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로 뉴욕 시내에 고립될 뻔 하다가, 잠시 모마에서 쉬며 몸을 녹였던 기억. 보고 싶던 모네의 '수련'은 당분간 해외 투어중이라 아쉽게도 다음기회에.

 

 

 

무드 인디고.

 

 

꽃처럼 피고 지는 사랑, 사랑처럼 피고 지는 꽃. 꽃이 은유인지 사랑이 은유인지 헷갈릴 만큼 미셸 공드리의 환타지는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사라진다.

 

그게 과연 환타지였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모두 한송이 꽃이라면 세상은 온통 꽃이 지천에 피고지는 거대한 꽃밭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가면의 고백 - 10점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잔뜩 힘이 들어가기 쉽다.

자신의 지난 사랑, 심지어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토록 진실되고 아름답고 뜨거웠던 사랑은

두 번 다시 못 올 거라는 듯이,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또 자신에 대한 상대의 마음이 단색으로 칠해진다.


사실은 아니다. 금송아지라도 껴안고 있었던 듯한 지난 삶은 사실 적지않이 누덕누덕한 채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모인 것에 불과했으며, 지난 사랑 역시 어거지로 강변했던 단심(丹心)의 모노톤이 아닌

선명하고 흐릿한 스펙트럼 내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쉼없이 급변하며-그렇지만 역시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냉온탕을 거쳤던 거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렵다. 나의 삶, 나의 사랑 이야기란.


미시마 유키오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가면의 고백'이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자신의 삶과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탄생부터 유년시절, 청년시절에 이르는 성장기를 자세히 묘사하며 동시에 자신의

성 관념이 어떻게 변전해 나가는지, 동성애적 성향이 어떻게 발현되고 자신을 괴롭혀 왔는지 고백한다.


그의 첫사랑은 아마도 동성과 이성, 양자를 나누어 따져야 할 듯 하다. 동성애적 성향을 발견시켜주고 이후

하나의 전범이 되었던 동성의 첫사랑,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싸우며 키워나가다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던

이성의 첫사랑. 그러니 어쩌면 '첫사랑'이라는 무디고 닳아빠진 단어에는 잡히지 않는 게 그의 복잡다단하고

종잡기도 어려운 첫사랑 이야기, 혹은 첫사랑을 경과하는 그의 심리관찰 이야기다.


아니, 비단 '첫사랑'이란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불연속적이고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총보를 악장별로, 파트별로 구별해 채보하는 작업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덩어리진 채 자신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 뿐인 그런 불안감, 초조감, 만족감, 기대감...그런 것들의 카오스적인

혼합물에 제각기 이름을 붙여내고 인과관계의 레시피를 구성해 내는 것. 비록 어느순간 자신이 실제와는 한참

동떨어진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지라도.
 

실제 삶이란 건 정신병자의 읊조림같은 분절적인 자동기술법에 지나지 않거나,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미친년 널뛰듯 하는 조증과 울증의 연속과 오히려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위태롭고 위험하다. 사건과

감정의 선후, 인과관계에 대한 명료하고 선명한 정리가 필요한 거다. 자신의 불안정하고 규정불가능한 감정선에
 
규칙적이고 모범적인 법칙을 부여하고 특정한 이름을 붙여내어 가닥가닥 구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안스럽도록

구체적인 카오스 덩어리는 그저 하나의 식별가능하고 이해가능한, 그리고 무독무해한 추상으로 변해버린다.



그의 고백은 그런 '가면'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너무도 잘 의식하고 있어서, 차라리 그 '가면'과의 대결이라

하는 게 낫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가감없이 철저하게 되새기고 손실없이 전달하고자 한문장 한문장

심혈을 기울여 뽑아낸다. 너무도 무디고 둔탁한 언어와 어휘를 가지고 종횡무진 사방으로 뛰노는 감정선들을

추스려 표현하기란, 거의 잠자리채로 바람을 잡아보겠다고 나대는 꼴과 같을지 모른다. 비록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가면'을 벗을 수야 없겠지만, 잠자리채로 바람을 낚을 수야 없겠지만, 그는 정말 낚아챌 기세다.


그의 삶의 행적과 사고과정을 오늘의 시각에서 아귀가 딱딱 맞도록 시간과 인과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몇가지
 
대표적 감정으로 칠하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행동하는 그 순간, 심지어

그 이후의 순간까지도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고 중첩되는 수만가지 온갖 단상들이 머릿속에 가득차 윙윙대고

있었음을 힘들여 기억해내고 있다. 거기에는 삶과 사랑을 미화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 단지 자신의 내면에

철저하게 솔직하고자 한다. 그게 그의 '고백'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삶이 마치 모네의 '수련' 작품과 같음을 보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는 그 형체란 게 사실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물감 범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그가 왜 단순하여 아름다울 '사랑'과 '삶'의 궤적을 그토록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아 온갖 진창과 같은 감정과 진실들을 떠올리고 말았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과

지난 사랑을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일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랑주리 미술관은 한국인들보다 일본인들에 훨씬 유명하고,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실제 내가 갔을 때에도 한국인은 혼자인 듯 했고, 동양인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글쎄..한국어 가이드북에 오랑주리

미술관의 비중이 그리 크게 나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


나 같은 경우는 파리에 가면 끌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을 꼭 보라던 이야길 듣고 이미 잔뜩 혹해 있었어서, 한 번

문닫는 날 찾아가선 좌절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찾아갔댔다.

튈를리 정원 내에 있달까, 다른 건물들과 다소 외떨어져선 세느강변을 내려보며 서 있는 날씬한 느낌의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지하에 전시되어 있던 건 자그맣게 축소된 형태의 누군가의 서재. 책들이 가득한 방의 네면 그득

한눈에도 익숙한 혹은 전혀 낯선 그림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나도 나중에 저런 서재 하나 갖고 싶단 생각 뿐.

누군가의 서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한데, 누구였을까. 아마 오랑주리 미술관의 컬렉션이 원형이 되었다는

폴 기욤의 서재였을까. 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이자 화상으로 어마어마한 컬렉션을 모았다고 했는데, 난 굳이

진본 작품을 걸지 않고 복제판 작품을 걸어도 마냥 뿌듯할 거 같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 시뮬라르크가 대세다.)

나중에 내 방엔 르누와르, 수틴, 모네의 그림을 꼭 걸어놓아야겠다고 다짐다짐.

오오...1층에 올라가면서 왠지 모를 신비스런 느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얀빛의 정숙한 통로를 따라 오르는데,

무슨 현대식 신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그 통로 끝에서 나를 맞이했던 끌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들.

압도당했다. 루브르박물관에서 보았던 다빈치의 그것들, 심지어 모나리자보다도 감동적이었다.


타원형 방 안에 기이일~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네 장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타원형 방이 두개 서로

연결되어 총 여덟 장의 수련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해뜰녘, 해질녁, 그리고 계절감이 다른 수련의 그림들.

잔잔히 바람 한 점 없는 명경같은 호수, 살짝 이는 바람에도 산산히 쓸려져 내리는 물결, 그리고 흐릿하니 빼곡히

하늘을 메운 구름, 그 구름마저 품어버린 호수. 모네가 굳이 수련을 택해 그가 계속 그림을 그린 건 수상식물인

수련이 갖는 특수성 때문일까. 처음엔 수상, 물 위의 풍경들만 보였지만, 조금씩 수면, 호수 표면에 떠있는 풍경들,

그리고 수면 아래 수초나 다른 일렁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개의 층위로 구획되는 공간이 서로의

움직임을 따르고, 부추기고, 그런 게 춤이다.


게다가 빛과 시간. 공기의 일렁임에 더해 빛의 밝기와 농밀함을 변화시키는 시간의 손길이 더했다. 천변만화하며

수상의 하늘에서, 수면 위에서, 호수 아래에서 피어나는 수련의 움직거림들. 수련의 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에서였던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특징을 설명하면서 예로 들었던 게 바로 이 작품이었다.

가까이 코를 박고 보면 의미불명으로 굳어버린 물감덩이일 뿐이지만 한걸음씩 뒤로 물러나며 시선을 던질수록

수련들이 무수하게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다는. 정말이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입장권은 당연히 끌로드 모네의 '수련' 작품의 한 부분을 얼굴로 내세우고 있다. 기념품삼아

여전히 내 사무실 노트북 앞에 붙여놓고 있는 입장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7.5유로. 괜히 국제학생증도 없으면서 학생이라 우기면서 할인받으려는 꼼수는 꿈도

꾸지 말 것. 다른 곳은 몰라도. 그리고, 얼마를 주더라도 꼭 가 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금액이라도 모두 기꺼이 내겠다는 건 아니지만.) 지하의 인상파 화가들 작품도 그렇지만, 모네의 수련 연작

여덟점만 멍하니 보고 있어도 하루가 후딱 갈 거 같은 느낌.

(화요일, 국경일 휴무. 7.5유로. 09:45~17:15)

오랑주리 미술관 입구에 있는 이 작품, 로댕 미술관에서 본 적 있는 그 작품이다. 제목이 키스였던가..보고 있기만

해도 입술이 근질근질해지는 느낌.

오랑주리 미술관 앞에 잔디밭에 잠시 앉아서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어딜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경비원이 와서

쫓아낸다. 잔디밭에 앉으면 안 된다길래, 무안해진 김에 다짜고짜 바로 옆 세느 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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