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플릿 지도. (뒷주머니에 꽂힌 채 땀에 절어 완전 허름하기 짝이 없는)

 

 

 

#2.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지하 공간

 

 

 

 

#3. 성 돔니우스 대성당 티켓

 

 

#4. 스플릿 - 모스타르 버스 시간표

 

 

 

 

 

 

 

스플릿의 수산시장, 바다에 바로 접한 대로의 반질거리는 대리석 위로 생선 비린내가 바다향기를 짙게 풍긴다.

 

 

이 곳에 풍부한 해산물들, 그 중에서도 집게 달린 이 새우로 만든 요리들은 뭘 먹어도 맛있었던 듯.

 

 

바다를 옆으로 끼고 걸어가는 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거대한 옛 궁전에 기대어 지어진 까페와 주택들을 바라보며

 

바다냄새 나는 손가락으로 기타를 튕기던 아저씨는 잠시 그늘로 숨어들었다.

 

 

이 곳에 보이는 벽들은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왕궁의 남쪽 벽면이다. 폐허로 남겨진 곳에 사람들이 모여살기를 몇백년.

 

 

이제는 이런 쌍둥이 꼬맹이들도 보라색 옷 때깔 맞춰입고 찾아올만큼 유명한 유적지로 남았다.

 

 

거의 이천년이 다 되어가는 로마황제의 거대한 개인 궁전, 한참을 버려졌던 이곳엔 이제 유리창도 에어컨도 끼워맞췄다.

 

 

성의 동쪽 외벽에 기대어 펼쳐진 재래시장에선 올리브유니 꿀이니 채소니 과일이니 온갖 것들이 주섬주섬 펼쳐졌고.

 

샘플 하나씩을 뚜껑에 달고서 갖가지의 크기와 색깔과 모양을 뽐내는 단추들.

 

꽃이 무척이나 화려하다 했다. 알고 보니 꽃 위에다가 락카를 뿌린 건지 어쩐 건지 퍼렇게 뻘겋고.

 

비닐로 몸을 둘둘 대충 감아둔 돼지 서너마리가 통으로 매달린 정육점.

 

 

 

그리고 머리까지 고스란히 붙은 채 생전의 모습과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닭고기들. 이건 설마..채식을 유도하는 고도의 장치?

 

 

색색의 바지들과, 과하게 가슴과 엉덩이를 튕겨낸 마네킹들. 허리에서 에구구 소리나는 것만 같다.

 

핏물처럼 붉은 과즙이 흐르던 블러드 오렌지.

 

 

그리고 다른 곳보다 좀더 많이 허물어진 성벽을 바라보고 선 성당 하나.

 

예수의 12길이 굉장히 강렬한 색감과 필치로 그려진 인상적인 모습들을 한바퀴 둘러보니 마음이 써늘해졌다.

 

아마도 옆가게로 수다떨러간 주인아주머니 대신 노상의 꽃가게를 지키고 선 고양이 두마리. 한마리는 벌써 지겨운지 기지개다.

 

 

 

네모 반듯한 왕궁의 외벽을 따라 바깥 풍경을 한 바퀴, 벌써 남문과 동문을 지나 북문으로 향하는 참이다.

 

 

그리고 북문에서 만난 마법사 같은 차림의 거대한 동상 하나. 10세기 크로아티아의 주교였다는 닌스키의 동상이라나.

 

 

라틴어 대신 크로아티아 어로 예배를 보도록 했던 그의 의도에는 무심한 관광객들은, 문지르면 복이 온다는 그의

 

엄지발가락만 반질반질거리도록 쓰다듬고 떠나버렸나 보다.

 

스플릿의 구시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왕궁을 굽어볼 만큼 거대한 그의 모습, 그리고 저 역동적인 어깨와 손가락 놀림은

 

왠지 모를 위압감을 전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표정도 너무 진지해보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벽을 따라 돌면서 발견했던 가장 흥미롭던 장면 하나는 이 클래식 포크스바겐.

 

양쪽 어깨에 높은 건물을 올려둔 좁다란 골목 안에 짙게 배인 그늘을 벗어나던 샛노란 차로 향한 카메라를 의식했다.

 

문득 멈추더니, 다시 슬슬 뒤로 후진해서는 촬영할 준비를 하라며 손짓을 한다. 빵 터져서 웃고는 오케이, 손짓하니

 

살금살금, 대리석을 즈려밟으며 한바퀴 한바퀴 우아한 워킹. 양팔을 쭉 뻗어 하트 한번 그려줬더니 그쪽 역시 빵 터졌다.

 

벽면을 따라 평면으로 이동하던 시선을 움푹 집중시켜 버리는 둥그런 돔 지붕 자체가 만들어내는

화려하고 세련된 느낌에 더해 온통 화려한 금장이 구불구불거리며 우아한 파스텔톤의 벽면을

기어다니는 천장이라니. 이런 천장을 이고 지고 살아보는 팔자라는 것도 꽤나 괜찮았을 듯.


집 밖으로 두 팔과 두 다리가 삐쭉삐쭉 튀어나간다는 초가삼간이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런 집에 살아본 사람이나 할 법한 이야기. 마치 돈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만큼 돈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면서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말을 할 수 있듯이.



@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 깊숙한 곳,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단정하게 세워진 다소곳한 별궁.

내부의 벽면이 전후좌우, 윗면 모두 복잡하게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득하다. 창밖너머에서

그득하게 던져지는 햇살을 뚫고 창틀에 기대면 시퍼런 보스포러스 해협이 활짝 펼쳐진다.

날이 쌀쌀해지면 저 실내 스토브에서 불을 피웠던 걸 거다. 아니 근데, 저거 스토브가 맞는 건가.

그리고 밑에는 아마도 세면대..? 아니면 기도시간에 맞추어 발을 씻기 위한 곳인가..; 용도가

아리까리하지만 그림같은 아랍어 글자들과 금박이 단정하고 세련되게 입힌 모양새가 이쁘다.

가까이 들여다본 모자이크 타일의 섬세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양, 한 장의 타일 내에 구비구비

얽혀있는 문양들도 신기하지만, 그 타일들이 다닥다닥 붙으면서 이어지고 엮여지는 느낌이 굉장하다.

빛이 스미는 창틀 바닥면에도 빠짐없이 붙어있는 모자이크 타일들이 정교하다.

길게 누울 수 있는 빨간 의자가 긴 벽면을 따라 미리부터 길게 누워있었고, 돌아나오는 발걸음을

잡는 건 좀처럼 심심할 틈 없는 올록볼록한 철문의 문양들.

별궁에서 바다 쪽으로 면한 울타리 너머로 톡 튀어나온 조그마한 정자, 금빛 지붕이 반짝이는

곳에서 두 사람이 서면 꽉 차는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너머로는

외적을 침입이나 불청객의 접근을 막기 위한 돌담이 완고하게 버티고 섰고.

이렇게 햇살이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곳에서 긴 의자에 누워서 뻐끔뻐끔 시샤를 맛보며 나른하게

한나절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푹신푹신하고 탱탱하게 탄력을 유지하는 듯 해 보이는 쇼파가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 새것같은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둥근 돔 천장에서 무게를 잡고 돔을 지탱하는 무거운 추가 늘어뜨려져 있다. 건축학을 전공한다는

여행 친구로부터 듣기 전까지는 왜 저런 걸 늘어뜨렸을까 궁금했는데, 그림까지 그려주며 설명하던

그 친구의 열의 덕에 이해할 수 있었더랬다.

건물 가운데에 네 발로 버티고 선...이것은 뭘까. 향로? 터키에도 향을 피우는 전통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김새로 보자면 꽤나 그럴듯하게 생긴 향로인 거 같은 거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에 초를 꼽거나 물을 담아두었을까. 그다지 다른 용도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너무나도

분명히 '나는 향로에요'라고 외치는 듯한 외양.

궁궐 건물들 사이에서 발견한 조금은 외진, 그렇지만 까막 바닥돌들이 하얀 돌들과 어우러져

꽤나 이쁜 그림을 그려내던 길 하나가 눈에 들었다.

돌아나오던 길, 드문드문 비추던 햇살은 깍쟁이처럼 끝내 간만 보이다가 사그라들어 버렸고,

어두침침한 구름 사이에서 톱카프 궁전의 담회색 잿빛 색조가 조금은 무거워졌다.

궁전의 곧고 반듯한 포장도로 위에서 젖은 발을 끌며 걷는 여행객들, 그렇지만 이전에 이 길위를

걸었던 건 터키의 왕후장상, 더러는 말을 타고 지나기도 했으려나.

아무리 해도 이런 둥그렇고 완만한 돔 형태의 지붕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 어렵다. 그냥 눈으로만 잠깐 바라보고 있어도 눈알이 뱅글뱅글, 덩달아 머릿속도

뱅글뱅글 해서 왠지 갸냘픈 폐병환자처럼 풀썩 기절이라도 할 거 같은 거다.

궁전에서 거의 다 돌아나올 즈음, 마치 테마공원의 으리으리한 지붕처럼 양끝의 첨탑이 뾰족하니

깃발을 휘날리는 성문을 지나쳐 나오곤 돌아보았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며 함께 걸어주던 성벽 근처에선 더이상 아무런 살벌한 기운도, 예리한

금속물질들의 철컹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양이 새끼들 몇 마리가 지나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는. 저 녀석들은 고양이라기보다는, 마중냥이나 개냥이 정도.

이제 완전히 톱카프 궁전의 구역을 빠져나오는 길, 돌아나오는 길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더 선명히 기억을 남길 수 있었던 거 같았다. 눈앞에서 어른대는 파랗고 하얗던

모자이크 타일들이니, 살짝 뿌연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보스포러스 해협의 검푸른 파도라거나,

비를 맞으며 이리저리 거닐던 와중에 발견한 호젓하고 분위기 있던 짧은 골목길이라거나.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 옆으로 조금 걸으면 나타나는 지하저수조, 비잔틴시대에 지어졌다는 이 지하

구조물은 당대의 수도 시설이었다고 한다. 천오백년전의 구조물이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실제로 볼 만한 건 지하저수조를 떠받친 빼곡한 기둥들 중 주춧돌을 메두사

형상의 조각상 머리로 받쳐놓은 몇 개의 기둥들.

조명이 기둥마다 비치고는 있지만 대부분은 까만 먹장 아래에 숨어있는 지하 저수조,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처럼 웅얼웅얼 번진다. 물방울이 더러 심하게 떨어지는 곳에서는 아예

우산을 쓰고 가는 앞사람의 어깨가 이미 젖어있었다. 예레비탄 사라이, 터키어로 물에 잠긴 궁전이란

뜻이라더니 정말. 물 속을 걷는 기분이다.

일명 '눈물의 기둥'. 다른 기둥들이 아무런 장식없이 그저 까끌까끌한 표면을 가진 것과는 달리

이 기둥은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유난히도 물이 많이 흘러내리는 기둥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건지도 모르겠고, 저 문양 자체도 왠지 굵고 끈적한 눈물을 흘리는 눈알처럼 생기기도 했고.

이렇게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물들이 정화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걸 알고 일부러 기둥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은 것이라고 하던데, 이 '눈물의 기둥'은 워낙 물이 많이 흘러내려서인지 아님

처음부터 그렇게 다듬은 건지 굉장히 매끈하고 미끈미끈하다.

메두사의 머리 부분이 거꾸로 물구나무선채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사람들도 몰려있고, 동전들도

몰려있던 곳.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더이상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물들과 괴수들이 진지하게 믿어지지

않던 시기였다는 걸 반증하는 것 같다. 봐라, 메두사 머리와 옛 신전의 조각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느냐. 봐라, 그 때 진지하게 메두사를 무서워하던 건 신화와

실제를 구분 못하는 무지몽매함 때문이었을 뿐이란 말이다. 아마 그런 걸 웅변하고 싶던 거 아닐까.

그런 점에서는 메두사 머리를 백팔십도 거꾸로 돌리나 구십도만 틀어버리거나 거기서 거기다.

굉장히 부리부리하고 선명한 눈초리에, 온통 크고 두툼한 코와 입술, 머리의 컬까지 메두사는

비록 고개가 꺽였을지언정 여전히 풍기는 압박이 범상치 않다. 비록 비잔틴인들이 신화세계를

무시하고 청산한다는 의미로 신전을 부수고 메두사의 머리를 이렇게 다뤘지만, 의연하려는

겉표정과는 달리 은근히 속으로 쫄지 않았을까. 마치 오늘날 성황당이니 부적이니 따위에

코웃음치면서도 속으로는 괜히 거시기하듯이.

이 곳에 저장된 물이 깨끗해서 마실 수 있는 정도인지 아닌지를 바로 알아보기 위해 비잔틴인들은

이렇게 물고기를 길렀다고 한다. 지금도 저 아래에 온통 꼬물대는 물고기들은, 어쩌면 그때부터

천오백년동안 이곳에서 자라온 물고기 일족의 후예 아닐까. 천오백년이면, 저 물고기들이 환경에

적응을 거듭하여 결국에 눈이 퇴화하기에 짧은 시간이었을까.

지상으로 다시 올라왔다. '메두사'란 이름의 까페가 바로 옆에 있었다. 이전 시대에 무서웠던 걸

괜시리 툭툭 치면서 자신의 당당함이나 용감함을 과시하는 건 비잔틴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메두사가 날뛰던 시절의 공포가 거의 완전히 무독해진 채 지하궁전보다도 훨씬 아래에 파묻힌

오늘날에는, 아마도 과학 이전의 비합리적 믿음이나 광신도적 신앙,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나

마음가짐, 체벌도 교육의 일종이라 여기는 마음가짐 따위를 지하궁전에 처박은 채 의연한 척

해야 하지 않을까.





드문드문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성마르게 벌써 환히 밝혀진 네온사인들, 그리고 차분하지만 굵게

실루엣을 각인하는 예니 사원의 미나렛 두 개.

유람선을 타러 가는 길이었다. 비가 드문드문 오는지라 배를 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선착장 역시

생각보다 한적하더라는.

이스탄불을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세조각내는 건 강이 아닌 바다, 바다 건너 보이는

굵직한 탑은 이스탄불의 전경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 중 하나인 갈라타 타워.

고등어케밥을 파는 배일 텐데, 시간이 늦어서인지 장사하던 사람들은 어디 가고 불꺼진 빈 배만 남았다.

간판 왼쪽에 고등어 사진도 붙어있었다. 바게트빵 사이에 구운 고등어를 넣어주는 고등어케밥은 의외로

담백하고 맛있었는데, 비리지도 않고.

예니 사원 앞으로 이중삼중으로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 빨강색의 터키 국기가 선명하다.

갈라타 대교를 통과하기 직전, 대교 옆의 계단 통로에 그려진 그래피티들이 뭔가 인상적이었다.

저 눈알이 줄에 걸린 채 튕겨오른 듯한 그림은 아무래도 '낚시바늘 주의' 정도의 의미 아닐까, 여기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이 많으니 휙 뒤로 낚싯대를 제낄 때 뒷사람 눈에 낚시바늘 꽂히지 않도록

주의하란 뜻 정도 말이다.

커다란 호화 크루즈선들, 저 정도 사이즈의 배면 안에는 슬롯머신이라도 설치되어 있지 않을까.

주로 유럽에서 단체 관광객들이 올 때 저런 크루즈를 이용한다던데 장기간의 배여행도 재미있을 듯.

하늘은 급격히 사위어가고, 희미해서 잘 보이지도 않던 노란 가로등이 점점 강렬하게 불빛을 내쏘았다.

갈라타 탑이 언덕배기를 따라 조금씩 키가 커지는 건물들 사이에서 단연 우뚝 솟은 채 노랑색 실루엣을

뚜렷이 새긴 채 길 잃은 새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미나렛 네 개를 가진 성 소피아, 그리고 미나렛 여섯 개를 삐쭉 세워올린 블루 모스크. 저렇게 열 개의

첨탑이 한눈에 들어오니 무슨 로켓 기지라도 보고 있는 기분이다.

셔터를 누르는 사이의 그 짧은 시간에도 하늘은 그 색깔을 휙휙 잘도 바꾸며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물색처럼 맑고 가벼운 느낌의 하늘이었는데 조금씩 어둡고 무거워지는 느낌, 그렇게 두 가지 얼굴을

한 대기가 서로 뒤엉켜 사방에서 멱살잡이를 하고 있는 사이 크루즈선에도 조그마한 어선에도 갈라타

타워에도 평범한 건물에도 불빛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조금씩 어둠이 짙게 깔리면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사진을 찍기가 점점 어려워졌지만 보스포러스 해협

양 쪽으로 드러난 풍경들이 차마 혼자 보기 아까운 것들이었다. 온통 불빛으로 휘감아 정신없이 화려한

건 아니었지만 적절한 수준으로 특정 건물에만 임팩트를 준 조명들이 오히려 세련되어 보였달까.

돌마바흐체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은 톱카프 궁전 대신에 19세기쯤 유럽의 양식을 많이 차용하여

새롭게 지은 궁전이라고 얼핏 기억한다. 다른 것보다 바다쪽 정원에서 조그마한 항구랄까 배를

정박할 수 있는 접안시설이 있어서 바로 선박을 궁전에 이어붙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었다. 그렇게

돌마바흐체를 지나 흑해 쪽으로 가다가 다시 빽, 막연하게 들떠있던 어슴푸레함 대신 완연한 어둠이

내린 이스탄불을 바라보았다.




2004년, 휴가때마다 못을 밟아가며 노가다 현장에서 모았던 돈을 바리바리 싸짊어지고 제대하곤 사흘만에

훌쩍. 터키와 이집트로 향했었다. 왜 하필 그 나라들을 가겠다고 맘먹었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덕분에 제대하곤 군대에서 공찬 이야기밖에 할 게 없는 '복학생' 껍데기 따위는 한번도 뒤집어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만큼 강렬하고 그만큼 행복했던 터키의 기억, 이번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디지털 모드로

6년만에 다시.

아낌없이 사진을 찍어주리라 다짐했건만,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새벽에 나와 아침 9시쯤 공항 도착하니

이곳은 일주일 째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10월경이 터키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던데 아마 세계적 기상이변의 영향 아닐까, 창밖으로 빗발이 계속 빗금을 긋고 있었다.

톱카프 궁전 들어서는 길, 아침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여행객들이 참 많았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사방에서

우산도 팔고 우의도 팔고. 저렇게 파란색 우의를 단체로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크루즈를 타고

놀러온 유럽인들이라 했다. 갈라타항구에 커다란 크루즈선이 정박하면 며칠동안 이스탄불 곳곳에 저들이

출몰하며 혼잡함을 더한다고.

티켓을 끊고 들어서는 곳부터 높은 천장, 금칠된 장식들, 묵직한 대리석의 위용.

이 꼬맹이들은 터키 어디선가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온 걸까. 선생님인 듯한 분이 한 군데로 모아놓고

설명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곳을 보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의 분방함은 어디나 똑같다.

투르크메니스탄의 흙먼지 풀풀 나는 건조한 분위기에 익숙했다가 초록빛 가득한 궁전 안을 둘러보니 눈이

다 싱그러워지는 듯 했다. 더구나 비까지 촉촉하게 내려주는 이스탄불의 아침이다.

궁전 곳곳에 돋을새김으로 그려진 문자들은 아랍어, 아마도 코란의 구절들 아닐까 싶지만 저건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건지 여전히 감도 안 잡힌다.

화려한 문양과 금박들로 뒤덮인 궁전에서 이렇게 담백한 벽면 찾기도 쉽지 않은 지라 오히려 더 눈에 띄던

하얗고 소박한 벽면. 게다가 활짝 열린 창문간에 놓인 조그마한 꽃화분까지. 왠지 조그마한 공주님이라도

살고 있을 거 같은 귀여운 방이 창문 너머에 있을 거 같다.

톱카프 궁전에서 꼭 보아야 할 곳 두 군데를 꼽으라면 왕궁 내 여자들이 거처하던 하렘, 그리고 이곳 보석방.

200캐럿이던가 굉장히 큰 다이아몬드를 위시해서 투르크 왕조가 비장하고 있던 보석류와 호화로운 장신구,

황금칼 같은 것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이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색감이 참 좋다. 갓 구운 빵의 노릇노릇하고 먹음직스런 빛깔 같기도 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커피크림 같기도 하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세워진 성곽이 왕궁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여기뿐 아니라 이스탄불 시내의 근처

해안가에는 오래전 세워진 성곽이 무너지거나 유실되지 않고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궁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꽤나 불편해보이는 돌의자 발견. 왕이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데, 저렇게 딱딱한 의자에 바로 앉히진 않았겠지 설마. 십분만 앉아있어도 엉덩이가

시리고 욱신거릴 거 같다는.

독특한 형태의 격자가 들어있는 난간 아래로 졸졸졸, 낙수물이 흘러내린다.

네모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창살에 송글송글 맺힌 빗방울들.

좌우대칭이라거나 정연한 질서가 있지 않아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모자이크가 벽면 가득, 아마도

그때의 미감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던 것일까. 딱히 좌우가 대칭되어야 한다거나 똑같은 문양이 연속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던 거 같다. 그런 대칭미나 연속미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톱카프

궁전의 모자이크.

궁전 내에는 은근히 앉아 쉴 만한 곳이 숨어 있었다. 애초 사람을 앉히려고 저렇게 툭 튀어나온 모양새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궁전 안을 배회하다 지친 다리를 쉬기에는 안성맞춤. 이미 자리잡고서 느긋이

쉬고 계신 어느 풍채좋은 유러피안 할아버지.



베르사유 궁전도 멋지고 중간중간 박혀있는 별궁들도 이쁘지만,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만화책 제목처럼 그

잘 다듬어진 정원이 가장 볼 만한 거 같다. 기하학적인 구조를 감안하고 좌우의 균형을 감안해 다듬어진 정원.

이런 광대한 정원을 돌아보려면 걸어서야 택도 없는 거고, 미니 트레인이던 뭐던 잡아 타야 하는 거다.

게다가 중간중간엔 사람들 발길도 뜸하고 폐쇄된 구역이 있어서, 나처럼 길 잘 잃는 사람은 자칫 어딘가 산속에

홀로 버려진 느낌으로 삼십분쯤 패닉상태에 빠져 사방에 대고 '헬프 미'를 외치기도 하는 거다.;

사람 하나 없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날씨는 어둑어둑해지고 추워지긴 하고, 사방으로 들뛰어보아도 대체

어디로 가야 베르사유 궁전이 나타날지 감도 안 잡히고, 무슨 덫에 갇힌 건 아닌지 계속 같은 곳만 돌고 있고.

길조차 어느 순간 끊어져 발목을 잡아먹는 높이로 잡풀떼기가 자라나 있단 걸 느끼면 문득 두려워지는 거다.

패닉 상태로 거의 울먹울먹한 지경에 이르러 숨이 턱에 차도록 한길로 달리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마주친

너무나도 한가로운 풍경. 저 아저씨는 내가 미쳤거나 누군가에 쫓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어딘가로부터 여기로 들어온 길, 대체 난 어딜 헤맸던 것일까. 아무리 지도를 봐도 각은 안 잡히고, 어쩜

18세기 어디메로 이어지는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그 비밀의 문을 들어섰다 다시 나온 건지도 모른다.

누구도 아니라고, 혹은 맞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순간 하나를 지나친 셈인 거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축축하게 흘러내린 머리도 좀 털고, 옷도 좀 털고. 잘못했음 베르사유에서 불귀의 객이

될 뻔 했다고, 또 인생의 위기 하나 넘겼다고 스스로 다독다독. 에구 대견해라.

벅찬 마음에 불을 질렀던 건 그렇게 삼십분 헤매다가 사람 사는 곳으로 다시 나와 두번째 만난 분이 한국말을

하시는 한국분이셨다는. 방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노라며 흥분흥분하다가 기쁜 맘을 몸으로 표현.

연못에서 노니는 오리들이야 날개가 있어서 여차하면 푸드득 날아오르면 끝이라지만 나야 어디 그런가.

좀 차분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살아나왔다는 기쁨에 급방긋. 여긴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반인이 사는 것을

체험해보겠다며 만들었던 농사짓기 테마파크,

옆에는 포도농장에서 품종별로 제법 기르고 있었다. 여긴 멜롯.

그러다가 마주친 나무들, 왠지 동양식 분재를 한게 아닐까 싶게 다복솔이 나뭇가지마다 얹혔다ㅏ.

그 옆에선 아슬아슬한 가지 하나가 기어이 하늘을 향해 잎사귀를 틔웠고.

베르사유 궁전까지 내처 걸으면서,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을 실감했다. 그래도 화사하기만 한 꽃송이들.

돌아나오던 길, 이렇게 베르사유 궁전에서 근 여덟시간 방랑하며 생명이 경각에 달했던 위기 한번을 무사히

극복하고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는.





베르사유 궁전 중 가장 화려하다는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전 2층에서 내다본 앞뜰의 모습. 반듯하게 각잡힌 연못과 정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14세가 쓰던 침실, 천장에서 길게 내려오는 커튼도 인상적이지만 생각보다 작은 침대 사이즈에도 살짝

놀랐다. 눈파랗고 머리노란 '색목인'들은 모두 몸집이 크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 사실 프랑스인들은 그리

크지 않은 사람들이다.

빗방울이 흩뿌리긴 하지만 화려한 정원 꽃밭의 색감과 조형미에 구질구질함조차 사라지는 느낌.

하악하악, 당대의 '요부' 마리 앙투아네트가 누웠던 침대. 국가간의 정략결혼으로 루이 14세에 '팔려와선'

앙시앙레짐의 마지막 한숨을 몰아쉬곤 프랑스대혁명을 맞아 단두대 위에 섰던 그녀. '요부'라기엔 모든 체제상

에러와 문제점들을 그녀 개인에게 몰아세우는 표현같고, 그저 꿈틀거리는 역사의 피해자랄까.

침실 뒤로 나있는 조그만 저 문을 통해 민중들이 궐기하여 궁을 에워쌌을 때 탈출을 기도했다고 한다. 물론

도망가다가 잡혀서 그들의 화만 더욱 돋운 셈이 되어 버렸지만. 빵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다는 백성들의 하소연에

빵이 없음 케잌을 먹으라 했던가, 그녀는 태생부터 일반인과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있던 고귀한 신분.

신분제가 살아있던 시절엔 딱히 화낼 것도 없는 일이긴 하다, 신분제 자체에 대한 불만이 없다면.

그녀의 방에 놓여있는 그녀 자신의 흉상. 도도한 왕비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는 표정.

어느 벽엔가 그려져 있던 나폴레옹과 그의 아내 조세핀의 대관식. 교황을 제끼고 직접 왕비의 관을 씌우던

나폴레옹의 모습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뭔가 테마전을 벌이는 듯 주렁주렁 매달렸던 빨간 하트. 여전히 미궁 속에 남겨진 저 하트의

정체. 누군가의 Heartbeat를 들려주려는 심장이었을까.

베르사유 궁전은 굉장히 넓어서, 안에서 이런 미니 트레인이 다닌다. 넓은 정원 곳곳에 산재해 있는 조그마한

부속 건물들과 '마리 앙투아네트 전용 농민체험 테마파크', 뭐 요런 것들도 있던 거다.

시간표와 노선도.

양털이 누덕누덕한 양떼들이 무더기로 방목되고 있던 한쪽 풀밭을 지나,

도착한 그랜드 트리아논(Grand Trianon). 루이 14세의 여름별장으로 쓰인 곳이다. 핑크빛 대리석이 화사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바람이 숭숭 통해서 여름에도 굉장히 시원할 듯한 긴 회랑에서 내다보는 정원의 풍경이 멋졌다.

좁고 길어 보이지만 은근히 넓으면서 길었던 회랑. 대리석에서 시원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탁트인 정경. 고풍스런 창문 걸쇠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지금이나 18, 9세기나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

The Grand Trianon을 요모조모 소개해둔 브로셔.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 전체를 소개해둔 브로셔. 마리 앙투아네트 참..어쩐지 병약해 보일만큼 하얗고

여리여리하게 생겼다. 정원이 저렇게 큰데 좀 달리기도 하고 삼림욕도 하고 그러시지 원. 맨날 케잌만 먹은 거다.




파리에서 베르사유 가는 법, 뭔가 여기 적힌 코스가 가장 싸게 먹히는 코스랬다.

이런 표딱지를 썼었는데, 지금은 또 어떨지 확인할 수 없으니 모르겠지만. 혹시 도움이 되려나 싶어서.

한적한 전철 역, 플랫폼 정지선에 맞추어 전철을 기다리는 파리지앵.

파리 외곽의 주택가인 듯. 전철 역 너머로 저런 풍경이 보이는 곳은 서울에도 많다. 국철 구간이라거나.

신기한 2층짜리 전철.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텅텅 비었던 전철 내부.

베르사유에 도착.

공사 중인 곳, 그래서 폐쇄된 구간이 조금 있어서 살짝 실망했지만, 사실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을 이용했던 프랑스 왕조의 복잡한 가계도.

궁전 안엔 알록달록 각기 다른 색으로 꾸며진 방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굉장히 멋진 색감.

베르사유 궁전의 창밖으로 보이는 프랑스식 정원. 빗발이 드문드문 흩뿌리는 흐린 날씨였지만 꽃밭엔 꽃이 가득.
이 곳에서 루이 14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던가. 앞에는 화려한 파이프오르간이 보인다.


델리에서 약 200킬로 떨어진 아그라에 도착, 티켓 오피스 앞에 섰다. 약 200킬로면 사실 한국에서야 두시간임

주파할 수 있는 거리지만 여기 기준으로는 네시간 반 정도. 안 그래도 전날의 숙취가 고스란히 누적된 상황에서

멀미 기운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도 티켓을 받아드니 없던 힘도 불끈 생겨나서, 정신차리고 돌아보기 시작. 티켓 뒷면의 도장은 타지마할

티켓을 사고 아그라의 다른 네 개 유적을 돌아보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표시라는데, 살짝 빵꾸가 뚫려있는

AGF, 아그라 포트만 돌아볼 수 있었다.

매표소 옆에 붙어있는 노천 까페/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길, 기둥마다 그려진 소박하고 단순한 그림들이 눈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매표소 건물 입구 위에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던 코끼리, 비슈누상. 굳럭을 상징하는 시바신의

화신 중 하나라는 비슈누다.

매표소에서 타지마할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 약 1킬로 정도 걸리는 그 길을 걸어서 가는 방법이 하나, 다른

하나는 전기 자동차를 이용해서 가는 거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타지마할의 보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실은 몇년정도 비공개로 쉬게 하라는 권고를 받을 정도였던지라 도입된 전기 자동차라고.

인도의 정정은 사실 그리 확립된 편은 아니다. 작년에도 테러가 있었고, 카슈미르 지방을 둘러싼 파키스탄과의

알력이라거나 분리주의자들의 격한 움직임도 유의할 대목. 타지마할까지 가는 길은 계속 이런 체크포인트와

장벽들을 넘어서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여유있게, 쓰레기통 깊숙이 얼굴을 처박고 먹을 거리를 찾는 소 한마리.

길 끝에서 타지마할의 입구를 만났다. 적색 벽돌로 매끈하게 가다듬어진 저 성벽 너머엔 타지마할이 있다.

인도 날씨는 꽤나 후텁지근할 거라 생각했지만 델리나 아그라 지역은 사실 1월엔 그다지 기온이 높진

않은 편이다. 다소 쌀쌀한 봄의 아침날씨정도랄까. 그럼에도 저렇게 댓바람부터 길거리에 사지를 뻗고

누운, 그야말로 개팔자 상팔자의 강아지들. 

역시나 입구 옆에는 소총을 둘러멘 경비원들,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예 벽돌로 저렇게 진지까지 구축해

놓았을 정도로, 테러의 위협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현실로 체감하고 있나보다.

마법의 숲을 지나 늪을 건너, 금속탐지기와 거친 손놀림의 스캐너를 거치면 타지마할 입성.

난 타지마할에 들어가면 바로 새하얀 그 궁전이 나타날 줄 알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기대를 배신하고,

쭉 이어지는 테라스와 붉은빛 벽돌담. 이것도 이쁘지만 난 얼른 타지마할이 보고 싶을 뿐이라구~ 생각하다가

사실 타지마할이 뭔지도 제대로 안 알아보고 덥썩 여기까지 왔음을 깨달았다.

저기가 타지마할로 들어서는 입구. 타지마할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영향이 혼합된 방식으로 지어진 사원으로,

익히 알려졌든 '타지Taj'라는 왕비를 위해 바쳐진 사후궁전인 셈이다. 현지어로는 '따즈마할'이랄까, 좀 다르게

발음하는 것 같던데.

외국인 여행자들이 쉼없이 들고 나고, 그 와중에 두껍게 무장한 병사들은 살벌한 쇠막대기들을 들고 발소리

척척 맞추어 사방을 순시하고 있었다.
 
정확한 좌우대칭이 되도록 힘썼다는 이야기, 힌두교 사원들이 엄격하다 싶을 정도로 좌우대칭 형태에 집착한

것처럼 타지마할 경내의 건물들 역시 마찬가지 맥락인 거다.

건물 안을 지나던 길, 어둑어둑한 실내에서 문득 발견한 창문 하나, 쏟아지던 햇살.



생각보다 많이 지쳤던 거 같다. 계속 죽은 듯이 자다가 루밀리성이 얼핏 보일 때쯤 잠시 정신차렸다가, 다시

이스탄불 오토가르에 올 때까지 전혀 대비없이 자버렸다. 셀축(Celcuk)-혹은 에페스(Efes)-에서부터 12시간

내리 달려 이스탄불까지. 버스들이 전부 껍데기는 벤츠인데 알맹이는 그냥 시골버스다. 차냄새 쿠리쿠리한. 

메트로 찾아서 악사라이까지 왔더니 또 친숙한 삐끼 아저씨를 한 명 달아버리고, 걍 주절주절 계속 달고

다니다가 비오는 걸 기화로 걍 떼내버렸지만 이젠 미안하지도 않다.


비가 오는 이스탄불은, 공기조차 달콤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어느 입구..저 너머엔 황금빛 응가통이 있었던 듯 하다.>

체크인하며 Shit이라 내뱉는 서양아가씨에 동감하며 짐풀곤 바로 박물관으로. 모자가, 알고 보니 용도가

디게 다양하다. 우산으로도 쓸 수 있었다. 소피아라는 덴마크 아가씨 만나서 말 좀 섞다가 박물관의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이랑 최초의 평화조약을 함께 보고...또...여기 와서 많이 멍청해졌음을 느낀다, 들으면 바로

까먹으니. 여튼 몇 가지 멋졌던 것들을 기억하고 숙소에서 인터넷에서 좀 썼다.

<돌마바흐체의 후원이던가, 흑해에 바로 면한 이 뒤뜰에서 맞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빗물인지 바닷물인지 사방에 비산되던 촉촉한 물방울들.>


동양호텔은 사람도 넘 많고-밖에 없고-인터넷이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나온단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국같이 익숙하고 둔감한 것이랄까, T4 라인 타고 돌마바흐체 가는데 현지 유학생을 만났다. 지나치게 친절하고

치근덕대는 터키 남자들때문에, 여자끼리 여행하기엔 참 안 좋은 곳이라는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하기도 하고, 터키에서 공부한다는 그녀의 열정에 감탄하기도 하고.

돌마바흐체는 눈이 좀 편했달까. 대략 눈으로 좇으며 걸어다닐만한 정도의 화려함. 그 음양감과 생생한 조각의

흔적들이 모두 그림이라니. 쳇, 짭퉁이다. 결국 울룩불룩한 게 아니라 평면이란 말이지. 껌딱지처럼.
일단의 패키지 여행객을 만났는데, 가이드가 정말 별로였다. 전혀 자신의 일에 열의가 안 느껴진달까. 그냥, 그래

한번 훑어봐라~ 라는 식의 싸늘한 표정과 건조한 말투, 식은 눈빛. 시간과 정신이 담긴 문화재를 설명하는 일에,

비록 남의 나라 것이라 여겨서 그럴지 몰라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정말 별로였다. 이스탄불 왔더니 역시

한국인이 많다. 가이드의 째려보는 눈빛을 느끼면서도 그의 설명을 조금조금 귀동냥하다가, 배낭여행객은 절로

가라고 하도 눈치주며 구박하는 통에 걍 니들끼리 놀아라~ 속으로 그러고 말았다.

탁심까지. 갈라타탑까지. 갈라타대교까지 내처 걸었다. 명동같은 거리에서 첨으로 가이드북에 나왔던 음식점을

찾아 맛을 보기도 했고, 구시가에서 잠시 길을 잃고 버벅거렸는데 아마도 그건 그 직전 예니사원서 만났던

적반하장의 할배 탓일 거다. 무지 친절한 척하다가 갑자기 삐져버리고. 아직 영어로 싸우는 건, 혹은 따지는 건

잘 못하겠다. 그저 착하고 모범적인 영어만 배워왔으니 원. 그림도 신통찮더만, 맘껏 구경하래서 옆에서

그림그리는 거 구경하고 한점 두점 꺼내서 보여주는 거 잠자코 구경했다가 갈랬더니, 그림 하나 안산다고 난리...

걍 말 안통하는 사람한테는 그저 미안하다고 하고 치워야겠다.


일요일이어서 원래 문을 안 연 거였는지, 아님 갑작스레 8시가 넘으면서 어두워진 것에 놀란 건지, 좁은 시커먼

골목에 인적도 없고 아무 생명의 기운도 없고, 아잔 소리가 괴기스럽게 골목을 뒤흔들더닌 길가에 널린 고양이들이

음흉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헤매도 대로는 커녕 사람 한 명 안 보이는데 덜컥 쫄아서 어느순간 뛰기 시작했는데,

문득 아야소피아의 어여쁜 미나렛이 눈앞에 서있는 모습에 맥이 탁 놓였다.

무슨 페스티발 같은 게 오늘부터 아야소피아 앞 광장서 있었나보다. 우리네 장터같이 구멍가게들이 열리고,

경찰들이 분주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좀 구경해주다가 영 지치고 목도 마르고 다리도 아프고. 오렌지를 까먹고

싶단 생각이 불쑥 들었는데, 오렌지주스말고 생 오렌지는 절대 안 판다는 싸가지 아저씨에서, 여섯개에 오천원을

부르는 사기꾼식끼, 그런 고난과 역경 끝에 겨우 6개를 1$에 손에 넣었다. 어찌나 기쁘던지, 공연을 보며 오렌지를

까먹겠다던 원래 생각과는 달리 공연은 보는 둥 마는 둥 계단에 앉아 순식간에 다 까먹고 숙소로 들어와버렸다.





2층 드농관

'사모트라케의 니케'. 이 천사는 땅위에 막 내려앉은 걸까, 아니면 막 떠나려는 걸까. 헬레니즘 조각 중 손꼽히는 걸작이라는 이 조각상은 명성에 맞게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밀로의 비너스 역시 넉넉한 공간을 확보한 채 독보적으로 우뚝 선 채 사람들에 포위당해 있었는데, 마찬가지다.

피사체로서 니케상과 적당한 거리를 격한 채 둥그렇게 포위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카메라로 기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살짝 든 생각..니케의 조각상이나 밀로의 비너스 모두, 그 오랜 명성에서 기인한 후광효과라거나, 혹은 전시 방식에 따른 효과, 그리고 정말 미적으로 작품 자체에서 우러나는 효과를 구분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이미 일련의 회로를 따라 미적감각이 유인되고 승인되고, 또 어떠한 감동을 느껴야 할지도 정형화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삐딱한 딴지를 걸고 싶었다. 과거의 가치를 전승하고 위계를 공고히 하는 박물관의 디스플레이 기법, 혹은 필연적인 보수성.

이런 식으로 해 보면 어떨까. 다른 유물들, 예술품들과 차별화되지 않는 식으로 함께 전시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명작으로서의 명성을 갱신하고 가치를 재평가받을 수 있도록 해 보는 거다. 사람들이 단순히 '걸작'이니까 아름답다라거나 뛰어나다라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도록. 스스로 그걸 발견해 내고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도록.

물론 이 작품이 다른 것들에 비해 달라보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별히 섬세하고도 자연스러운 저 옷자락의 율동감이라거나,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아름다운 몸을 가진 인간을 고대로 대리석으로 굳혀 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인체의 비례라거나,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어디로 떠나거나 혹은 막 어디로부터 떠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그 생생함. 힘있게 쭉쭉 뻗는 날개 역시 상상력의 소산이라기엔 너무도 그럴 듯 하게 리얼한데다가 묘한 느낌을 던진다.

사람들이 지쳐 간다. 사실 루브르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은 역시 2층 드농관에 있는 모나리자 등 회화와 3층 리슐리외, 쉴리관에 있는 프랑스 회화들일 텐데, 이들은 무엇을 보며 여기까지 와서 널부러진 걸까. 나 역시도 저기 한 구석에 앉아서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이 점차 뭉글뭉글 부풀고 있었지만 어차피 빈자리도 없다.

제리코가 그린 '메뒤즈호의 뗏목'같은 회화 대작들을 보며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나가다 보니 일종의 '정체 구간'에 들어섰다는 걸 느꼈다. 모나리자가 앞에 있다.

모나리자가 그다지 크지 않은 그림이란 건 알았지만, 저렇게 작은 그림인 줄은 몰랐다. 세로 77cm, 가로 53cm. 온통 모나리자를 위해 열린 공간에 사람들이 그득그득 몰려 있었다. 한걸음씩, 서둘지 않고 내딛으며 모나리자에게 눈싸움을 걸었다.

사람들을 뚫고 맨 앞까지 나아가 한참동안 요모조모 찬찬히 살폈다. 눈, 입술, 얼굴, 손, 좌우 높이가 살짝 다르다는 배경..뭔가 안개가 스멀스멀 신기한 느낌을 자아내는 기법 탓이라곤 하지만, 역시 신비로운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주위에 웅성웅성대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없다면, 좀더 깊이 그 느낌에 젖어들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그치만 굳이 내가 파리에서 봤던 것 중 가장 멋졌던 예술작품을 꼽으라면..역시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중인 모네의 '수련' 연작. ([파리여행] 빛과 바람, 시간에 희롱당하는 수련..오랑주리 미술관.)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의 기법도 신묘하긴 하고, 모델이 된 그녀/그의 웃음도 신비롭긴 하지만, 그냥 난 수련이 더 맘에 들었다.

이런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촛불 시위때 등장했던 '유모차 부대'의 어머니들의 이미지도 왠지 오버랩되었고-맥락이 동일하진 않고 역할 역시 다르다지만-, 가운데 여성의 단호하고 결연한 표정이 가슴을 흔들었다.

그런가 하면 이런 평화롭고도 달콤한 풍경..화환을 만들어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삼아 기대 쉬고 있는 아가씨에게 씌워주려는 남자. 여성의 분홍빛 뺨과 발뒤꿈치가 앙증맞다.

레오나르도의 또다른 그림, '두 명의 성녀와 아기 예수'.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이라는 논문에서 이 그림이 그의 성적인 배경이라거나 어릴 적의 기억, 보다 정확히는 어머니에 대한 금기된 욕망을 해소하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이 그림에서 발견된 '독수리'의 형체가 레오나르도가 종종 사로잡혔던 '독수리'의 환상이 반영된 것이라 말하며 이런저런 성적 욕망으로 읽어내는데, 저 그림 속 파란 옷자락이 바로 그 형체라 한다.
한참동안 그림 앞에 앉아 대체 어디에 독수리가 있는지 찾고 있을 때, 마침 옆에서도 유럽인 커플도 그 이야기를 하며 새를 찾고 있었다. 그들도 프로이트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 새를 찾아내려 하고 있었던 게다. 우리는 한동안 대체 새가 어디에 있을지, 머리가 어디고 꼬리가 어딘지 뚫어져라 그림을 바라보았었지만 결국 그들은 포기하고 모나리자에게 가버렸댔다. 난, 내가 찾은 저게 아닐까 싶은데..모르겠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어귀에서 바라본 루브르 궁전. 그 중에서도 팔레루아얄 뮤제 드 루브르 메트로 역과 인접한 리슐리외관. 사람드이 이제 조금씩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다들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다른 곳에 가서 파리의 야경을 감상할 생각이겠지. 난 이제 9시쯤까지만 3층 회화를 둘러보면 되니, 한결 여유로워졌다.

멀리 보이는 카루젤 개선문의 연한 핑크빛 대리석이 단정하고 따스한 느낌이다. 그림자가 잔뜩 길어진 저녁무렵.

3층 쉴리관

앗..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랬다. 이건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에 있던 도록에 포함되어 있던 그림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누나 또래라 생각하며 감상했었고, 조금 크고는 비슷한 나이대라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예기치 못하게 다시 만난 그녀는 이제 여동생이겠다 싶다. 하아....예술의 불멸성이란. (여전히 이 작품의 이름과 작가 명은 모르고 있다.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시길..ㅡㅡ;)

정말 발을 질질 끄는 수준이 되어 가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을 걷기 시작한 지 거의 8시간여..4층의 회화 중에는 익히 알고 있는 것들도 많았고,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대작들도 많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댈 기력이 쇠해가고 있었다. 사실 속으로는 얼른 다 보고 나가서 좀 쉬자, 란 느낌도 없지 않았고, 또 한켠으로는 좀만 더 버티고 여유롭게 보자..언제 또 루브르 오겠냐..란 오기도 있었고.

그 중 이 그림은 지친 발을 좀 오래 쉬게 할 만한 유인이 되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 파스텔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런지 색채가 부드러우면서 풍요한 느낌이 들고, 또 그러면서도 무지 세밀하고 섬세한 묘사를 해냈다는 점에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모델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루이 15세의 애첩이었고,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그녀는 당시 사교계의 여왕이었다고 한다. 그랬을 거 같다.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잃지 않았고, 정숙해 보이는 듯 하지만 일변해 요부스러움을 과시할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표정이다.(딱 내 이상형이다..ㅡㅡㆀ)

3층 리슐리외관에서는 루벤스의 대작들도 감상하며 파트라슈와 네로를 생각했고, 다른 고전파 화가들의 회화를 둘러보았다. 약간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지만 역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려면 오르세 미술관을 가야 한다는 말이 맞지 싶었다. 그리고 난 이제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보니 심각할 정도의 악취와 함께 거대한 물집이 생겨 있었다.

뭐...저렇게 아름다운 루브르 궁전의 야경을 앞에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이제 박물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고, 시간도 거의 9시에 육박해 가던 시간에 난 루브르 박물관 10시간 산책 대장정을 마칠 수 있었다. 아직 문이 닫히기 전까지 시간은 좀 남았고, 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을 다시 한번 찾아가 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으레 전시회 같은 곳에 가면 내가 취하는 코스가 그렇기도 하다. 우선 한번 쭈욱 둘러보고, 그다음엔 맘에 들었던 작품 몇 개를 찾아가 다시 한번 감상하는 것.

3층에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다시 만나고, 루벤스의 그림들을 다시 보고, 2층으로 내려오며 니케를 다시 만났다. 조금 사람이 적지 않을까 해서 모나리자를 만나러 갔더니 거긴 암만해도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빠질 생각이 없나 보다. 여전히 시끄럽고 웅성웅성 소리가 울려서 잠시 후에 나왔다. 소란스러움을 피해 제리코의 '메뒤즈호의 뗏목',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식', '나폴레옹 1세의 제관' 같은 것들을 다시 둘러보던 중, 박물관의 폐문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9시 반 루브르 OUT. 정말 지쳤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발에서 은은하게 떨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은 소슬한데 루브르의 야경은 왠지 눈물겹도록 따스해서, 왠지 미친듯이 센치해져서 순간 마음의 갈피를 잃었다.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그 공간의 넘치도록 풍요한 감성과 자극들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배가 차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없이 노틀담을 향해 걷다가 예술의 다리를 지나게 되었다. 사람들이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노는 걸 보고 있자니, 왠지 배도 고프고 가슴도 고프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완전 한국의 가을 날씨였고, 루브르를 나서며 순간 난 '가을'을 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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