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인 왕궁, 그 거대한 정사각형 형태의 성벽 외곽으로 한바퀴를 돌고 나니 이제는 안으로 돌아다녀볼 차례.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은 근 이천년 가까이 숱한 사람들의 발걸음에 쓸려 광택에 광택을 더했음이 틀림없고, 온통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들의 위로는 그 오랜 세월의 현현인 것처럼 두텁고 육중한 벽돌들이 벽을 이루고 공간을 쌓았다.

 

 

 

두터운 외벽과 내벽 사이의 공간, 이 빈 틈새로 수백년이 지난 폐허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거처를 구하고, 그렇게 잊혀졌던 곳이라 했다.

 

그러다가 다시 스플릿과 이 왕궁이 주목을 받은 건 1차 세계대전 시기 항구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라고.

 

 

여전히 골목은 말그대로 미로와 같고, 곳곳에서 막다른 길 앞에 나를 멈춰세우지만, 그렇게 잠시 잦아든 발걸음 앞에 놓인 게

 

이런 비감하면서도 다정한 풍경이라면. 저런 대리석 받침은 대체 몇백년을 이곳에 버티고 있던 걸까. 누가 저리로 옮겨놨을까.

 

 

빼곡히 건물들로 이루어진 골목과 골목 사이를 뱅글뱅글 감아나가다 보면 그래도 곳곳에서 확 숨이 트이는 광장들을 만나게 된다.

 

동상 너머로 온통 벽을 지탱하기 위한 조임쇠들이 벽면 곳곳에 박혀 있는 오랜 건물이 보인다. 아마도 저건 무슨 행정관청이었으려나.

 

 

 

 

광장 여기저기서 새어나오는 골목들을 따라 둥둥 흘러나온 사람들,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건물들과 대리석에 눈이 부신다.

 

 

 

 

 

 

스플릿의 수산시장, 바다에 바로 접한 대로의 반질거리는 대리석 위로 생선 비린내가 바다향기를 짙게 풍긴다.

 

 

이 곳에 풍부한 해산물들, 그 중에서도 집게 달린 이 새우로 만든 요리들은 뭘 먹어도 맛있었던 듯.

 

 

바다를 옆으로 끼고 걸어가는 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거대한 옛 궁전에 기대어 지어진 까페와 주택들을 바라보며

 

바다냄새 나는 손가락으로 기타를 튕기던 아저씨는 잠시 그늘로 숨어들었다.

 

 

이 곳에 보이는 벽들은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왕궁의 남쪽 벽면이다. 폐허로 남겨진 곳에 사람들이 모여살기를 몇백년.

 

 

이제는 이런 쌍둥이 꼬맹이들도 보라색 옷 때깔 맞춰입고 찾아올만큼 유명한 유적지로 남았다.

 

 

거의 이천년이 다 되어가는 로마황제의 거대한 개인 궁전, 한참을 버려졌던 이곳엔 이제 유리창도 에어컨도 끼워맞췄다.

 

 

성의 동쪽 외벽에 기대어 펼쳐진 재래시장에선 올리브유니 꿀이니 채소니 과일이니 온갖 것들이 주섬주섬 펼쳐졌고.

 

샘플 하나씩을 뚜껑에 달고서 갖가지의 크기와 색깔과 모양을 뽐내는 단추들.

 

꽃이 무척이나 화려하다 했다. 알고 보니 꽃 위에다가 락카를 뿌린 건지 어쩐 건지 퍼렇게 뻘겋고.

 

비닐로 몸을 둘둘 대충 감아둔 돼지 서너마리가 통으로 매달린 정육점.

 

 

 

그리고 머리까지 고스란히 붙은 채 생전의 모습과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닭고기들. 이건 설마..채식을 유도하는 고도의 장치?

 

 

색색의 바지들과, 과하게 가슴과 엉덩이를 튕겨낸 마네킹들. 허리에서 에구구 소리나는 것만 같다.

 

핏물처럼 붉은 과즙이 흐르던 블러드 오렌지.

 

 

그리고 다른 곳보다 좀더 많이 허물어진 성벽을 바라보고 선 성당 하나.

 

예수의 12길이 굉장히 강렬한 색감과 필치로 그려진 인상적인 모습들을 한바퀴 둘러보니 마음이 써늘해졌다.

 

아마도 옆가게로 수다떨러간 주인아주머니 대신 노상의 꽃가게를 지키고 선 고양이 두마리. 한마리는 벌써 지겨운지 기지개다.

 

 

 

네모 반듯한 왕궁의 외벽을 따라 바깥 풍경을 한 바퀴, 벌써 남문과 동문을 지나 북문으로 향하는 참이다.

 

 

그리고 북문에서 만난 마법사 같은 차림의 거대한 동상 하나. 10세기 크로아티아의 주교였다는 닌스키의 동상이라나.

 

 

라틴어 대신 크로아티아 어로 예배를 보도록 했던 그의 의도에는 무심한 관광객들은, 문지르면 복이 온다는 그의

 

엄지발가락만 반질반질거리도록 쓰다듬고 떠나버렸나 보다.

 

스플릿의 구시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왕궁을 굽어볼 만큼 거대한 그의 모습, 그리고 저 역동적인 어깨와 손가락 놀림은

 

왠지 모를 위압감을 전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표정도 너무 진지해보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벽을 따라 돌면서 발견했던 가장 흥미롭던 장면 하나는 이 클래식 포크스바겐.

 

양쪽 어깨에 높은 건물을 올려둔 좁다란 골목 안에 짙게 배인 그늘을 벗어나던 샛노란 차로 향한 카메라를 의식했다.

 

문득 멈추더니, 다시 슬슬 뒤로 후진해서는 촬영할 준비를 하라며 손짓을 한다. 빵 터져서 웃고는 오케이, 손짓하니

 

살금살금, 대리석을 즈려밟으며 한바퀴 한바퀴 우아한 워킹. 양팔을 쭉 뻗어 하트 한번 그려줬더니 그쪽 역시 빵 터졌다.

 

세계각국의 유명 건축물들의 미니어처를 모아두었다는 제주 미니미니랜드, 삼십분의 일이라거나 십오분의 일

사이즈로 줄여놓았을 뿐 실물과 똑같다는 그 건축물들이 모인 곳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 다녀온 곳들, 보았던 곳들 앞에서 각자 인증샷을 찍으면 괜찮겠다 싶다. 간 데가 몇군데

안된다 하더라도 뭐, 어쨌든 세계 곳곳에 산재한 명소들이 한 곳에 모여있단 건 큰 메리트니깐.

건축물들 미니어쳐 앞에 섰을 때, 걸리버가 소인국에 떨어졌을 때의 느낌에 최대한 가까울수록 성공적인

거 아닐까. 소인들이 꼬물거리며 지어올리고 그 안에서 사는 건물들의 디테일이나 리얼리티란 건 그야말로

최고의 수준일 테고, 그들 소인들보다 크고 무딘 손으로 조그마한 건축물을 지어올리려면 말이다.

타이완의 중정기념당, 한 사람을 위한 공간, 중정기념당에서 장개석을 생각하다.

중국 자금성,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 내가 카메라랑 그다지 친하지 않던 시절 다녀왔던. 비가 내리는 궂은

어두컴컴한 날씨였지만 황금빛 기와지붕과 붉은 담벼락은 여전히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 캄보디아#31. 채색의 흔적을 발견하다, 앙코르 왓(1/3)

캄보디아#32. 박스 안의 박스, 무한선물상자를 열어보는 즐거움, 앙코르왓2

캄보디아#33. 앙코르왓의 전경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던 연못, 앙코르왓3

캄보디아의 앙코르톰. 사실 앙코르왓은 씨엠립의 여러 옛 사원 중 하나의 이름일 뿐.

캄보디아#4. '크메르의 미소' 바이욘(앙코르 톰)

이집트의 스핑크스. 이집트#7. 카이로 달동네를 거쳐 피라밋으로.

이집트#8. 쿠푸왕 대피라밋 안의 석관에 누워보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플랫아이언빌딩이 있었는데, 여기도 2001년..까마득한 과거에 다녀왔는지라.

뭐 자유의 여신상이나 플랫아이언에서 찍은 건 아니지만 어느날의 월스트리트.  풍요로운 땅 뉴욕의 공립도서관.


태국의 왕궁, 왕궁(Grand Palace)에서 만난 수호상, 랍스타 퍼레이드.

공원이 꽤나 넓었다. 무려 120여점의 건축물을 오밀조밀 세워둔 세계 7대 미니어처 파크라니 이정도 크기는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조경까지 생각하고 지역이니 나름의 테마에 따라 보기좋게 진열하려면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거 같다. 어느 순간 비가 쏴아 쏟아붓기 시작해서 부랴부랴 비를 피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우의를 사입고 구경을 재개했다.


인도의 타지마할, 인도#5. 우윳빛깔 풍만한 타지마할의 자체발광, 하악하악.

미국의 워싱턴 국회의사당. 여기도 2001년에 3개월동안 체류하며 불법으로 알바하며 모은 돈으로 갔던 곳.

쿠웨이트의 쿠웨이트타워, [쿠웨이트] 24시간의 쿠웨이트 체류.

중국의 만리장성, 미니어처 건축물과 건축물 사이에 뱀처럼 몸을 좌우로 뒤채며 늘어져있었다. 

역시 내가 블로그를 하기 전, 카메라랑 친하기 전에 다녀왔던 곳. 


미국의 백악관. 워싱턴을 샅샅이 훑었던 그 때, 마일스톤 앞에서 잔뜩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던 곳.

그리고 역시 미국의 링컨 기념관. 이번에 정말 재미없던 트랜스포머3에서 저 거대한 의자에 앉은 링컨을

밀어내고 나쁜 로봇이 편하게 앉았었다.

여긴 다녀오진 않았지만, 이 곳에서 가장 크고 이쁜 미니어처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어서 한 장.

이탈리아의 트레비분수였다던가.

이것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초록빛깔 잔디와 잘 어울리는 게 왠지 스위스 쯤에 있는 뭔가가 아닐까.

안 가본 나라가 너무 많은 거다. 이곳에 모인 것들은 전세계 곳곳의 50개국을 대표하는 한두점들일 뿐인데도

이 중에서도 안 가보고 모르는 것들이 이리도 많다니. 미니어처 말고 진품을 직접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그리고 한국의 불국사. 여기야 뭐,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많이들 갔었지만, 막상 혼자던 친구랑이던

한번 다시 가면 새삼스러운 구석이 참 많던 곳이다. 불국사 말고도 경주라는 도시가 그랬다.

청와대. 시화연풍, 청와대 들어가기.

남대문, 지금 열심히 복원공사중일 텐데 이전보다 더욱 오리지널에 가깝고 단단하게 복원되면 좋겠다.

건축물들만 밋밋하게 열맞춰 늘어선 게 아니라, 나름의 야트막한 언덕이나 구릉이 있었고 또 이런 나무들도

있었으며 연못도 있고 다리도 있고 그랬다. 이끼가 파랗게 낀 보슬보슬한 촉감의 나무에 덩굴 하나가 체인처럼

기둥을 휘감은 채 흘러내린 모습이 너무 이뻤다.

하루방을 뭔가 캐릭터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 같은데, 좀 아쉽다. 좀더 간결하고 참신하게 바꿨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좀더 귀여웠어야 했지 싶다.


제주도 똥돼지를 멀뚱하게 바라보는 젊은이 하루방.

아무래도 제주가 좀 습하고 따뜻하고 그래서 그런지 나무들이 조금만 그늘진 곳이다 하면 저토록 빽빽히

이끼가 끼는 거 같다. 온통 연두빛 융단을 휘감은 듯한 느낌의 나무둥치.

세계 위인들의 조각상들도 있었다. 어떻게 선정된 위인들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선수로는 충무공 이순신과

세종대왕. 아마 화폐에 활용된 인물을 기준으로 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보다 놀랍고 기분좋았던 건 바로

맑스가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단 사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맑스의 조각상 뒤에서 주먹 불끈 쥐고 인증샷 찍고는 맑스 조각상을 따로 찍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러시아어가 적혀있는 그의 조각상을 전시하다니,

미니랜드가 급 좋아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만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공간도 있었다. 스머프들이 뛰노는 마을 뒤에서 음흉하게 웃으며

쳐다보고 있는 가가멜과 그의 고양이 아즈라엘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똘똘이 스머프 뒤로 텔레토비도 보인다.

그리고 원피스! 루피와 조로, 샹띠가 멋진 포즈를 잡고 있었는데 애들 보다는 오히려 내 또래의 '어른'들이

더 좋아라하던 포토존이었던 듯. 그나저나 대체 원피스는 언제 완결되려나.

무엇보다 캐릭터들 중의 압권이자 대미는 우리의 뽀통령. 모자빨과 안경빨일 뿐, 조그만한 눈에 앞머리 탈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게 함정이라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던 포토존.

이건 태권V의 입체그림이라고 했다. 정해진 뷰포인트에 두발을 고정하고 그림을 바라보면 바닥에 그려진

그림이 마치 벽처럼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거다. 아마도 지정된 점으로 집중되도록 소실점을 잡고선

원근을 감안한 덕분인 듯 한데, 페인트칠한지 좀 오래라 발색이 선명하진 않아도 제법 일어난 느낌이다.

쥬라기공원에 등장했던 렉터, 티라노사우루스도 있었다. 꽤나 정밀하게 묘사된 피부나 이빨, 발톱의

모양새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박치기하는 애들, 이름이 뭐더라, 그 초식공룡들도 마치 산책로를

점거할 듯한 기세로 산책로 옆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은, 무료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박아두고 있던 매직거울체험관. 미로공원에서 이미

겪었듯 길 찾기에는 영 젬병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 이 기둥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듯 보이는 거울의 방에서

자칫 못 나올 뻔 했다. 두 손을 엉거주춤 벌리고 앞의 공간을 더듬으며 그게 거울인지 아님 열린 공간이지

확인하며 한참을 버벅댄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비만 안 왔으면 좀더 둘러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그래도 제법 꼼꼼하게 다 살펴보았더니 두시간 가까이

흘렀던 거 같다. 나오는 길에 눈길을 잡았던 건 오줌싸는 소녀의 상. 이건 대체 어느 나라에 있는 조각상을

소개한 건지는 전혀 확인하지 못했지만 익살맞은 표정이나 편안해보이는 자세가 매력적이었다.





중요한 장소임을 드러내는 표식들 중에는, 하늘 높이 솟은 지붕이나 끝없이 늘어선 두툼한 기둥들 이외에도

어디에서든 문간을 지키고 섰는 온갖 수호상들이 있다. 청동, 대리석, 현무암질, 검은 오석, 철..다양한 종류의

재질에 다양한 표정, 다양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대개 상상 속의 동물이란 점에선 유사한 것 같다. 꼬맹이들이

좋아라 하며 수호상의 발치를 차지하곤 방긋 웃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한쪽 벽면의 그림을 복원하고 있는 걸까, 어떤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두무릎을 모으고 앉아 벽화에 붓을 대고

계셨다. 옆에 놓인 여러 도구들이나 단단히 짜여진 아시바를 보면 훼손된 벽화를 덧칠하거나 다시 복구하는 전문가

틱한 작업이긴 한 거 같은데...붓끝이 너무 뭉툭하고 두툼해서 염려스럽다. 저렇게 세밀한 필치로 묘사된 화려한

마차와 건물들, 자연 풍광들을 묘사하려다가 되려 모두 뭉개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저 못생긴 동물은 해태인 걸까..개구리랑 사자를 합쳐놓은 거 같기도 하고, 꼬리는 볏이 듬성듬성 서있는게..닭?

그러고 보니 해태는 어느새 서울의 상징동물이 되었다고 들었었다. 대체 해태가 뭔지 문득 궁금해져서.

해태獬豸 ≒해타(). :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 가운데에 뿔이 있다고 한다. 중국 문헌인 《이물지()》에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대사헌의 흉배에 가식()되기도 하였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사전 참조)

왕궁을 걷다 보면 순간 길을 잃고 헤맨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비슷한 건물들이 온통 시야를 가리고 겹쳐섰어서,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걸까, 무슨 건물과 무슨 건물 사이에 끼어 있는 걸까 지도를 찾아 확인하게 된다. 비가 살짝

나리고 바람이 쌀쌀한 날씨에도 여행객들은 개의치 않고 걷고 있다.

태국 왕실을 지키는 근위병의 근엄한 자태..라지만, 영국의 근위병이나 다른 서구 제국의 그것과는 느낌이 사실

많이 다르다. 일단 짧고, 왜소한 체구, 게다가 왠지 빈티가 살짝 나보이는 외모까지. 온갖 '양이(洋夷)'의 문물에

왜곡되어 버린 나의 시신경, 감각기관의 탓인 걸까 아님 정말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까. 어쨌든 이 분도 꼼짝않고

빳빳이 서선 왕실에 근엄함과 권위를 보탰다. 옆에서 왠지 뿌듯한 표정을 짓고 계신 부모님.

빗방울을 툭, 툭 흘리는 칠칠맞은 하늘 탓에 시야가 다소 뿌옇고 시크무레죽죽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화려하게

꾸며진 궁궐 건물들의 지붕은 되려 적당한 광채를 머금고 안온하게 느껴졌다. 사실 햇볕이 살짝 강하게 내려쬐었을

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단 말이다. 태국 왕실이 국민들로부터 받고 있는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궁궐 지붕에

비기자면, 이런 식으로 적당히 구름낀 하늘 아래 담백한 광택만을 부드럽게 흩뿌리는 순금색의 느낌? 햇살마저

반사시켜 지가 반짝이는 양 보는 사람의 시야를 온통 얼룩지게 만들었다면, 그런 신뢰와 존경은 불가했을 거다.

중요한 사원, 신전들을 보호하는 수호상들. 비슷한 모티프로 제작된 상상속의 동물들이나 인물들이지만, 곳곳에서
 
색다른 표정과 뉘앙스를 만나게 된다. 약간은 찡그린, 멍청해보이기도 하고, 뭔가 불만에 가득하거나 화장실이

급해보이기도 한 울상인 표정도.

왠지 색목인 삘이다. 다른 수호상에 비해 월등한 사이즈도 사이즈려니와, 움푹 패인 커다란 눈에 높고 큰 코,

게다가 이국적인 콧수염까지. 한 때 태국 왕실에서 서양인이 근무했던 적이 있는 걸까. 괜히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보게 만드는 수호상.

왕궁은 야트막한 담을 경계로 외부 세계와 갈라져 있다. 파란색빨간색 촌스러운 색깔의 택시가 유유히 굴러다니는

2차선 도로. 이 곳을 구경하고 나니까 우리나라의 궁궐들도 한번 작정하고 제대로 구경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대조군이 있어야 그에 비교해서 뭐는 어떻고 뭐는 어떻고, 이렇게 나불나불 이야기할 거리들이 생길

텐데 말이다.

뜬금없는 랍스터 사진. 저녁을 먹으러 근처 씨푸드 레스토랑에 갔는데, 들은 것과 달리 랍스터 가격이 한국에 비해

그닥 싸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배터지게 함 먹어보려던 애초의 계획을 철회하고 맛만 보는 걸로 급선회.

내 손바닥 두개 합친 것보다도 더 큰 듯한 이 통통하다 못해 퉁퉁하고 거대한 랍스터를 먹은 건 아니고. 



 
슬랩스틱이 난무하던 어린 시절의 개그 프로에서 단골 레퍼토리로 나오던 동네가 있다. 방콕. 방에 콕? 그 방콕.

태국의 왕이 살던, 그야말로 방콕 중에서도 노른자위라 할 Grand Palace 내에 세워져 있는 이 황금빛 기둥은

'도시의 기둥'이란 의미의 락 므앙이라고 한다. 태국인들은 도시를 세우면 꼭 기둥을 세우고 그 곳에 사당을

세운다나. 끄트머리가 연꽃봉오리 모양인 황금빛 기둥은 얼핏 두꺼운 국기봉같기도 하지만, 글쎄, 아마도

태국인들은 이 기둥이 도시 위의 하늘을 떠받친다고 생각한 것일까.

뭔가 영험한 힘이 깃들었다는 곳은 한국이나 태국이나 온통 번쩍번쩍하고 화려한 문양이 눈에 띈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벽지 디자인하며, 붉은빛 금빛으로 채색된 문짝하며, 그리고 그 위의 얹힌 핑크 테두리 그림까지. 참

이질적이다 싶으면서도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익숙한 면이 없지 않다. 한국의 절들에서 보이는 사천왕상이나

다른 벽화들, 혹은 불교에 포섭된 삼신각의 그림들까지.

락 므앙에 들어가는 문 중의 하나였지 싶다. 저토록 조밀하고 섬세하게 표현된 문양들과 문짝의 그림들이라니.

금색을 그냥 쳐발랐다면 무지 촌스럽고 유치찬란해 보였을 텐데, 금색의 고급스러움과 위풍당당한 느낌은

살리면서도 화려함 역시 갖추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지 않았을까.

왕궁, Grand Palace는 어디나 그렇듯 무지하게 넓다. 여러 전각으로 구획된 공간마다 층층이 높고 주렁주렁한

장식이 달린 럭셔리 지붕이 턱하니 얹혀있었다. 상대적으로 심플하고 깔끔해 보이기만 하는 하얗고 네모난 기둥들.

이곳 기둥들을 전부 그 '도시의 기둥'처럼 금칠해놨었음 더욱 화려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외려 시선이 분산돼

지붕에서 펼쳐지는 기기묘묘한 장식들의 향연을 즐기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고.

전철 안에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태국인들의 먼 선조들이 일군 유물들. 그치만 서울의 을지로입구쯤서 드문드문

마주치며 과거의 사실을 일깨워주는 황당한 대리석비들처럼, 기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과 과거의 그것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근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치장되기 시작한 과거, 박물관안에 모셔지고, 왕궁을

복원하고, 그렇게 시간 앞에 허물어지려는 기억과 흔적들을 애써 그러쥐며 난 관광중인 한국인, 그대는 순찰중인

태국인. 조금은 선명하게 너와 내가 갈라진다.

사진을 찍다 보면 문득, 아..이 건물들은 계속해서 내 시선을 높은 곳에 잡아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위풍당당하고 권위를 과시하려 지어진 건물들이 그렇다. 왕궁 안으로 들어와서 내 카메라는 계속 높은 곳을 향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지나다니는 여행자들의 목을 전부 뎅강뎅강 잘라버리고 건물을 담기에 여념이 없어지고 만다.

그치만 건물들이 워낙 화려한데다가 온통 금빛으로 번쩍거리니 원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야지. 숨겨진 고대의

황금도시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면 주위의 여행자들, 동료들 목을 뎅강뎅강 친다는 스토리도 나오는 게

전혀 이상할 일은 아니다.

같은 건물을 다른 측면에서 뒤로 잡고선, 조금 호흡을 가다듬어 한걸음 뒤로 재겨나서 찍은 사진엔 그래도 아빠가

제대로 들어가 있다. 왕궁이 관광자원화되려면 저런 식의 울타리는 필수인 걸까. 곳곳에서 마주치는 금지의 표식은

이 공간을 방문한 우리가 어쩜 상당한 불청객인지도 모른다는-실제로 그렇겠지만-느낌을 상기시키곤 했다.

이 금색의 원뿔탑은 부처님의 가슴뼈가 안치되어 있는 뼈라고 했다. 대체 어디에?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뭐 있다니

그런가보다 할 뿐. 너무 둔탁한 형태의 금빛 탑이라서 처음 봤을 땐 왠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햇살이

강하게 내리쬘 때는 온통 번쩍거려서 눈이 아프도록 부시더니 살짝 구름이 끼니까 번쩍이던 불빛이 여기저기서

툭툭 힘을 잃고 떨어져내렸다.

계단 옆 난간도 범상치 않은 용가리 모양이다. 그것도 머리가 다섯개 짜리인. 사실 용이라기엔 입크기나 모양이

살짝 조잡스러워서 무슨 제삿상 굴비 입과 이빨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그래도 머리 다섯개 위에 제각기 그럴듯한

모자를 쓰고 있으니 용이려니 너그러이 받아주기로 했다.

저 탑은 뭔가 돌덩이로 탑의 형체만 얼추 잡아놓고, 금색 천이나 금색 벽지로 얼기설기 풀칠해서 싸발라버린 느낌.

축축 늘어진 윤곽들도 그렇고, 왠지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의 금빛 광택도 그렇고.

그 탑을 밑에서 받치고 있는 괴물딱지들이 신기하고도 귀여워서, 어정쩡하지만 아빠랑 나랑 그 포즈를 따라했다.

...뭔가 저 괴물딱지들은 심하게 쩍벌쟁이들인 거다. 어떻게 저 자세가 가능하단 말이냐.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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