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꿀꿀한 하늘 아래 형광색 점퍼를 입은 마부 아가씨가 눈에 확 띈다.


그리고 파란색 파이프가 구불거리며 도시를 관통하는 아래 새빨간 차양과 의자를 가진 까페도.


이 작고 귀엽지만 빨라 보이는 차는 아마도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 같은데, 미처 그들에 초점을 잡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슈프레 강폭을 가늠할 수 있는 사진. 조금만 단단히 마음을 먹으면 이 정도 너비의 강쯤은 금방 횡단할 수 있을 듯.


그리고 계속 벼르고 있던 뮤지엄아일랜드. 호텔 바로 옆인데도 도무지 시간을 내볼 수 없었던 방문장소를 일욜 오후에야 겨우 들러봤다.


운이 좋았던 거라, 마침 벼룩시장이 열려서 중고 책이니 카메라니 심지어는 중고 타자기까지 꺼내놓고 팔고 있던 사람들. 이리저리 뜯어 보고 인터넷도 검색해보고 하다가, 구 소련제 필름카메라 한 점과 무려 1938년에 만들어진 타이프라이터 한 점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외모를 가진 아저씨가 노려보는 보데 뮤지엄, 그 앞에서 사람들이 번다하게 오가며 사진도 찍고 내부 전시도 보러 들어가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출장이 아니라 여행을 온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 기분을 더욱 북돋아주는 트럼펫 아저씨. 쉼없이, 엄청 진지하고 열심히 연주를 하고 계시길래 주머니 속 동전을 탈탈 털어드리곤 맘놓고 이리저리 사진 촬영을 시도..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작지 않은 강, 슈프레(Spree) 강변으로는 과거 독일 분단시기의 유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독일이 동서로 나뉘고, 동독 내에 소재하던 수도 베를린 역시 동서로 나뉘었던 그 시절, 체제 경쟁이 심화하면서 동독은 서베를린의 구획을 온통 장벽으로 둘러싸버리기로 한 것. 그게 베를린 장벽의 초기 모습이었다. 물론 '클래시 오브 클랜'같은 게임을 보면 알 수 있듯 장벽이 점차 업그레이드되면서 내구성도 단단해지고 강화되는 것처럼, 이 장벽도 점점 최신의 기술적 진보를 더해 걷잡을 수 없이 삼엄해졌고.

20여 킬로미터에 이르던 그 장벽이 일부 구간, 약 2킬로미터 정도로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이곳 East Side Gallery다. 말그대로 거리의 갤러리, 장벽을 미술관 전시품처럼 보전해 놓은 곳. 


이른 아침에 도착해서 한번 따라가보기로 했는데, 상상보다 충격적이었다. 장벽 자체는 이렇게 얇고 허름했구나 싶어서.


보전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듯, 여기 보이는 그래피티들은 전부다 최근의 것들. 그러니까 '훼손'이랄 수 있겠다.


1961년 이래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1989년까지 장벽을 넘으려다 숨진 사람들의 공식적인 숫자는 163명이라고 한다. 그 숫자만큼 해당 년도에 표기해 둔 이 작품은, 그렇지만 공식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탈주 시도자와 은폐된 죽음들을 놓치고 있을 거다.


누군가 가져다둔 화환. 아마도 여전히 그 상흔을 생생히 갖고 있는 누군가겠지.


이렇게 장벽에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둔 것처럼 묘사해둔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작은 구멍 하나로부터 장벽이 무너지리라는 기대 혹은 다짐.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가 끝나는 지점에 '장벽 박물관(The Wall Museum)'이 있다는 표지가 곳곳의 아스팔트 바닥에.


그렇지만, 동방의 여전한 분단국가에서 온 이가 새삼 감회에 젖기엔 이미 독일 통일은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제 통일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마구 그려댄 그래피티로 장벽은 훼손되고, 그 코앞 전봇대나 가로등에는 온통 난삽한 광고 뿐이다. 이미 27년전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이미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장벽이 던졌던 문제의식, 혹은 장벽을 남기며 사람들이 남기고 싶었을 자유라느니 정의라느니, 그런 가치들은 이제 얼마나 싱싱하게 남아있을까. 아니면 이들은 이미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젖히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느라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부러운 일이다.


장벽 너머 보이는 슈프레강, 이 작은 강은 대체로 동독의 영역에 속한 채 군사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에 아이가 빠졌을 때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칫 상대편의 총격을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인데, 이후 인도적인 조치를 취할 때에는 협조하도록 원칙을 세웠다고.


자꾸 한반도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5차 핵실험이 벌어지고, 남북한 양측의 '최고존엄'이 전쟁을 부추기는 언어를 주고 받는 상황이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진, 동독과 구소련 정치지도자 간의 유착관계를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버전으로 치면, 글쎄, 두 명은 누구여야 하려나.


The Wall Museum 내부, 생각보다 전시물도 많고, 장벽이 생긴 이래 철거되기까지의 역사에 대한 시청각 자료가 엄청 많아서 둘러보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사진은 처음 장벽을 쌓아올릴 때 쓰였던 허름하고 기초적인 장비들.


그리고 최초의 기초적인 망루. 슈프레강 넘어 보이는 건 서베를린.


다리 중간도 이렇게 엉성하고 속이 빈 벽돌블럭으로 담을 쌓고.


그러다가 1989년, 외부 세력의 개입을 적절히 차단해 가면서, 또 적절히 활용해 가면서 서독과 동독은 결국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맞이한다. 박물관 내 영상 자료들을 따라가다보면 그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질 지경이다.


부럽기도 하고, 천운이었다 싶기도 하고, 또 한국과는 굉장히 상황이 달랐다 싶기도 하고. 일단 베를린이 엄청 어색하게 동독 한복판에 박혀 있었던 데다가 동독과 서독간에 전쟁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도 없었으니. 한국은, 그리고 북한은 독일과 같이 분단 체제를 역사로 되돌릴 수 있을까.





성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이다 보니 아무래도 화장실 표시부터 남다르다. (그리고 화장실 문이 절대 닫혀있지 않도록


쇠사슬로 열어놓은 채 고정해놨다는 건 또다른 포인트) 큐빅인지 뭔지, 그런 소재를 가지고 남자의 몸을 형상화하고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눈물만은 아닙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듯한 남자화장실 표시.


그리고 제법 현실적인 몸매를 갖춘 여성의 닭똥같은 낙루. 여자화장실.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더블린에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 맥주. 그 중에서도 바로 기네스.


일본에 여행다닐 때도 그랬지만 맥주 공장에서 바로 시음하는 맥주만큼 맛있는 게 없었던 터라 기네스 공장은


꼭 가보려고 별렀던 터였다. 그렇게 찾아간 기네스 스토어하우스.

 

입구에 정차해있던 굉장히 유니크한 기차 같은 자동차.


 

입장 티켓과 기네스 스토어하우스의 가이드 팸플릿.


티켓팅을 하고 들어서면서 시작되는 공장 투어. 사실 이 건물 자체는 맥주를 만들던 공장이었는데 이제는 일종의


기네스 박물관이 되어 어떻게 맥주를 만들어내는지의 전공정과 관련지식들을 전파하는 샵이 되었다.

 

 

투어의 초입,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의 기네스 기념품샵이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기념품도 많던 곳.


예컨대 이런 식으로, 맥주 병따개가 차양에 붙어있는 모자같은 걸 팔고 있었다.


그리고 본격 투어 시작. 도슨트가 함께 하는 단체 투어가 수시로 출발하는 것 같았지만 그냥 자유롭게 돌아보기로.


(워낙 거센 영국 악센트 때문에 알아듣기 힘드니 지레 포기한 것도 없진 않지만, 꼭 그런 때문만은 아닌 걸로)

 

기네스 맥주의 광고에 흔히 등장하는 코뿔새..라고 하나, 왜 그 커다란 천연색 부리를 가진 새들이 무리지어 나는 중. 


 

맥주의 재료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특히나 기네스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오랜 세월 공장으로 쓰이던 건물의 빈티지함을 잘 살려내서 마치 갤러리나 박물관에 방문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기네스를 만들어내는데 결정적이라는 마법의 이스트. 그 귀중함을 보여주려고 이렇게 금고 속에 꽁꽁


숨겨둔 채 틈새로 살짝 훔쳐보게 만드는 연출이라니. 센스쟁이들이다.

 

 

그리고 역시 좋은 맥주의 원천은 좋은 물. 물이 얼마나 맑고 훌륭한지를 보여주는 공간인데 바닥에는 온통 동전들.

 

그리고 놀라운 사실 하나. 기네스는 아서 기네스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었다는 것. 저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과거 공장일 때 맥주를 발효시키고 보관했을 통들 옆구리에 안내문이나 설명글들을 적어두는 센스.

 

 

 

 

성미 급한 사람은 바로 전망대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기네스 시음을 하고 돌아선다지만, 각층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돌아볼 만한 내용들도 있는 데다가 공장을 개조해 만든 그 공간의 쓰임들만 봐도 흥미로울 듯.

 

 

 

 

 

3층이던가 4층이던가 올라가던 중간에 창밖으로 잠시 내다본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의 또다른 부분. 아마도 여기는


여전히 공장으로 작동하며 어마무시한 양의 기네스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듯 하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맥주는 


전유럽을 커버하고 있다고 했던가. 

 

  

 

기네스 맥주를 보관하는데 쓰였던 오크통들.

 

 

 

그리고 과거에는 이렇게 커다란 선박에 오크통을 가득 싣고서 기네스 맥주를 해외로 수출했었다고 한다.

 

 

 

 

뭘까, 아마도 과거 어느 시기 기네스가 지금의 영광을 확보한 즈음 만들어진 조각상 아니려나 싶다. 


시꺼먼 재료를 다듬어 약동하는 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도 그렇고, 왠지 기네스 수송선박에 쓰였을 법한 장식.

 

 

 

 

기네스의 상징이기도 한 하프 복원품. 

 

그리고 역대 기네스 광고에 쓰였던 여러 소재들을 한곳에 모아둔 채 명성을 얻은 광고들을 재상영해주던 공간.

  

이런 캐릭터가 등장하는 광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뭔가 찾아보니 이런 거다. 추운 겨울 물고기가 맥주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용이 정확히 와닿진 않지만 어쨌든 그 선뜻하리만큼 차가운 기네스의 맛은 상상이 된다.




 

 

한곳에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글을 남기고 둥둥 띄워놓을 수 있도록 모니터도 크게 준비해놓고.

 

 

그리고 드디어 기네스 맥주를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곳. 그간 세네층을 돌아보며 맥주에 대한 


이야기만 실컷 듣다가 비로소 맥주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처음 얻게 된 셈이기도 하고, 잘 따르는 법을 배운 후


인증서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제법 흥미가 동하는 곳이다. 

 

 

잘 생긴 아저씨가 열심히 설명을 해주기 시작. 1) 우선 깨끗한 잔을 준비한다. 2) 45도 기울여 기네스 맥주를 받는다.


3) 90%정도만 채운 후에 맥주가 안정될 때까지 가만히 냅둔다.(대략 1분 내외) 4) 새까맣게 기네스 맥주가 안정되면


남은 10%를 마저 채운다. 5) 기네스 잔의 로고가 손님을 향하도록 잔을 전달한다. 끝!

 

신나서 맥주를 따라보는 체험자들. 한잔씩 볼 때는 몰랐는데 저렇게 시차를 두고 따른 맥주잔들을 보니 정말


안정되어 까만 색이 우러난 맥주와 아직 거품이 일고 있는 갈색의 맥주가 확연히 구별되는 거다. 

 

그리고 완벽하게 따라진 기네스 맥주 위에 얹힌 두툼하고 크리미한 맥주거품. 


무사히 전원 인증서를 획득하고 신나서 찍은 단체샷. 꽤나 디지털화되어 있어서 밖에서 저렇게 사진들을 하나씩


찾아보고 본인의 이메일로 전송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파이널 스테이지. '더블린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기네스 맥주를 무제한 마실 수 있다'는 바로 그 전망대.


상상했던 것보다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 있어서 아늑하다거나 여유로운 분위기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지만


기네스는 무지무지 맛있었고,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도 거칠 것 없이 워낙 탁 트여있어 보기 좋았다.

 

 

일본의 맥주 공장들은 시음 시간이 정해져있어서 마치 무슨 컨테스트에 나간 것처럼 일정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마시겠다고 무리해야 했는데, 여기는 전혀 시간제한이 없이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어 더욱 행복한 체험이었다.


그렇지만 기네스 맥주가 워낙 배가 쉬이 부르는 류의 맥주라서 고작(!) 4잔밖에 못 마신 게 아쉬웠을 따름.

 

통유리를 통해 360도 전경을 내려다보는 게 가능한,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고작해야 한 군데에서 창문가를


지키고 있는 게 최선이었던 공간에서 그래도 내려다보는 풍경이 심심치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얼콰하게 취해서 내려온 기네스 스토어하우스, 들어갈 때는 못 봤던 마차들이 마치 저녁시간에 강남역


택시 줄 서 있듯이 입구에 주르륵 늘어서 있었던.

 

 

 

샌디에고 다운타운의 해안,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이 있는 곳이다. 대략 150년 이전의 범선부터 2007년까지

 

활동하던 잠수함까지 7척의 크고 작은 선박들의 내외부를 일일이 둘러볼 수 있다는 게 포인트. 특히나 동해를 무대로

 

활동하던 구소련제 공격형 잠수함인 B-39의 좁고 불편한 내부를 살피는 건 꽤나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박물관의 중심건물이랄 수 있는 1898년 건조된 버클리 선. 증기를 내뿜었을 커다란 굴뚝을 높이 세운 선박 안에는

 

증기선의 엔진이라거나 실내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뜬금없게도) 타투샵도 들어가 있었다.

 

1700년대 영국의 프리깃 선을 복원한 서프라이즈 선, 내부에는 그래도 제법 오래된 느낌을 살린 대포라거나 각종

 

무기들이 실려 있었다.

 

대포의 여러 부품에 대한 이름과 작동방식에 대한 설명도 나와있고.

 

해먹 대신 그래도 널판지가 깔린 침대에서 몸을 뉘일 수 있었던 상급 선원의 공간도 둘러보고.

 

선장의 호화로운 식사 공간도 슬쩍 훔쳐 보는 재미.

 

당대의 선원들이 어떤 식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요일별 식단을 아예 소개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18세기의 대영제국을 건설하는데 선봉에 섰을 전투선박인 거다. 충분히 해양박물관의 앞머리에 설 만하다.

 

그리고 1974년에 건조되었다는 구소련의 잠수함. 굉장히 투박하고 못 생겼다라는 느낌인데다가, 내부를 돌아보려면

 

우선 저 앞의 동그란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지 확인한 후에 들어가야 한다. 설마 그렇게 좁은 출입구가 있겠어, 하기

 

쉽지만 정말로 저렇게 좁고 불편한, 당장이라도 폐쇄공포증에 시달릴 것만 같은 공간이 저 안에 있었다.

 

온통 새까맣게 칠해진 구소련 잠수함의 꼭대기에 그려진 혁명의 붉은 별, 그 붉은 빛이 선연하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것부터가 벌써 뭔가 숨통이 턱 막히는 느낌.

 

어뢰나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공간인 거 같은데, 이렇게 조밀하게 공간을 채워넣으려 애써도 선원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은 고작해야 발딛고 움직일 수 있는 두어뼘 남짓이다.

 

그리고 잠수함에 탑승하기 앞서 시험해봤던 바로 그 문과 동일한 사이즈의 철문.몸집이 큰 미국인들에게는 꽤나

 

통과하기 어렵겠다 싶은데, 실제로 저 정도의 아저씨도 한참을 낑낑거리며 버거운 몸뚱이를 부비적거렸다.

 

그나마 화장실이 이정도 공간이라도 확보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온통 파이프와 전선과 손잡이로 포위됐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면 꽤나 현대적이랄까, 배관과 원형의 손잡이와 전선들이 최적의 공간 활용을 꿈꾸며 사방으로

 

내리달리는 모습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계란색 바탕에 빨갛고 파랗게 정돈된 색감 역시.

 

 

 

역시 어디서든 사람이 생활하는데 긴요한 건 먹는 것, 그리고 싸는 것. 잠수함 승조원들의 일과와 식사시간에 대해서

 

자세한 메뉴와 함께 설명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비록 그런 삼시세끼 식사를 만들어내는 주방이라는 게 무슨 보일러실처럼 이렇게 작고 보잘것 없다고 해도.

 

재미있는 건, 이 잠수함의 작전구역이 한국의 동해지역이었다는 점, 때로는 대한해협을 통해 남해와 서해 지역까지도

 

작전지역으로 삼았다니 일촉즉발의 냉전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전사임에 틀림없다.

 

그런 잠수함이 우여곡절 끝에 미국까지 항해해서는 결국 샌디에고에 안착, 해양박물관의 주요 전시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도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전히 이런 상급 장교의 의복이나 구소련의 영도자들 사진을 남겨둔 채.

 

잠수함 승조원들의 세면장..이라는데, 설마 여기서 모든 세면을 다 하지는 않았겠지? 고작해야 싱크대 수준인데.

 

 

그리고 다른 배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발견한 선실 창문에 반사된 샌디에고만 앞바다의 풍경. 온통 크고 작은 선박들이

 

정박해 있기도 한데다가 1700년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배들이 뒤섞여 있다보니 기분이 묘해진다.

 

그리고 해양박물관에서 가서 알게 된 재미있는 프로세스 하나. 참치 통조림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

 

 

 

 

샌프란시스코의 곳곳에 숨겨진 특색있는 박물관 중에 하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박물관.

 

미국에 이주한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박물관이라고 하길래 찾았는데.

 

두둥. 올해말까지 더 크고 새롭게 짓는다며 리모델링이었다는. 아쉽게도 언젠가의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그리고 샌프란의 그래피티들. 이전에 갔을 때는 주로 미션 지구쪽의 이름난 그래피티 골목들을 돌았다면 이번엔 그냥 랜덤으로.

 

 

 

미국의 이미지 중 하나는, 온갖 담배와 맥주를 팔고 있는 철조망 촘촘한 구멍가게. 왠지 이런 그림에 가깝지 않을까.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 앞에서 문득 육박해들어오는 그래피티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돌아보지 못한 골목에 대한 아쉬움도 한가득.

 

무슨 건물인지 모르겠지만 외벽이 온통 음악과도 같은 느낌. 악기와 음표들과 새들이 날아다니는.

 

어디보다 맘에 들었던 그림, 선연한 빨강과 파랑, 그리고 하얀색과 왼켠의 노란색 기둥까지.

 

그러다보니 불쑥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의 공터로 흘러나왔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와

 

무거워보이는 짐보퉁이를 들고서는 힘든 듯 잠시 멈춰선 중늙은이 할아버지. 뭔가 지쳐보이는 뒷모습들이다.

 

어느 건물 벽면에 누군가 그래피티..라기보다는 캘리그래피같이 그려둔 낙서. 형체를 분간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저 그 모호한 형상과 필선의 강약만으로도 느낌을 던져주는 듯 하던.

 

여기 역시. 건물의 모든 외벽을 굉장히 세밀한 그래피티로 래핑해버린 게 굉장히 인상적이다.

 

건물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 그리고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본 벽면의 그래피티.

 

실컷 거리를 종횡무진,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해떨어질 무렵 숙소로 돌아와서.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호텔인지라

 

호텔방 번호판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케이블카가 담겼다.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내려다보기 좋은 트윈픽스 발치, F라인 전차의 서쪽 종점이기도 한 이쪽 미션Mission 지구 곳곳에는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중이다. 그만큼 샌프란시스코의 전향적인 분위기가 물씬한 이 곳,

 

특히나 돌로레스 대성당 어간에서부터 시작되는 발미 앨리Balmy Alley에는 1970년대 이래 진보적 아티스트들이 그렸다는

 

그래피티들이 골목들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평온한 일상이 흘러다니는 깔끔하고 단정한 큰길, 어느 길모퉁이에서 예기치 않게 나타난 전복의 순간.

 

 그리고 골목 담벼락을 온통 활용한 화려하고 입체감 넘치는 벽화.

 

 

비록 살짝 지린내도 나고 인적도 드물어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한 구간도 있긴 하지만, 차들이 늘어선 큰길가에도 그래피티의 축복이.

 

1776년에 지어져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오랜 건물이라는 돌로레스 대성당의 종탑. 이 위에서라면 울긋불긋하게 단풍처럼

 

번져나간 발미 앨리 지역의 그래피티들의 물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말에는 세 차례씩, 2시간 동안 이 곳에 그려진 60-70여개의 벽화를 감상하는 투어가 진행되고 있다고도 하는데,

 

혼자 돌아다니기보다는 아무래도 대낮 시간에 단체로 가이드를 따라 움직이는 게 안전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혼자 이 구역을 돌아다니는 게 위험하다고 느꼈다거나 곤란을 겪었던 건 아니고, 워낙 골목마다 숨어있는 그림들이

 

많아서,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있었다면 더욱 알차게 돌아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정도랄까. 요런 귀여운 토끼도 놓칠 뻔 했다.

 

 

성긴 철창이 가로막은 건물 외벽에도 누군가의 손길은 여지없이 거쳐갔다. 거대한 연꽃을 타고 있는 부처가 샌프란시스코에 현현했다.

 

 

 

정교하고 잘 안배된 기하학적 무늬가 차고 하나를 통째로 감싸버린 풍경이라니, 작업했던 모습을 상상해보게 만드는 풍경이다.

 

 조던의 드리블 장면이 붉게 두드러진 농구 골대에 내리쬐던 햇살, 좁다란 골목 양켠에서 형형색색의 색채를 밝힌 그래피티들.

 

 

 

 이름 모를 성당-혹은 교회-옆구리에도 그래피티의 가차없는 스프레이는 비켜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성당의 위신을 고려했는지 만화체로 그려지긴 했지만 예수와 성모..인 듯한 캐릭터들이 독특한 수인을 맺고 있다.

 

 

 사실 벽화보다는 이런 그래피티가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좀더 본격적이고 멋진 그래피티를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가 하면 작정하고 캔버스로 벽돌담 벽면을 활용한 듯한, 무려 호랑이와 상어 간의 일촉즉발 격돌 장면.

 

 사실 발미 앨리 아니어도 샌프란시스코의 곳곳에서 숨어있는 벽화, 혹은 그래피티들을 찾는 재미는 쏠쏠하다.

 

아마도, 카센터의 내려진 셔터에 그려진 그래피티. 이 정도면 나름 상업적인 목적에도 충실하면서 미적인 기능까지 놓치지 않은 수작. 

 

 

 혹은, 뜬금없지만서도 파라오의 토실한 입술이 센스넘치게 가리키고 있는 소화전의 붉은 주둥이.

 

 이 건물은 GLBT 역사 박물관, 그러니까 게이(Gay), 레즈비언(Lesbian),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의

 

역사와 투쟁을 담고 있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당당하게 펄럭이는 무지개 깃발만으로도 뭔가 상쾌하다.

 

 

샌프란시스코의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래피티, 혹은 좀더 포멀한 차원의 벽화들. 아래는 작년인가

 

금문교를 배경으로 치뤄졌던 세계 요트대회의 한 장면을 건물 벽면에 재현해 둔 거라고 한다.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용이 지키는 도시답게 건물들은 나즈막하면서도 나름의 운치와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류블랴나 성을 향한 오르막길, 사람이 채 오르기도 전에 양옆으로 어깨 부딪기며 열지어선 집들이 먼저 지쳤다.

 

 

 

류블랴나 구시가에 있는 성당, 그 벽면에 기대어선 (아마도) 대주교님과 성모상, 그리고 가운데의 성화.

 

벽공에 마련된 피에타상, 밤에도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조명을 내걸었다.

 

심지어 성당의 정문은 이렇게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돋을새김해둔 청동문이다.

 

 

 

류블랴나 구시가의 중심, 그리 크진 않지만 꼿꼿한 오벨리스크가 광장의 중심에서 하늘을 향해 뻗었다.

 

 

 

어느 갤러리였던가 박물관이었던가, 유서 깊어보이는 건물의 안마당으로 들어가서 발견한 류블랴나의 시내 지도.

 

그리고 다른 갤러리에서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이 한창이었다. 사진보다 전시공간이 더욱 눈에 들어오기는 또 처음이다.

 

 

광장의 바닥도 나름의 문양을 촘촘히 그려내고 있는 곳, 뭔가 아기자기하고 앙증맞은 느낌의 도시다.

 

 

 

좁은 골목길에 무심코 세워 놓았을 자전거조차도 왠지 그림이 되어 버리는 곳.

 

특별할 것 없는 허름한 건물 입구의 다닥다닥한 우편함에도 각기 개성이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고,

 

 

주렁주렁 매달린 신발들로 이곳이 쉽게 벗어나기 힘든 매력적인 곳임을 곳곳에서 과시하는 도시기도 하다.

 

 

 

아이고, 여긴 참..많은 사람들이 와서는 눌러앉고 말았나 보다.

 

류블랴나의 자그마한 구시가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골목도 구경하고, 이쪽에서 본 저쪽 모습, 저쪽에서 본 이쪽 모습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사이에 안 그래도 흐렸던 하늘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꺼뭇꺼뭇해지고 있었다.

 

 

 

 

자그레브의 구시가, 그 시발점이 되는 옐라치치 광장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광장들을 따라 걷다보면, 우연찮게도-아마도

 

도시 계획의 산물이겠지만-커다란 U자 모양의 산책로가 만들어진다. 옐라치치 광장에서 슈비차 광장을 지나 모던 갤러리,

 

토미슬라브 광장을 지나 자그레브의 중앙역까지. 그리고 오른쪽으로 꺾어서 보타니칼 가든을 끼고 걷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턴.

 

그렇게 미마라 박물관과 크로아티아 국립극장을 만나는 코스가 바로 자그레브의 말굽 편자모양 산책로의 대략적인 동선.

 

(사실 그냥 걷고 싶은 대로 걷기만 해도 자연스레 걷게 되는 코스, 계속 초록빛 풀밭과 나무들을 옆에 끼고 걷고 싶은 게 인지상정)

 

그러다 보면 광장 어디메쯤에서 뜬금없는 슈퍼주니어 한국팬들의 테러도 볼 수가 있고,(여기서 콘서트라도 있었던 건가;;)

 

 

한국과는 달리 시원한 하늘색으로 칠해진 소화전도 볼 수가 있고,(이건 사실 빨간색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자연스럽다)

 

 

송화가루인지 열매인지를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도 지나는가 하면,

 

슬몃 비껴나기 시작하는 햇살을 담뿍 빨아들이며 반짝반짝 빛나는 자그마한 분수대를 보기도 하고.

 

이만큼이나 길어진 나무 그림자들을 헤치며 공원 산책로를 빠른 걸음으로 내딛는 중인 아저씨들도 만나는 거다.

 

 

자그레브 중앙역 앞의 '토미슬라브 광장', 그 가운데에서 마치 광화문 광장 중앙의 이순신 장군처럼 위풍당당한 말탄 장군상.

 

그렇지만 저렇게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맥주도 마시고 따끈하게 덥혀진 대리석에 앉아 광합성 중인 모습은 한국과 다르다.

 

어디나 그렇듯, 먼 길을 떠날 사람들에게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오는 건 온갖 도색잡지들. 유리벽을 온통 도배해버린 타블로이드지들.

 

가게 너머 살짝 보이는 게 자그레브의 중앙역, 가까운 슬로베니아로부터 먼 유럽으로 이어지는 기차가 지나는 곳이다.

 

 

모던 갤러리. 안타깝게도 이곳 자그레브의 대부분 박물관이나 미술관들 역시 월요일은 휴관. 여긴 가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사람과 자전거가 모두 멈추라며 시뻘겋게 핏대를 세운 자그레브의 신호등. 신호가 바뀌면 초록빛 사람과 자전거가 뿅.

 

 

4월부터 11월까지만 개방하는 보타니칼가든은 담장 너머로만 슬쩍 구경하고 지나고 나서 마주친 (아마도) 대학 건물.

 

건물 꼭대기에 무슨 장식물인가 했더니 눈을 부릅뜨고 사주를 경계중인 부엉이들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염두에 둔 거겠지만

 

왠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나 안하나 감시하는 엄한 선생의 표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조그만 놀이터가 보이길래 그냥, 조금 말굽형 산책로에서 벗어나 갓길로 샌 참에 발견한 귀여운 꼬맹이들.

 

내 손에 들린 카메라를 보고는 여봐란 듯이 더 용감한 포즈들을 지어보이느라 경쟁이 붙었다.

 

 

그리고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던지는 샛노랑 외관이 파란 하늘 아래서 더욱 두드러지던, 크로아티아 국립극장.

 

맞은편의 미술공예 박물관도 노랑빛이긴 했지만 국립극장만큼 강렬하지는 못했다. 그늘진 모습이어서 그랬던 걸까, 모르겠다.

 

공원 옆에 그어진 주차구역 중에서 눈에 확 띄던 오토바이 주차구역의 표시. 되게 디테일하고 이쁜 표지다.

 

 

크로아티아 국립극장이 유명한 건 그 개나리색 외관뿐만이 아니라, 크로아티아의 손꼽히는 예술가이자 조각가인 메슈트로비치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는 '생명의 원천'이라는 작품이 정면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작품, 남자와 여자의 강렬한 눈빛이

 

부딪히는 사이에 뒷켠에 있는 다소 늙고 지쳐보이는 남자의 시무룩한 포즈가 대비된다.

 

그런 군상들이 크로아티아 국립극장 앞의 광장 한가운데에서 사방을 향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녹색 편자가 끊기고 다시 구시가에 가까이 도달한 즈음, 아무 노천 까페에 앉아 잠시 다리를 쉬는 참에 시선에 잡힌 할아버지.

 

후드티와 청바지 차림의 할아버지가 멋지게 선글래스를 끼고는 자전거 페달을 힘주어 밟는 모습이 그럴 듯 했다.

 

테이블에 앉아 쉬는 김에 주머니를 털어 가진 돈 액수도 확인하고, 이 나라 돈에는 어떤 그림이나 장식들이 있나

 

꼼꼼히 살펴보는 참에 신기한 걸 발견했다. 크로아티아의 돈 단위인 쿠나(KUNA)는 동전의 숫자 뒤에 새겨진 그 짐승, 족제비나

 

담비처럼 생긴 동물의 이름에서 딴 거라길래 그것부터 신기하다 했는데, 모든 동전의 도안이 물고기, 새, 곰같은 동물이랑

 

식물들이다. 뭐랄까, 굉장히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인 것 같은 느낌이 팍팍.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그래도 좀 이쁘게 포장되려나. 자그레브 구시가,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성마르크 성당으로 가는 길에

 

문득 마주친 흥미로운 뮤지엄 하나.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깨진 커플 박물관' 정도로 의역하면 될까 싶다.

 

 

연애가 되었건 결혼생활이 되었건, 아니면 짧디짧은 하룻밤의 유희가 되었건 상처받은 이들의 추억과 스토리가 흥건한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건 온갖 인형과 신발, 의류들. 이곳은 세계 각지에서 깨진 커플들의 스토리와 사랑의 징표들을

 

기부받아 세워진 박물관이라고 한다. 이미 꽤나 유명해져서 세계를 돌며 순회 전시도 할 만큼 규모면에서나 인지도면에서 성장했다고.

 

누군가 배 위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썼던 편지와 지도 그림. 흔들리는 배 위에서, 편지지조차 없어서 읽던 책을 찢어서 썼을 만큼

 

그 마음이 뜨거웠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깨지고 부질없는 사랑의 징표로 받은 이의 손을 떠나 대중 앞에 전시되는 중이다.

 

여기서부터는 살짝 19금. 이런 걸 선물해주고 또 착용해서 보여줬을 그들의 내밀하고도 달콤한 이야기들, 덧없고 덧없구나 싶다.

 

 

 

관계가 틀어지고 난 이후에도 이런 걸 계속 지니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아쉬움과 민망함이 교차되었을 듯.

 

 

관계의 마지막을 고하던 날, 그 극렬하던 싸움의 흔적이란다. 깨진 유리 조각을 이곳에 기증한 사람도 대단하다.

 

아예 이런 사람도 있었다. 둘이 주고받던 사랑의 편지들을 유리에 붙여서는 산산조각내버리곤 그 조각을 여기에 넘겼단다.

 

 

 

누군가가 아마도 이런 느끼한 대사를 치며 선물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을 여는 열쇠야, 당신이 처음 발견한.'

 

사람을 시니컬하게 만드는 전시인 거 같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기 시작했다.

 

 

제법 값나가 보이는 옷들도 말짱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사연은 제각각이어서 처음 사귀던 날 입었던 옷이라거나,

 

프로포즈받을 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결혼식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그들에겐 이 옷이 그대로 자신들 삶의 한 조각이었을 거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쪼개져 나가며 벌어졌던 전쟁의 와중에도, 피난을 떠나던 꼬맹이들의 맘속에는 사랑이 일렁였다.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낀 채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던 상이용사와 간호사의 사랑이야기도 있었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거라곤 프랑스 국적밖에 없다는 한탄이 그대로 들리던 전시품도 있었고.

 

 

 

결혼식날 입었던 웨딩드레스나 혼인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나중에 결혼 10주년에 다시 입고서 남편과 춤을 추리라던

 

아름다운 소망이 물거품으로 꺼져버린 후에, 그 웨딩드레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아팠을까.

 

이 뮤지엄에 기증하고 나서 이제 자신은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자신만의 춤을 추겠다는 기증자의 다짐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비록 조그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선물이었을 망정, 그 물건 하나에 담긴 곡절과 의미와 추억은 이토록 길고도 깊다.

 

 

이 뮤지엄의 기념품 중 하나. 나쁜 기억을 지워준다는 지우개를 팔고 있었다. 이런 뮤지엄을 설립해 전세계의 실연한 이들로부터

 

스토리와 가슴아픈 징표들을 기증받는다는 아이디어도 굉장히 참신했는데 이런 깜찍한, 그렇지만 제법 위로가 되는 기념품이라니.

 

이런 것도 있었다. '당신은 최고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당신 뿐이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따위의 빈칸이 있는 카드들.

 

영원할 것만 같던 찬란한 사랑이 지고 난 후의 씁쓸하고도 가슴 아픈 시간을 그대로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들이다.

 

 

뮤지엄을 나와 다시 성마르크성당으로 향하는 길, 왠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운운하는 이들에게 어디 한번 보고서 이야기하라고

 

강추하고 싶은 뮤지엄에서 세계 각지의 사람들 마음이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을 보고 나니 건물벽 균열조차 심상치 않아 보였다.

 

 

 

 

 

포항 호미곶의 등대공원, 상생의 두손이 활짝 움켜쥐고 있는 땅끝 어귀에 펼쳐진 몇몇 박물관과 시설물들, 그리고 야외 공원.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만난 '등대원 생활관' 입구. 실제 등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수은조식 회전등명기. 1953년 제작되어서 목포 홍도등대에서 사용되었다던가. 1979년까지 사용되다가 지금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저 등불이 계속 회전하면서 반짝반짝 빛을 냈던 구조였던가 보다.

 

매월 25일은 저축의 날. 월급의 계좌이체가 일상화되기 전, 매달 회사에서 지급받았다는 월급봉투. 등대지기 김용정님은 매달

 

2만7천원정도를 받으며 근무하셨구나. 언제적 물가인지 모르겠지만 요새 돈 가치가 엄청 떨어지긴 했구나 싶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출연했던 쏨뱀이. 기억이 안 나실 분들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톰 행크스가 악령이 깃들었다고 믿는

 

산에 오르기로 결심했던 건 여동생 딸, 그러니까 여조카가 '쏨뱀이'에 물려서 다리가 팅팅 부어올라 죽어가던 사건 때문이었다.

 

사실 그 녀석이 이녀석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서도, 왠지 무섭게 생겼으니 납득이 가기도 하고.

 

1900년대 초에 처음 만들어졌다는 대한제국시기의 근대식 등대. 안에 들어가면

 

각층 천장마다 대한제국의 꽃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굳게 걸어잠겨 있어서 안에는 구경도 못했다.

 

 

 

뒤로 보이는 해양박물관의 세모꼴 모양새도 독특하지만, 그 앞에 위풍당당 배를 깔고 누운 호랑이의 눈매도 인상적이다.

 

 

부표. 바닷물이 넘실거릴 때 속절없이 출렁이는 부표같은-사실 부초, 부평초같은, 이란 표현이 더 보편적이지만-이미지와는

 

달리 굉장히 묵직하고 거대한 느낌이다. 배의 왕래를 돕는 중앙선이나 차선 같은 역할을 하는 부표.

 

등대박물관 앞마당에서 침묵에 잠긴 야트막한 난쟁이 등대 광원.

 

겨울이라 물이 쫙 빠진 등대공원의 야외분수를 지키고 선 인어의 헐벗은 몸이 추워보인다.

 

 

 

 

 

얼마전 드디어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한 박물관, 단어가 좀 이상하지만 '박물관'이 생겼다는 기사는 봤었다.

 

독립공원 내에 지어지기로 했다가, 광복회 같은 단체에서 '격이 다르다'며 건립에 반대했다던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를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vs '피해자 한국'의 구도로만 보는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생각했던 사건이었다.

 

 

어쩌면 좀더 깊숙하게는 '전쟁' 상황에서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국가 폭력의 문제, 남성들이 가하는 폭력의 문제까지

 

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여성', '인권' vs '전쟁'시 증폭되는 남성성의 문제, 그게 본질인지도 모른다. 한일간의 국가간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억하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공간에 붙은 이름은 무척이나 명확했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가는 길은 참, 참담하도록 허술하고 허름했다.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어 종이로 전봇대에 붙여놓은 화살표가 전부.

 

쓰레기 무단투기 경고판이 그나마 화살표를 가리고 있어서 눈 크게 뜨고 돌아보지 않고는 찾기도 쉽지 않은.

 

일본에 대고 국가 배상을 해라 말아라, 한국 정부는 떠들지만 말고 이런 기억의 장소부터 제대로 챙길 일이다.

 

 

드디어 나타난 간판. 늦은 가을, 혹은 초겨울의 날씨에 붉은 단풍이 서렸다. 근데 아무래도 '박물관'이라는 단어가 좀.

 

박물관 건물 전경. 독립공원 내에 입주를 포기하고 찾은 곳이 홍대입구에서 멀지 않은 이 곳의 가정주택이었다고 한다.

 

 

*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39-13 (월드컵북로11길 20)

 

 - 개관시간 : 13-18시 (화-토, 수요일은 수요집회 후 15-18시)

 

 - 홈페이지 : www.womenandwar.net

 

 - 전화 : 02-365-4016

 

 

얼마전 트위터에서 '미디어몽구'님이 앞장서서 모금운동을 펼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할머니들 수요집회 다니시거나

 

외부 활동 다니실 때 쓰시라고 기증된 차량도 볼 수 있었다. 모금한 분들의 이름이 하트 모양을 그리며 새겨져 있었던 핑크빛 차.

 

건물 귀퉁이에 조그맣게 있는 입구.

 

마침 수요일이어서, 수요시위를 마친 오후 세시부터 관람하러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은 오후시간만 개관.

 

입구를 들어서면 나비들이 날아오르는 동영상이 쉼없이 돌아가는 벽면의 설치물, 그리고 매표소.

 

카드 사용이 불가하며 일반인은 3,000원, 청소년은 2,000원, 어린이는 1,000원.

 

지하 1층, 1층, 2층으로 구성된 전시공간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과 슬픔을 생생하게 담고 있었고,

 

개별 전시공간은 유기적인 이야기로 잘 엮여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입장료를 내면 티켓을 받는데, 매일 다른 할머니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고 한다.

 

11월 21일, 홍강림 할머니와의 연을 맺었지만, 이 분은 이미 스러져가신 다른 많은 할머니들처럼 세상을 뜨셨다.

 

"일본 정부는 증거가 없다고 하는데,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그대로 증거입니다!"라고 외치시던 분들.

 

유일하게 촬영이 허용된 곳은 2층의 소녀상. 비어있는 의자 옆에 두 주먹 꼭 쥔 소녀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깜박이지도 않고 응시하고 있는 곳은, 수요집회의 영상. 할머니들이, 지지하러 온 사람들이 확성기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머금고 일본 정부에 외치고 있는 영상이었다. 위안부의 존재조차 여전히 부정하는 그들을 향한.

 

슬픈 듯 분노하는 듯, 아니면 차라리 안타까워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 어깨에 앉은 새 한마리.

 

의자가 두 개, 앉은 사람은 하나. 저 소녀가 혼자 진창같은 삶을 살아오다 진실이 알려진 게 고작 1991년이다.

 

이십년이 넘어가지만, 저 옆자리에 앉아서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의 수는 적기만 하다. 일본 정부나 한국 정부를 막론하고.

 

작년인가, 헌법재판소에서 그간 한국정부가 필요한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획기적인 판결을 내렸다던데, 바뀌려나.

 

2층에서, 금지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한 장 굳이 찍고 말았다. 이게 뭐냐하면,

 

위안부를 상대하는 군인들에게 지급된 콘돔이다. '돌격'이라고 쓰여진 콘돔...돌격이랜다. 끔찍한 표현.

 

 

정신대, 처녀 공출 따위 여러 표현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따옴표까지 포함해 '위안부'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위안부'라는 표현 자체가 남성의 시각에서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따옴표 안으로 넣었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군대(국가 폭력)에 의한 집단적/조직적 강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2층 테라스의 추모관. 하나둘 세상을 뜨시는 할머니들이 벽돌 하나하나를 비석삼아 쉬고 계셨다.

 

나와 연이 맺어진 홍강림 할머니, 누군가 놓고 간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벌어졌다.

 

그리고 박물관 앞뜰. 날이 좋으면 이곳에서 문화행사도 열고 담소도 나눌 수 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찬바람만 머물렀다.

 

돌아나오는 길. 굉장히 먹먹해진 무거운 마음으로 나오는데, 입구 겸 출구인 곳 앞에서 나비떼가 확 번져갔다.

 

그리고 들어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돌무더기 한 줌. 어찌 보면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이같이 생기기도 했고,

 

그 위에 묵직하게 얹힌 돌멩이들 하나하나가 왠지 위안부 할머니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거 아닐까 싶어서.

 

나도 돌 하나를 얹어놓았다.

 

찾아가는 길, 그리고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관련 정보 다시.

 

 

*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39-13 (월드컵북로11길 20)

 - 개관시간 : 13-18시 (화-토, 수요일은 수요집회 후 15-18시)

 - 홈페이지 : www.womenandwar.net

 - 전화 : 02-365-4016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 사이에 텅빈 공간은 그대로 서울의 밤풍경을 담아내는 화폭이 된다.

 

멀찍이 파랗게 빛나는 탑은 서울N타원, 주변에 별무리처럼 총총이 박힌 주홍불빛들이 따스해 보인다.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 이른 시간부터 후둑후둑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집집의 불빛이 안온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폐장이 가까운 시간이 되니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거대한 구조물만 덩그마니 남았다.

 

박물관 안에 있는 이쁜 까페에도 온통 테이블과 의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밖으로 드리운 두꺼운 어둠 덕분에 깊은 바다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창 밖, 그 심해 속에서 유영하고 있던 두 석상. 중앙박물관 앞에 꾸며진 석조산책로는 예상치 못했던 멋진 공간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입장료는 25달러를 '권장'하나 원치 않으면 그냥 내지 않고 들어가도 된다. 미국에선 흔치 않은

 

국영 기관의 배포라고 해야 하려나. 센트럴 파크를 잠시 걸어주다가 날도 덥고, 앞에 색소폰 부는 아저씨가 먼저 날 불렀다.

 

사진엔 성조기를 꺼내들었지만, 공연 중에 각국의 국기를 꺼내들며 그 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는 레퍼토리는 각양각색의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그리고 두둑한 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영리한 전략이다.

 

원색의 옷을 입은 가족, 아이들은 흥겨운 색소폰 운율에 맞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앞 계단을 마구 뛰어놀았다.

 

조금 앉아서 연주를 듣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슬쩍 둘러나 보자고 박물관 안에 들어갔다.

 

 

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이집트 파라오의 좌상. 박물관 1층의 큰 비중을 차지한 전시물이 이집트 유물들이기도 하다.

 

 

2004년에 이집트 여행을 한달동안 하며 내겐 특별하고 소중한 곳으로 각인되어버린 이집트, 여기서 이리 보니 반갑다.

 

이집트 미술이라고 전부 정면을 바라보는 건 아니란 말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나신의 여인.

 

 

사람들이 전부 한번씩 고개를 빼고 안을 들여다보게 만들던 커다란 석관. 그치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쿠푸왕의 대피라밋에 있었던 석관도 딱 이런 사이즈였던 듯. 그 안에 들어가 누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그리스 문자가 새겨져 있는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금반지들.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 상.

 

 

그리고 유럽 상류계층의 호화스러운 가구들과 생활 자기들.

 

 

 

작품을 보며 제목이 뭘까, 상상해보는 것도 하나의 쏠쏠한 재미라고 하면 이 작품은 그 재미를 만끽시켜 준다. "겨울".

 

 

 

 

 

 

 

 

사랑의 비너스~ CM송의 위력을 되새기게 만드는 비너스.

 

 

이 작품의 제목은, "밤"이다.

 

 

이런 테이블은 아무런 실용적인 용도는 충족시키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굉장히 멋지다.

 

 

여성의 성기를 저런 모양으로 단순화해서 나타내다니, 감탄감탄.

 

 

그리고 아마도 남미나 중미 고대 문명관으로 넘어온 듯. 동선이 좀 복잡하게 짜여있어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제는 썰물빠지듯 지나가버린 올림픽을 되새기며 그리스의 도자기 몇 점.

 

남자들이 고추를 덜렁거리며 뛰어다니던 게 올림픽의 시초란 건데, 그 때나 지금이나 운동 그 자체보다 그 위에

 

이리저리 얹어둔 정치적 의미와 역학 관계가 더 중요했던 시기들이 많았을 거다. 혹은 국가 대 국가의 문제로 번지거나.

 

 

뉴욕의 모든 박물관, 미술관들의 폐장 시간은 네시 반. 생각보다 꽤나 이른 시간이지만 얄짤 없다.

 

밖으로 나와보니 여전히 연주 중이던 아저씨.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지만 아저씨는 지나가던 아가한테

 

무릎을 꿇고 '잘자라 우리아가', 이게 슈베르트의 자장곡이던가, 그걸 불어주느라 여념이 없다.

 

 

박물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더러는 계단에 철퍼덕 앉고, 더러는 택시나 버스를 타고 가버리고, 그런 어느 한가하고

 

따뜻한 뉴욕 중심가 여름날의 오후.

 

 

 

 

 

 

청동으로 만들어졌대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조심해야 하는 건 역시 마찬가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만난 씨없는(?) 남자들.

 

 그리고 이럴 때 떠오르는 바로 그 표정, "내가 고자라니!"

 

바로 그 표정 역시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만나볼 수가 있었다. "내가 고자라니!!!22222"

 

작품에 대한 이런 심오한 설명이 있긴 하지만 일일이 해석하는 건 각자의 몫으로 남기기로 하고.

 

5초후 "내가 고자라니!"를 외치게 될 짤방 몇 개를 투척하고 휘리릭.

 

 

 

 

 

지난 2월 중순쯤에 한번 아이폰 사진폴더에 지저분한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몇 장 선별해서 올렸던 포스팅,

아이폰 사진폴더에서 잠자던 사진들. 에 이어서 한 6개월새 또 잔뜩 잡다구레한 사진들로 가득차 버린

사진폴더도 정리할 겸.

회사에서 갔던 직무연수, 이천 근처에 있는 연수원에서 2박3일동안 재밌게 지내다가. 집체수업 와중에 있던

쉬는 시간, 이쁘고 푹신한 쇼파에서 다정한 한때를 보내던 동기들과 하얀 속살의 배를 까내린 사람.

연수원 앞에 펼쳐진 잔디밭에 드문드문 놓인 바윗돌의 그림자들이 길어지던 시간, 그 너머 인공잔디밭에서

공을 쫓아다니느라 때이른 구슬땀을 뻘뻘 흘렸더랬다.

수업하고 저녁먹고 가볍게 맥주 한잔 하면서 과일안주 데코레이션으로 괜히 꽃꽂이를 해보기도 하고.


연수원 뒤의 무성한 숲 사이로 삐져나와 길을 잃어버린 초록개구리 한마리, 네비게이션이 재로딩되는 중.

서울 동쪽의 어느 동네, 독거노인분들 도시락 배달하는 봉사활동 중에 눈에 들어온 신기한 전봇대. 직선으로

쭉쭉 뻗은 전선의 흐름을 지켜내려한 건지, 아니면 옆건물의 실루엣을 배려한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휘영청.

초등학교 앞에는 여전히 이런 뽑기 기계가 너댓개씩 열맞춰 늘어서 있었다. 내용물은 조금씩 달라진 거 같기도

하면서 유치하거나 쓸데없다는 점에선 정말 똑같은 거 같기도 하고. 드림하이니 뭐니 속지는 최근에 바뀐 거

같긴 한데, 저렇게 뙤약볕맞고 비바람에 씻기면 빛바랜 빈티지 느낌 완연해지는 건 금방이다.

'카모메식당'이란 일본영화에서 처음 들었던 '까페 루왁'이란 단어. 커피맛이 좋아지라는 주문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커피가 있는 거다. 사향쥐가 먹고 뒤로 배출된 커피콩이 바로 커피 루왁.

커피맛이 정말 달랐다. 굉장히 독특한 향도 그렇고 색깔도 조금 일반 커피와는 다른 느낌.

어느 동네를 가던 들고 다니는 카메라 말고도 아이폰으로도 사진 한두장씩은 남기는 이유, 아이폰에

사진찍힌 위치가 기록된다는 게 재미있어서 곳곳에 로그를 남겨두고 싶어서다. 제주도 초콜릿박물관

갔을 때도 마찬가지, 방문 후 포스팅을 남기면 추첨해서 선물을 준다길래 열심히 썼는데 아무런

응답도 없어서 섭섭하더라는. [제주] 초콜릿박물관, '초콜릿은 마약?'이란 질문에 답이 있는 곳.

청주에 가던 길, 맞은편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게 보였다. 트럭에 실려있던 종이박스에서

불이 시작된 거 같은데..아마 어딘가로부터 날아온 담뱃불이 그 불씨 아니었을까. 갖고 있던 카메라로 먼저

찍고 폰카메라로 다시 촬영한 사진.

어린이대공원,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이 저런 애매모호한 거시기가 툭 튀어나오다니. 이쪽 끝 말고도 다른쪽

끝 역시도 비슷한 녀석이 코끼리 코같은 걸 툭 내밀고 있길래 재미있어서 한장.

일본의 어느 호텔, 그야말로 빈티지 오토바이들이 주르르 늘어서 전시되어 있는 로비. 카와사키의 바이크도

보이고, 스쿠터도 보이고, 미니바이크처럼 조그맣고 귀여운 것들도 보이고. 아마도 호텔 주인이 바이크

매니아였던 거 같다.

그리고 아오모리 공항을 떠나기 전 공항내 경찰서 앞에 빼곡하게 붙어있던 현상수배 포스터. 사설탐정이

활동하고 있는 일본이니까 아무래도 저런 현상금을 노리고 범죄자를 쫓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아오모리에서 돌아오던 비행기, 인천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날개가 파랗게 질리더니 구름이 번졌다.

회사에서 있었던 족구대회. 비가 온다고 코엑스의 빈 전시장에 그물을 쳐놓고 족구경기를 하는 회사는

아마도 이곳밖에 없지 않을까. 태앵탱, 공이 바닥에서 튕기는 소리가 광활한 전시장에 울려퍼졌다.

올해 세번째 갔던 제주도에서 카페리를 타고 가파도로 들어가던 길. 렌트카에 장착된 네비게이션은 차가

망망대해 한복판에 둥둥 떠있다고 나왔고, 녀석은 잔뜩 당황해선 계속 뱅글뱅글 돌며 시끄럽게 굴었다.

쉼없이 계속되던 경로 재탐색의 메시지는 배가 무사히 가파도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는.

신당동 떡볶이를 먹고 나서였던가, 근처 아이스크림집에 들어가서 발견한 마법의 문짝. 아마도 청소도구나

기타 비품류를 보관해두는 창고 문이 아닐까 싶은데, 저렇게 그림을 그려넣으니 그 자체로 훌륭한 장식이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 속초에 놀러갔을 때, 맥가이버 BGM이 나오는 가운데 누군가의 손가락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희생된 콘돔의 새로운 용례. 안에 동글동글 맺힌 물방울은 다른 게 아니라 손가락의 땀..이지 않을까.;

이게 누구꺼더라, 아이폰 케이스가 넘 맘에 들었다. 카메라렌즈 부위를 새의 눈으로 활용한 센스도

훌륭하거니와 그 새가 뻐큐 손가락 위에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 딱 내 스타일인데..이제 난 3GS를 벗어나

5G를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대기.

어느 사케집의 화장실 표시. 노상방뇨하는 남자를 황급히 피해 몸을 날린 건지, 아니면 그를 향해 니킥을

날리려고 몸을 던진 건지는 불분명하지만 여하간 노상방뇨는 남을 놀래키거나 매를 버는 나쁜 짓이라는

메시지는 선명히 전달되는 거 같다.

앤디 워홀에 대한 오마주..랄까. 이태원의 식료품가게를 갔더니 캠벨의 스프깡통들이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었던 거다. 시립미술관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던 때와 똑같은 디자인으로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 캠벨의 치킨누들스프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걸 워홀보다 먼저 태어나 먼저 포착했다면 그의

부와 명성은 모두 내 것이었을 텐데. 아울러 아마도 캠벨스프 평생무료이용권 같은 것도.

서울대입구역 근처에서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 선후배들. 노래방에 갔더니 뜬금없이 봉 하나가 천장에서

바닥까지 단단하게 설치되어 있는 거다. 이게 뭥미, 하다가 술김에 다들 봉을 잡고선 서로 기어오르겠다고

싸우며 '봉춤'사위를 펼치던 두어시간. 오랜만에 잠들어있던 근육을 깨웠더니 한동안 팔이 땡겼다.

어느 사거리 앞의 쓰레기통, 온갖 브랜드의 커피 플라스틱잔들과 음료수 펫병, 유리병들이 빼곡하게

올라가 있었다. 얼핏 위만 보면 누군가 설치미술을 해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질서하면서도

형형색색의 스트로우와 형체에서 뭔가 미감이 느껴지는 건...나만의 생각인 건가.

광주에 놀러갔을 때, 집에서 문자가 와서는 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고 하길래 인증샷 겸 찍어서

보내드린 광주의 어느 버스노선도. 아무리 지금 광주라고 말로 해봐야 사진 한장의 위력보다 못하다는.

어디 까페였더라, 시럽들이 3X2로 줄맞춰 서있는데 뚜껑 하나가 내게 눈을 찡긋찡긋.

올림픽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사람들, 네트가 없으니 자전거를 쭉 늘어세워 네트 대신. 이런 식의

임기응변 참 맘에 든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네트가 없으면 자전거로.

얼마전 퇴근하는 길에 문득 올려다본 하늘, 추락하듯 뚝 떨어지는 무지개를 보며 원래 저렇게 생겨먹었던가

싶을 만큼 참 오랜만에 본 무지개.

대학교 근처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약속, 좀 많이 일찍 도착해 버린 바람에 학교 다닐 때 가끔

시험공부를 하거나, 그리고 맘먹고 좀 길게 공부하던 때 찾았던 사회대 도서관을 새삼 들어가봤다.

사회대와 앞 아고라는 반토막났지만 난간에 기대어 음료수를 마시던 그 장소는 그대로.

선릉쪽에 이쁜 까페들이 좀 늘어나고 있는 듯 한데 그 와중에 눈에 띄던 이쁜 가구점. 저  흔들의자가

완전 맘에 들었다. 귀까지 디테일한 양모양으로 만들어져 복슬하게 양털이 감싸인 의자가 굉장히

포근하고 따뜻할 거 같은데다가 경사가 그리 급하진 않아서 정말 흔들흔들 잠들기 딱 좋을 거 같은.

그리고 이건.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직접 만들었다는 '기타바', 울림통을 떼어내고 휴대하기 편하도록

고안했다는 기타바를 전시, 판매하는 매장을 발견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요새 기타 들고 다니기 불편한데

저런 기타 하나 있음 좋겠다 싶기도 하고.

추석 연휴, 예전에 받아둔 채 묵혀두고만 있던 스타워즈 에피소드 1,2,3,4,5,6을 다 보아버렸댔다. 지금

뭘 하고 있냐는 질문에 가장 적절한 장면을 찍어보내려다 보니 요다를 찍게 됐다. 사실 다스베이더의

그 유명한 'I am your father' 장면을 찍었어야 했지 싶기도 하지만, 요다의 광선검 실력도 굉장하더라는.

그리고 왕십리였던가, 고층 빌딩마다 의무적으로 공공예술작품을 앞에 설치해야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돌로 젠가를 쌓아놓아도 되는 건지는 몰랐다. 대리석 젠가.





제주도에 있는 선녀와 나무꾼 테마파크,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는 한국의 7,80년대 풍경, 상가라거나

학교라거나 달동네 풍경을 담고 있는 곳에서 발견한 화장실 표시. 어르신들의 향수를 자극하는-이라지만

내가 고등학교때나 대학교때 쓰던 커다란 삐삐나 휴대폰들도 있어서 반가웠다는-시절의 풍경 말고도

어촌, 전통마을의 풍경이라거나 고색창연한 도깨비집도 있었던 곳이어서 한번 들러볼 만한 곳 같던데,

그런 공간의 이름이 왜 '선녀와 나무꾼'인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이름과 딱 맞아떨어지는 남자화장실.

일종의 브랜드-빌딩(brand-building)이랄까, 간판과 어울리는 구색으로 컨텐츠를 채우고 화장실과 같은

자잘한 디테일까지 일관성 있고도 개성있게 꾸미는 작업은 꽤나 중요한 거 같다. 방문자로 하여금

이 공간이 참 많이 신경쓰여 가꾸어진 거구나, 하는 느낌을 갖도록 해줄 뿐 아니라 수많은 관광지 사이에

묻히지 않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주효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디테일까지 신경쓴 티가 가득한 이곳 '선녀와 나무꾼'은 옛 서울역사를 닮은 입구를 지나

여전히 서울 여기저기서 보이는 달동네의 풍경, 7,80년대 고고장을 지나 어렸을 적 몇 번 가봤던 듯한

시시껄렁한(그렇지만 꽤나 무서운) 공포의 집 제법 풍성한 컨텐츠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계속 컨텐츠를 확충하고 있으니 앞으로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한번 가봐도 좋겠지 싶다.


초콜릿 박물관에 이르면 가장 먼저 그 초콜릿 색깔의 독특한 건물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제주도 남서쪽,

모슬포항에서 놀다가 제주시로 올라가는 길에서야 비로소 이전부터 꼭 들르고 싶었던 그곳, 초콜릿 박물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계에 산재한 '초콜릿 박물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이 곳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사실

압구정에 있는 '샤또 쇼콜라' 초콜릿 전문점에서였다. 밀크나 유지방이 텁텁하게 들어간 네*퀵 류의 초코

음료가 아니라 제대로 된 맛이 나는 진짜 초콜릿 음료가 맘에 들었고, 그제서야 제주도에 언젠가 왔을 때

눈으로 슥 훑었던 지명 하나가 떠올랐다. '초콜릿 박물관'.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입장하기 전부터 뭔가 시선을 붙잡는 것들이 많았다. 멀찍이서 바라보는 초콜릿 빛깔의

판타지스러운 성같은 본관 건물이 그랬는데, 저 색깔은 제주도 특유의 화산석인 '송이석'으로 건물을 지은

덕분이라 하니 왠지 초콜릿과 제주도는 은근 궁합이 절묘하게 맞는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카카오 열매를

두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카카오의 신님. 신이라기보다는 '찰리와 초콜렛공장의 비밀'에 나오는 움파룸파족같은.

이곳이 어떻게 2010 '세계 10대' 초콜릿 박물관 중 하나로 선정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안내문에는 이곳의 초콜릿을

만드는 전 공정이 보여지는 작업장과 각종 초콜릿 아트 갤러리가 눈을 끈다고 되어 있다. 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트롤리도 있다고 하는데 결국 이건 박물관을 돌아보는 동안 못 보고 말았다. 여하간 중요한 건, 이곳에서

초콜릿을 직접 만들고 있을 만큼 애정도 깊고 열정도 대단한 개인이 이런 박물관을 만들어내었다는 것.

초콜릿의 맛에 영향이 있을까봐 전구역에서 엄격한 금연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 마음이 느껴진다.

햐아. 건물 안에 들어가서 저 안에 초콜릿에 대한 무슨 내용들이 꽉 차 있을지도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그 전에

이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건물 자체를 좀더 즐기고 싶은 맘이 큰 거다. 초록빛으로 싱싱한 잔디밭과 드문드문

여유롭게 놓인 테이블도 그렇고. 초록색과 초콜릿색의 뚜렷한 대비가 웬지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어렸을 적 읽었던 '찰리와 초콜렛공장의 비밀'이란 소설에선 그야말로 어린 아이의 상상력과 식욕을 마구

자극하는 온갖 기기묘묘한 초콜릿들이 등장했었다. 그렇지만 그 다채로운 초콜릿의 향연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이었던 건 아랍의 어느 왕자를 위해, 단단한 초콜릿으로 성을 만들고 안의 인테리어도 전부 초콜릿으로,

심지어 초콜릿으로 만든 수도꼭지를 틀면 마시는 초콜릿이 나오게 했다던 전설 같은 이야기. 이 성이 딱 그렇다.


마구 신나서는 건물을 사방에서 요모조모 뜯어보기도 하고, 잔디밭을 여기저기 찔러보며 걷기도 하고,

카메라를 들고 잔디밭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보기도 하고. 완전 신난 기분이 그대로 찍힌 듯한 사진 한장.

아마도 이제 슬슬 저 안에 뭐가 숨어있을지 궁금함이 극에 달한 시점, 초콜릿 박물관 입구를 향해 달음박질하던

참이었던 거 같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건 중세 유럽의 완전무장한 철갑주의 기사. 한손엔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방패를 쥐고,

다른 한손엔 칼을 쥐고 초콜릿 박물관을 수호하고 있었다. 뭔가 그 기세만으로 따지면 십리 밖에서 바람타고

넘어온 극미량의 담배연기조차 쫄아서 발걸음을 돌릴 듯.

철갑의 기사를 지나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바로 카카오. 하얗게 속이 꽉 차 있는 카카오는 아직 익지 않은 카카오로

녹색의 껍질을 두들기면 둔탁하고 속이 찬 느낌이 든다고 한다. 이 카카오는 최고 품질의 초콜릿을 만들 때 쓴다는

크리올로(criollo) 종이라고.

4-5개월 쯤 지난 카카오. 아직 조금 덜 익어서 껍질의 색깔은 노랑색을 띄고 있지만 크기는 약 20센티미터나

되고 무게도 500그램 가까이 된다고 하니 얼추 모양새는 잡힌 셈이다.

 

그렇게 익지 않은 카카오가 한 6개월 지나면 껍질이 불그스름하게 바뀌고, 두들기면 속이 비어있는 맑은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달고 신 맛이 나는 작은 씨가 삼사십개 들어있는 익은 카카오의 모습. 저 씨를 가지고 여러모로


가공해서 만드는 게 일반적인 초콜릿의 제조 방법이라고 한다.

걸음을 뗄라 하면 금세 새로운 뭔가가 발길을 붙잡는다. 입구에서부터 걸음을 떼놓기가 쉽지 않을 만큼

풍부한 이야기거리와 볼거리를 갖고 있다는 느낌. 입구 천장에 그려진 그림과 카카오 나무 화분이

묘한 현실감을 부여하며 3D 입체영상처럼 창세기의 한대목을 재연해 냈다.

최초의 초콜릿은 지금과 같은 딱딱한 판형이나 응고된 형태의 모양이 아니라 마시는 형태였다고 한다.

고대 중앙아메리카대륙에서 처음 시작된 '마시는 초콜릿'은 이후 대항해시대에 유럽으로 건너가며

왕실이나 귀족층의 고급 음료로 큰 인기를 끌며 점차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그래서 현재까지도 멕시코나 중남미에서는 전통으로 내려오는 도구들을 동원해 마시는 초콜릿을 일상에서

즐겨마신다고 하는데, 그들의 조상은 무려 기원전 십여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시절부터 그렇게 가까이에서

카카오 열매를 활용한 음료를 즐겼다는 거다. 심지어는 종교의례에까지 가미되어 제사장의 피와 카카오를

섞어마시는 일도 있었다니, 뭔가 하늘과 땅을 잇는 신비의 음료라고 생각했는지도.

그렇게 초콜릿에 대한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피고, 어떻게 유럽을 거쳐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전시물들과 설명을 지나, 초콜릿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Q&A 공간이 있었다. 원래

알고 있던 사실도 있었고, 전혀 처음 듣는 사실도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웠던 것들 몇개만.

Q. 초콜릿은 여드름을 유발하나요? A. 아닙니다. 유발하지 않습니다.

Q. 초콜릿은 최음제의 역할을 하나요? A.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음..딱 떨어지는 답변은 아닌 거 같아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뭐 아즈텍의 왕들이나 카사노바 등이

많이 먹었다니까 나도 많이 먹어야겠다..가 아니라, 많이 먹여야겠다, 가 맞으려나 그럼? 여하간.


과학적인 뒷받침이랄까, 카카오는 다양한 흥분제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익히 알고 있는 카페인,

근데 이게 카카오에 들어잇는 줄은 몰랐고. 테오브로민과 테어필린이란 흥분제 성분도 있다고. 물론

다른 설명에 나와있듯 초콜릿의 성분이 마약같은 중독에 이르려면 몸무게 60킬로그램의 성인이 하루

11킬로그램씩 초콜릿을 먹어야 한다니 과히 걱정하거나 유의할 수준은 아닌 거 같다.

그렇지만 박물관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공간은 바로 이곳, 크리스마스 룸. 방 전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데다가, 온갖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그득하게 채워져있고 크리스마스 케잌을 꾸미거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고받음직한 초콜릿류가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던 거다.


심지어 푸른 잔디밭이 창밖 가득 펼쳐진 유리창 위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다가,

누구라도 잠시 앉아 쉬어갈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 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 무늬가 귀엽게 박혀있는 테이블

보까지.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때였지만 이 방만은 유독 사람들이 몰려서 떠날 줄을 모른 채 사진찍기에

열중하고 있더라는.


케잌 장식에 사용되는 각종 초콜릿과 설탕 공예 작품들, 그리고 이런저런 초콜릿 브랜드들이 판촉에 나서며

만들었을 장난감들까지도 저렇게 많이 수집해 놓았다. 근 30년동안 전세계 천여개에 가까운 초콜릿 샵을

돌아다니고 백여개가 넘는 초콜릿 공장을 방문했다는 박물관장의 열의 앞에 새삼 감탄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녹인 초콜릿을 부어 형체를 만드는 몰드. 돼지니 원숭이니, 심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복잡하고

커다란 것에 이르는 수십개의 몰드가 유리장 안에, 벽면에 열지어 늘어서 있었다. 실제로 여전히 초콜릿을

만들 때 쓰이기도 한다는 이 몰드들도 유래한 나라의 문화와 미적 감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셈이니

주화나 지폐, 우표처럼 꽤나 의미있고 흥미로운 수집목록이 되는구나 싶다.

초콜릿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 중에, 그리고 초콜릿 브랜드 중에 '고디바'를 빼놓을 수는 없는 거다.

자신의 백성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려는 성주에게 선처를 호소하던 젊은 고디바 부인이, 옷을 벗고

말을 탄 채 마을을 한 바퀴 돌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성주의 삐뚤어진 요구에 그대로 응하였다던가,

그대로 행한 부인의 결심도 대단하지만 그때 문과 창을 모두 걸어닫은 채 그녀를 지켰다는 마을 사람들

역시 대단하긴 매한가지다. 아름다운 이야기에 걸맞는 맛과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고디바.

우리나라에선 언제쯤 그런 유서깊고 정평난 초콜릿 브랜드가 생겨날까. 한국인에게 초콜릿은 꽤나 새롭고

낯선 음식이었을 거다. 한국전쟁 때 미군으로부터 받아먹은 초콜릿 한 조각의 기억이 무한히 재생되는가 하면

그 이전 명성황후가 초콜릿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수입품으로 그녀의 눈을 홀리려던 일본의 계략이었다느니

그런 악의적인 해석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세계 10대 초콜릿 박물관에 들어가는 수준의 박물관이 한국에 있다는 건 정말 놀랍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일천한 역사를 딛고서 순전히 박물관장의 개인적인 열의와 노력으로

이런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리고 초콜릿 제조에 대해서도 세계적 수준으로 훈련받고 노력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는 것. 계속해서 이 곳이 발전해 나가 나중엔 '고디바'와 같은 명성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유리벽 너머 작업장에서 초콜릿 만들기에 열중한 저들의 손놀림과 눈빛을 보니 더욱.

초콜릿 제조실 안에는 초콜릿 품질 관리를 위해 절대 관람객들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다지만, 따뜻하게 녹여진

초콜릿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는 유리벽 너머까지 침투하기가 거침이 없다. 달달하고 사랑스런 분위기.

좀 뜬금없지만, 아~ 이래서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구나,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순수 초콜릿으로만 제작되었다는 수공예품들. 신데렐라, 곰돌이 인형, 에펠탑 등등이 한쪽 코너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꼼꼼이 살펴볼수록 그 정교함이나 세련된 터치에 감탄하고 마는 것들이었다.

저런 건 아까워서 먹을 수도 없다지만 그 짙고 먹음직스런 초콜릿색깔과 향기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고 전세계에서 팔리고 있는 고급 초콜릿 선물박스들을 모아두었던 곳에도 볼 게 참 많았다. 비운의

다이애나비를 추모하는, 혹은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초콜릿 박스도 인상적이었고, 오즈의 마법사

오리지널 버전인 듯 보이는 캐릭터들이 그려진 양철가방 모양의 초콜릿상자도 재미있었다.

이 곳에서 만들고 있는 초콜릿들을 전시, 판매하는 샵을 한번 둘러보고는 다시 박물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마당 반대쪽에 온실같은 게 보여서 슬쩍 가봤더니 카카오나무를 직접 기르고 있는 온실이라는 거다. 아니,

한국의 기후에 카카오나무가 자라는 게 가능한가 싶어서 꼼꼼이 안내판을 읽었더니 역시 생육 조건은 절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겨우 싹을 틔우고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설명, 언젠가

'의지의 한국인이 키운 카카오나무에 달린 카카오빈으로 달콤한 초콜렛을 만들 그날'을 그린다는 마지막

문장이 굉장히 맘에 들었다. 보통 20년 내지 30년 정도의 수령이 된 나무가 가장 좋다니, 그때쯤이려나.


돌아나오는 길. 사실 요새는 예전과는 달리 고급 초콜릿을 파는 샵도 많이 늘었고 수제 초콜릿에 대한

수요도 많이 늘어난 거 같다. 그래도 아직 한국의 초콜릿 소비량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지만, 수천년 이래 인간에게 달콤쌉쌀한 맛을 전해준 초콜릿이 사랑과 열정, 도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온 것처럼 한국에서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거 같아서 다행인 거다.


사실 초콜릿이면 무조건 아리도록 달기만 한다고 생각했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처음에 99% 초콜릿이니

다크 초콜릿이니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원. 그런 점에서 이곳

초콜릿 박물관은 한국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을 만끽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공간인 거 같다.

* 아, 그리고 하나 더. 보통 '초콜렛'이라고 많이 쓰는데 이 박물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초콜릿'

이라고 적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맞춤법 관련 규정을 확인하니, 놀랍게도 '초콜릿'이 올바른 표기.

많은 걸 배우고 돌아가게 해주는 제주 초콜릿 박물관이다.ㅋ




고인돌의 나라, 강화도(고인돌의 나라, 강화를 재발견하다.)에서 올해로 벌써 14회째를 맞이한

축제가 있다. 다른 지자체들의 축제가 부침을 거듭할 때에도 흔들림없이 계속되어온 이 축제의

이름은 "강화고인돌문화축제", 아무래도 강화도를 대표할 뿐 아니라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에 이른 고인돌을 앞장세운 게 톡톡히 제 역할을 했지 싶다.


이틀동안 축제가 벌어지는 곳은 생각보다 너른 섬 강화도의 중앙쯤 위치한 고인돌광장,

강화도 지석묘를 둘러싸고 있는 초록잔디밭 광장 위로 특이한 형태의 연들이 줄지어

꼬리를 퍼덕이고 있었다. 올해의 경우 6월 11일(토)부터 12일(일)까지 이틀 열렸는데

광장을 꽉 채워 고인돌 행사장, 체험장, 사진전시장, 전통체험관, 먹거리장터들이 늘어섰다.



ㅇ 고인돌 축조 재현하기

무엇보다 눈을 사로잡았던 건 역시 고인돌을 쌓아올리는 모습을 직접 재현하는 모습이었다.

부족을 통솔하던 부족장이 죽자 하늘이 내려앉은 듯 탄식하며 비통해하는 원시인들의 모습,

그리고 커다란 덮개돌을 덩굴같은 줄로 단단히 묶어서는 흙으로 비탈을 만든 바닥돌 위로

힘을 합쳐 끌어올리는 모습, 재현 중에서는 열명 남짓한 원시인들이 힘을 합쳤지만 실제론

수백명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었을 거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건 실제보다는 상당히 축약된 무게와 규모로 재현된 미니어처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재현행사를 준비하는 스탭들이 저 커다란 덮개돌을 가뿐하게 들어올리는

모습을 얼핏 보았던 거 같기도 하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었으려나, 그렇지만 그걸 저렇게

리얼한 표정과 액션으로 소화해내며 재현 행사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원시인 여러분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낼만 했다.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내어 으쌰으쌰, 덮개돌을 바닥돌 위에 확실히 얹어놓고나서는

두 손을 번쩍 치켜올리며 고인돌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원시인들. 바퀴 역할을 하며 바닥에서

뒹굴었던 나무통과 비탈을 만들어 주었던 흙만 치워내면 이곳 강화도에 이미 존재하는 140여기의

고인돌에 하나가 더해지는 셈이다.

고인돌축제의 개막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인돌 축조과정을 재현하는 원시인들의 기합소리와

함께, 칠선녀들의 공연과 함께. 고인돌광장과 바로 붙어있는 강화역사박물관에 마네킹으로 전시된

선녀들의 복장이나 장신구는 완전히 똑같았던 그녀들은, 그렇지만 훨씬 뛰어난 미모와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칠선녀는 과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낼때 일곱선녀가 옆에서 제를

도왔다던 고사로부터 등장하는데, 전국체전의 성화를 매년 새롭게 뽑히는 칠선녀들이 참성단에서

채화하고 있기도 하다고. 그리고 그녀들은 1956년 이래 강화여고에서 뽑혀왔다고 하니, '그녀들'이라

칭하기보다는 그 아이들, 이라는 표현이 낫겠다.


ㅇ 원시인의 일상 체험하기

이리저리 고인돌광장을 떠돌며 행사도 구경하고 체험관들도 구경하던 와중에 만난 꼬맹이들.

고인돌을 둘러싼 울타리에 기대앉아선 조금 쉬어가려는 듯 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불고 있더니

카메라를 보자 불쑥 장난끼가 발동한 듯 옥수수랑 돌도끼를 양손에 쥐고는 흔들어준다.

원시인들이 다들 저런 레오파드 무늬가 뚜렷한 가죽옷을 입고 다녔을지는 상당히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벌거벗고 다니거나 잎사귀 한두장으로 코스프레를 하기엔

너무 전위적인 느낌이니까 원시인들은 모두들 표범 한두마리쯤 쉽사리 때려잡았을 거라

호의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호피무늬 원시인 복장을 머릿수건까지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돌도끼나 단검을 꼬나쥐고 나니까 다들 신났다. 거울 앞에서 요리보고 조리보고.

그렇다고 다들 폭력적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돌판과 돌확을 이용해서 낟알의 껍질을 까고 있는

진지한 표정의 아이의 손끝이 신중했다. 돌확은 원시인들이 곡식을 떨어내고 껍질을 제거하던

작업을 돕기 위한 도구인데, 저 정도로 원시적이어서야 손으로 하나씩 까는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하지 않으려나 싶다. 하긴 워낙 발전속도가 빨랐으니, 수천년 전의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터에 직접 '인간 탈곡기'가 되어 체험하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몇몇 시대를 구분짓고 공간을 구분지을 지표가 되어주는 토기들을 갖고 아이들에게

열심히 그 특징과 정보를 알려주고 계신 아저씨. 이 토기에 그려진 무늬는 빗살무늬라고 하는데

주로 곡식의 낟알등을 담아두었고 바닥이 뾰족한 건 땅에 묻어두었으리라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운운,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자세가 제법 의젓해서 보기만해도 흐뭇했다.

사냥감을 사냥해보는 체험, 이랄까. 새총들이 줄줄이 늘어선 가운데 꼬맹이들이 있는 힘껏

노랑 고무줄을 당겨서는 표적을 노리고 있었다. 공룡이 그려진 표적지를 보며 다시금 궁금해진 건,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들이 공룡과 겹쳤던 적이 정말 없었을까. 일반적으로는 인류와 공룡은

서로 시기가 겹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고인돌 빠삐코'니 뭐니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원시인들은

늘 공룡들과 함께 노닌다.


ㅇ 강화도 문화 체험하기

강화도의 특산품, 하면 화문석. 어쩔 수 없는 암기식 교육의 부산물이다. 이름만 익히 듣고 외웠지

그게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여태껏 블랙박스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게 사실.

옆에서 하나씩 가르쳐주는 선생님 옆에서 입을 꼭 다문 채 화문석 만들기에 몰입해 있는 아이도

아이지만, 그 손놀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체 어떻게 저렇게 이어지고 묶이는 걸까 호기심에

가득찬 구경꾼들의 표정도 못지 않았다. 시간만 있다면 털썩 천막에 앉아서는 선생님한테

배워가며 직접 한땀한땀 정성으로 매만진 화문석 한장을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강화도에 많이 나는 약쑥으로 비누도 만들어보고, 상큼한 형광색 꼬리를 달고 있는 화살을

던져넣는 투호도 하고, 그렇게 몇걸음 채 걷지 못하고 무언가 직접 손목 걷어부치고 만들거나

경험해보거나 그렇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함께 즐길 거리들이 제법 솔찮았다.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혹은 걷는 아이 손을 꼭 붙들고 온 부모들에겐 꽤나 수월한 나들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천연염색을 체험할 수 있는 부스를 포함해서, 고인돌마을 족장 체험, 도자기 만들기 체험,

연날리기 체험, 무형문화재 제14호 단청그리기 체험, 다도체험 등등 고인돌을 만들던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살던 인류가 축적해온 유무형의 독특한 문화유산들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넓게 열려있었다. 이정도면 굳이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는 단어를 동원해

교육과 놀이가 혼합되어있음을 강조한 주최 측에 수고했노라, 박수를 쳐줄 만 하다.


ㅇ다양하게 즐기기

강화고인돌문화축제를 즐기러 와서 찍은 사진 중에서 맘에 드는 사진은 즉석에서 인화해서

콘테스트에 응모할 수 있다나, 이미 응모된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다들 욕심이 그득하다.

일등해서 상품가져갈려는 의욕이 넘치는지 사진들이 다들 범상치 않았달까.

원시인 복장을 챙기고 돌도끼를 들지는 않더라도, 뺨이든 손등이든 뭔가 고인돌축제에 어울릴

페인팅을 하나 하고 나면 뭔가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된 느낌인 거다. 특히나 아이들이 엄마손

잡고서 길게 늘어선 그 줄을 슬쩍 지나치고 나니 또 다른 긴 줄이 나타난다. 삐에로 아저씨가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주는 건, 정말 어디서나 아이들을 모으는 최고의 방법인 듯.

그 와중에 바쁘게 돌아가는 먹거리장터와 행사장 주변 스탭들의 발놀림. 축제의 분위기를

돋우는 건 심장 박동을 따라 노니는 풍물의 흥겨운 장단과 함께, 빤짝거리는 새틴 재질의

'가죽옷'을 입은 '원시인'이 어색한 옷차림에 불편해하면서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행사가

잘 되도록 움직이고 있는 모습인 거다.
 

공연도 이틀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짜여있었다. CBS에서 녹음방송을 하는가 하면, 마야가

초청가수로 와서 노래를 부르고, 평양예술단이니 인천시무형문화재협회 공연이니, 심지어는

웃찾사 공연팀이 와서 개그공연까지 하도록 스케줄이 짜여있었다. 나름 강화군 차원에서 심혈을

쏟아붓는 행사라는 게 빈말은 아닌 거 같다.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조금 아쉬웠던 건 '에어바운스' 축하비행이었다. 등뒤에 커다란 프로펠러를

메고서는 그 힘으로 날아올라 낙하산에 의지하여 두둥실 떠다니는 것, 처음에 굉장히 커다란

선풍기 소리가 날 때만 해도 설마 저게 날겠어 싶었는데 정말 훌쩍 떠오르더라는. 아쉬웠던 건

바람이 너무 쎄서 비행에 성공하기까지 어려움이 좀 많았고, 그나마 떠올랐던 것도 생각보다

일찍 내려온 거 같았다. 그치만 정말, 저렇게도 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줬달까.

그 옆의 역사박물관에서는 축제 기간에 맞추어 인천무형문화재 기능장들의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대금, 단소 같은 전통악기나 화문석, 도자기나 전통의상 등이 강화역사박물관 1층의

로비에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으니, 잠깐 더위도 식힐 겸 에어콘 바람도 쐴 겸 들어가서

휘 둘러보기에 딱 좋았던 거 같다.  

 

2011년 강화 고인돌문화축제는 여러모로 좋은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 강화도에 있다고만 들었던,

실물을 제대로 보거나 체험해본 적은 없는 고인돌이니 화문석이니 그런 것들에 대해서 작정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고, 축제 자체도 '고인돌'이라는 뚜렷한 아이템을 가지고 특색있게 잘

꾸며놓아 중구난방식의 여느 지방 축제와는 격을 달리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강화 고인돌광장 인근으로 산재해 있는 고인돌군을 돌아보기에도 좋은 위치라는 점,

그리고 강화도도 제주도나 다른 곳들처럼 트레킹 코스를 사방으로 개발하고 있으니만치 더욱

즐길 것이 많아졌다는 점도 축제에 맞추어 강화도를 향해 발걸음을 쉽게 떼도록 이끈다.








* 제주도 2박3일 실제로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것으로,

렌트카, 빡빡한 시간표, 그리고 짧은 시간에 많이 보려는 욕심, 이렇게 세 가지에서 해방된

삼무(三無)의 일정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토요일(첫째날)

6시반,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출발.

7시반, 제주공항 도착.

8시, 제주시외버스터미널 도착. 모슬포행 시외버스 탑승.

9시반, 모슬포항 도착. 숙소 IN.

11시, 읍면순환버스 탑승. 화순해수욕장 도착

11시반, 올레길 10코스(화순해수욕장-모슬포항, 약 16km) 시작.

12시~13시, 점심(고등어구이, 해물뚝배기)

17시반, 올레길 10코스 끝, 모슬포항 도착.

18시반, 숙소에서 휴식.

20시, 저녁(고기국수 등)

일요일(둘째날)

8시, 모슬포항 도착.

9시, 가파도행 배 탑승.

9시15분, 가파도(올레길 10-1코스, 5km) 도착.

12시~13시, 점심(가파도정식)

14시20분, 가파도 출발.

14시35분, 모슬포항 도착.

17시, 모슬포항 인근 까페.

18시, 숙소에서 휴식.

18시~20시, 저녁(고등어회)

월요일(셋째날)

10시, 모슬포항 출발.

10시반, 읍면순환버스, 초콜렛박물관 도착(농공단지 버스정류장)

11시, 도보 2km, 초콜렛박물관 도착.
 

12시반, 초콜렛박물관 출발.

13시~14시, 점심(밀면 & 수육)

14시, 숙소 OUT, 서일주버스 탑승.

15시, 협재해수욕장 도착.

16시, 한림공원 입장.

18시, 한림공원 퇴장.

18시~19시, 저녁(빅허브버거)

19시반, 서일주버스 탑승, 협재해수욕장 출발.

20시반, 제주공항 도착.

21시반, 비행기로 제주 출발.










 

 

짜오프라야강 서안, 카오산로드에서 북서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선박박물관',

태국 왕실이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짜오프라야강에 띄우는 화려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이토록 한적할 수가.


입장료는 100바트, 300바트에 대략 10달러, 만이천원이라 치면 100바트는 대략 3000원선.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지만 따로 100바트를 추가로 내면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고 했다.

걍 둘러보지 뭐, 하고 입장료만 내고 들어갔다가 헉, 아니다 싶어서 냉큼 100바트 더 내고 촬영을

허가받았다는 표시의 얄포름한 종이 한장을 목에 걸었다.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던 촬영증.

이런 금빛찬란한 화려한 뱃머리가 나란히 모여 있던 거다. 첫눈에도 정교한 조각과 세련된 마감,

금빛이 번쩍거리면서도 결코 싸지 않은 느낌의 배색과 품격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 무려 1981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의식용으로 쓰이는

이 배의 뱃머리엔 옆구리에 손을 짚은 신장이 당당히 저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춤엔 조그맣게 숨어있는 포신. 이런 배를 넓고 도도한 짜오프라야 강심에서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뱃머리, 저 눈길을 올려다본다면.


이것들은 더 멋졌다. 동남아에서 신격화되는 뱀의 신 '나가'를 형상화한 듯한 일곱 머리를 가진

뱀의 흉흉하고 위압적인 모습도 그렇고, 날개처럼 두 팔을 펄럭이며 날아오를 듯한 분위기의

날렵한 신장도 그렇고. 특히 저 빨간 혀와 새하얀 이빨을 가진 일곱머리 금빛 뱀은 태국 왕실을

배경으로 유유하게 짜오프라야 강을 점령한 화려한 배들이 담긴 풍경 엽서에서 자주 봤었다.

이 녀석은 정말, 이 배를 타고 수많은 선단으로 구성된 전투용 배들의 앞머리에 섰다면, 적선들이

딱 마주쳤을 때 바싹 쫄았을 거 같다. 화염이 불타오르는 듯한 저 사납고 들끓는 듯한 갈기들,

그리고 단숨에 숨통을 물어뜯어낼 듯한 강력한 턱과 이빨, 그리고 새빨간 혀가 날름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아가리까지. 뱃전에 설치된 포신이 차라리 귀여워 보일 지경.


옆으로 넘어가며 배를 하나하나 둘러보는 데도 은근히 동선이 길다. 배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싶었는데, 앞에서 보았을 땐 얄포름하다 싶어서 그랬지만 정작 배의 길이가 꽤나 긴 거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형태의 배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을지는 모르곘지만, 그런

날씬한 형태를 갖추고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이런 위엄을 갖출 수 있다니 그것도 놀랍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여덟 척의 배중에서 가장 아름답던 배, 초록색 눈과 은빛 어금니가

온통 보석으로 꾸며진 것 같다. 학처럼 우아하게 뻗어올려진 미끈한 목에도 비늘같은 무늬가

꼼꼼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슬몃 쳐들어올려진 고개도 당당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이 또아리를

틀고 땅에 내려앉은 채 하늘을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리고 배의 뒷꼬리, 미끈하게 쭉 빠진 느낌도 그럴 듯 하지만 배의 앞섶과 마찬가지 문양으로

통일성을 갖춘 모양새는 왕실의 선박으로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번쩍 들린 앞머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실용적인지 감각적인 측면인지 모르겠지만, 하늘로 은근히 슬금슬금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번쩍 치켜올려지는 휘영청한 곡선의 아름다움까지.

배 가운데, 금빛 휘황한 좌대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왕과 왕비, 왕자나 공주를 위한 자리일 테고.

시야를 확보하고 바람이 넉넉하도록 그랬는지 햇빛을 가릴 천장이 좌대만큼 높았다. 저렇게

높이고서도 배가 균형을 잘 잡을까 싶을 정도로.


현재도 언제든지 불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배들 옆으로, 옆면이 휑하니 빈 채인

배도 한 척 보였고, 아예 분해해서 새롭게 만들 작정인 듯 뱃머리만 떡하니 떨어져나가있는 덩어리도

보였다. 다리 사이로 대포를 쏴대는 모양의 뱃머리,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니 한척 한척이 모두

굉장히 소중한 거 같다.

그래서겠지만, 박물관 한 쪽에는 이전에 쓰였던 배의 잔해들과 장식들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언제든 새로운 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한척 한척 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모양새와

분위기를 가지고 짜오프라야 강을 당당하게 가로질렀노라 기억해 두려는 듯. 박물관이긴 하지만

이 배들은 유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계속 저렇게 자재를 운반하고, 배 안에 들어가 사포질을 하고

뭔가 수선하고 보완하는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박제된 기념품들이 아니라, 언제든 행사 일정에

맞추어 나설 준비가 된 살아있는 것들.

아마도 저런 일꾼들이 이렇게 소담스런 불당을 차려놓은 거 아닐까. 박물관 아닌 박물관의 기둥

한켠에 새집처럼 올려둔 불당 앞으로 빨강색 환타 두병을 열어서 빨대까지 꼽아둔 저 다정함이라니.

한쪽 벽면에는 배를 실제로 어떻게 젓는지, 그리고 수병들의 복장은 어땠는지, 그런 모습을

에둘러 짐작해볼 몇 장의 자료들이 있었고 조그마한 형태로 축소된 배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배들은 언제든 수로를 통해 짜오프라야 강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제각기의 도크

위에 번쩍 들려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당당히 든 채 다리가 치워지고 철문이 열려 짜오프라야강

위로 둥실, 의연하게 미끄러져가는 그림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허름한 창고 같은 박물관

안에서 벗어나 남국의 햇살 아래 온통 번쩍거리며 그 섬세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사방으로

빛무리를 떨쳐낼 그럴 장면. 왕의 배들이 어둠속에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2층짜리 나즈막한 국립전주박물관 본관 안에서 만난 화장실 표지, 산뜻한 노란색 배경에

지난 어느 왕국의 전통 와당 문양이 담겨 있고, 그 앞으로는 혼례때 입을 법한 긴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환히 웃고 있다. (지방색이 살아있는 훌륭한 (공짜)문화공간, 국립전주박물관.)

여자화장실 역시, 간결하고 깔끔한 도안으로 처리된 혼례복장의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는

노란색 표지. 전반적으로 환한 분위기의 국립전주박물관의 화장실에서 더욱 산뜻하게

눈에 띄는 기분좋은 표지였다.

역시 국립박물관이라 조금 더 세세한 부분까지 문화를 담고자 노력했다는 게 보인다 싶어

기분좋게 돌아서는 길, 조금 아쉽게도 박물관 마당에 있는 화장실은 저렇게 금빛이 번쩍이는

글씨로 적힌 채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파랑색 빨강색 사람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왕 하는 거 안이나 밖이나 좀더 통일되고 이쁘다 느껴지는 표지를 붙이면 더 좋았을 텐데,

문화가 담긴 화장실 표지판, 인상에 남는 화장실 표지판 찾기가 쉽지 않다.



* 여행을 다니며 결코 빠질 수 없는 '답사지' 중 하나가 그곳의 화장실이란 점에서, 또 그곳의

문화와 분위기를 화장실 표시에까지 녹여내는 곳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특징적인

화장실 사진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자신이 본 최고의 화장실 표시를 제보해주실 분은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지방에 그럴 듯한 박물관이 있다는 건 꽤나 행복한 일이다. 모든 게 서울에만 편중되어 있는 이 지독한

'서울공화국'이라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슬쩍 맘만 내키면 훌륭한 전시품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일이기도 하고, 각 지역의 지방색이 드러나는 좀더 특성화된 전시 테마나 기획을 통해

국가 단위의 역사인 '국사' 속에 숨겨져 있는 지방사나 홀대되었던 역사를 발굴하는 일이기도 할 거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죽도록 촙던 날 사방으로 쏘다니다가 잠시 들어가 몸을 녹이며 설렁설렁 둘러보기에

딱 좋은 경유지라는 점. 전주에 있는 국립박물관, 높지 않은 2층짜리 아담한 국립전주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일 뿐더러 이 지역에 위치했던 마한이라거나 가야의 유물들이 제법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은 가야의 철제 갑옷, 굉장히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가야의 역사나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거 같다.


이 곳이 정말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느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유물들에 붙어있는 이름표들에 있었다.

'점을 치는 뼈', 이 정도면 뭔가 갸우뚱하면서도 그럭저럭 별다른 낯선 느낌없이 넘길만하다 치더라도,

'신께 바친 다양한 제물', '크기를 줄여 만든 석제품'이라니. 왠지 이런 건 '제사공헌물', '석제모조품'

따위 한자어로 퉁명스럽고 고압적인 느낌으로 이름이 붙어있었던 게 일반적이지 않았나.


그런 식의 '친절한 이름표'종결자랄까, '고종 황제의 도장'이란다. 나이 든 사람들은, 아니 당장

나부터도 '어보'라거나 '옥새'라거나 '국새'라거나 따위 한자어로 적혀야 뭔가 있어보이고 격에

맞다고 얼핏 느껴지는데 과감하게 '도장'이란 단어를 써버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쉽게 풀어쓴

이름표를 보니까 그 유물이 뭐에 쓰인 건지 감이 확 온다. '네귀달린청자항아리'라니 실제 유물

특징이랑도 딱 와닿고, 이름만 들어도 상상이 대충 되고.


아이들을 데리고 교육삼아 오는 학부모들이 급격히 많아진 걸 생각하면 바람직한 변화인 듯 하다.

게다가 사실 괜히 어렵고 함축적인 한자어로만 이름표를 적어두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 전주국립박물관에서처럼 한글로 풀어쓴 이름을 크게, 한자어로 작게 병기하는 정도가

딱 좋은 거 같다.


박물관에서 본 신기한 것들이 몇 점 있었다. '시가 새겨진 청자 조롱박모양 주자',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신기하다기보다는 집에 저런 거 있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 청자에 저렇게

술을 권하고 풍류를 즐기는 시를 새겨두고 술을 담아 주거니 받거니. 얼마나 멋졌을까.

집에서 저런 청자 주전자에 술을 담고 분위기 맞는 깔맞춤한 잔에 따라마시면 멋질 텐데.

그리고 실내 전시관 한켠 장독대에 뜬금없이 붙어있던 하얀 버선발 한짝. 알고 보니 집의 장맛을

지키기 위해서 숯도 깔고 꼬추낀 금줄도 두르고, 요기까지가 익히 알고들 있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버선발을 거꾸로 장독에 붙여두는 것도 '잡귀'를 쫓는 방법 중 하나였다고.

그리고, 사방에서 출몰하는 쥐는 '토끼의 해'특별전시 공간도 비켜가지 않았다는. 정작 토끼에

관련된 전시도 몇 점 되지 않는 상황에서 눈에 번뜩 뜨인 쥐 녀석. 요새 엿기름에도 빠지고

케잌속에도 들어가고 파란집에도 들어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아야 소피아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본다는 손가락 넣고 돌려보기, 저 구멍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한바퀴 삼백육십도 회전시킬 수 있다면 소원이 이뤄진다던가. 대체 어떤

이야기가 얽혀있어서 저 구멍이 그런 '행운의 구멍' 역할을 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냥, 늘 행운과 소원성취를 바라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아닐까 싶다.

반쯤 돌리다가 선택의 순간에 직면, 손가락을 꺽어뜨릴 것인지 내 소원을 꺽어뜨릴 것인지, 아무래도

몸을 챙겨야겠다 싶어 포기하고 아야 소피아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울퉁불퉁한 돌들이 나름

미끈하게 닳긴 했지만 여전히 꿀렁꿀렁, 옆으로 새는 길은 저렇게 철망이 쳐진 채 길을 막았다.

2층에서 보이는 풍경은 1층에서 볼 때와는 또 사뭇 다르다. 아무래도 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색

글자가 샹들리에와 함께 바로 눈높이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데다가, 창문을 바로 등진 위치라서

훨씬 밝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2층은 아야 소피아가 성당이던 시절 그려진 벽화나 기타 작품들을 전시해둔 미술관 같은 분위기.

무슬림들의 공간 모스크로 변하면서 회칠로 덮이기도 했던 그림들이라 도리어 보존상태가

양호한 건지도 모른다. 모스크를 꾸몄던 것들은 이후 다시 기독교도들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전부 돌이킬 수 없게 지워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림과 글자가 어지러이 섞여 있는 데다가, 그림이 보여주는 전형성들, 그림에서 드러난

상징들을 보면 이 때의 그림이란 게 단순히 미감을 충족시키는 장식용이나 종교적 숭배의

의미 뿐 아니라 교육의 의미도 컸음을 짐작케 한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예수의 얼굴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같은 공간에, 다른 시기에 그려진 그림에서

나타나는 신의 형상이 변화한 건 역시 당대 인간들의 상상력 차이 아닐까 싶다.

천정의 무늬를 보란 듯이 한 겹 벗겨낸 뒤에서 드러나는 어슴푸레하지만 분명 다른 문양들.

아마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지배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이 곳에서 지워진 상대의 흔적,

그리고 새롭게 덧씌워진 자신의 흔적일 텐데, 저런 식으로 절개된 모습을 보니 무슨 외과수술

같기도 하고, 역사의 지층을 드러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렇게 벽면 가득한 문양들 뒤에서 새롭고도 오래된 흔적을 찾아내는 건 지층을

헤집으며 화석을 찾으며 과거 시간을 복원하려는 노력과도 비슷하겠다. 노란빛 일색으로

뎦였던 그 공간 뒤에서 웅얼대고 있던 옛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또 한 편으로는 지금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이야기들을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게 하려는 노력도

함께 진행중이다. 이미 오랜 이야기, 터키가 비잔틴 제국에 속했던 때, 술탄의 지배 하였던 때,

그런 기억들은 이미 도색된 물감들이 색을 잃고 먼지처럼 바스라질 만큼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도 대신 사진과 이미지를 구하러 들르는 시대.

한쪽 돔에서 드러난 성모자의 벽화. 돔의 완만하지만 분명한 곡선벽에다가 그림을 그려넣는

작업은 굉장히 어렵지 않았을까. 그 굴곡진 면의 왜곡되는 정도를 생각하고 실제 아래에서

그림을 볼 때 어떻게 보여질지를 감안해야 했을 텐데.

어느 창 너머를 무심하게 시선이 쓸고 가다가 문득 멈췄다. 창 너머 언뜻 보이는 저 뾰족탑들은

블루모스크의 그것들, 담담하고 차분하지만 세련된 느낌의 옅은 청회색 미나렛이 이쁘다.

아야 소피아에 남아있는 모스크의 자취, 1층과 2층 사이에서 여성들을 위한 기도공간.

나오려다가 마주친, 전등을 갈고 있던 아저씨들. 이 공간에 켜져있는 샹들리에만 수십개니까

거기에 달려 있는 전구는 대체 몇 개나 되려나. 의외로 저분들 하루에 해야 할 일이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출구로 돌아나오는 길에 올려다본 천장들, 천장을 꾸민다는 행위는 뭐랄까, 가장 덜 필요하면서

또 가장 재력과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싶다. 공간에서 눈이 가 닿을 마지막 부분이

아마도 천장, 그리고 화장실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화장실은 아예 공간 밖으로 빼내어 버리고

천장에도 이렇게 공을 들여 무늬를 그려넣고 모양을 만들고.

아야 소피아의 복잡한 내부 구조를 생각하면 당연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 외부는 역시 만만치

않은 복잡한 구조로 이리저리 꺽이고 휘어지고. 이렇게 거대하고 위대한 건축물은 그래서 역시

바싹 붙어서 보려다간 전혀 알아볼 수 없고 도리어 혼란에 빠져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완상하는 게 가장 잘 파악하는 길인지도.

원래는 이곳에서 무슬림들이 발을 씻고 손을 씻는 곳일 텐데, 더이상 모스크로 기능하지 않는

이곳에서는 더이상의 실용성을 잃은 정자 정도랄까. 이날처럼 비가 오던 날은 잠시 안에 들어가

일행을 기다릴 수 있는, 비를 긋는 공간으로 쓰였다.

그리고 굉장히 쿨한 모습으로 금발을 휘날리며 앞서 걷던 두 분의, 아마도 프랑스 아가씨들.

전혀 아야 소피아와 연관되지 않는 사진이라지만, 그래도 출구가 저렇게 생겼구나 정도를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니 전혀 억지로 끼워넣은 건 아니다.ㅋ




아야 소피아 성당, 하기야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박물관, 이 건물을 칭하는 수많은 단어가 있다.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를 넘나들며 수차례 건물벽면에 회칠이 새롭게 되고 이전의 흔적이 덮였던

건물다운 건지도 모른다. 유럽과 아시아 한 가운데 버티고 선 이 건물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할지,

이 건물을 성당이라 해야 할 지 이슬람 사원 모스크라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뜨악하고 어색한 색감이지만, 구석구석 자연스럽게도 닳아빠진 게 용케도

중후하고 분위기 있는 색감을 만들어냈다 싶다. 저렇게 뻘건 색깔이 생생하게 갓 칠해졌을 땐

대체 어땠을까, 사실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는 않도록 텁텁하고 끈적하고 더운 색감이지 않았을까.

안으로 들어서서 처음 맞이하는 길다란 회랑은 의외로 꽤나 담백하다. 담백하다기보단, 전혀

치장이 안된 맨얼굴을 맞이하는 느낌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바닥의 돌들은 조금씩 삐뚤거려

발걸음을 엉키게 하고, 벽면과 천장의 벽돌들은 곱고 반듯하게 마감했을 회칠이 전부 벗겨졌는지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유적을 연상케 했다. 그 벽면에 기댄 그림들은 아야 소피아의 과거를

알려주는 온갖 그림과 정보들.

그 그림들을 슬쩍 훑고서 문 하나를 더 지나치면 벽면이 색색깔의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그 자체의

문양과 색감으로 이미 충분히 화려한 회랑이 다시 나타난다. 조명조차 변변찮던 첫번째 회랑과는

달리 수십개의 전구가 밝게 켜진 샹들리에가 드높은 천장에서부터 길게 내리뜨려졌다.

두번째 회랑에 들어서면 언뜻언뜻 문 안으로 보이는 아야 소피아의 내부가 워낙 현란하고

궁금해서 금방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회랑을 살피면 이곳도 꽤나

공들여 다듬어진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대리석을 잘라 그 무늬가 좌우대칭이 되도록 하여 붙힌

벽면의 붉고 푸르고 하얀 대리석들도 그렇고, 천장의 노란 배경색과 문양들이 그렇다.

드디어 아야 소피아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건 커다란 문 위에 그려진

금빛 찬란한 성화 한 폭. 성화도 성화지만 그림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레이스같이 가느다랗고

새하얀 장식들이 섬세하다.

드디어, 드디어 아야 소피아 내부로 진입. 벽면에 커다랗고 동그란 검은 판에 금빛으로 씌여진

그림은 코란의 한 구절들이라고 한다. 도무지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모스크의 중앙돔엔

'알라가 유일신'임을 고백하는 아랍어가 씌여있다고 하니 그 비슷한 문구들이 아닐까.

6년 전에 왔을 때도 어딘가 공사중이긴 했던 거 같은데, 이번에도 한쪽 벽면은 완전히 아시바로

빼곡히 가려진 채 복원작업이 진행중이었다. 아무래도 세계의 주요한 유적들은 쉼없이 복원이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른 거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도 그렇고, 서유럽의 온갖 유적지도

그렇고, 여기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도 그렇고. 일상 생활에 들어와 활용되다가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기도 하고 스러지기도 하던 공간에서 과거를 고착시키고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바뀌면서

억지스레 잡아놓으려니 그런 거 같다.

이 분위기란, 이 이국적이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압도적인 느낌이란, 따뜻한 듯 하면서도 뭔가

비밀을 숨긴 듯한 엄숙하고 단호한 느낌이란,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가는 여행자들이 내뿜는

웅성거림과 방황하는 분위기가 더해지니 완전히 멍하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사방으로 종횡하는

시선을 따라 사방으로 눌려지는 셔터.

아무리 찍어도 좀처럼 온전히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과 그 독특한 분위기가 담기지 않는 듯.

돔형으로 지어진 천장을 따라 둥글둥글 내려선 벽면들, 그 벽면들에서 다시 뭉글뭉글 뻗어나간

공간들과 입체적으로 뚫린 창문들, 실제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가늠하기 힘들도록 입체적으로

확장되어지는 공간, 그 공간감을 더욱 왜곡시키는 건 사방으로 늘어뜨려진 샹젤리제와 동그란

판들과 기둥들과 회랑과 창문들.

그 기둥들 하나하나에 저렇게 투각되어 있는 기하학적인 문양들, 그리고 벽면의 노란 색감만큼

노란 빛을 뿜어내는 수백 수천개의 전구들, 그만큼의 빛을 이 공간에 던져놓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만 둥근 창문들. 대체 이런 너를 뭐라면 좋을까.

아무래도 아야 소피아엔 항복이다. 아무리 찍어대도 뭐 하나 만족스러운 사진이 없고, 아무리

찍어대도 이 아름답고 위엄있는 건물에 누를 끼치기만 하는 느낌이다.







이스탄불의 구시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관광지 벨트'랄까, 톱카프 궁전-아야 소피아 박물관-

지하 저수조-블루 모스크로 이어지는 그 구역에서 가장 맘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곳은 바로

블루 모스크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과 나란히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붉은 빛이 감도는 그것과는

달리 훨씬 포근한 푸른빛 감도는 잿빛 건물이 온화한 데다가 주위에 벤치나 녹지공간도 많이

품고 있어서 쉬기에 좋다. 게다가 내부를 구경하는 것도 공짜, 아무래도 블루 모스크가 가장

맘을 풀어둔 채 쉴 수 있고 또 그만큼 기억도 많이 남길 수 있는 이유다.

블루모스크의 이름이야 당연히 푸른빛이 은은한 이 외관에서 비롯했겠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꾸물꾸물한 하늘 아래서 바라보니 오히려 살짝 칙칙한 잿빛이나 회색빛의 느낌이 강하다. 그렇지만

그 파스텔톤의 한결 가라앉은 색감이 여전히 번뜩이는 황금빛 장식들과 어우러져 던지는 운치란 

또 나름의 매력이었다. 얄쌍하게 뻗은 네 개의 미나렛에서 풍기는 세련되고 단아한 느낌은 한결같다.

블루 모스크 앞 벤치가 비 때문에 축축해지고 나니까 사람들 대신 고양이들이 활개를 쳤다.

인류의 엉덩이가 드리워져야 할 벤치에 뽀송뽀송 곱게 살이 오른 고양이 발바닥이 종종 찍혔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귀찮다는 듯 느적대며 자리를 피하는 고양이 녀석.

옆의 아야 소피아 박물관 2층 창문에서 슬쩍 내비치는 블루모스크의 미나렛과 중앙 돔의 모습.

많이 느낌이 다른 두 개의 거대한 사원이 서로 나란히 붙어 있으니, 게다가 한놈은 파랗고 한놈은

빨개서 좀 우습지만, 그래도 한 눈에 두 건물을 바라보면 꽤나 흐뭇한 광경이 된다.

지도로 바라본 이스탄불의 구시가. 맨 오른쪽 아래의 블루모스크, 그 위로 예레비탄 사라이,

그 위로 아야 소피아 박물관, 그리고 톱카프 궁전까지 딱 하루동안 돌아보기에 좋은 알짜코스.

사실은, 블루 모스크라면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이라도 맨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라볼 수

있겠다는 게 솔직한 본심이다. 며칠짜리 코스가 어디 있나, 그냥 맘이 채워질 때까지 묵묵히

이리도 돌아보고 저리도 돌아보고, 다시 또 뒤로 돌아보기도 하는 게 여행.




지브리미술관 구조를 소개하는 브로슈어, 그치만 이것만 봐서는 통..뭐가 뭔지 한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게다가

무려 한국어를 포함한 다섯개 언어, 일본어까지 합치면 여섯개 언어로 소개가 되어있음에도 그다지 쓸데있는

정보는 안 담겨 있는 거 같다. 명색이 미술관인데, 더구나 지브리의 특성을 살려 만화로 표현해놓은 지도인데.

지도는 보고 나면 여기가 어디고 어디로 가야할지는 최소한 알아야 할 텐데. 어떻게 이럴 수가.

브로슈어 뒷면에 적혀 있는 문구 하나, 이 모든 의혹을 해소하는 강력한 단서가 되어 주었다. '미아가 됩시다,

다 함께!!'라는 문구다. 영어로는 'Let's lose our way, toghether'라나. 이들은 지브리 미술관에 들어온 사람들을

모두 길잃고 홀리게 만들어 기념품점을 싹싹 긁어가게 만들고, 지브리홀릭으로 만들 생각인 거다.


더구나 미술관 내 사진촬영, 비디오촬영은 모두 금지라니. 이러니 지브리에 두고 온 내 금쪽같은 추억들이

더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게 풍화되는 거다.

지브리의 입장권 두 장. 이걸 갖고 미술관 지하 1층으로 가면 오로지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지브리의

단편 만화영화를 볼 수 있다. 약 15분에서 20분 가까이 되는 작품을 매시간 세 타임씩 틀고 있었다.


위의 입장권은 '붉은돼지'의 한 장면, 밑의 입장권은 '포뇨'의 한 장면, 필름을 이렇게 몇 컷씩 잘라내어 다시

입장권으로 재생한다는 발상도 참 감탄스럽다. 이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기념품.

지브리 스튜디오 입장권을 사전 예매하고 현지에서 받기로 했는데, 한국에서 미리 예약할 수 있는 곳은 대한여행사

뿐이라고 많은 블로거분들이 그렇게 알려주셨기로 나 역시.




맥주를 맛있게 잘 마시는 방법 중 하나는 맥주잔을 한번 들어올려 한모금 마실 때마다 일정한 양의 맥주를

들이키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 급하게 덤벼들거나 지루하게 할짝대지도 않으면서, 적당하고 일정한 템포로

맥주를 맛보는 것이 요체.


어렸을 적 키스를 잘하려면 체리에 달려있는 뒷꽁지를 입안에서 잘 휘감아 매듭짓는 법을 연습하라던 얘기를

듣고 종종 연습했던 적이 있었는데, 맥주도 마찬가지. 이렇게 크리미한 흑맥주류를 잔에 가득 따라서 거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고리를 만드는 걸 확인해 가며 마시면 보는 재미에 마시는 재미까지 일석이조랄까.


에비스의 스타우트흑맥주는 달콤한 맛이 살짝 커튼 뒤에 숨은 채 이쪽을 훔쳐보는 발그레한 뺨의 소녀처럼,

쌉쌀한 맛이 막 장작개비 일백개를 힘껏 패고 굵은 힘줄이 여기저기 돋아난 당당한 마당쇠처럼 방울방울.



@ 도쿄, 에비스맥주박물관.
공주박물관에 있는 무령왕, 백제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백제인이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를 알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백제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린 불꽃무늬 왕관은 오늘에도 그대로 남아 분명한

형체를 남기지만, 그 왕관 아래 얼굴과 분위기는 대부분 상상의 영역에 남겨진 것. 그저 문헌상 '온유하다'거나

'따뜻한 성품'이라거나 따위 몇 개 키워드로 상상해낸 분위기를 어슴푸레 더듬을 뿐이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진 않다. 공주박물관에서 발견한 백제인의 생생한 얼굴, 그리고 전신의 형체. 어느 정도

중국풍이 가미된 걸 감안하더라도 꽤나 귀티나게 그려놓았다. 자신만만한 눈매, 당당한 태도의 잘 갖춰진

의관까지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풀풀.


기원후 500여년쯤 중국 남조 양나라 때 그려진 두루마리 그림 '양직공도'에 남아있던 그림으로, 중국 황제에게

사신으로 방문한 외국 사람들이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양나라(혹은 중국)과의 우호도나 관계에 따라 어느 정도

이미지가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었겠다고는 생각되지만, 아무리 중국인 입맛대로 그렸다고 해도 이건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

또 다른 버전의 백제사신을 봐도 그렇다. 똘망똘망하고 귀티나게 생겼다. 의복 역시 허투루 대충

걸치고 다니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세련되고 당당한 느낌.

고구려 사신의 모습도 있었다. 나름 화려한 복색과 깃털관의 모양이 특징적이지만 무엇보다 털이 복슬복슬,

뭐랄까, 짐승남의 매력이 풀풀.

신라, 조금 다른 나라에 비해 앳된 듯한 동안의 사신이다. 백제 사신도 그랬지만 다른 주변국에 비해 뽀얀 피부,

붉은 입술,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까지.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살짝 퇴폐적인 눈매까지.

왜국의 사신, 뭔가 헐겁게 걸친 옷가지들, 그리고 새까만 피부색, 그리고 바로 옆 고구려 사신과는 다른 느낌으로

북실거리는 털들. 그렇지만 색감이나 감각은 훌륭하다. 나름의 의관과 맞춘 의복에 팔다리귀에 꿴 고리들까지.

다른 버전으로는, 조금은 피부가 하얗게 나온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 사신에 비해 약간 키가 작게 나오는 게

'왜(倭)'라는 글자의 연원을 떠올리게 한다. 왜소하다, 작다, 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는 한자 倭.


조금 자극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루저'였던 왜나라 왜국인들이였달까. 뭐 그떄가 요새처럼 키높이를 가지고

결정적인 평가를 내렸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여 정림사지, 왠지 그렇게만 이름부르고 끝내면 어색해지고 만다. 뭔가 더 이어서 할 말이 있는데 중간에 덜컥

끊어버린 느낌이랄까.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이렇게 한단어로 덩어리지어 기억되던 그곳. 부여에 도읍을

정한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란 것이 머리에 꾹꾹 눌러박혀있는 거다.


그렇지만 몇 년전 대학 섭을 째고 무작정 버스터미널 가서 바로 출발하는 티켓을 사서 달렸던, 그 때의 부여,

그때의 정림사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들어서는 길에 만난 벤치, 봉황이 활개치며 금세라도 하늘로 뛰쳐오를 듯한 율동감이 충만해 있다. 반대편엔

다소곳이 깃을 가다듬고 서 있는 봉황.

정림사지 5층석탑의 위엄. 600년 경 만들어져 이렇게 단단히 섰다고 하니 대략 1400년쯤 되었겠다.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모습, 살짝살짝 들린 끄트머리가 은근하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이 석탑에다가 명문을 조각해 남겼다고 했다.

14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렴풋하나마 글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탑신. 기록의 힘이다. 더불어 용케도 천여년을

무사히 살아남은 이 탑의 힘이기도 하고.

예전에도 이런 게 있었던가, 싶도록 생경한 연못이 탑끄트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품고 있었다. 어렸을 때 뭔가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를 다룬 전래동화를 읽었었는데, 무영탑의 설화던가. 와이프가 탑의 완성을 기다리며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길 마냥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는. (넘 거칠게 요약해 버린데다가 '와이프'란 표현이

전래동화의 격을 확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림사지박물관은 조금 심심했다. 아무래도 여전히 복원중인 정림사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엔 조금 발굴된

소재가 모자랄 수 밖에 없을 거다. 그래도 이런 장면은 꽤 흥미로웠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땠을지, 우뚝 선 완성태의 모습이 아니라 이게 어떤 식으로 하나씩 다져지며 올라갔을지를 상상케 해주는

몇 가지의 선명한 이미지를 선물해주는 전시들.

그 외에 부여 시대 백제의 암막새와 수막새(기와)를 지붕위에 얹는 장인들의 모습도, 첨에 아무생각없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던 시선에 저 사람들이 잡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었다. 진짜 사람인 줄 알고.;

그치만 정림사지에서 만났던 가장 깜놀했던 장면은 바로 화장실 표식. 눈알이 그려지지 않은 채 흰자가 있어야할

부분까지 온통 살색으로 메꿔지고 만 이 젊은 처자는, 왠지 복수심에 불타 입술을 앙다물만큼 절절한 사연이

있어 보였다. 이래서야 화장실 들어가기 무서워서 원.

남자라고 별반 다를 거 없다. 뭐 나름 전통 의복을 입혀 놓은 건 좋은데, 역시 눈알이 안 찍힌데다가 흰자위까지

온통 살색이다. 표정 역시 완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태. 사실 따지려면 한량없다. 저 의관은 백제식으로 갖춰

입혀놓은 건지, 아님 그냥 조선식으로 입혀놓은 건지.

그리고 석불좌상. 5층석탑 너머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또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정림사지는

엄밀하게는 고려의 문화유산, 그 원래자리를 준비하고 있던 5층석탑만 백제의 것인 셈. 미처 몰랐다. 어쨌든,

번쩍이는 안광에 힘이 빡 들어간 도깨비의 억센 이빨이 손잡이를 물고 있고 연꽃무늬가 장식된 문을 지났다.

뭐랄까, 온몸이 완전히 닳고 닳아버렸다.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니 아무리 멀리 잡아도 천년인데, 5층석탑이

저렇게 세밀한 부분까지 고대로 남아있는데 반해 이 부처님 좌상은 무슨 바위덩이처럼 변해 버리다니.

두 돌덩어리는 각기 다른 시간을 넘어 오늘에 이른 걸까. 그렇다고 이 석불좌상의 느낌이 죽어버린 것도 아니다.

다소 죄송스런 맘을 담아 표현하자면, 지하철이나 터미널같은 데서 많이 뵐 수 있는, 몸이 불편하여 땅에 일부를

끌고 다니시는 그런 분들을 닮은 부처다. 팔도 다리도, 온몸이 둥글둥글 지워져 버렸지만 왠지 모를 위엄과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일견 엄한 것 같은 표정이지만 슬몃 웃음이 물려있는 듯 하기도 하고.

돌아나오는 길, 이번엔 석탑 대신 소나무 한 그루가 연못에 그려졌다.

정림사지는 여전히 발굴 중, 잔디만 무성한 한쪽 벌판 끄트머리에 뜬금없이 자리잡은 돌계단,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돌들이 어깨맞댄 틈바구니에서 풀들만 무성하다.

이런 거 좋다. 지역의 역사문화적 이미지를 이렇게 적극 활용해서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박물관에서 뽀얀 뽀샵 조명받고 손도 못대게 박제시켜 두는 것이 아니라, 2010년 현재에서 1400년전 사람들이

창조해내고 즐기던 미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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