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푼짜리오페라 #브레히트 #희곡 #책스타그램

브레히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공산당에 가입한 적 없는 자칭 맑시스트란 점, 그리고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하며 고전적인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낯설게 하기'의 선구자란 점 정도. 희곡을 텍스트 자체로 읽는 건 상상하며 읽을 여지를 남기기 마련이지만, 합창과 대사와 방백이 뒤섞인 그의 희곡은 곳곳에서 제동을 걸어왔다.

서푼짜리오페라에서 그는 등장인물로 하여금 계속해서 초기 자본주의시기, 아마도 19세기 초반쯤을 냉소하는 대사를 내뱉도록 한다. 거지 왕초와 갱 두목간의 이야기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고, 또 누구와 대척하며 누가 자신들을 억압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그게 무엇이든, 우정이던 애정이던 전부 돈으로 환전되는 모습도 적나라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갱 두목이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끝나나 했던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왁스럽게 방향을 틀어버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할 수 밖에, 맥락없고 뜬금없는 사면령에 더해 귀족 작위라니. 피첨 부인과 피첨이 관객에게 직접 던지는 마지막 대사는 씁쓸하고 당황스러운 울림을 남긴다. "왕의 말탄 사신이 항상 온다면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손쉽고 평화로울 텐데."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끝은 비참하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는 주문이자 집요한 요청.

- 걷고 싶은 아름다운 산책길 4, 경주 황남동 대릉원 지구(윤성의)-

 


* 2016. 7. 14(목)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 (시간이 보듬어준 경주의 듄, 대릉원의 곡선들.)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오늘 함께 걷고 싶은 길은 경북 경주 황남동 일대의 대릉원 지구입니다. 황남동은 황남빵으로도 익숙한 지명이죠. 대릉원은 신라시대 왕과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중에는 천마총, 오릉, 미추왕릉 익숙한 관광지 외에도 박해일 신민아 주연의 영화 경주 배경이었던 경주 노서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등도 있습니다.

대릉원은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대릉원은 제법 커다란 공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요. 이곳을 둘러싼 담백하고 야트막한 기와 담벼락, 그리고 너머 민가들의 수수한 기와지붕들이 잠시 시간감각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야트막한 언덕 같기만 무덤 하나 하나에는 각각 주인이 있고 어쩌면 무덤 안에는 여전히 찾지 못한 보물들이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눈에는 그런 귀한 유물들보다 무덤의 옆구리 곡선이 탐나게 느껴졌습니다.

사하라 사막에 갔을 반해버렸던, 바람이 만들어낸 모래언덕과 닮은 곡선이었습니다. 바람이 모래를 하릴없이 헤치고 깎고 부어내며 만들어내던 자연스럽고 우아하던 곡선, 아마 대릉원의 곡선들 역시 조금 시간이 걸렸을 , 자연의 손길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방이 온통 둥그스름하고 풍만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공간, 사이를 구비구비 휘감아 돌아가는 산책로의 모양새도 좋습니다. 딱히 어디를 찝어서 여기를 봐야겠어, 라거나 바퀴를 전부 걸어봐야겠어, 라는 욕심 부리지 않아도 그저 눈앞에 펼쳐진 곡선의 풍경들과 곡선의 길들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공간입니다.

노서리 고분군도 추천하고 싶은 곳인데요, 천년을 버텼던 왕국의 무덤에서는 어느새 세월을 먹고 자라난 나무들이 자리를 잡은 풍경을 있습니다. 누가 감히 왕들의 안식처에 올라가 나무들을 심고 키우고 손봐줬을 리는 없고, 그저 자연스레 바람이 옮겨다준 씨앗을 자그마한 언덕이 품고서 물과 양분을 주며 이만큼 키워냈을 거라고 상상하면, 오랜 세월을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됩니다.

대릉원에서부터 첨성대나 안압지, 계림숲이나 경주박물관까지도 설렁설렁 걸어서 닿을 있는 거리에 있구요. 오릉을 지나 포석정을 거쳐 경주 남산 아래턱을 가볍게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고분의 둥실한 실루엣과 너머 야트막한 산들의 실루엣이 겹쳐 보이는 풍경, 안에서 천년의 세월을 느끼며 걸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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