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이곳에 존재했음을 실감하는 데에는 East Side Gallery과 The Wall Museum을 무엇보다 추천하고 싶지만,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 구역을 보려면 베를린 장벽 메모리얼을 둘러보는 것도 추천함직 하다.


앙상하고 얄포름한 콘크리트 장벽의 골간이 되었던 철근만 뾰족하니 남아있는 그 곳에는 과거 이 장벽을 넘기위해 애썼던 사람들의 순간들이 주변 건물 벽화로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인근의 불타버린 성당 자리에 새롭게 꾸며진 자연친화적인 공간에서는 이 곳에서 흩뿌려진 피와 희생에 대해 묵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미니멀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회상하거나 추억하는 듯 했다.



어느덧 3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역사, 뜯어낸 장벽을 둘러싼 울창한 초록빛 식물들의 생명력이 왕성하다.


메모리얼에 들어가면 실제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며 사람들의 이탈과 움직임을 막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내부까지 둘러보진 못했고 그저 바깥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




수백년 묵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정기와 신비롭기까지한 분위기란 건 직접 맞닥뜨려야 실감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나무들이 한두 그루도 아니고 즐비하게 늘어서 아름답고 작은 성당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곳, 아산 공세리 성당이다.








밤새 파도소리에 귀기울이다 까무룩 잠이 들고는, 어느새 아침. 주인아저씨는 아예 집을 맡긴 채로 옆섬에 마실가시고.


나머지 섬을 한바퀴 돌아보며 설렁설렁 산책하고 뭍으로 나가기로 했다.




언제부터 저기에 방치되었던 건지, 온통 초록 풀떼기에 점령당해버린 봉고차.



조그마한 승봉분교도 구경해보고. 낮은 이층짜리 건물의 따끈한 현관문 앞에는 초등학교 때 했던 실험, 흙과 물에


각기 온도계를 꼽아놓고 어느쪽에 더 온도가 높이 올라가나를 체크하는 (아마도) 실험이 진행중.


간소한 골대와 손바닥만한 운동장. 그렇지만 학교 밖이 온통 놀이터일 테니 어쩌면 운동장은 승봉도 섬만하겠구나.



아직 여물지 않은 논을 보면 꼭 어느 농촌같은데, 이렇게 보트 몇대가 정박된 풍경 덕분에 섬이라는 게 새삼 실감.


조금씩 정비중인 수변공원이랑 산책로도 있고.


하릴없이 바닷바람에 시달리다 온통 빛바래고 허물어져버린 어느 횟집의 메뉴판도 있고.


뭍이나 다른 섬들과 이어지는 유일한 창구인 항구의 한적한 풍경.



작다 못해 귀엽기까지 한 성당, 앞마당의 잔디가 푸릇푸릇 싱싱하다.


슬쩍 안을 구경해보니 더 귀엽다. 위엄서린 제단도, 딱딱하게 열맞춘 신자석도 없다. 개다리소반 하나가 정겨운 곳.



바닷가에는 어느 회사에선가 야유회를 온 듯 청백으로 팀을 나누어 2인3각도 하고 짝맞추기 게임도 하고.


그리고 섬 한가운데 예기치 않은 연꽃밭. 동네 꼬맹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노니는 나와바리인 듯 하다.




슬쩍 꾸물거리는 날씨, 뭍으로 떠날 시간이다.



항구 옆에서 여유롭게 망중한을 즐기고 계신 강태공.



근처 섬이나 모래사장으로 놀러다녀온 배 한 척이 긴 포말을 그리며 지나간다.




뭔가 이 세상의 끝이라는 느낌을 주는 막다른 마침표. 막막하게 저기 주저앉아 있는 쇳덩이처럼 시뻘겋게 부식되고


상해갈 수 밖에 없는 걸까, 하는 조바심을 달래는 건 조만간 배 한척이 들이닥쳐 마침표를 쉼표로 바꿔주리라는 기대.


이렇게. 



이제 뭍으로 다시 가는 참, 승봉도에서 이쁜 쉼표 하나 잘 찍고 돌아가는 셈이다.





 

마카오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앙상한 건물 외벽. 그것도 정면만 덩그마니 남아있는 모습은 기괴하기조차 하다.

 

그렇지만 1835년 화재로 정면을 제한 나머지가 소실된 이래 계속 저렇게 버티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고 할 부분이고,

 

또 그 전면에 저렇게 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빽빽하다는 것은 역시 아름답다.

 

이왕이면 하늘도 좀 새파랗고 빛도 따뜻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거 같은데, 그렇지만 이렇게 온갖 색깔의 우산이

 

마카오의 거리를 점령해 버린 모습도 꽤나 재미있는 풍경이다.

 

 대부분이 여행객인지라 이렇게 무리해서 꼬맹이한테 우산을 들리고 무등을 태운 아버지의 뒷모습도 보이고.

 

육포와 아몬드 거리로 이어지는 골목은 온통 고기 냄새와 아몬드 가루 냄새로 가득하다. 빗냄새 덕에 더욱 생생했던 듯.

 

실컷 육포도 맛보고 아몬드쿠키도 맛보고 나서는, 북쪽으로 계속 가서 까몽이스 공원까지 걷기로 했다.

 

정확히 어딘지는 몰라도 대충 골목길을 따라 위로위로 가다보면 나오겠거니 하고선, 재미있어보이는 골목으로 고고싱.

 

스콜처럼 비가 잠시 쏟아질 때는 옆에 있는 아무 상점이나 들어가서 물건들 구경도 하고, 주인이랑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디서 왔냐길래 한국에서 왔다니까, 너는 왜 다른 한국인들처럼 shy하지 않냐고 놀라던 주인.

 

 

 

 

이렇게 상태 훌륭해보이는 400년전의 대포가 그랜드 리스보아 카지노호텔을 겨누고 있는 곳은 몬테 요새 위의 공원.

 

그야말로 마카오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포인트다.

 

길 찾기가 조금 쉽지 않았던 거 같기도 하지만, 대충 오르막길이겠거니 하고 어림짐작으로 밟은 길이 그대로

 

몬테요새로 올라가는 길이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대체 어떤 요구조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카오에는 유난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문화재들이 많다.

 

몬테 요새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건물 정면만 남겨진 벽면이 바로 세인트 폴 대성당.

 

그리고 이렇게 공원이란 쓰임에 걸맞게 이쁜 꽃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기도 한 이곳은 거의 마카오인들의 휴식처라고.

 

 

이 곳에는 총 22문의 400년전 대포가 성벽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데, 실제로 사용된 건 17세기에 딱 한번 뿐이라고 한다.

 

네덜란드 함대가 공격해왔을 때, 단번에 함대의 탄약고를 폭파시켜 승리로 이끌었다나.

 

 

 

 

 

 

 

 

세나도 광장에서 발길 닿는대로 움직이는 길, 아무래도 눈길가고 재미있어 보이는 길을 좇아 걷게 된다.

 

하얀 바닥에 정교하게 불규칙한 모양의 검은 타일을 붙여 기하학적인 문양을 피워냈다.

 

그리고 해마와 물고기들이 물을 뱉어내는 그럴듯한 분수대 하나. 그 뒤로 보이는 체크무늬 건물벽이 인상적이다.

 

 

고만고만한 골목에서 서로 만났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되는 사람들. 이쯤 되면 왠지 반가워진다.

 

빗물에 씻겨 개나리색 벽면의 색감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참이다. 그 앞의 벤치 하나가 동그마니.

 

마카오에서는 광둥어가 주로 쓰이지만 북경어와 포르투갈어도 병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어는 거의 못 본 듯 하다.

 

성당앞에는 꽃무늬라거나 성서에 인용된 알파니 오메가 같은 기호들도 있지만, 이렇게 물결무늬가 치는 것도 좋다.

 

 

잠시 길을 잃고 헤매던 참, 아무래도 이 쪽은 아닌 거 같아서 몇사람을 잡고 길을 물었으나 영어가 정말 안되더라는.

 

무슨 오토바이 주차를 이렇게 잔뜩 해놓은 거주 구역은 또 처음 보는 거 같다. 대만에서도 인도에서도 못 본 진풍경.

 

 어느 막다른 골목 언저리에 꾸며져 있던 사당. 토지신에게 복을 비는 곳인가 싶다.

 

 

몬테 요새로 가려던 참이었으니, 계속해서 오르막길이 나오면 왠지 맞겠다 싶었다. 온통 새장처럼 철창을 두른 건물을

 

가운데 두고 갈라져나가는 삼거리에서 주저않고 오르막길을 택한 이유도 그런 거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내려다보기 좋은 트윈픽스 발치, F라인 전차의 서쪽 종점이기도 한 이쪽 미션Mission 지구 곳곳에는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중이다. 그만큼 샌프란시스코의 전향적인 분위기가 물씬한 이 곳,

 

특히나 돌로레스 대성당 어간에서부터 시작되는 발미 앨리Balmy Alley에는 1970년대 이래 진보적 아티스트들이 그렸다는

 

그래피티들이 골목들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평온한 일상이 흘러다니는 깔끔하고 단정한 큰길, 어느 길모퉁이에서 예기치 않게 나타난 전복의 순간.

 

 그리고 골목 담벼락을 온통 활용한 화려하고 입체감 넘치는 벽화.

 

 

비록 살짝 지린내도 나고 인적도 드물어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한 구간도 있긴 하지만, 차들이 늘어선 큰길가에도 그래피티의 축복이.

 

1776년에 지어져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오랜 건물이라는 돌로레스 대성당의 종탑. 이 위에서라면 울긋불긋하게 단풍처럼

 

번져나간 발미 앨리 지역의 그래피티들의 물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말에는 세 차례씩, 2시간 동안 이 곳에 그려진 60-70여개의 벽화를 감상하는 투어가 진행되고 있다고도 하는데,

 

혼자 돌아다니기보다는 아무래도 대낮 시간에 단체로 가이드를 따라 움직이는 게 안전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혼자 이 구역을 돌아다니는 게 위험하다고 느꼈다거나 곤란을 겪었던 건 아니고, 워낙 골목마다 숨어있는 그림들이

 

많아서,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있었다면 더욱 알차게 돌아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정도랄까. 요런 귀여운 토끼도 놓칠 뻔 했다.

 

 

성긴 철창이 가로막은 건물 외벽에도 누군가의 손길은 여지없이 거쳐갔다. 거대한 연꽃을 타고 있는 부처가 샌프란시스코에 현현했다.

 

 

 

정교하고 잘 안배된 기하학적 무늬가 차고 하나를 통째로 감싸버린 풍경이라니, 작업했던 모습을 상상해보게 만드는 풍경이다.

 

 조던의 드리블 장면이 붉게 두드러진 농구 골대에 내리쬐던 햇살, 좁다란 골목 양켠에서 형형색색의 색채를 밝힌 그래피티들.

 

 

 

 이름 모를 성당-혹은 교회-옆구리에도 그래피티의 가차없는 스프레이는 비켜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성당의 위신을 고려했는지 만화체로 그려지긴 했지만 예수와 성모..인 듯한 캐릭터들이 독특한 수인을 맺고 있다.

 

 

 사실 벽화보다는 이런 그래피티가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좀더 본격적이고 멋진 그래피티를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가 하면 작정하고 캔버스로 벽돌담 벽면을 활용한 듯한, 무려 호랑이와 상어 간의 일촉즉발 격돌 장면.

 

 사실 발미 앨리 아니어도 샌프란시스코의 곳곳에서 숨어있는 벽화, 혹은 그래피티들을 찾는 재미는 쏠쏠하다.

 

아마도, 카센터의 내려진 셔터에 그려진 그래피티. 이 정도면 나름 상업적인 목적에도 충실하면서 미적인 기능까지 놓치지 않은 수작. 

 

 

 혹은, 뜬금없지만서도 파라오의 토실한 입술이 센스넘치게 가리키고 있는 소화전의 붉은 주둥이.

 

 이 건물은 GLBT 역사 박물관, 그러니까 게이(Gay), 레즈비언(Lesbian),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의

 

역사와 투쟁을 담고 있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당당하게 펄럭이는 무지개 깃발만으로도 뭔가 상쾌하다.

 

 

샌프란시스코의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래피티, 혹은 좀더 포멀한 차원의 벽화들. 아래는 작년인가

 

금문교를 배경으로 치뤄졌던 세계 요트대회의 한 장면을 건물 벽면에 재현해 둔 거라고 한다.

 

 

 

 

 

 

스플릿의 수산시장, 바다에 바로 접한 대로의 반질거리는 대리석 위로 생선 비린내가 바다향기를 짙게 풍긴다.

 

 

이 곳에 풍부한 해산물들, 그 중에서도 집게 달린 이 새우로 만든 요리들은 뭘 먹어도 맛있었던 듯.

 

 

바다를 옆으로 끼고 걸어가는 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거대한 옛 궁전에 기대어 지어진 까페와 주택들을 바라보며

 

바다냄새 나는 손가락으로 기타를 튕기던 아저씨는 잠시 그늘로 숨어들었다.

 

 

이 곳에 보이는 벽들은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왕궁의 남쪽 벽면이다. 폐허로 남겨진 곳에 사람들이 모여살기를 몇백년.

 

 

이제는 이런 쌍둥이 꼬맹이들도 보라색 옷 때깔 맞춰입고 찾아올만큼 유명한 유적지로 남았다.

 

 

거의 이천년이 다 되어가는 로마황제의 거대한 개인 궁전, 한참을 버려졌던 이곳엔 이제 유리창도 에어컨도 끼워맞췄다.

 

 

성의 동쪽 외벽에 기대어 펼쳐진 재래시장에선 올리브유니 꿀이니 채소니 과일이니 온갖 것들이 주섬주섬 펼쳐졌고.

 

샘플 하나씩을 뚜껑에 달고서 갖가지의 크기와 색깔과 모양을 뽐내는 단추들.

 

꽃이 무척이나 화려하다 했다. 알고 보니 꽃 위에다가 락카를 뿌린 건지 어쩐 건지 퍼렇게 뻘겋고.

 

비닐로 몸을 둘둘 대충 감아둔 돼지 서너마리가 통으로 매달린 정육점.

 

 

 

그리고 머리까지 고스란히 붙은 채 생전의 모습과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닭고기들. 이건 설마..채식을 유도하는 고도의 장치?

 

 

색색의 바지들과, 과하게 가슴과 엉덩이를 튕겨낸 마네킹들. 허리에서 에구구 소리나는 것만 같다.

 

핏물처럼 붉은 과즙이 흐르던 블러드 오렌지.

 

 

그리고 다른 곳보다 좀더 많이 허물어진 성벽을 바라보고 선 성당 하나.

 

예수의 12길이 굉장히 강렬한 색감과 필치로 그려진 인상적인 모습들을 한바퀴 둘러보니 마음이 써늘해졌다.

 

아마도 옆가게로 수다떨러간 주인아주머니 대신 노상의 꽃가게를 지키고 선 고양이 두마리. 한마리는 벌써 지겨운지 기지개다.

 

 

 

네모 반듯한 왕궁의 외벽을 따라 바깥 풍경을 한 바퀴, 벌써 남문과 동문을 지나 북문으로 향하는 참이다.

 

 

그리고 북문에서 만난 마법사 같은 차림의 거대한 동상 하나. 10세기 크로아티아의 주교였다는 닌스키의 동상이라나.

 

 

라틴어 대신 크로아티아 어로 예배를 보도록 했던 그의 의도에는 무심한 관광객들은, 문지르면 복이 온다는 그의

 

엄지발가락만 반질반질거리도록 쓰다듬고 떠나버렸나 보다.

 

스플릿의 구시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왕궁을 굽어볼 만큼 거대한 그의 모습, 그리고 저 역동적인 어깨와 손가락 놀림은

 

왠지 모를 위압감을 전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표정도 너무 진지해보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벽을 따라 돌면서 발견했던 가장 흥미롭던 장면 하나는 이 클래식 포크스바겐.

 

양쪽 어깨에 높은 건물을 올려둔 좁다란 골목 안에 짙게 배인 그늘을 벗어나던 샛노란 차로 향한 카메라를 의식했다.

 

문득 멈추더니, 다시 슬슬 뒤로 후진해서는 촬영할 준비를 하라며 손짓을 한다. 빵 터져서 웃고는 오케이, 손짓하니

 

살금살금, 대리석을 즈려밟으며 한바퀴 한바퀴 우아한 워킹. 양팔을 쭉 뻗어 하트 한번 그려줬더니 그쪽 역시 빵 터졌다.

 

 

블레드 호수를 천년동안 내려다보고 선 블레드 성은 무려 100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 자리한 옛성이다. 올라가는 길은 이리도 험하다.

 

 

 

이런 휘장, 중세 시대 성벽에 나부낀다거나 기병대 간의 전투가 벌어질 때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하늘로 올라가는 그런 깃발이다.

 

 

조금 가빠진 숨을 가누며 성 안에 들어서면 블레드 호수와 그 주변을 둘러싼 호텔이니 레스토랑이니 까페들이 한눈에 내려보인다.

 

 

그리고 옛날에 쓰였을 우물이니 초소니 건물들이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나름 굉장히 집약적인 공간활용.

 

 

그리고 성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블레드 호수의 한쪽 둔덕.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에서 되려 촉촉한 느낌의 풍경이다.

 

 

 

그리고 호수 한 가운데 있는, 아무래도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는 이걸 참조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블레드 섬.

 

블레드 호수 주변에 있는 높고 낮은 구릉들은 관광객들이 즐기는 트레킹 코스 여러곳을 품고 있다고 한다.

 

단 이렇게 흐리거나 비가 왔거나,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중간중간 끊겨있는 경우에는 입산 통제.

 

 

이때만 해도 아직 비가 오지 않아서, 저렇게 꼬물꼬물 조그마한 배가 블레드 섬에 오가는 걸 보며 나도 저걸 타면 되겠구나, 했는데.

 

 

 

 

동전을 넣으면 기념주화로 바꿔준다는 조그마한 프레스기. 궁금하긴 했는데 나 이외엔 여행자도 안 보여서 걍 포기.

 

 

덩굴손이 건물 외벽을 꼼꼼히도 감싸버린 운치있는 옛 건물은 빨간 지붕조차 적당한 느낌으로 퇴락했다.

 

성 내에 있는 '대장간' 공간에서 여전히 쇠를 만지며 이러저런 기념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나 보다. 역시나 용의 형상이 지천이다.

 

성 안에 있는 역사관이나 유물관 같은 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옛 시절의 용 이미지들.

 

 

이렇게 생긴 사람들이 블레드 성과 호수 주위에서 수렵을 하고 농경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때에도 역시 드래곤이 짱.

 

 

성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블레드 섬. 그리고 그 너머 더욱 꾸물거리는 하늘.

 

 

대장간 내부에 들어왔더니 망치와 모루, 그리고 온갖 공예품들과 장식품들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요녀석이 땡겨서 슬쩍 만져보기도 하고 가격도 물어보고 디스카운트를 시도하다가 실패. 깨끗하게 포기. (너무 비쌌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성당. 제단 위에 있는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성모상이 너무 맘에 들어서 슬쩍 사진을 찍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고, 나는 망루 같은 곳에 잠시 기대어 비가 금방 그치지는 않을지 가늠해봤지만, 갈수록 굵어지는 빗발.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망루 주위를 두른 울타리랄까, 비둘기와 하트 문양이 번갈아 교직하는 그런 하얀 울타리.

 

 

블레드 성의 입장료는 8유로, 그런데 티켓에 1.5유로 짜리 쿠폰이 붙어있어서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음식을 사먹을 때

 

할인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일 쌌던 커피가 3.5유로였던가 하여 결국 돈을 더 쓰게 만드는 마법의 쿠폰.

 

그리고 블레드 성에 가게 되면 꼭 들르라고 강추하고 싶은 와인 저장고! 중세 수도사처럼 생긴 수염 북실북실한 아저씨가 직접

 

오크통에서 와인을 병에 옮겨담아서 저렇게 마개를 하고 라벨을 붙여서 마지막엔 봉인까지 해준다.

 

그런 특별한 와인 말고도 슬로베니아에서 나는 온갖 와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인근 지역에서 '블레드'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들도 꽤나 많이 보였다. 가격대도 다양하고, 아저씨도 굉장히 친절하고 수다스럽게 와인도 소개해주고

 

북한의 핵실험과 일본/중국의 단체여행객이라거나 싸이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최근엔 일본의 단체여행객들이 깃발을 하나 들고 우르르 왔다갔다 하는데 시즌이고 뭐고 없이 엄청 많이 온다고 하길래,

 

이제 이삼년 후면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올 거라고 지금부터 한국어 한두마디는 연습해두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해줬다.

 

그렇게 아저씨랑 실컷 떠들며 한잔 따라주신 와인을 홀짝대다가, 결국 와인 한병을 사들고 뚜껑을 따달라고 부탁해선

 

더욱 거세진 빗발 속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와인을 한 병 들었으니 뭐 딱히 걱정할 것도 없고 하여.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버스로 한시간 반, '알프스의 눈동자'라 불리는 블레드 호수에 도착했다.

 

날은 굉장히 흐리고 꿀꿀한 게 금세라도 비나 진눈깨비가 내릴 듯한 날씨였지만 호수의 수면은 거울처럼 매끈하다.

 

 

백조가 유유히 직선을 그어내는 호수 너머 조그마한 섬, 매직 아일랜드같은 느낌으로 버틴 섬을 꽉 채운 성모승천 교회.

 

 

그리고 100여미터의 절벽 위에 서 있는 블레드 성. 무려 천년 동안이나 저 위에서 호수를 굽어보았다고 한다.

 

개구리 모양의 (아마도?) 쓰레기통, 그 넓적한 입매가 장난스럽게 비틀어졌다.

 

 

백조님의 클로즈업 샷. 어찌나 깃털이 발수기능이 좋으신지 머리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모습이다.

 

 

생각보다 호수는 엄청 커서, 둘레가 대략 6키로미터라고 했던가. 겨울철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여름엔 무지 북적거린다고 한다.

 

 

그리고 덩굴처럼 자라난 아름드리 나무의 잔가지들이 수면 위로 스물스물 그림자를 드린 가운데 새하얗게 우아한 백조가 그리는 궤적.

 

 

아직 날은 춥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지만 여지없이 봄이 내딛는 발자욱은 한걸음씩 진군 중이었다. 꽃망울을 여기저기 터뜨리며.

 

 

 

블레드 성에 오를 즈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그칠 기미없이 점점 세차진다 싶더니 급기야 호수 표면에 셀수없는 구멍을 내버렸다.

 

나무 아래에서 잠시 비를 그어갈까 했지만 아직 다들 잎사귀조차 제대로 틔우지 못한 앙상하고 헐벗은 나무들.

 

 

중간중간 블레드 호수로 모이는 개울들의 목소리는 한층 더 드높아졌다.

 

 

 

블레드 섬과 호수 둘레길과의 직선거리가 가장 가까워지던 즈음, 두마리 조그마한 오리들이 섬을 향하듯 호수면을 미끄러지고.

 

잔설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호숫가에는 차가운 빗물이지만 쉴새없이 내리며 조금씩 겨울의 흔적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블레드 호수의 둘레길, 블레드 성에서 산 와인 한병을 들고서 홀딱 비 맞고 흐느적흐느적 걸으며 병나발 부는 맛이란. 캬.

 

 

 

 

원래 블레드 섬까지 들어가는 유람선이 있다고 해서 그것도 타보고 싶었지만, 워낙 비수기에 와버린 데다가 이렇게 비가 내리니

 

들어가는 건 포기해버렸다. 그 안에는 '소원의 종'이 있는데 그 종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나, 내게 소녀시대가 있으니 괜찮아.

 

 

 

섬 주변에는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곳곳에 있고, 블레드 성같은 오랜 유적도 있는 데다가, 레스토랑이나 까페도

 

뭉탱이 뭉탱이 몰려 있다. 이 건물도 뭔가 까페인 거 같은데, 비수기라 역시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블레드 섬의 360도 뷰를 찍어볼 기세로 호수 둘레길을 걸으며, 와인병을 기울이며 사방에서 찍어댄 결과물들.

 

 

 

그리고 호수를 거의 다 돌았을 무렵,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더이상 촬영은 무리겠다 싶어서 카메라를 집어넣기 직전 마지막으로

 

담은 블레드 성의 옆모습. 얼짱각도에 수렴하는 45도 비껴난 샷이다.

 

다시 블레드에서 류블랴나로 가는 버스 안. 옷이고 신발이고 가방이고 홀딱 젖어서 무척이나 묵직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창밖을 보니

 

어느새 빗물이 진눈깨비나 눈발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날이 좀더 푸릇푸릇하고 맑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비를 쫄딱

 

맞으며 와인 한병을 병나발 불며 호수 한바퀴를 도는 경험이란 것 역시 나무랄 데 없다.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용이 지키는 도시답게 건물들은 나즈막하면서도 나름의 운치와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류블랴나 성을 향한 오르막길, 사람이 채 오르기도 전에 양옆으로 어깨 부딪기며 열지어선 집들이 먼저 지쳤다.

 

 

 

류블랴나 구시가에 있는 성당, 그 벽면에 기대어선 (아마도) 대주교님과 성모상, 그리고 가운데의 성화.

 

벽공에 마련된 피에타상, 밤에도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조명을 내걸었다.

 

심지어 성당의 정문은 이렇게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돋을새김해둔 청동문이다.

 

 

 

류블랴나 구시가의 중심, 그리 크진 않지만 꼿꼿한 오벨리스크가 광장의 중심에서 하늘을 향해 뻗었다.

 

 

 

어느 갤러리였던가 박물관이었던가, 유서 깊어보이는 건물의 안마당으로 들어가서 발견한 류블랴나의 시내 지도.

 

그리고 다른 갤러리에서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이 한창이었다. 사진보다 전시공간이 더욱 눈에 들어오기는 또 처음이다.

 

 

광장의 바닥도 나름의 문양을 촘촘히 그려내고 있는 곳, 뭔가 아기자기하고 앙증맞은 느낌의 도시다.

 

 

 

좁은 골목길에 무심코 세워 놓았을 자전거조차도 왠지 그림이 되어 버리는 곳.

 

특별할 것 없는 허름한 건물 입구의 다닥다닥한 우편함에도 각기 개성이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고,

 

 

주렁주렁 매달린 신발들로 이곳이 쉽게 벗어나기 힘든 매력적인 곳임을 곳곳에서 과시하는 도시기도 하다.

 

 

 

아이고, 여긴 참..많은 사람들이 와서는 눌러앉고 말았나 보다.

 

류블랴나의 자그마한 구시가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골목도 구경하고, 이쪽에서 본 저쪽 모습, 저쪽에서 본 이쪽 모습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사이에 안 그래도 흐렸던 하늘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꺼뭇꺼뭇해지고 있었다.

 

 

 

 

 

광장에서부터 온갖 자그레브의 명소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려면 손가락이 열개여도 부족하겠다. 사방팔방을 가리키는 화살표.


 옐라치치 광장으로부터 두 개의 언덕, 카프톨과 그라데츠로 뻗어나가는 오밀조밀한 골목 틈새를 비집고 늘어지는 햇살.


 

 성모승천 대성당이 삐죽 고개를 디밀고 있는 골목도 있고.


옐라치차 광장의 중심, 광장보다 움푹 들어가서 조성된 이 분수대 주변은 사람들이 층층이 앉기 참 좋게도 생겼다.


 짙은 구름이 잠시 지나고 햇볕이 내리는 그 곳은 역시나, 햇살을 즐기며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들을 위한 명당자리.


  

 

옐라치차 광장 중앙에 선 기마상이 조그맣게 보이는 각도, 나도 질세라 분수 옆 돌계단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참이다.


옐라치차 왕을 기리는 기마상 앞에는 크로아티아의 국기와 꽃들, 그리고 촛불이 잔뜩 봉헌되었다. 신생국의 포스란 이런 건가.

  

 

광장 옆의 기념품 가게. 자그레브의 고유한 빨간 하트 모양의 장식품이 화려하다.

 

 이곳의 축구 사랑이 유별나다더니 아예 기념품 샵들이 곳곳에 늘어섰다. 



기마상 앞을 지나는 사람들, 어떻게 보면 그다지 크지 않은 광장일 수도 있겠지만 자그레브의 규모에 비기면 작진 않은 듯.

 

 

그리고 광장의 한켠에서 묵주니 성모상이니 등등을 팔고 계시던 분 뒤로 보이는-어디에서나 크게 눈에 띄는-저 광고는 참.




 

자그레브의 구시가를 형성하는 두개의 언덕 중 하나, 그라데츠 언덕의 동문에 있는 스톤 게이트는 오히려 '기적의 성모'가

 

현현했다는 이야기로 더욱 유명하다. 1700년대에 일어났던 화재로 동문이 전부 타버렸지만 그 잿더미 속에서 한점 손상도 입지 않은

 

성모 마리아의 성화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이곳은 성지순례의 장소가 되었고 이른바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더욱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

 

 

 스톤 게이트는 그런 이야기가 서린 동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짧은 터널 같기도 한 그 곳의 위로 향하는 조그마한 문에

 

빗겨 내려쬐는 햇살이 더욱 운치를 더한다. 아마도 스톤 게이트 위의 성당으로 이어지는 문일까, 평소엔 닫혀있는 듯 하다.

 

 

사람들이 모두 자석을 만난 철가루처럼 정렬하고 선 저 너머, 꽃으로 장식된 저 창살 너머에 언뜻 보이는 그림이

 

바로 그 '기적의 성모' 성화라고 한다. 신의 뜻이라는 게 고작 잿더미 속에서 그림 한장 구해낸 걸로 드러나는진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이 곳에 소원을 빌고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딱히 딴지를 걸고 싶진 않고.

 

그보다 스톤 게이트 입구에 세워진 여인상이 더 재미있는 스토리를 감추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단단해보이는 나무상자와

 

하트가 그려진 열쇠를 들고 있는 여인은 아름답지만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거부했다며

 

분노하고 질투에 눈먼 남자에게 독살당하는 어처구니없도록 단순하지만 강력한 비극의 주인공이라는데,

 

그럼에도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몇번이고 지켜내겠다는 결의인 걸까. 몸매 전체에서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거 같기도 하다.

 

 

스톤 게이트에서 동서로 이어지는 자그레브 구시가의 풍경. 따로 전봇대가 없이 길 위에 떠있는 가로등들이 특이하다.

 

 

이렇게 스톤게이트의 동쪽 문과 서쪽 문을 찍고 나서 보니 왠지 터널같이 생겼다는 느낌이 더 짙어진다.

 

문 위로 약간 시커먼 흔적은 터널에서 빠져나온 매연이나 연기가 그려낸 자국 같기도 하고.

 

스톤 게이트로 향하는 언덕길 위에서 커다란 뱀 혹은 용을 무찌른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성 조지의 기마상.

 

 

 스톤 게이트를 지나 자그레브의 구시가, 그라데츠 마을의 골목들을 하나씩 탐방하다가 만난 갤러리에서 발견한 크로아티아 고대문자.

 

영어 알파벳과도 같지 않고 마치 중국 고대 갑골문자 같이 생긴 이 도형들은 꽤나 자유분방해보이고 매력적이다.

 

 크로아티아의 중세 시대를 달궜을 온갖 무기들과 갑주, 방패들이 전시된 또다른 갤러리.

 

 

그러고 보면 길의 오르내리막이 뚜렷이 실감나는 게 자그레브 구시가의 특징인 거 같기도 하다.

 

두 개의 봉긋한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올망졸망 모여있는 크로아티아의 역사적인 장소와 건물들을 섭렵하게 되는 거다.

 

 

 

 

그라데츠 언덕의 남쪽에서 로트르슈차크 탑으로 올라가는 길, 건물과 건물벽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남자 두명 어깨를 맞대고

 

걷기도 힘든 너비지만, 이 길 끝을 향한 관광포인트들의 화살표가 저리도 수다스러우니 한치의 의심없이 가는 거다.

 

 그래피티라기엔 조금 아쉬운 낙서들이 붉은 벽돌담의 회칠을 이리저리 긁어놓고 있었고, 다행히 골목은 조금씩 넓어지고.

 

 

언덕을 올라간다는 실감이 나는 게, 조금씩 자그레브의 구시가부터 야금야금 붉은 지붕들이 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았다 싶었는데 성 마르크 성당이랑 그 너머 성모승천 대성당이 보인다. 저기가 자그레브의 또다른 언덕

 

카프톨의 꼭대기인 셈이고, 지금 걸어 올라가는 중인 언덕인 그라데츠를 오르면 자그레브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로트르슈차크 탑을 비롯해서 성모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스톤 게이트 등을 볼 수 있다.

 

 제법 높이 올라왔다 싶어서, 뒤로 돌아 밟아 올라온 계단들을 보려는데 문득 눈이 마주친 아가씨. 손을 흔들어주니 흔쾌히 답해준다.

 

 그리고 왠지 알루미늄 호일을 꼬깃꼬깃 구겨서 만들었거나 껍데기를 씌운 듯한 이 조각상은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시인이라는

 

'안툰 구스타브 마토사'라는 분을 기려 세워진 거라고 한다. 아니, '세워졌다'는 표현이 어폐가 있다 싶은 게 워낙 친근하고 격의없는

 

느낌의 조각이라 그런 거 같다. 그는 자그레브의 삶을 즐기고 자유로이 살다갔던 보헤미안이었다고 하니 이게 맞겠다.

 

 그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자그레브 시내. 그가 보았던 도시와 지금의 도시는 얼마나 어떻게 바뀌었을까. 여기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삶이 더 척박해지고 속물스러워지고, 게다가 많이 고유의 것들을 잃어버렸을 텐데. 다행히 짧은 체류를 했을 뿐인

 

외지인의 눈에는 꽤나 훌륭하고도 단단한 문화자산들을 갖고 있는 특색있는 나라로 보였지만 말이다.

 

두둥. 아직 3월 중순이라 봄이라고 하긴 애매한 시기지만, 여튼 푸릇푸릇해진 풀밭 너머로 보이는 게 로트르슈차크 탑.

 

그라데츠의 남문을 지키기 위해 세운 감시탑이라고 하는데, 무려 13세기에 지어진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단다.

 

수백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정오에 대포를 발사해서 시간을 알려준다는데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각, 대포 소리는

 

들은 기억이 없지만 여전히 귓가에 남아있는 건 저 씨디도 발매하신 프로 아티스트 할아버지의 연주 소리.

 

 

사실 여기는 이렇게 걸어오는 것도 방법이고, 남쪽의 일리차 거리와 연결되는 케이블카를 올라오는 것도 방법이다.

 

여하간 탑의 조그마한 입구를 들어서면 한산한 기념품샵과 매표소가 있고. 10쿠네(약 2천원)을 내면 저 문 너머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게 된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원형 계단은 우선 건물 외부를 타고 오르게 된다. 발음도 어려운 로트르슈차크 탑과 옆 건물 사이의 빈 공간을

 

따라 나선 계단과 함께 하늘로 치솟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 한 그루, 그리고 한켠에서 수줍게 나부끼며 응원중인 빨래들.

 

그리고 탑의 실내로 들어섰더니, 마침 자그레브의 젊은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탑의 조그마한 창문들로부터

 

은은하게 비쳐들어오는 흐릿한 햇빛이 탑 내부의 하얀 벽면과 반들거리는 나뭇바닥에 사정없이 반사되면서 분위기가 그럴 듯 하다.

 

슬쩍 내다본 창문 너머로는 방금 올라온 완만한 계단길이,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들고 나온 아가씨의 손수레가,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그리고 사랑을 속삭이느라 여념이 없는 커플이 보인다.

 

그리고 일리차 거리에서부터 올라온 케이블카가 도착해서 사람들을 쏟아내는 출입구. 사실 그렇게 케이블카를 타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진 않던 게, 나선 계단을 따라 탑을 뱅글뱅글 오르는 중에 계속해서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저 문이 열리고

 

관광객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던 거 같다. 그렇겠다 싶은 게, 운영 거리도 짧거니와 걸어서도 충분한데 뭐.

 

 

조금씩 눈높이가 둥실둥실 떠오르는 게 느껴지려나 모르겠지만, 한층한층 오를 때마다 탑의 네면에 한개씩 있는 창문에 달라붙어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사진으로 담다보니 사진에서 보이는 풍경들의 눈높이가 점점 지상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러다가 이렇게 자그레브 시내의 붉은 지붕들이 어떤 식으로 디테일하게 타일들을 짜맞춘 건지 궁금증을 풀기도 하고.

 

이만큼 높아진 시선에서야 비로소 붉은 지붕들 너머로 하얗게 반짝거리는 성 마르크 성당의 일부를 보고 설레이기도 하고.

 

아래에서 강아지들을 끌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궁금해하며 사진을 담기도 하고.

 

아까 자그레브 대학교의 미대생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던 저 아가씨는 그새 아이스크림 아저씨랑 한담을 나누는 중이다.

 

 

그래도 케이블카가 운영되지 않는 건 아니어서, 이렇게 두 개의 레일을 따라 파란색 케이블카가 오르내리는 걸 보기도 했다.

 

주변의 낡고 붉은, 그렇지만 그 디테일한 까끌까끌한 질감이 살아있는 지붕들과 완전히 정반대인, 반짝이는 파란, 매끄러운 케이블카.

 

계단은 계속됐고, 그 때마다 자그레브의 신예 작가들의 사진을 빠짐없이 감상하고 게다가 네 면의 조그마한 창문에서 보이는

 

자그레브 시내의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나 걸리고 있었지만, 조금씩 시야가 멀리까지 트이는 걸 실감하며

 

기꺼이 만끽하는 중이었다. 계단도 그렇게 가파르거나 높지 않아서 힘들지 않고.

 

 

이런 창문들이 사각탑의 네 면마다 하나씩. 위로 올라가니 제법 외풍이 세차게 몰아닥쳐 창문을 아예 잠궈놨던데,

 

굳이 그걸 살짝 열고는 유리창의 방해 없이 맨눈의 자그레브를 구경하고 싶었다.

 

 

층수로 치면 4층쯤 되려나. 이제 왠만한 자그레브 시내의 건물들은 얼추 눈아래로 들어온다 싶을 즈음.

 

대포가 나타났다. 이게 매일 정오마다 발포되어 시간을 알려준다는 대포, 리얼 대포다. 대포가 있는 유리방 벽면에 붙어있는

 

온갖 삼엄한 금지 표시들만 봐도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런 대포를 향해 창문 너머로부터 쏟아지는 이 나른하고도


따스한 햇살은 좀. 반칙 아닌가 말이다.

 

붉게 칠해진 바퀴는 단단히 고정되어 반동을 최소화했고, 어느 하나 녹슨 부품이 보이지 않는 대포의 철제 바디는 보기만 해도

 

왠지 군대의 살상병기가 갖는 위용을 그대로 떠올리게 만들었는데. 그런 대포가 자그레브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려주는 유용한

 

알람 시계로 활용되고 있다니 꽤나 교훈적이랄까 바람직하고도 건전한 모습이다.

 

그리고, 사진이 너무 많아 일단 여기서 끊고 로트르슈차크 탑 위에서 보이는 풍경은 다음 포스팅으로.

 

맛보기 삼아 한장만 올리자면, 이 탑 위의 전망대에서는 성 마르크 성당의 자수같은 지붕이랑 아이 컨택이 가능하다.

 

 

 

 

 

 

여기가 거기였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구시가 복판에 있는 성 마르크성당. 예전에 어디에선가 사진으로 스쳐지나갔던,

 

그렇지만 굳이 여기가 어디에 있는 건물일까 찾아보게 만들었던 그 건물이었다. 하얀 외벽에 깜찍한 지붕을 얹은 성당.

 

성모승천 대성당을 지나,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를 지나 금세 다다른 조그마한 광장, 아니 광장에 채 진입하기도 전에

 

지붕부터 대번에 시선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림이라기엔 기와 한장한장의 입체감이 너무도 뚜렷한, 그래서 흡사 레고블록을 쌓은 듯한.

 

사실 성 마르크성당의 건물 자체도 1200년대에 지어졌다니 굉장히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내공을 풍긴다.

 

들어서는 정문만 해도 십여명의 수호성인들이 지키고 선 걸 보면 그렇다.

 

그렇지만 저 흰색과 파란색, 빨간색이 올망졸망한 지붕이 파란 하늘 아래에서 하얀 벽 위에 얹혀 있는 데서 이야기는 끝나버렸다.

 

타일 지붕은 고작(?) 1880년에야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고 하는데, 왼쪽은 중세의 크로아티아 왕국, 달마티아 지방, 슬라보니아 지방을

 

나타내고 오른쪽은 자그레브 시를 나타내는 문양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게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 더하기 달마티아 지방(현재 크로아티아의 중부 지방) 더하기 슬라보니아 지방(동부 지방)의 상징.

 

그리고 이게 자그레브 시의 상징인 셈이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까 타일 한장 한장이 선명하고 화려한 발색을 내며 각자의 입체감을

 

돋을새김하듯 지붕 위에서 어필하고 있는 모습이 더욱더 뚜렷하다.

 

성당 안에서의 촬영은 다른 여느 성당들이 그랬듯이-성모승천 대성당도 마찬가지였지만-촬영 불가. 잠시 들어가서 그 묵직하고 오랜

 

공기를 들이마시며 어두컴컴한 실내에 적응할 때쯤 다시 나와버렸다. 최소한 성 마르크성당은 밖에서 보는 게 진짜다.

 

아마 성 마르크성당 주변에는 EU 관련한 관공서랄까 정부 청사가 있는 건지 크로아티아 국기와 EU국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패트롤이나 검정색 커다란 세단들도 누군가 귀빈들을 위해 대기중이었고.

 

그 와중에 경찰 아저씨의 허락을 득하고 찍은 크로아티아 경찰 오토바이의 위용. 진격의 BMW Motorad.

 

옐라치차 광장에서 성모승천 대성당, 각종 뮤지엄들, 그리고 성 마르크성당까지 그러고 보면 참 오밀조밀 잘도 붙어있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눈앞에 나타나는 굉장한 풍경들과 역사의 증거물들 앞에서 숨 한번 돌릴 여유를 찾기엔 노천 까페가 최고.

 

이쯤해서 돌라츠 시장의 노천 까페를 찾아 잠시 쉬어갈 타이밍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그래도 좀 이쁘게 포장되려나. 자그레브 구시가,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성마르크 성당으로 가는 길에

 

문득 마주친 흥미로운 뮤지엄 하나.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깨진 커플 박물관' 정도로 의역하면 될까 싶다.

 

 

연애가 되었건 결혼생활이 되었건, 아니면 짧디짧은 하룻밤의 유희가 되었건 상처받은 이들의 추억과 스토리가 흥건한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건 온갖 인형과 신발, 의류들. 이곳은 세계 각지에서 깨진 커플들의 스토리와 사랑의 징표들을

 

기부받아 세워진 박물관이라고 한다. 이미 꽤나 유명해져서 세계를 돌며 순회 전시도 할 만큼 규모면에서나 인지도면에서 성장했다고.

 

누군가 배 위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썼던 편지와 지도 그림. 흔들리는 배 위에서, 편지지조차 없어서 읽던 책을 찢어서 썼을 만큼

 

그 마음이 뜨거웠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깨지고 부질없는 사랑의 징표로 받은 이의 손을 떠나 대중 앞에 전시되는 중이다.

 

여기서부터는 살짝 19금. 이런 걸 선물해주고 또 착용해서 보여줬을 그들의 내밀하고도 달콤한 이야기들, 덧없고 덧없구나 싶다.

 

 

 

관계가 틀어지고 난 이후에도 이런 걸 계속 지니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아쉬움과 민망함이 교차되었을 듯.

 

 

관계의 마지막을 고하던 날, 그 극렬하던 싸움의 흔적이란다. 깨진 유리 조각을 이곳에 기증한 사람도 대단하다.

 

아예 이런 사람도 있었다. 둘이 주고받던 사랑의 편지들을 유리에 붙여서는 산산조각내버리곤 그 조각을 여기에 넘겼단다.

 

 

 

누군가가 아마도 이런 느끼한 대사를 치며 선물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을 여는 열쇠야, 당신이 처음 발견한.'

 

사람을 시니컬하게 만드는 전시인 거 같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기 시작했다.

 

 

제법 값나가 보이는 옷들도 말짱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사연은 제각각이어서 처음 사귀던 날 입었던 옷이라거나,

 

프로포즈받을 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결혼식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그들에겐 이 옷이 그대로 자신들 삶의 한 조각이었을 거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쪼개져 나가며 벌어졌던 전쟁의 와중에도, 피난을 떠나던 꼬맹이들의 맘속에는 사랑이 일렁였다.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낀 채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던 상이용사와 간호사의 사랑이야기도 있었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거라곤 프랑스 국적밖에 없다는 한탄이 그대로 들리던 전시품도 있었고.

 

 

 

결혼식날 입었던 웨딩드레스나 혼인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나중에 결혼 10주년에 다시 입고서 남편과 춤을 추리라던

 

아름다운 소망이 물거품으로 꺼져버린 후에, 그 웨딩드레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아팠을까.

 

이 뮤지엄에 기증하고 나서 이제 자신은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자신만의 춤을 추겠다는 기증자의 다짐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비록 조그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선물이었을 망정, 그 물건 하나에 담긴 곡절과 의미와 추억은 이토록 길고도 깊다.

 

 

이 뮤지엄의 기념품 중 하나. 나쁜 기억을 지워준다는 지우개를 팔고 있었다. 이런 뮤지엄을 설립해 전세계의 실연한 이들로부터

 

스토리와 가슴아픈 징표들을 기증받는다는 아이디어도 굉장히 참신했는데 이런 깜찍한, 그렇지만 제법 위로가 되는 기념품이라니.

 

이런 것도 있었다. '당신은 최고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당신 뿐이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따위의 빈칸이 있는 카드들.

 

영원할 것만 같던 찬란한 사랑이 지고 난 후의 씁쓸하고도 가슴 아픈 시간을 그대로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들이다.

 

 

뮤지엄을 나와 다시 성마르크성당으로 향하는 길, 왠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운운하는 이들에게 어디 한번 보고서 이야기하라고

 

강추하고 싶은 뮤지엄에서 세계 각지의 사람들 마음이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을 보고 나니 건물벽 균열조차 심상치 않아 보였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그 중에서도 구시가 중심이랄 옐라치치 광장을 둘러싼 오육층은 가뿐히 넘어보이는 건물들 너머로

 

덧니처럼 뾰족하니 튀어나온 첨탑 두개의 주인공. 광장 오른켠에 자리한 카프톨 언덕 위의 성모승천 대성당이다.

 

구시가의 낡고 오랜 건물들 사이를 흐르는 이차선 도로, 그 옆에서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는 나이든 크로아티아의 할아버지,

 

너머로 삐죽 고개를 치켜올린, 근 천년을 지켜온 성모승천 대성당의 보수중인 첨탑 하나.

 

 

카프톨 언덕을 휘적휘적 올라가면 마주치는 대성당 앞의 광장에는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성모마리아상이 우뚝 솟았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 아래서도 번뜩이는 금빛을 발하는 성모상과 아래의 천사들은 살짝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설수록 더욱 실감나는 성모상의 유별난 높이. 성모승천 대성당을 찾는 이뿐 아니라 자그레브, 아니 크로아티아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높이다.

 

게다가 눈에 신경을 집중해서 그 진중하고도 살짝 근심어린 듯한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노라면 진짜 하늘에서도 그럴 것만 같다.

 

 

성모승천 대성당의 섬세하고도 우아한 입구, 상아빛의 대리석과 조각상들이 차곡차곡 접혀들어가며 녹슨 청동문으로 집약되는

 

그 운동감이 너무 좋아서 한참동안 보고 있는 사이에 신부님도 수녀님도 신자분들도 조심스레 입구를 드나들었다.

 

문 위 벽공에 바쳐진 유달리 하얗고 거칠지만 에너지 넘쳐보이는 대리석 조각상도 가만히 눈여겨볼 만 하다.

 

 

정문의 좌우에 시립하고 선 (아마도) 카톨릭의 성인성녀들이려나. 화려하고 섬세한 대리석 조각 장식들은 가만히 뜯어보면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고 매무새도 다르다.

 

그리고 성모승천 대성당을 삥 에둘러 한바퀴 돌아보는 길, 성당 옆에 자리한 부속 건물들에서 느껴지는 연륜도 못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반질반질 매끈해진 대리석 재질의 포석들이 밟히는 소리가 따각따각 경쾌하던 그 곳.

 

 

 

두 개의 종탑은 최근까지도 모두 보수중이다가 최근에야 하나가 산뜻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바싹 당겨서 본 그 모습은

 

디테일하고도 부드러운 매무새가 왠지 돌을 다루는 경지에서 경주의 다보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성당 옆구리에 나있던 이러저러한 나무문들, 어느 것 하나 심심하거나 허술하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공들여 치장된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성당 외벽에 붙어있던 커다란 태엽시계, 그 아래에서 비둘기들에 빵을 뜯어주던 아저씨는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참이다.

 

 

섬세하고 세밀한 조각들로 치장되어 있는 첨탑이라거나 정문과는 달리, 성당의 어느 외벽은 이렇게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나잇살 깨나 먹은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바로 인접한 곳에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 사실 이곳은 드물지 않게 강변북로를 타거나

 

합정을 거쳐 강북이나 강남을 넘나들 때 꽤나 지나친 곳이기도 하다. 그저 지나치기만 했다는 게 함정이었달까.

 

 

좌회전이 불가하다는 속세의 붉은 사인 따위 코웃음치며 하늘 높은 곳과 사방을 고루 가리키는 녹슨 십자가.

 

 

 아마도 조선 말기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어느 대감 양반이런가.

 

 성모의 얼굴이나 안고 있는 예수의 얼굴이 참 와닿는다. 딱 한국인 얼굴이다.

 

 

 

 고수부지로부터 자전거를 끌고 계단을 올라와 순교지에 올라온 사람도 보인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와 '순교'를 기리기 위한 곳, 교회와 천주께 바쳐졌다는 그들의 충성은

 

더러 기존 질서와 관습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와 천대로 이어지곤 했다는 것도 동시에 기억해둘 비극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모형과 이야기들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둔 체험관.

 

 

 한국의 초대 추기경이 타고 다니던 포니 2를 반짝반짝한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던.

 

 

 그리고 엎어져 곤장을 매우 치던 형틀 역시 사실적인 (아마도) 1:1 실제 사이즈로 재현되어 있었고.

 

 발에 차는 차꼬와 얼굴에 씌우는 형벌기구들까지.

 

 

 

그리고 절두산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녹색의 그늘은 짙푸르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봄바람에는 성당의 성가대 노랫소리가 살짝 실렸다.

 

 

 절두산 성당은 순교자들에게 씌웠던 목칼, 조선시대 양반이 즐겨쓰던 갓, 그리고 순교자들에게 채워진

 

차꼬를 형상화한 쇠사슬의 세가지 포인트를 갖고 건축되었다고 한다.

 

 

 

 온통 해어진 채 구멍이 너덜너덜한 예수님. 아마 이 시대의 이 땅을 지켜보는 예수의 마음이 저럴 거다.

 

 

 활짝 열린 성당의 정문 안 쪽으로 당당하게 걷고 계신 수녀님.

 

 

 성당 앞에는 미니어쳐로 성경의 유명한 구절들을 재연해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 모습은,

 

글쎄, 묵을 곳을 구하지 못해 헛간에 잠시 몸을 뉘인 요셉과 마리아 아닐런지.

 

 

그리고 이 장면은 필시 예수가 최초로 기적을 행하는 장면일 거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

 

 

 성당 뒷켠에는 흥선대원군이 세웠을 척화비가 여전히 시대착오적으로 당당하다.

 

 

  

 저 분은 얼핏 듣기로 한국 최초의 신부님이셨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시라 했던가.

 

 

 

 절두산 성지 옆구리 쪽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성모상을 모신, 붉은 장미꽃들이 화환처럼 에워싼 곳이 나타난다.

 

 

 

매번 지나치기만 하던  절두산 순교성지. 이쪽에서는 더욱 잘 보이는 갓 모양의 둥근 형상과

 

구멍이 뻥 뚫린 목칼의 형상. 그리고 건물을 빙 두르고 늘어뜨려진 차꼬를 형상화한 쇠사슬의 형상들.

 

 

 

짜오프라야 강을 남쪽으로 달리는 쾌속 유람선에 별 대책없이 올라탔다. 뭐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정 반, 가다가 괜찮은데 있음 내키는대로 내리자는 심정 반. 의외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불쑥불쑥 솟아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버티곤 선 오성급 호텔들이나

새로 지어지고 있는 고층빌딩들.

촌스럽다 싶을 정도의 원색을 세개나 써서 빨갛고 노랗고 초록빛나는 배가 통통거리며 지나고,

그 뒤로는 흰색으로 우아하게 뻗은 유람선, 그리고 턱없이 불끈 솟아오른 완강한 빌딩의 뼈대

사이엔 뭔가 적잖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너무 크고, 혹은 너무 작고.

뱃전에 선 아이들은 아주 신나셨다. 사방으로 손가락을 찔러대고, 격한 강바람을 온몸으로

즐기면서 속절없이 부어지는 햇볕 아래 펄쩍대고 있었으니까.

유람선이 짜오프라야강의 마지막 역인 '오리엔탈' 역에 멈춰섰다. 그 전역, 전전역, 전전전역에서

내릴까 말까 갈등하다가 강바람이 좋아서 그냥 끝까지 와버렸다. 배 위 이층탑 위에서 배를 조종하던

마도로스 아저씨의 선그라스가 반짝, 빛났고 나는 내려서 '유럽의 어느 길'을 옮겨놓은 듯 하다는

오리엔탈 역 근처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도 '유럽길'을 옮겨놓은 듯 하다는 고풍스럽고 세련된 느낌의 거리는 간데없고

그냥, 여느 방콕의 거리랑 비슷한 거다. 관광지 쪽에만 집중된 밀도높은 사람들, 활기 같은 것들이

벗겨지고 난 고즈넉하고 한산한, 적당히 허름한 거리. 그리고 어디에나 뿌리깊이 박혀있는 불교.

그랬는데 문득 눈앞에 전 교황님인 요한 바오로2세의 동상이 나타났다. 이럴 수가. 역시 이쪽 동네는

'유럽'의 거리를 옮겨놨다더니 성당도 다 보이는구나 싶었다. 자세히 밑의 명판을 읽어보니 그가

태국 방콕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걸 기념해서 이렇게 동상을 만들어 놓은 거라고 하는데,

그의 발치에 놓인 조그마한 화환이 역시 태국이구나, 싶다.

성당 내부는 꽤나 화려하다. 성당임에는 분명한데 금색 도료가 아낌없이 칠해진 걸 보면 역시

종교가 수입될 때도 나름의 문화적 맥락과 고유한 미감이 덧칠해져서 받아들여지는 거다.

그리고 얼핏 굉장히 이국적으로 보이는 천사상도, 태국스럽다고밖에 할 수 없다 싶은 건 역시

팔에 푸짐하게 둘려진 꽃다발. 노란빛깔이 강렬한 화환이 다소 가라앉은 색감의 천사상을 둥실

하늘로 띄워올리는 느낌이었다. 태국의 성당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저런 화환 만으로도.

그리고 한참을 방황하다가 발견한 건 그 '유럽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는 동아시아회사.

과거 제국주의 시절 유럽 열강이 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을 경영하면서 진출했던 기업의

건물인 듯 한데, 아쉽게도 입구는 막혀있었다. 그저 겉으로만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뭐 조금

1밀리그램쯤은 유럽의 느낌이 난다고 쳐줄 수도 있겠다.

저 위의 깃대에는 어느 나라의 깃발이 휘날렸을까. 안에 들어가면 뭐가 있을까. 이것저것 꼬리무는

물음표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런 것만큼 더 확실하게 다가왔던 건 역시나, 어줍잖은 몇마디

감상평이나 가이드북 코멘트에 낚이는 건 위험하단 사실. 그래도 저 태국화된 성당의 느낌을

얻어내었으니 나름 뜻밖의 수확은 충분했다.
전주 한옥마을 근처로 비빔밥을 먹으러 가다가 문득 독특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돌담 너머 언뜻

비치는 기와지붕들이 느적느적대던 스카이라인 가운데 불쑥, 로켓처럼 하늘을 향해 온몸 뻗쳐있는

건물 하나. 그렇게 크지도 않은 건물이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끌리듯이 다가섰다. 이 아름다운 건물이 영화 '약속'에서 박신양과 전도연이 슬픈 결혼식을

올렸던 그 곳이란 건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전동성당'이란 이름의 유명한 건물이란 것도.

두 팔을 한껏 벌린 예수가 성당을 꼭 껴안을 듯 하다.

뭐랄까, 전문용어로는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했다는 이 성당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를 기리고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정문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틀 덕분에 뭔가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길고도 멀어보이는 느낌이 든다. 마침 미사 중인지 성가를 부르는 소리가

문밖으로 메아리처럼 흘러나왔다.

내부는 사진촬영금지, 잠시 들어가 몸을 녹였다가 숨을 참으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번 주말

날씨가 어찌나 춥던지, 서울에서 한참 남쪽에 있는 이곳도 서울처럼 춥기는 매한가지. 그치만

차 안에 앉아 볕을 쬐노라면, 혹은 실내 찻집에 앉아 밝은 양달을 내려보노라면 꽤나 따뜻해

보일만큼 햇살은 좋았다. 사진 속에서도, 그림자가 지고 잔설이 남은 곳 말고 햇살을 바로

쬐고 있는 곳들은 은근히 포근해보이기까지 하는 듯.

한바퀴 빙 둘러보는데 이거 은근 흥미로운 구조다. 정면에서 보면 평평한 구조물이 뾰족뾰족

탑을 이뤘고, 길쭉하게 뒤로 뻗은 몸통은 일정한 패턴으로 연장되며, 마지막으로는 둥글게

십자가를 모신 공간 배치까지.

그리고 어디에서 보던, 꽤나 멀리에서까지 분명히 식별할 수 있을 저 십자가와 세 개의 둥근 돔.

붉은 벽돌로 처음 지었을 때에는 반짝반짝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이 좀더 들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적당히 녹슬고 빛바랜 지금의 모습은 많이 부드럽고 현명해 보인달까. 굳이 비기자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뭔가 생기충만하고 의욕이 넘치는 모습, 저 안에서 기도를 하면 바로

푸슝! 하고 하늘로 힘차게 쏘아올려질 것 같은 그런 에너지가 있었을 거 같다면, 지금은 뭐랄까

저런 곳 안에서는 기도도 왠지 조심스럽고 온화하게 드릴 거 같다.

사제관인 듯한 옆 건물도 불그스름한 파스텔톤이 되어버린 벽돌들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식빵 모양처럼 뚫려있는 곳으로 바람이 거침없이 숭숭 들고 나면 실제로는 굉장히 추울 듯.

전주 한옥마을 옆에 바로 붙어있던 전동성당.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에게도 눈에 번쩍 띌 만큼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그 성당 안의 (촬영) 금지된 모습과 분위기는 더더욱.





아야 소피아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본다는 손가락 넣고 돌려보기, 저 구멍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한바퀴 삼백육십도 회전시킬 수 있다면 소원이 이뤄진다던가. 대체 어떤

이야기가 얽혀있어서 저 구멍이 그런 '행운의 구멍' 역할을 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냥, 늘 행운과 소원성취를 바라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아닐까 싶다.

반쯤 돌리다가 선택의 순간에 직면, 손가락을 꺽어뜨릴 것인지 내 소원을 꺽어뜨릴 것인지, 아무래도

몸을 챙겨야겠다 싶어 포기하고 아야 소피아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울퉁불퉁한 돌들이 나름

미끈하게 닳긴 했지만 여전히 꿀렁꿀렁, 옆으로 새는 길은 저렇게 철망이 쳐진 채 길을 막았다.

2층에서 보이는 풍경은 1층에서 볼 때와는 또 사뭇 다르다. 아무래도 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색

글자가 샹들리에와 함께 바로 눈높이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데다가, 창문을 바로 등진 위치라서

훨씬 밝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2층은 아야 소피아가 성당이던 시절 그려진 벽화나 기타 작품들을 전시해둔 미술관 같은 분위기.

무슬림들의 공간 모스크로 변하면서 회칠로 덮이기도 했던 그림들이라 도리어 보존상태가

양호한 건지도 모른다. 모스크를 꾸몄던 것들은 이후 다시 기독교도들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전부 돌이킬 수 없게 지워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림과 글자가 어지러이 섞여 있는 데다가, 그림이 보여주는 전형성들, 그림에서 드러난

상징들을 보면 이 때의 그림이란 게 단순히 미감을 충족시키는 장식용이나 종교적 숭배의

의미 뿐 아니라 교육의 의미도 컸음을 짐작케 한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예수의 얼굴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같은 공간에, 다른 시기에 그려진 그림에서

나타나는 신의 형상이 변화한 건 역시 당대 인간들의 상상력 차이 아닐까 싶다.

천정의 무늬를 보란 듯이 한 겹 벗겨낸 뒤에서 드러나는 어슴푸레하지만 분명 다른 문양들.

아마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지배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이 곳에서 지워진 상대의 흔적,

그리고 새롭게 덧씌워진 자신의 흔적일 텐데, 저런 식으로 절개된 모습을 보니 무슨 외과수술

같기도 하고, 역사의 지층을 드러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렇게 벽면 가득한 문양들 뒤에서 새롭고도 오래된 흔적을 찾아내는 건 지층을

헤집으며 화석을 찾으며 과거 시간을 복원하려는 노력과도 비슷하겠다. 노란빛 일색으로

뎦였던 그 공간 뒤에서 웅얼대고 있던 옛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또 한 편으로는 지금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이야기들을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게 하려는 노력도

함께 진행중이다. 이미 오랜 이야기, 터키가 비잔틴 제국에 속했던 때, 술탄의 지배 하였던 때,

그런 기억들은 이미 도색된 물감들이 색을 잃고 먼지처럼 바스라질 만큼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도 대신 사진과 이미지를 구하러 들르는 시대.

한쪽 돔에서 드러난 성모자의 벽화. 돔의 완만하지만 분명한 곡선벽에다가 그림을 그려넣는

작업은 굉장히 어렵지 않았을까. 그 굴곡진 면의 왜곡되는 정도를 생각하고 실제 아래에서

그림을 볼 때 어떻게 보여질지를 감안해야 했을 텐데.

어느 창 너머를 무심하게 시선이 쓸고 가다가 문득 멈췄다. 창 너머 언뜻 보이는 저 뾰족탑들은

블루모스크의 그것들, 담담하고 차분하지만 세련된 느낌의 옅은 청회색 미나렛이 이쁘다.

아야 소피아에 남아있는 모스크의 자취, 1층과 2층 사이에서 여성들을 위한 기도공간.

나오려다가 마주친, 전등을 갈고 있던 아저씨들. 이 공간에 켜져있는 샹들리에만 수십개니까

거기에 달려 있는 전구는 대체 몇 개나 되려나. 의외로 저분들 하루에 해야 할 일이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출구로 돌아나오는 길에 올려다본 천장들, 천장을 꾸민다는 행위는 뭐랄까, 가장 덜 필요하면서

또 가장 재력과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싶다. 공간에서 눈이 가 닿을 마지막 부분이

아마도 천장, 그리고 화장실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화장실은 아예 공간 밖으로 빼내어 버리고

천장에도 이렇게 공을 들여 무늬를 그려넣고 모양을 만들고.

아야 소피아의 복잡한 내부 구조를 생각하면 당연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 외부는 역시 만만치

않은 복잡한 구조로 이리저리 꺽이고 휘어지고. 이렇게 거대하고 위대한 건축물은 그래서 역시

바싹 붙어서 보려다간 전혀 알아볼 수 없고 도리어 혼란에 빠져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완상하는 게 가장 잘 파악하는 길인지도.

원래는 이곳에서 무슬림들이 발을 씻고 손을 씻는 곳일 텐데, 더이상 모스크로 기능하지 않는

이곳에서는 더이상의 실용성을 잃은 정자 정도랄까. 이날처럼 비가 오던 날은 잠시 안에 들어가

일행을 기다릴 수 있는, 비를 긋는 공간으로 쓰였다.

그리고 굉장히 쿨한 모습으로 금발을 휘날리며 앞서 걷던 두 분의, 아마도 프랑스 아가씨들.

전혀 아야 소피아와 연관되지 않는 사진이라지만, 그래도 출구가 저렇게 생겼구나 정도를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니 전혀 억지로 끼워넣은 건 아니다.ㅋ




아야 소피아 성당, 하기야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박물관, 이 건물을 칭하는 수많은 단어가 있다.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를 넘나들며 수차례 건물벽면에 회칠이 새롭게 되고 이전의 흔적이 덮였던

건물다운 건지도 모른다. 유럽과 아시아 한 가운데 버티고 선 이 건물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할지,

이 건물을 성당이라 해야 할 지 이슬람 사원 모스크라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뜨악하고 어색한 색감이지만, 구석구석 자연스럽게도 닳아빠진 게 용케도

중후하고 분위기 있는 색감을 만들어냈다 싶다. 저렇게 뻘건 색깔이 생생하게 갓 칠해졌을 땐

대체 어땠을까, 사실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는 않도록 텁텁하고 끈적하고 더운 색감이지 않았을까.

안으로 들어서서 처음 맞이하는 길다란 회랑은 의외로 꽤나 담백하다. 담백하다기보단, 전혀

치장이 안된 맨얼굴을 맞이하는 느낌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바닥의 돌들은 조금씩 삐뚤거려

발걸음을 엉키게 하고, 벽면과 천장의 벽돌들은 곱고 반듯하게 마감했을 회칠이 전부 벗겨졌는지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유적을 연상케 했다. 그 벽면에 기댄 그림들은 아야 소피아의 과거를

알려주는 온갖 그림과 정보들.

그 그림들을 슬쩍 훑고서 문 하나를 더 지나치면 벽면이 색색깔의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그 자체의

문양과 색감으로 이미 충분히 화려한 회랑이 다시 나타난다. 조명조차 변변찮던 첫번째 회랑과는

달리 수십개의 전구가 밝게 켜진 샹들리에가 드높은 천장에서부터 길게 내리뜨려졌다.

두번째 회랑에 들어서면 언뜻언뜻 문 안으로 보이는 아야 소피아의 내부가 워낙 현란하고

궁금해서 금방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회랑을 살피면 이곳도 꽤나

공들여 다듬어진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대리석을 잘라 그 무늬가 좌우대칭이 되도록 하여 붙힌

벽면의 붉고 푸르고 하얀 대리석들도 그렇고, 천장의 노란 배경색과 문양들이 그렇다.

드디어 아야 소피아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건 커다란 문 위에 그려진

금빛 찬란한 성화 한 폭. 성화도 성화지만 그림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레이스같이 가느다랗고

새하얀 장식들이 섬세하다.

드디어, 드디어 아야 소피아 내부로 진입. 벽면에 커다랗고 동그란 검은 판에 금빛으로 씌여진

그림은 코란의 한 구절들이라고 한다. 도무지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모스크의 중앙돔엔

'알라가 유일신'임을 고백하는 아랍어가 씌여있다고 하니 그 비슷한 문구들이 아닐까.

6년 전에 왔을 때도 어딘가 공사중이긴 했던 거 같은데, 이번에도 한쪽 벽면은 완전히 아시바로

빼곡히 가려진 채 복원작업이 진행중이었다. 아무래도 세계의 주요한 유적들은 쉼없이 복원이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른 거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도 그렇고, 서유럽의 온갖 유적지도

그렇고, 여기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도 그렇고. 일상 생활에 들어와 활용되다가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기도 하고 스러지기도 하던 공간에서 과거를 고착시키고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바뀌면서

억지스레 잡아놓으려니 그런 거 같다.

이 분위기란, 이 이국적이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압도적인 느낌이란, 따뜻한 듯 하면서도 뭔가

비밀을 숨긴 듯한 엄숙하고 단호한 느낌이란,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가는 여행자들이 내뿜는

웅성거림과 방황하는 분위기가 더해지니 완전히 멍하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사방으로 종횡하는

시선을 따라 사방으로 눌려지는 셔터.

아무리 찍어도 좀처럼 온전히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과 그 독특한 분위기가 담기지 않는 듯.

돔형으로 지어진 천장을 따라 둥글둥글 내려선 벽면들, 그 벽면들에서 다시 뭉글뭉글 뻗어나간

공간들과 입체적으로 뚫린 창문들, 실제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가늠하기 힘들도록 입체적으로

확장되어지는 공간, 그 공간감을 더욱 왜곡시키는 건 사방으로 늘어뜨려진 샹젤리제와 동그란

판들과 기둥들과 회랑과 창문들.

그 기둥들 하나하나에 저렇게 투각되어 있는 기하학적인 문양들, 그리고 벽면의 노란 색감만큼

노란 빛을 뿜어내는 수백 수천개의 전구들, 그만큼의 빛을 이 공간에 던져놓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만 둥근 창문들. 대체 이런 너를 뭐라면 좋을까.

아무래도 아야 소피아엔 항복이다. 아무리 찍어대도 뭐 하나 만족스러운 사진이 없고, 아무리

찍어대도 이 아름답고 위엄있는 건물에 누를 끼치기만 하는 느낌이다.







대학가가 밀집했던 동네에서 문득 마주쳤던 고풍스런 성당, 꽤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건물이었는데, 하늘로

솟은 첨탑에 가까울수록 대리석의 빛깔이 뽀얗게 살아있는 반면 아랫도리쪽은 꼬질꼬질 때가 낀 것 같았다.

성당 내부의 분위기는 늘 그렇듯 기침소리조차 조심스럽다. 부조에 집중된 조명이나, 공간축과 시간축을 순간

헝클어뜨리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배치된 조형들이 빚어내는 효과들이란 건,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왠지 재밌다.

바스티유 감옥이 있었다는, 1794년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바스티유 감옥에서의 대량 탈주가 있었다는

바로 그 곳이다. 바스티유 광장. 뭔가 당시의 분위기를 어림해볼 흔적이 당연히, 프랑스니까,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의외로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옆에 있던 건 바스티유 오페라관. 한때 정명훈이 지휘자로 활동하던 곳이라던가, 정치인들과의 친분이 돈독하다는

그는 작년이었던가, 여기까지 그를 만나러 와서 순식간에 정리해고당한 서울시향단원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학생들에 막말을 했다고 한다. 니들 좌빨이지, 뭐 그런 식이었다던가. 그 기사를 썼던 분은 나름 정명훈을

위대한 음악가로서 그에 걸맞는 감성과 도덕을 가졌으리라는 기대치가 있었나보던데, 사실 그런 거 없다.


지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나 고고하게 천상에서 독야청청하는 예술 같은 건 존재할 수 없을 텐데.

작게는 정부의 온갖 되도않는 공익광고에서 이뿌고 멋진 목소리와 이미지를 팔고 있는 사람들, 크게는 음악과

예술의 천분을 팔아 자리를 차지하고 완장질하는 온갖 또라이들. 정도의 차이지만, 다들 '부역'중이다.

오페라홀에서는 공연도 없었고, 그저 거리를 배회하다 보니 바닥이 냉큼 눈에 띄는 거다. 자전거 통행길이

참 꼼꼼하게도 그려져있다. 파리는 서울과 달리 구릉이 심하지도 않고, 사이즈도 한결 작으니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기에 참 좋을 거 같다. 그래서 아마 파리의 연인들에서 김정은이 그렇게도 자전거를 즐겼는지도.

반대편에 서 있던 쇼핑센터. 여긴 아무래도 주거지역이 가까운 탓인지 '오리지널' 프랑스인들 말고 아프리카에서

온 듯한 흑인들과 유색인종들도 많이 보였다. 퇴근시간이었던가, 직장인들도 많이 보이고 뭔가 입구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고.

미국식 패스트푸드에 대해 경멸에 가까운 무관심을 보이는 프랑스인들이라고 하던데, 정말 KFC니 맥도널드니

세계의 엔간한 도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을 보기가 쉽지 않았던 도시였다. 그런데 여기서

딱 발견한 KFC. 그리고 그 옆에는 다소 생경한 색감의 맥도널드까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버스 안의 쾌적한 공간에 앉아 바라본 파리의 시내 풍경.




스마트카가 곰실곰실 기어다니는 파리 시내, 엷은 잿빛의 대리석만큼 하늘이 우중충하던 날 거리를 거닐었다.

스마트카가 참 귀엽다며 서울에서도 저런 차들이 많아졌음 좋겠다고 생각하던 즈음, 거의 달구지 수준으로

낡은, 그렇지만 또 어찌 보면 굉장히 유니크하고 귀여운 녀석이 하나 지나갔다. 네모 반듯하게 각진 '월-E'의

캐릭을 처음 봤을 때 그 가공할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저런 투박한 생김에서도

뭔가 귀여움을 찾아낼 수 있게 되어 버렸다.

화려한 장식이 주렁주렁 꾸며져 있는 다리, 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위에, 구릿빛 주물들을 포인트마다 조금씩

얹어 놓고, 반짝반짝하는 금칠로 마무리. 밤에는 그 위에 주홍빛 불빛이 한겹 내려앉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느강변, 어느 아가씨가 둔덕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사과를 깨물어 먹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한참을

쳐다봤댔다. 그녀가 가버리고 남은 자리.

한강 고수부지와는 다른 느낌, 뭔가 좀더 풍경들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느낌이다. 바닥에 깔린 포석부터. 한강은

그냥 시멘트로 맨들맨들, 아무런 질감이나 요철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죽이 대부분인 거다.

가방을 앞에 앉힌 채 근처 까페에 들어갔었다. 까페 이름은 퐁뇌프. 바로 그런 이름의 다리 옆이었다.

잔이 넘치도록 찰랑찰랑 따라진 화이트와인을 홀짝홀짝. 빵을 담았던 종이봉투가 꼬깃꼬깃해지도록 손에

쥐고 다녔으니 여기서 저 와인의 마지막 한 방울이 사라질 때까지 같이 다 마셔버릴 셈인 거다.

일요일날에 나왔을 적엔 차들의 통행을 막은 채 거리 축제 분위기를 한껏 풍겼던 바로 그 거리, 평일의 찌뿌린

하늘 아래에선 왠지 살짝 쓸쓸한 분위기의 한적한 길가로 변해버렸다.

성 샤펠성당을 지나며 다시 한번 그 뾰족뾰족한 외양을 눈길로 슬쩍 쓰다듬어 주고.

관광객도 잘 눈에 띄지 않던 어느날 오후, 금세라도 비가 꾸물댈 듯한 날씨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

틈에서 왠지 나도, 여행자가 아니라 현지인인 양 무심하게 한번 올려다 보았다.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 삼색기에 담긴 그럴듯한 뜻도 그렇지만, 프랑스의 국가 역시 피 냄새가 가득하다.

피를 먹고 세워진, 자라난 그네들의 국가 이미지. 최소한 그 정도의 피값을 주고 기억해 내어야 나라의 기풍이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만한 건덕지가 생기는 걸까.

노틀담 성당. 프랑스 파리의 중심부는 딱히 랜드마크라 할 만큼 두드러지게 높은 건물이 눈에 안 띄지만, 그래도

단연 노틀담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이 시선을 잡아끄는 거다. 자연스레 시선을 붙잡아 두는 효과.

오르세 미술관 지나는 길. 철도역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오르세 미술관 옆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언뜻 옛 서울역의

풍취가 떠오르기도 하고, 그리 작지는 않은 사이즈의 도시에서 마주쳤을 법한 철도역사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었다.




노틀담 성당을 지나다가 우연찮게 구경하게 된 미사 집전 장면, 아마 파리 추기경이 직접 와서 집전하는 것

같던데 제법 볼만한 광경이었다. 아름다운 성당과 더불어 멀리부터 순례해 오는 듯한 사제들과 수사들이 

파리 시내 가운데서 압도적인 경건함을 피워올린다.
 
양쪽으로 쭉 늘어선 관광객들과 구경꾼들을 헤치고 노틀담 성당으로 스며들듯 빨려드는 하얀 옷입은 신의

대리인들. 이미 미사를 보려는 교인들은 성당 안에 만석이었다.

왠지 가톨릭교와 관련된 오리지널 버전의 이미지랄까,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벽안의 백인 (남성)신부다.

최근까지만 해도 하느님-혹은 신-의 이미지 역시 서양 백인남성의 그런 이미지 일색이었다가, 얼마전부터

그런 성상이나 성가에 대해 '한국적' 시즈닝이 가해졌다고 알고 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예수님, 국악풍의

성가라는 건 바람직한 변화인 거 같긴 하다.

사실 '신성함'의 외피를 두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은지도 모른다. 정숙하고 느릿한 발걸음, 신과 그 위엄을

상징하는 온갖 악세사리와 기호들, 그와 나의 공통 인식기반이 되는 문화적 컨텐츠들. 예컨대 천지창조니

부활이니 하는 신이 역사한 사건들에 대한 경외감.


그런 건 모두 거품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들의 외피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법정스님 선종 후 터져나온

봉은사 명진스님에 대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외압설에 대해 '종교인이 정치색이 심하다'느니, '모든 걸 버리고

조용히 하라'느니, 따위의 조언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종교적 신성함과 종교적 의미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법정스님이 4대강 사업에 강한 반대 입장을 밝혔던 건 어떨까. 세상에 뒹굴며 세속에서 힘쓰는 게 곧

'더러워지고' '신성함을 해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워낙 관광객이 많은지라, 앞에는 미사를 방해받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성당 가운데쯤 바를 쳐 두었다. 높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정숙하게 걸러진 햇살, 십자가에 집중된 조명, 파이프오르간의 장중한 선율과 울림까지

미사 참여의 목적이 아닌 '구경'의 목적으로 들른 사람들조차 위압한다.


미사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뭔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글로리아, 아멘, 이정도? 근데

말을 못 알아들어도 하울링 심한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신부님의 낮고 단정한 음색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혹은 신성한 느낌이었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그에 비하면 요새 나오는 더미 파이프오르간은 상당히 간소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이다. 애초 천장이 저리도

높고 공간이 넓은 성소를 짓기란 요새 세상에 불가능하니, 파이프 오르간의 성스러운 효과음 역시 시대에

맞게 바뀌어 연출되어야 하는 거다.




시테섬에는 콩시에르주리(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에 목이 잘릴 때까지 갇혀있던 감옥이라는데

별로 가보고 싶지 않아서 안 들어가 보았다..)과 인접한 생 샤펠 성당과 노틀담 성당이 가장 큰 볼거리라고 한다.

말하자면 어느 여행가이드북에나 나와있는 must-see 포스트랄까, 근데 계속해서 성당만 도는 것 같아 살짝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자연 내 걸음도 휘적휘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흐릿흐릿하며 빗발이 흩뿌리더니 때마침 기습적으로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려붓는다. 난 프랑스 날씨도

마치 익히 알고 있는 영국의 날씨처럼 그렇게 변덕스럽고 흐린 줄은 몰랐었다. 유학생 친구의 말을 빌자면, 얘들은

볕이 잘 들어 양지바르고 날씨가 좋은 땅을 찾아 주변으로 전쟁을 일삼을 수 밖에 없었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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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든 볕을 따라 냉큼 분수대에 내려선 참새들, 파리엔 비둘기도 많고 참새도 참 많다. 거리나 공원에 주저앉아

빵을 뜯다보면 참새들이 십여마리씩 둘러싸고 빵쪼가리를 노리는 건 예삿일일 정도.

비 따위 개의치 않고 노틀담 성당에서 시테섬 서쪽으로 걷던 중에 오락가락하던 비가 어느 순간 오지게 내리기

시작했고, 난 잠시 비를 그을 생각으로 나즈막하게 턱진 길가 가로수 옆 풀떼기에 앉아 비를 피했다.


그리고 만난 그녀, 아까서부터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 싶더니 결국 날 따라잡고는 나랑 같은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겠다고 들어와 섰다. 서로를 아까부터 의식하고 있었음을 왠지 알아채고는, 이대로 말않고 계속 서있음

민망하겠다 싶은 타이밍을 잡아채고 Hi~*

약간 마른 몸에 갈색 생머리를 가진 그녀는 뜻밖에도 의외의 굵은 톤의 목소리로 대답을 주더니, 몇 마디 나누다가

우리가 같은 곳을 찾고 있음을 알고는 같이 가잰다. 나야 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여행의 묘미이니만치

냉큼 앞장섰다. 문제는..이러저러한 수다를 떨며 걸어도 걸어도 아무리 걸어도 생샤펠이 보이지 않았단 것.

그녀의 이름은 다니엘, 남자 이름같다고 했더니 뒤에 le가 더 붙으면 여성형이 된단다. 첨 알았다.

건축학도라는 그녀는 방향감각이 없었고, 나 역시도 네비게이션 없이는 운전하기가 힘든 상황인데다가 코엑스

지하에서 여전히 생경한 골목을 마주하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시테섬 남쪽 강변을 끼고 계속 걷다간 결국

섬끝에 이르고 말았다.

...그제야 이야기를 좀 주섬주섬 가다듬고는 각자가 가진 맵을 보충해 가며-그녀의 대축척지도, 내 소축척지도-

다시 빠.꾸. 몇 번의 갈림길과 결단을 요청받은 후에야 생 샤펠 성당에 들어설 수 있었는데 사실 둘다 별로 그곳에

방문하는데 열의를 갖고 있지 않은 탓이 컸지 싶다.


스물다섯이라는 그녀는 은근슬쩍 청소년 가격으로 거의 반값에 생샤펠 티켓을 샀고,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은근슬쩍

청소년 티켓을 구매. 9유로에 가깝던 티켓값을 4.8유로에 사고 나니 왠지 마음이 맑아 밝아진 느낌.


그렇지만 그 스테인드 글라스는 역시 대단했다. 서민용이었다던 다소 담백한 1층의 공간을 훌쩍 넘어서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선 2층은, 조심해요 다니엘, 괜찮아요 써니, 이러면서 올라선 2층은 딱 들어서는 순간 화려한

유리창 빛깔을 묻혀서 내리꽂히는 색색의 광선들로 가득했다. 그 광선을 반사시키는 금색의 기둥과 장식들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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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갱장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함을 보고 있자니 인간이 만들어낸 신적인 분위기도 때론 즐길만 하다 싶었다.

숱하게 마주친 성당들, 그 안에서 숨소리조차 조심하는 인간들은 결국 스스로 신을 불러내고 만들어내고 있는

게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 그러한 믿음이 모이고 모이면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신을 불러내고, 또 영혼을

정화하기도 할 뿐더러, 그런 믿음이 기실 이렇게저렇게 역사를 움직여왔다. 그게 긍정적이던, 혹은 부정적이던

믿음 자체는 그만한 힘을 갖고 있다는 거다. 감세정책이 무조건 '표심'을 얻는 현상이라거나, 단적으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도, 경제를 살리겠거니 했던 믿음이 자초한 무시무시한 결과인 게다.


Danielle은 캐나다의 70-80%가 무교일 거라면서 자기도 역시 종교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여태 자신이 파리에

머물면서 찍었다는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사람은 없고 전부 건물에, 파이프에, 바닥에..그런 것들 뿐이다. 니 사진은

왜 한장도 없냐 했더니, 자신은 파리에 건축물들 공부하러 왔기 때문에, 또 그걸 즐기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공사판

현장 사진같은 것들만 찍고 있노라는 대답. 벽에 붙어서 사진 몇장을 찍더니 휙 돌아보고는 자긴 됐댄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저렇게 반짝대고 있는데. 난 좀 더 느긋하게 돌아보려고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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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혼자 다니느라 내 사진이 없으니 좀 찍어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잰다. 몇 장 찍고, 이 냉담한 건축학도의

지식을 재고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고딕 양식의 건물들에선 창문이 애초 엄청 좁고 작았는데

갈수록 커지는 걸 볼 수 있다는 둥, 중력과 건물 자체의 무게를 이렇게저렇게 지탱하고 있다는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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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나도 어느 정도 분위기에 젖었다 싶어서 생 샤펠을 뒤로 하고 나섰다. 밖으로 나서니 정작 하늘은

찌뿌드드했고 햇살도 없었던 걸 보니, 스테인드 글라스 자체가 좀더 밝고 화사한 실내를 만드는 기능도 의도한 게

아닐까 하는 내 해석에, 명민한 건축학도 다니엘도 수긍하더군. 날 인정하다니 머리가 좋은 아가씨인 게다.


알고 보니 다니엘도 나처럼 그닥 빡빡한 일정표는 갖고 있지 않았고 걸어서 파리를 돌아다니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여서, 우리는 일단 오늘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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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틀담 성당의 건물은 +자 모양이랄까, 입구와 십자가상이 양끝에서 마주 보고 있고 그 직선상 허리켠 쯤에

양날개처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커다란 채광창이 달려있는 형태다. 그 +자의 중간, 성당의 중심부 천장엔

이런 그림이 조그맣게 올라붙어있단 사실을, 구석구석 둘러보다가 발견했을 때 혼자 속으로 많이 좋아했다.

천장에 조그맣게 그려진 저게 이런 성모자의 형상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그래서

노틀담 성당에 대한 내 첫 사진으로 임명. 별이 가득한 우주를 관장하는 그리스도와 성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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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시테섬으로 건너면서 놀랬던 건, 거의 십여개에 달하는 다리를 세느강 양안으로 뻗고 있는 시테섬은

그다지 섬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것 하나, 그리고 관광객들이 다 어디갔나 했더니 노틀담 성당에 전부 다

몰려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하나. 2층짜리 관광버스가 쉴새없이 관광객을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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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본 노틀담 성당의 이미지는 사실 모종의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이미 익숙했다. 그렇지만 뒤에서 본 노틀담

성당은 영 딴판이어서, 마치 '대항해시대'같은 게임에서 숨겨져있던 보물같은 장소를 찾을 때 느끼는 그런

팡파레 같은 게 터지면서 짜잔, 하고 나타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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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부는 아저씨에게선 왠지 모를 예술혼이 느껴져서, 내 기꺼이 50상팀을 내주었다. 사실은 사진 좀 잘

찍어보려다 눈이 딱 마주치는 바람에 별 수 없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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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틀담 성당은 왠지 상아를 정교하게 세공한 건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약간 아이보리빛을 띈 건물에 촘촘하게

조각된 창문이나 정면에 선 세 개의 대문은 한참동안 서서 바라보아도 싫증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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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성당에 나가고 세례도 받았지만은, 성당같이 '신성성'을 표하는 공간에 들어가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의도한 대로,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노래와 높은 천장으로 공명하는 울림, 그리고 어슴푸레

조여진 몇몇 창문으로 계산되어 들어오는 한줌의 햇살, 아줌마라 불러야 할지 처녀라 불러야 할지 모를 마리아와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한 사내, 혹은 아기의 형상까지. 스스로 만들어낸 분위기에 스스로 압도당하고 눌려버리는

것 같다.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진 신에게 스스로의 삶을 바치고, 인간의 역사를 내맡겨선 몇 백년간 싸움도 하고

여전히 그런 도그마에 빠져 종교분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맑스의 이야기가 더욱

와닿는다. 물론 맑스의 그 말은 뒤집어 생각컨대, 적절한 수준에서의 '복용'은 정신건강에도, 육체건강에도 좋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옛날 비상약으로 아편을 꿍쳐놨다가 조금씩 써먹었다는 얘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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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에 가서도 놀란 것 중 하나가, 기독교 문명권에서 얼마나 다양한 표정과 모션과 메시지로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이미지가 변주되어 왔는지 하는 것. 숱한 옛 기록들을 짜맞춘 'holy book'을 그 자체 하늘의 음성으로

여기면서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상상력을 발휘한 그 결과물들은, 당연히도 제각기

첨예하게 다르다. 단지 외양이나 포즈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었을지..에 대한 기대나 예측 자체가

그토록 판이한데, 과연 그들이 생각하고 호명하던 '신'이란, 과연 같은 사람 혹은 무언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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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틀담 성당 안에 있는 프랑스의 성녀, 잔 다르크. 어떤 영화에서였던가, 그녀는 신들린 반 또라이로 나왔던 걸

본 적이 있다. '신들린'이란 단어, 써놓고 보니 참 시니컬하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한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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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이뿌다는 생각 이전에, 저기에 돌멩이 하나라도 던져서 누군가 깨뜨릴라 했다면, 그

소리가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솔직한 고백. 이 경건하고 웅장하고 밭은 기침소리 하나 내기도 힘든

엄숙하기 짝이 없는 성당 내로 유리조각들이 산산이 떨어져내릴 때라면, 거의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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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중인 파리지앵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보인다. 언젠가 한번 명동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이

직접 연주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시니컬한 나로서도 그 장엄함에 감동받고 말았었다. 여긴 어떨까..궁금했는데,

우연찮게도 여행을 마치기 전에 한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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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바깥날씨, 왠지 밖으로 나오면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여기가 내가 사는 세상, 가스펠 성가나

엄숙한 설교소리, 그리고 고요한 분위기로 포장되지 않은 날것의, 다소 칼칼하지만 신선한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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