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시민'이란 단어가 여태까지는 촛불집회에 나섰던 국민들의 진정성과 평범함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단어를 통해 어느정도 '빨갱이괴담'과
'이념논쟁'으로 몰아가려던 반동세력들의 시도를 무력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분,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많은 시민들의 실로 역사적인 대규모
집회 참여를 표현하기에도 적절한 표현이었는지 모릅니다. 시민단체활동을 하거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유별난' 사람들만이 시민이라고 생각되던 한국 시민사회의 미성숙함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러한 '순수한 시민'이라는 단어로 우리의 선명한 입장과 견해를 가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중립적이고 초정파적인 입장에 서있는 듯한 '순수한 시민'이란
단어로 우리를 지칭함으로 인해, 지금까지 진행된 촛불의 전진은 '변질'이라 비판받게 되고,
우리는 '변질된 시민, 빨갱이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순수한 시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민으로 가져야 할 순수함이란 게 어떠한 덕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쳤던 우리는 "미국산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하고 "이명박 정부의 파행적 정국운영을 반대"하는
분명하고 선명한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 이상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최대공약수는 그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거리의 목소리와 제도정치권의 지형이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자신은 정치로부터 초탈한 양, 그저 훈수나
두면 된다는 듯이 "순수한 시민"이라는 고고하고 우아한 미명 뒤에 숨어서 자신의 입장과 정치적
의견을 감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와 진보신당, 나와 민주노동당이 어떠한 점에서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보수 언론들의 경마식보도처럼) 누가 승기를 잡을지,
누가 뜨는 인물인지에만 가십성 흥미 위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촛불집회가 어떻게 진행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중요한 교훈은 유실되어선 안됩니다.
그건 우리가 '순수한 시민'으로 이해관계에서 초탈해있다거나 정치적 입장이 무색무취한
고고한 원자적 존재들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지평 내에서 엄연한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가진 정치적 존재들이란 점입니다. 그걸 잊지 않는다면 각자의 입장에 맞는 정치집단,
시민사회집단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다거나, 하다못해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사람을 뽑을 수 있을 겁니다. 뉴타운이니, 737이니..에 속아넘어가지 않구요.

각자의 입장과 견해에 따라 결집한 시민들의 목소리는 이상화된 '시민' 전체의 순수한 목소리가
애초부터 아니었기에, 변질된 것이 아닙니다.(이명박도 시민이고, 유인촌도 시민입니다.)
좀더 명료해지고, 좀더 선명하게 '우리'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뿐인 것입니다.

촛불집회가 점점 진지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건 '변질'이 아니라 '발전'이라고 생각하면서
적어보았습니다. 불필요한 '순수성' 논쟁이 촛불집회와 국민들의 민주주의적 역량의 성숙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촛불을 든 우리 스스로 그러한 '순수성' 논쟁에 발목이 잡혀서도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광우병위험미국산쇠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시민이며, 이명박정부의 퇴진을
요청하는 시민이며, 조중동이 폐간되어야 한다고 믿는 시민이며, 진보신당이 원내진출을 꼭
이뤄내고 나아가 준비된 정권으로 국정을 담당하기를 바라는 시민입니다.


- 다음아고라토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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