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타워로부터 내려오는 케이블카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남산타워를 다시 오르는 케이블카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남산의 옛이름을 딴 찻집에 앉아 땀을 식히던 중 휘영청 기와지붕의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남산에 서린 기억들을 구비구비 펼쳐놓으려니 터질듯한 연둣빛의 가로수가 팔을 뻗어 아서라, 한다.

하얀 강아지를 앞세워 다정하게 산책하는 모녀의 모습이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 말줄임표가 되었다.

기상청의 구라는 끝이 없는 걸까. 꿈과 희망의 오월이니만치 구라를 쳐도 조금은 긍정적인 구라를

치면 좋겠고만, 꾸물거린다는 예보 덕에 집에서 꾸물대다가 느지막히 나오는 거다. 그래도 이토록

반짝반짝 잔디밭 한가득 튀겨대는 햇살을 놓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남산도서관 옆의 그 유명한 돌계단. 둘씩, 셋씩 짝지어 계단을 오르내리고 더러는 철퍼덕 앉아

쉬어가는 모습이 정말 모두 느긋하고 여유로워보였다. 제각기의 사연과 이야기를 가졌을 사람들,

이렇게 한 사진에 담기고 나니 뭔가 모자이크 하나를 완성한 느낌이기도 했다.



@ 남산.

Clifford 였던가, 그런 비스무레한 이름으로 FAKE ID도 만들었댔다.

도서관에 들어가 앉아 미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책도 읽고 눈인사도 하고, 앞자리 아가씨도 훔쳐보고 싶었는데.


문득 궁금해진 건 대체 저렇게 멀리서 잡아준 사진은 누가 찍어줬던 거지.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부탁했단 얘긴데...풍요의 땅 미국이라도 내 카메라 들고 토끼지 말란 법은 없건만.






내부에는 거의 장식이 없는 밋밋한 벽면으로 일관하던 앙코르 유적들, 앙코르 왓쯤 오니까 내부에도 무엇인가

장식을 하려 했던 시도들이 남아있다. 가슴엔 동그라미 두 개가 선연한 미완성의 압사라 여신들. 완성되진

않았지만 압사라 여신들의 둘레를 휘감고 있는 오오라같은 불꽃 장식이 멋지다.

많은 불상들이 머리가 부러진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유독 해맑게 웃으며 머리를 지키고 있던 불상 하나.

입술엔 누가 뭔가 발라놓았는지 쥐를 잡아먹었는지.

천장 드문드문 도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도안 자체가 꽤나 복잡한지라 일일이 구분지어 색칠하려면 굉장한

수고로움이 따랐을 거 같은데, 어느 한 군데라도 온전히 남아있으면 미루어 짐작이라도 하련만.

여기도 도서관이란다. 왜 이렇게 사원 내부에 도서관 건물이 많은가 했더니, 그런 건물들은 당시의 귀중품이던

'책'과 함께 제사용 집기나 향료, 심지어는 음식물까지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고 한다. 게다가 도서관 위치에

따라 담당하던 의례의 대상과 운영시간이 달랐다고. 남쪽 도서관은 달이 떠오르는 기간에, 북쪽 도서관은 달이

지는 기간에 각각 다른 신에게 의례를 바쳤다고 한다.

네모난 상자 안에 작은 상자, 그 상자 안에 더 작은 상자, 그런 식으로 앙코르왓을 까는 재미가 있다. 그러려면

우선 상자 하나를 열고 들어가기 전 상자의 네 바깥면을 꼼꼼히 살핀 후 상자 안쪽 네면을 다시 또 살피게 된다.

그리고 나선 다음 상자로 옮겨가는 식이다.

상자에 비기자면 앙코르왓은 총 다섯 개의 상자 안에 있는 셈이다. 그 중 두 개의 상자를 열어젖히고 나면

명예의 테라스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크메르 왕이 외국사신이나 고관대작에 베푸는 연회가 열렸을 이 테라스는

이제 여행자를 위한 '통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앙코르 왓의 선물상자 중에서 가장 포장이 화려한 건 세번째 상자, 명예의 테라스를 휙 지나치지 않고

외곽으로 한 바퀴 삥 돌면 나타나는 '포장지'다. 사면에 가득 벽화가 그려져있는데, 혹자는 앙코르왓의 백미는

건물의 조형미나 실루엣이 아니라 이 벽화라는 이야기도 한다.


남북으로 187미터, 동서로 215미터, 둘레가 총 800여 미터에 이르는 '세번째 상자 겉면 포장지' 회랑을 따라

각각의 주제를 가진 8개의 벽화가 조각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오른쪽으로 돌며 관람한다고 한다. Godorization.

가장 섬세하고 볼만하다고 생각했던 서쪽회랑 남쪽방면, 그러니까 바로 '명예의 테라스' 오른쪽에 펼쳐지는

'쿠륵세트라의 전투' 부조. 아무래도 인도 역사에 길이 남는 대회전을 새겼으니만치 스케일도 장대하고 등장한

사람들 하나하나의 묘사가 꼼꼼했다.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난투극의 한 장면을 펼쳐 보이는 이 '쿠륵세트라'

전투가 바로 체스와 장기의 게임 규칙으로 전승된 것이라 한다.

수리아바르만 2세의 행렬도를 조각한 두번째 벽면을 넘어, 세번째 주제는 '천상과 지옥'. 굴비처럼 둘둘 엮인채

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도 보이고, 소처럼 코뚜레를 하고 끌려가기도 한다. 판결을 받는 영혼들의 모습, 그

판결에 따라 지옥으로 던져지는 영혼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칼로 베이는 벌을 받기도 하고, 온몸에 못이

촘촘하게 박히는 형벌을 받기도 하는 모습들이 적나라하다.

앙코르왓이 지금과 같은 '관광자원', 혹은 '인류유산'으로 보전받게 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300년

전만 해도, 이렇게 자신의 아내 무덤을 앙코르 왓 내부에 세워두기도 했던 거다. 지금 만약 누군가 여기에다가

자신의 가족을 몰래 묻는다면 심각한 문제로 비화되고 끝내 쫓겨나겠지만, 그래도 300년쯤 먹은 건 나름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획득해 버렸다. 덕분일까, 천년짜리 앙코르왓과 놀다보니 무덤이 조로했는지 꽤나 오래고

낡아 보인다. (그리고 조잡해보이기도 한다.)

이곳을 당시 다스리던 사람이 아내 무덤을 여기에 썼다는 내용을 담은 기록이 남아있다. 뭐랄까, 한국으로

치자면 '음택'을 잘 쓰고 싶었던 욕심일까. 그치만 이렇게 사람이 늘상 붐비는 곳이 되고 말았으니, 그 사람이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다.

약간 중국식의 냄새가 난다 싶었다. 명예의 테라스 정반대쪽, 그러니까 동쪽 회랑에 있는 그림들은 애초 기획된

기간에 끝나지 못하고 무려 400여년 동안 미완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미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서

중국풍이 섞이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세력이 예전만 못했어서 그런지 딱 한눈에 보기에도 이전 벽화들만

못하게 다소 치졸해 보인다. 저기 저건, 무슨 도인이 하나 캄보디아에 등장해 버리셨다. 이런.

세번째 선물상자의 마지막 네번째 바깥면, '신과 악마와의 전쟁'이 묘사된 곳이다. 여기저기서 거대한 동물과

신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악다구니를 쓰는 중이다.

싸움 장면에도 지쳐버려서, 잠시 앉아서 쉬려는데 바깥쪽 풀밭에 꼬물꼬물 뭔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저게

뭔가 했더니 원숭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이리저리 노닐고 있었다.

털의 상태로 보건대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곧게 뻗은 꼬리는 저 아이들이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임...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 캄보디아에선 원숭이를 쉽게 볼 수 있다더니, 앙코르왓에서도 원숭이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도 드문드문 골목길에서 원숭이를 발견해서 첨엔 깜짝깜짝 놀랐지만

나중엔 익숙해져 버렸댔다.)

마지막 부조 벽화, 왠지 원숭이들이 우글우글 나오는 게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서유기'의 오리지널 버전인가

싶다. 서유기의 등장인물 '손오공'이 동남아 신화로부터 유래했다더니. 마침 원숭이들이 정글에서 뛰노는-

정확히 말함 네 발로 꼬물대며 기어다니는-모습을 보고 나서인지 부조된 원숭이 얼굴들이 확확 다가온다.

수고했어요~ 세번째 포장지는 다 둘러봤으니 이제 들어가 보도록 해요, 라며 금방이라도 미사일이 튀어

나올 것 같은 강철 가슴을 가진 압사라가 말했다. 명예의 테라스에 올라서니 앙코르왓 중심부가 보인다.




똥*일보 인턴기자질을 마쳐가던 즈음, 인턴들에게 4면의 지면을 주고 담고 싶은 기사를 취재해 오라고 했던,

마지막 기념품삼아 신문을 직접 만들어 보도록 하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이른바 '바이라인'이라는 기사 아래의

자신 이름 석자가 실리는 것에 환상을 갖고 있던 인턴 동기들은 저마다 열의를 갖고 이런저런 기사거리를

제안하고 취재를 하겠다고 했으나, 사실 무해하고 '건전한' 장난감같은 4면짜리 인턴신문으로 견인코자 했던

관리자들의 태클로 이도저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다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인턴신문에 그래도 각자 바이라인 하나씩은 넣어야 한다는 게

또 보기 좋고 건전한 마무리를 위한 전제조건이었달까..결국 난 친구 하나가 발제하고 허가를 득한 주제에 대해

함께 취재하러 나가게 되었었다. 그건 바로 서울에서도 도서관 마냥 한사람씩 공간을 칸막이 쳐놓고 음식을 팔고

있는 음식점이 생겼다는 것. 당시 명동교자와 일부 음식점이 점심 때 혼자 와서 밥먹는 직장인들을 위해 그런

일인용 칸막이가 둘러쳐진 테이블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뭐 여러 사정 끝에 그 기사는 하나의 트렌드를 짚고 있다기엔 무리가 있다 하여 짤리고 말았으나, 그때 처음으로

일본엔 이미 그런 식의 1인용 식당이 왠만큼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 후쿠오카를 여행하며

드디어 직접 그런 식으로 구획된 라멘집을 경험했으니.

캐널시티에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배가 고파져서 찾은 라멘집. 일본 라면을 두고 느끼하다거나 맛이 너무

진해서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첫날 자그마치 '곱창 라멘'의 죽도록 느끼하고 진득한 맛에 반한

후로는 하카다식 라멘에 홀딱 빠진 상태였달까.


근데 여기, 다른 음식점들처럼 가게 앞에 자판기가 있어 표를 사서 주문하는 건 비슷한데, 뭔가 자리배치도에 파란

불빛으로 '空'자가 적혀 있는 게 특이했다. 뭐지? 테이블이 어디가 비어있다고 표시해 놓은 거 같긴 한데.

자리에 앉기 전 주위를 둘러보다 입구쯤서 발견한 추가주문용지. 드문드문 한자는 뭔말인지 얼추 추측은 하겠다만

일본어가 얼기설기 섞여있어서 좀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뭔가 돈을 더 내야 추가로 뭔가를 더 집어넣어

라면을 만들어주겠다는 뜻인 듯.

자리에 앉으려니 의자 하나, 그리고 딱 도서관 칸막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만큼을 허용하는 둘러쳐진 테이블.

대체 음식은 어떻게 나오나 싶어 앞쪽으로 고개를 빼어보니 가운데엔 서빙하는 점원이 앞뒤로 움직일만큼의 좁은

통로가 있고, 그 양쪽으로 이렇게 칸쳐진 도서관 책상이 열지어 있는 구조였다.


혼자 와서 밥을 사먹을 수 있다는 건, 때론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거나 철이 들었다는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무지 꺼려지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그런 피치못한 순간에 이처럼 혼자 조용히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은폐된 채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란 꽤나 매력적이겠다 싶었다. 앞쪽에 마주보고 있는 사람과 행여 눈길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길게 드리워진 커튼같은 천조각은 더욱 완벽하게 자기 자신과 앞에 놓인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제공하게 될 거 같다.

옆에 젓가락통에 함께 꼽혀 있는 종이에는 한국어로 라면 기호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몇가지 옵션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예컨대 기름기 정도, 라면의 감촉, 그리고 비전 조미료를 얼마나 넣을지 같은 것들을 무난한

한글로 적어놓고 있었는데, 꽤나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 반증이지 싶다. 다만 하나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저 항목, "궁극의 신맛"이 대체 무얼까..심플하게 '있다'와 '없다'만을 선택할 수 있는 양자택일

그 기로에서 난 일단 '있다'를 선택했다.

이게 바로 '궁극의 신맛'이 있는 라면. 살짝 퍼진 느낌의 네모난 라면그릇에 담긴 건 기름기 둥둥 떠다니고 마치

한국의 꼬리곰탕처럼 진한 육수맛이 인상적인 라멘. 한국의 라면을 떠올리게 된다기보다, 오히려 사골탕이나

꼬리곰탕같이, 뼈가 흐물흐물해지도록 고아낸 뿌연 육수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그런 것들은 식으면서 마치 젤리나

묵처럼 국물이 걸쭉하게 굳어버리곤 하는데, 분명 이런 후쿠오카의 라멘도 그렇게 될 거 같다.


뭐랄까, 음식의 계보를 따지자면 일본의 라멘은 분명 한국의 라면보다 꼬리곰탕같은 사골국물에 훨씬 가까운

음식으로 판명되지 않을까 싶다.

이치란. 가이드북에 따르자면, 여기가 관광객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라멘 전문점이란다. 자그마치 1960년도부터

이어온 비밀 양념장이 푹 고아진 돼지뼈 국물에 더해져서 느끼하지 않은 국물맛이 난다고 하는데, 글쎄 난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도 모르고 그저 맛있게 먹었을 뿐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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