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이곳에 존재했음을 실감하는 데에는 East Side Gallery과 The Wall Museum을 무엇보다 추천하고 싶지만,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 구역을 보려면 베를린 장벽 메모리얼을 둘러보는 것도 추천함직 하다.


앙상하고 얄포름한 콘크리트 장벽의 골간이 되었던 철근만 뾰족하니 남아있는 그 곳에는 과거 이 장벽을 넘기위해 애썼던 사람들의 순간들이 주변 건물 벽화로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인근의 불타버린 성당 자리에 새롭게 꾸며진 자연친화적인 공간에서는 이 곳에서 흩뿌려진 피와 희생에 대해 묵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미니멀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회상하거나 추억하는 듯 했다.



어느덧 3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역사, 뜯어낸 장벽을 둘러싼 울창한 초록빛 식물들의 생명력이 왕성하다.


메모리얼에 들어가면 실제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며 사람들의 이탈과 움직임을 막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내부까지 둘러보진 못했고 그저 바깥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



- 한국에서 즐기는 해외여행 1, 외국 분위기 물씬한 정원(윤성의)-

 


* 2016. 8. 16(화)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로그의 글 (엘레강스한 주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한려수도의 꽃 외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디오 전국일주 청취자 여러분. 한창 휴가철인 이맘때면 새로운 풍경과 경험을 찾아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들로 공항이 연일 북새통이라는 기사를 많이 보실 텐데요, 저는 이번 한주동안 청취자 여러분께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한 주 저와 함께 국내 곳곳에 숨어있는 외국 분위기 물씬한 여행지들을 돌아보시면서, 진부하다거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곳에 숨어있었던 낯섦 한조각, 설레임 한조각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오늘 먼저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곳은 외도 보타니아 해상공원입니다. 외도는 깨끗하고 푸른 남해 바다와 경관이 수려하기로 이름난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해상공원입니다. 동양의 하와이라는 별칭도 있다고 할 만큼 온난한 기후에 물이 풍부해 여러 이국적인 아열대 식물들이 가득한 작은 자연 공간에, 지중해의 어느 해안도시처럼 유럽 스타일로 공들여 꾸며진 건물과 조경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전부터 섬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한쪽 끝에 서면 다른 쪽 끝이 보이는 그런 조그마한 섬. 외도는 그 정도로 작지는 않아도, 불쑥 올라선 섬의 중앙부에선 섬의 가장자리가 닿을 듯 가깝게 보일만한 크기인지라 정원으로 꾸며진 섬 전체가 한눈에 보입니다. 그 너머 섬들이 가득한 남해바다가 희끄무레한 바다안개를 덮은 채 버티고 있었구요.

그렇다 보니 대략 한시간의 산책로는 그대로 섬의 외곽을 따라 한바퀴 도는 길입니다. 판판한 평지에 조성된 정원이 아니라 제법 오르내림이 있는 조그마한 언덕 같은 섬에 조성되어 있으니, 산책로를 걷는 재미도 더 큰 거 같았습니다. 더러는 잘 다듬어진 높은 야자수들로 울타리쳐진 길을 오르기도 하고, 아니면 야트막한 정원수들이 양쪽에 열지어 있는 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며 전체 섬을 내려보기도 하구요.

프랑스 식으로 네모반듯하게 잘 다듬어진 비너스 가든과 벤베누토 정원은 외도의 한복판, 그야말로 외도 정원의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중간중간에 놓인 이국적인 느낌의 벤치나 조각상들 역시 바닷바람에 씻기고 적당히 헐어보여서 오히려 더 맘에 들었습니다. 괜히 유럽이나 그리스식의 분위기를 흉내내느라 억지로 힘줬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제 외도 보타니아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이르렀달까요.

한바퀴 설렁설렁 돌아보고 선착장에 내려서기 직전, 외도의 마지막 포스트인 '외도 갤러리'에선 특히나 그곳에서 바라보는 바다쪽 풍경이 참 좋았습니다. 천장이 높아 바람이 숭숭 자유로이 드나드는 커다란 정자 같은 곳에 삼삼오오 앉아서는 바닷바람도 맞고, 멀찍이 바다에 시선을 던져둔 채 가만히 앉아있는 것. 바다랑 섬들이랑 사이좋게 어깨겯고선 남해의 풍경 덕분에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외도는 국내 유일의 해상농원으로, 놀랍게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섬이라고 합니다. 부부가 1969년부터 수십년간 지극정성으로 가꿔온 섬,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분들의 개인적인 취향과 안목을 살펴보는 재미도 각별하지만 그분들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오랜 세월 쏟아오신 노력도 잊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으면서 이런 독특하고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흔히 우리가 빠지기 쉬운 개발이냐 보존이냐, 라는 양극단 이외의 길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니까요. 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올해가 싱가폴이 건국한지 50년이어선지 거리 곳곳에서 'SG50'이라는 로고와 함께 각종 현수막들을 볼 수가 있다.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에서 놀다가 나와보니 바로 옆에 저런 현수막으로 온통 시선을 끌고 있는 '싱가폴 시티 갤러리'


라는 곳이 있길래 덥썩 들어가봤다.


뭔가 큰 기대는 없이 그냥 싱가폴에서 운영하는 관제 느낌 물씬한 도시 홍보관이겠거니 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이렇게 도시에 대한 조감이 가능한 모형이라거나 곳곳에서 찍은 이쁜 사진들, 싱가폴이 어떤 곳인지 등등


뻔하디 뻔한 구성은 피할 수 없었지만, 도시국가로서의 싱가포리안들이 가진 고민이 얼마나 깊고 진지한지 보여줬달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한된 도시부지을 어떤 비율로 각각 녹색공간으로, 상업공간으로, 그리고 주거공간으로


할당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도시국가로 20%가량의 부지를 군시설에 할당하고 나머지와의 연계를 어떻게 이룰지에


대한 고민. 간척사업으로 땅을 넓히고 재개발로 초고층 빌딩을 세우는 등 가능한 효율적으로 땅을 사용하려는 고민.


그러다 보니 입체적으로 땅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들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나라나 지역에서도 유례가 없을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거다.


그리고 싱가폴 남단에 있었던 트레일 코스, 마운트 페이버 파크에서부터 주욱 이어지는 그 길을 따라 이렇게 


녹색으로 표시가 어김없이 되어 있는 것도 재미있었던 포인트. 



혹시 도시이자 국가이자 한개의 주로서 기능하고 있는 유별난 싱가폴의 도시계획이라거나 그 실행에 대해서


호기심이 인다면 한번 꼭 들러봐도 좋을 곳. 온갖 도면과 모형들, 그리고 게임 형태로 된 시청각 자료들은 덤이다.




 

홍콩에 가면 꼭 하루쯤을 할애해서 잔뜩 걸어보는 거리, 캣스트리트. 대략 소호거리와 만모우 사원이 있는 일대랄까.

 

이런 식으로 거리에까지 넘쳐나오는 중국의 전통 예술작품들이나 현대예술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들도 많고,

 

샵 하나를 둘러보는데 반나절이 훌쩍 넘어버리는 홈 인테리어 아이템샵인 '홈리스'도 있고.

 

 

 그리고 골목골목 재미있는 벽화와 풍경들을 숨기고 있기도 하다.

 

 

 

완탕면이라거나 이탈리안 레스토랑같은 이런저런 맛집들도 골목마다 숨기고 있고.

 

 

 만모우 사원에서 풍겨나오는 짙은 향내에 이끌려 사원 안을 둘러보기도 하고.

 

 이렇게 나선형으로 배배 꼬인 채 늘어뜨려진 향을 따라 시선을 뱅뱅 돌리다보면 왠지 어지러워져서 나오게 되는.

 

 

 

 특색있는 건물들, 그리고 건물 벽면을 꾸민 벽화와 디자인들.

 

그 풍경 속에서는 이렇게 모냥빠지게 입구에 찌그려 앉아있는 아이들조차 멋져 보인다.

 

 

그리고 과거 중국의 골동품들이라거나 모택동 시절의 공산당 유품들을 잔뜩 내걸고 있는 골목통까지.

 

재작년에 왔을 때는 여기서 새빨간 색으로 된 마오쩌둥의 어록집을 샀었는데, 영어와 중국어가 병기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사방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 제법 가파른 경사길들.

 

 

 

어느 집앞에 있던 우편함은 이렇게 파스텔톤으로 불규칙하게 배열된 게 꽤나 센스있다.

 

 

캣스트리트의 어느 길가를 지나다 뭔가가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와본 곳에는, 정색하고 있는 여자 얼굴이 그려진

 

오토바이 헤드라이트가 방긋거리고 있었다.

 

 

 

전주에서 차로 조금 이동해야 나타나는 오스 갤러리, 어느결에 사람들이 수두룩빽빽해진 전주 시내 말고 좀더 내밀한 곳을 원할 때.

 

 

봄에 오면 벚꽃이 만개해 있다는 길을 한참 꼬불꼬불 달리다보면 툭, 하고 나타나는 야트막한 건물. 갤러리 느낌이 벌써부터.

 

여리지만 섬세한 겨울볕, 그만큼 희뿌옇고 존재감없는 겨울 그림자.

 

귀여운 화장실 표시.

 

그리고 통유리로 시원하게 트인 바깥 풍경과 함께, 어느 푸릇한 봄철 이 곳을 담았을 사진 몇장이 겹쳐졌다.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용이 지키는 도시답게 건물들은 나즈막하면서도 나름의 운치와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류블랴나 성을 향한 오르막길, 사람이 채 오르기도 전에 양옆으로 어깨 부딪기며 열지어선 집들이 먼저 지쳤다.

 

 

 

류블랴나 구시가에 있는 성당, 그 벽면에 기대어선 (아마도) 대주교님과 성모상, 그리고 가운데의 성화.

 

벽공에 마련된 피에타상, 밤에도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조명을 내걸었다.

 

심지어 성당의 정문은 이렇게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돋을새김해둔 청동문이다.

 

 

 

류블랴나 구시가의 중심, 그리 크진 않지만 꼿꼿한 오벨리스크가 광장의 중심에서 하늘을 향해 뻗었다.

 

 

 

어느 갤러리였던가 박물관이었던가, 유서 깊어보이는 건물의 안마당으로 들어가서 발견한 류블랴나의 시내 지도.

 

그리고 다른 갤러리에서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이 한창이었다. 사진보다 전시공간이 더욱 눈에 들어오기는 또 처음이다.

 

 

광장의 바닥도 나름의 문양을 촘촘히 그려내고 있는 곳, 뭔가 아기자기하고 앙증맞은 느낌의 도시다.

 

 

 

좁은 골목길에 무심코 세워 놓았을 자전거조차도 왠지 그림이 되어 버리는 곳.

 

특별할 것 없는 허름한 건물 입구의 다닥다닥한 우편함에도 각기 개성이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고,

 

 

주렁주렁 매달린 신발들로 이곳이 쉽게 벗어나기 힘든 매력적인 곳임을 곳곳에서 과시하는 도시기도 하다.

 

 

 

아이고, 여긴 참..많은 사람들이 와서는 눌러앉고 말았나 보다.

 

류블랴나의 자그마한 구시가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골목도 구경하고, 이쪽에서 본 저쪽 모습, 저쪽에서 본 이쪽 모습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사이에 안 그래도 흐렸던 하늘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꺼뭇꺼뭇해지고 있었다.

 

 

 

 

 

모처럼 찾은 인사동, 길이 꽁꽁 얼어붙은 탓에 걷기도 힘들고 공기조차 차갑게 호흡기를 긁어내리며 들이마셔지는 느낌이라

 

가나아트스페이스니 무슨무슨 갤러리니 등등 눈에 띄는대로 일단 들어가서 체온을 보충, 그리고 설렁설렁 구경하다 다시 밖으로.

 

 

그러다 보니 이런 조각보 전시도 예기치 않게 구경하기도 하고, 생활한복이니 도자기니 사진전이니 등등, 예기치는 않았지만

 

예상했던 것만큼 쏠쏠한 재미가 있는 인사동 나들이가 되었다.

 

 쌈지길이 이렇게 내려다보이도록 높은 곳까지 한층한층 차근하게 구경하며 옆 건물의 갤러리를 돌아보기도 하고.

 

 기와지붕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풍경 너머로 질척한 뻘밭에서 이리저리 배회하는 사람들.

 

 새하얀 눈송이를 머리 위에 지고 있는 장독대 4인가족이 흘낏 훔쳐보는 쌈지길의 번다함과 퓨전스러움은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슬쩍 스며들듯 찾아온 조용한 까페. 아무래도 메인로드 양옆의 까페들이나 전통찻집은 늘 바글바글대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조용하고 나름 테이블간 거리도 아늑한 곳이 있었구나 싶다.

 

 

 

왠지 요새 크리스마스는 어영부영 지나버리는 느낌이지만 그즈음의 이런 장식들은 한철이라 더 이쁘게 느껴지는 거 같다.

 

 

 

 

그다지 길지 않은 하루 해가 그렇게 또 가고. 창 너머 비스듬한 옆집 지붕 위에는 에어콘 환풍기가 일렬로 늘어선 채

 

'홍콩'반점의 뿌연 형광등빛을 한겨울 얼어붙은 눈무더기처럼 이고지고 버텨낸다.

 

 

 

 

 

 

 

소호의 가로세로 바둑판같은 골목길들, 소호 거리라는 실감을 나게 해주는 건 건물밖으로 삐져나온 철제 계단들.

 

 

건물 밖으로 튀어나온 철제 계단, 필요에 따라 땅까지 늘어뜨리기도 하고 올려두기도 한다는 건 끝내 신기하다.

 

 

이래서 문화의 거리, 란 걸까 싶도록 구석구석 숨어있는 재미난 것들.

 

 

아마도 이건 지난 아큐파이 시위 때 붙여놓은 걸까.

건물들이 그럴 듯 하니 어떻게 찍어도 화보스러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막무가내로 그래피티같지도 않은 글씨들이 그려진 녹슨 철문조차 위에 붉은 크림 하나를 얹었다.

 

 

저 처자분 종아리의 그림은, 설마 타투는 아니리라 믿지만, 왠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서로 본체 만체 지날 뻔 했던 두 아저씨는 각자를 이끌고 앞서 가던 개 두마리가 얽히는 바람에 눈이 맞게 되고..

 

 

온통 촘촘하게 세워진 건물과 어디로던 통할 거 같은 철제 계단이 미로처럼 얽힌 속에서 괜히 여행을 떠날 때처럼 설레는 거다.

 

 

덥다 싶으면 무턱대로 가까운 갤러리로 들어가 전시된 작품들도 구경하고 땀도 식히고.

 

 

여전히 저런 스티커도 눈에 띈다. 9/11 is a lie. 그만큼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다는 반증일 텐데,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캠퍼 샵의 시원시원한 디스플레이.

 

 

소호도 예전같지 않다더니-예전이라 함은 이전에 여길 들렀던 2001년쯤-명품 샵들이 사방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도 여전히 멋진 샵들과 갤러리, 그리고 어디서든 털썩 가방과 카메라를 던져놓고 커피 한잔에

 

샌드위치 하나를 베어물고 싶게 만드는 까페나 레스토랑들이 즐비한 거리, 소호다.

 

 

 

 

 

 

가평에 있는 쁘띠프랑스, Petite France. '조그만, 작은, 이쁜' 프랑스라는 의미일 텐데 워낙 잘 알려져 있는 곳이고,

사진으로도 많이 담긴 이쁜 곳이니만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려니 이미 차들이 그득그득, 인도해 주는대로 길가에 차를 대고 매표소입구로. 아직 바람이 차갑다.

입구를 지나면 나타나는 이국적인 풍경. 파스텔톤의 벽면이나 따뜻한 색감의 기와들, 다양한 표정의 실루엣들이다.

자그마한 분수 광장을 둘러싼 노란 파라솔들, 그리고 다시 파라솔들을 에워싼 색색의 건물들. 그치만 위압적이진 않은.


빨간 제라늄꽃이 창틀에 놓인 건물 사이로 마을의 다른 건물 지붕들이 내려다 보인다.

겨우내 추위와 찬바람에 시달렸을 것들이 이른 봄볕을 찹찹찹 게걸스레 핥고 있다.

제법 복잡하게 이리저리 꼬인 계단들, 산토리니의 새하얀 계단형 건물들을 살짝 떠올리게 만드는.


아직은 누렇게 말라죽은 채인 풀밭이지만 조금만 더 날씨가 풀리고 따뜻해지면 꽃과 잔디가 융단처럼 깔릴 꽃밭.

갤러리 앞에는 벼룩시장이 열렸다. 도자기 인형들이나 접시가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노랑 우체통.

양철 주전자들이 띄엄띄엄 바닥에 늘어서 있는 폼이 불규칙하면서도 제법 느낌있다.

갤러리 안에 전시된 마리오네트 인형. 얼굴표정이나 옷감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굉장히 섬세하다. 툭 튀어나온 앞니까지.


마리오네트 인형들은 왜 이렇게 전부 인상적인 표정과 기괴한 외양을 갖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눈을 높이 맞추고 있다가 문득 바닥으로 내렸더니 왠 화관을 쓴 처자가 비둘기를 한마리 건네주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공간이 넓고 길다. 그 공간을 온통 꽉꽉 채운 프랑스 느낌 가득한 소품들과 장식품들.

프랑스를 상징하는 새, 프랑스의 국조는 수탉이란 걸 갤러리에서 새삼 실감했다. 온통 수탉을 형상화한 장식품들.




근데 한국의 나라새, 한국의 국조는 뭐더라. 까치였던가 싶긴 한데 확신이 없어서 검색해보니 역시 '까치'가 맞단다.

갤러리를 나와 조그마한 프랑스 마을 같은 쁘띠프랑스 내부를 걷는데 딱 나타난 사진찍기 좋은 곳.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를 나란히 내려놓고 카메라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쁘띠프랑스의 전경, 그리고 청평호수까지 멀리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오르내리는 계단이 워낙 좁단 게 에러지만.

이렇게 쁘띠 프랑스의 색색 빛깔의 이쁜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거나,

청평댐이 버티고 막아서서 바다처럼 넓은 청평호수와 어른거리는 산그림자까지도 보이는 전망이니 올라갈 만 하다.


야생화 산책길을 지나 '사랑의 종탑'으로. 어린 왕자의 스토리에서 '사랑'과 관련한 경구들은 무수히 뽑아낼 수 있겠지만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을 오르며 사랑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이르고는 비로소 종에 다다른다. 대앵~ 대앵~

3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는 유럽동화 인형극축제, 평소에 하던 샹송공연이니 마임쇼에 더해서 인형극도

열리고 목각인형 콘서트 같은 것도 열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후가 무르익을수록 점점 늘어나는 꼬마손님들.

안내 포스터에 나왔던 그 여자분이 그대로 나와서 샹송을 부르는 공연. 조금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저씨들이

문득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를 치더니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만 하는 수준의 샹송 가수를 받침해주던 악기는 기타, 그리고

약 백오십년 전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전통악기, 그리고 아코디언 한대.

따님의 초등학교 시절 아코디언을 들고 와 연주하시던 이 분이 활을 이용해서 켜는 방식의 프랑스 악기, 무려

한국에 한대밖에 없다는 이 악기도 연주하셨다. 건반이 감겨있는 모자라거나 어깨의 금색술이 인상적인 분.

 

쁘띠프랑스가 워낙 잘 알려진 명소가 된 데에는 장소 자체가 워낙 이쁘게 잘 꾸며진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몇몇

방송에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얻은 것 같기도 하다. 베토벤바이러스라거나 시크릿가든, 러닝맨까지.

특히 '베토벤 바이러스'의 경우는 메인촬영지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서 전출연자들이 사인도 남겨놓고 세트장의

배치도 고스란히 간직해두었다고 한다. 뭐, '베토벤바이러스'던 '시크릿가든'이던 드라마를 안 봤으니 별 감흥은 없지만.



그 옆에 바로 인접해 있는 건물은 '프랑스 전통주택관'. 근 이백년 가까이 된 프랑스의 고택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전시관이라고 하는데, 주름살처럼 깊이 골이 패인 기둥 하나만 봐도 이 집의 범상치않은 연륜이 느껴진다.

천사가 호롱불을 들고 날아다니는 천장에는 슬쩍 단발 비행기도 날아다니고 있지만 현란한 접시장식들로 숨겨졌다.

이것도 한 이백년쯤 되었으려나, 애기들이 타고 놀았을 목말이랄까, 세발자전거랄까.

집 한채를 통째로 옮겨왔다고 하니 이런 전등갓처럼 세세하고 고풍스런 장식물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백년전 프랑스의 저택에 살던 사람은 이런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겠구나. 세련된 색감이나 문양이 참.

화장실의 전경. 앞에서부터 세면대, 변기, 그리고 욕조 하나. 끝.

그런데 이 변기는 남성 전용인 걸까 아니면 남성 소변 전용인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모든 걸 다 저기서 해결?

인형극장 앞에 있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의 기념사진 촬영용 판넬. 선그라스를 멋지게 낀 애기가 백설공주의

얼굴을 훔치고는 활짝 웃고 있었다.

프랑스나 유럽의 인형극을 부정기적으로 여는 극장이라고 하는데, 'Guignol', 기뇰이란 건 프랑스 전통의

손 인형극을 말하는 거라고 한다. 4-50석 되어보이는 자리가 꽉 차서는 빨간망토 소녀 인형극을 관람.

15분쯤 되는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에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이야기, 간단한 구조와 심플한 등장인물들까지

아이들이 보기에 딱 좋은 내용과 분량인 듯. 감탄할 만큼 현란한 손놀림이나 부드러운 움직임도 관람 포인트.


처음에 한바퀴 돌아보면서는 그리 크지 않은 조그마한 마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볼 것들도

많고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들이며 걷게 되었지만, 각도마다 달라지는 풍경도 한 재미.




돌아나오는 길. 샹송 공연에 인형극 공연까지 챙겨보느라 한 세네시간 정도 걸린 듯 하다. 그렇지만 까페에 들어가

커피랑 츄러스도 맛보고, 중간중간 앉아서 쉬기도 했으니 완전 널럴한 페이스였단 걸 감안하면, 작긴 작구나.ㅎ


쁘띠프랑스에서 체크아웃. 조금만 더 날이 따스해지고 야생화니 잔디가 불긋푸릇해지면 더욱 이쁜 풍경이지 않을까.




 

어느 야트막한 담장을 따라 이파리를 늘어뜨린 채 해바라기 중이던 초록빛깔 덩굴식물. 삼지천 마을,

혹은 삼지내 마을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나 차분함이란 건 저런 덩굴이 꼬물대며 이파리를 밀치는 소리와

움직임이 보일 거 같은 그런 정도의 질감을 갖고 있었다.

A탐방로니 B탐방로니 일견 복잡해 보이는 코스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어려울 거 없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눈길 닿고 마음 동하는 대로 걷다보면 어느새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거다. 미처 못 가본 샛길의 풍경이 못내

궁금하다거나 아쉽다거나 하면 그저 또다시 휘적휘적 걸어가면 될 일. 그런 게 '슬로우시티'의 호흡이 아닐까.

이리저리 휘휘 감기며 이어지는 돌담길이 끊긴다 싶은 곳엔 반쯤 열린 나무대문이 버티고 섰다. 안 그래도

나뭇살이 조금씩 휘어지고 뒤틀려 안의 풍경이 속살처럼 드러나고 있었는데, 대청마루가 시원해 보인다.

마을 곳곳에 빈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들. 이 곳에서 민박을 하는 집들이 꾸며 놓은 거기도 하겠지만

딱히 광고나 영리 목적의 홍보가 아니라 마을을 치장하고 소개하는데 더 마음을 쓴 거 같다.

 

한눈에 확 매료되고 만 전통 가옥 한 채가 있었다. 지붕에 촘촘이 얹은 기와 한장한장이 비바람에 씻기고

세월에 퇴락해선 저마다 다른 얼룩과 상처를 갖고 있었지만, 그 제각기의 표정과 분위기를 가진 기와들이

삐뚤빼뚤하는 듯하면서도 제법 정연하게 늘어서서 풍겨내는 그 느낌이란 건 참. 틈새 하나 벌어지지 않고

기왓장 한장한장 반짝거리며 단정한 검은색을 뽐내는 새로 올린 기와지붕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람 냄새 나는 흐트러짐과 깨어짐. 얼마나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저 기와지붕은 표정이 있었다.

 

좀처럼 돌아나오기 아쉬웠던 가옥. 아마 집 주인이신 듯한 분께선 왜 이 쪽만 계속 사진을 찍냐고, 새로

기와를 올린 다른 쪽도 좀 보고 그러냐고 하시며, 며칠 전에 다녀간 건축학과 학생들도 이 건물만 죽어라

사진을 찍어대더라며 은근히 뿌듯해 하셨다. 그 건축학도들이 봤던 건 뭘까. 내가 본 건, 건물의 표정.

나팔꽃을 푸짐하게도 얹고 있던 돌담에 자전거 두대의 무게까지 얹혔다. '슬로우시티'라는 인증마크 없이도,

나른하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게 딱 어울리는 풍경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지 못할, 박물관이나 민속촌 같은 느낌도 절대 아니었다. 품위있게 올라간 기와지붕이나

재래의 냄새 가득한 초가지붕만 있던 게 아니라 잔뜩 삭아버린 슬레이트 지붕도 한쪽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고,

지금도 이곳에선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흔적과 냄새가 여기저기서 남아있었다. 그 흔들림없는

증거로 이렇게, 사람들이 더께를 밀어내고 씻어내는 목욕탕에서 여전히 뜨거운 김이 펄펄 오르고 있던 거다.

마을의 구석구석 풍경들. 어느 골목에선가 뜬금없이 조우한 저 석상은, 원래 커다란 무덤을 지키는 문신상

무신상 뭐 이런 거 아닌가. 덜렁 혼자 남아서 파란 하늘을 이고 있었다.

 

기왓장 위의 고양이, 시멘트담벼락을 거칠하게 기어오른 나팔꽃, 멀찍이 보이는 (여기도 예외없는) 교회

첨탑만큼이나 뾰족뾰족하게 선 녹슨 철문.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주기도 한다는데, 걷는 것도 좋지만 자전거로 슬슬 다니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 사이 목욕탕 남탕 문이 열렸다. 돌담길 옆 나무가 Y자 모양으로 가지를 벌렸다.

 

누렇게 녹슨 형광등 갓이라거나, 문짝을 걷어올려 걸어둘 수 있는 새모양 등자,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둥이며 마룻바닥이라거나. 게다가 담쟁이덩굴이 온통 건물 벽을 따라 기어올라 처마까지 매달린 이런 집,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맘이 물씬 드는 곳이었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 그리고 마당 앞 귀퉁이에서 피어있는 별모양의 이름모를 꽃,

그리고 고랭지배추 꼬갱이같이 찌글찌글 얄포름한 호박꽃잎하며, 의외의 곳에서 만나는 의외로 어울리는

영단어들, LETTERS.

다음에 이곳에 오게 되면 꼭 한옥 민박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골 할아버지댁같은 느낌이면서도

아기자기한 풍경이라거나 둥글둥글하게 깍이고 다듬어진 사물의 모서리들이 넘 좋은 거다. 게다가

활짝 열린 문이 겸연쩍었던 듯 얼기설기 낡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둥 마는 둥 해둔 저런 제스쳐까지.

눈길 함부로 밟지 말라고 했던가, 갓 부어놓은 시멘트길도 역시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되겠단 걸 보여주는 사진.

저 멀리 마을 입구까지 이어지는 저벅대는 발걸음이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할머니였을까, 무슨 급한

일이 있던 건 아닐까, 손주 녀석이 소식도 없이 내려온 건가.

아직은 신선한 노랑빛이 반짝거리는 논, 좀더 햇살을 먹고 가을바람에 다독여지면 한층 가라앉아 무겁고도

차분한 누런 빛깔을 띄게 될 거다. 논두렁길을 따라 걸어 나오며, 비로소 삼지천마을의 마법같은 시간의

흐름에서 차츰 벗어나는 걸 느꼈다. 조금씩 빨라지는 초침 소리.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2011 아트페어,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한다는 KIAF, Korea International Art Fair다.

코엑스 주위 강남권에 회사도 많고 하니 잠시 짬을 내어 구경나온 회사원들도 적잖이 보였다. 네이버에서

세운 아트월 중 하나인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을 유심히 감상중인 어느 회사원의 뒷모습이 진지하다.

이번 아트페어의 스폰서인 네이버는 곳곳에 아트월을 세워두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QR코드를

읽어서 해당 작가의 작품들을 좀더 자세하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었다. 포토월이란 단어는

많이 익숙하지만, 아트월(Art Wall)이란 단어는 처음 들어본 거 같은데 참 좋은 아이디어 같다.

이제 많이 유명해진 이동기 작가의 '아토마우스'도 아트월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고, 마를린 먼로의 얼굴이

어슴푸레 드러나는 모자이크 그림도 눈길을 모으고 있었고.


이번 아트페어는 9월 22일부터 26일, 그러니까 다음주 월요일까지 코엑스 1층 전시관에서 열린다.

약 17개국의 200개 가까운 갤러리가 참여했다나, 총 작품수가 5천점에 이른다니 왠만한 미술관

전시회를 둘러보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던 거 같다. 뭐, 미술관 전시회처럼 주제가 명확하고

이야기 흐름이 있는 전시는 아니고 갤러리들이 소장한 예술작품들이 우르르 쏟아진 셈이니 보다보면

살짝 소화불량에 걸릴 듯한 느낌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재미는 쏠쏠하다.

이렇게 맘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감상하며 저게 뭘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그런 궁금증이 어깨에 잔뜩 얹힌 채 매료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목이 뭐더라, the sunny day? 뭔가 해피한 날의 표정이긴 한데, 가슴엔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이 꼽혔다.

표정과 액션, 형상과 제목간의 모순으로부터 뭔가 궁금증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love였던가, 비슷한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온몸에 하트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여자의 눈매가 저리도 앙칼진건

뭘까, 사랑의 흔적만 온몸에 남기고 뒤돌아서는 남자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나 지난 사랑을 그리는 안타까움일까.

이것도 맘에 들었던 것 중에 하나. 제목이 unmasked였던가. 마스크를 벗어던지듯 얼굴껍데기를 온통 벗겨버린

듯 근육과 지방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 그렇게 얼굴껍데기가 벗겨지고 나니 오히려 모든 표정이 지워진 채

그야말로 무표정한 모습이다.

요새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회화 소재 중에서 한국적인 미감을 물씬 풍기는 재료가 바로 자개. 색감도 그렇고

반짝반짝하는 광택도 그렇고,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이다.

입체의 형태는 시각에 따라 하트로 보이기도 주머니로 보이기도, 혹은 그저 평평한 평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신기한 재료들, 철사망을 어떻게 매만져야 저렇게 갈기를 휘날리며 내닫는 말의 형상이 떠오를 수 있는 건지,

그리고 저 초현실적인 그림에선 나뭇이파리나 털들이 왜 툭툭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붙어있는 건지.

저런 분방한 상상력도 경탄스럽지만, 그런 상상을 저렇게 작품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그 능력도 부럽다.

일견 엉성하게 만들어지다 만 듯한 손, 심지어 손가락도 세 개 밖에 없는데다가 질감도 굉장히 거친데,

그게 또 이렇게 뭔가 절절해보이고 짙은 감성이 담긴 느낌을 던져준다.

이런 식으로, 숫자던 구체적인 물체-단추니 포크 따위-를 터무니없이 큰 사이즈로 재현하는 작품들은

이미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버린 거 같다. 색감까지 알록달록 이쁘긴 한데, 왠지 이건 0부터 9까지

일괄구매해야 할 거 같다. 그치만 실제로는 숫자 하나만 구매해서 소장할 수도 있다더라는.

눈에 익고 친숙한 사이즈를 확 바꿔버림으로써 뭔가 미감을 자극하는 방식은 회화에서도 등장한다.

귤이니 콜라병이니 따위를 향해 진격하거나 공격중인 군인들의 모습이 연작으로 담겨있던 어느

한국 작가의 작품들은 그런 베이스에 나름의 아이디어를 얹어 고유한 특징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인듯.

전통 회화와 오브제들이 바둑판무늬로 짜여져서는 설치미술작품이 된 거라고 해야 하나. 특히 저 노랑 버스랑

말 인형이 맘에 든다.

굉장히 다양하고 신기한 작품들이 그득한 전시장 안에서 문득 '니모를 찾아서'의 니모처럼 생긴 물고기가

둥둥 허공에서 유영하는 모습이란 그렇게 초현실적이진 않았다. 요샌 저런 'R/C 생선풍선' 있구나. 그런

정도의 감흥. 그치만 다시 생각해보면 저거 꽤나 재미있어 보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눈에 띄던 조각들. 아니지, 이걸 조각이라 하기도 그렇고 음..걍 미술작품, 이라는 게 무난하겠다.

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얼마나 거짓말을 해댔길래 코가 저렇게 낭창낭창하도록 길어졌을까.

풍선아트를 그대로 굳혀놓은 듯한 저 선명하고 발랄한 색감의 작품은 분명 내가 이름을 아는 작가의

그것 같기도 한데. 이름을 까먹어서 잘난 척할 타이밍 1회 상실. 뭐, 이름 외우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


금과 은으로 장식된 듯한 새하얀 마차랄지, 삼륜차랄지, 바이크랄지. 가만보면 좌석 등받이 쪽에 붙은

조그만 모니터에서 뭔가 사람들이 꼬물거리고 있다.

저렇게 낮은 곳에 있어서야 지나는 사람들의 부주의한 발길에 밟히면 어쩌려고. 하얀 모래가 깔린 가운데

허우적대고 있는 두 사람, 뭔가 개미지옥이나 사막의 구덩이같은데 빠진 절망적인 상황 같다.

그리고 뭔가 반복적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저 녀석들이 있었다. 눈과 입, 아마 실제

사람의 눈과 입을 따서 투영시킨 거 같은데, 쉼없이 꿈벅거리고 말하고 하품하는 그 형체가 기괴했다는.

그리고 이런 클래식하고도 반가운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도 있었다. 당대에는 획기적이고도

참신했겠지만 이미 그 뒤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그의 작품은 뭔가

손때묻고 오래되어 따스한 온기가 도는 낡은 기계의 느낌이 난다. 오래된 재봉틀이나 빈티지스러운

바이크에서 느껴지는 그런.


나 같으면 BMW에 이런 식으로 도색을 하진 않겠다. 차는 참 이쁜데 말이지.

정말이지 전시장은 너무도 광활했다. 사람도 무척이나 많았지만 워낙 넓고 천장도 높아서 갑갑한 느낌은

들지 않았고, 그렇게 전시장 한가운데서 방황하다가 작가들이 붓을 흩뿌리며 작품을 만드는 것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미술 시간에 저렇게 붓에 물감 찍어서 휙휙 뿌리는 건 참 재미있었는데. 


중세시대 귀족들을 희화화하는 걸까, 커다란 목장식을 벌통으로 바꿔놓고는 얼굴 곳곳에 벌을 붙여놓은

작품도 있었고,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을 촬영하곤 이리저리 매만진 작품 앞으로 온통 분해되어 버린

바이올린의 조각들이 가까스로 서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인도네시아던가, 그 나라의 정치 상황과 사회 분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런 사회성 짙은

작품들도 더러 있었다. 폴리스 라인 뒤에서 죽어 나자빠져 있거나, 그 라인을 의식하며 권력에 대한 충성을

허둥지둥 맹세하거나, 혹은 라인을 밟고 경계에 선 사람의 모습까지. 내 맘대로 읽어낸 거지, 실제로 무슨

의미를 담고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센스가 넘치는 회화들. 안 그런 것들이 없었지만 특히 저 사이클 장면을 그린 그림이 와닿았다.

부시와, 테레사수녀와, 달라이라마가 레이싱 중이다.
 

눈이 시뻘개진 나무 늘보가 괴물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해가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림 아래쪽에 창을 내고 알루미늄을 붙여선 공간을 틔워버리고 나비 두마리를 날려보고 있는 그림도 있었다.

그리고 칠판처럼 배경이 그려진 그림 위에 저런 뜬금없는 고추를 그리거나 명함을 오려붙이고, 낙서를 마구

해서는 마치 학예회날이나 만우절날, 혹은 교생 떠나가는 날의 칠판을 그대로 떼어온 듯한 그림도.

누구의 입버릇을 빌건대, "내가 추석 연휴 때 스타워즈 에피소드 1,2,3,4,5,6을 전부 봐서 아는데," 스타워즈의

캐릭터들은 정말 그 풍요롭고 탄탄한 스토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서, 이렇게 예술작품으로 환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다. 다스베이더의 가면 너머 숨어있는 그 깊고도 복잡한 심경, 그걸 그대로 전유해서

예술 작품 자체에 깊이를 얹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 않을까. 그리고 스타워즈 자체가 수많은 아티스트의

소재가 될만큼 강력하고 매력적인 자극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거다.


여하간, 다스베이더를 소재로 삼은 저런 작품들, 아..하나 갖고 싶다. 스타워즈 빠돌이가 되어버렸다.

최근 인터넷에서 실사판 화투패라고 돌고 있는 것도 있던데, 그것도 제법이었지만 이렇게 뭔가 메카닉의 느낌이

담긴 화투판도 괜찮은 거 같다. 심지어 비광의 저 냥반은 스케이트를 신고 있는 거 같다.ㅋ

한국 작가 누구더라, 의 태권브이는 맨발로 당나귀를 타고 있다. 태권브이의 저 입모양은 이모티콘으로 따지면

-0-, 이런 느낌을 주는 거 같아서 재미있다.

저런 그림 참 좋다. 도발적인 자태와 눈빛, 흘러내린 머리까지. 나중에 집에 걸어두고 싶은.

그리고 이런 툭 까내리는 메시지도 좋다. 다짜고짜 뻐큐란다.

모네의 그림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무질서해 보이는 수많은 붓질이 한송이 수련꽃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처럼. 이 여인의 얼굴 그림 역시 가까이 들이대면 이런 조악해 보이는 어설픈 동글백이가

수없이 숨겨져 있었던 거다.


사진 작품들도 제법 있었다. 익히 알려진 배병우 작가의 작품들 말고도, 저런 작업은 어떻게 한 걸까.

어린왕자의 B612처럼, 조그만 별에서 벚꽃나무가 거침없이 뻗어나가 우주를 채웠다.

그리고 아마도 수많은 도장들을 모아서 프레임 안에 채운 게 아닐까 싶은, 크기도 높이도 모양도 내용도

전부 제각각인 것들이 모여서 커다란 직사각형의 작품에선 무슨 디오라마같은 입체감이 느껴진다.


뭐라더라, 설명을 들었는데 대도시의 밤풍경을 내려다보면 이렇게 혼란스럽고도 화려한 이미지일 거라

했던가. 작가가 실제로 그런 걸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딱 보면 정말 혼란스럽기는 하다.

예술은 늘 최신의 과학 기술과 성과를 또다른 표현수단으로 받아안고는 했다. 3D 아트는 그런 의미에서

조금 늦은 건 아닌지 싶을 정도다. 안경을 썼더니 너무 어지러워서 패스.


이거...레이 아닌가. 아니면 다른 변신물의 캐릭인가. 모르겠지만 일본 애니에서 뛰쳐나온 게 분명한

저 소녀가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다니, 저런 작품도 유쾌하니 맘에 든다. 사방에 뭔가 변신중이라는

듯한 범상치 않은 기운이 휘감겨 있는 것도 맘에 들고.

중국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요새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더니 꽤나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급변하는

중국 사회의 모습을 때로는 풍자적으로 때로는 시니컬하게 담고 있는 그들의 작품 중에 특히나

너무도 적나라해서 눈에 확 들어왔던 작품. 색감도 굉장히 선명하고 멀리 떨어져 조그매보이는

천안문 광장 앞에 당당히 선 하이힐 신은 쪽쪽 곧은 다리들이 인상적이었다.


거칠게나마 한바퀴 돌아보고 나오니 훌쩍 지나 있는 시간, 소화하기 버거울 정도로 너무 많은

전시물들이 있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어서 본인 깜냥에 맞춰서 즐기기에 딱 좋은 기회일 듯 하다.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까페 가회, 저번달에 '타투이스트'의 전시가 있다해서 겸겸 다녀왔었다. 전시는

생각보다 단촐했는데, 아무래도 전시의 방점이 '타투'보다는 타투이스트의 예술 세계에 맞춰져서 그런듯.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여권에 과감하게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고, 심지어 저렇게 타투하듯이

재봉틀로 별이니 배니 종이비행기니 박아놓았던 작품.

북촌 한옥마을은 거의 처음 가봤던 거 같다. 안국역에서 내려선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자칫하면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조그마한 안내판을 용케도 놓치지 않고선, 빗길을 뚫고 가회 갤러리 까페 입성.


입구에서부터 전시중인 타투이스트 전시 관련한 팜플렛과 달력, 온통 그의 '타투' 작품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북촌 한옥마을을 소개하는 A4 한장 크기의 도보자용 지도도 주었는데, 여태 모셔두고만 있다.

왜 이렇게 비가 자주 오는지 걷기엔 참 좋지 않은 날씨 탓이다.

'타투이스트',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어로 딱히 바꾸기가 애매한 단어다. 문신술사, 문신전문가, 문신예술가.

혹은...뭐가 더 있으려나. 그만큼 한국에서 '타투', 문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워낙 부정적이고 척박하단

사실을 반증하는 거 같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종이 비행기를 주된 테마로 잡고 타투 아트를 계속해온

아티스트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박수쳐줄 일이지 싶다. 자기 몸을 도화지 삼아 연습하지 않았을까.


그가 갖고 있는 타투 장비들. 저 총처럼 생긴 것에 잉크통을 꼽고서 펜처럼 피부 위에다가 그림을 그리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타투가 뭐라더라, 공중위생법으로 제재받고 있다던가. 딱히 제재할 법이 없으니 저

타투 장비가 위생적이지 못하다느니 병을 옮긴다느니 따위의 조잡한 꼬투리를 잡고서 제재하고 있다는데,

한심한 일이다. 양성화해서 다양한 예술적 디자인이나 그래픽이 발전하도록 하고, 위생상의 문제가

정 그렇게 신경쓰인다면 제대로 관리하면 되지 않을까.


타투이스트 한 명의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이 이루어진 결과물들도 전시해 놓았었다.

재봉틀을 이용해 저런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수놓고는 소녀의 여린 팔목에 뽀빠이처럼 닻 모양이라거나

조폭처럼 '一心' 이런 한자를 수놓는 센스라니.


뭐 벽면 한쪽으로 그런 그림이나 복합 재료로 꾸며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이렇게 분방하게 채색된

구두도 한 켤레 놓여있었고. 아무래도 갤러리 까페라 그런지 차 마시기도 괜찮은 분위기였지만, 찻잔을

들고 벽면을 따라 돌아다니며 이런 전시물들을 구경하기에도 괜찮았던, 편한 분위기의 천장 높은 까페.

와중에 발견한 맘에 쏙 들던 아이템 하나. 뱅 앤 올룹슨의 오디오였는데, 저 앙증맞은 빨강 세모모양

스피커가 한눈에 확 꽂혀버렸다. 게다가 조그마한 체구에서 울려나오는 사운드가 전혀 뒤지지 않고.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라도 꼭 사겠다며..일단 위시리스트에 보관.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많이 연했다. 갈수록 진한 커피를 좋아하게 되는 참이라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에스프레소 위의 크리마가 여느 까페 체인의 그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부드러웠던 듯. 저렇게 활짝 웃고있는

스푼의 애교에도 맘이 녹아내렸다.


들어갈 때 한장씩 나눠줬던 종이는, 전시 중인 타투이스트의 메인 테마인 종이비행기를 접으라며 미리

접는 선이 인쇄된 종이였다. 내친 김에 종이비행기도 접고, 배도 접고 나서는, 영수증 종이로도 조그마한

종이비행기를 마저 만들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문득 불붙어 버린 종이접기의 마력. 어렸을 때 만들었던 독수리5형제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궁금해져버려서 있는 종이 없는 종이 동원해서 결국 만들고야 말았다. 저렇게 입도 쩍쩍

벌어지는 날렵한 모양의 비행기. 양쪽 옆구리에도 비행기 한대씩 합체분리할 수 있고 위에도 한대

합체해놓을 수 있는 궁극의 비행기였었다. 어렸을 때 커다랗고 두꺼운 달력 종이로 참 많이 만들었는데.

그렇게 비행기도 접고 배도 접고, 까페도 온통 둘러보고, 책도 읽고 하는 와중에도 참 줄기차게 내리던 비.

이제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기보다는 '우기'가 있는 아열대의 나라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북촌한옥마을을 좀더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에스프레소는 훌짝 다 마셔버린지 오래. 마치 타투처럼 굵고 선명하게 남아버린 크리마의 갈색 띠만

에스프레소 잔 안쪽에 보름달처럼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내 타투를 보고도 사람들이 '참 잘했어요'라거나 '1등급' 따위의 둥근 도장을 찍어놓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이쁘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조금은 더 밖으로 열려있는 이미지였음

좋았겠다 싶기도 하고, 일단 달과 별을 몸에 새겼으니 다음에는 다른 천체를 새겨서 공간을 넓혀야겠다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실 가회 갤러리까페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이 타투이스트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내 꺼만한 게 없지 싶어서 조금은 뿌듯.




토요일날 샤갈전을 보러 나섰었다. 3월 27일까지라 하여 막판이니 사람들이 많으리란 건 이미

예상을 했었지만, 줄이 잔뜩 늘어서 입장하는 데만 한시간이 걸리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왜 이리도 사람이 많은 건지. 굳이 샤갈전을 보러 왔다기보다는 근처를 걸으며 놀고 싶었던 거라

미련없이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선 오디오 설명이 붙어있는 앞에서

바글바글 모인 채 줄서서 작품 감상을 하리라고 생각하니 정말. 샤갈은 다음 기회에.

그냥 돌아서서 정동 쪽으로 넘어가려는데 문득 발걸음을 붙잡은 건, 뭔가 분위기가 묘한 조각들.

잔뜩 찌그러들어있어서 왠지 저기 어딘가쯤에 블랙홀같은 게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건 아닌가

싶도록, 순간적으로 눈이 어질어질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잔뜩 짜부러진

가족들의 모습들. 실물 형태로 만들어두고 위에서부터 지긋하게 꾸우욱 눌러서 만든 걸까.

각도를 이리저리 달리 해서 보니까 더 재미있었다. 눈높이를 맞춰서 보면 호빗족 같기도 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냥 장독 같이 땡땡하고 배나온 물체들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작품 제목도

무려 '장독대'였던가.

그리고 좋아하는 길 중 하나, 시립미술관에서 넘어가는 길. 노랑색만 살리고 모노톤으로 찍어본

사진에서는 바리케이트가 발랄해 보인다. 저너머 수풀 속 개나리 뭉치들도 어찌됐건 슬금슬금

오고 있는 봄기운을 느끼게 했고.

가다가 문득, 정동갤러리를 들렀다. 현대작가들의 소품전을 열고 있었는데 여긴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다. 2층까지 전시된 작품들을 유유히 둘러보면서 몇몇 작가들의 그림에 감탄해주고

이름도 눈여겨 보아두고, 내키는 대로 돌면서 한바퀴 돌고는 점찍어둔 작품들은 다시 한번

봐주고.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갤러리 안에서 나무마룻바닥에 울리는 내 발걸음 소리도 좋았고

따끈하게 실내의 공기를 덥히는 백열전구들의 온기도 좋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쌀쌀한 삼월말의 날씨, 세상에 식목일이 코앞이건만 이렇게 추워서야. 갤러리 안에

후끈하게 덥혀진 공기는 백열전구 말고도 이 녀석의 도움이 컸던 거다. 빨갛게 달아오른 코일을

둘둘 감고 있는 난로. 그 솔직한 열기가 난로와 마주한 살갗에 훅 끼쳐와서, 왠지 정다워서 난로

앞에 쪼그려앉아서 열기를 느껴줬다.

늘 미술관에 오면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 특히나 현대 미술로 넘어오면 더 심해지지만 이렇게

작품들이 줄줄이 전시된 가운데 소화전이나 통신단자 부스같은 것들이 문득 숨어있는 거다.

더구나 여긴 아주 의도적인 양 스뎅부스 주변을 액자틀같은 걸로 둘러놓았다. 액자틀까지

대략 주위 작품들과 깔맞춤되어 있는데다가, 마침 바로 옆에 전등스위치가 바싹 붙어있어서

작품 라벨같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설렁설렁 노닐다가 밖으로. 어디선가 물이 줄줄 흐르는 소리가 개울가 같다 싶었는데

건물 청소중이었다. 4층짜리 학교 건물 위에 줄 하나로 지탱한 채 건물 외벽을 청소중이신

아저씨의 뒷모습이 하늘하고 붙어버렸다.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고, 추워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당당해 보이기도 하고.

마무리는 영화관. 어쩌다 보니 '미로스페이스'가 근 일년여만에 재개관하는 첫날이었다. 깔끔하게

재단장한 영화관, '2011 감독열전' 작품 중에서 시간이 맞는 녀석 하나를 골라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었더라는. 혼자 영화관 전세내서 '초롤케의 딸'이란 다큐를 보았는데 이리저리 자세도 바꿨다가

좌석도 바꿔서 보았다가, 영화 만큼이나 너른 영화관도 재미있었다.



헤이리의 아프리칸 갤러리. 국내에서 유일하게 아프리카 목조각상들을 전문취급한다는 곳이다. 입장료는 천원.

무료로 개방된 공간에 하도 사람들이 바글바글대길래 냉큼 천원을 내고 유료 공간으로 넘어와버렸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무료에서 유료로 넘어가는 계단 벽면을 빼곡하게 장식한 전통탈.

각도에 따라 느낌이 제법 다르다. 대충 눈높이를 맞춘 상태에서 보면 나름 우스꽝스럽고 친근한 구석까지도

읽혀지는 표정이지만, 이렇게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차갑게 눈을 흘기는 것 같기도 하고 볼이 잔뜩 부은 채

금세라도 시니컬하게 갈굴 것만 같다.

며칠 전 트위터에서 누군가 알려준 인도의 소식. 코끼리떼가 이동하다가 새끼 코끼리 발이 철로에 끼고 말았다나,

기차가 달려들 때까지 수십마리의 어른 코끼리들이 새끼를 둘러싼 채 버텼고 결국 일곱마리인가 기차에 치여

숨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했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던 너무 리얼한 코끼리,

그리고 그 살점을 뜯어먹는 콘도르떼들.

아프리카, 하면 기린떼도 빼놓을 수 없다. 드넓은 초원을 달리다가 문득 나무처럼 삐죽삐죽 솟아있는 그들의

긴 목부터 마주치는 순간은 아프리카에 대한 일종의 로망. 에버랜드에 생겼다는 초식동물 사파리에 가서 기어이

기린에 먹을 풀떼기를 쥐어주고 말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아프리카의 이 생생한 표정들, 조개껍질과 돌멩이를 활용해서 저런 얼굴을 표현해 낸다는 건, 대담하기도 하고

창의적이기도 하고. 군대 있을 때 '야전성'이란 표현을 우리끼리 썼던 적이 있는데, 뭐랄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재빨리 해결하는 응급조치의 순발력이랄까 유연한 발상이랄까. 그런 게 아프리카의 것들에서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식으로 조금은 더 '갖춰진' 인형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옷도 제대로 갖춰입었을 뿐 아니라

눈코입의 묘사 역시 클래식한 아프리카 토속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아프리카스러운 느낌은 살아있는.

조약돌 세개씩 깜장돌과 하얀돌을 늘어세운 뭔가 단촐한 게임판을 앞에 둔 채 맞은편에 놓인 화려한 의자. 저건

진짜 무슨 게임인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꽤나 단순한 외양 때문인지 쉬워 보이기도 하고.

강아지가 고개를 슬몃 쳐들고 눈망울을 또르륵 굴려대는 이건, 흔들의자. 반질하게 잘 다듬어진 뒷마무리가 좋다.

책을 세원둔 채 양쪽에서 받쳐두는 책꽂이가 이정도 포스를 풍기다니. 이런 아이템이 제대로 분위기를 가지려면

꽤나 그럴듯한 서재가 있어야 할 듯. 왜 그 마호가니 나무 책상에 벨벳 카펫이 깔려있는 아늑한 방.

기린 모양을 따서 만든 경쾌한 느낌의 의자들. 기린 다리 네 개로 의자의 내 다리를 형상화하고 나니 기린

모가지가 남는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바닥으로 잔뜩 꿇어박음으로써 모가지도 해결.

험상궂고 단호한 턱을 가진, 아마도 짐바브웨에서 왔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전사의 목각상. 전사의 얼굴 생김이

왠지 동네 어귀 장승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게다가 짚으로 엮은 머리띠며 목걸이를 칭칭 감고 있는 것도

낯설지 않은 느낌.

이쁜 아이템들도 많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것들은 하나만 덜렁 놓여있으면 참 멍청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냥

이렇게 이쁜 것들 눈요기하는 것으로도 잠시나마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빛을 머리에 부어내리며 돌아다닌듯

여행의 즐거움을 살풋 맛볼 수 있어서 만족.

아프리칸 갤러리를 나와 경기도 헤이리의 햇살을 한바가지 뒤집어 썼다. 갤러리 앞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빙빙 돌고 있던 앵무새가 인사를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대장정'의 영웅 마오쩌둥이다. 어디선가 많이 본 중년의 마오쩌둥 사진. 그런데 뭔가

다르다. 귀에 삽을 박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이이는 이어폰을 귀에 걸었다. MP3로 노래라도 듣고 있는 걸까.

그들의 국부라 할 수 있고, 중국공산당의 아버지라 할 만한 사람의 귀에 이어폰을 꼽아주다니, 어쩌면 중국은

이제 한국보다도 정치적으로 유연하고 관용적인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해의 '신천지(新天地)', 삼청동 쯤을 연상케 하는 그럴듯한 까페와 갤러리들이 모인 곳의 어느 가게에서 무심코

카메라를 꺼내들게 만들었던 그림 한장. (사실 그런 갤러리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마련이다.)

상해의 조계 지역이었을까. 굉장히 고풍스러우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의 벽돌건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저 햇볕을 즐기는 듯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느낌이 아니라 파리 샹젤리제 거리같은, 그런 여유롭고 유럽스러운 분위기의 공간이다.

왠지 커피빈은 외국에서 만나면 반갑다. 아놔.

바닥의 포석들도 나름 신경써서 깔아둔 듯 하다. 최소한 아무런 미감이나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치 않고 그저

아무데나 막 깔아버리는 '범용' 포석은 아닌 거 같단 이야기. 포석이 이쁜 길은 걷기에도 즐겁다.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들이 요리조리 방사형으로 퍼진 골목길 따라 늘어서 있었다. 1층엔 까페, 2층엔 갤러리,

뭐 그런 식으로 공간을 겸하고 있는 샵들도 보였고, 저렇게 생긴 테라스들이 이층마다 툭툭 턱처럼 나왔었다.

아직 뜨겁다기보다는 따땃해서 기분좋은 햇살을 걸러주는 연두빛 투명한 여린 잎사귀들.

그리고 빨간 완장이 우스꽝스럽던 토실토실한 아저씨는 바싹 마른 소같은 자전거를 타고 소처럼 느릿느릿

햇살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유연한 그의 페달질에 놀랬고, 붉은 완장이 생각보다 그럴듯해 또 놀랬다.




장면 #1.

강호순이 현장검증을 다니며 여기저기 야산에서 살인과 매장을 재연할 때마다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렸다.

'동네주민'이라고 소개되는 이들은 한결같이 사람이 어찌 저럴 수 있느냐, 사형시켜야 한다 등등 극한 언사와

폭언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저게 인간이야?!", "저 XX한테 인권이 어딨어?!", "마스크를 왜 씌우냐고!!"

수백명의 강호순'갤러리'들이 그의 범죄 현장을 따라다니며 혀를 끌끌 차대고 고래고래 욕해대기에 바빴다.


마치 팬클럽처럼 졸졸졸. 스트레스 제대로 풀 화풀이감 하나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장면 #2.

대중을 끊임없이 자극시켜, 행여나 그 날선 분노와 눈먼 증오가 무뎌질까봐 두려운 기자들은 오늘도 이런 기사를

쓴다. 강호순, 유치장서 코까지 골며 잘 자고 잘 먹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02/2009020200054.html)

현장검증을 하는 강호순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방송멘트는 으레 이렇게 시작된다. 희대의 연쇄살인범

강호순은 살인행각을 별다른 동요없이 태연히 재연했습니다, 이틀째인 오늘도 태연히 재연했습니다, 대체로

무덤덤한 표정으로...망설임없이...(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278278_2687.html)


대체 강호순이 어떤 표정과 태도를 보이면 만족할지 궁금하다. 직접 손으로 찢어발기지 못해서 아쉬운가.


장면 #3.(고백)

어렸을 적 나를 놀래키고 겁먹게 했던 배가 빨간 독개구리, 셀수없이 많은 발을 꼬물딱대던 지네, 그리고

새까맣고 반들거리는 눈에 분홍색꼬리를 가진 쥐를 '말살'시키면서 어떠한 쾌감을 느꼈는지 고백한다.

*                          *                          *

마스크를 벗겨야 하네 어쩌네 말이 많았다. 그 와중에 법질서 수호를 걸핏하면 핏대높여 외치던 조선과 중앙이

가장 먼저 '공익'을 위한답시고 마스크를 벗겨냈다. 그리고 사람들의 흥분한 욕지거리와 삿대질,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느껴지는 광기는 점점 짙어지는 것 같다. 집단적인 폭행을 가하고, 멸시하며, 침을 뱉고 돌을 던진다.

그리고 언론은 그런 비이성적인 흥분과 감정과잉의 상태를 부추기고 보도하며 보도하고 부추긴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라는 탄식. 그건 위선일지 모른다. 사람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런 사람도 있구나, 라고

자신은 어떤지 돌아보지는 않더라도-'너희 중 죄없는 사람만이 돌을 던지라'는 가르침을 주는 어느 종교가

성행하고 있으니 기대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굳이 사이코패스니 뭐니 나와는 다르다는 부적들로 덕지덕지

분리시키고 격리시키는 건 왜라고 생각하는가.


다르다고 항변할 수 있다면, 지금 이렇게 사냥감의 목덜미를 한번 물면 놓을줄 모르는 충성스런 사냥견같이

강호순에 극악스럽게 달려들고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는 당신들은. 피냄새를 맡고 온 건 아닌지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신들이 발가벗겨진 그보다 훨씬 선하며 인간답다는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는

마치 말못하는 못생긴 짐승과도 같은 그에 비해 압도적인 힘의 쾌감을 은근히 만끽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어쩌면 그건 강호순이 다른 여자들을 죽이면서 얻었던 쾌감과도 같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내가 어렸을 적

혐오스런 생명들을 짓밟으면서 느꼈던 잔인한 희열과는 분명히 닮아있다.



 07-1학기 도예의 기초

인사동 탐방 및 관람기

졸업하기 전에 꼭 듣고 싶었던 ‘도예의 기초’ 수업을 결국 수강하는데 성공한 1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을 만들어 줄까 주문을 받고 있던 때였다. 가족들이 인사동 근처에서 외식을 한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인사동을 둘러보며 어떻게 만들지 안목을 좀 틔우라고 조언해 주셨다. 커다란 접시를 세 장 정도 만들어 오라시던 엄마는 당신의 접시가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셨던 것 같다. 내가 예기치 않게 커다란 자기가 만들어져서 대패로 밀어가며 모양을 다듬고 있다는 얘기를 괜히 했구나 싶은 상황이었다. 한 시간여 둘러보며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몇몇 특이한 모양의 컵이 눈에 띄었다. 아무 생각없이 쓰던 컵이 이렇게 다양한 손잡이 모양을 가질 수 있구나, 이렇게도 모양을 잡을 수가 있겠구나, 하는 작지만 스스로 기특한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일상적인 쓰임으로부터 사물들을 해방시킬 때 그 본래적인 의미가 드러난다는 마그리트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다음 작품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법 비축해서 수업에 들어가니, 교수님이 불쑥 내주신 숙제, 인사동 탐방 및 관람기 제출. 이미 한 번 다녀왔지만, 사실은 아주 반가웠다. 컵 말고 다른 도예 작품들도 좀더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다니느라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던 탓도 컸다. 이번에는 갤러리 위주로 여유있게 시간을 두고 다녀보고 싶었고, ‘쌈지길’, ‘가나아트스페이스’와 ‘공예갤러리 나눔’ 등 몇 곳을 축으로 해서 도자기가 보이는 가게마다 들어갔다. 사실상 모든 갤러리와 샵들이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껏 뒤돌아서서 가린다거나, 주인이 한눈 파는 틈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어야 했다. 가끔 정말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은 작품이 보일 때에는 우선 찍고 보자는 심정으로 후다닥 찍고선 제지하는 주인에게 사과하고 도망나오기도 했다. 굳이 사진을 안 찍고 머리에 담아오거나 스케치를 해오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한없이 변형되는 형태와 윤곽선들을 기억하려 애쓰는 것은 무리란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이후 그림을 그리는 따위의 용도로는 전혀 쓰인 적이 없던 내 오른손으로는, 그 미묘한 뉘앙스와 느낌의 차이를 잡아낼 만큼 섬세한 스케치가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비슷비슷해 보이던 주전자, 찻잔, 술잔 같은 것들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색감이나 질감의 차이만이 아니라, 주둥이를 말아올린 느낌이나 형태잡힌 선의 윤곽을 조금은 더 민감하게 분별해 낼 수 있게 된 것 같다. 특히 차주전자의 복잡하고도 미끈한 형태를 보면서 저걸 어떻게 만들어냈을지 경이로움과 동시에 도전의식을 느끼게 되면서, 조금씩 다른 주둥이나 뚜껑의 형태라거나 손잡이의 처리 방식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마침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차주전자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다양한 사이즈의 독특한 주전자들을 구경하면서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도 해보다가 기어코 팜플렛의 도자기 사진을 촬영했다. 아무리 머릿속에 넣어두고 기억하려고 하거나 무딘 손으로 스케치를 해보아도 그 형태를 허물어뜨리지 않고 떠올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갤러리에서 일하시는 분이 ‘도자기 공부하는 사람이 팜플렛 가격을 아끼면 어떡해? 팜플렛을 촬영하는 사람은 또 처음 봤네’라고 구박하셨지만, 정작 도예의 기초 수업을 들을 뿐인 왕초보가 도예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비쳐졌다는 사실에 마냥 흡족할 뿐이었다.



여섯 시간 가까이 돌아다니며 인사동을 끝에서 끝까지 다니다보니, 흙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빚어낼 수 있는지,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들고 싶어졌는지 깨닫고 문득 놀라버렸다. 수업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그저 머그컵 한 세트와 화분 정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굽 모양, 손잡이 모양, 주둥이 모양 하나하나에도 무언가 의미와 느낌을 불어넣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했다. 비록 몸은 다소 지치고 피곤했지만 촬영이 금지된 이 곳에서 백여장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과 무언가 도자기를 보는 안목이 조금은 올라간 것 같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흙을 가지고 놀기만 해도 정신건강에 좋다는 뉴스가 최근에 보도된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예 수업을 듣는 네 시간동안 꼼짝도 않고 손끝에 정신을 집중하는 작업이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가끔은 전생에 도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라는 택도 없는 망상이 머릴 스쳤지만 주위 사람들의 야무지고도 센스있는 손끝을 보면 꼭 그런 것같지도 않다는 생각도 교차한다. 인사동에서도 그랬지만, 이제는 무엇이든 보면 저걸 흙으로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하게 된다. 술집에서는 술잔과 술병을 보면서, 음식점에서는 그릇과 접시를 보면서 말이다.



인사동의 어느 갤러리에서 한 도예가가 남긴 글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적어왔다. 비록 이 정도의 쾌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기는 건방진 초짜지만, 그래도 흙을 만지면서 이런 비슷한 즐거움을 얻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주전자는 참 재미있다.


꼭지를 만들 때는

젖꼭지를 연상하며

뚜껑을 여닫을 때는 살갗이 닿는 느낌으로,

몸통은 둘이 한데 어울어지는 감각이 일게 만들었다.


절정은 注口를 통해 흐르는 물을 느낄 때이다.


이렇게 보고 만지고 느낀 상상까지 확대할 수 있는

주제는 그리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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