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어떤 철학이 담겨야 할지, 어떤 역사적인 맥락과 주변과의 조화가 고려되어야 할지에 대한 많은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흔히 DDP로 줄여부르는 것 같은 그 건물이다. 사실 이 생뚱맞고 이질적인 건물을 설계한 자하 하디드를

 

둘러싼 논쟁보다는, 원칙적으로 제기되는 건축의 철학성, 역사성, 그리고 주변과의 심미적인 조화에 대한 문제가 과연 한국에

 

현대 건축에 얼마나 배어있는지를 곱씹어보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는 건축이라면, '말하는 건축가'

 

고 정기용 건축가씨의 건축 정도려나. 몰개성한 아파트더미들과 스틸과 유리로만 처바르면 미래지향적이라 생각하는 건물들이 천지다.

 

하여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깔고 앉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그래놓고 보호하자는 이 낯짝두꺼운 표지판 보소.

 

 

 

동선이 굉장히 기괴하다고 느꼈는데, 층수와 현재 위치에 대해 계속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위풍당당한 외양에 집중한 건물.

 

음...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하다거나 눈높이가 낮은 건물은 아니어서, 전시나 슬쩍슬쩍 보고 빠져야 할 듯 하다.

 

아니면 옆에 전태일교에서 노랑리본을 단 채 21세기의 이땅을 바라보는 그 청년의 곁을 지나쳐 동대문 시장통을 거닐거나.

 

 

 

 

 

뭐,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전날까지 심하게 내렸던 눈으로 인해 대부분의 코스가 막혀버리고 하류쪽

 

약간의 코스만 열려있던 상황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눈을 헤치고 휘적휘적 나아가다가 어느결엔가 출입통제구역들까지 헤집었단 얘기.

 

 

 

 

에메랄드빛 호수 위로 슬몃 바람이 지나면 가지 위로 한껏 쟁여놓았던 눈발이 마치 하늘에서 내리듯 푸지게 쏟아져내린다.

 

 

아직 사람 하나 지나지 않은 하얀 설원 위에 길을 만들며 휘적휘적, 전후좌우 위아래로 온통 새하얀 풍경들이 쉼없이 이어진다.

 

 

 

 

 

무슨 말을 더 붙여야 할까. 그저 잠자코 사진이나 올릴 수 밖에.

 

 

 

벤치 위에 사람 대신 눈이 그득하니 앉았다.

 

 

 

 

제설차가 밀고간 눈이 온통 길 양옆으로 밀려나면서 다리를 완전 막아버렸지만, 저길 또 뚫고 지나가보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또 신세계. 대충 플리트비체 호수들의 중심, 코자크호수의 중류까지 도착한 듯 하다.

 

 

내가 만들어온 길도 한번 슬쩍 돌아봐주고. 이제 제법 태양이 중천으로 치솟고 있는데도 워낙 사람도 없고 조용하다.

 

 

그치만 또 이런 말갛고 투명한 녹빛의 물이 유유히 흐르는 새하얀 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냥 좋다.

 

 

 

 

 

 

 

 

 

 

 

 

 

 

 

커다란 S자로 휘이~ 돌아가는 저 산책로를 밟고 싶어서 이리저리 길을 뚫어보려 하는 참이다. 짙은 초록빛의 호수 가운데의 새하얀 길.

 

 

문득 잊혀졌던 바람이 다시 불면, 어제의 삼엄했던 폭설이 재연되는 순간.

 

그 와중에 내려가는 길을 찾아냈다. 아마도 여기가 날좋은 날엔 보트를 타거나 하는 식으로 호수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포인트인 거

 

같지만, 나중에 다시 올라오면서야 폭설로 출입통제였음을 확인했다. 어쩐지..내려가는 길에 몇번이나 위기를 넘기고. 결국 자빠지고.

 

 

 

결국 한번 되게 넘어지고 나서야 바닥을 보았다. 이곳에서 보이는 플리트비체 호수들의 풍경은 또 굉장히 다르다.

 

 

 

 

 

대체 뭔 사진을 버리고 뭔 사진을 취해야 할지 정하기도 쉽지 않다. 아니, 그보다 플리트비체의 한순간한순간이 너무나

 

인상깊어서, 어느 한토막이나 풍경 한조각을 버리기가 너무 아깝다는 게 맞겠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3월 중순의 늦은 폭설이 내린 직후라 이런 숨겨진 기적같은 풍경들에 매혹당하고 말았지만, 좀더 날씨가 풀리고

 

초록초록 울울창창하게 단장한 플리트비체를 만나는 것 역시 또다른 기적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일지 모르겠다. 언제고 꼭, 꼭,

 

다시 한 번 맨눈으로 다시 보고 싶은 최고의 비경.

 

 

 

 

 

 

 

앞서거니 뒷서거니 움직이던 프로 사진기사 아저씨 일행과 나. 전날 내린 폭설 덕에 한사람 걷기도 쉽지 않은 외길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서로의 위치를 빌려주기도 하고, 서로의 카메라가 향한 곳을 흘깃거리기도 하고.

 

 

 

그리고 잠시 한눈 판 사이, 나는 더이상의 접근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돌아섰던 그 곳을 훌쩍 넘어가버린 프로 아저씨. 엄청 불어난

 

물 때문에 통나무로 만들어진 산책로가 거의 수면 아래로 잠기다시피 했던 길인데, 저 길 너머에 플리트비체의 대폭포인 벨리키폭포가

 

있는 거다. 아마도 이렇게 한 걸음 떼는지 마는지가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일지도.

 

산책로 아래로는 바로 또 낭떠러지 폭포가 이어져 있어서 물소리도 귓전을 때리고,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물방울도 온몸을 때리고.

 

 

급물살은 찰박거리며 쉼없이 산책로를 들썩여대고, 폭포수의 맹렬한 소음과 진동은 몸 전체로 전해지는 상황. 이미 신발이고 옷은

 

흠뻑 젖어버렸고, 그저 카메라나 놓치지 않도록 꼭 쥐고 있는 것이 고작인 상황.

 

그래도 역시나, 이쪽에서 바라본 풍경들도 하나같이 숨을 멎게 만들 만한 그런, 절경이다.

 

 

멀찍이서 보이던 눈꽃들의 세세한 디테일과 원근감이 하나씩 드러나는 풍경 속에서, 좀더 두텁고 둔중한 소음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벨리키 폭포. 플리트비체 하류의 대폭포라고도 불리는 이 폭포는 물의 낙폭이 78미터라나, 아래에서 올려다보기 쉽지 않다.

 

 

그리고 폭포 아래로부터 어딘가로 다시 모여 흘러내리는 개울을 이루고는 오랜 세월 무성한 나무들을 키워냈다.

 

 

눈이 많고 추운 계절이라 그런지 아직 유량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소리나 위용은 굉장히 사납고도 맹렬하다.

 

 

옆엣 산책로를 조금 빗겨 올라가서 벨리키폭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껏 감상했다. 참, 이쁘고도 오묘한 경치다.

 

 

끊긴 다리를 향해 돌아가는 길, 벨리키 폭포는 플리트비체 공원 하류의 포인트이자 끄트머리이기도 해서, 이제 상류로 올라갈 시간.

 

 

상류쪽으로 멀찍이 보면, 조그마한 웅덩이 같은 에메랄드빛 호수들이 찔끔찔끔 이쪽으로 흘러내려오는 듯한 느낌이 있다.

 

카르스트지형의 특색이랄 수 있는 그런 하류로 미끄러지는 호수들, 그에 더해 하류의 눈꽃에서 미끄러지는 무지개도.

 

 

왠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더 많은 산책로가 폭포수에 먹혀버린 듯 하다. 앞에서 한바탕 찍고 간 프로 사진기사

 

아저씨도 조금 끙끙대며 건너가는 거 같더니 이유를 알 만 하다.

 

 

뭐, 급할 거 없으니 안전하게. 그리고 가능한 풍성하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산책로가 폭포수에 먹힌 바로 그 시점을 코앞에 두고, 인증샷 한 장을 남겨 이날의 모험을 기억해두겠다며.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서 프로 사진기사 아저씨가 선방을 뜨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앞장설 일은 없었지 싶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KBS중계소를 지나 울릉도 성인봉으로 오르는 길, 갈수록 가팔라지는 계단이나 비탈길에 지치다가도

 

잠시 옆 나무에 털썩 몸을 부려놓고 있으면 평생 처음 맡아보는 짙고 진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숲향이 그득.

 

 

위로 올라가며 어느순간 희뿌연 안개 같은 구름이 사방을 가리웠다. 일년 중 대부분의 날들을 이렇게

 

구름으로 휘감고 있는 봉우리인지라 성스럽다 하여 성인봉이라 이름지었다던가.

 

뭔가 네이쳐 리퍼블릭 광고 같이 초록빛이 농염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광고를 찍기에 딱 맞춤한,

 

그런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 이런 게 어쩌면 깊은 숲이나 원시림에 대한 뿌리깊은 경외심을 자아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숲향에 흠뻑 취해서 나무 사이를 뒤채며 내달리는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숲바람을 쐬노라면

 

금세 기운이 다시 회복되는 거다. 정말 취한 듯한 기분으로, 모세혈관 하나하나 깨어나는 기분으로.

 

 

그렇다고는 해도 몇 걸음 걷다가 이내 에라 모르겠다, 굳이 서둘러야 할 이유 따위 없으니 털썩.

 

오후 세네시쯤이어선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등산객들. 세상에 혼자 존재하는 느낌이다. 온갖 새소리들 빼고.

 

 

그렇게 쉬엄쉬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농밀하고 강렬한 숲향에 취하고 산바람에 희롱당하며 오르다가 문득.

 

어느 나무 등걸에 몸을 거의 뉘이고 있는데 불쑥 초록빛 운무를 뚫고 빛이 내렸다.

 

 

온통 희뿌옇고 어른어른한 풍경들 속에서 불쑥 땅바닥에까지 늘어뜨려진 햇살 몇 가닥.

 

 

 

 

 

아마도,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풍경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느닷없는 빛살이 내려 초록빛 운무와 짙은 숲향을

 

일렁이고는 마음까지 흔들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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