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부터 온갖 자그레브의 명소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려면 손가락이 열개여도 부족하겠다. 사방팔방을 가리키는 화살표.


 옐라치치 광장으로부터 두 개의 언덕, 카프톨과 그라데츠로 뻗어나가는 오밀조밀한 골목 틈새를 비집고 늘어지는 햇살.


 

 성모승천 대성당이 삐죽 고개를 디밀고 있는 골목도 있고.


옐라치차 광장의 중심, 광장보다 움푹 들어가서 조성된 이 분수대 주변은 사람들이 층층이 앉기 참 좋게도 생겼다.


 짙은 구름이 잠시 지나고 햇볕이 내리는 그 곳은 역시나, 햇살을 즐기며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들을 위한 명당자리.


  

 

옐라치차 광장 중앙에 선 기마상이 조그맣게 보이는 각도, 나도 질세라 분수 옆 돌계단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참이다.


옐라치차 왕을 기리는 기마상 앞에는 크로아티아의 국기와 꽃들, 그리고 촛불이 잔뜩 봉헌되었다. 신생국의 포스란 이런 건가.

  

 

광장 옆의 기념품 가게. 자그레브의 고유한 빨간 하트 모양의 장식품이 화려하다.

 

 이곳의 축구 사랑이 유별나다더니 아예 기념품 샵들이 곳곳에 늘어섰다. 



기마상 앞을 지나는 사람들, 어떻게 보면 그다지 크지 않은 광장일 수도 있겠지만 자그레브의 규모에 비기면 작진 않은 듯.

 

 

그리고 광장의 한켠에서 묵주니 성모상이니 등등을 팔고 계시던 분 뒤로 보이는-어디에서나 크게 눈에 띄는-저 광고는 참.




한국전쟁은, 어쩌면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국가 형성(Nation-building)의

급격하고도 폭력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사회시스템을

깨고 영토와 국민, 그리고 그것들을 규율할 대내적 주권을 장악한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거다.

물론 식민지 조선시대부터 이미 '근대'는 수혈되기 시작했지만, 전쟁은 그야말로 시골무지랭이

촌동네까지도 비켜가지 않고 적나라한 근대국가의 위력과 속성을 뼛속까지 새겨준 셈이다.


밤낮으로 국군과 산사람(인민군)들이 마을을 자신들의 영토라며 선혈이 낭자한 땅따먹기를 하고,

마을사람들이 상대 군인을 돕는 건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며 을러대고 핍박하는 모습은

남한과 북한, 두 개의 근대국가가 어떻게 서로에 기대어 세워졌는지 그 적대적 공존의 기원을 보여준다.

게다가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가진 것을 탈탈 털어 바치고 필요하면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는 건,

지금은 이미 너무도 공고해지고 세련되어져버려 잘 보이지도 않는 국가의 폭력성,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같은 대극장에서 연극이 올랐다는 점으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연극 '산불'은

이런 지점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 할 연극'이라느니, '리얼리즘 희곡'의

대명사라느니, 그런 홍보 문구들은 자연스레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이데올로기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나 비인간성, 혹은 근대국가의 위선이나 폭력성을 천착하며 쉽지 않은, 가슴

답답해지는 느낌을 가득 안고 나오겠구나 했던 거다. 답없는 질문, 그렇지만 질문 자체로 새로운

프레임이 잡히고 당연했던 상식들을 낯설게 보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멋진 경험이랄까.


그런 기대가 좀 컸던 탓일까. 리얼리즘은 커다란 무대 위에 구현된 산골마을의 초가집이나 언덕길,

봄에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과 막판의 산불 이미지가 리얼했다고 붙여질 만한 이름은 아닐 텐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한 어정쩡한 치정극을 본 느낌이었다. 여리고 나약한

인텔리 '선생님'을 두고 이년간 수절했던 두 과부가 욕정과 애정이 뒤범벅되어 만들어낸 삼각관계,

한국전쟁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조건이었을 뿐 꼭 그때가 배경일 필요는 없었을 거 같고,

그나마 사랑 이야기조차 제대로 설득력있게 풀리지는 않은 것 같다.


1부에서는 나름 충실하게 한국전쟁의 비극성과 작위적이지만 흉포한 근대국가의 폭력성을

묘사하려 애쓴 거 같은데,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겨울이 지나고 순식간에 봄이 오며 시작하는

2부에서는 다른 것들은 다 뒤로 물러나고 급작스레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갈등과 절망에

초점이 맞춰지는 거다. 남자의 분노도 여자들의 절망도 공감하기에는 너무 급작스러워서, 이후

온통 무대를 벌겋게 피어오른 산불은 극의 절정이라거나 극적인 결말이라기보다는 그냥 모든 문제를

무화시키고 덮어버리는 느낌이었다.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나도 모르게 극이 계속 진행되었던 걸까.


물론 공정하게 말하자면 꽤나 재미있었다. 연기도 좋았고, 넓은 무대를 십분 활용한 동선이라거나

그럴듯한 배경과 효과들, 그리고 무대인사 때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부자의 무게감이나 관록까지.

다만 막이 내리고 돌아나오면서 뭔가 당황스럽고, 딱히 이야기의 포커스를 잡아서 이해하기엔

모호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 희곡의 원저자가 누구던, 어떤 금테가 둘려 있던 간에, 글쎄,

'한국전쟁기'라는 특수하고도 깊숙한 상흔을 갖고 이정도 문제의식 밖에 못 꺼내고 이정도 이야기

풀어낸다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특히나 '한국인이 꼭 봐야 할 연극'이라고 팔고 싶다면.







원빈의 무겁고 까만 눈빛과 (원빈의) 화려하고 산뜻한 피의 향연. 그 두개가 장착되었으니

영화가 그렇게 떴던 거 아닐까. 원빈의 등언저리에 붙은 근육과 팔근육이 꿈틀거리며 움직여

만들어낸 군더더기없고 단호한 선들이 쓰레기들의 목을 따고 동맥을 끊어 빨간 피를 콸콸

쏟아내는 장면이란 건, 남자가 보아도 굉장히 아름답다 느껴질 만한 장면들이었으니.


그리고 하나가 더 있지 않나 싶다. 제목, '아저씨'. 특히 여성에게 '아저씨'라는 호칭이 갖는

안도감 혹은 적당한 거리감이 먹혔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이긴 하나 연애나 섹슈얼한 의미의

가능성을 가진 대상이 아니라 육체적이거나 성적인 의미가 지워진 상대. 비슷한 위치의 두 사람이

감정을 밀고 당기고 하는게 아니라 여성이 확 낮아진-그러나 우월한-위치에서 그저 바라보고

부탁하고 얻어낼 수 있는 그런 편하고 편리한 상대.(자신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를 무기로.)


그래서 이 영화는 김새론이 연기한 소미의 시각에서 줄곧 바라보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말없이 보듬어주고, 이불덮어주고, 심지어 목숨을 걸고 구하러 오는

싸움도 잘하고 과거도 멋있고 잘생기기까지한 '아저씨'. 그 아저씨는 다른 남자들처럼 귀찮게

그녀를 치근대거나 몸달라 마음달라 보채지도 않는 거다. 김새론의 눈높이에 어느결에

동화되어 버린 여성들의 환타지를 만족시키는 무독하고 일방적인 애정을 제공하는 아저씨.


그러고 보면 그런 원빈 아저씨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허름하고 오징어 비스무레하게

생겼다는 일반 아저씨들과의 차이는 딱 그거다. 아저씨라 불릴만큼 연령대도 다르고 연애의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점은 같지만, 보통은 싸움도 못하고 과거는 초라하며 대개 자신은

중간은 간다는 환상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거다. 아저씨라고 다 같은 아저씨가 아니다.



p.s. 그런데 소미는 아저씨를 계속 기다렸을까. 그녀와 아저씨의 뭐라 이름붙이기 힘든

애정의 관계는, 부모자식간의 그런 형태로 갈까 아니면 남녀간의 그런 형태로 갈까. 저런

스토리의 끝에는 어쩜 일반적 차원에선 '로리콘'이라 손가락질할 이야기가 덧붙지는 않을까.

그리고 난 왜 그런 게 궁금해지는 걸까, 그냥 다 사랑인데.



난 김혜자가 싫었다. 그녀의 가늘고 여리여리한 목소리, 때로는 신경질적일 만큼 하이톤의 그 목소리도 싫었고,

그 목소리가 이와 혀를 걸러 발출될 때의 발음과 말투도, 그녀의 얇은 입술도 싫었다. 쉽게 근심그늘이 고이는

웅덩이같은 그녀의 양미간, 짙은 주름도 보기 싫었고 무언가 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있는 듯한 눈매와 그

축축한 눈동자도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연기는 언제나 '엄마'였다. '국민 엄마'라는 칭호로 소개되곤 하던 그녀에게선, 정말이지

여자가 아닌 엄마의 표시만이 가득했다. 잔소리와 더러는 짜증을 예비하기 위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자식 걱정에 굵게 패인 주름, 자식놈이 커나갈수록 쉬이 축축해지는 눈동자까지. 그런 '엄마'만

있는 게 아니라지만, 그녀는 그런 특징들을 꽉 쥐고 '엄마' 역할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런 엄마, 전원일기 속 엄마, 드라마 속 엄마에 더해 봉준호의 '마더'는 그녀에게서 살짝 불온하고 불안한

엄마 모습을 캐내고자 한다. 섹스가 없는 상태에서의 엄마, 섹스를 원하지만 충족할 수 없는 엄마의 모습들.

간이 옷장 안에 숨어 젊은 남녀의 육덕진 섹스를 훔쳐보는 엄마, 고등학생의 부탁으로 생리대를 고르고

계산하며 눈치보는 엄마, 휴대폰 속 벌거벗은 남자-섹스 구매자로서-들 사진을 한장씩 넘겨보는 엄마,

심지어 자신을 막 대하는 아들 친구에 묘한 긴장감을 느끼는 엄마. (어쩌면 이미 그녀와 아들 친구놈은

한번쯤 잤던 사이라고 힌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그녀, 엄마는 조금은 지쳐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라곤 아들 밖에 없는 집에서 둘이 산 지 오래다.

다 큰 아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해 팬티만 입은 채 한 이불을 덮고 엄마 가슴을 조물딱대며 잠들곤 하니,

'엄마와 잔다'는 표현이 계속해서 중의적으로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닌 거다. 아직은, 아마 앞으로도,

상상할 법한 '패륜'의 힌트가 예기되지는 않았으니 엄마는 만족되지 못한 채 지치거나 욕구불만이거나.

그렇지 않을까. 아마도 그래서 노상에 방뇨하는 아들의 그곳에 유심스레 눈길이 간 거다.


남자의 욕구야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그녀의 다 큰 아들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빠졌어도 육체는 건전하니,
 
쌓이기만 하는 욕구는 그를 '발정난 개'로 만들어 버린다. 굳이 '오이디푸스 신드롬'이니 따위 엄마에

대한 근원적 욕구를 운운할 생각은 없지만, 그를 사랑해주고 보듬어주는 여자는 그녀 뿐이다. 비록

그녀가 다섯살즈음 농약을 먹였을지언정, 그녀는 마르지 않고 넘칠듯한 사랑으로 그를 무조건 믿고

보호하며 지지한다는 걸 안다. 그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대안은, 엄마다.


아들에게 '바보'라는 표현이 그 누적된 욕구불만을 파열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면, 엄마에겐 그

아들의 존재-하나뿐인 피붙이이자 '남자'로서-가 위기에 처할 때 방아쇠가 작동한다. 천지사방을

뛰어다니며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애쓴다. 그치만 누구를 위한 구명일까. 바보천치 아들은, 콩밥도

맛있다며 교도소 안이 편하다는 아들은 사실 창살 안과 밖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혹, 엄마 자신을 위한 구명 활동 아닐까. 그녀가 살기 위한, 그녀의 욕구불만을 해소키 위한. 
 
그러고 보면 엄마에게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남자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은 더욱 서로에 의지하고, 지쳐가며, 또 헌신한다. 다른 방법이나 대안이 없기도 하다.

특히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에 대한 보호 본능이라 이름붙이던 모성애라 이름붙이던, 그녀는 아들로

인해 욕구불만이 강화되고 아들로 인해 욕구불만을 해소한다. 달리 기댈 곳이 없었던 그들의 애정이 쏟아져

나갈 유일한 통로,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 애정이 콸콸 쏟아지는 순간, 그녀는 말랐던 댐이 터지듯 온통

뿜어나오는 피분수 속에 두 손을 담궜다. 어느 순간 구르기 시작한 파국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으면서도

그 둘의 징글징글하고도 섬뜩하기까지 한 애정, 특히 엄마 혜자의 아들 도준에 대한 사랑은 더욱 뚜렷이

선연해지기만 한다.


"엄마는 원래 그런 존재야, 모성애란 그런 거지" 등등의 따뜻하지만 통속적인 이야기로 끝낼 영화는 아닌 거

같다. 그녀의 사랑은 알게모르게 현실적인 이해타산이 맞물려 있고, 다른 통로의 유무에 따라 그 강렬함이

결정되며, 그 기저엔 엄마이기 이전 사그라드는 여성으로서의 욕구불만이 마그마처럼 꿈틀대고 있다는. 

무조건 신성하고 순결한, 지고한 데다가 여성이 가진 본성과도 같은 덕목으로 찬양받는 '모성애'가 실은

그런 육체적인 욕망과 얼기설기 엮여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던 건 아닐까. 천상의 모성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19금)이라 쓰고 어여들 와서 많이 봐라, 라고 읽는다.

뭔가 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느니, 미성년자 휴게실을 별도로 설치 운영중이라느니 요란은 떨었지만 대체

한국에서 어떤 정도의 수위까지 가능할까 싶었다. 마침 데세랄을 지르고 처음 나간 출사, 그것도 야간 출사인

셈이어서 전시된 작품 하나하나 여러 차례 찍어가며 성능을 시험했다. 그다지 즐겼던 건 아니다.ㅋ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몇몇 장난스런 벽화가 나타나고는, 이런 수돗가가 나타났다. 불끈 힘을 쓰는 근육질의

남정네, 귀엽게 톡 배가 튀어나온 땅딸한 아저씨, 비쩍 골았지만 길이(응?)는 못지 않은 할아버지까지.

땅에는 관람 동선을 알리는 '버섯'이 큼지막하게 그려져있고, 하늘에는 남녀가 네발로 기고 있었다.

아저씨의 불룩한 바지, 그리고 불독의 뭉툭하고 불룩한 콧날. 방향이며 각도가 절묘하다. 제목은 사진상으로

잘 보이진 않지만 이름하야 "즐거운 산책".

농염한 여체였다. 색계에서 탕웨이가 보여주었던 동양적 육체미랄까, 늘씬하고 쭉쭉 시원하게 뻗어나간 느낌은

없지만 굉장히 탐스럽고 욕정적인.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엉덩이하며.

저 오늘 한가해요, I'm not busy. 라는 제목이었다. 아 그러신가요, 저는 앞으로 계속 한가해요, 라며

당장이라도 덤벼들 태세를 0.5초간 갖췄다가 움찔, 해제했다.

쟤들은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하며 즐기는 걸까, 아니면 땅에 거꾸로 처박혀서조차 탐닉하는 걸까.

발등을 묘하게 꺽어세운 거대한 다리 네개가 분수대 한가운데서 엉켰고, 내 머릿속에선 구지가와

처용가가 묘하게 얽혔다. 다리 둘은 내것이건만 나머지 둘은 누구것일꼬, 머리를 당장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아, 작가의 센스작렬. 호미걸이랜다.
 
그나저나 이들의 불끈 달아오른 욕구와 애정을 표현하기에는 하반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행여 하반신만 잘라내 보여주는 건 이것이 '애정'이 아닌 '욕정', '육욕'에 가깝다는 함축은 아닐지.

인도의 경전 카마수트라. 만트라의 기원이 되었다던가, 얼추 알고 있기론 중국의 소녀경과 함께 성적 에너지의

활용을 통한 인간 정신의 고양, 궁극의 해탈을 꿈꾸었다던, 그렇지만 낮은 차원에서는 방중술의 묘법을

가르쳤다던 책이다.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는 제주도인 거다. 저기에 서로 얼굴 집어넣고 행복한 결혼생활, 행복한 애정생활하며

백년해로하라는 뜻이겠거니, '건전'하게 발전적으로 생각키로 했다.

거시기, 그 뭣이냐, 할때의 거시기가 이 거시기인지는. 당근과 버섯, 로켓과 뱀대가리, 심지어는 부리까지

동원되었던 '이상한 나라의 응응응들'. 그러고 보면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거시기'의 묘사는 채털리부인의

사랑, 거기에 나오는 산지기의 아내가 가진 응응응을 묘사하던 장면이다. 새의 부리같았다던가.

오호......'비밀의 화원', '다복솔', '깊은 산속 옹달샘', '마르지 않는 샘', '지옥의 불구덩이'.

세상의 모든 은유는 어쩌면 하나로 통한다.

밑에는 연결된 크랭크가 있어서,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위의 모빌이 움직인다. 덜커덕덜커덕, 덩기덕쿵더러러러

쿵기덕 쿵덕. 몇개의 모빌 연작이었는데 앞에는 저마다 다른 제목이, 혹은 설명서가 붙어있었다. '부드럽게

돌리시오', '유연하게 돌리시오'..뭐 그런 따위의 지침.

굉장히 맘에 들었던 구도였다. 제목은 천하장사. 무슨 쏘세지도 아니고..했다가, 아. 했다.

말뚝박기를 영어로 번역하자면 Horse Riding이랜다. 썩 와닿는 의역이다. 여성의 간절하면서도 섬세한

손놀림은 에로틱하고, 욱씬, 고개를 쳐든 그것은 굉장히 도도하고 원시적이다.

고개를 쳐든 이유? 고기가 물을 따르듯. 응응응은 응응응을 찾기 마련. 나비모양 문신의 탁월한 포지셔닝. 

왠지 구릿빛 재료가 그대로 그네들의 피부질감으로 살아난다. 바다의 왕 포세이돈이 바닷가 모래사장을

거닐던 처자를 납치했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에 어울릴법하다 싶은 건, 이들을 떠받치는 욕정이란 이름의

해일 때문인 걸까. 그런 와중 일본의 촉수괴물이 나타나는 성인망가를 연상케 하는 해일의 미묘한 물결.

여성상위 시대. 유방의 옛 고사를 따르자면 저 다리 밑을 기어야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라능. 

거꾸로 여자를 메다꽂고는, 발사~* 갑니다 슝슝슝. 뱅글뱅글 돌아가는 유도미사일처럼 하염없이 지루한

동심원을 그리며 목표물을 향해 뻗어나가는 '가늘고 긴' 응응응.

공원은 꽤나 넓었다. 그리고 몇 개의 실내 전시관을 갖고 있었는데, 거의 성인용품점을 방불케 하는 수준의

화려한 데코와 구비용품들이 흥미로웠던 전시관이 하나-여기는 파리 몽마르뜨에서 구경했던 성인용품점보다

볼 게 많았다. [파리여행] 물랑루즈 거리의 홍등가.-있었고, 이곳은 나무를 깍아 만든 목공 조각들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작품들은 뭐, 이미 수많은 남근석이니 남근목이니 그런 문화에 익숙하니만치 별다른 건 없었지만

가끔 재미난 것들도 있었다. 이 사진처럼 제목이 정말 운율감있게 딱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이 작품처럼 뭔가 정말 진하게 와닿는 필을 던져주는 것도 있었다. 시작, 을 말할 때의 설레임과 일말의 망설임,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 혹은 격정적인 기대감 따위. 주위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사서 선물하고 싶어지는 작품이랄까.(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하는 말이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조각공원을 한바퀴 돌아 나오는 길, 이번에는 '세차게 돌려주세요'라는 제목, 혹은 요청이

붙어있는 모빌 옆을 지나치게 되었다. 아, 하고 뭔가 깨닫고 말았다.

벤치조차 범상치 않은 그곳, 낮에 갔으면 꽤나 뻘쭘하거나 재미없었을 것 같다. 적당히 어둠이 배경을 지워주고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워주는 시간에, 조금은 더 '몰래 보는 재미'가 커지는 밤에 가는 게 좋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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