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요새 봤던 왠만한 영화 중에 최고다.

Wall-E에 이어 픽사가 또다시 잊지 못할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업(UP) 말이다.

메가박스 영화관 한가운데에 전시된 풍선이 주렁주렁 매달린 집을 보았을 때도, 다른 영화를 보기 전 예고편으로

할아버지와 뚱뚱한 꼬맹이가 나왔을 때도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감동적이고 흡인력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애니메이션이 더이상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이제 굳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

방식을 지적하며 다른 실사 영화와는 다른 기준으로 그 예술성이나 완성도를 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건, 요새 봤던 왠만한 영화 중에 최고다. 이야기를 이끄는 호흡의 완급에 있어서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에

있어서나, 어느 모로 보나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인 것 같다. 감동을 마구 먹어버렸다.

스포일러의 요소를 최대한 피하겠지만, 사실 이건 영화를 직접 봐야 느낄 수 있으니 별로 스포일링되지 않을 듯.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 한번 고여버렸다.

할아버지가 거대한 풍선다발에 집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오르기까지의 삶, 그러니까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초반의 장면들이란 건 뭐랄까, 누군가의 인생에 순식간에 감정이입하면서 문득 일흔세살의 노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준다. 어느순간, 내가 그 '칼'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그의 백발이

이전엔 검은 머리였음을 알고, 그의 완고한 표정과 눈매가 이전에는 훨씬 부드러웠고 누군가에겐 애정이 가득했음을

알고 있다. 비행선을 동경하며 늘 모험을 꿈꾸던 아이가 어른이 되고 홀로 남게 된 그런 상황, 영화는 그제서야

시작이다.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 한번 고여버렸다. 이런 영화는 본 적이 없다.

"Adventure is up there"?

스토리를 구구절절 이야기할 생각은 없으니 급마무리랄까. 할아버지가 집을 위로 띄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

주위가 온통 재개발에 들어가 고층빌딩이 조그마한 집을 포위한 터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집을 띄우고 남아메리카까지

날아가기로 한다. 비행선을 동경했던 할아버지 내외의 가슴에 새겨져있던 탐험가의 말, "Adventure is up there"는

늘 '칼' 할아버지에게 하늘을 쳐다보게 만들었댔다. 이야기가 끝낼 때쯤에야 바닥에 안착하는 집의 이미지가 보여주듯

모험이란 건 다소 들뜨고 불안정한 상태,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고 부유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건,

모험을 하려면 약간은 바닥에서 거리를 두고, 원경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Adventure is ubiquitous!

'유비쿼터스'란 단어가 한때의 트렌드였던 적이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편재하는' 정도의 뜻을 가진 이 단어가

아마도 이 이야기와, '칼' 할아버지를 이끄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위(up)' 어딘가 기다릴 모험을 찾아 떠난

길이지만 실은 그의 삶 전부가 모험에 다름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특정 장소에 도착해야 비로소 모험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냥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하며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던 거다. 흔히 여행이란 방식으로
 
낯선 곳에 떨어지고 나서야 하루하루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곤 하듯이 말이다.


'칼' 할아버지는 과거의 일상이 모두 소중한 모험이었음을 깨닫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지금의 순간을 적극적으로

'탐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집이 비록 과거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과거에 약속한 모험을 이루기 위해 위로 떠오르긴

했지만, 수천개의 풍선은 이제 지금의 순간을 위해, 지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으레 삶의 전성기를 지났다 여겨지는 노인들이 그러듯 어떤 삶의 순간에 멈춰버리지 않고, 다시금 계속해서 살아간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며.



p.s. 다시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이어서 유리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이라서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장면 하나하나에 스토리의 흐름에 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움직임
 
하나, 소품 하나까지 의도에 맞게 정밀하게 세공해낼 수 있는 게 애니메이션이니까. 중간중간 화면 전체에 의미가 꽉 차

있다고 느껴지는 장면들이 더러 있었다. 게다가 어떤 건물의 창문밖을 슥 지날때 풍선을 투과해서 집안 내부에 비쳤던 

알록달록한 조명도 그렇고, 집에 묶여 바람에 나부끼는 색색의 풍선들이 보여주는 음악같은 율동감과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이라니. 물론 이야기 초반에 나오는 압축적이고도 압도적인 삶의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또 하나 만화라서 되려 유리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한 부분이 있다면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육체적으로

쭈글쭈글하여 '아름답지' 않으며 뭔가 모험이나 역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 극을 이끄는 주인공으로는 잘

캐스팅되지 않는 그런 캐릭터를 무리없이, 감정이입이 쉽게 구현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애니메이션이 갖는 '미화'의 힘

때문은 아닐까. '칼' 할아버지는 사람이 살면서 자연스레 외면에 쌓게 되는 온갖 흔적들로부터 자유로운 건 사실이니까.

어떤 배우가, 어떤 사람이 '칼' 할아버지를 이만큼 연기해낼 수 있을지 잘 상상이 안 간다. 만화라서 유리한 건 역시

역사성 없는 할아버지 캐릭터랄까. 삶의 구린내가 전혀 풍기지 않는 동화(만화) 속의 할아버지여서, 그의 삶에 더욱

쉽게 감정이입하고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살풋 들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나도 당신들처럼 살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을 뿐이라고. 돈이 있고 없음에, 나와 당신들은 창살과

인질을 격하고 마주하고 있다고. 실화를 주물러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얼마간 위험을 안고서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토리가 뻔한 결말로 치닫는 걸 지루해할 관객들을 잡아놓아야 하고, 이미 많은 방식으로 해석된 실화에 대해 얼마나

그럴듯한 살점을 붙여넣을 수 있을지. 홀리데이도 그런 '뻔한' 스토리라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외침을 얼마나 와닿게 던져줄 수 있는가의 문제니까.

감독은, 얼마간 난관에 부딪힌 듯 하다. 처음의 철거촌 장면에서 드러나는 적나라한 공권력의 '합법적 폭력성'은 차츰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어디론가 스며들어가고 도망가버린다. 핏빛 낭자하던 콘크리트 바닥의 민들레꽃과 죽일듯

바라보는 그런 전장의 눈빛. 그런 건, '외국놈'들을 반기기 위해 정화된 서울거리에 어울리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소소하지만 따스한 일상의 공간들에 '침입'해들어간 '탈옥수'들은, 그래서 한낱 바이러스처럼, 아님

살인강간강도전과에 총칼로 무장한 괴한이란 말이 차라리 자연스럽다.


차츰 흐릿해지는 그들의 현실인식, 그리고 감독의 대략 낭패스러움, 큰일났다, 자꾸만 지강혁 '일당'과 대치하는 공권력,

내지 국가란 녀석이 어디론가 내빼고는, 지강혁은 단지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또라이 정도..로나 보이게 된다는 거다.

어쩔 수 없어진다, 감독은, 지강혁이 수북이 피워올린 담배가 올림픽종합경기장 모양의 재떨이에 꾸욱 비벼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가진 따스한 인간성과 최민수의 야비한 목소리와 말투, 표정을 대치시키려 하지만, 자꾸 전선은

허물어진다.

 
야비함과 비인간의 화신이 된 최민수를 죽이지 않고 극의 끝까지 그들과 대척시키려 하지만, 그정도론 어림없다. '우리의

대한민국'과 '대머리아저씨'는 피한방울 안묻어있을 뿐더러, 초코파이에 열광하지도 않고, 걸핏하면 욕지거리나 해대고

싸워대는 '시정잡배'가 아니란 말이다.
 
결국, 최민수가 마지막 쏘아올린 세 발의 총성, 실제와 다르게 감독이 영화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마무리한 그것은,

최대한 '공권력'을 감각시켜내려는 상징 그 자체다. 그런 식으로밖에는, 그 실체를 잡아낼 수도, 보여줄 수도, 느끼게

할 수도 없다는 거다. 슬프게도, 지강혁이 무엇과 멱살을 잡고, 무엇에 대고 욕지거릴 내뱉었는지 볼 수가 없는 거다.

고작해야, 말갛게 닦인 시꺼먼 각그랜저 보디쯤에서, 그리고 최민수의 예기치못한 깍듯한 모습이 거기에 비쳐지는
 
것으로, 그렇게 보여질 뿐이다. 그렇다면, 그 총성 역시도 공권력, 국가 그 자체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반향 정도? 차체에 비친 최민수의 모습처럼, 국가의 압력이 최민수의 둘째손가락쯤에 가해져 작렬한 총탄. 

갈수록 투명해지는 국가권력의 압박, 그리고 아직 cloaking되지 않은 그 끄트머리쯤은 계속해서 감각적인 차원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안타까움. 난곡, 봉천3동...용산. 그리고 가슴저릿저릿한 비지스의 음색. 
 

Ooh you're a holiday , such a holiday
Ooh you're a holiday , such a holiday

It's something I thinks worthwhile
If the puppet makes you smile
If not then you're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Ooh it's a funny game
Don't believe that it's all the same
Can't think what I've just said
Put the soft pillow on my head

Millions of eys can see
Yet why am I so blind
When the someone else is me
It's unkind, it's unkind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Yet millions of eyes can see
Yet why am I so blind
When the someone else is me
It's unkind, it's unkind

Ooh you're a holiday , ev'ry day, such a holiday
Now it's my turn to say , and I say you're a holiday
It's something I thinks worthwhile
If the puppet makes you smile
If now then you're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 throwing stones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프랑스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 - 가랑비.

프랑스 영화는 굴곡이 없고 밋밋한 거 같아.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 어느순간 크레딧이 올라간다구.

'비퍼 선셋'이 '비퍼 선라이즈' 이래 9년만에 만난 두 남녀의 자잘한 수다로 일관하다 어느순간 끝났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물론 그 영화가 싫었단 건 아니지만, 그 영화는 그야말로 "프랑스영화"였다는 얘기지.

그런데 사실 기승전결이 뚜렷치 않고 감정선이 뭔가 펑하고 터져나가는 순간이 없다는 거 자체는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하나의 스타일인 거지 뭐. 천둥이 내려꽂히듯 번쩍 하는 깨달음이나

카타르시스의 순간도 있을 수야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조근조근 젖어들 수도 있는 거니까.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광화문

그녀와 나는 월요병에 걸린 상태였어. 주말 내내 자알 놀았던 나는 사무실 책상 앞이 어설프고 어색해서 종일

엄지손가락 열개로 타자를 쳤고, 토요일밤부터 월요일을 의식하던 그녀는 결국 매우매우 녹초가 된 데다가 둘다

저녁을 먹지 않아 굶주린 상태였거든. 잔뜩 꾸물꾸물한 날씨, 왠지 전철이 광화문에 가까워질수록 몸도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어서, 몇마디 말도 나누다 끊겼던 듯 해. 게다가 광화문에 내려 시네큐브로 몇발짝 걷기도

전에 후두둑 후두둑 내깔겨지는 빗방울이라니. 좀, 좋지 않은 날에 좋지 않은 날씨, 영화도 그닥 기대만발이거나

막 보고 싶었던 영화가 아닌, 뭔지도 모르고 '프랑스영화' 보러 가는 길이었으니. 괜한 스케줄이었나 싶었지.


자그마한 우산들, 그리고 다시 비.

따뜻한 커피부터 한잔. 우중충하고 눅눅한 날이어선지 뜨거운 김이 폴폴 오르는 커피가 땡기는 거야. 한모금

마시고 나니 후끈한 커피기운이 마치 뜨거운 다리미처럼 몸을 뽀송뽀송하게, 게다가 날선 와이셔츠처럼 빳빳히
 
다시 풀먹여주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나니 둘다 기분이 매우 좋아졌었지. 다소 흐릿했던 눈매도 어느새 초롱초롱

총기가 반짝거렸고 심지어는 장난끼까지 어른거릴 정도로.
 

다리를 쭉 펼 수 있던 넓은 영화관, 절반도 채 차지 않았던 듬성대는 인구밀도, 게다가 어디선가 아스라히 들리는

빗방울 소리. 그건 마치, 여름날 매미가 벗어둔 허물같은 소리였어. 아니면 엄청시리 크게 틀어둔 엠피쓰리의

주인없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얇고도 빈약한 소리랄까. 적당히 포근하고 또 적당히 감정을 흔드는 그런.


한숨 죽인 빗소리가 쏴아.....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지. 레인. 

언제나 화창하길 바라지 않아. 이 영화 원제가 뭔지 알아? 렛 잇 레인. 비는 내리거나 말거나. 날씨 핑계를 대며
 
우울해할 수야 있지만, 사실 성철스님 말마따나 비는 비요, 사람은 사람이라구. 그보다 덜 가다듬어진 대사도 하나 

있었지 아마. "자기만 있으면 난 언제나 해가 쨍인걸!" 이렇게 오바스런 대사는 상자에 넣고 청테이프로 둘둘

감아 뻥하니 발로 차버리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니 밖에서 그악스레 내려대는 빗방울 따위 심장까지 스며들어오지

않겠다는 자신감 혹은 여유가 생겼달까. 그런 영화였어.




* 영화 '레인'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그치만 영화의 흐름과 느낌에 매우매우 충실하려 애썼던,

비에 대한 이야기..


*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이런 식이다.

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



오감도 홈페이지(http://www.eros2009.co.kr/)엔 자유게시판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랑을 원하시나요?"라는 제목아래

간단한 메시지를 포스트잍틱한 비주얼로 남길 수 있게 되어있는데, 온통 욕이다. 트랜스포머2 개봉에 맞춰, 그리고 실은

'대한늬우스' 강제상영에 맞춰 9,000원으로 오른 영화값에 대한 분노, 노출신에 맞춰진 홍보만 믿고 살색그림 펑펑

터져나오는 걸 보고 싶었는데 낚였다는 분노, 혹은 (애국시민의) '한국영화'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분노까지.

그렇게 욕먹을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실은, 꽤 괜찮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다섯 가지 사랑이야기가 뚝뚝 끊어져 나온다. 김수로의 캐릭터가 겹치긴 하지만, 스토리는 각각 전혀 다른 측면의

사랑을 포착해낸다.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단물빠진 소재들, 다소간의 동성애 코드나 의외의 반전조차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하여 그다지 강력하진 않았지만, 그건 어쩌면 주재료인 '사랑'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살려내기 위해

일부러 한번쯤 위력을 줄여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클린턴 식으로라면, "Stupid, it's love."


즉석복권과도 같은 기차 티켓을 매개로 벼락처럼 마주친 두 남녀의 감정이 각자의 경험치와 스킬에 따라 어떻게

번져나가고 기어코 그 목적한 바를 이루게 되는지, 그렇지만 그 과정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쉽지 않은 내적인

꼼수와 갈등들을 지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His Concern)는 첫 섹스를 하고 난 후 느닷없이 고개를 드는 낯섦과

막막함, 외로움을 보여준다. 또 그 다음 에피소드 '나 여기있어요'는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다"고 한줄 정리할 법한

이야기를 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했으며 어떤 때 가장 행복했는지, 그리고 남은 자의 눈물이 언제 흘려지고 언제

닦이는지..그렇게 잔뜩 응축된 화면과 스토리로 속삭인다. 알몸으로 있을 때 가장 섹시하지만, 또 알몸으로 안아줄

때 가장 행복하지만, 굳이 섹스는 없어도 된다. 섹스가 없어도 사랑이다.


이런 때라면, 확실히 육체적 '사랑'은 그다지 의미가 없거나 무언가 품격이 떨어지는 뭔가로 보인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한대목을 빌자면, "이 어이없는 엉덩이의 율동, 초라하기 짝이 없는 축축하게 젖은 조그마한 페니스가 시들어

가는 바로 이것...결국 여기에 경멸감을 느낀 현대인은 옳은 것이다."
라고 볼 법하단 이야기다.


그렇지만 사랑은 역시 자극적이고 치명적인 무엇이기도 하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페로몬 향내따라 내달리는 남자들이, 혹은 여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33번째 남자'에서 나오듯 자극만을

좇다보면 어느새 피향기 가득한 식탁 위에 사지가 올라있을지도 모르지만..그럼에도 서른세번째, 서른네번째, 사냥감은

쉼없이 덤벼든다. 상대가 이성이던 동성이던 그것은 별반 다를 바 없다. '끝과 시작'에서 나온 엄정화와 김효진은

이룰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때로 사랑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스스로의 정상적인 생활

자체를 파멸로 몰고 가더라도,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생활을 온통 갈아엎어버릴지라도, 그런 사랑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섹스는 격렬하다. 끈이 동원될 수도 있고, 피를 볼지도 모른다. 좀더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된다.


어쩌면, 섹스는 그 자체로 사랑인가. 다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빌자면, "이 세상에 남은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당신 속에 들어갈 수 있으니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그 번다하고 다소 용두사미로

보일지 모르는 행위로부터 "우아하고 힘찬 육체의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 안에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에게 열어준다는 메타포의 현현.


그리고 '순간을 믿어요'. 사실 이 다섯번째 에피소드는 좀 패착이 아닐까 싶은데, 10대 또래로 구성된 세 커플이 서로의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다소 도발적인 스토리다. 아마 십대의 발랄함과 미성숙함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그보다

나이많은 이들의 '시험'이었다면, 그래서 일종의 스와핑으로 나타났다면 좀더 위태롭고 좀더 위험했을 게다. 감독은

거기까지는 (아마도) 차마 나가지 못하고 만다. 에피소드 다섯개의 배열이 결국 섹스와 사랑의 관계를 좀더 진지하게

묻고자 했던 의도를 품고 있었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치열함이 조금 부족했고 도발성은 매우 부족했던 거 아닐까.


마지막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며 나오는 내레이션이 보다 분명히 이 영화의 의도를 전달한다.

아마도 그건 섹스와 사랑, 좀더 눈에 익은 편한 단어로는 육체와 정신, 그 중간의 황금비율에 대한 이야기.

내레이션으로 의도는 알겠는데, 답을 주지는 않았다. 나 역시 답은 모르겠다. 다만 영화제목의 권위를 빌자면, 역시

사랑은 오감을 모두 동원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정도?



* 사실 영화는 그렇게 야하지 않다. 그 흔한 가슴 한번 나오지도 않고, 부모님과 함께 봐도 별로 안 민망할 듯..

살색그림의 향연을 기대하고 보러 간다면 그닥 비추.




영화를 보기 전 가급적이면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피하려는 성향이 언젠가부터 생겨버렸다.

위드블로그에서 있었던 이 영화에 대한 시사회 신청을 하면서도, 여주인공 이름이 (아기공룡 둘리의 그)

'둘리'라니 왠지 더 보고 싶다느니, 희미한 기억 속 친구의 멘트를 팔아가며 신청은 했지만, 사실 시놉시스나

평가같은 것들에 대해선 일부러 눈을 감고 신청했던 거다.


광화문 인근에 이런 영화관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음식물 반입이 일체 금지된 데다가 전후좌우로 넓찍한

좌석공간, 그리고 세련된 마감재로 신경쓴 듯한 영화관 내부의 은근히 호기로운 분위기. 시네큐브에 도착해서야

내가 보게 될 영화의 제목을 확실히 각인했다. 그전까지는 블랙 스노우였는지 블랙 아이스였는지 계속 헷갈렸다.




알고 보니 여주인공은 둘리가 아니라 툴리였고, 영화는 그리스 비극과 같은 느낌을 풍겼다.

이렇게 발랄하게(!) 시작했던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심영섭 평론가님과 함께 했던 '씨네토크' 자리에서 누군가

지적했던 것처럼 '놀랍게도' 이 둘은 부부다. 주름살이 패이기 시작하는 마흔살 나이의 아내지만, 그 둘은

뜨겁고도 농염한 사랑을 나눈다.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고 잠시 생각할 만큼 행복해 보인다.


심영섭님은 일종의 나비효과라고 했지만, 이걸 나비효과라고 부를 수 있을지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행복하던

어느 한순간 기타케이스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다섯개 들이 콘돔 한 통, 그 안에 내용물이 세개밖에 없었다는

데서 최초의 충격이 가해진다. 신뢰를 잃은 남편, 그렇게 살얼음판 위에 콱 내리찍힌 후에는 남편의 자잘한

거짓말을 타고 균열이 사방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 사라가 의도치않게 '남편의 애인', 툴리를 만나면서 찌지지직, 손쓸 수 없는 속도로 번지기

시작한다. '남이 하면 불륜, 자신이 하면 멜로'라는 손쉬운 한마디는 모종의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남이 하는 

'불륜'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것도 역시 사랑이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었던 감정의 흐름들, 그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무리라 해도 때로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나 보다. 사라가 툴리에게 그랬다.

그게 심지어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 할 지라도. 남편을 빼앗긴 상처받은 사라는 남자를 빼앗고

불안해하는 툴리를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수백번씩이나 생각하는 동시에, 가면 쓴 사라, 크리스타는 툴리와

은밀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제 사라는 신뢰를 저버린 남편을

미워하고, 툴리에게도 불성실한 남편을 미워하며, 그럼에도 사랑하고, 깨어진 자신의 사랑을 슬퍼하고,

툴리를 정말 좋아하며, 남편을 뺏은 툴리를 증오하고, 툴리의 젊음을 시기하며, 스스로의 위선과 가식을

혐오하고, 툴리의 행운을 빈다. 이 모든 혼란스런 감정은 그대로 '진심'이다.


그런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사라와 툴리의 내면에서 들끓으며 더더욱 복잡하고 모순적인 그림을 보이면서도,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아내 vs 아내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통속적인 구도에서 비롯한 갈등은 또 자체의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속내야 어떻든 그녀들 둘은 서로 맞부딪혀야 하는 사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결론으로 치닫게 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그리스 비극들처럼, 그 둘은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균열이 극대화되는 순간, 핀란드의 백야는 끝나고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벗어난 자동차는 나무둥치에

들이박는다.


미워하는 사람을, 신뢰를 잃은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는 신뢰와 사랑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남편과 아내 간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보다 초점을 맞추는 건 오히려 사라와 툴리의 문제다. 어느 순간 (조금 많이 꼬아진) '델마와 루이스'가

왠지 연상되기도 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비극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래도 그 둘은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을

진부하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를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었다.


스토리를 요약하려 해도 참 쉽지 않다. 영화가 인물들의 행동이 아닌 감정과 심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딱 떨어지는 느낌은 전혀 없이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느낌마저 들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스토리 전개도

뭔가 폭발적인 한방을 바랬던 관객에게라면 어지러울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원래 사람 맘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 말로 하나하나 설명해내기엔 참 구구하고 재미없고 설득력도 없기 십상일 텐데, 이렇게 흡인력있고

짜임새있게 풀어낸 감독이 대단하다 싶다.


영화를 다보고 생각한다.

블랙아이스란, 당신과 나의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에마저 끼어있는 자그마한 살얼음판. 잠시 방심한 한순간이면

관계의 통제력을 잃게 만들어 한껏 감정을 휘젓다가 어디론가 꼬라박히게 만드는. 안전운전..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기엔, 저 멀리서 비웃고 있는 '운명'이란 녀석의 썩소가 맘에 걸린다.



 
 

종로3가의 허름한 낙원상가 4층에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는데, 아직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나면 늘 그렇듯, 잔뜩 피곤하고 뭔가에 절어버린 듯한 느낌으로..한동안 고심했다.

시사회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피곤하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보는 게 요샌 별로 땡기지도 않고,

금요일 저녁에 사람 복작대는 종로통에서 헤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시사회 티켓교부처에서 이름을 말하고 티켓 두 장을 받았다. 한 장은 됐다고 돌려줄까 하다가, 그냥 받았다.

담배를 피는 커플들 틈에 끼어 낙원상가 옥상에서 종로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약간 헤매며 찾은 이곳은, 말하자면

낙원상가 건물 옥상에 위치한 모양새의 영화관인 거다. 카메라를 들고 왔어도 뭔가 신기한 것들이 잡혔겠다고

살짝 아쉬워했지만, 어차피 영화시간에 딱 맞춰 근근히 도착했으니 할애할 시간도 얼마 없었다. 입장 전에 티켓

한 장은 아예 가방에 밀어넣고, 나머지 한 장만 손에 쥔 채 조용히 통과했다.


처음 이 영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다, 갯벌 어쩌구 하길래 난 왠지 당연히 '태안 앞바다'겠거니 했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영화는 근 15년간 끌어왔던 '새만금 간척사업' 에 대한 이야기였다. 망가지는 갯벌을 보여주며

자연 다큐처럼 시작해서는, 간척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농성이나 천막투쟁을 보여주고, 그간 간척 사업을 둘러싼

간략한 역사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간척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분열'되고 '패배'했는지,

또한 그러면서도 바다를 터전삼아 살아가는 여성어민들이 얼마나 강인하면서 인간적인지를 보여준다.


대책위의 지지부진한 행동, 불분명한 입장표명, 그리고 간척사업으로 인한 피해가 고르지 않게 돌아가는

선주들과 非선주들 간의 미묘한 입장차. 최종적으로 33킬로에 달하는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기 전까지 몇번이나

예고되었던 대규모 선상시위의 뉴스는 나도 들은 기억이 있지만, 그렇게 허탈하고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건지는

몰랐다. 엉엉 울면서 하소연을 하는 젊은 아저씨의 붉은 눈시울이 가슴에 와 닿았고 물막이 공사현장을 점거하곤

밤늦도록 핏대높여 자신들끼리 방향을 두고 싸우던 그들의 절실하고 필사적인 모습이 먹먹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복잡하고 미묘한 그림을 보여주는 다큐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뭐니뭐니해도 어머니들이 앞장섰다. 어느 분은 감성적인 소녀처럼 바닷가 생명들이 죽어나간다며 한숨지었고,

또 어느 분은 자식넘이 들고 온 돈내라는 가정통신문이 겁난다며 분노했고, 그렇게 제각기의 포인트는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해수유통. 물막이댐을 터서 바다를 되살려내라. 그렇게 청와대 앞에서 일인시위도 하고, 농림부로

찾아가 책임자와의 면담도 요구하고, 해상 시위에도 앞장서고. 그리고 결국 한 분은 갯벌을 베고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는 농림부에 찾아갔던 그분들이 대체 누구를 보고 소리치고 호통을 쳐야 할지 모른 채, 사방에 대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너무 와닿았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누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가. 그(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길래 화면 귀퉁이에도 나오지 않는가. 그분들의 흥분한 눈초리와 새된, 그러다가 쉬어버린

목소리는 농림부나 청와대, 혹은 국가기관 그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한 채 허탈하게도 증발해버린다.


대법원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각된 어느 날, 어민 한분이 초딩 4년짜리 딸내미에게 술김

훅훅 뻗치며 허탈하게 말한다. "넌 나중에 공부 잘해도 판사 하지 말어, 그럼 아빤 너 안 봐." "차라리 시인되라.

시인이나 철학자. 그래서 이 사회 썩어빠진 거 전부 비판해 버려." ..그렇게 갯벌은 하얗게 소금기가 낀 벌판이

되어간다. "물막이한 게 뭐라고 태극기를 흔들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도 아녀." 그러게요, 그러게 말입니다.


터전을 상실한 그분들이 다른 지역의 바다로 옮기면 되지 않나..하고 살짝 생각했지만, 내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

한 분이 말씀하신다. 마치 농부가 대지에 민감하듯, 어부는 바다에 민감한가 보다. 다른 지역은 영 다른 환경에

다른 기술과 도구가 필요한, 말하자면 다른 기술을 요하는 다른 '직종'인 셈이랄까. 당신들의 직장을 한순간

상실해버린 채 제대로 된 보상조차 못 받고 등떠밀리는 상황..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랐었다


하긴, 나는 바다, 갯벌, 생태라고 하면 기껏 '태안' 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시크한 도시 남성인데다가, 물막이

공사가 끝났을 뿐 여전히 그곳에는 거대한 바다(랄까 호수랄까)가 버티고 있음을 상상도 못했던 상상력 빈곤한

녀석인 거다. 그 곳을 매립하기 위해서는 인근 반경 60킬로 내의 야산을 모두 깨야 한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어느

주민 한 분이 말했던 것처럼 (미국 뉴올리언주를 덮쳤던 카트리나 같은) 재해가 닥쳐서 차라리 저 물막이댐을

쓸어가 버리면 어떨까..


* 2009 희망다큐프로젝트는 1월 '워낭소리'를 시작으로, 2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3월 '할매꽃',

4월 '살기 위하여', 그리고 5월 '길', 6월 '3xFTM'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한국독립영화협회와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개최하는 “아시아 독립영화의 오늘” 기획전 티켓을 받게 되었다.

3월 13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 나온 14편의 작품 중에는 '똥파리', '농민가', '개종자', '유토피아' 등

투박하고 날것의 느낌이 풀풀 풍기는 제목도 있었고, '리버 피플'이니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조금은 더 제목에

신경을 쓴 듯한 영화도 있었다.


그 중 시놉시스로나 제목으로나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양익준감독의 '똥파리'란 작품이었다. 오늘 아침 신문에

이 작품이 프랑스 도빌 영화제에서 대상과 국제평론가 협회상을 받았다는 기사가 났던데..아쉬운 일이다. 

내가 보았던 "멘탈"이란 영화는 너무 길었고, 너무 난해했달까. 무려 두시간 십오분동안 영화를 보고 나니 완전히

지쳐버렸댔다.


멘탈. MENTAL. 精神. 정신질환자들이 겪고 있는 두 가지 질병에 대해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들이 '정상인'과 달리 앓고 있는 특정한 질환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나 다른 '정상인'를 막론하고

잠복해있는 '정신질환자' 혹은 정신병자 혹은 (막나가자면) 미친사람, 또라이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 당장 내가

모종의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고 하면 영화 속 그들이 보여줬듯 사회로부터 완전히 밀려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주변인의 시각에서 굳이 냉랭함과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는 2시간 내내 그들이 사실 그렇게 두렵지 않으며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는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병원에서나, 가정 도우미가 드나드는 집에서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카메라를 따르다 보면

그들의 앙상하고 낯선 이미지에 살이 붙고 피가 돌면서, 그들도 별반 유별난 구석 없는 사람이라는..그런 식의

진부한 결론을 향해 치닫는 듯 하다.


그렇지만, 마지막 15분쯤 카메라는 한 정신질환 노인이 복지시설 내로 들어와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을 실시간에

가까울 정도로, 집요하게 따라간다. 그 15분간 솔직히 그 노인이 어떻게 그렇게 막 나갈 수 있는지, 주위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대로 하는 태도를 보며 복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 거였을까? 쉽사리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은 같은 사람'이라며 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것과, 직접 그들의 복지와 생활을 챙겨야 하는 입장에서

맞닥뜨리는 건 역시 다르다고? 고작 15분여 그 노인의 언행과 태도를 마주했을 뿐인데도 참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의 의도인 걸까, 아님 나만 그렇게 느낀 걸까는 모르겠지만.




조커는 번번이 화가 났다.

갱단이라는 것들은 '가오'도 잡을 줄 모르고 돈만 밝히며, 경찰은 화끈하게 자신과 놀아주기는 커녕 빌빌거리다가

뒤로 돈이나 찔러주면 좋다고 실실거린다. 범죄자라고 감옥에 처박힌 것들도 조금만 겁주면 오줌이나 질질 싸거나

눈물부터 흘리는 심약한 것들이고, 그런 범죄자와 자신은 다르다며 고고한 척 하는 '시민'들 역시 애써 자신들

마음 속에 있는 악마적 요소들을 외면하고 있을 뿐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선하고 나무랄데

없는 '문명화된' 사람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이 조커 그에겐 역겹기까지 하다. 착한 척, 질서잡힌 척, 교화된 척이나

하지 말던가.


그는 생각한다. 나는 억울하다.

인간은 누구나 악한 거다. 네놈들은 분칠한 내모습이 무섭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네놈들이 위선과 허영으로

자신의 악한 모습에 덕지덕지 분칠해 놓은 것은 더더욱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선한 척, 고상한 척, 고결한 척

하며 애써 겁먹지 않은 척 자신에게 대적하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니들 마음속의 악마를 보란 말이다. 우린

다르지 않아. 왜 나를 별종(Freak)이라고 몰아가지? 왜 나만 나쁜 놈이라 비난하지? 니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은 원래 혼돈 그 자체이고, 악과 선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는데, 왜 날 거세하려 들지?


그렇다면 좋다.

니들이 스스로의 가면을 벗도록 해주지. 난 돈 따위 관심없어. 다만 당신들이 스스로 각성하길 바랄 뿐이야.

조커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심판을 내린다. 기독교적인 의미의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계량하고

본모습을 대면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린 속내와 직면하고, 그걸 따르도록 강제, 혹은

유인코자 한다. 덴트 검사야말로 배트맨이 '백기사'이자 영웅으로 세워내려할 만큼 강하고 훌륭한 '가면'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그 역시 조커에 의해 '투페이스'로서의 광기에 먹히고 만다.


여기서 꼭 항변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건, 그 광기 자체를 내가 불러낸 건 아니란 사실이야. 검사 양반 그가 그토록 크고 강한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반대로 그가 그만큼 크고 강한 악의를 감추고 있었단 이야기도 되지. 그는 자신의 속에 애초부터 존재하던

'광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야, 약간 내가 돕기는 했지만 말이지. 그가 왜 받아들였냐고? 그 이름모를 여자의

죽음이 마치 방아쇠처럼 그의 가면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알 바 아냐. 어쨌든 난 또다시 내

주장을 강화하는 커다란 샘플을 얻었지. 세상의 것들은 온통 타락했고, 악하며, 세상의 본질은 카오스 그 자체라는.

그런데 영 맘에 안드는 자식이 있다. 배트맨.

내가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추의 한쪽 끝, 극단이라면 또다른 한쪽 끝에 서서 균형을 잡고 있는 녀석. 그런데 그는

나를 없애려고만 드니 골치가 아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나를 죽일 용기도 없는 '찌질이'다. 그러니 더

배알이 꼴리는지도 모르지. 내가 그를 희롱하고 놀리듯이 그도 나와 놀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유머감각도 없고 '균형'이란 걸 생각지도 못하는 꽉 막힌 놈이다. 몇번이고 말하지만, Why, so, serious?

난 몇번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시험해 보았는데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나처럼 별종(Freak)이다.

그의 것은 '가면'이 아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박쥐가면을 쓴 찌질이와 허연 분칠을 한 입째진 조커만이

실은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그가 적당히 섞인 채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조심스런 미소와 겸손한 태도를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거다. 사람들이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결국 배트맨 너와 조커 나는 사이좋게 정신병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거다. 너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리지 않은 동전 앞면'이 나오는 녀석과, 나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린 앞면'이

나오는 존재는 '사람처럼' 살 수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다수결원칙으로 정의한다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배트맨 너와 나는 이미 '사람'이란 종에 속하지 않는지도 모르니까.


아마도 그래서 우린 살아남았다.

서로 몇번씩이나 죽일 수도 있었지만, 지겹고 이가 갈리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일 지경이겠지만, 니가 없이는 내가

무너지고, 내가 없이는 니가 무너지겠지. You, complete, me. 다음엔 좀더 멋지게 해보자구. 넌 여전히 사람들이

본래 선하고 질서를 선호한다고 믿고 있겠지만, 내가 그 믿음을 산산이 깨뜨려 보여주지. 아직까지 우리의 싸움은

오십 대 오십. 잠깐 어느쪽으로 추가 기운 듯 보일 수야 있겠지만, 아마 앞으로의 싸움도 오십 대 오십.



P.S. 그렇지만 말야 친구, 결과를 안다고 재미없어지는 건 아냐. 난 당신과 춤추듯 스텝을 밟을 뿐야.

누가 리드하던, 한발 앞으로 딛었다가 한발 뒤로 뺐다가, 날렵하게 턴을 하기도 하고 말이지. 멋지지 않아?

끝도 결말도 없는 선과 악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지.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그 속에서 가는 거라구.





#1. '남편'이 아니라 '아내'가 결혼한 이유.

'남편이 결혼했다'란 제목은 '아내가 결혼했다'는 지금의 제목보다 더욱 비현실적일 뿐더러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 남자로, 혹은 남편으로 산다는 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굳이 따로 결혼을 생각할 만큼 머리가

복잡한 일이거나 채워지기 힘든 불만족을 떠안고 지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단순하기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한국 남자에게 결혼은 아직 '남는 장사'고, 하고 나면 장땡인 '쑈부'인 게 사실이다. 


그리고 굳이 '결혼'이란 형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틔워놓아야 할 만큼 절박하지도 않으며, 언제든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즐기고..그게 또 '남자답다'는 식으로 용인받기도 하는 게 아직은 사실인 듯 하다. 여전히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고, 영화 중의 대사말마따나 '바람핀 뇬 용서못하고 차버리고 떠난

놈 용서못한다'는 게 일종의 관습법인 게다.

결국 남편이라면, 굳이 또다시 결혼을 할 생각을 할 유인이 적다. 그래서, 아내가 결혼했다.


#2. 목마른 그/녀가 우물을 팔 뿐.

그렇지만 이 영화를 꼭 페미니즘적인 시각, 그러니까 가부장제적인 가족제도 하에서 구속받고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해방이란 측면에서 보아야 할 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남자 둘, 여자 하나 간의 섹스에 대한 문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할 뿐, 어정쩡한 선에서 봉합하고 있다고 보이니 그다지 적극적으로 '성 해방'을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요사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코드로 읽어내려가려는 내 편향성이 걸리긴 하지만, 이 영화 역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을 끝까지 추구하고 지켜나가려는 이야기..란 느낌이다.


그녀는 사랑이 하나가 아닐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반으로 쪼개지냐는 그의 항변에,

뻔뻔하지만 또 사랑스럽게도 그녀는 이렇게 응수한다. 사랑이 절반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 배가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마음이 상대의 장점, 단점, 그리고 온갖 고유한 특성들을 다 껴안아 주는

거라면, 그는 그녀가 믿고 있는 이러한 애정관을 미리 알았어야 했고, 껴안거나 내치거나 해야 했을 거다.


그는 그렇지만 '그녀가 원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녀의 연애 생활을 무덤 속으로 끌고

가려고' 결혼을 이미 해버렸다. 결혼은 그런 게 아닐 텐데, 아니어야 할 텐데, 뒤늦게 수업료가 어마어마하다.


사랑은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애초 서로에게 마법같이 끌려들었던 그 감정을 그대로

지켜 나가는 두 사람에게 이해되고 용인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문제될 것은

없을 거 같다. 그리고 남1과 여, 남2와 여는 그렇게 우여곡절과 자기부정과 관계부정을 거쳐, 자신들의 '사랑'을

새롭게 정의하고 단단히 다져나간다. 그들은 아마, '축구공'을 차고 노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어릴 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걸 게다. 그들 인생의 축구공을 단단히 쥐고 함께 살아가기를.


#3. 사랑을 유지시키는 신기술, 두 번의 결혼?

그런데 꼭 또 한번의 결혼이어야 했을까. 그보다, 그녀가 남2에게 느꼈던 것은 사랑이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상대의 도드라진 점만 보는 연애와는 달리, 결혼은 삶 자체가 포개지는 느낌이라고, 새로운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행복을 남2와도 나누고 싶다고.


어쩌면 그녀는 흔히들 결혼을 핑계로, 변화를 핑계로, 혹은 다른 무엇인가 적당한 핑계로 사랑이 식고 '情'으로

굳히기에 들어가는 관계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번에 두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있다, 혹은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하는 거고, 평생에 걸친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는 여전히 흔들림없는 게다. (상대가 하나던 둘이던

간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평생 한사람만 사랑할 자신이 있냐"고 묻는 도발적인 카피는 사실 좀 초점이 엇나가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어쩜 덧없고 허무한 '사랑'의 불꽃을 계속 신선하고 뜨겁게 지켜내기 위해 다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꼼수를 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이 사랑이었다고, 혹은 자기합리화라고 재단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녀와 사랑하는 자의 몫이다.


#4. 내게 묻는다면.

다만, 내가 그라면, 그녀를 이해하려고 애써보긴 하겠지만..끝내 못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이 하나가 아닐 수 있을까. 게맛살 쪼개지듯이 사람 맘이 두 곳으로 쫙 쪼개져서 둘다 진짜임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건 잠정적인 과도기일 뿐 결국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도덕적으로 누구에게 미안하고

못할 짓이고 라는 식의 비난이 아니라, 결국 그 두 사람 모두에게서 외로움만 더 커지고 마음의 상처만 깊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 명씩이었다면 그 순간 상대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또 자신의 것-"내꺼"-이라고 믿으며

한때나마 충일감을 느끼고 외로움을 떨쳤겠지만, 그런 기적과도 같은 마법을 온통 망쳐버리는 짓 아닐까.


그래서 나라면,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영원한 기간동안 그녀가 나와 또다른

남자를 사랑할 거라는 선언을 받아들여 그녀를 사랑할 자신은 없다. 물론 모, 닥쳐봐야 아는 일이지만.



덧댐. 아마도 '채털리부인의 사랑'에서 나왔던 대목을 차용한 거 같은데, 맨살-혹은 우비만 입고-로 소낙비

빗방울을 후두둑후두둑 맞으며 사랑하는 이와 야외 섹스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환타지, 그걸 실제로 남2와

했었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내가 이 영화를 그다지 강하거나 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이유다.


덧댐2. 손예진의 매력이란...그리고 뮤직비디오로 '요조'의 모닝스타가 쓰였는 줄은 몰랐다.


#1. 지워진 테입에 덧씌워진 '새롭고 오랜 기억'.
 
제리(잭 블랙)이 사고로 자석인간이 되고 나서 친구 마이크(모스 데프)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의 비디오 테입이

전부 지워진다. 그렇게 아무 내용이나 기억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 채 허망한 타이틀과 앙상한 시놉시스만 걸치고

남아있는 테입들이지만, 그들의 필사적이고도 기발한 재창조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롭지만 익숙한 무엇들을

품게 된다.


옛 영화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묘하게 코믹하고, 또 묘하게 감탄하게 만드는 그들의 새 영화들은, 마치 자신의

실수로던 어떤 이유로던 서둘러-예기치 않게-지워버린 과거의 사랑을 다시금 기를 쓰고 기억하고 각인해낸..

그런 결과물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큰 얼개와 스토리 전개는 비슷하다 해도, 자신의 입맛과 현재 상황에 맞춰

이리저리 각색되고 힘을 덜 빼고 더 넣은 장면들.


그들의 '새롭고도 낡은' 영화는 대박이 났다. 사랑이 지난 후의 '새롭고도 낡은' 기억 역시 대개 대박이 되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쩜 평생 품을 가슴시린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2. 지워지는 '파사익의 팻츠'에 덧씌워지는 '새롭고 오랜 기억'

비디오 가게 주인 플레처(대니 글로버)는 이 마을, 파사익(Passaic)과 자신의 가게가 있는 건물에 얽힌 '팻츠'란

재즈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비감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라곤 마이크와 제리 뿐이었던 듯 하다. 건물을 철거하려는 당국의 시도에

끈질기게 저항해 보았지만 끝내 일주일 후 건물이 해체되기로 통보를 받은 날, 그는 사실 '팻츠'와 그 건물, 그리고

그 마을을 묶어주던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의 재구성. 신부님, 독실한 교인,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풀어내는 '구라'들이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펑, 소리내어 부정당할 뻔 했던 '팻츠'와의 이야기끈을 더욱 딴딴하고 풍요롭게 비끄러

매어주는 동앗줄이 되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불러낼 만큼 힘있는 '사실'이 된다.


그렇게 가게 주인 플레처가 지워 버리려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이야기는 다시금 생명력을

얻고 또다시 '새롭고도 낡은' 기억으로 화한다. 그건 더이상 플레처가 말했던 그 내용과도 다르지만, 또 예전과

같이 얄팍하고 의미박약한 이야기도 아니다.



#3. 시간에 씻겨나가는 기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사실 'Be Kind, Rewind' 이 영화 코미디라고 분류되어 있다. 그냥 배우들의 재기발랄한 표정과 연기를 즐겨주고,

또 노골적으로 조악한 특수효과, 그렇지만 그 통통 튀는 상상력과 표현력에 탄복하며 살짝 마지막에서 감동해

주면 그만일 영화인데, 괜히 심각한 척 다른 데를 보며 되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비카인드 리와인드', 되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도로 의역될 수 있을까. 비디오 가게에 크게 적혀

있기도 한 이 제목은 그렇지만 괜히 이런저런 다른 생각으로 나를 계속 몰고 간다.

"종종 짜증나고 싫던 기억들, 다시 되감아 조금 더 여유롭고 아름답게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만의 기억이라 여겨지던 것, 다시 되감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말입니다...


나만 가슴이 살짝 아프게 본 걸까. 모르겠다.



덧댐. 참, 영화를 다 보고 이 영화 출연진들을 일별하는데 깜짝 놀랬다. 시고니 위버가 나왔었다고..??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oscar@momo: 아카데미의 보석들]에서 상영된 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하다

놓쳤거나, 기대하고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그래도 몇 개 딱히 끌리지 않는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더 레슬러". 제목만 봐도 뭔가 센스없어 보이고 무성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시놉시스를 약간 보니

대충 '은퇴한 레슬링 영웅의 눈물겨운 부활..' 그런 식의 뻔한 레퍼토리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 2008/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105분/청소년관람불가

은퇴한 노년의 레슬러의 눈물겨운 재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 미키 루크의 화려한 재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으며, 이미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미키 루크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쥘 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98년 장편 데뷔작 <파이>와 2000년 <레퀴엠>으로 영화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작이며, 1992년 <내 사촌 비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후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마리사 토메이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면서, 두번째 여우조연상에 도전한다.(씨네아트 상영작 정보 中)


그렇지만 시간상의 제약으로 다소 체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던 이 영화는, 의외였다.

노쇠한 영웅의 재기..라는 뻔한 주제에 따라붙기 쉬운 뻔한 묘사들, 뻔한 동기 부여들에 더해 그냥 괜찮은 영화로

남는 게 아니라, 그나마 남아있는 삶의 안온한 부분들을 전부-자의던 타의던-던져 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에센스로 바로 돌진하고 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느순간 자신의 지난 삶이 실은 자신의 황금기였음을 깨닫는 것 같다. 자신에게 현재 남아있는 건

소원해진 가족, 얼굴도 까먹은 친구들, 그리고 밥벌어먹고 사느라 망가져가는 몸뚱이, 그렇게 누추해진 삶일 뿐.

그러면 보통 며칠 싱숭생숭하다가 술 한잔 하고 풀기도 하고-더러는 눈물을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혹은

돌아올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있는 여행을 다녀온다거나..그렇게 어떻게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현재의

자리로 고분고분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건 뭐랄까, 추운 겨울날 아침 눈을 딱 떴을 때, 그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벗어나기 싫어 더욱 안으로 

파고 들듯..그렇게 '남아있는 행복'들에 집착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레슬러는 달랐다. 그나마 그에게 안온함을 주고 남아있는 삶의 행복쪼가리들이라도 꼭꼭 지키며 남은 삶을

방어하려는 자세를 굳힌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쳐진 링으로 돌아가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는 살이 깨끗하게 발라진 뼈다귀만 애꿎게 핥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았던 게다.


그는 착하지도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며, 사람에 대한 속깊은 사랑이나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알았고, 다른 대체물들로 대리만족을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어나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아마도 그 점이, 가게에서 쌍욕을 하고 자해를 하며, 스테플러 철심을 몸에 박아넣고 피칠갑을 하는 그를 끝내

연민하고 응원하게 되는 이유지 싶다.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는 외톨이 레슬러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





카센터 김씨와 처음 만났을 때, 밀양의 한자 의미를 아냐는 생뚱한 질문을 던져 대화의 허리를 댕겅 잘라버렸던

그녀. 그 질문은, 어지럽게 자란 둑방 풀섶에 앉아 뜬금없이 '좋다~'라는 말을 내뱉었던 만큼이나 맥락이 없었다.

그래도 횡뎅그레하게 던져진 이 말에는 되바라진 아들녀석이 "뭐가 좋아?"라고 받아치기라도 했었다. 도시인인

자신이 촌에 '내려왔다'는 현실에 더해 그럴듯한 비장미와 낭만이 서려있음을 만끽하는 그녀.


그녀는 허영쟁이다. 그녀는, 밀양에 내려온 자신이 무언가 특별해 보이기를 원했고, "죽은 남편을 못잊어 남편의

고향에 내려와 살기까지 하는 여자", "서울에서 내려온 돈많은 여자", 혹은 (김씨의 장단에 맞추어) "국제 콩쿨서
 
우승도 한 피아니스트"같은 아우라를 덮어쓰고 싶어했다.


이런 자잘한 허영심은 그녀의 아이를 데려간다. 이제 "남편에 이어 자식까지 잡아먹고 만" 신애에겐 남은 게 없다.

신을 믿노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감염되어, 그녀는 신의 허울을 빌린 거대한 허영심으로 살아남고자 한다.

신, 신을 아는 자, 신을 모르는 가엾고 불쌍한 자의 위계 속에서 그녀는 다시금 굽어볼 발판을 마련했다. 급기야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빗발치는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러 나선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자에 대해 갈갈이 찢어죽이겠다는 증오 대신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러. 메조키스트나 할 법한 묘한 방식의 승리

선언을 위해.


그녀가 '사랑과 용서'로 굽어보려 했던 그는 이미 같은 무기, '신의 사랑과 용서'를 장착하고 있었다. 좌절한

그녀의 허영심. 십자가 아래 그를 무릎꿇리고 가련한 존재로 격하하려던 사디스트적 욕망이 픽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다.


그렇다, 신애는 깨닫는다. 처음 교회에 나가 온몸으로 울던 것은 신의 가피 따위에 위로받은 것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운 그녀는 예기치 못한 지렁이 한마리에도 와락 허물어지지 않았던가.

신 = 지렁이. BGM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전두환이 이노래듣고 불같이 화내며 방송금지시킬만 하다고

처음으로 공감했다.ㅋ)


그녀는 경건한(?) 야외 집회를 망치고, 집사의 성욕을 불지르고, 끝내는 한결같은 김씨의 감정마저 농락하면서,

신에게 복수하려 한다. 그녀의 복수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결정적으로 상처받고 만 그녀의 허영심? 끊임없이

주기만 하는 연애같은 종교에 대한 실망? 허영심에 젖어있던 그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스스로의 의지로

2등칸에서 '불쌍하고 가련한' 3등칸으로 물러난 그녀는, 신에 대한 복수의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손목을 긋고서야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이었다. 살려주세요. 나 지금 아파요. 사람 살려요..


왜 하필 그시간에 그곳에 있었냐던 미용실을 뛰쳐나온 그녀는, 장독 위에 거울을 걸쳐놓고 혼자 힘으로 머리를

깎으려 한다. 목을 이리저리 빼고, 팔은 불편하게 굽힌 채다. 김씨의 등장, 그리고 적당한 높이에 든든히 세워진

거울. 햇빛 한 조각에 신이 숨어있던 말던, 그녀는 인간스러운 그로부터 베풀어진 그 정도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위계에 기댄 자기파괴적인 허영심이 무독하고 고상한 자존심으로 순화되는 순간. 그것은 또한, 살려달라던

그녀의 호소가 답을 얻은 순간.


김씨는, 여러모로 놀라운 인물이다. 교도소에 굳이 찾아가겠다는 신애에게 사람들이 '화이팅' 어쩌구 외칠 때

코웃음을 던지고, 계속 교회에 다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안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맘편해서, 습관이

되어서 계속 다닌다고. 아편의 사용법에 대한 그 나름의 갈파가 아니었을까.


어쩌다 보니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 VIP시사회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VIP로 대접받고

싶어하고, 행사가 있으면 헤드테이블에 앉겠다고 난리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치 그런 거다. 내가 뜬금없는

호텔 VIP로 대접받아 영화시사회에 초대받는 상황.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러고 보면 요새 영화는 전부 시사회에 초대받아 보고 있다. 요새 좀 그렇다.)


영화는, 사람 얼굴을 쉽게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소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인물을 깔아두면서 시작했다.

그들의 사랑이 때론 막 깨어져 나갔고, 진행중이기도 하고, 혹은 피어나는가 싶더니 피시식 꺼져버리는 이야기들.

그런 짧막한 에피소드들이 서로 하나씩 단서들을 물면서 연결되고, 누군가의 불꽃같은 사랑은 또다른 누군가에겐

결혼생활을 송두리째 회의케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감정에 빠진다는 것은,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취사선택을 요구받았던 두 개의 알약 중 하나를 삼켜야

하는 바로 그 타이밍에 빠져드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생활, 지금까지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뭔가 낯설고 거슬리는

균열을 발견하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다만 매트릭스의 알약과 사랑의 차이라면, 이번

'핑크 알약'은 한번 먹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거 아닐까.


소설 하나를 쓰는 기분으로 연애나 사랑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감정의 변곡선의 위태위태한

궤적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어디서 언제쯤, 어떤 대사를 동원해 결말까지 써내리겠다는 다짐을 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 시점에 했을 거라 자각했던 건, 늘 그 사랑이 지나고 난 바로 다음이었다. 그대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해도,

사랑에 빠진 스스로의 감정을 즐기며, 그렇게 암묵적인 개요와 아웃라인에 맞춰 결말까지 숨가쁘게 한판 달리고

나선 문득 이건 자기애가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이기적인 '사랑'놀음을 깨고,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알렉스가 지지에게 빠져버리듯 그렇게

최초의 '핑크 알약'을 맛봤던 그런 순간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락하거나, 무의미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투적인 사랑이야기라기엔, 그리고 상투적인 변곡선들이 넘나들며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식의 뻔한

스토리라고 치부하기엔,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 커플(혹은 홀로 선 깨진 커플조차)의 모습이 이쁘다.

타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참 뻔하고 식상하고 닳고 낡은 이야기일지 몰라도, 지금 사랑에 빠져 있고, 그 사랑이

자신을 사랑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유치하고 이기적인 수준이 아니라면, 그 둘만의 이야기는 참 충만하고

내밀한 달콤한 소근거림으로 가득할 거다.


마침 발렌타인 데이란 게 다가왔고 또다시 솔로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겠지만,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부디 자신들의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소근대기를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어딘가엔

"He's just not that into you"라는 살벌한 가능성이 으르렁대며 웅크리고 있을지라도, 그저 매순간 진심을 따라

행동한다면, 그리고 그 진심에 감응한 또다른 진심이 용기를 낸다면,


He can be absofuckinglutely that into you. 비록 언젠가 마침표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찍게 될지라도.


* 스포일러가 약간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스포일러는 뭐니뭐니해도 "손수건을 준비하라"는 팁..이 아닐지.


사랑하는 열 살짜리 아들이 한순간 눈앞에서 스러져 버렸다. 그것은, 처음에는 사고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가누어가는 남은 세 가족, 에단, 그레이스, 그리고 딸-여동생이 있다.

에단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비난할 사람을 찾고 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아들의 부재, 그런 당혹스럽고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누구인지, 누가 그의 아들을 치고 도망갔는지 밝히고야 말겠다며 광기에 가까운

집념과 증오심을 불태운다. 어쩌면 그건 그의 아내 그레이스가 자칫 자책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해서, 혹은

자신조차 아내에게 원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억지로 몰고 나간 감정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레이스는 이미 떠난 그녀의 아들을 정리하고 남은 가족들을 잘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며,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연신 경련하듯 흔들리는 화면은 그녀의 바스라질 듯한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더이상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니 법적 절차니 운운하며 떠난 아이의

아픈 기억을 들추는 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아픔을 참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 입술에 힘을 주며,

그 슬프고 힘겨운 바람이 멎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느낌. 보고 있는 것조차 너무 아팠다.


사이좋던 오빠를 잃은 여동생은, 영문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꼬맹이지만

또 하늘에 있을 오빠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바칠 줄도 아는 녀석이다. 어쩌면 죽음 앞에서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라는 식의 당위 없이 있는 그대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또 보낼 줄 아는 게 아이들 아닐까.



그 사고로 인한 슬픔을 가누어가는 또다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고를 살인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었던 그였는지라, 실수로 쏟아버린 물처럼

의도치 않게 벌이고 만 사고는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 괴로움을 안기고 만다. 그렇게 그가

괴로워하면서 시간을 끌고, 거의 반사적으로 증거를 은폐하고, 또 겨우 짜낸 용기도 무성의한 경찰들 앞에서

사그라들어 버리면서 타이밍을 놓치는 사이, 그 사고는 살인으로 바뀌어 간다.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그의 압박감과 죄책감, 그리고 어느새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걸 둔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끼도록 바꿔버리는 시간의 강력한

산화력에 대항해서, 그와 에단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된다. 마주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가슴의 떨림, 그리고

그 진동을 상대가 눈치채면서 이야기는 폭발하듯 터져오르는 순간으로 급속히 달려나간다.


비극이란 건, 단순히 이야기가 슬퍼서 비극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그 인간의 숙명같은 것..뭐랄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뒤얽히고 결국은 옴쭉달싹 못하게 되는 그런 '통발'같은 스토리를 이른다고 했다.

어느 한편을 들어서 쉽게 다른 한 편을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욱 가슴이 답답하고 꽉 메이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게 만드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의 비극.



모두가 아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 사고라면, 누군가에게 아픔을 적극적으로 떠넘기는 게 살인 아닐까.


결국 한 아이의 사고는 남은 가족들이나, 그 죽음을 직접 초래하고 만 당사자, 그리고 그의 남은 가족들에게 모두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을 남긴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그 사고, ACCIDENT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걸 다른 단어가 아닌 '사고'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고와 살인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은 자들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모두 전가해버리려는 의지를 갖고 행하는 건 범죄, 살인.

그리고 남은 자들의 아픔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모르쇠하려는 게 아니라 기꺼이 내 몫을 나누어 받겠다는 자세라면

실수, 사고.


사고를 낸 드와이트, 죽은 아들의 부모인 에단과 그레이스가 모두 '인간'이어서 다행이다. 그들은 삶을 살아나가다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맞닥뜨렸으며, 그들 모두 그 사고의 피해자였던 것 아닐까..



* 삼국지 내용이야 다들 알 텐데 굳이 스포일러를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다만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듯 오우삼이란 이야기꾼은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고 드러내고 싶었는지를 느낀대로 말하는 정도랄까요.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주말의 명화 시간에 몇 번이고 봤던 영화가 몇 편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벤허'도

질릴 줄 모르고 봤던 작품들이었지만 무엇보다 The Towering Inferno, 한국어 제목으로는 심플하게 '타워링'을

빼놓을 수 없다.


재난이라고 하면 으레 폭풍, 해수면 상승, 우주인, 화산폭발..같은 어느정도 인력을 벗어난 것들을 다루고 있는

영화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가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대화재에 휩싸인
 
초고층건물에서 쥐잡듯 몰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주 조그마한 스파크에서 시작해 급기야 초고층빌딩

전체를 거대한 횃불처럼 살라먹으며 세 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 내내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불(火). 위협적으로 시뻘겋게 낼름이는 화염의 이미지가 어찌나 강렬하게 남았던지, 초등학교

혹은 이후의 유년시절에서도 화재방지 포스터 같은 걸 그릴라치면 가장 먼저 '타워링'의 장면들이 오버랩됐더랬다.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흔히 나관중 삼국지의 스토리에 익숙한 사람들이건 아니건 큰 상관없도록 한

배려인 건지, 영화는 삼국지의 전체적인 맥락과 큰 그림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이야기를

살짝 단순하게 변주한다는 느낌이다. 한국에서야 삼국지를 열여덟번 읽어야 서울대를 간다느니 하며 위풍당당한

동양의 고전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시 삼국지가 익숙치 않을 넓은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오우삼감독이라

그런지 이야기하는 데에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적벽대전 1'을 보지 않은 사람조차 그다지

영화를 따라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니까. 2편 스토리도 사실 크게 복잡하지 않은 게, 화계를 사용한 이후의

전쟁씬을 묘사하는 데 더 열중하는 듯.


물론 등장해야 할 사람들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천하삼분지세를 유지할 조조, 공명, 주유의 세 축을 비롯해

유비 삼형제, 손권, 조자룡, 감녕, 채모, 장윤, 화타..등등에 더해, 주유의 아내인 소교, 그리고 손권의 여동생인

'돼지' 상향과 숙재던가, 바보스럽고 우직하지만 축구를 잘해 천부장이 된 조조의 병사가 새롭게 비중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긴 시간동안 영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주인공은 불(火)이다.

바람의 힘을 빌어 화계를 쓰겠다고 양 진영에서 모두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부터, '적벽대전'이라 후세에 알려진

그 처참한 싸움이 있었던 전장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건대, 통제불가능한 수준의 대화재를 조장하고 방기한

거대재난지역으로 예정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애초 불화살과 화염탄의 성능을 키우지 못해 안달내던 감녕이 전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 이제 더이상 사람이

손쓸 도리도 없을 만큼 자체의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화마(火魔) 그 자체다. 조조군이나 손권군, 소속을

불문하고 화염이 무차별하게 너울지며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새삼 망연하고 경악스럽다.

그런 질린 듯한 표정의 끄트머리를 타고 얼굴에 선연해지는 결기, 혹은 광기의 힘을 빌어 그들은 앞의 상대를 베고

찌르고 자르고 부수고 으깬다.

의외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이미 주인공 노릇에 진부할 대로 진부해진 거물 정치인들이 아니라 손권의

여동생 상향과 그 '착한 멍청이' 숙재인지도 모르겠다. 조조의 노련한 선전선동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환자들이

'승! 리!'를 거푸 외치며 전의를 불사르는 모습은 그 정도의 정치적 깜냥도 안 되어서 '오해다'란 말을 유행어로

미는데 정신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뿐, 왠지 기괴하고 불편해 보였다. 그에 반해 이름조차 몇번 나오지 않는

숙재는 단지 세금을 삼년간 면하고 먹고 싶은 걸 맘껏 먹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줏대있는' 젊은이다. 그와 상향은 마치 에반겔리온이 AT-필드를 무력화시키듯이

소속과 명분의 이데올로기 싸움을 뻘쭘하게 만드는 소소한 연애담과 이벤트들로 사람냄새를 폴폴 피운다.

우연찮게도 그들은 모든 걸 덮치고 불살라 버리는 탐욕스런 불길이 빚어낸 재난에서는 한발 빗겨서 있는 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비극적 결말을 피하는 데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비록 영화 자체는 조조가 무도한 역적으로, 주유와 공명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는 식으로, 게다가 주유는

천하삼분지계를 위해 조조를 살려두고 말았다는 식으로 다소 가치판단을 유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그들은 정치인. 혹은 지배계층. 혹은 권력자.

조조에게, 주유에게, 그리고 공명에게 불을 이용한 화계라는 건, 각자의 명분을 실현하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기꺼이 마수(魔獸)를 풀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을 전제한다. 그 마수에게 어느순간 통제권을 빼앗기고 적과 내가

동시에 쫓기는 상황이 될지라도,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화마(火魔)를 불러내겠다는 그런

권력욕과 광기어린 정복욕은 불길이 과시하는 끝없는 탐욕과 순수한 비인간성과 통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유는 마지막에 신음을 토해내듯 말한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없다고. 애초 유황을 실은 배

몇 척으로 시작했던 화계가 어느 순간 온 바다와 산야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번져오른 데에 대한 자각이나

반성이었을까. 복잡한 눈빛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읽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소개 사이트에 보이는

이 영화에 대한 시놉시스(http://cinema.ticketlink.co.kr/detail/place_end01.jsp?pro_cd=A0009565)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란 사건에 대한 요약일 뿐 이 영화 자체에 충실한 시놉시스라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불타오른다, 는

그야말로 딱 떨어지는 표현 하나를 제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인간이 불러내고 만들어낸 재난에 대한 영화이자, 그 권력자입네 하는 인간들
 
자체가 다른 이들의 삶을 재앙에 빠뜨리는 재난임을 말하려고 한 영화는 아닐까. 조조군에 혈혈단신 찾아갔던

소교가 무지막지한 칼날 앞에서 하릴없이 횃불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장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주유의 아내가

아니라 백성을 대표해 조조 앞에 나섰다고 했던 그녀가 들고 있던 불은 고삐가 매인, 잘 통제되어 무섭지도 않은

그런 잔불이었다.




* 스포일러의 가능성은 없지 않으나...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훨씬

불쾌하지만) 질문이다...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우리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주진모는 왕이다. 그가 키워낸 호위무사 조인성은 그의 다정한 연인이다. 그들은 사랑한다.


왜 그들이 사랑하게 된 건지는 중요치 않다. 조인성이 어렸을 적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또랑또랑 말했을 때

시작된 건지, 갸름한 선의 어여쁜 아이가 칼을 휘두르며 수련하는 모습에 맘이 움직인 건지는 모른다. 그리고

조인성이 왜 주진모를 사랑하게 된 건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왕을 왕으로 받들고 아끼고 모셨을 뿐인데 왜

사랑하냐고 물으신다면.."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 왕 주진모에 대한 사랑은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 그들의 사랑도 이유없이, 마치 땅속에서 버섯이 솟아오르듯 문득 생겨났을
 
뿐이다.


그들의 다정하고 때로 후끈하지만 샤방샤방한 공기는, 그렇지만 이미 곳곳에 이물질이 침투하고 있었다.

원나라에서 온 왕후 송지효는 두 남자의 밀도높은 관계 속에 쐐기처럼 박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가 하면,

건룡위의 총관 조인성이 왕 주진모에게 입고 있는 총애를 질투하는 부총관도 도끼눈을 뜨고 있고, 후사가 없는

왕의 자리와 권세를 노리는 권문세족들도 호시탐탐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왕의 패착..이랄까. 핀치에 몰린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그리고 서로의 감정에 대해 굳은

확신이 있었다고는 해도, 주진모는 그와 조인성의 사랑을 "시험에 들게 했다." 사랑을 과신해서 함부로 휘두르다

자신도, 상대도 온통 상처투성이로 뻘밭에서 뒹구는 꼴을 많이 봤다. 곱게 품고 아끼고 소중히 다뤄도 언제고

깨지기 십상인 그 레어아이템을 덥썩 '욕정' 혹은 '또다른 사랑'과의 무한경쟁에 돌입시킨 남자 주진모.

사랑이란 감정이 세계일류를 지향할 것도 아닌 바에야 왜 다른 것들과 비기고 재어가며 질투하게 만드는 건지,

왕은 결국 자신이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던 상황에 스스로 갇혀버렸음을 깨닫는다.


"관계의 중심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나는 너를 원한다/나는 너를 원하지 않는다-양쪽 메시지 모두

그것이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이 시점에서 연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짝에게

다시 구애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낭만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대책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응답을 강요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꾀를 부리기도 하고, 그

앞에서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그는 합방을 떡밥으로 조인성과 송지효를 시험에 들게 하고, 모든 것을 왕의 뜻에 따를 것임을 스스로 고백케

하며, 대식국의 말과 그림, 달콤했던 추억의 환기를 통해 조인성을 자신에게 비끄러매어두고자 당근을 내건다.

동시에 그는 검이 술(術)이 아니라 혼(魂)이라며 갈구기도 하고,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아마도 조인성의 사랑)을

이미 잃었는데 너의 목숨을 취해서 무엇하냐며 삐지기도 하고, 조인성과 송지효의 또다른 사랑을 '욕정'이라

이름하도록 위협하기도 한다. 그는 조인성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다 여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라 믿지만, 사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할 방법이란 없다. 그게 불안하다.


그리고 미쳐돌아가는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통 뿌연 흙탕물로 흐트려놓듯 왕 주진모가 스스로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국사를 팽개치고 조인성에 대한 낭만적 테러리즘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왕의 여자 송지효에 대한 조인성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주진모와 송지효 그 둘 모두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어정쩡한

포지셔닝은 주진모에게 신기루를 보여준다. 이건 욕정에 눈이 먼 한순간의 실수일 뿐이라고.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우리의 사랑은 결국 어려움을 겪고 한뼘 더 성장할 거라고. 실제로 더욱 격해지는 건 주진모의

집착, 그리고 질투일 뿐. 이제 어떤 식의 파국이 진행될 것인지의 문제만 남겨놓고 있었다.


"테러리스트가 된 연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쓸모없다

해서 그 일을 반드시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송지효는 왕후다. 그녀가 한때 질투하던 조인성은 왕의 호위무사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한다.

시작이야 어떻든, 굴욕감을 참으며 미동도 않던 그녀가 어느순간 입술을 열고 몸을 움직이며 사랑을 시작했다.

옆방의 왕이 문을 몰래 밀치고 숨어서 보든말든, 왕의 남자 조인성은 또다른 사랑이 왔음을 깨달았다. 왕은

그의 뿌리를 뽑아내고, 급기야 왕후의 목을 성벽에 내걸어 극도의 질투심이 담긴, 극한의 테러를 가한다.


그렇게 다시 눈앞으로 조인성을 불러내고는, 그는 다정히 묻는다. 왜 이제야 왔냐고. 여기 좀 앉으라고.

그는 기껏 조인성을 눈앞에 불러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그는 너무 많은 것을 흐트려 놓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망쳐놓았다. 조인성에게 기대할 수 있던 건 단지, 단한번도 당신에게 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는,

당신을 정인이라 생각했던 적이 단한번도 없었다는 표독하고도 가슴에이는 대답뿐.


주진모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린다. 그는 못 보겠지만 나는, 그 독한 대답을 듣는 주진모만큼이나 독한 대답을

해내고 만 조인성의 눈빛도 심하게 부서지고 있음을 본다. 아마 그들이 서로의 부서진 눈빛과 마음을 알아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거다. 이미 그들의 사랑은 시험에 처했고, 수명이 다했고, 결코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망연하게 찢기는 주진모의 마음이 담긴 화폭, 부서져내리는 한때 그들이 뒹굴던 침소, 그리고 마치 푸닥거리하듯

온통 깨어지고 부서지는 그들의 내밀한 공간..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 서로의 심장에 칼을 후벼박고는

양패구상해서 둘다 무너져내리는 넝마같은 결말밖에는. 그리고 왠지 모를 후련함. 실컷 상처입고, 실컷 힘들어하고

그리고 바닥까지 온통 지랄같이 휘저어 흙탕물 범벅을 만들어놓고는 '이제 됐다'싶은 느낌.


"나는...사랑을 강요할 의지를 잃었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그건 어쩌면 비통한 체념. 아니면...자신의 마음을 상대에 강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의 후련함.


연말이라기보다는 그저 한없이 휴일에 가까웠던 느낌의 토요일, 일요일을 보내면서 얼마전 친구가 강력히 추천해

주었던 해롤드와 쿠마(Harold and Kumar) 1, 2를 한꺼번에 잡아보았다.


#1. 등장 인물

주인공 해롤드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40년전 미국에 자리잡은 부모의 이민 2세대라는 설정이다. 영화속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이리저리 치이는 모습과 함께, '계집애같고 공부만 잘하는 조용하고 왜소한' 동양계 남자아이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1탄 첫 장면에서 멍청해보이는 잠자리 안경을 끼고 어리버리한 표정을 짓던 그가

주인공이라니, 왠지 한국인(동양인)보다 얼굴근육이 네 개나 많다는 서양인들 사이에서 너무 어수룩 일변도라거나

표정이 쩔어 보이진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JOHN CHO, 피플지가 뽑았던 가장 섹시함 미혼남성 중 하나로 뽑혔던

그의 내면/외면 연기 모두 맘놓고 즐기기에 충분.



쿠마 역의 KAL PEN, 완전 마리화나에 쩔어 사는 약쟁이에 어떤 상황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무한한 낙천성까지.

병원 의사로 성공한 아버지와 형 못지 않은 훌륭한 의학적 재능과 머리를 지녔지만 소수민족으로서의 피해의식은

의외로 매우 예민하다. 인도계인 그의 검은 피부와 수염이 2탄에서 암스텔담행 비행기 안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그것과 오버랩되는 대목도 있지만, 이 친구와 마리화나 봉다리가 사랑을 나누고 심지어 쓰리썸을 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듯.

그리고 Neil Patrick Harris. 어렸을 적 동경하면서 보았던 야무진 천재소년 두기의 그 두기가 어른이 되었다.
그것도 보통 어른이 아니라, 여성의 엉덩이에 자신의 이니셜인 N.P.H 낙인을 찍어버리는 변태적 취향의

섹스 중독자랄까. 실제로는 그가 2006년경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란 걸 알고 있다면 영화속 그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더욱 빛을 발한다. 1탄과 2탄에 걸쳐 주인공 해롤드와 쿠마의 멋진 조연 역할을 하며 끊임없이 발정난 두기.



#2. 1탄..Go to White Castle..

스토리는 별거 없다. 1탄은 시덥잖은 화장실 유머와 섹스, 약에 대한 만담이 즐비한 가운데 티비에서 식욕을 마구

자극하는 '화이트 캐슬'의 햄버거를 먹기 위해 감옥에 갇히고, 차를 도둑맞고, 치타를 만나고, 절벽에 쫓기고,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약(마리화나)을 해대고, 약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그리고 결국은 햄버거를 먹는다는

하룻밤 이야기. 그들은 감옥에 갇히면 탈옥을 하고, 치타를 만나면 치타를 타고, 절벽에 몰리면 행글라이딩을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스토리를 이어나간다. 웃기는 건 그런 말도 안 되는 툭툭 지르는 스토리가 외려

조심스럽고 설득력있게 보이려 애쓰는 왠만한 영화들보다 더욱 유쾌하고 흡인력있다는 사실.

동물원을 탈출한 치타를 만나서 한바탕 게거품물며 호들갑을 떨어주고는, 치타와 함께 마리화나를 피우는 장면.

치타 입에서 한오라기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뻥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엉성한 씨지. 노골적으로 '나 싸구려B급보다 못한 영화다', 혹은 '초저예산 영화다'라고 광고하는 듯한

이 용가리보다 백만배 못한 씨지는 어쨌건 해롤드와 쿠마가 마리화나 동료 치타를 타고 달리고 있다는 의미 전달에

전혀 문제없이 성공. 치타와 두 사람과 배경을 되는대로 합성해놓은 듯한 따로 노는 그림에 몰입도가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그 뻔뻔한 대담함에 더욱 매료되어 버렸다.

영화의 대미가 이런 거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화이트 캐슬'에 도착해서는, 인당 햄버거 40개에 콜라 5잔씩 먹고

우는 장면. 물론 운다는 따위의 감정적인 누수 장면은 1초도 안 되어 사라지고 또다시 모든것을 희롱하고 마냥

덮어놓고 놀려먹는 분위기로 돌아간다. 전혀 엄숙해야할 필요도, 심각할 겨를도 없는 영화. 그렇다고 단순히 머리

식히려 보는 킬링타임용 영화가 아니라, 그냥 그런 퍽퍽 치고 나가는 것 자체를 긍정하는 것 같은 영화다.


#3. 2탄..Escape from Guantanamo Bay

1탄에 이어 4년만에 나왔다는 2탄,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암스텔담에 가면 마리화나가 합법이라며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1탄 마지막 대사를 치고는 바로 이어 2탄 첫머리에선 샤워를 하고 여행가방을 싼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잠시를 못참고 마리화나를 피우려다 테러범으로 몰려 도착한 관타나모 수용소..분명히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좌라거나, 우라거나 진지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국토안전부와 네오콘을 시종일관 놀려

먹으면서도, 정색을 한 메시지나 시사하는 바 따위는 찾기 힘들고 그저 과장된 근엄함과 진지함을 비틀기에

매진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들이 뛰고 있는 링의 타이틀은 '정치적 좌파 대 정치적 우파'쯤이 아니라

아마도 '도덕적 엄숙주의 대 발랄한 유치찬란함' 정도로 붙어야 할 듯 싶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탈출해 플로리다 해안에 상륙해 텍사스까지 향하는 이들의 여정, 그들을 치졸하게 쫓고 있는

거대한 국가기관가 막 성공할려는 찰나 진중권의 표현을 빌건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

뜬금없이
호출된 부시대통령의 한마디에 눈녹듯 사르르 해결되어 버린다. 내 생각에 부시 대통령이 나와서 아버지

부시에 욕을 하고, 체니 같은 아버지 부시 친구에게 기죽고 지내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을 비판하기 위함도, 9.11 테러 이후 반민주적 퇴행을 야기한

그의 보수적 태도를 비난하기 위함도 차라리 부차적인 것에 불과한 거다.

바로, 부시 대통령마저 마리화나에 환장하는 약쟁이로 묘사하는 것. 부시가 2탄의 이야기를 끌고 나간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세팅된 것은, 다만 그가 해롤드 & 쿠마와 함께 마리화나 연기를 퐁퐁퐁 마시며

헤실헤실 웃어대는 장면을 담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이 얼마나 유쾌하고 상쾌한 장면인지.

그리고 이 멋진 질문. 당신이 이걸 그렇게 좋아하면, 왜 합법화시키지 않는 거죠? 쏘쿨.

엿이나 먹으라고 해, 관타나모.ㅋㅋㅋ 부시도, 부당하게 관타나모에 갇혔던 해롤드나 쿠마도, 그리고 그의 가족도

관타나모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찾을 수 없거나 무디기 짝이 없다. 테러 이후 반테러법 제정 등으로 제한된

기본권들에 대한 풍자 역시 마찬가지. 시사에 대한 신랄한 풍자나 해학이라기보다는, 시사를 배경으로 그 주어진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약쟁이와 오입쟁이들의 정신사나운 만담.


#4. 굳이 기억하려 애써본 대사.

관타나모에서 힘들었다는 해롤드가, 정부를 믿기가 쉽지 않다고 조심스레 부시에게, 친근하게 이야기한다. 함께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부시 대통령이 문득 현명해진 듯이 현자처럼 말한다. "나도 정부에서 일하지만 나도 정부를

신뢰하지는 않아. 착한 시민(good American)이 되기 위해 정부를 믿을 필요는 없어. 그냥 니들이 있는 나라를

믿으면 된단 말야." 그전까지 개개 풀려있던 부시의 눈이 일순 반짝거린다고 느낄 정도로 힘이 들어간 대사였지만,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오...뭔가 멋진데 하고 생각했지만 좀 이상하다.


뭔가 있어보이는 대사지만, 오히려 영화 전체를 위해서는 덜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해롤드와 쿠마는 갑자기

부시 앞에서 착한 아이들처럼 굴고 있다. 비록 그들이 함께 마리화나를 피고 있다고는 해도, 그들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갑자기 철든 것처럼 진지해지고 '꼰대'에게 조언을 구하고는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는 모습.

무질서와 혼란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혹은 끊임없이 그에 휘말리며), 그리고 기존 도덕과 질서에 무관심하고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들을 무기력하게 하는 그들이라면 내 생각엔 부시가 그런 소리를 할 때 코를 파거나, 휴지를
 
들고 마리화나 봉지랑 섹스를 하거나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사의 내용이란 것도 실상 따져보면 이상하다. 그냥 니들이 있는 나라를 믿어라...나랏님의 나라를

믿으란 건가, 아님 민초들의 나라를 믿으란 건가. 이건 답을 준 것도 아니고 대답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2탄보다 1탄이 훨씬 무리없이 잘 빠진, 수미일관한 영화였지 싶다.

3탄도 계획중에 있다던데, 이번엔 어떨까.







Q. 인터넷 예매 티켓은 어떻게 받나요.

A. 인터넷 예매 하신 티켓은 영화 시작 1시간 전까지 영화제 기간 중에 운영되는 임시매표소에서 티켓을 찾으시면
됩니다. 이때 본인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지참하셔야 합니다.
대리인을 통한 티켓 수령의 경우에는 티켓을 예매자의 신분증을 지참하신 경우에 대리수령이 가능합니다. 영화제 기간전에는 전국 GS25편의점 내 ATM기와 부산은행 전 지점에서 미리 발권받으실수 있습니다.


Q. 교환부스란.

A. 교환부스란 당일 상영작에 대해 환불을 원하시는 분과 그 영화의 입장권을 원하는 분들의 만남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당일 표를 환불받기 원하는 입장권을 교환부스에 접수를 하면, 자원봉사자들이 그 입장권을 원하는 분에게 팔리면 입장권의 금액만큼 받아가고, 그 입장권을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즉, 볼 수는 없지만, 입장권이 아까우신 분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현장판매의 모든 것

A. 1. 현장판매는 현장 임시매표소(대부분 상영관에 설치되어있는 극장매표소입니다.)에서만 합니다. 2. 현장판매는 예를들면 10월4일에는 10월 4일에 상영하는 영화만, 5일에는 5일의 영화만... 매일 당일영화만 판매합니다. 3. 현장판매는 전체좌석의 30%이며 야외상영장, 부산극장, 대영시네마와 같은 1000석이상의 좌석이 있는 큰 영화관은 20%정도입니다. 4.현장판매는 해당극장 임시매표소에서 다른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도 판매합니다. 5.임시매표소 오픈 시간에 인기작은 대부분 매진됩니다. 임시매표소 운영시간을 확인하세요.


Q. 티켓 예매 관련 주요 일정

A. 티켓 예매관련 주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화제 기간             : 2008. 10. 2 ~ 2008. 10. 10

개.폐막식  예매 :2008. 9. 22 오후 6시
    - 9월 18일 18:00     - 인터넷예매만 가능

일반 티켓 예매        : 2008. 9. 24 ~ 2008. 10. 9
   - 예매시간 : 24시간(단 부산은행은 은행업무시간)
   - 단, 9. 24은 09:30 부터 운영


Q. 인터넷 예매 내용을 변경하고 싶어요.

A. 문자 메시지로 받은 예매내용(영화명, 극장명, 성인/학생여부, 예매티켓 수량, 상영일시 등) 또는 결제 지급 방법을 변경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기존 예매를 취소하고 새로 예매를 하셔야 합니다


Q. 예매를 취소하면 전액 환불을 받을 수 있나요?

A. 1) 영화제 시작 전(10월 1일까지) : 수수료 없음 - 인터넷 예매 후 발권 전에는 인터넷에서 취소 가능합니다. - 인터넷 예매 후 (GS25에서) 발권 받은 티켓은 (영화제기간 이외에는) 취소 및 환불이 되지 않습니다. - 모바일 예매는 모바일에서만 취소가 가능합니다. (10월 1일 이후에는 임시매표소에서만 취소 가능) 2) 영화제 기간(10월 2일부터): 수수료 장당 1,000원 - 인터넷 예매 후 발권 전에는 인터넷에서 취소 가능합니다. - 발권 받은 모든 티켓은 임시매표소에서만 취소가 가능합니다. 영화제의 사정에 의한 상영 취소 또는 변경의 경우 폐막일까지 임시매표소에서 환불 가능합니다.(수수료 없음) 영화 상영 당일 티켓은 취소 및 환불이 되지 않습니다. ★ 인터넷으로 예매하신 티켓을 GS25 또는 부산은행에서 미리 발권해서 오시면 현장매표소에서 줄을 서서 표를 교환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권을 한 뒤에는 영화제 기간 임시매표소에서만 취소가 가능합니다.(수수료 부가)


Q. 영화 예매시 수수료는 얼마인가요.

A.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예매 시 별도의 예매 수수료는 없습니다. (단, 영화제 기간 티켓을 취소하시면 취소수수료 1장당 1,000원이 있습니다.)


Q. 해운대 숙박시설 연락처

A. 파라다이스 호텔 051) 742-2121 www.paradisehotel.co.kr/
매리어트 호텔 051) 743-1234 www.busanmarriott.co.kr
조선비치 호텔 051) 749-7000 www.echosunhotel.com
해운대 그랜드 호텔 051) 740-0114 www.grandhotel.co.kr
해운대 리베라 호텔 051) 740-2111 www.rivierahotel.co.kr
B&B 호텔 051) 742-3211 www.bnbhotel.co.kr
퀸스관광 051) 743-4848
로드비치호텔 051) 747-9911 www.lordbeach.co.kr
로얄킹덤호텔 051) 744-1331 www.royalkingdom.co.kr
호텔 서울온천 051) 743-0414~5 www.seoulonchun.com
테마21 모텔 051) 747-9021~2 www.theme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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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스 모텔 051) 746-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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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아쿠아비치 051) 743-2805
청풍 모텔 051) 742-0305
파라디아 모텔 051) 746-9887
해운온천 051) 742-6945
송도각 051) 743-5393
달맞이 별장 051) 747-4146

< 부산국제영화제 상영관 및 인근역 >



ex. 아마도 가장 먼 코스일 2호선 장산역에서 1호선 자갈치역까지의 시뮬레이션.

해운대 프리머스(장산역)에서 영화를 보고 부산극장(자갈치역)으로 이동한다고 할 때, 네이버 지도에 따르면

빠르게 환승하기 위해 서면행 5번칸 3번문에 서있다가 2호선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면 된다고 한다. 35분 소요.


(위의 자료는 부산국제영화제 공식홈페이지 http://www.piff.org/kor/index.asp 등에서 재정리하였습니다.)

매년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의 기사나 소식을 들으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 부글부글 키워왔었다.

대학교 1,2 학년때에는 다른 짓들을 하느라 그다지 아쉬운 줄 몰랐지만, 한 해 또 한 해 지날수록 부산국제영화제는

판도 커져갔고 질적으로도 꽤나 발전했다는 소식이 이어져왔다.


그러다 작년쯤이던가, 왠지 우울하던 가을날씨에 취했는지 어쨌는지, 내가 죽기 전에 부산국제영화제 한번

가보지도 못하고 가고싶다, 가고싶다고만 되뇌이다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절박감이 들었댔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는 와중에 해운대 앞 바다가 내게 낼름낼름 손짓하는 것 같기도 한 데다가 회사에서

부산국제영화제 가고 싶은 사람들 지원해준다길래, 냉큼 맘을 정해버렸다. 이미 개막작, 폐막작은 불과 1분여 혹은

5분여 만에 매진되어 버렸다는 긴박한 소식을 듣고는 오늘 오전 9시반, 영화제 기간중 상영하는 영화들의 티켓

예매가 시작되는 시간을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마치 대학다닐 때 인기과목들 수강신청하는 마음으로 몇개 땡기는 영화들을 골라놓고는, 9시반이 되자마자 접속,

신용카드로 마구마구 긁어대기 시작했다. 편당 5000원이라는 착한 가격이 내 손가락질을 더욱 빠르게 했는지도.

정말 순식간에 샤샤샥 매진되어 버리는 바람에 몇개-예컨대 "날고 싶은 눈먼 돼지"라거나 "댄서의 꿈"같은 매력적인

제목의 영화들-는 놓치고 말았지만, 그래도 "스카이 크롤러+고모라"를 예매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헝거"와

"힌드미스"를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뭐, 현장에서 예매하겠다고 길게 늘어선 줄에서 방실방실 웃는

사람들을 티비에서 보면서 상당히 부러워했던 터라...그 대열에 기꺼이 낄 용의도 있다.


10월 4일, 5일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끽하고 올 예정. 문제 하나는, 부산까지 내려가는 김에 군대친구들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해야 할 텐데...지금 티켓예매 상황을 보아하니 일욜 아침같은 빈 시간에 술을 마셔야 할 듯 하다는 것.

어찌됐건, 죽기 전에 부산국제영화제 한 번 가겠다는 꿈은 이렇게 이루어내는구나 싶어 뿌듯하다.
얼마전 여자친구가 CGV의 CINE de CHEF 십만원권 상품권이 생겼던 터에, 언제 이 좋은 아이템을 써야 할 지

머리를 굴리고 의논하다가 몇 가지 기준을 세웠더랬다.

1) 우선 영화가 정말 보고 싶은 거여야 한다. 피가 튀는 '스위니 토드'나 '추격자'류의 영화를 피하고, 그렇다고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영화를 보기는 상품권이 넘 아깝지 싶어서.

2) 저녁식사는 너무 비싸니 점심식사를 하는 걸로 하자. 그러자면 주말이나 주중에 휴가를 내서라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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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시네 드 쉐프가 뭔지도 몰라서 CGV 홈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겨우 알아냈었다. 얼마전 CGV 골드클래스

티켓도 여자친구를 통해 처음 써 봤었고, 마찬가지로 CGV 홈페이지를 뒤적대곤 이런 게 있구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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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미아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 보고 싶은 영화가 별로 없던 터에, 상품권 유효기간이 1년밖에 안 되어서 조만간

휴짓조각으로 날라가진 않을까 긴장감이 더해가고 있었기 때문에..이 영화를 꼭 보자! 라고 둘이서 결심했다.

맘마미아 뮤지컬도 몇 번씩 보고 싶었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쳤었고, ABBA의 노래는 좋아하고 있었으며,

이번 영화가 뮤지컬에 충실한, 그다지 욕심부리지 않은 영화란 평을 봤었기에 더욱 보고 싶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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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서, 6만원짜리로 두 명이면 12만원이니까 추가로 드는 현금은 2만원이면 그만인 셈.

영화를 먼저 볼지 밥을 먼저 먹을지 잠시 자중지란에 빠졌다가, 먼저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어야 소화도 잘 되고 밥먹으면서 얘기할 것도 많을 거라는 게 그녀를 설득시킨 나의 근거들. 사실

밥을 먹던 차를 마시던 항상 쉴새없이 둘이 떠들어대는 터라 그다지 영화얘기만 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화는, 지중해의 부드럽고 화사한 햇발이 바다 표면에 산산이 비산되는 만큼이나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멋진

풍경에, 가슴을 울리는 발성과 노래가사, 그리고 발랄하고 생기넘치는 군중 퍼포먼스까지. 왠지 여성상위의

모계사회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다소 발칙할 수 있게도 딸은 세 아버지를 긍정하고 세 잠재적 아버지는 모두

1/3의 딸을 인정하겠다는 장면 역시 신선했던 장면 중 하나.


무엇보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이제 아바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풍경이 떠오를 거 같다. 마치, 에픽하이의 노래

러브러브러브를 들을 때마다 김태희가 깜찍하게 춤을 췄던 광고가 떠오르듯이. 그리고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꼭 '맘마미아'를 뮤지컬로 봐야겠다고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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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전채로 버섯샐러드와 연어샐러드가 나왔고, 아마도 8만원짜리 메뉴일 스테끼

대신 파스타가 나왔다. 메뉴판이 따로 나온 건 아니었고, 웨이터가 몇 가지 주워섬기면 그 중에 맘에 드는 걸

고르는 형태였는데, 올리브오일 파스타와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고르고 나름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고 자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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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도 고급스러웠고, 테이블 배치도 넓찍하게 쓰여져서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식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대부분 어느 정도 연령대가 있으신 분들이 부부동반으로 오신 듯 했고, 우리처럼 젊은 애들은 안 보였다.

하긴, 영화를 아무리 골드클래스보다 더 좋은 의자-자그마치 좌석당 600만원 짜리라는 홍보..-에 앉아 볼 수 있다

하고 점심식사를 좀 분위기 있는 데서 '칼질'할 수 있다 해도, 인당 6만원은 버거운 금액임엔 틀림없다.

더구나 6만원짜리 메뉴는 '칼질'할 것도 없는 파스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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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다시 갈 거냐고 묻는다면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골드클래스도 그랬지만, 영화를 안락하게 볼 수 있고

영화보기 전후에 뭔가 특별한 공간에서 식사나 차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지불하기에는 비용이 좀 세다고 본다.

그러니까 전국을 통틀어 오직 CGV압구정점에만 운영하고 있는 거겠지만.


하나 불만이었던 건, '씨네 드 쉐프'를 예매할 때 그리고 예매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웨이터나 매표원이 '육만메뉴'

혹은 '팔만메뉴' 이런식으로 적나라하게 가격을 드러내어 지칭한다는 것.


어찌됐건 결론은, 여친 덕분에 좋은 경험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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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만드는 CG효과라거나, 구름갖고 장난치거나 뜬금없이 환타지틱한 화면이 중간중간 끼어들어간 것.

그리고, 마냥 냉막한 듯이 보이던 금자씨가 아파트 계단에서 화들짝 놀라는 장면, 끝내 자기가 살포시 엎어주었던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고 딸에게 돌아가는 장면..복수가 진행되어 정점에 달한 상황에서도 최민식은

야릇하게 끙끙거리는가 하면, 금자씨와 딸 사이의 대화는 정말 실감나게 '더빙'이 되고.

영화가 뱉어내는 스토리에 그저 함몰되려 했다면 순간순간 무기력해짐을 느끼게 되고 만다.


복수 삼부작 시리즈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생각하더라도, 금자씨 이 영화는 글쎄..복수에 어울릴법하지 않은..

다시 말해 온몸으로 '복수'에만 몰입할 수는 없는 인간들의 불철저한 감정과, 복수를 위한 불성실한 자세..그런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아무리 이를 갈고 13년 반동안 계획을 세워나왔대도, 복수란 순식간에 해치워지는 작업도 아닐

뿐더러, 인간의 감정이란 순식간에 평온모드-복수모드-평온모드로 구획지어 구분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금자씨는 착해보이지 않으려 하고 감정을 죽인 듯 목소리를 깔고 눈빛을 예리하게 떠보지만..목사의 예기치 못한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억지로 쓰고 있던 가면을 순간 노출시키고 만다.


딸을 찾으러 간 호주에서도 마찬가지, 금자씨의 행동은 장중하고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우울함과 비장함을

계속해서 가볍게 만들고 점점 금자씨 스스로 복수에 대해 몰입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그래서

결국 아주 크리에이티브한 그런...복수 전략의 생중계..그리고 집단적 복수의 이벤트까지도 끌어내며 최민식에

대한 복수심의 총량을 키워내려 한거고. 그치만 무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순수한 '복수심'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해져가는 복수심을 다시 불붙이려 했던 금자씨의 기도는...그들의 혼란스럽고도 현실적인, 그리고

속물적이랄 수도 있는 감정의 비빔속에서 허망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조커처럼, 입을 쫙째고

웃는듯 우는듯..그렇게 총을 버린다. 13년여의 수감생활을 통해 얻어냈던 그 총을 버리는 순간 복수는 끝나지만.


역시, 그녀가 유괴했던 그 아이는 금자씨에게 웃어주지 않는다. 그나마 함께 백선생을 처단했던 가족들은

뜬금없이라도 '천사가 지나간다'며 상상속에서 자신의 복수심과 그로 인한 모종의 후련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금자씨는 아무도 없다. 그저 속죄의 의미로 잘라냈던 손가락의 깁스가 그녀의 과거 행위와 현재의 감정을

이어주는 하나의 가시화된 상징일 뿐, 조만간 그것은 시간에 쓸려갈 부질없는 이미지.


그래서, '화이트' 두부 케이크를 얼굴에 마구 부비며라도, 하얘져서 다시 딸과 행복해졌으면 한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복수를 마쳐서 행복해져도 된다? 아님 복수를 한 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렇다고 무작정

용서해라.라 이야기할 생각은 감독도 없는 듯한게..관객을 끊임없이 흔들고 낯설게 하며, 봐라봐 나지금 복수에

살짝 질렸거든? 살짝 이쯤서 갸우뚱해보는 건 어때?라고 의도하는 것 같아서.


13년간은 삶의 희망이자 의지였을지도 모르지만, 막상 그걸 직접 실현하는 중에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흐르다

보니 '복수'에 애초 부여했던 순수함이 퇴락하고, 몰입했던 감정이 시들어버렸다.

그다음에는 마치 의무와도 같은 방어전으로, 복수심에 떠밀린 채 스스로 갈피를 못잡게 된 듯한. 하긴 순수한

감정으로 쭉 복수 하나만을 그리는 캐릭터는 영화속에서나 그럴듯 하다.


올드보이에서 느끼던 비장미와 그 파괴적인 아름다움이 금자씨에서 안 느껴지는 이유, 대신 올드보이에서 안

느껴지던 다차원적인 인간의 감정과 흔들림..좀더 인간적이고 불순하며 잡종틱한 혼란스러움이 금자씨에서

부각된 이유. 내가 보기에는.

지난주는 내내 딩굴거렸다. 논문쓰고 났더니 지쳤는지, 아님 내처 꾸역꾸역 달려왔던 것에 질렸는지, 이제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져서 다리조차 안 움직여지는 거였는지.


수욜엔 학교서 김기덕의 빈집을 보고, 목욜엔 논문섭째고 김기덕 강연회가서 질문하고 사인받고, 금욜엔 모처럼

술마시고, 토욜엔 친한 누나 결혼식, 일욜엔 집에서 내내 잠.


김기덕의 영화는,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깡통따개같은 거다.

잔혹해 보일 수도 있는 영상들과, 적나라할 수도 있는 정형적일 수도 있는 남여의 역할, 그리고 하나같이

우울하고 어둡고 아픈. 이게 당연한 거라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을 낯설게 하고 난 정상의 감수성과 예민함을 갖고

있다 생각했던 것들에 문득 이질감으로 경악을 느끼게 하는. 그래서 그의 영화는 내겐 아름답다.

말이 닿지 못하는 차원에서 두명의 인간이 만나고 이해하고, 한장한장 그림과도 같은 상징과 의미들로 가득찬

화면들을 통해 의식의 흐름을 전하고. 가슴이 아프면서도 이거 진짜다 싶은...


김기덕은, 강연회 처음에 인사를 생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칠판으로 가더니 휙휙 글자로 '반갑습니다'라며

인사말을 날려썼다. 다소 파격이었지만, 신선했다. 그이기에 더욱 납득할 수 있었다. '소통'을 끈질기게

이야기하는 감독이라 여겼기에, 그에다 대고 카메라폰을 찍어대는 건 왠지 아니다 싶어서 말았지만 칠판만은

한장 남겼다. 머, 결국 사인까지 받고 말았으니 그다지 수평적이고 인간적인 '소통'과는 좀더 거리가 멀어진거

같기도 하지만.ㅋ


심각하게 무기력하다. 오늘 아침에 좀 나아지나 했더니 아니다.

수욜쯤 여행이나 다녀와야겠다. 어딘가 있을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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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니들끼리 잘해봐라"였던가? 06년 한국을 강타한 괴물의 오프닝에서 나오는 대사다.

아마도 한강에서 투신 자살을 꾀할 정도로 삶의 극한에 몰렸던 그는, 칙칙한 강물 바닥 아래서 그 무언가를

감지한다.



#1st '둔함'-괴물이 존재하던 말던..

강두(송강호)의 가족은,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마주한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마스크를

공구해서 일괄착용하고, 상상된 '바이러스'를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의사는 강두 머리에 구멍을 내고,

경찰은 그들을 잡기 위해 애쓰며, 국과수직원은 연무소독에 여념이 없다.(이로써 그들의 임무는 완수된다)

어쩌면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강두 딸의 생존 가능성이나 괴물의 존재에 무관심한 사람들.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전적으로 송강호들의 몫이다.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둔감함이 일부 깨어나는 것은,

자신이 그로 인해 피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다. 환경'운동권'으로 표현된 사람들이랄까..



#2nd '둔함'-영화 '괴물'의 괴물은 누구?

바이러스의 숙주는, 옐로우 뭐라는 그 축늘어진 돌고래같은 '괴물'이었다. 날것으로 인간을 잡아먹고 뼈를

토해내는 다른 괴물은, 변태적인 기형일지언정 생태피라미드의 한 부분에 살짝 걸쳐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그 돌고래시체같은 노란 '괴물'이 요동하는 순간 사람들은 귀에서 피를 뿜으며 한강변에 쓰러진다. 물론

강두의 가족은 그 '바이러스 vs 사회'라는 틀을 벗어나 있었고, 개인사적인 원한 관계로 '올챙이 괴물 vs 가족'의

구도를 갖고 있었다. 해서 화염병 석유+불화살+쇠파이프 라는 사상 초유의 무기로 괴물을 해치우는 것이

가능했고 의미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 두려워하던 바이러스는, 혹은 바이러스와 같이 생체를

갉아먹는 것은 그 노란 '괴물'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었지만 이는 순수한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는

올챙이 괴물에 가리워져버렸다.

괴물과 송강호들이 조우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온갖 괴물스러운 작태들, 시스템들. 그 극단의 형태가 바로

노란돌고래였을 수도.



#3rd '둔함'-재생시킨 행복조차 둔해빠진.

엔딩 어디메쯤에서 송강호는 매점 창밖의 기척에도 총을 움켜쥐며 괴물을 경계하지만, 정작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럴듯한 발표를 낭독하던 티비는 무심하고 둔한 발가락으로 꺼버린다. 언제고 한강에 사람을 잡아먹는

올챙이같은 것이 나타나는 순간 작동하기 시작하는 '괴물'. 그 아가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훨씬 세련되어서

'빠이'프를 쑤셔넣기도 불가능할 텐데도, 송강호는 현상수배됐던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삐라'를 액자에 꼽아넣고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끝까지 둔해빠진 색퀴".

따스한 불빛은 그의 조그마한 매점 주위만을 밝힐 뿐, 푸지게 쏟아지는 하얀 눈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온통 어둠에

먹혀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최초의 발견자가 한강에서 보았던 건, 과연 뭐였을까. 그 검은 그림자는 올챙이 괴물의

그것이었을까.



더하기. 반미영화?

정말, 이제 '반미'는 문화적 상품이자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포름알데히드'라는 단어를

반복학습시키는 영화인지라, 강력한 반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선전됐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송강호와 함께 괴물에 맞섰던 그 미군은? 바베큐 파티를 함께 하던 미군과 한국군은? 구도는 좀더 명료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과 미국에 복종하는 한국 기득권층) vs 미국에 반대하는 한국(혹은 민중)은 아닌 것 같다.

마치 '살인의 추억'에서 미국의 회신이 결정적으로 한국의 수사 향방을 좌우했듯 미국은 하나의 '상수'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냥 우리가 놓인 환경..이란 정도. 송강호에게 재갈을 물린 건 미국, 미군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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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이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기대를 꽤나 했었고, 꽤나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것을

보면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흥미진진했었다. 그렇지만 칸영화제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는 수다스런

언론의 설레발이 확대재생산되고, 마치 한국영화의 새로운 부흥을 알리는 전기가 될지 계속 침체일로를 걸을지

막중한 역사적 의미까지 띈 영화처럼 부각되면서 차츰 우려스럽기 시작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단

사실만으로 이미 맘속으로 몇 수 접어주고 관대한 갈채를 보냈던 분위기 속에서, 생각보다 별로였다..란 조심스런

얘기조차 돌팔매질당하는 분위기가 또다시 재연될까봐 불편했다.(이미 '디-워'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논란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던 데다가, '밀양'같은 '어려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 역시 외국영화제로부터 빌려온

아우라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이미 스스로도 너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것은 아닐까, 이러다간 왠만한 영화를 봐도 좀처럼 만족스럽지

않겠다..란 생각도 하고 있던 터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치솟기만 한 기대치를 어떻게든 낮추고 봐야겠다는

경계심이 들었달까. 개봉 나흘만에 100만에 육박한다는 실로 과열된 신드롬 현상-한국에서 흥행했던 많은

영화들의 첫 궤적-을 따르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약간의 우려와 스스로에 대한 경계, 그 두가지가
 
아마도 이 '놈,놈,놈'을 보는 나의 준비자세였지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생각없이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라고 생각하며, 두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 그다지

길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볼거리와 긴장감도 팽팽한 영화인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볼 때 탄탄한 스토리를

기대하거나 배우들의 연기에 주목하는 편이라면 다소 실망했을 수도 있겠지만, 여름방학을 맞이한 본격적인

오락영화 그자체의 본분에는 매우 충실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뭔가 잡아내서 이야기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그리고 이 영화가 몇백만이 들만한 영화일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평가하기도 그런-재밌으면 보는 거지 뭐..

다만 남들이 보니까 따라보는 게 아니기만을 바랄뿐..아니 실은 그랬대도 별말 하고 싶지는 않다-영화.



최근에 씨네21이었던가, 어느 영화잡지에서 본 거 같은데 김지운 감독이 분명 '마카로니 웨스턴'의 광팬이었을

거라고 평했던 적이 있었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의 대결이 아니라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의 대결.


* 마카로니웨스턴 [macaroni western],

미국 서부극과 같은 개척정신의 요소는 없고, 주로 멕시코를 무대로 총잡이를 등장시켜 잔혹한 장면을 강렬하게 묘사한 것이 특색이다. 1964년 세르지오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를 제작한 이래 미국 서부극을 압도할 기세로 선풍을 일으켰다. 한국에도 1966년 《황야의 무법자》(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가 상영된 이래 여러 편이 수입되어 마카로니 웨스턴 붐을 일으켰다. (네이버 백과사전 中)


그에 더해, CGV 골드클래스 경험담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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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연인에서 나온 CGV골드클래스 장면)

영화 시작 한시간전부터 골드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데, 골드클래스 상영관에 붙어서 바로 라운지가 있다.

주류를 포함해 약간의 음료와 간식류를 팔고 있으며 조그마한 카페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영화 시작전

아늑하게 미리 입장해서 편히 앉아 놀거나 쉴 수 있는 장소.

입장을 하게 되면 좌석은 총 30개, 130도까지 꺽이는 편안하고 커다란 가죽의자가 두개씩 붙어서 있고 커플석당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있다. 한껏 젖혀서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 영화관을 전세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조조를 봐서 그런지 대략 10명도 안되는-그니까 네 커플도 안되는-사람들이 엉성히 앉아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실 영화시작전 한시간동안 라운지에서 무료음료와 보드게임 어쩌구..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건

CGV입장에서도 일종의 수익사업이지 관람객의 편의를 기한다는 느낌이 크지 않고, 영화관의 좌석 배치와

안락한 좌석...그게 골드클래스의 가장 큰 메리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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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놈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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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놈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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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시도되었을 열차탈취씬. '서부영화' 혹은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장르
역시 한국에서 최초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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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상한놈 송강호. 자칫 '가오'만 잔뜩 잡고 엉성해지기 쉬웠을 영화를 끝까지 붙잡고 갈 줄 아는 배우.
그는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생생한 캐릭터를 연기해냈다고 생각한다.

묘한 이질감을 주는 제목처럼, 한풀이식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돋우는 영화는 아니었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누가 정말 적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어진 상황에서..오지에서 독특한 가면 문화와 삶을 꾸려나가던 사람들은

럭비도 배우고, 창가도 즐기고, 인종과 이념 같은 것이 부질없어지는 '환상적인' 상황에 처한다. 뙤놈이나 왜놈

운운하는 대사가 있지만, 그다지 현실적이라거나 실제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동막골은, 그런 곳이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는데, 그중에서도 맘에 툭 꽂혔던 장면이 있다. 무엇이 불안한지, 아니면

두려운지, 무릎을 바싹 땡긴채 웅크리고 자는 앳된 군인의 옆머리에 강혜정이 꽃을 꽂아주는 장면. 그리고는,

아주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꽃잎을 두어번 쓸어내리는. 촉촉한, 보들보들하면서도 생생한 그 감촉..은, 그네들이

'작대기'라 부르던 우왁스럽고 둔탁한, 그리고 선뜻한 총의 감촉과 정확히 대척하고 있다. 풍선처럼 유유히

낙하하는 폭탄의 질감 역시. 꽃잎을 쓰다듬으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미친X, 아님 광년이라 불릴 수 있는

세상이다. 다행히도, 동막골은 그런 미친X를 포용, 아니 이해하고 있었고..그녀의 죽음은 그래서 마을 전체의

슬픔이 된다.


언젠가부터 나비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여 흰나비를 백의민족 어쩌구의 상징으로

생각하지 않는한. 다만 호접지몽, 장자지몽 이전에..나비효과 같은 걸 연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딘가의 나비

날갯짓으로부터 불러들여지는 폭풍.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건지, 무엇이 어긋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분노를

투사하고 총을 겨누며, 맨몸으로 폭격기에 맞서야 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대답은, 도식적인 구도로 나타나지도

않으며 쉽게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그런 간단한 관계가 아니라는.


예측할 수 없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인간들은 서로가 원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 부지불식간에 쌓아올린 업?

구조? 관계? 아님...간주관성?--; 그런 것들로 보이지 않게 서로 구속되어, 싸우고 웃고 울고 죽어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며칠전에 본 박수칠 때 떠나라의 신하균은 두가지 작품을 동시에 했음에도 캐릭터가 하나도 안 섞였다. 멋진
 
배우에 멋진 영화들. 올여름 대박 세영화다 가족들이랑 심야로 봤다. 이사가기전에 가까운 센트럴시티 무지

이용한다.ㅋ


난 항상 사랑니가 났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문득 이가 아파 병원에 가면 사랑니가 이미 다 난 상태라 하고,

그것때문에 아프단다. 너무 쉽게 생겨나고, 너무 금방 아파지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님 살짝 둔해서 무지하고,

다 자라고 나서야 뽑아버리는..참 멍청한..어쨌거나 어제는 입안으로 망치와 메스(조각칼같은), 뽁뽁이가

들어갔고..염증을 제거한다고 엄지손톱만큼 살을 잘라냈다. 치료받고 담주에나 뽑아낼거 같은데..항상

뽑혀나가기만 한다. 달이 삼분지이가 지났다. 근데, 전화요금이 기본료 더하기 2614원.


이번달, 군대 녀석들이랑 논다고 전화 은근 많이 썼지 싶었는데, 아마 저번달 기록 경신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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