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진! 달래, 아리야!

“사람이 챙길 수 있는 최대한의 지인 수는 삼백 명 어간이라고 한다. 여태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고양이들은 맥주, 달래, 아리와 삐노에 더해서 주변 친구들의 오월이, 미달이,
영달이, 똘망이, 찡코, 뭉치, 토리, 엔조, 토르 정도일까. 아무리 박박 긁어 모아 봐야 삼백
마리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내게 고양이 녀석들 한 마리 한 마리는 더욱 각별하고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결에 저자에게는 고양이와 여행 사이에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생겨버렸다.
이제는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으면 여행지에서 만났던 녀석들까지 덩달아
연상된다고 한다. 단숨에 여행의 조그마한 순간들까지 뻗어나가 생생한 추억으로
되살아나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들은 고양이를 빨랫줄 삼아 여행의 순간들을
널어둔 셈이다. 여행하는 와중에 예기치 않게 고양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면서 문득 지금 자신이 여행 중이구나 느끼기도 했던 순간들 말이다. 그 순간들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 조금은 구김이 지거나 원래 모양새와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엄연히
자신이 한때 온전히 살았던 것들이다. 내키면 언제고 다시 팔다리에 꿰어보거나 그저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지금의 자신은 어떤 여행을 하는 중인지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이러니저러니 결국 고양이에 빠져들고 나서는 좀처럼 헤어나올 길이 없다고
고백한다.

고양이는? 여행은?

아침마다 해가 뜨고 새로운 날이 오는 게 그렇게도 신기하고 좋은지 우다다, 변함없이
신나고 열정적으로 하루를 맞이한다. 벌써 수백 번은 돌아봤을, 크지도 않은 집의
귀퉁이마다 낯설고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양 꼼꼼하고 조심스레 돌아본다. 코를 킁킁거리고
앞발로 톡톡 쳐보다가는 고개를 갸웃거리길 반복이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매일 보는 얼굴이나 손길인데도 질릴 줄 모르고 빤히 바라보다가는 문득 새로이 큰
결심이라도 내린 것처럼 슬그머니 다가와서 찬찬히 살피고 코로 냄새를 맡는다. 마주하는
사람에게도 덩달아 어떤 설렘이나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사랑이 막 시작되려 할
때처럼 마구 애정이 솟아난다. 그렇게 애정을 담되 낯설게 볼 줄 알고, 또 미련 없이
돌아설 줄도 안다. 쓰다듬거나 안아달라며 마구 보채다가도 충분하다 싶으면 훌쩍
내려서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난다. 가히 어딘가에도 매이지 않는 올곧은 여행자의
자세답다.


삐노의 짙은 파랑 눈빛과 대비된 새하얀 털빛은 인도의 타지마할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달래의 초록빛이 일렁이는 눈빛은 요정들이 산다는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의 초록 물빛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호안석처럼 묵직하고 몽환적인 아리의 노랑빛 눈은 이집트
시와에서 마주했던 장엄한 사하라사막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어디 하나 뭉툭하거나
날카롭지 않게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몸은 그 자체로 호주의 울룰루나 사하라사막의 듄에서
느꼈던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선을 닮았다. 게다가 녀석들이 우아하게 움직일 때 거죽
아래에서 불끈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라니, 두브로브닉이나 울릉도 앞 먼바다의 두터운
파도가 미묘하게 움직이는 그 섬세함을 꼭 닮았다.


녀석들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도 여행의 매력과 닮았다. 다른 종의 생물이니
당연한 일 같기도 하지만, 정말이지 워낙 다른 게 많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습관이나
패턴이 있는 건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많은 고양이를 접하고 길러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자기들끼리도 장난치다가 엉뚱한 짓으로 튀어버리는 걸 보면
고양이들끼리도 말이 통하기는 하려나 의심스럽기도 하다. 대충 눈빛이나 꼬리의 움직임,
분위기로 어림짐작이나 할 뿐 끝내 낯설기만 할 테니, 사람과 고양이의 만남이란 생판 처음
접하는 나라의 외국인 아니 외계인과의 조우에 비길 만큼 엄청난 일 아닐까. 그런 데다가
녀석들이 바라보는 세상이란 걸 따져보자면 사람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거다. 고양이
눈이란 사람 발목쯤에나 달려 있는 셈이니 눈높이가 다르고, 대체로 시각에 기대는
사람과는 달리 후각에 기대어 세상을 감각하고 있을 텐데 그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책 속으로


정말이지 고양이의 앞발은 대단한 물건이다. 내게 ‘어느 손가락이게' 놀이를 시전할 만큼
섬세하고 정교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고양이의 기분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는 꼬리
못지않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21쪽)

그러고 보니 이스탄불 곳곳에서 길냥이들을 많이도 만났다. 원래 이스탄불이 대륙간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고 중요한 항구 거점이다 보니 계속 새로운 종류의 고양이들이 유입됐다고
한다. 머나먼 이국에서부터 항해해온 배들은 으레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한두 마리씩
싣고 있기 마련이었고, 그 녀석들이 지금 이스탄불의 이 다채로운 고양이들의 조상이 된
거라고. (31쪽)


처음 취직 준비를 할 때 자기 소개서에 줄창 그 표현을 써먹었다. ‘고양강아지’라고. 틀에
박힌 자기소개서 항목 중 하나인 ‘본인의 성격을 묘사하고 장단점을 말하시오’였던가, 그
비슷한 항목에 항상 욱여넣었던 단어였다. 고양이처럼 야무지고 자존감이 강하면서도,
강아지처럼 성실하고 충성심도 높다, 뭐 이런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56쪽)


제 멋대로이고 혼자 세상사는 표정이지만, 사실은 애교도 많고 살가운 동물, 고양이에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성에서 만났던 공장 직원들, 음식점
접대원들도 모두 그 표현에 맞춤해 보였다. 그네들을 칭하기에 가장 적당한 단어가 아닐까
싶었다. 심지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내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샅샅이
검열하던 북한 군인까지도 무표정한 ‘츤츤함’ 가운데 왠지 ‘데레데레함’이 느껴졌다면
나만의 착각이었을런지. (69쪽)


고양이 알러지가 심하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2009년이었다. 새해 벽두부터 ‘용산
참사’라는 야만적인 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고, 그 김에 고양이 카페를 처음 가보기도
했던 터라 기억이 선명하다. (72쪽)


고양이들이야말로 영역 동물이다. 자기의 ‘나와바리'를 지키며 그곳 안에서 독립적으로 먹고
자다 보니, 그곳을 떠나면 다른 고양이의 공격에 직면하거나 생존이 위협받게 되는 거다.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시작되면 하루아침에 집을 잃게 되는
셈이라 선진국에서는 이런 대단위 철거가 진행될 때면 길고양이들의 이주와 구조 작업을
병행한다고 하는데 아직 한국은 아쉽게도 그렇게 체계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88쪽)


고양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 위해 소리를 내는 거라 한다. 고양이를 키우고 나서야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이다. 자기들끼리는 아마 기분이 안 좋을 때 으르렁대거나 하악질하는 정도
혹은 짝짓기를 위해 짝을 찾을 때 애기 울음소리 내는 정도로 의사소통하는 게 아닌가
싶다. (104쪽)


볼 때마다 짜릿하고 늘 새롭다. 역시 귀여운 게 최고인 건가. 이런 일상의 작은 순간마다
행복한 정도가 정점을 찍는다. 진부하지만 우리가 모두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면 그냥 저
녀석들과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보듬고 기억하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렇다고 이런 뻔한 마무리가 여전히 오빠와 형 사이에서 버퍼링을 면치 못하고 있는 자신에
게 은근슬쩍 면죄부를 주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써야겠다고 반성하
고 있다. 형아가 밥 주러 간다, 기다려라 삐노야. (134쪽)

그렇지만 살짝 억지를 부려 보자면, 고양이들이 정말 이런 것들을 장점이라고 여기며
중성화 수술을 기꺼이 받겠다 할까. 고양이가 잔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할지
알 수 없다. 당장 아픈 곳 없이 건강한 상황에서 생살을 찢고 잘라내는 확실한 고통과
발생할지 않을지도 확실치 않은 질병으로 인한 장래의 고통, 그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을 고르는 게 맞을지는 사실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다. 녀석들이 바라는 행복한
삶에 그런 식으로 당장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
(156~157쪽)


지은이 소개

자신의 평소 모습과 다른 새로운 면모를 내세우는 ‘부캐’라는 단어가 유명해지고 나니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이야기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한 가지 캐릭터에 갇히지 않고,
그러니까 몸과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밥벌이 캐릭터에 갇히지 않고서, 가능한 다방면으로
부캐를 키워내고 싶다. 그중 오래된 하나는 글을 쓰고 인세를 받아 은퇴까지 노리는 야심
찬 녀석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영역들도 열심히 키우려는 중이다.
고양이 집사로서의 정체성은 최근 두드러지게 약진 중이지만, 사실은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길러온 병아리와 열대어, 십자매와 다람쥐, 그리고 구워 먹으면 초콜릿 맛이 난다는
타란툴라 브리더로서의 면모를 이어받은 셈이다. 그 외에도 늘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을
찾아 벌려놓고 있는 와중에 자칫 산만할 수 있는 여러 관심사를 묶어주는 역할을 해주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여행을 매개로 부캐들끼리의 시너지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여, 여행과 사진과 온갖 잡글이 합쳐져서 2009년부터 6년 연속 여행 분야 우수 블로거에
선정되기도 했고, 여행 에세이 『삼거리에서 만나요』를 쓰기도 했다.


차례


프롤로그 - 여행보다 강한 마력, 고양이


1부 - 고양이로의 여행
이집트 다합, 처음으로 고양이를 품던 순간
프랑스 파리, 플리마켓에서 만난 고양이 인형
터키 이스탄불, 고등어케밥이 불러낸 똥고양이들
보스니아 모스타르, 하드보일드 버전 <캣츠>의 세상
네팔 히말라야, 인간과 고양이의 거리 두기
싱가포르, 이 정도면 29금 스킨십을 즐기는 고양이
베트남 하노이, 전설의 고양강아지 등장하다
일본 아키하바라, 코스프레 구경 대신 고양이 까페
북한 개성, ‘츤데레’ 고양이 왕국에 다녀오다
용산 남일당, 고양이의 위로라도 도움이 된다면
서해 승봉도, 하얀 고양이와 무아지경 플라워댄스
서울 둔촌동, 고향 잃은 고양이들과 내 영역


2부 - 고양이와의 여행
내 첫 고양이는 맥주가 되었다
고양이와 AI 로봇의 무쓸모 대결
고양이 울음소리를 가장 많이 내는 사람
천재 고양이, 전쟁을 개시하다
세상은 놀이터요, 만물은 놀거리라
셋째 고양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난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아기 고양이에 대한 이상과 현실
약쟁이 고양이들의 먹는 재미 지켜주기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집사의 자세
고양이에게 피임약과 섹스 토이를!
맥주를 떠나보내던 날


에필로그 - 맥주와 달래와 아리와 내가 아는 고양이들에 대하여


#장수고양이의비밀 #무라카미하루키 #캣스타그램 #책스타그램 #하루키에세이클럽

책읽는 것도 좋고 고양이도 좋다. 고양이에 대한 책을 읽는 건 더 좋다. 게다가 하루키. 그가 빚어내는 픽션이 유리오르골같은 섬세함과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가 전면에 나선 에세이는 방망이깎는 장인의 거친 손을 더듬어 잡는 듯한 생생함과 고집스러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약간의 애정만 있다면 다소 '빈티지'스러운 말장난이나 특유의 위트는 역시 하루키스러운 부분이라며 너그러워진다.

이번에도 그의 에세이는 가볍고 재미있다. 그리고 계속 읽힌다. 소설보다 에세이가 낫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의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나 경이로운 사실이다. 전라로 집안일하는 주부라느니 모텔이름 고찰이라느니 고객불만 편지를 쓰는 법이라느니 살짝 외설적이거나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데다가, 왠지 자신없는 말투지만 근성있게 웅얼웅얼, 누구도 캐묻지 않은 것에 대한 소심한 변명이나 설명을 덧붙이는 궁시렁쟁이가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 비밀은 아마도 드물게 그가 정색하며 쓰는 문장, 혹은 역시 쓰려다 말고 눙치되 감정을 흘려둔 문장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남녀관계나 나이먹음에 대해 말하다 말고 문득, 역시 일반론은 그만두어야겠다고 슬쩍 넘어갈 때. 백화점의 장애인 안내문구를 놓고 그 이면의 비정함과 둔감함에 (그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분노를 표할 때. 전집 간행문제로 자신과 불화한 당사자가 마음고생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면서도 역시나 자신은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 명토박을 때. 그가 굳이 말하지 않고 에세이에 숨겨둔 것들은 그런 것들이다.

그의 문장을 조금 고쳐 말하자면, 아무리 작가라 해도 모두가 웃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불가능하고, 그 책임은 본인이 오롯이 짊어지고 살 일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다, 식으로 늘 조심스럽게 열어두는 방식의 태도를 견지하는 그가 이럴 때 보여주는 진지함과 날카로움은 서늘할 정도다. 그럼에도 말하자면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때의 완전한 느낌, 그처럼 아름답고 성실한 묘사로 한순간이나마 그에 공감할 수 있게 해준 건 역시나 하루키여서 가능한 마법이었다.

@ytzsche

@ytzsche

#거실의사자 #애비게이터커 #마티 #캣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고양이 #애묘 #집사필독서

오랫동안 cat-person을 자처해왔지만 문득문득 그런 의문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 앙증맞고 새침한 동물은 대체 뭐하는 동물이길래 사람 맘을 홀리는가. 딱히 쓸모도 없고 충성심도 없어 스크래치를 온사방에 내기 일쑤인 이 이기적인 동물이 어떻게 길과 거실을 온통 장악해버릴 만큼 번식하고 넘쳐나 버렸는가. 심지어 이제는 사진첩과 SNS피드를 정복해 버렸으니 말이다. 의문들은 으레 일종의 경외감과 숭배의 마음으로 찜찜하게 마침표를 찍곤 했었다.
 
이 책, 거실의 사자는 그런 고양이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애초 거대고양잇과 육식동물의 간식에 지나지 않았던 인류가 그들의 고기를 훔쳐먹고 차츰 도구로 무장하며 세력이 비등해지는 것에서 고양이의 가축화 아닌 가축화가 시작된다. 고양이는 개나 소와는 달리 가축화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특별한 동물이란다.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복속되지 않고 종적인 일관성을 유지한 채 골격과 체형을 지금까지 유지했다고. 개와 달리 종 자체가 고작 털색으로 구분되는 얄팍한 다양성을 가진 걸 감안하면 알 만하다.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양이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개와 달리 고도의 육식동물인 고양이는 인간에게 소처럼 편하고 안정적인 단백질원이 될 수도 없었고, 쥐를 잡는다는 오랜 통념과 달리 쉬운 먹이를 취하느라 쥐 박멸엔 큰 효과를 내지 못했고, 다양한 표정과 감정표현을 진화시킨 개와 달리 단독사냥꾼 고양이는 늘 새침한 표정으로 곁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번식기계 고양이는 폭발적인 번식속도와 인류 이동에 힘입어 전지구로 퍼져나갔다. 이집트에서 발원한 고양이는 신대륙과 남극까지 퍼지며 토착생물의 씨를 말리고 급기야 인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번성하는 동물이 되었다. 미국에서만 하루에도 길고양이 수만마리가 살처분되고 있지만 숫자는 줄어들 줄 모르고 중성화조치(TNR)는 애묘인과 인도주의자를 의식한 요식적인 눈가림일 뿐이란다.

이쯤되면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 만물의 영장이 맞나 다시 물어볼 때다. 고양이님들의 집사를 자처하는 인류는 먹이사슬의 맨꼭대기를 고양이에 양보한 건 아닐까. 소위 '양육 본능의 오발'을 유발할 만큼 귀엽고 애기같아지는 식으로 진화한 고양이의 매력 앞에 저항할 수 있는 인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책중에 소개된 '톡소플라스마'의 전인류적 감염으로 고양잇과 동물에 대한 저항력과 경계심이 제거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토록 귀여운 책표지를 만든 디자이너는 분명히 그런 환자임에 틀림없다.

고양이의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왜 스스로 고양이 앞에선 애기 어르듯 하며 집사를 자처하게 되는 건지 궁금한 사람에게 강추강추하고 싶은 책. 냐옹♡

오나의여신님.

울드와 스쿨드와, 뭐니뭐니해도 베르단디.

내 중학교 시절 그녀의 화려하고도 섬세한 머릿결을 칼로 한올한올 파서 코팅하던 녀석과 친구였는데, 유유상종이었던 것이다. 오나의여신님 극장판 ost의 라이브공연 버전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척 그 간드러지고 꿀떨어지는 목소리에 집중했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오나의여신님의 그림체는 무하의 그것과 비교함직하지 싶다.)

십년 넘도록 연재되어온 스토리를 갈수록 희귀해지는 만화방을 찾아 잘도 따라오면서, 어디선가의 애니 팬시샵이던가 전시회던가에서 사왔던 책받침, 콘티 자료집과 네컷 만화집까지 지금까지 고이 갖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면서도,

또 그와중에 종반에 이르러 케이를 고자로 만들었던 베르단디의 '속임수'라는 설정에 잠시 멘붕했다가, 초반에서 중종반을 지나며 같은 베르단디를 그리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각하게 변신해 버린 작가의 그림체에는 만성적으로 뜨악함을 느끼면서도, (갠적으론 초반의 통통함과 종반의 각진 달덩이 그 사이 어디쯤이 참 좋았는데)

이렇게 오그라들면서도 아름다운 결혼식 장면으로 완결되었다는 건 뭔가 내 안에서도 함께 슥 완결되는 느낌을 던져주는 거다. 뭐, 물론 전적으로 남성 위주의 하렘물이라거나 입맛에 맞춘 캐릭터들의 진열 등등의 부분은 이미 쇽 극복한지 오래지만서도. (코슥)

날씨도 죽을 듯이 덥고 끈끈해서 사람들이 많이 안 온단 친구 이야기에 찾았더니, 막상 실내의 놀거리, 아니면 에어컨을 찾아나온 듯한 인파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닌 느낌.

작년에 비해 퀄리티도 전반적으로 좋아진 느낌이었고, 또 마냥 고양이와 고래에 꽂혀있던 동물나라가 좀더 다양해진 느낌이었다. 고양이를 애정하는 입장에서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반가운 변화.


#서푼짜리오페라 #브레히트 #희곡 #책스타그램

브레히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공산당에 가입한 적 없는 자칭 맑시스트란 점, 그리고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하며 고전적인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낯설게 하기'의 선구자란 점 정도. 희곡을 텍스트 자체로 읽는 건 상상하며 읽을 여지를 남기기 마련이지만, 합창과 대사와 방백이 뒤섞인 그의 희곡은 곳곳에서 제동을 걸어왔다.

서푼짜리오페라에서 그는 등장인물로 하여금 계속해서 초기 자본주의시기, 아마도 19세기 초반쯤을 냉소하는 대사를 내뱉도록 한다. 거지 왕초와 갱 두목간의 이야기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고, 또 누구와 대척하며 누가 자신들을 억압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그게 무엇이든, 우정이던 애정이던 전부 돈으로 환전되는 모습도 적나라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갱 두목이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끝나나 했던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왁스럽게 방향을 틀어버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할 수 밖에, 맥락없고 뜬금없는 사면령에 더해 귀족 작위라니. 피첨 부인과 피첨이 관객에게 직접 던지는 마지막 대사는 씁쓸하고 당황스러운 울림을 남긴다. "왕의 말탄 사신이 항상 온다면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손쉽고 평화로울 텐데."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끝은 비참하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는 주문이자 집요한 요청.

#문상 #김금희 #책스타그램

매듭. 매듭. 옮겨온 흔적. 꽁꽁 싸맨 채 이고지던 보퉁이를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과거, 라고 퉁쳐버리고 나선 다시 시작하는 현재란 거. 그런 매듭. 매듭진 삶.

마치 픽사애니 '업'의 인트로를 좀더 디테일하게 풀어놓은 느낌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이들이 만나 사랑하고 살아가고 또 이별한다. 이렇게 삶이 피고 지는구나, 라는 짧은 탄식 속에 진하게 졸여진 감정을 표현하기엔 단어가 모자란다. 슬프다기엔 아름답고, 아름답다기엔 애잔하다.

아름답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다. 가진 것도 없고 딱히 야심이나 욕망을 품지도 않았다. 절름발이 무능력녀와 생선잡이 괴팍남의 첫만남은 그래서 좀더 잿빛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단지 어디로던 탈출하고 싶었던 여자의 니즈와 가정부가 필요했던 남자의 니즈가 가까스로 합을 이루었던 위태롭고 앙상한 조합.

말 잘 들으라며 따귀를 맞던 여자가 어느 순간 남자가 끄는 손수레 뒤를 절룩거리며 따라다니고, 또 어느 순간 손수레 위에 앉아 같은 풍경을 보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기도 한다. 여자는 이제 남자의 주먹구구식 밥벌이에도 개입해 훨씬 정연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고 있다. 마치 그의 돼지우리같던 오두막이 변신한 것처럼.

그녀의 그림이 없었어도 그와 그녀의 삶은 그만큼 아름다웠을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창문 프레임 바깥 풍경과 같은 것을 그가 보지 못한다 해도, 그래서 '고작' 난 당신-내 아내-만 본다며 서툰 경상도 남자같은 고백으로 평생을 버텨냈다 해도,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속엔 이미 그가 가득했으므로.

#내사랑 #maudie #에단호크 #세종문화회관 #소소마켓 #야외상영

#미국의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 #교유서가 #리처드호프스태터 #지식인 #책스타그램

책을 손에 쥐면서부터 이유모를 겸연쩍음이 계속됐다. 반지성주의란 단어가 활자화되어 다뤄진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우르르 몰려다니는 대중 따위 반지성적이라며 냉소했던 나 자신은 정작 뭔가 싶은 혼란스러움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대학 새내기시절 읽었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책이 던졌던 오래된 질문을 환기시킨다. 지성은 뭐고 지식인은 누구이며 뭘 하는 존재들인가. 관료나 작가가 지식인인가, 월급노예는 그럼 뭐지. 나이와 위치에 맞게 좀더 현실화된 고민이다. 그리고 왠지 낯간지럽고 겸연쩍은 고민.

지성과 지식인의 특별함을 말하는 건 이제 그런 간지러운 느낌인 시대다. 혹자는 X선비질하지 말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민주주의와 평등이 보편가치가 되었고, 지식과 정보는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데다가 교수와 철학자의 이야기는 온라인 상에서 댓글과 과히 다를 것 없는 무게감을 갖는다. 정치와 역사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특허나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닐진대 대체 저 '척'하는 먹물들은 왜 그걸 독점하려 드는가 말이다. 그리고 쉽고 짧게 말하면 될 걸 왜 괜히 어렵고 복잡하게 말이 길어지냐 말이다. 그냥 실용적이고 돈되는 이야기나 하지, 구름잡는 이야기 따위 일자리 한개라도 만드는데 보탬이 되나 말이다.

저자는 미국의 건국과 대서부시대 이래 1950년대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 시점까지 지식인들의 역할과 지식인사회-대중간의 긴장을 국면국면의 스냅샷처럼 찍어 세밀히 묘사한다. 미국의 특유한 '반지성주의'가 형성된 곳을 크게 종교와 정치, 사업과 교육에서 찾고 있다. 엄밀한 의례와 교의를 갖춘 종교와 대척하여 개인의 신비체험을 강조한 복음주의교파들, 지성보다 인성을 강조하며 귀족계급의 리더십을 타파한 평등주의적 정치이념, 고급문화의 정신적 가치 대신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삼은 교육과 사업에서의 실용주의자들. 미국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흐름을 '지성 vs 반지성'의 오랜 갈등사로 재구성한 스토리는 굉장히 설득력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실한 프레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유지하고 있는 지식인상이 정치와 문화, 체제에 대한 비판정신으로 표상되는 점이 여전히 난 맘에 든다.

그렇지만 몇가지 떠오르는 질문들을 남겨놓자면. 1.이게 정말 미국만의 상황이었을까. 유럽 이외의 모든 국가에 보편적인 양상은 아니고? 어쩌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유럽의 '지성주의'가 예외적인 건 아닐까 싶어서 하는 이야기다. 2.2000년대를 경과한 미국도 같은 프레임으로 읽을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 같은 표피적인 사건말고 예컨대 서부 IT기업들의 기업문화는 반지성주의와 어떻게 엮일까. 실용성과 기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반지성주의의 흐름에 있다고 봐야 할지. 3.AI 등의 논의는 인간과 지성이란 테마에 어떤 자극을 줄까. AI를 둘러싼 논의가 온통  정보처리에 집중되어 있어 지성 따위 잊혀진 건 아닐까 싶은데 그럼 안되는 거 아닌가.. 4.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따져본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미국의 그것과 별반 차이없이 종교와 정치, 비즈니스와 교육이 큰 요소인 건 변함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한국이 타파해야 할 귀족적/특권계급적인 지적공동체, 앙시앙레짐이 애초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자전거도둑 #bicyclethief #italy #movie #classic #영화스타그램 #고전

1948년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고전. 이토록 강력한 영화라니. 충격과 반전의 후반부는 말그대로 입을 떡 벌리게 만들었고, 인간과 삶에 대한 김기덕 류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폭발이 아니라 세련되고 담백한 표현만으로도 그정도 성취에 이를 수 있음을 웅변한다.

2차대전후 피폐해진 이탈리아,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가족이 바라보는 건 아버지뿐이지만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직업소개소에서 용케 소개받은 일자리는 자전거가 꼭 있어야 일할 수 있다는데 정작 전당포에 팔아먹은지 오래. 침대보와 베갯잇을 다시 전당포에 잡히고 자전거를 꺼내오는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에게, 아니 그의 가족에게 자전거는 당장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수단인 셈이다. 그런 자전거를 도둑맞고서 그가 느꼈을 암담함과 좌절감은 얼마나 깊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은 러닝타임 내내 계속되는 자전거와 자전거 도둑에 대한 추적이 줄곧 무위로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짜증과 답답함으로 변질될 지경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경찰, 나몰라라 하는 주변인들, 증거내놓으라며 뻗대는 관련자들.

그러게 왜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그러냐. 같이 돌아다니는 꼬맹이 아들은 무슨 잘못인데 왜 화풀이하고 그러냐. 겨우 도둑에게까지 가닿았다 싶은데 무기력하게 빈손으로 되돌아설 때쯤에는 애꿎은 화살이 급기야 피해자인 남자에게 쏠리고 말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전개. 사실 충격이라기엔 사람 심리가 그런 거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날벼락같은 피해를 입었고, 누구도 내게 도움을 주지 않고 관심도 없다면, 어쩌겠는가. 도둑맞은 이가 도둑이 될 수 밖에. 사진이 바로 그 갈등의 순간.

그리고 한번 더 인상적인 반전이 등장한다. 순식간에 잡혀버린 그는 아이 앞에서 따귀를 맞고 다구리를 당하지만, 잡힌 도둑 앞에서, 다시금 안전하게 수중에 들어온 자전거 앞에서, 이번 피해자는 관대함을 과시한다. 경찰서로 끌고 가는 대신 그냥 아이와 함께 보내주겠다며 풀어주는 것.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망연자실한 표정이라니. 사방으로 휘적대는 눈빛은 어딘가 목을 매달 곳, 죽어버릴 곳을 찾는 것만 같다. 칼날 위에 선 듯 위태로운 파국을 맞을 것만 같은 긴장감이 팽팽한 순간, 아이가 내미는 손을 잡고 비척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 아, 이게 사는 건가, 싶은.

#쇼와육군 #글항아리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일본 #전쟁 #쇼와 #육군 #위안부 #박유하 #제국

저명한 르포르타주 작가이자 '자성사관'의 주창자인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그중에서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견인한 세력이 누구이며 어떤 관점과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천착한다. 그저 '일본이 나빴다'거나 도조히데키 개새기,라는 두루뭉술한 선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여전히 피가 흐르는 동시대사를 갈무리된 역사로 넘기기 위해서도 구체적이고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단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일본의 정치와 전쟁을 줄곧 주도해온 세력을 육군, 그중에서도 대본영 육군부(참모본부)의 엘리트 군관료집단이라 본다.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국민에 대한 통치권보다 우위를 점한 채 전혀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던 시대. 육군은 오로지 천황의 재가에 따라 움직이는 황군이라지만, 천황이 허울뿐인 총괄을 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변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육군 엘리트들은 군대조직의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자존 자위를 말하며, 그에 따른 안보선은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내지를 보전하기 위한 중국 침략, 중국을 보전하기 위한 러시아 견제 혹은 동남아 침략, 급기야 미국에 대한 침략으로. 그렇지만 빈약한 정보와 준비되지 않은 병참, 무엇보다 국가총동원체제로 치뤄지는 전쟁에서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정신력과 충성심만으로는 중과부적.

책을 덮으며, 그간 우리는 승자의 기록에 손쉽게 편승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해방이라는 혜택을 입은 이해당사자로서(얼마나 다행인가, 일본이 폭주하여 스스로 자멸했단 건!), 엄밀하고 냉정한 분석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1년말 진주만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 그리고 그전의 독이일 삼국동맹과 연합국간 다툼을 두고 단순히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나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은 뒤늦게 시장쟁탈전쟁에 가담한 국가 중의 하나였을 뿐.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과 자유민주의 원칙들은 기실 타국의 대외정책을 견제하고 자국의 통상이익을 수호하는 국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증거로 뒤늦게 제출되었지 않나.

책의 한계 하나, 저자는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데올로기가 허위적이고 가식적으로 쓰였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그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와 서양을 대비시키며, 식민지 지배자와 해방자를 대비시키는 구도는 너무 단순하고 나이브하지 않나. 게다가 동남아 전선에 버려진 수천의 무명용사들이 각국의 해방전쟁에 자의로 가담했음을 근거로 대동아공영권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건 비약이다. 그들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분석없는 점프의 결과는 보편적인 인류애나 가치관이 아닌, 인종과 지역을 근거로 한 대동아공영권 아이디어 자체가 복권될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두번째 한계를 굳이 더하자면, 천백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월간지에 연재된 원고를 근간으로 쓰여지다보니 압축적이지 못하다. 관련자에 대한 심층취재의 생생함을 더하려 했다 해도 겹치는 내용과 장면이 많아, 예컨대 위안부나 전후배상 문제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이 아쉽다. 전시는 평시와는 다른 가치관과 결정을 필요로 하며 또 당대는 지금과 다른 감각으로 위안부 정책 등이 수행되었다, 는 다소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들이 뭉뚱그려졌다. 저자 말대로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야 그에 따른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한 부분일 텐데, 1991년에 씌여진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후 그다지 계승되지 못한 듯 하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봐야겠다.

#옥자 #넷플릭스 #영화스타그램 #봉준호
 
소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장악한 '보여줄 권리'에 넷플릭스가 참신하게 덤벼들며 꺼내든 무기..란 측면에서, 역시나 잘 만든 오락영화가 답이었으리란 생각. 전연령이 시청이 가능하고, 특정 마켓에 한정된 소재나 장르가 아니며, 소녀와 반려동물의 이야기는 유니버설하게 먹힐 수 있는 원형과도 같은 소재랄까나. '잘 만든 오락영화'란 건 그 본령이 엔터테이닝에 있으되 이것저것 슬쩍 얹어낸 양념과 고명이 과하지도 앙상하지도 않았을 때 가능한 표현인 것 같다.

공장형 대량축산, 유전자조작식품, 먹거리를 둘러싼 신념과 현실 간의 낙차, 글로벌 종자기업들의 패권성, 육식 자체의 도덕성 등등 다채롭게 읽힐 수 있는 힌트들은 무성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그런 부분에 집중하는 건 아닌 거 같단 이야기. 조금 도발적으로는 그저 영악하게 잘 갖다쓴 소란스런 이슈들-논란을 일으켜 대중을, 돈을 끌어모을 소재들-이란 표현이 맞겠고, 조금 호의적으로는 가족영화/오락영화에도 사회적 이슈를 적절히 반영했다고 할 수도.

옥자와 미자, 반려동물과 인간간의 숱한 애정담에 대한 봉준호식의 변주. 내 기준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이건 아마도 속편이 있겠다 싶은 내 촉이 맞을까 하는 부분. 던져진 채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장면과 떡밥들이 적잖은데, 아무래도 봉감독은 속편까지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싶은데..모르겠다.


단지 착취나 억압의 피해자가 된다고 해서, 혹은 그에 저항한다고 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남성들도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것이 트렌드라곤 하지만, 페미니즘이 무엇이며 어떤 문제의식과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인지 차분한 이야기를 나누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저자는 명료하게 말한다. 페미니즘이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남성을 여자 아래로 끌어내리고 여성을 남자 위에 세워올리는 게 아니다. 남성과 여성간의 젠더 전쟁을 벌이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를 바꿔나간다는 건 그저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 남성'에 분노한다는 것 이상을 말함이다.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선 내면의 적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스스로 바뀌기 위한 진단과 공부가 필요한 거다. 자신과 타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 하나하나 철저히 되짚어 보아야 한다. 여성 내부에 체화된 가부장제적인 감수성과 인종적, 계급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태도를 유지하고서는 기득권에 편승중이라며 공격받는 남성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종, 계급, 민족 등 스스로가 놓인 지형에 대한 성찰과 고민없는 일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기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수혜자들인 남성과 얼마나 닮았던가. 강자와 약자가 그대로 온존하는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로라면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개인의 출세나 자기만족을 위한 하나의 발판처럼 쓰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비단 페미니즘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이런 '미러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성과 남성 모두, 페미니즘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풍경을 조심스레 따라가볼 필요가 있는 거다.


#모두를위한페미니즘 #페미니즘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시간날 때 만들어본 내새끼 자랑♡


#코스모스 #칼세이건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기념비적인 과학교양서, 라는 말은 다소간의 경계를 요한다. 기념비에 먼지가 채 내려앉기도 전에 속속 밝혀지는 많은 오류와 논쟁중인 해석이 대중화를 위한 설탕옷을 입고 간명한 진실인양 행세하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자가 쓰는 비유와 전문영역이 아닌데서 끌어오는 배경지식은 자칫 오해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깐.

그런 점에서 1980년에 첫 출간된 이 고전 역시 비켜갈 수 없는 한계들은 엄존한다. 과학에는 전혀 전문성이 없는 내 눈에도 당장 보이는 건 DNA에 대한 과한 기대감이라거나, 우주공간에서의 핵 사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라거나, 무엇보다 그가 그렸던 수십년 후의 미래를 살고 있는 지금이 그의 상상과는 꽤나 다르다. 인간 이성을 신뢰하고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 공헌할 거라던 그의 신념 혹은 의지는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책의 주된 메시지는 여전히 엄청나게(!) 유효하다. 과학 자체와 과학의 결과물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하기'의 과정과 문제의식에 대해 바쳐진 그의 열정과 단호함이 인상적이다. 결론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 관건은 그 결과물이 왜 잘못 해석되었거나 예견되지 못했는지, 그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틀거리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과학 정신을 궁극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건 안으로는 인간 내부와 기원을 향하고 밖으로는 지구와 별과 우주로 향하지만, 결국 이는 만나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자 그대로 인간은 우주에서 생겨났으니까. 그런 통찰을 가로막았던 건 지상의 왕들과 신들과 권위자들이었다. 그렇게 기원전 깨인 자들의 탐구 대상이 되었던 우주가 수십세기동안 미신과 미망의 원천으로 전락하고 나서야 다시 인류는 우주에서 코스모스, 질서와 규칙을 찾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초판 내지 개정3판 정도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언젠가 천문대에서 별들을 바라보고 은하계 변방의 작은 티끌의 티끌에 불과한 지구를 실감했던 날의 소름이 오소소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보잘것 없는 곳에서 찰나를 살다가는 인류라니. 게다가 난 그 인류의 아주아주 작은 점 하나일 뿐이라니. 그건 일종의 신비체험이기도 했고, 내가 찾아낸 겸손해질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한 이유이기도 했던 것 같다.


#자백 #영화 #영화스타그램 #뉴스타파

힘을 가진 그들에게 다른 보통사람들은 그저 본인을 위한 발판으로만 보이는 걸까. 사람들 눈과 귀를 가리는 건 일도 아니고, 랜덤으로 찍어걸린 이들을 윽박지르고 강압하여 자백 아닌 자백을 이끌어내는 스킬은 수십년간 갈고 닦아왔던 거다. 억울함에 울부짖던 자살시도를 하던, 남은 가족들이 울화병으로 뒷목잡고 쓰러지던,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김기춘과 그 후예들이 조작한 사건 피해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확실히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숨막히도록 끝없이 이어지는 '자백'에 근거한 사형/무기징역/수십년의 징역과 수십년늦게 바로잡힌 무죄판결의 기록들은 97년 이후 잠시 멈칫하다가 2013년부터 슬슬 되살아났다. 한참 레벨업되었던 스킬을 새삼 오늘에 되살리려니 아무래도 좀 부족한 점들이 있었던 거려나. 최고권부라는 검찰도 국정원도 일처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게, 뉴스타파의 취재로 저렇게 정면반박당하고 깨갱하고 말다니. 영화를 보다 옆자리 아저씨가 탄식처럼 크게 '저런 개새끼들', 할 수 있는 만큼의 시대가 된 덕분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주로 다루는 2013년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대법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기까지의 3년여 시간을 촘촘히 따라가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당시 이명박정부가 박원순시장을 찍어내려 간첩사건을 만들어냈다는 해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탕봉지에서 사탕 빼먹듯 북한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쥐고 흔들며 내키는대로 사건을 창작해내는 사람들,  그들의 장난질은 한순간의 정략과 정치기획이었겠지만 그 파급력은 개인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가혹하다. 그 조작으로 이득을 보려던 사람의 관심은 식었고 정권도 바뀌었지만,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조작사건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엄연한 사건이 되어 희생자에겐 길고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남기는 거다.

어처구니없지만 웃을 수도 없는 부조리극. 보통사람들에게 그건 일종의 천재지변이었고, 힘센 사람들에게는 그저 게임을 위한 장기말 배치같은 것. #이게나라냐



#죽여주는여자 #영화 #윤여정 #이재용

죽여준다는 표현이 갖는 이중성, 말그대로 죽여주겠다는 살벌한 의미일 수도 있고, 또 죽여줄만큼 좋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렇게 두가지의 '죽음'을 (남자에게) 가져오는 사신같은 여자 윤여정의 인생과 현재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마치 포스터 속 그녀의 복잡해 보이면서도 멍해보이는 표정 그대로. 대체로 그건 수동적이고, 왠지 알아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에 맞부딪힌 자의 표정이다.

등장인물들간의 욕망이 향하는 세기나 방향을 바탕으로 등고선지도를 그려보면 어떨까. 윤여정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욕망의 등고선은 두가지 죽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 모두에 있어서 그렇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탑골공원의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같이 좋은 섹스를 맛보고자 하고, 또 그렇게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조차 불러오려 하니까. 그녀는 모든 (남성들의) 욕망이 흘러내려오는 곳, 배꼽같은 저지대일 뿐이다. 그녀의 삶은 늘 그랬으니까, 어쩌면 그 표정은 지쳐 체념한 데서 비롯한지도 모른다.

주변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다소 복잡한 지형을 보인다. 오타쿠같은 장애인 남성, G-spot이라는 야릇한 이름의 트렌스젠더바에서 일하던 트렌스젠더. 이들은 영화의 욕망이 단순히 남녀의 이분법으로만 읽히는 걸 막고 좀더 건전한 욕망의 교류, 등가교환에 가까운 뭔가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섹스관광의 결과로 태어난 코피노(코리안+필리피노) 꼬맹이. 윤여정에게서 뻗어나가는 유일한 욕망 한가닥이 있다면 그것, 그 꼬맹이를 통해 과거 젖도 못뗀 아이를 입양한 기억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한가닥 욕망조차 제대로 채우기 쉽지 않다. 방해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남성들)의 욕망이 사회의 전지적인 권한을 침범하는 시점. 구성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전권을 행사해야 하는 사회는 그 통제를 벗어난 늙은 남성들의 잇단 죽음을 주목한다. 영화속 현실에 충분히 노출된 지금의 현실, 고 백남기농민이나 한상균 민노총위원장의 뉴스가 그 사회가 가진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면, 이제 그 힘으로 윤여정을 단죄해 위신을 유지할 때인 거다.

그렇게 그녀는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 평생을 살았고, 자신의 작은 욕망 하나 채우지 못한 채 삶을 마친다. 대체 그녀의 삶은 뭐였을까, 아니. 이렇게 묻는 건 스크린 너머 내가 그녀의 삶에 여전히 코박을 만큼 가깝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제각기 남들이 알 수 없는 내밀한 속사정과 맥락이 있는 법이고, 그녀의 삶 역시 나름의 만족과 안온함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손을 빌어 세상 밖으로 구출해낸/죽여버린 그들의 감사함에서 작은 의미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뒷바퀴와 앞바퀴, 핸들과 브레이크선 등을 모두 연결한 모습. 부품에서 전체 조립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뭔가 아귀가 딱 떨어지는 느낌이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academy #plamodel #bicycle copyright 1998. 내게 친구가 말하길, "형 합법적으로 신나 불려고 저거 하는거지?"라니. 그치만 역시 니혼징의 섬세함은 못 따라가는구나..약간 국산품애용캠페인같이 스스로 세뇌를 하면서 어쨌던 끝내자고 다짐다짐.

스티커도 데칼처럼 얇고 정교하면 좋을 텐데 두께가 1미리쯤은 될 거 같은 두꺼운 비닐 소재다.

그래도 나름 추가적으로 도색도 하고, 약간의 커스터마이징도 하면서 최대한 디테일을 살려보려 노력중.

이런 자전거 받침대의 용수철도 그냥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모양이라 납작하고 부실해 보이는 게 아쉬웠던 점. 진짜 스프링은 못 쓴다고 하더라도 좀만 더 정교하면 좋은데.

그래도 페달은 따로 도색을 했더니 색감이나 텍스쳐가 그럴 듯하다.

브레이크패드 부분도 무광 은색으로 도색을 했으니 그나마 좀 나은 모습. 그렇지만 저런 주형틀 자국이 남은 것들은 좀..

대략 완성샷. 그래도 완성시켜놓으니 뿌듯한 마음은 다를 바 없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plamodel #bicycle 그야말로 악전고투. 조잡함과 정교함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실감했다..저 브레이크 라인은 계속해서 빠지고, 곳곳에서 흔들흔들 위태한 부품들의 결합상태라니.

어쨌든 그래도, 만들면서 자전거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어떻게 동력이 전달되고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뜯어볼 수 있었던 기회. 재미있었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academy #plamodel #bicycle
copyright 1998. 무려 20년 전의 모델인데, 친구가 선뜻 내주어 조립을 해볼 수 있었다. 바이크와 건담 이후 또다른 아이템.

그렇게 퀄리티가 높거나 (그래서) 비싼 녀석이 아니라 그런지 부품은 세가지 색깔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래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말랑거리는 타이어 고무가 맘에 든다.

아무래도 색을 좀더 써줘야 할 것 같아 갖고 있는 타미야 스프레이로 부분부분 포인트를 주기로. 빨간색과 무광 은색, 무광 검정색 정도 얹어주면 될 거 같다.

제법 디테일은 뭉개지지 않은 편이긴 하다. 체인부분이나 기어 부분엔 별도로 도색하니 좀더 나아보이기도 하고.

안장부분도 다시 도색을 했다.

뒷좌석 역시. 그렇지만 싸구려 크롬 느낌나는 은색 부품들이 좀 거슬린다. 게다가 부품이 말끔하게 주형되지 않아 마감이 약간 안타깝기도.

빠른 속도로 프레임을 만들고 뒷바퀴와 체인부분을 완성. 빨간 색으로 페달 부분 일부를 칠한 것도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물인 듯.

그러나 이때까지는 몰랐다. 갈수록 태산, 안타깝던 퀄리티가 삐죽삐죽 문제를 만들기 시작하리란 걸.


#이중섭 #덕수궁미술관 #아고리 #발가락 #아스파라거스

황폐한 나라에 재능이 넘쳤다. 천재인 주제에 다정도 병이었다.  콧수염까지 잘난 외모인데, 발가락 페티시가 있었나보다. 그의 남덕씨, 그의 아스파라거스 군과 발가락씨. 그림 하나하나, 붓질 하나하나에 그의 인생과 감정과 염원을 담았던 슬픈 천재.


#그가돌아왔다 #넷플릭스 #히틀러 #나의독재자 #영화

2014년, 그가 삶을 마감했던 지하 벙커 바로 그 자리에서 히틀러가 되살아났다. 우선 보여줄 거리는 60여년의 시간차로 인한 어벙한 모습들, 그로 인한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기. 기울어가는 전쟁 한복판에 있던 그가 평화로운 베를린 한복판에서 거리의 공연을 펼치는 이들과 자리다툼하는 모습이라거나, 군복을 몽땅 벗어 세탁소에 맡기는 모습 같은 것들.

가볍게 그의 시대착오적인 연설을 끄집어내어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도 좋겠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그의 말투는 한소절만 들어도 웃음이 터지는 개그물일 뿐이니까. 난민, 청년 실업, 노인 빈곤, 국가 채무, 멍청한 텔레비전...어라. 생방송 프로그램에 개그맨으로 발탁된 그의 연설솜씨는 전혀 우습지 않다. 그의 주제 역시 전혀 터무니없거나 미친소리 같지 않다.

일약 사회문제로 떠오른 티비 히틀러. '히틀러의 지적이 독일 사회문제의 정곡을 찔렀다'거나 '정치가 뭔지를 아는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따위 폭발적인 찬사가 이어진다. 대중은 그를 좋아하고, 언론은 그를 잘 포장하여 대중 앞에 대령하며, 자신이 진짜 히틀러임을 셀수없이 선언한 그에게 재차 이름을 묻는 사람은 사라졌다.

영화는 집요하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마치 1933년 드라마틱한 그의 집권을 전후한 시대상과 현재의 상황을 정면으로 충돌시킬 생각인 거 같다. 그것도 있는 힘껏. 히틀러의 뼈대가 되었던 우생학과 아리안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가 얼마나 농담같이 시작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상식이 되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게 히틀러라는 악인의 등장이라는 돌발변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이름의 누구라도 대행할 수 있었을 인류의 한 국면이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건 꼭 '악의 평범성'으로 풀 이야기만은 아니다. 히틀러를 낳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무르익으면, 그 화약고에 불붙이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독일 걱정에 밤잠을 못이룹니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정작 독일을 불구덩이로 집어넣었었고 또다시 집어넣을지 모르는 역사의 반복, 이건 두번 다 틀림없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 거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이를 가진 어떤 나라에도 불길한 전조를 드리운다.

그렇게 소름돋게 만드는 영화의 마지막, 2014년의 히틀러는 이제 대중의 인기와 언론매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슬슬 본색을 드러낸다. 잡종개를 총으로 쏴죽이고 유태인의 피를 혐오하며 유색인종은 육체노동이나 하라고 농담처럼 밑밥을 깔아둔 터였다. 난민을 위한 집단수용소에 대해선 전문가라며 자신감을 보인 터였다. 더이상 그는 어릿하고 후져보이지 않는다. 눈빛은 명민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카리스마는 백퍼센트 충전됐다. 이제 어디로 독일 국민들을 끌고 갈까.

설경구가 스스로를 김일성으로 착각한다는 설정의 '나의 독재자'를 초반에 살짝 떠올렸으나,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 대충 얼버무리거나 금기시되어버린 히틀러라는 이름이 갖는 미묘한 지점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사람들을 당혹시키려고 작정한 작품이고,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그 목적을 초과달성한다.


#히틀러의비밀서재 #히틀러 #서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어떤 책을 읽어왔고 어떤 책을 소장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근거가 될까. 적어도 1만6천권의 장서를 개인소장했고, 그의 사상과 행동이 역사를 뒤흔든 사람이라면 그의 독서이력과 서재는 큰 힌트가 된다는데 이견은 없겠다. 사실 나는 그보다 자취가 작은 일반인, 한국같은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라거나 평범한 갑남을녀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애서가를 자처했고 늦은 밤까지 하루 한권의 책을 읽어내는 것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의 제3제국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철학자로 니체나 쇼펜하우어를 들먹인 것도 주효했을 거다. 지독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뒤범벅된 그의 이른바 민족사회주의는 그래서 더욱 파악하기 어려워보이는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대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어떻게 엮어내겠단 건지, 거기서 파생되는 논리적 귀결들이 서로 절그럭거리는 건 어떻게 해소하겠단 건지. 유대인은 왜 이렇게 늘 인류의 적이 되어 왔으며, 아리아인종이란 건 대체 어디서부터 순수하고 어디서부터 '오염'된 건지도. 등등, 끝이 없다.

그렇지만 과연 그가 그만큼의 소화력을 갖고 있었는가 하면, 아니었단 게 이 책의 일관된 메시지다. 그는 체계적인 독서를 한 적이 없고, 그의 사고는 독서와 함께 부딪히고 발전하고 변화한 게 아니었단 이야기다. 문제는 그의 독서법. 그는 자신의 근거없는 신념과 망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조각들을 찾는 방식의 독서를 했고, 개별 철학이 진지하게 구축하려 한 세계와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그런 아전인수식의 발췌독은 현란한 수사와 웅변에 필요한 벽돌은 제공할지언정 본인의 사고와 사상을 위한 자양분은 뽑아내지 못한단 이야기렸다.

이 대목을 아전인수식으로 다시 인용해보자면, 글쎄. 양보다 질이다. 몇권을 봤는지가 아니라, 개개의 책들이 어떤 맥락과 통찰력을 갖추고 본인에게 도전해왔는지가 중요하단 말이다. 교양을 진열하기 위한 지대넓얕식의 지식 소비가 갖는 위험성은, 혹은 장학퀴즈/일대백식의 퀴즈쇼에 특화된 암기지식이 갖는 위험성은 전혀 본인을 흔들지 못하는 그 무독한 지식에 있다. 백번을 흔들리고, 아프고 또 아파야 하는 건 청춘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개개인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지식이라면 결국 애서가이자 웅변가 '히틀러'가 되는 게 고작일 테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 독서 경험과 서재의 구비를 통해 히틀러의 뼈대가 될 신조와 인생을 짚어준다는 것. 사실 지금까지 과문한 바 히틀러의 삶과 그의 신념에 대해 제대로 짚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투쟁'을 읽어보는 건 고사하고 그가 외계인도 남장여자도 사이코패스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반인류적인 짓을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조각 하나 찾지 못했으니깐. 그렇지만 그의 사고퍼즐을 담당한 책들이 직조되면서, 그 역시 평범한, 혹은 다소 지적으로 부족하거나 성찰력이 부족한, 그래서 결단력만 가득한 멍청이였지 않을까 상상하고 이해해보게 만든다.


#세계최초의증권거래소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주식 #투자 #증권

격물치지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사물의 원리를 디립다 파헤쳐서  자기의 지식을 확실하게 넓혀나간다' 정도의 뜻이려나. 특히나 생활에 필요한 만물을 직접 하나씩 고안하고 구비해나가던 과거와는 달리, 점점 복잡해지는 생산과 창조의 말단으로 밀려나기만 하는 처지로서는 뭐하나 이해하기 쉬운 사물이 없다. 자동차는 어케 굴러가는지, 인터넷 검색은 어케 가능한 건지, 하다못해 냉장고와 에어콘은 어케 기능하는 건지.

주식회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주식시장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그저 현재의 효용이란 관점에서 주식투자방식을 연구한다거나 주식시장의 작동원리라거나 인간의 탐욕 운운하는 게 아니라, 이 독특하고 복잡한 시스템이 어떤 목적과 경로로 시작되었는지 말이다. 수많은 주주로부터 장기간동안 거대한 규모의 자본을 확보하여 사업을 가능케 해주는 주식회사, 한편 그 주식 지분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주식시장과 그 플레이어들.

물론, 책에서 주목하는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전세계 주식시장의 원형이자 실질적인 발원지인지는 잠시 유보해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각 국가마다의 필요성과 특수성이 있었을 테고, 어쩌면 제각기 중구난방식으로 비슷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한 건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분명한 건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설립과 더불어 보여지는 모습들이 지금과 너무도 유사하단 사실이다. 선물, 옵션, 파생상품, 그리고 투기로 인한 버블과 위기 상황까지. 덕분에 우린 좀더 심플하고 간명한 그림으로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듯 하다.

#나는단순하게살기로했다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미니멀리즘 #대지진 #일본

저자가 말하는 단순한 삶을 설명하는 글과 논리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게다가 도무지 사기만 하고 버리지는 않는, 청소나 정리 따위 하지 않고 쟁여두기만 하는 창고형 인간이라니, 이런 인간형이 흔할까 싶어서 공감도 떨어진다. 선이니 미니멀리즘같은 단어로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잡스와 마더테레사와 간디를 운운하고 인간 정신과 역사를 들어 정신사납게 쓰고 있는데, 결국 '미니멀하게 말하자면' 내가 파악한 키워드는 두 가지다. 디지탈로의 이동(digitalization), 그리고 우선순위 정하기(prioritization).

일본만화 드래곤볼에 등장했던 기똥찬 발명품, 호이포이캡슐. 집이던 차던 수십톤의 물이던 전부 조그마한 캡슐 안에 집어넣었다가 꺼냈다가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더랬다. 아마 그걸 가장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게 디지털로의 이동 아닐까. 무게도 부피도 없어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언제든 꺼내어 보고 들을 수 있는 디지털 컨텐츠의 물성. 저자가 말하는 지독히 단순화된 '물건구매-만족-익숙해짐-싫증'의 무한루프가 실제로 존재하며 동시에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가 제안하는 미니멀한 삶에서조차 이 루프는 사실 끊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체 그가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어 남겼다며 예찬해 마지않는 애플의 고성능 컴퓨터/스마트폰 속 데이터는 얼마나 빠르게 소비되고 쌓이고 있을까. 현실세계의 물건들을 처분하고 사진파일로 옮겨둔 그 디지털 세계, 씨디와 책 대신 인터넷 속 온갖 컨텐츠와 정보로 갈음하는 그 세계 속에서 그는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그의 시도가 부질없다거나 기만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주변정리의 차원에서, 무한욕구의 궤도에서 탈출해 보다 자족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차원에서도 그는 나름 의미있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니깐. 우선순위를 정하고 핵심이 아닌 것들을 지워내보자는, 너무도 담백하고 당연한 이야기라서 김이 좀 빠지긴 하지만 말이다. 저자같이 극단적인, '지저분한 방 출신의' 인간 말고 좀더 평균적인 인간을 들어 말해보자면, 평소 하듯 오래되었거나 낡았거나 안 쓰는 물건은 버리던 팔던 하자는 거다. 그렇게 물건들이 들고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것들, 그런 것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니 잘 챙기고, 나머지는 그보다 덜 중요한 것들이니 과감하게 덜어내어 버리던 혹은 마음만 덜어내던 그러자는 거다. 뻔하다고? 어디 이런 류의 책이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 하던가.

결론적으로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를 온전히 짊어지기엔, 저자가 펼치는 철학은 그다지 근본적이거나 철저하지 못하며 차라리 극단적인 버전의 집정리 스킬에 가깝다. 그런데 외려 내 흥미를 끈 건 이 부분이었다. 아날로그 물건들의 디지털로의 피난, 그건 저자가 의식한 것 이상으로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후과인지도 모른다. 대지진이 터지고 방사능이 만연해도 아날로그 세상 그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이들이 준비하는 신천지 디지털로의 노마드행.



#군자를버린논어 #논어 #공자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공자를 위시한 유가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유가철학이라고 하면 왠지 공자왈맹자왈, 옛 한문을 글자 그대로 암송해야 할 듯한 고루함에 더해 군주-백성의 관계를 다룬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지 않으려나. 그래서 어쩌다 그저 한두구절만 떼어 볼지언정 논어를 통으로 읽을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꽤나 획기적이고 도발적이기까지한 논어 읽기를 시도한다. 말그대로 '군자'란 표현을 버리고, 대신 지식인/지성인/지도자 등의 현대적인 표현으로 대체한다. 수레를 모는 대신 차를 운전하는 건 애교 수준. 공자가 애정한 안연, 자로 등 제자들의 재미있는 캐릭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 그들의 대화가 오늘날의 말글처럼 재연되었기 때문일 거다.

내용면에서는, 역자가 여러모로 공자와 논어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시사적인 이슈와 문제의식을 접목해서 공자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공자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어떻게 달라지고 여전히 같을까, 등등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거다. 글쎄, 다소 인상비평에 그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최소한, 공자가 여전히 현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이야기할 거리가 있다는 시작점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돼지의왕 #연상호 #부산행 #창 #영화스타그램 그림체는 낯설고 동작은 엉성하다. 움푹 패인 눈매와 불쑥 솟은 광대를 강조한 인물들은 만화의 미덕인 '뽀샤시'의 덕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보고 몇번이나 전율이 돋고 말았다.

학원폭력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보다는 어떤 사회적인 관계에서던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에 대한 집요하고 사정없는 묘사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약자라고, 피해자라고 선하거나 순할 것만 같은가. 그네들의 어둠은 오히려 가해자들의 일방적인 것보다 더욱 깊고 독하지 않을까.

표출되지 못한 분노와 폭력성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것들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다면, 그래. 이렇게 어둡고 음침하고 일그러진 세상에 사람들일 수 밖에 없는 거다.

p.s.그러고 보니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었다. 아..이 사람 뭐지.




#우리는어떻게괴물이되어가는가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신자유주의인격의탄생

왜 이렇게 '또라이'가 많아진 걸까. 터무니없이 공격적이거나 패배적이고, 온갖 심리장애 증상들은 날로 늘어만 간다고 정신분석학자인 저자는 진단한다. 직장이나 학교의 왕따 문제는 글로벌해진지 오래고, 묻지마범죄에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범죄 등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전반적인 사회 풍조,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상식'화된 신념들이 문제인 건 아닐까. 그것들이 사회 안의 인간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윤리체계를 설정해준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건 아닐까. 저자가 책의 절반을 할애해 꽤나 설득력있게 그 연관성을 논하고 있듯이.

그 기반에서 신자유주의라는 포괄적인 이데올로기를 호명하며 저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건 경제 능력주의와 교육 능력주의의 결합이다. 호봉이나 직급이 아닌 능력에 따른 평가를 강조하는 시스템이 초기엔 효율적인 듯 보이나, 이내 숫자로 환산가능한 지표와 결과에만 매몰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 체제의 중기 이후를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시스템 효율화를 위한 능력주의는 기존의 노동윤리와 공동체윤리를 해체하고, 아무것도 그자리를 대체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깨어진 지점에서 남는 건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일 뿐인(Homo homini lupus est) 계약 이전의 정글상태. 그게 현재 사람들이 병든 이유이며, 신자유주의가 주조하는 인간형이라는 결론이다.

길게 써봤지만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진다. 책이 그렇다. 사회가 정체성과 윤리 체계를 형성한다는 부분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은 꽤나 매혹적인데, 이를 신자유주의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헛점들이랄까 말해지지 않은 부분들이 보이기 때문일 거다.

우선 신자유주의가 최악인 시스템이란 것에 대한 분석이나 합의가 부재하다. 모든 사회는 나름의 지배사조와 그로부터 주형된 정체성과 윤리체계가 있을 텐데, 신자유주의 하에서 유독 정체성과 윤리체계가 파괴되었다는 진단이 과해보이는 거다. 그래서 또라이가 양산된 현상이 현대 사회에 고유하거나 유별나다는 것에 대해 납득시키지 못했다.

둘째로는, 서유럽에 기반한 분석이 과연 기타 지역, 한국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의문이다. 예컨대 한국의 전통적인 노동윤리와 공동체윤리는 서유럽의 그것과 같았던가. 능력주의의 부작용은 공통될 수 있으나 그것이 타파한 과거의 온정주의적 평가는 한국과 서유럽이 같았을까. 등등.

마지막으로, 서유럽의 실업률이 높은 것에 대한 원인을 능력주의와 성공에 대한 환상으로 인한 미스매치로 치부하는 것, 젊은 세대에 대한 능력주의식 교육의 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올바른 분석일까.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교육(과 자기계발열풍)에 미친 영향에 한정하여 이야기를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젊은이는 자신을 미니 기업으로 보아야 하며, 경제적 의미 차원에서 지식과 능력이 처음이자 마지막 심급이다."같이 잘 정제된, 까기 좋은 언명을 모처럼 잘 골라놓았는데 말이다.



#예술과경제를움직이는다섯가지힘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비추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한다. 자라와 솥뚜껑이 닮았다는 관찰은 제법 참신하고 재기넘쳐보일 수 있지만, 본질이나 근본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란 의미로 새길 수도 있을 거다. 예술과 경제를 함께 얽어내는 이런 책이 인문학을 살짝 얹은 천박한 교양서나 잡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대체 예술과 경제를 비교하기 위한 잣대가 뭔지부터 살펴보자. 머릿말에서 저자는 그걸 '명쾌하게' 다섯가지로 집약한다. 투시력, 재정의력, 원형력, 생명력, 중력-반중력. 각각에 대한 자의적인 설명은 그렇다치고라도, 그 다섯가지가 왜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간다. 게다가 정의상 서로 충돌하거나 중첩되는 것들까지.

다소 참신하고 풍부한 시각으로 예술의 표피로부터 경제에 대한 메타포를 끌어낼 뿐인 책이다. 경제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이리저리 썰어내고 구부러뜨린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 다시금, 이런 류의 '통섭'이나 '지적 네트워킹'을 말하는 자들에 대해 실망하고 말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