 폐쇄중이라고 하니 잘됐다.

 

 

플리트비체에 있다는 92여개의 폭포 중에서 가장 큰 폭포이자 백미라는 벨리키 폭포. 높이 78미터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게다가..물이 흘러내리는 곳따라 함께 흘러내리는 눈길에 밟히는 건..온통 눈꽃. 이런 눈꽃은 여태 듣도 보도 못했단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턴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냥 사진 감상 위주로다가. 정리를 아무리 하고 지워보려 해도 아까운 사진들이 잔뜩이다.

 

 

 

 

 

 

1번 입구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하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애초 석회암 지대인 이곳의 지반을 오랜 시간 강물이 깍아내리며

 

점점 계단식으로 층층이 호수를 넓혀온 거라고 한다. 그 외곽을 돌며 자잘한 호수가 이어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묘미라는데.

 

 

이렇게 푸지게 눈이 온 다음날이라 가능한 풍경들, 눈꽃이 풍성하게 피어난 나뭇가지 위로 미끄러져내리는 무지개라거나.

 

투명하게 파란 하늘 아래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순백의 풍경, 그리고도 디테일한 원경과 근경, 그에 더한 보슬보슬 질감까지.

 

이런 식의 미묘한 푸른 빛의 호수가 조금씩 하류로 밀려들고 있는 풍경, 가히 절경이다.

 

 

국립공원이 개장하자마자-오전 10시 개장-제일 먼저 들어섰는데, 어느 순간 뒤에서 아저씨 둘이 추월해 나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프로 사진사 아저씨랑 공원 관리인 아저씨. 플리트비체의 공식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던가, 묵직한 장비를 이고지고 걷고 있었다.

 

 

 

아..넘넘 이쁘다 진짜. 정말이지 정신도 못 차리고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뿐.

 

 

 

 

그리고 이 미묘하고도 몽환적인 물의 색깔. 물속에 포함된 석회질과 각종 미네랄 때문이라나, 빛의 각도나 햇살의 세기에 따라서

 

그 색깔이 환상적으로 번져나가는 게 워낙 유명하다고 한다.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 기슭으로 가는 참, 다리에 기대어 잠시 쉬어가던 나뭇가지나 부유물 위로 두텁게 쌓인 하얀 눈이불.

 

 

 

플리트비체의 호수들이 얼마나 큰 낙차를 갖고 있는지, 상류지역과 하류지역의 호수가 얼마나 낙폭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안내판.

 

 

하류의 호숫가를 구경하고 벨리키 폭포를 코앞에서 구경할 수 있는 코스는 이쪽인데, 눈이 많이 내린 탓인지 나무계단 위로까지

 

호숫물이 범람해 버렸다. 눈이 두텁게 쌓인 산책로가 위태롭게 끊겨버린 지점, 이쪽으로는 포기해야 하나 잠시 갈등하던 참.

 

이 길을 따라가야 벨리키 폭포를 올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일 텐데, 안타까운 마음을 아는지 무지개 하나가 둥실 환상처럼 떠올랐다.

 

 

뒤로 돌아보아도 아까 그 프로 사진사 아저씨 일행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 상황. 전날 내린 눈 때문인지 공원 내엔

 

사람 하나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다. 음..어디로 가야 하나 갈등이 조금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결에 다시 나타난 프로 사진사 아저씨 일행이 여기저기 휘적대며 사진을 찍더니 문득, 물이 잔뜩 차오른

 

나무다리를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물살이 세찬 나무다리 위로 발을 내딛고 말았다.

 

김이 펄펄 끓어오르던 커다란 양은솥. 아궁이에서 삼엄하게 번져나오던 화염. 그 와중에 살짝 풍기는 달콤한 냄새.

 

그것은 가히 '화염'이라 부를 만한 정도의 불길이었다. 빨갛다 못해 샛노랗게, 투명하게 달아올라 뿜어오르는 빛과 열.

 

부뚜막에 정좌하고 앉으신 며느리 할머니는 빨간 잠바를 이쁘게 걸치시고 파란 물바가지를 젓고 계셨다.

 

 

천천히. 그렇지만 쉼없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파란 물바가지가 끈적하게 아우성치는 조청에 휘감기는 느낌으로.

 

 

 

ㅇ 고인돌, 교과서 밖에서 만나다.(Intro.)

강화도,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교과서에서 배웠던 강화도와 실제로 이래저래 놀러다녔던 강화도의

이미지 사이에는 꽤나 큰 갭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국사교과서 상권이었던가, 표지모델로 봤었던

이런 지석묘, 고인돌의 이미지가 강화도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였다면, 막상 강화도를

걷고 달리고 드라이브하면서 마주쳤던 풍경 중에 고인돌은 딱히 맞닥뜨렸던 적이 없는 거 같다.


의외로 이렇게 눈에 탁 뜨이는 공간에 그림처럼 놓여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데다가 평소에

별반 관심이 없으면 그만큼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나만의

특수한 사례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고인돌을 실제로 본 적도 굉장히 까마득한 거 같고,

한두기 띄엄띄엄 보는 게 아니라 좀 제대로 작정하고 본적도 없는 거 같고.

그러고 보면 고인돌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탁자모양 북방식, 바둑판모양 남방식,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매장양식이란 거 정도다. 이래서야 원, 저렇게 얼추 탁자모양 닮은

벤치가 덩그마니 놓여있는 것만 보고도 '탁자모양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생각할 지경이다.


이미 14회를 맞이했다는 강화도고인돌문화축제, 이번 기회에 단단히 작정하고 고인돌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강화도 여기저기에 산재해있다는 고인돌, 알아보고 찾아보고, 그러면

더 강화도를, 고인돌의 이미지들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알고 보면 고인돌은 영어로 Dolmen,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거석문화의

한 형태라고 한다. 큰 바위로 석상이나 무덤 등을 만들어 부족의 권위나 영광을 드러내는

문화, 어쩌면 그런 문화는 인류가 지배-피지배의 권력관계로 정립되고 나서 지배계층이

품게 되는 필연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닐까. 이집트의 피라밋,

요르단의 페트라, 모아이의 석상들, 그 커다랗고 무쓸모하지만 위풍당당한 석조물들. 

그렇지만 한국의 고인돌이 2000년 UNESCO의 세계문화유산 인증을 받은 건 나름의 고유함과 특성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강화, 고창이나 화순처럼 고인돌이 밀집된 곳이

흔치 않다고 한다. 전세계에 퍼진 약 6만여기의 고인돌 중 약 2/3(4만여기)가 우리나라에 있는데,

강화도의 경우는 북한과 남한 고인돌의 맥을 모두 반영하고 있어 그 형태가 다채롭고, 고창,화순은

보존상태가 좋고 한곳에 밀집된 특징이 있어 선정되었다.


특히 강화도의 경우, 북방의 탁자식과 남방의 바둑판식이 섞여 있고, 고려산을 중심으로

고지대에 분포하고 있어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강화도 고인돌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16년 조선총독부가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학술적 가치를 짐작할 만 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표적인 고인돌이 바로 첫사진, 그리고 강화고인돌문화축제가 벌어지는

곳인 부근리 고인돌이고, 그 외에 강화도에 산재한 150여기 중 70여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니 저렇게 다양한 고인돌 탐방로를 짜서 둘러볼 수 있는 거다.


ㅇ 고인돌 만드는 법

무릇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 선사시대 부족장 Style의 무덤이 언젠가 2000년대 이후 부활해서

새롭게 트렌드가 될지 모르는 거다. 당장 던져진 돌무더기가 산을 이루도록 맞아야 할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여하간 어떤 경로로던 고인돌(Dolmen) 스타일의 매장 풍습이 다시 유행할

떄를 대비하여 간단히 고인돌 만드는 과정을 보아두는 것도 좋겠다.

1. 채석하기 : 고인돌을 만들기에 좋은 편마암을 큰 바위조각으로 떼어낸다. 특히 강화도는

편마암이 풍부한 덕에 고인돌이 이렇게 많이 축조되었다고 이야기된다고 한다.

2. 바닥돌 세우기 : 땅을 파서 통나무를 지렛대처럼 이용해서 돌을 세운다. 꽤나 많은 인력과

당시로선 적잖은 물자가 동원되었을 테니, 아무래도 고인돌은 지배집단이 강력해진 징표.

3. 덮개돌 운반하기 : 흙으로 바닥돌 주위를 덮어 완만한 경사면을 만든 후, 통나무를 바퀴처럼

활용해서 덮개돌을 바닥돌 위로 끌어올린다. 커다란 고인돌의 경우 덮개돌을 옮기기 위해

천명에 가까운 인력이 소요되었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고 하니, 보통일은 아니었던 거다.


4. 고인돌 축조완료 : 완만한 경사면으로 쓰기 위해 덮었던 흙을 전부 파내고, 바닥돌 사이의

양쪽 열린 공간을 막음돌로 막는다. 그러고 나면 이제 '선사시대 부족장 Style' 고인돌 완성.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던 차례를 지내던, 아니면 굿판을 벌이던 남는 건 선사시대 매장양식을

21세기에 되살린 본인의 취향 문제랄까.


ㅇ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를 돌아보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수많은 고인돌을 갖고 있단다.

특히나 강화도, 고인돌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이 '강화도 지석묘'의 존재만으로도

강화도는 '고인돌의 나라' 수도 서울깜이다. 이 고인돌은 얼마나 공들여 축조되었는지 바닥이

무려 수십층이나 다져진 자취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저토록 당당한 듯.

그렇지만 사실 대부분의 고인돌들은 저렇게 반듯하고 딱 떨어지는 깔끔한 이미지로 유지되는

건 아니다. 근처에 있는 '신삼리고인돌', 논밭 한가운데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잔뜩 녹슨

철울타리로 둘러쳐진 커다란 너럭바위가 하나 있다 싶었더니 고인돌이랜다. 아놔. 잡초라도

좀 거둬내주고 울타리라도 좀 페인트칠이라도 다시 하던가, 나무울타리로 바꿈 좋겠고만.

그렇지만 요모조모 둘러보며 이 수천년 묵은 커다란 바위의 신비함을 느끼기에는 더없는

효과가 있는 거 같기도 하다. 좀처럼 연대를 식별할 수 없는 바위지만, 저렇게 판판하게

다듬어진 게 수천년 전의 인류 솜씨라는 걸 헤아리려면, 저렇게 잡초라도 무성하고

녹이라도 슬어야 좀 실감이 나는 거다. 바닥돌이 좀만 더 잘 보이면 좋겠지만.


지나던 주민분들, 폭삭 늙으신 할머니 농민분들이 사진찍는 걸 보더니 슬쩍 알려주시던

이야기 한 토막. 논을 넓히겠다며 주인이 저 바위를 움직이겠다고 으쌰으쌰한 적이 있댄다.

그게 언젠지, 삽으로 퍼내려 한건지 굴삭기를 동원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날밤

그의 꿈에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나타나서 크게 꾸짖었다나. 우가우가, 이러셨을려나.

 

그리고 좀더 차로 달리다가 문득 발견한 강화 부근리의 '점골 지석묘'. 제법 잔디도 깔리고

말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서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70여기의 강화도

고인돌 중 하나라고 한다. 앞선 '신삼리 고인돌'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이었어서

그렇게 방치되다시피 했던 걸까.


고려산 북쪽 능선을 따르다 끝자락에 축조된 점골 지셕묘는 상석과 4개의 바닥돌이 있는

전형적인 탁자형 고인돌로, 원래 상석과 바닥돌이 기울어져 있던 것을 2009년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며 발굴조사하고 나선 해체하고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문화재를

수선하거나 관리할 때 자주 쓰이는 '해체', '복원'이란 단어가 웬지 고인돌 앞에선 웃기다.

그냥 돌들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제대로 올려놓는, 굉장히 심플한 작업이지 않을까 싶은 거다.

물론 실제론, 제대로 이가 맞았는지라거나 어디를 괴어야 할지 따위 의외로 복잡할 듯.

'강화 삼거리 고인돌군'
엔 그래도 제법 고인돌들이 우르르 몰려있다길래 놓칠 수 없다 싶어

조금 길을 헤매고 뱅뱅 돌면서도 굳이 찾아갔다. 표지판들이 꽤나 오래전 구비된 듯 많이들

헐고 낡은데다가, 그렇게 많지 않아 가는 길 내내 이 길이 맞는지 조바심을 내야했다. 게다가

저렇게 철컥 자물쇠가 걸린 채 수십년은 녹슬고 있는 듯한 장애물까지.

옆으로 돌아 계속 앞으로 걸으니 점점 산길이 깊어지고 경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산 꼭대기를 오르는 길인가 싶어, 어느 순간부터 끊긴 인적을 찾아 되돌아가야 하나 걱정이

스물스물 일기 시작할 무렵. 문득 저런 조그마한 표지판이 땅에 박힌 걸 발견했다.

그 표지판 옆에는 저런 제법 커다랗고 판판한 바위가 땅에 박혀있었다. 저게 설마, 고인돌인가.

그저 바위라고 생각하기에는 은근히 인공의 손길이 가해진 느낌으로 판판한데다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지판이 앞에 이름표처럼 붙어있을 리가 없으니깐.

역시 그런 거였다. 계속 오르는 길 양편으로 제법 크거나 많이 크거나 조금 큰 바위들이 누워

있었고, 그게 좀 눈에 띄게 편편하다 싶은 것들엔 저런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이곳 강화도

삼거리 고인돌군에 크고 작은 고인돌들이 십여기나 모여 있다더니, 이런 것들이 이제 그

예고편이나 전조처럼 가는 길에 늘어서 있는 건가보다.

오르막길이 끝나고, 제법 평평해진 중턱에 올랐더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수천년 전에도 여긴

지금처럼 평평한 지형으로 양지바르게도 햇빛을 담뿍 받는 그런 곳이었을까, 수기의 고인돌이

주르르 늘어서 있다니 뭐랄까, 그때의 선사시대인들과 약간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저들도, 지금

내가 쬐는 이런 햇살을 쬐었겠구나, 오르막길 걷다가 이 평지에 탁 올라서니 기분좋았겠구나.

'강화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이 산재해 있으며, 특히 이들 중에

10-20여기에 달하는 군집을 이루는 고인돌군이 5개가 있다. 이 중 하나인 삼거리고인돌군은

고려산 북쪽 능선에 위치하며, 모두 10여기의 북방식 고인돌이 3개의 소군집을 이루고 있다.

삼거리 고인돌 중에는 덮개돌에 '성혈'이라고 하는 작은 구멍이 패여있기도 하는데 이를

별자리와 연관짓기도 한다. 2000년 12월 2일 고창,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덮개돌이 미끄러져 내려간 걸 제외하면 형태가 제법 온전히 남은데다가

덮개돌이나 바닥돌이 고른 두께로 납작하게 다듬어진 게 꽤나 공력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가히 삼거리고인돌군의 대표선수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무너져 내리지 않았으면 최근에

만들어진 석조 탁자라고 해도 믿었을 거 같다. 차라리 무너지며 뒤틀려서 아마도 부족장의

유해가 뉘여졌을 그 내부 공간이 드러나고 나니까 고인돌스러운 거 같다.
 


누군가가 옆에 굴러다니는 납작한 조그만 돌들로 고인돌을 만들어놓고 떠났다. 뒤로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천년 전의 커다란 진품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자잘한 고인돌 모형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대부분 덮개돌이 미끄러져 내린 채 낙엽이 두껍게 덮이고, 잡초가

자라고 자잘한 돌들이 틈새를 메우고 있었다.


십여년 전에 조성된 무덤은 무섭지만, 수천년 전에 조성된 이곳 고인돌 무덤은 전혀 무섭지 않다.

그들의 팔다리가 놓였을 공간은 이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머리가 놓였을 곳에는 특히나

불쑥 뾰족뾰족한 잡초가 자라났다. 그네들의 양분을 빨아먹고 자랐을 거다, 라고 간단하게

치부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차이가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흙으로 돌아갔다가

지렁이에 먹혔다가, 물에 섞여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땅위로 흘러내리고 바다로 번져서,

온세상에 흩어져 있을 거다. 
 

그래서 이렇게 싱싱하고 원기왕성한 덩쿨이 되어 나무를 기어 오르기도 하고, 이미 죽어버린

나무등걸들이 때마침 바닥돌처럼 11자로 늘어선 가운데에서 부울쑥, 새싹을 틔우기도 하는건

아닐까. 수천년 전의 인류가 지금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대체 얼마나 길고 오랜 시간이

그 사이에 놓여있는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네들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공간인 고인돌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 망연한 수천년의 시간이 바싹 땡겨지고 조여지는 느낌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수천년동안 깨지지도 녹슬지도 변색되지도 않는 돌처럼

단단하고 완고한 그들의 거석문화가 아니라, 이렇듯 금세 녹슬고 낡아지는 슬레이트 같은 세상은

아닌가 더러 걱정스러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수천년 전 고인돌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렇게 전하는

그들의 본능적인 지혜랄까 원초적인 에너지를 우리도 갖고 있으려니 믿고 싶어지는 거다.


아까 신삼리 고인돌이 덩그마니 놓여있던 논밭을 지나 강화도를 빠져나오는 길.

수천년전 그때처럼 태양이 새빨갛게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를

빠져나오면서 내 안 어디에선가 틀림없이 각인되어있을 수천년전 인류의 흔적이 새삼

도드라져 보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