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논란’ 진중권 “황상민 고소, 연아 이미지 타격”

 

[박동희의 입장] 김연아, ‘국민요정인가, 동네북인가’

 

김연아의 '까임방지권'은 까여야 한다

 

김연아의 까임 방지권은 누가 줬는가

 

 

숨가쁘다. 어느결엔가부터 김연아에 대한 기사는 상찬 일색이었던 과거가 무색하도록 극과 극이 공존하고 있다.

 

요새 내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김연아에 대한 극단적인 호오의 분열. 김연아의 탁월한 연기는 좋아하지만

 

표정관리랄까, 꾸미지 않은 분위기나 내숭이 풍기지 않는-게다가 더 이쁜-아마추어 일반인같은 아사다 마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이러나 저러나 김연아 개인에 별 관심없는 사람으로 이런 '국민요정'과 '돈연아'로 점점 과잉 분열하는 분위기가 웃기고

 

재미있기도 하고.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그녀의 몸값 유지전략의 위기 측면.

 

우선 김연아가 '연예인'과 '스포츠스타'를 번갈아 넘나들며 인기를 증폭시켜왔던 페이스가 한계에 봉착한 게 아닐까 하는 거다.

 

 

 

연예인의 짧은 인기 수명과 스포츠스타의 상대적으로 긴 인기 수명,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단 쇼도 진행하(다가 말아먹)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곧잘 출연하며 노래와 춤도 선보이고 하는 식으로 국제대회에서의 성취 사이사이 연예인으로서의 탈렌트를

 

보여 '몸값'을 올려왔다. 위의 사진에도 있는 '김연아의 키스&크라이' 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사례겠다.

 

 

연예계 활동이 좀 급 시들해지고 질려갈 즈음 스포츠스타로서의 면모로 다시금 인기를 점프업시킨 후 다시금 연예계로 살짝 돌아와

 

대중의 열광 속에 광고 등 수익을 극대화하는 패턴이랄까. 뭐 김연아를 비난하거나 그의 몸값이 거품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의 엄청난 광고 수익과 더불어 고대 입학과 교생실습 등 '혜택'이 가능했던 건 그녀 자신의 순전한 스케이팅 실력과 성취

 

이외에도 그런 패턴이 반복되며 몸값을 눈덩이처럼 키워온 것 같아 하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의 균열과 대중의 극단적인 호오의 분열을 보면, 심지어 '고릴라'니 뭐니 외모에 대한 비난과 '돈연아'니 뭐니

 

인신공격까지 횡행하는 걸 보면 그런 그녀의 전략이 위기에 처했다는 느낌이다. 흔히 그녀를 까는 사람들이 말하듯 스포츠선수로서

 

실력을 다시금 보여달라, 빙판 위에서의 모습을 보여달라, 라고 하는 말은 그녀에 대한 겁박이나 강요라기보다는, 지금 그녀가

 

보이는 모습이 '연예인'에 가까우며, 그러한 모습엔 질렸다는 반증이라는 게 맞겠다.

 

 

어쩌면 '연예인'으로서의 모습과 '스포츠선수'로서의 모습을 넘나들며 대중의 인기를 얻어왔던 그녀의 두가지 가면 모두에 대해

 

일부 대중은 지치거나 질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스포츠선수가 아닌 연예인으로서의 김연아를 너무 오래 노출시켰는지도

 

모르겠고. 이미 그녀는 스포츠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다시금 점프업할타이밍을 놓친 듯해서, 그녀의 몸값은 더이상

 

예전같지 못할 거 같다. 평생 받을 '연금복권'을 일시불로 바싹 땡긴 것처럼 보일만큼 열심히 수익활동에 매진했으니

 

억울할 게 없을 수도 있겠다. (애초 땡길 수 있을 때 바싹 땡기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했을지도.)

 

 


또 하나는, 김연아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반발의 이면에는 이제 뭐만 좀 하면 '나라의 영웅'이니 '국민 어쩌구'니 하는 타이틀을

 

붙이는 유치찬란하고 촌스런 수사학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난 게 아닐까 하는 점. 그런 거창하고 숨가쁜 호들갑에 순순히 호응했던

 

사람들은 늙어가고, 젊은 사람들은 그저 그녀의 개인적인 성취를 감상하거나 즐길 뿐이었던 건데, 더이상 그 오그라드는 단어들을

 

못 참아주겠다 하고 반편향의 거부감을 토하는 것 같다. 김연아는 그런 점에서 보면 미디어의 희생양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만큼 얻은 것도 사실이니 일종의 무의식적인 야합이랄 수도, 혹은 의식적인 편승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문화사회 적응 못하는 한국인

한겨레|입력2012.04.15 20:50|수정2012.04.15 22:40

 

[한겨레] 중국동포,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주여성 등 국내에 거주하는 특정 지역 출신 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감정이 혼란을 겪고 있다. 이미 2007년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00만명을 돌파하면서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지역 출신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한편, 실업과 사회 양극화로 고조되는 불만이 저임금 노동시장을 채우고 있는 이들을 향한 질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커지는 피해 의식

수원 여성 살해사건 뒤 중국동포 추방운동까지 '일자리 잠식' 인식 한몫

인권침해·차별 여전

이주여성 국회 진출 불구 임금체불 등 빈번히 발생 "범죄집단 모는 건 위험"

지난 13일 한 포털사이트에서는 '소름 돋는 외국인 노동자들, 어린 여학생 강제 헌팅 장면'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올라왔다. 지하철역 안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추정되는 남성 3명이 한국인 여학생으로 보이는 여성 2명에게 치근거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번지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지난 1일 경기도 수원에서 중국동포가 20대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중국동포 운영 상점 불매운동이나 중국동포를 추방하자는 내용의 청원운동이 포털에서 전개되기도 했다.

최황규 서울중국인교회 목사는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총격 사건이나, 수년 전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의 조승희 총격 사건 때도 미국 사회는 한인들을 비판하지 않았다"며 "다문화·다민족 사회 경험이 적은 우리나라는 개인의 범죄를 집단으로 모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이런 인식의 배경에는 실업난과 사회 양극화에 따른 불만도 깔려 있다. 2008년 한 포털에 개설된 다문화 정책 반대 카페는 15일 현재 회원이 8500여명이다. 이 카페의 소개글을 보면 '다문화는 후진국의 값싼 인력과 우리 서민을 저임금 경쟁시키려는 자본가들의 음모다. 이는 가난한 서민에겐 재앙이다'라고 돼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서민들의 일자리와 생계를 위협한다는 우려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건설업·서비스업 등 일부 업종에 한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 일자리를 잠식하는 측면이 있지만, 전체 경제규모나 수준 등을 고려하면 이들이 (내국인들이 꺼려하는) 일자리를 채워주는 부분이 크다"며 "직업을 잃은 일부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당연하겠지만, 전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확대해석을 사회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4·11 총선에서 필리핀 출신 결혼 이주여성 이자스민(35)씨가 새누리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자, 이에 대한 반감이 인터넷 등을 통해 생기는 현상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병호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정부가 이주노동자, 결혼 이주여성이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겪는 인권침해·차별을 본질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보여주기 식으로 일부에게만 시혜를 베풀거나 지원을 몰아주는 정책 위주로 펴다 보니, 서민들은 그 집단 전체가 수혜를 받는다고 생각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역효과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실업과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불만 등에서 비롯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무시·차별은 외국인 범죄의 원인이 돼 사회 갈등을 일으킨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범죄율은 2007년 대비 131% 늘었다. 지난 6일엔 한 중국동포가 못 받은 임금 때문에 다투다 직업소개소장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편집국장은 이와 관련해 "임금 떼이고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 중국동포들이 사회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갈등은 수시로 일어날 수 있다"며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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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달린 오천개가 넘는 댓글들, 그리고 추천수가 미친 듯이 많은 댓글들...먹고 사는 팍팍함에 외국에서 밀려들어온

 

저임금 이주노동자로부터의 위협이 일부 사실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이빨을 드러내고 맹렬하게 혐오하는 모습은 끔찍하다.

 

생활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한 그들의 분노가 정당하긴 하지만, 그건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과 사회적 안전망의 붕괴로

 

인한 것이며 최근의 자극적인 사건들은 한국 경찰력의 무능력이나 기초 치안의 공백을 탓할 일이지 외국인 노동자 전반에

 

대한 것은 아니니까. 방향을 잘못 잡은 분노는 쉽게 눈에 띄고 만만한 상대에게로 향한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새누리당'에 대한 비난을 토하며 '진보'인 양 하고 MB를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비난과 반대를

 

이자스민, 그리고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로 이어가고 있다는 점. 외국인 노동자 이주정책은 워낙 복잡한, 경제와 문화,

 

사회적 측면에서 살펴야 할 부분들이 많고 세밀하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쉽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다만 그 기본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고, 지금처럼 이렇게 무작정

 

이빨 드러내고 백색테러라도 벌일 듯 막말 퍼레이드를 벌이는 게 호응받고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정말.

 

 

(개인적으론 이건 새누리당이 이번 19대 총선을 압승, 과반승한 것 만큼이나 역겨운 일이고, 결국 이게 우리나라의

 

수준이란 생각이다. 게다가 '이주노동자'문제, 다문화문제가 어쨌던 한국사회가 맞이하는 큰 변화의 일부라는 점에서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새누리당에 이슈를 선점당한 것 역시 아이러니하고 어처구니없긴 마찬가지.)

 

 

 

 

 

 

 

 

 


1. 네 삶을 적으라.

2. 가족과 연을 끊으라.

3. 네 부모를 막 대하라(부모는 아무리 막 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4. 5크로네 이하의 돈 때문에 이웃을 치지 말라.

5. 촌스런 자들을 미워하고 조롱, 무시, 경멸하라.

6. 셀룰로이드 소매 달린 옷을 절대로 입지 말라.

7. 스캔들을 일으키기를 꺼리지 말라.

8. 후회하지 말라.

9.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보헤미안의 존재미학을 담은 저서 "프라크리스차니아 보헤멘"에서 노르웨이의 작가/철학자이자 무정부주의 활동가였던

한스 헨릭 예거(1854-1910)이 정식화한 보헤미안의 라이프 스타일.



@ 씨네21 no.839, '진중권의 아이콘' 지면의 "창조적 개새끼"에서 발췌.




● 일시 : 2012년 2월 7일(화) PM 23:50부터

●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
http://ytzsche.tistory.com)

● 자격 : 1) 보헤미안의 9계명 중에서 맘에 드는 것 하나를 고르고,
             2) 그 이유를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비밀 댓글)

            + 초대장을 받을 이메일주소!^-^*

● 주최 : ytzsche(이채, 異彩)

● 제공 : 초대장 18장






'나꼼수'를 조금 듣다가 말았다. 재미없었다. 정치 이야기를 예능처럼, 헐리웃 영화처럼 풀어놓고 있었다. MB만 없어지면

새로운 세상이 옵니다, 믿습니까! 라는 식으로. 게다가 자신들의 이야기가 반MB의 전부인 양 구는 것도 맘에 안 들었다.

멤버들의 당차고 도발적인 말투는 '비주류'였을 땐 멋졌지만, 그들이 대중을 등에 업고 말한다고 느껴지니 역겹기 시작했다.


"정치라는 게 단순한 게 아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만의 싸움도 아닌데 <나꼼수>는 정치를 마치 종교처럼 선악구도화하고 대통령에 대한 조롱을 풍자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예능적이고 말초적인 즐거움을 준다"

"정권말기에 (현 정권의) 독이 빠진 상태에서 이명박을 겨냥하고 두들겨 패는 쾌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명박하고만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재능교육이라든지 더 들여다봐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이명박이 BBK로 처벌을 받으면 우리 사회의 진보가 이뤄질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문제라든지, 관료의 문제라든지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나꼼수>는 MB만 없어지면 천국이 올 것처럼, 야권이 집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기사 중에 나와있는 말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낡은 구조가 복잡하고 건재하게 살아있는 현실을 풀어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나꼼수식 이야기가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스스로가 MB 반대진영을 전부 아우르는 양, 혹은 대중의 환호성과 지지에

우쭐해져서 완장이라도 찬 양 구는 건 도무지 맘에 들지 않는다.


둘다 불편하다. 나꼼수에 열광하는 대중, 그리고 나꼼수 멤버들.

대중은 몇년전 '질서유지선 안의 촛불'로 정치를 소비하던 트렌드를 '인터넷방송 안의 씨바, 쫄지마'로 정치를 소비하는 걸로

유행을 좇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분노하고 현실에 몸을 던지기보다 적당히 도발적이고 일탈적인 순간의 카타르시스만을

탐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지함과 분노가 '올드한 입진보'나 '운동권'처럼 간주되고 있어서야 답이 없다.


나꼼수 멤버들 역시. 애초부터 그들에게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저 정치에 좀더 관심을 끌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정도였는데 뭔가 반MB 교주를 자처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들끼리 즐겁고 유쾌하고 가볍게 가는 건 뭐라 할 수 없지만,

그 파급효과를 감안하건대 방식과 이야기 모두를 정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 만들어낸 '나꼼수' 신도들이 보이는

-일부의 행태일지언정-배타적이고 MB스러운 행태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배태된 거라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나꼼수'를 건드리면 입진보라며 낙인찍고 이죽거리는 것, 나꼼수가 MB와 기득권을 까는 방식이 딱 그거다.

양날의 칼. '나꼼수'가 지금까지의 열풍을 몰고 삽시간에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풍자나 시니컬함이

가진 강력한 산화력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진지함'과 '정당한 분노'를 희석시켜 버린다. 그리고도 기껏 그리는

세상이 MB없는 세상, 노무현 만세라고?




아래는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건드리면 '폭풍까임' '입진보' 낙인
<나꼼수> 편가르기, 빨간불 들어왔다
[신년기획] 진보논객 3인에게 <나꼼수> 현상을 묻다
홍현진 (hong698) 기자
트위터에 <나는 꼼수다> '찬양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꼼수>와 그 지지자들이 '우리편'이라고 생각하는 진보진영에서도 '<나꼼수> 현상'을 불편해하는 의견이 존재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12월 28일~30일 '진보논객'으로 불리는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학전공 교수, <88만원 세대> 공저자 박권일씨, <안티조선 운동사>를 쓴 자유기고가 한윤형씨에게 <나꼼수> 현상에 관해 물었다. 이들은 <나꼼수> 현상을 "소중한 현상"이라면서도 <나꼼수>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편집자말>
'BBK 의혹'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의 확정 판결을 받은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 멤버인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 주진우 <시사인> 기자의 배웅을 받으며 자진출두하고 있다.
ⓒ 유성호
정봉주

그야말로 '핵폭탄'이었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김용민 시사평론가, 정봉주 전 국회의원, 주진우 <시사인> 기자 4인이 지난해 4월 시작한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는 '회당 600만 명 청취'라는 영향력을 과시하며 '대안미디어'로 자리잡았다. 기성 언론에서 <나꼼수>를 벤치마킹한 프로그램이 속속 만들어졌고, 제도권 정치인들은 <나꼼수>에 출연하기 위해 줄을 섰다.


지난해 11월 30일 여의도 공원에서 열린 '한미FTA 반대 나꼼수 특별공연'에서 만난 김경래(30)씨는 "<나꼼수>를 들으면서 뉴스를 안 보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기존의 언론들이 다뤄주지 않는 내용을 <나꼼수>에서 들으면 속이 시원해진다"면서 "주로 <나꼼수>와 트위터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고 했다. 이날 공연에는 2008년 '촛불' 이후 집회 참여 인원으로서는 최대인 5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나꼼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의 공격도 거세졌다. 이들 언론은 <나꼼수>의 '음모론'과 '편파성'을 문제 삼으면서 <나꼼수>를 '선동매체'로 규정했다.


<나꼼수>를 향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수구보수 진영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진보논객들 역시 개인 트위터와 지면을 통해 <나꼼수>에 '쓴소리'를 해왔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대표적인 예다. 진씨는 지난해 10월 <나꼼수> 콘서트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불륜과 사생아 의혹이 제기된 것과 관련해 자신의 트위터(@unheim)를 통해 "한껏 들떠서 정신줄 놓고 막장까지 간 거다. 포르노라는 게 원래 노출 수위를 계속 높여야 한다"면서 "제발 경쾌하고 유쾌하게 가라"고 일침을 가했다.


"'정치 예능화' 통해 정치 관심 없었던 사람들 유입"


'국내 유일의 가카(각하) 헌정방송'을 표방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나꼼수>의 주요 흥행요인 가운데 하나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학전공 교수(@worldless)는 "이명박 대통령이 표상하는 '꼰대스러운 가치'가 있다. 권력은 가졌지만 남들은 다 욕하는데 자기만 모르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부'라느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만 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 같고. <나꼼수>는 그것을 조롱하는 본격적인 프로그램"이라면서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일종의 '교양'처럼 된 사회에서 <나꼼수>는 정치풍자 코미디로서 일반인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88만원 세대> 공저자 박권일(@fatboyredux)씨는 이를 '정치의 예능화'라고 표현했다. 박씨는 "정치라는 게 단순한 게 아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만의 싸움도 아닌데 <나꼼수>는 정치를 마치 종교처럼 선악구도화하고 대통령에 대한 조롱을 풍자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예능적이고 말초적인 즐거움을 준다"면서 "정치를 단순화시키면서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유입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음모론'이 더해진다. <안티조선 운동사>를 쓴 자유기고가 한윤형(@a_hriman)씨는 "이명박 정부라든지, 검찰이 왜 나쁜지, 정치에 새로 유입된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 '어떤 사건이 있는데 배후에는 일을 꾸미는 누군가가 있고 은폐공작이 일어난다는 것'"이라면서 "음모론은 정치에 막 관심을 처음 가졌을 때 가장 쉽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박권일씨는 "주류 미디어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음모론이라는 형식이 대중들에게 각광을 받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보았다. 박씨는 "잡을 수 있는 완벽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나꼼수>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항하기 위해 몇 가지 정보를 엮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음모론으로 간 것은 필연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MB VS 반 MB' 선악구도화... "MB만 없어지면 천국 오나?"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 멤버인 김용민 시사평론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 주진우 <시사인> 기자가 2011년 11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한미FTA 반대 특별 야외공연에서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 유성호
나는꼼수다

이들 진보논객들은 한 목소리로 <나꼼수>가 '가카'를 모든 사태의 중심에 두고 'MB 대 반 MB'를 선악구도로 설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향한 <나꼼수>식 조롱과 풍자를 "축제 중에서도 힘 빠진 짐승을 칼질하는 쾌락을 제공하는 사육제"라고 표현한 박권일씨는 "정권말기에 (현 정권의) 독이 빠진 상태에서 이명박을 겨냥하고 두들겨 패는 쾌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명박하고만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재능교육이라든지 더 들여다봐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이명박이 BBK로 처벌을 받으면 우리 사회의 진보가 이뤄질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국회 비준 과정에서 지난해 말 또 다시 논란이 되었던 '한미FTA'는 '반 MB' 구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사례다. 박씨는 "<나꼼수>는 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FTA와 '노무현FTA'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데도 마치 다른 것처럼 여론몰이를 했다"고 비판했다.


반MB 전선에만 매몰될 경우 구조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택광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문제라든지, 관료의 문제라든지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나꼼수>는 MB만 없어지면 천국이 올 것처럼, 야권이 집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씨는 "우석훈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정봉주는 살아서 신이 된 사나이'라고 썼던데 정봉주씨가 감옥에 들어가면서 마치 순교자처럼 되어 버렸다"며 "정봉주씨가 억울하게 형이 집행된 측면도 지적을 해야겠지만 본질은 불합리한 선거법"이라고 주장했다. 박씨는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선거법 문제가 집중적으로 이야기됐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울고불고 신파로 끝나버렸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반 MB 전선'만 절대화... 비판하면 '입진보'


한윤형씨는 "MB를 축으로 보는 시선 역시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고 전제한 뒤, "MB를 축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고 신자유주의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시각들이 공존을 해 나가야 한다"면서 "그러나 반 MB 도식을 처음으로 배우고 이 도식 이외에 다른 것들을 상상할 수 없는 경우, 반 MB 도식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다 적으로 돌리는 경향이 <나꼼수> 팬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나꼼수>에 쓴소리를 하는 진보논객들은 '입진보'라는 비아냥과 함께 트위터 등을 통해 '폭풍까임'을 당하게 된다. 진중권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목숨 걸지 않으면 나꼼수 못 까요", "꼼진리교 신자들은 워낙 닥치고 찬양이 아니면 다 나꼼수에 대한 질투로 읽더라구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씨는 "'입진보'가 원래는 입으로만 진보를 말하고 실천을 안 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갖다 붙이는 말이 됐다"면서 "반 MB 전선을 절대화하다 보니까 나머지 전선은 폄하하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이택광 교수는 "<나꼼수> 팬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 중 하나가 '진보'를 현실적인 힘이 없는, 쓸모없는 세력으로 본다는 것인데 이는 신보수주의적인 논리"라면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나꼼수>가 표현의 자유를 용인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씁쓸해했다. 박씨는 "기본적으로 선거구도를 반한나라당 전선을 세워놓고 거기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입진보'라고 하는 것은 주객전도"라고 말했다.


'민주화 투사'된 4인방... <나꼼수>의 딜레마


'BBK 의혹'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의 확정 판결을 받은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이 검찰에 자진 출두한 가운데,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정문 앞에서 지지자들이 정 전 의원을 떠나보내며 빨간 장미와 응원하는 손피켓을 놓고 있다.
ⓒ 유성호
정봉주

이러한 현상은 정봉주 전 의원의 징역형이 확정되면서 더욱 과열되고 있다. '<나꼼수> 멤버들이 목숨을 걸고 현 정권과 싸울 때 '입진보'들은 뭐했느냐'는 것이 요지다.


<나꼼수> 멤버들이 마치 '민주화 투사'처럼 영웅화되는 분위기와 관련해, 이택광 교수는 "지나친 오버"라면서 "<나꼼수>가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초기에 멍청한 위정자를 놀리는 역할을 하면서 기존의 언론이 건드리지 못하는 부분을 건드리는 정치풍자 코미디였던 <나꼼수>가 점점 심각한 프로그램이 되고 있다"면서 "이렇게 되면 '친노세력'으로 대표되는 <나꼼수> 지지자들은 결집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깥의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꼼수>가 소수정파(친노세력)의 선동방송이 될 경우, <나꼼수>가 설득해야 하는 40%의 부동층에 대한 외연을 확대하기 곤란해진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한윤형씨 역시 "내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중간파 유권자를 공략해야 하는데 <나꼼수> 팬들 가운데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의 쇄신을 엄중하게 봐야 한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나꼼수>를 듣는 청년층 지지자가 있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는 등 사태를 안일하게 보는 경우가 있다"면서 "'우리 편'끼리 모여서 놀다보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못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박권일씨는 "<나꼼수>가 지지자들만을 결집시키는지, 외연을 확대하는지에 대해서는 관련된 통계가 없기 때문에 지금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면서도 "<나꼼수> 팬들의 과잉된 행동이나 노무현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둘 다 지지하지 않는 중간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더 냉소적으로 변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라고 충고했다. 진보논객들의 '쓴소리'를 단순히 "<나꼼수>를 도발해서 덩달아 뜨고 싶은 것"(정봉주 전 의원)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사실, 이건 일종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같은 쿠데타 반란세력, 군대를 뒤집고

정치를 뒤집고 나라를 뒤집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두른 범죄집단의 수괴를 국민의

손으로 처단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혼란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고 그의 지도력, 그의 '조국근대화' 능력, 그의 카리스마, 그의 청렴함,

그의 인간미 따위에 대한 상찬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며 재구성되는 건, 그 독재자와

추종세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이다.


지들끼리의 자리다툼을 벌이다 자중지란에 빠져 붕괴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최소한 눈에 보이는 성과는 이뤄냈던 박정희 도당들보다도 못한 문어대가리 일파들이

다시 그 정권을 찬탈했으니. 제대로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고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더 나쁜 놈이 나타나버렸으니 기억이 왜곡된 건 아닐까. 때리던 놈 다음에 칼로 찌르는

놈이 나타난 셈이랄까. 칼로 찌르던 놈들 두 명은 법정에까지 겨우겨우 세웠다지만,

여전히 때리던 놈에 대해서는 요원한 거다.


박정희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상식, 무조건적인 찬양은 여전히 가실 줄을 모르고

일종의 '신앙화' 경지에서 굳어진지 오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설복시키거나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라지만, 최소한 서로의 인식이

공통의 지평에서 뻗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 몇가지 팩트와 분석자료가 담긴

글들을 공유해 본다.




[심층취재|박정희기념관 파문]
“박정희 개발독재는 시장경제 발전의 암세포”
고려대 경영대학장 이필상 교수 인터뷰 (신동아, 2000.12.01 통권 495 호 (p134 ~ 143))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mairso2@donga.com

”IMF 위기의 씨앗은 바로 개발독재입니다. 박정희전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이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공은 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역사의 형틀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를 쓰러뜨린

책임도 있는 겁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향수엔 그의 경제개발 치적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민주화운동 탄압과 인권 말살 등 피로 얼룩진 독재정권에 대한 비난을 상쇄시켜온, 유일한 또는

최후의 보루 구실을 해왔다.

찬양론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실적을 들이대며 개발독재론을 옹호하고 정당화해왔다.

한마디로 경제발전을 위해선 민주주의 유보가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단기간 초고속성장의 신화를 낳은 개발독재. 그것은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나. 역사의 저울추는

개발독재의 성과와 폐해 중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가. 고려대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겸하고 있는 이필상 교수(53)는 인터뷰에서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고 비판했다.


인터뷰는 11월13일 오전 고려대 경영대학장실에서 진행됐다. ‘재무관리’ ‘관리경제학’ ‘신국제금융’

‘경제정책과 기업활동’ 등 다수의 경제 관련 책을 펴낸 이필상 교수는 그간 인터뷰나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왔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어 혹시 인터뷰 주제가 그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기우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 신화의 허구성


―최근 박정희 전대통령 흉상 철거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동안 꾸준히 진행돼온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기념관 문제를 떠나 흉상철거행위 자체에 대해선

법질서를 들어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싶습니다.


“그 자체는 불법이므로 잘못된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 전대통령의 업적이
 
잘못 해석되고 신화가 돼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흉상 철거행위는) 거기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의사표시 방법은 잘못됐지만 그 뜻을 다함께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박 전대통령의 업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죠. 불법행위로 간주해

무조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념관 건립에 대한 반대여론이 강하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박정희 기념관 논란은 박 전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초부터 박정희 신드롬 또는 박정희 부활현상이 일어났는데, 찬양론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것이 경제치적입니다. 먼저 박 전대통령의 경제업적을 살펴보지요.


“경제가 어렵다보니 사람들이 정신적 돌파구를 찾게 됐는데, 막연히 과거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을

동경하면서 그것을 신화로 삼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박정희 경제신앙으로

굳어졌죠. 그 배경이 뭐냐. 첫째, 우리 민족은 6·25를 거치며 엄청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그 힘들던 보릿고개를 극복했습니다. 초가지붕 개량으로 상징되는

새마을운동, 그것이 후세에 길이 남을 박 전대통령의 업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둘째, 신화창조의 계기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입니다. 당시 건설비용이 1년 국가예산보다 많았습니다.

일본이 주도한 아시아개발기금이 원조하는 자금을 바탕으로 착공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역사였습니다.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끝내 성사시켰는데 그것이 산업발전에 대동맥이 됐죠.

또한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줬습니다.


셋째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저 먹을 거나 제대로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에게 국토는 좁지만 경제영토는 전세계로 무한히 펼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섬유라든가 합판 가발 등을 수출하면서 우리 경제의 잠재력을 일깨운 것이죠.


넷째로, 두드러진 업적은 중화학공업 발전입니다. 60년대 말부터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등

네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했습니다. 과잉·중복투자로 국가 경제를 주름지게 했지만, 기간산업을
 
구축하고 우리 경제가 세계적 경제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죠.”


이교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긍정성을 뛰어넘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는 게 우리 경제의 비극이다.



정경유착과 성장제일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큰 문제는 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 형성입니다. 정통성 없는 독재권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보겠다는 재벌과 불법공생관계를 형성한 것이죠. 권력은 재벌에

각종 인·허가상 특혜를 비롯해 금융·차관·세제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권력과 재벌의 유착이라는 불법구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 정당성 없는 지배계층이 지금까지 사회·경제·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지배구조라는, 역사발전의 큰 걸림돌을 만든 거죠.


그 둘째 병폐는 빈부격차입니다. 무조건 고속성장을 해야 한다, 가난을 탈피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성장제일주의로 나갔거든요. 그것을 위해 정부가 경제를 통제했어요. 통화증발과

관치금융에 의해 인위적으로 돈을 풀어 특정기업에 지원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그러다 보니

특혜를 받는 쪽은 자꾸 발전하고 부가 축적된 반면 일반 기업과 서민 계층은 인플레이션의

피해를 입으며 소득이 자꾸 떨어지고 빈부차이가 계속 벌어졌습니다.

빈부격차의 배경이 된 또 하나의 문제는 지하경제입니다. 정경유착 테두리에서 돈을 마구

뿌리고 고속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부동산 값이 폭등했어요. 권력의 특혜를 받은 계층은

부동산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부동산 값은 일반 물가보다 몇 배 상승하는

경향이 있어요. 공급이 제한돼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땅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지배계층은

그걸 이권으로 삼았어요. 증권시장도 비슷한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부동산과 증권시장이

지하경제의 온상이 된 것은 고속성장의 큰 부작용이죠.


셋째 문제는 경제력 집중이에요. 재벌을 집중지원해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정책을 펴다보니

일반 중소기업이 빈사상태에 빠진 거죠.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직적 주종관계가 돼버렸습니다.

중소기업이라는 게 산업의 풀뿌리로 상품 개발과 기술력 향상을 통해 경쟁력의 저변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재벌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해 산업발전에 엄청난 불균형이
 
생겼죠. 각종 인·허가 특혜를 받은 대기업이 조금씩 대주는 걸로 연명하다보니 자생적 기술이나
 
상품을 가지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죠.

가장 큰 문제는 조립수출산업 위주로 산업이 발전된 데 있습니다. 흔히 가마우지 경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마우지라는 새는 훈련을 시키면 고기를 잡아오는데, 그것을 삼키지 못하게

목을 묶어 놓습니다. 고기를 뺏고 나서 풀어주면 다시 고기를 잡아와요. 잡아온 고기를 빼앗기고

날아가는 일을 되풀이하죠. 우리 경제가 그렇다는 거예요. 외국에서 부품과 기계를 사들여

조립해 만든 상품이 주종을 이루다보니 수출로 해외에서 돈을 벌어와 봐야 부품값 갚고

기계값이나 기술료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죠. 진짜 이익인 부가가치는 뺏기고 조금씩
 
던져주는 먹이나 얻어먹고 사는 가마우지 경제를 만든 겁니다. 자생적 경쟁력의 기반이

처음부터 형성되지 않은 겁니다.


넷째 부작용은 지역격차입니다. 대개 동쪽에서 집권세력이 나오다 보니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동서간 경제력 격차가 커지고 그것이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이 됐어요. 지배계층은 그것을 또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경제의 동서분단선을 만든 겁니다.
 
그에 따른 사회갈등이 선거 때마다 극단의 형태로 표출되면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골이 깊어진 것입니다.” 



지역감정의 뿌리


이교수는 지역간 불균형 경제발전이 오늘날 지역감정의 뿌리가 됐다고 단언했다. 그가 지적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는 끝이 없을 듯싶다.


“지역격차의 또 다른 측면은 도시 농촌간 격차입니다. 재벌들에게는 한국은행을 독촉해 돈을
 
지원해주면서 농촌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지원엔 인색했습니다. 지배자들의 횡포였죠.

그렇지 않아도 산업화과정에는 농촌경제가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인위적으로 육성하고

발전시키지는 못할지언정 거꾸로 황폐화를 가속시켰어요. 농촌 사람들이 안 되겠다 싶어
 
다 도시권으로 옮겨가면서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는 비대해지고 농촌은 황폐해지는,

기형적이고 비효율적인 국토발전이 이뤄졌습니다.


다섯째 폐해는 천민자본주의의 만연입니다. 고속성장을 독재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성장제일주의가 사람들에게 사치와 허영을 부추긴 겁니다.

부동산 투기로 돈 벌어 흥청망청 쓰고 해외에 나가 낭비하고 사치품을 사들이고… 그런 게
 
소비미덕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이 그걸 부러워하는 사회가 돼버렸어요. 그 과정에 가난한

이웃과 나누며 살던 전통적 가치관과 따뜻한 가족관, 공동운명체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회파괴라고 생각해요. 전통문화가 파괴되면서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됐다고
 
봅니다.


여섯째로 관료주의 확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독재권력을 장기간 유지하려다 보니 입법부

기능을 축소하고 사법부를 마비시켜야 했습니다. 반면 행정부는 굉장히 비대해졌죠. 사회를

지배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기업들을 길들이기 위해 엄청난 규제가 양산됐습니다. 관료주의가

엄청난 힘을 갖고 경제를 지배하다 보니 정부와 유착하지 못한 기업은 아예 발전 대열에 진입도
 
못하게 됐죠. 말만 시장경제지, 사실은 관치경제였습니다.


일곱째로 빚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로부터 금융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다들

자기 돈이 아닌 은행돈으로 사업을 벌이다 보니 부채비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죠. 특정 기업이
 
좀 어려워지면 그때마다 한국은행 돈 풀어 구제해줬습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좋은 기업이란

시장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물건 판 돈으로 스스로 발전하는 기업입니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돼야 하는데, 거꾸로 됐죠. 금융특혜를 받은 부실기업에 자꾸 돈을 대주니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부실이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기업들을 빚 먹고 사는 공룡으로 만든 겁니다.

외국 차관도 끌어다 그런 기업에 대주고. 기업들이 시장에서 평가받고 스스로 자본을 축적해
 
투자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돈 대줘 발전하는 기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다 보니
 
산업구조가 매우 취약해졌어요. 위험도도 높아졌고.


여덟째. 부패공화국입니다. 경제가 부패공화국의 희생물이 된 거죠. 정경유착에 따라 재벌과
 
권력층이 경제를 독식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경제가 희생됐습니다. 관료주의가 확대되고

규제가 양산되다 보니 뇌물이 판치는 비리구조가 위에서부터 형성됐고 그 영향이

민간부문에도 미쳤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가 그 씨앗을 뿌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죠.”


IMF위기 씨앗은 개발독재


이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개발독재의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들의 책임이 크다. 어쩌면 오늘 인터뷰에서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자의 ‘불안감’도 아랑곳없이 그는 마치 한칼에 끝장을

내기라도 하듯 설명을 계속한다.


“79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서거한 후 들어선 전두환 체제는 오히려 독재권력을 강화했지요.

시장경제는 더 멀어지고. 특히 정권이 정통성을 갖지 못했기에 정경유착이 더 악화됐어요.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개발독재의 구조적 문제가 심해졌습니다. 두 사람이 쓰고 남은
 
돈, 들킨 돈만 각각 5000억원, 4000억원이었어요. 그렇게 따지면 독재정권의 집권자들이

재벌보다 더 큰 재벌이었던 셈입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뭔가 고쳐질 것으로 다들 기대했지요. 그런데 가장 큰 걸림돌인

정치질서 체제가 바뀌지 않고 관료주의도 여전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혼자 개혁하려

애썼는지는 모르지만 체질화된 관료주의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이 둘러싼

상태에서 도저히 뭘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금융실명제라는 미증유의 개혁이 변질된 것도
 
그런 사정 때문입니다.

개혁을 하려면 끝까지 제대로 해야지 실패하거나 변질되면 경제에 오히려 더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문민정부가 경제를 망치고 말았는데, 그 배후엔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단이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선 국민의 정부도 크게 다를 바 없어요. 구태의연한

정치체제와 관료주의가 여전히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요. 개혁의 성적표를
 
따진다면 크게 내세울 게 없죠.”


이교수의 개발독재 비판논리는 IMF 책임론으로 연결된다.


“IMF 위기의 씨앗은 바로 개발독재입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이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공은 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역사의 형틀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를 쓰러뜨린 책임도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건 IMF라는 큰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의 틀을 바꿔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짊어진 국민의 정부가 제몫을

못 한다는 점입니다. 정경유착과 관료주의를 타파하는 근본적 개혁을 해야 하는데

그것 없이 재벌개혁을 한다고 나섰다가 저항에 부딪히자 기껏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근로자나 정리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아직까지 박정희 개발독재의

패러다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들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이 잘못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과거 고도성장의
 
향수에 빠져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는 건 굉장한 모순이 아닐 수 없죠.”



독재와 지도력의 혼동


―박정희식 경제성장에 대해 학계에선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절대 긍정론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고 지금도 그 패러다임이 유효하다는 겁니다

. 둘째, 개발독재 자체는 비판적으로 보지만 산업화 초기단계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견해죠. 즉 한시적 긍정론입니다. 셋째 견해는 완전 부정론입니다. 개발독재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독재를 정당화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독재는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속성장했다, 빈곤에서 탈피했다,
 
그것을 당시 독재 덕분으로 돌리는 건 굉장히 잘못된 해석이고 위험한 일이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독재와 지도력을 혼동해서 그래요. 독재가 아니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시장경제체제를 발전시켰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선진형 경제구조를 갖게 됐을 겁니다.”


―교수님은 그러면….


“셋째 견해에 해당하죠.”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지요. 그런데

민주주의를 내세운 장면 정부가 허약하고 무능해 군부가 일어났다는 것 아닙니까. 당시 장면

정부가 더 기회를 가졌다면 박정희 못지않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이 점을 구분해야 합니다. 당시 장면이라는 사람, 장면 정부가 허약했지 민주주의가 허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곧 장면 정부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장면 정부가

무능하고 지도력이 부족했다면 민주적 절차로 정권을 교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빌미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독재를 정당화한 것은 잘못된 일이죠. 그때는 각 나라에서

경제발전이 시작되는 단계였어요. 어떤 정부가 들어섰더라도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3세계, 특히 동남아국가들의 경제 발전 시기와 배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고, 특히 우리에게 굉장한 자극을 준 나라는 일본이에요. 일본이 전쟁에 패한 후
 
그 잿더미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걸 봤거든요. 그걸 보고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당연히 우리도 해보자, 이렇게 나온 거죠. 그때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합리적 경제발전

체제를 만들고 시장경제 개념을 발전시켰다면, 모르겠어요, 빈곤탈피속도는 좀 느렸을는지
 
모르지만 훨씬 의미 있는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어쨌든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한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경제발전의 질보다
 
외형적인 수치나 가시적인 성과에 더 감동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당시 경제지표를 보면,

경제성장률만 해도 5·16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해인 1962년부터 박 전대통령이 죽은

1979년까지 연평균 9.3%를 기록했습니다. 1인당 GNP도 1961년 82달러에서 1979년엔

1640달러로 커졌어요. 수출액도 4000만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엄청나게 늘었지요.


“맞아요.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죠. 그런데 지금과 그때 상황을 비교해 지금 어려우니

그때 그런 일이 또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잘못된 일이죠.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였어요. 사람들이 일을 하면

뭔가 이뤄지는 게 막 보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경제발전이 시작되고 소득이

늘어나니 다들 놀랐죠. 그런데 지금은 경제구조가 달라요. 경제여건도 달라요. 지금 만약

박정희 방식을 적용한다면 경제, 마비됩니다. 현 경제구조에서 정부가 모든 걸 통제하고

특정기업을 지정해 특혜를 주고 정경유착을 강화한다면 경제가 쓰러지죠.” 


관치경제에 희생당한 금융



―단기 고속성장이 갖는 단점은 무엇입니까?


“몸집이 아주 왜소한 사람이 별안간 쌀밥과 고기 먹고 몸집이 커졌다고 했을 때, 과연

몸집만 보고 그 사람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나라 경제는
 
초고속성장을 하며 몸집은 굉장히 커졌어요. 그런데 그 몸에 피를 돌게 하는 심장 구실을
 
하는 금융 부문이 관치경제에 희생되고 정경유착의 수단이 되면서 기능이 마비됐습니다.
 
심장에 병이 든 거예요. 심지어 플라스틱 인공심장을 달기도 했어요. 그럼 그 사람의

건강이 제대로 유지되겠어요? 계속 성장하며 힘을 발휘할 수 있겠어요? 고속성장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경제의 심장을 망가뜨렸다는 점, 나아가 문화 측면에서 볼 때

머리도 정신도 완전히 잃었다는 거예요. 별안간 큰다는 게 좋은 건 아니에요.”


―고도성장의 요인 중 하나로 박정희 전대통령의 리더십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경제발전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일관성 있는 전략,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비전 등이지요.


“그런 것들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한 건 사실입니다. 고도성장에 견인차가 됐죠.

그건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통치수단, 정권연장 수단으로 악용했고 그 결과
 
경제 전체가 병들었다는 점은 구분해 평가해야죠.”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이나 신념은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덕목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철학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그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릇된 경제철학과 신념이 결합한데다 정치논리가 개입되면서 그 폐해가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바깥 세계의 평가도 무시할 순 없지요. 1993년 세계은행 보고서엔 한국이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공사례로 소개됐습니다. 박 전대통령의 수출지향 전략과

거시경제적 안정화 전략을 그 요인으로 꼽았더군요.


“결과만 놓고 보면 엄청나게 성장한 건 맞아요. 그러니 성공이냐 실패냐, 이렇게만 따질 때
 
바깥에선 당연히 성공으로 보죠. 그런데 그들이 우리 내부의 상황이나 경제발전의 내용,

예컨대 독재나 정경유착 부정부패 경제집중 등 개발독재의 폐해를 따지진 않는다는 겁니다.
 
내용을 따지면 실패죠.”



시장경제 철학 없어


―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공 모델로 ‘네 마리 용’이라는 표현이 있지요. 이 나라들은 경제발전
 
배경이나 시기, 정치적 여건이 비슷하지 않았습니까. 그중 우리나라가 가장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다 지금은 가장 처졌다는 평을 듣는 것 같습니다. ‘네 마리 용’의 유사성이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겉으로 보기엔 네 마리 용이지만 실은 세 마리 용과 한 마리 공룡입니다. 우리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몸집은 오히려 다른 세 마리보다 컸을 겁니다. 그런데 내면적인 모순
 
때문에 먼저 주저앉아버렸어요. 또 몸집이 크니까 그만큼 일어나기도 힘들고. 그 내면적인
 
병이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인 것입니다.”


―독재라는 공통점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홍콩만 빼고요.


“독재라는 형식은 비슷해도 내용과 결과가 크게 다르죠. 대만은 중소기업 발전을 기반으로 한
 
경제구조가 탄탄했어요. 결정적 차이는 우리나라처럼 정치지도자가 재벌로부터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받는, 재벌과 정권의 불법공생체제가 없었다는 것이죠. 좁은 국토에

자원도 없는 싱가포르는 일찍이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개방 정책을 추진했어요. 지금

싱가포르는 세계 속의 싱가포르입니다. 반면 폐쇄성이 강했던 우리 경제는 결국 억지로

개방하게 됐는데 경쟁력이 약해 맥없이 무너져버렸어요.”




암세포 도려냈어야



박 전대통령이 사망한 직후인 1980년 한국 경제의 각종 지표는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렸다.

20년 가까이 늘기만 하던 1인당 GNP가 처음으로 줄었고 실업률은 3.8%(1979년)에서

17.9%로 뛰어올랐다. 1979년 경제성장률은 6.8%였으나 1년 뒤엔 마이너스 3.9%를 기록했다.
 
물가도 50% 가량 올랐다. 직접적인 원인은 석유파동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비판론자들은

이를 개발독재의 후유증에 따른 구조적 위기로 본다.


―1980년의 경제지표는 각 부문에서 곤두박질쳤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80년대 초반 공장 가동률이 50%대로 떨어졌어요. 박정희 경제의 한계가 폭발한 것이죠.

그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습니까. 당시 5공 정권의 김재익 경제수석이 경제안정 정책을
 
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것이 다시 힘을 축적하는 계기가 됐는데,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 때 비록 엔화 가치의 절상 덕을 톡톡히 본 것이긴 하지만, 무역수지에서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는 힘이 됐죠.”


이교수는 경제 정책에 관한 한 김영삼 전대통령보다 전두환 전대통령을 높게 평가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자기가 모르면 전문가한테 다 맡긴다는 것이죠.

경제분야는 김재익 수석에게 일임했는데 당시 물가를 3%로 잡았어요. 김영삼 전대통령도
 
경제를 모르니 맡기긴 했는데 사람을 잘못 썼지요. 정부 주변에서 관치금융 논리나 제공하고
 
영화를 누려온 사람한테 단지 부산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맡겼거든요. 김영삼 정부 초기
 
‘신경제 5개년계획’이라는 걸 추진했는데, 5년 동안 한 일이라곤 한국은행에서 돈 푼 것과

외채 끌어온 것밖에 없어요. 처음 ‘신경제 100일계획’을 추진할 때만 6조8000억 원을

풀었어요. 외채는 400억 달러에서 1500억 달러로 늘었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가장 극대화한 사람이 김영삼 전대통령입니다. 구시대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답습했습니다. 구조조정은 안 하고.”


―IMF의 뿌리가 박정희 개발독재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부 경제학자들은 김영삼 정권도

억울한 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덤터기를 썼다는 것이죠.


“IMF 위기를 초래한 데 대해선 책임을 져야죠, 문민정부가.”


―뿌리는 박정희 개발독재에 있지만….


“뿌리는 그렇지만 그 뿌리를 잘랐어야죠, 명색이 문민정부인데. 새로 시작했어야죠.

그런데 오히려 문제를 확대시켰습니다. 암세포를 더 키운 거죠. 돈 풀어가면서,

외채 끌어들이면서.”


화제는 다시 박정희 개발독재의 문제점으로 돌아갔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그 두 가지는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핵심요소 아니었습니까?


“수출 드라이브 정책 자체는 좋은 거죠. 문제는 실적 위주의 드라이브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양만 강조하고 질적인 측면은 외면했어요. 기술개발보다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수출상품들, 예를 들어 옷이나 가발 등을 수출하는 데 주력한 겁니다.

중화학공업 투자의 경우, 아무리 좋은 투자라도 그 나라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마치 아무리 좋은 보약이라도 그 사람의 소화능력에 맞아야지, 좋다고 무조건 먹으면
 
설사 나는 이치와 같은 거죠. 중화학공업에 과감히 투자한 건 좋은데 과잉·중복투자를 하는

바람에 우리 힘에 부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후유증이 컸죠. 70년대 중반부터 엄청나게

투자했는데, 1·2차 석유파동의 충격이 가해지자 가뜩이나 부담이 큰 상태에서 견디지

못하게 된 겁니다. 80년대 초반의 산업공황은 그래서 생긴 겁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공통점



―재벌정책은 어떤가요. 일부 경제학자는 박 전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위해 재벌을 적절히
 
이용했다고 평가하더군요. 고속성장과 대형사업을 벌이는 데 재벌의 힘이 필요했다는 것이죠.


“재벌은 우리 경제를 발전시킨 반면 주름지게 한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권이

재벌과 결탁했다는 것이죠. 재벌 불가피론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이 잘 발달한
 
대만의 경제발전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우리나라의 경우 잘못된 재벌 정책의 폐해가 너무
 
큽니다. 재벌에 돈이 집중되고 각종 특혜가 몰리는 바람에 너무나 많은 중소기업이

죽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산업이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했죠.”


이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박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과 신념을 다시 한번 높게

평가했다. 반면 그것이 경제논리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치논리에 오염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는 데 대해선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끝으로 박 전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정책 면에서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


“박 전대통령은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일어나서 해보자, 하면 된다,

이런 정신을 갖고 있었지요. 반면 김대중 정권은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요.

그런 점에서 대비가 되죠. 공통점이라면 역시 정치논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끝)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는 사람들 (신동아, 2000.12.01 통권 495 호 (p112 ~ 124))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mairso2@donga.com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불길이 뜨겁다. 지난 9월 시민단체들을 비롯한 학계 언론계 노동계
 
문화계 등 각계 247개 단체의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결성으로 기세를 떨친 이 운동은
 
최근 서울 문래동의 문래공원에서 벌어진 박정희 전대통령(이하 박정희) 흉상 철거 사건으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국민연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념관 반대운동을 범국민 차원으로

확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1월8일 오후 문래공원은 적막감과 평화로움에 휩싸여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칼바람이 공원 여기저기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낙엽들을 들들 볶고 있었다. 놀이터에선 몇몇 아이들이 한가롭게 미끄럼을 즐기고

있었다. 기자는 오랜 세월 인간들의 삶을 지켜봐왔을 성싶은 아름드리 고목들의 연륜에
 
위압감을 느끼며 문제의 박정희 기념탑이 자리잡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래공원의 박정희


문래공원은 약 7000평.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 따르면 하루 평균 700∼800명의 시민들이

찾는다. 자연학습장과 놀이터 동물원 등이 주요 시설물이다. 공원 정문 쪽에서 박정희 기념탑
 
쪽으로 가다보면 금계와 인도공작, 일본원숭이 등이 놀고 있는 동물원이 눈에 띈다. 그 앞에서
 
직원 한 사람이 부지런히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기자는 그의
 
왼손 손가락 두 개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언론에 보도된 윤아무개씨(52),
 
바로 그였다.


보도에 따르면 윤씨는 3일 전인 11월5일 낮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5개 기관·단체 회원

30여명이 이 공원에 세워져 있던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때 이를 저지하다가 전치2주의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기자가 “얼마나 다쳤냐”며 아는 체를 하자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조금 다쳤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더 말을 붙일 틈을 주지 않고 잰걸음으로 동물원 뒤쪽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따로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손가락이 부러진 건 아니고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간 정도”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김용삼씨(50)에게 적용된 폭행 혐의는 바로 이 손가락 상처와 관련된 것이다.


동물원을 지나 20발짝쯤 걸으면 박정희 기념탑과 마주친다. 공원의 거의 동쪽 끝이다. 몸통인
 
흉상이 떼어진 기념탑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높이는 2m쯤 될까. 윗부분에 흉상과의

연결고리인 듯싶은 철근 2개가 삐죽 솟아 있다. 탑 앞면엔 ‘5·16 혁명발상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이 이곳에 세워진 배경은 이렇다. 5·16 당시 이곳엔 서울을 관할하는 육군 제6관구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58년 별 두 개를 단 박정희는 이듬해 6개월 동안 6관구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런 인연으로 6관구사령부는 5·16 당시 쿠데타군의 지휘부 구실을 했다. 기념탑이 세워진 것은
 
1966년. 6관구사령부의 요청으로 홍익대 조소과 최기원 교수(65)가 제작했다. 이번 흉상 철거

사건에 홍익대민주동문회가 관련된 데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기념탑 뒷면엔 문인 박종화(1981년 사망)가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이 새겨져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 불의 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라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7.7‘

 

 

DJ의 선거공약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숙제인 박정희. 그는 과연 한국민에게 어떤 존재인가.

1961년 5월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당시 44세)는 일단의 군대를 끌고 한강을 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한국사회는 ‘영원한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포박됐다.
 
3선개헌, 유신헌법 제정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통치기간을 연장한 그는 1979년 10월26일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서야 절대권력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절대권력의 혼란기를 틈타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헌법 전문에서 ‘5·16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박정희와 다름을 애써 강조했다. 이후 상당수 한국인들은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구국의 결단’이라던 5·16은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혁명이 아닌
 
불법 쿠데타로 굳어졌고, ‘민족중흥의 지도자’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입에서 박정희 기념관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7년 대선 유세 때였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경북 구미를 방문, 박정희의 생가를 둘러본 후 그 지역 유권자들에게 박정희
 
기념사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현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 추진은 이처럼

김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해 5월13일 대구를 방문한 김대통령은 이의근 경북지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적극 지원할 의지를 밝힘으로써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은 곧이어 5월19일 김대통령이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지시한 직후 싹트기
 
시작했다. 5월20일 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 등은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 인권 분배정의 등의 가치를 부정한 박정희식 근대화를 기념하는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역사의식에 왜곡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대구참여연대와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 등 대구 지역 시민단체들도
 
반대성명을 냈다. 또 4·19혁명 관련 4개 단체는 “김대통령은 독재자와 화해하기 앞서

민주화투쟁을 하다 의문에 싸여 죽었거나 감옥 갔던 사람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부터
 
먼저 해야 한다”며 지원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 7월26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신현확

전국무총리가 회장을, 김대통령이 명예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국민회의 권노갑 고문

(현 민주당 최고위원)과 자민련 김용환 의원(현 한국신당 대표) 및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현 한나라당 부총재)이 부회장으로 추대됐다. 정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비(100억원)와

기념사업회 운영비(5억원) 등 모두 105억원을 2000년 예산에 책정했다.

10·26 2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해 10월25일 서울에선 두 가지 상반된 모임이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선 옛 공화당 출신들이 주축이 된 박정희 어록집

(‘우리도 할 수 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반면 정동의 세실 레스토랑에선

전국역사학자모임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등 역사학자 1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국고지원 중단을 촉구했다. 


역사학자들의 분노



역사학자들은 성명을 통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모순의 대부분이 박정희 시대에
 
이뤄졌으며, 경제성장을 내세우며 그가 자행했던 인권탄압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전국역사학자모임은 전국의 대학교수, 강사 및 연구원, 대학원생,

중·고교 교사 등 역사 연구자 11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11월25일엔 71개 단체가
 
연합한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박정희 기념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해가 바뀐 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정희 기념관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은
 
7월20일 이후. 전날 정부가 2002년 월드컵이 열리는 서울 상암동에 5000∼7000평의
 
박정희 기념관을 짓기로 확정한 것이 촉발제가 됐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가운데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성명(7.21),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대구·경북지역 40개 시민단체의 국회 및 청와대 앞 항의시위(7.31),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학단협(학술단체협의회) 소속 교수들의 기자회견 및 서명운동(8.3)

등이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은 마침내 9월28일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이하 국민연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국민연대엔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연합 녹색연합 등 이른바

빅4 시민단체를 비롯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전교조, 민족문학작가회의, 4월혁명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민언련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전국역사학자모임 등 모두 247개의 사회·시민단체가 참여했다.

국민연대는 정관 제정과 함께 고문단 공동대표단 상임집행위원장단 등을 구성, 모양새를
 
갖췄다. 국민연대는 이날 결성선언문을 통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민족사를 유린하는
 
범죄행위”라고 규정하는 한편 김대중 대통령에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직을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10월17일엔 전국 대학교수 649명이 10월유신 선포 28돌을 맞아 박정희 기념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국민연대는 박정희 사망 21주기인 10월26일 오전 덕수궁 앞에서 회원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열었다.

11월5일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4개 단체 회원들이 서울 문래동에 있는 박정희
 
기념탑에서 흉상을 끌어내린 것은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첫 ‘실력행사’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간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가 199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그간 주로 친일파들의 행적을 고발하는 책을 펴내는 한편
 
그와 관련된 각종 시위와 집회를 주도해왔다.

11월9일 서울 청량리동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몹시 분주해 보였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가운데 직원들은 관련단체들의 지지성명을 챙기는 한편 이번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싶었다. 기자와 마주 앉은 서우영 기획실장(36)은 박정희 기념관
 
국고 지원에 대해 “김대중 정부의 천박한 역사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 “영남권 지지표를
 
얻으려는 단세포적 정략”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밤 10시께 방학진 조직부장(29)과 홍익대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이중기씨(35)가 경찰에서
 
풀려났다. 철거현장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던 곽태영 4월혁명회 대표(64·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하루 전인 8일 귀가조치됐다. 이제 경찰서에 남은 사람은 김용삼 운영위원장뿐이다.

다음날 오전 방학진씨와 통화했다. 방씨는 “문래동의 흉상은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기념비가
 
아닌, 쿠데타 찬양 기념비이므로 그것을 철거하는 것에 국민이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정통성을
 
갖춘 정부라면 당연히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노숙자와 실직자들이 박정희 흉상
 
앞에 술을 올리는 것을 본 적 있다”며 “이런 퇴행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정부가 막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기념관 건립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가치관을 혼란케 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 곧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시시비비다. 반대론자들은 대체로 박정희는 기념관을 세워 기릴 만한 업적이

없으며, 오히려 역사적 과오가 크다고 주장한다. 논쟁의 또다른 초점은 국고 지원의 타당성

여부. 기념관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국민의 세금으로, 곧 정부 지원으로 기념관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정희 찬양론자 또는 추종자들이 사비를 들여 박정희의 고향에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박정희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민주주의 억압과 인권 탄압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기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2년을 포함하면 총 18년에 이른다. 1963년 군복을
 
벗고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박정희는 1979년 사망 당시 9대 대통령이었다.

장기집권의 포석이 된 것은 1969년의 3선개헌이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던 이 불법개헌을 성사시킨 1등 공신은 공작정치의 산실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였다.

그러나 이는 독재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제정, 영구집권의
 
길을 닦았다. 이른바 총통시대의 출현이었다.

박정희 절대권력을 뒷받침한 것은 공포정치와 공작정치였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는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교수 학생

문인 노동자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의문사했다.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과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야당 의원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95만 표 차이로 선전해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대중

신민당 의원은 일본 동경에서 괴한들에 납치 당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1979년엔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며 박정희 체제를 비판한 것을 문제삼아서였다. 이 일은 부산·마산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역사적
 
가정이다. 김재규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죽기 8일 전인 1979년 10월18일 “부마사태가
 
전국적인 민중봉기로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김재규의 보고를 받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김재규는 이때 박정희의 심복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이나 200만 명 정도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고 진술했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부에선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다면 부산이나 마산에서 1980년 5월의 광주학살처럼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는 주장마저 제기하고 있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18년 동안 집권하면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세 차례(31개월) 발동했다. 군대가 주요 시설물을
 
점거해 경비하는 위수령과 각종 비상조치를 포함하면 총 105개월 동안 ‘비정상적’ 통치를

했다(한국정치연구회, ‘박정희를 넘어서’, 도서출판 푸른숲, 1998). 이는 그의 통치기간인
 
220개월의 약 절반에 달하는 기간이다. 1974년 1호로 시작해 1979년 9호까지 이어진
 
긴급조치는 체제비판을 원천봉쇄하는 초헌법적인 명령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자는 영장도 없이 체포돼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벌받았다. 한성대 사학과

윤성로 교수의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그 부정적 유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1970∼

1979년까지 10년 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노동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죄로 구속된

양심수는 총 2704명(그중 1184명은 구류)에 이른다.

한국의 파시스트 논리를 비판한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로 유명한 진중권씨(36)는
 
박정희를 파시스트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진씨는 지난 11월7일 민언련 강당에서

열린 ‘박정희와 조선일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유신 이후 한국 정치는 파시스트 체제였으며
 
이는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휘두른 독일의 나치즘, 반미·반공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신우익과
 
맥락이 닿아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론자들은 박정희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는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한마디로 개발독재의 폐해다. 개발독재가 낳은 경제성장보다는 그 폐해가

한국 경제에 끼친 악영향에 더 주목하는 것이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경제력의 지역격차,

소득분배 불균형 등을 대표적 후유증으로 본다. 또한 가시적인 성과와 실적 위주의

성장제일주의에 따른 구조적 모순이 한국 경제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다카끼 마사오


박정희의 과오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다. 지난

11월9일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조문기씨(76)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22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중단을 촉구하며 발표한 성명엔 이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젊은 시절 일제에 맞서 싸울 때 박정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는데
 
앞장선 일본제국주의의 선봉대였다…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결과 일본군 장교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민족의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박정희가 교직을 떠난 것은 1939년.
 
일본인 아리마 교장을 폭행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의 행적. 이듬해 23세의 그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그 해
 
그는 창씨개명을 했다. 다카끼 마사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한 다카끼 마사오는 우수한 성적 덕분에 일본 본토의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944년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그의 첫 부임지는
 
관동군 635부대. 이어 만주군 보병 제8단장 부관으로 임명됐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만군장교 박정희는 소속을 잃었다. 8월29일 중국 베이징으로 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잠시
 
몸담았다가 이듬해 5월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신동아’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각계 인사 15명을 집중 인터뷰했다. 현 정부 초대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64)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근로자 권익을 짓밟는 등 강압적
 
요인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며 성장의 질을 문제삼았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성장한 데 대해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는 데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폭군이자 반역사적 인물이다.

역사를 보면 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를 내세워 독재를 정당화한 예가 많다.”


소설가 유시춘씨(50)는 박정희 흉상 철거행위에 대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양심범의 정당한 행위”라고 평가했다. 유씨는 “박정희는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짓밟고 인권탄압을
 
일삼은 독재자다. 도대체 박정희의 어떤 점을 기리겠다는 것인가”라며 분노했다.


“우리 민족을 가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개발의 공을 박정희의 카리스마로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온 국민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인권탄압 일삼은 독재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김재열 신부(61)는 “광복 후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군대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 자체가 민족의 불행”이라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비판했다. 김신부는 또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경제성장 대 인권’의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경제는 속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언제든 발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다운 삶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베스트셀러인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36). 박씨는 지난 7월26일 동아일보에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담은 의견광고를 내 화제가 됐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국가에서라면
 
쿠데타를 기념하는 흉상이 세워질 수 없다”며 박정희 흉상 철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똑같이 독재를 했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이라도 했다”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좌익 전력으로 체포됐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 동지들을 밀고하는 등 인간성에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4·19 이후 부패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5·16이 앗아갔다.
 
2공화국이 무능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부를 어떻게 그렇게 평가할
 
수 있나. 2공화국도 경제개발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며 5·16을 비판했다.


“학교 다닐 때 그 사람(박정희)이 사라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정희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세뇌라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 여파가 최소한 30년은 간다고
 
봐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박정희 추모 열기는 그 시대가 제대로 종결되지 못한 데 따른
 
후유증이다.”


고려대 사학과 박용운 교수(58)는 “쿠데타로 역사를 후퇴시킨 사람에 대해 아무런 역사적 평가 없이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돈명 변호사(78)는 김지하 국보법위반사건, 김재규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 유명하다. 이변호사는 “박정희 흉상을 계속 놔둔다는 것은 민족의 정서에
 
유해한 일”이라며 흉상 철거를 “정당한 역사적 행위”로 평가했다. 그는 또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며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강요당했나”라며
 
유신독재를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의 경제발전 공적에 대해서도 이론을 폈다.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박정희 방식이 아닌, 더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했다면 폐단 없이 경제개발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10·26재평가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이변호사는 특별히 김재규의 ‘진실’에 대해 말했다.


“나는 변호사로서 ‘유신체제의 종결을 위해 박정희를 죽였다’는 김재규의 증언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증거도 있다. 김재규 재판은 재판도

아니었다. 일부에서 CIA 배후설이 제기돼 김재규에게 물어보니 펄펄 뛰더라.”




”기념관은 박정희에게도 부담”


경실련 정책협의회의장인 건국대 경제학과 최정표 교수(47). 최교수는 “쿠데타 주역들이

생존해 있는 지금 박정희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며 개발독재론을 비판했다.


“개발독재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뤘다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고도성장을 이룩한 싱가포르도 우익독재를 겪었지만 오늘날 선진국가 대열에
 
올라섰다. 그 차이는 우리의 경우 정권유지를 위해 독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교수는 박정희를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았다. 경제발전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며

특히 지금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박정희 탓만으로 돌리는 데 대해선 반론을 폈다.


“박정희의 국가경영철학과 리더십은 인정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폐해가 한국 경제의 구조를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에 일리는 있지만 그후의 위정자들 책임도 크다. 전임자의 잘못을

고쳐나갔어야 했다. 재벌 문제만 해도 그렇다. 박정희는 재벌을 고도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정경유착의 폐단이 심화된 건 80년대 이후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기호 신부(51·시흥4동 성당)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독재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신념화한 추종자들이 생긴다. 그들과 변혁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신부는 또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정신세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정신세계는 경제와 달리 하루아침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건설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다.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44)는 박정희를 ‘반국가사범’으로 규정하고 기념관 건립을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박정희의 정책 구조는 한국형 부패구조의 원형”이라며

“박정희 부활현상은 허약한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것은 미숙했던 우리 정치사의 시행착오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불행히도 기릴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경제를 조금 발전시켰다고, 국민을 있는 대로

짓밟아놓은 그를 기념하는 것은 애들 교육에도 좋지 않다. 그것은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아마 박정희도 지하에서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홍교수는 또 “경제발전 방식이 잘못됐다”며 개발독재의 폐해를 지적했다.


“민주화나 인권을 논하기 전에 박정희의 경제논리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분배가 시작된 것은
 
1987년의 6월 항쟁 이후다. 새마을운동만 해도 그렇다.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경쟁하기 위해

시작한 그 운동은 농민들에게 거대한 환상만 심어주고 결국엔 농촌을 폐허로 만들었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11월3일 박정희 기념관 건립 논쟁을 다룬 MBC의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55·학단협 대표). 강교수는 경제발전의 공을 박정희에게 돌리는 것을 경계했다.


“당시 경제발전의 배경엔 미국이 주도한 냉전구도가 있다. 미국은 대만과 남한을 주변의

공산주의국가들에 맞서는 보루로 삼기 위해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5·16 직전
 
장면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짜 놓았다. 그것이 박정희 경제발전계획에
 
토대가 됐다. 당시 세계는 자본주의경제가 팽창하던 때다. 한일협정도 미국의 압력으로 맺은
 
것이다. 박정희는 그때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가 발전한 것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경제성장은 가능했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발전?


그는 또 박정희 리더십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했다.


"리더십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만드는 지도력이다. 박정희 정권을 유지한 것은

일관된 무력이었다. 무력에 바탕을 둔 철권통치와 폭압정치는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희연 교수(44·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는 “1997년부터 일기 시작한

박정희 신드롬은 경제위기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며 “대중은 위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영웅을 상상했고, 그것을 대선 과정에 일부 정치인들이 이용함으로써 증폭된 점이
 
있다”고 박정희 부활현상의 원인을 진단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핵심적 가치는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 경력과 독재는 정신적 뿌리가 같은 것으로 민족적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다.

5·16은 반혁명이자 반역사적 쿠데타다. 특히 유신체제는 극단의 전체주의체제였다. 피해자가
 
엄존한 상태에서 충분한 국민적 합의 없이 독재자의 기념관을 짓는 것은 국론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그런지 드러내놓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다. 먼저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47).

박의원은 “YS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 잘못된 재벌정책 등 개발독재의
 
폐해가 문민정부 때 폭발해 IMF 위기를 불렀다”며 문민정부의 경제실정을 박정희 탓으로

돌렸다. 그는 또 “당 지도부가 정체성을 못 살리고 있다”며 “박근혜 부총재도 진정 자신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무엇이 유리한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라며 박정희 기념관 문제에
 
관한 한나라당 지도부의 대응방식을 비판했다.


서울시 국감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부당성을 제기한 민주당 심재권 의원(54)은 “박정희
 
흉상 철거 당시 기자들도 있었다.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데 구속한 것은 잘못된

처사”라며 경찰의 ‘과잉대응’을 비난했다. 심의원은 “박정희는 공보다 과가 훨씬 많은 사람”이라며
 
박정희 체제를 “세계사에 흔치 않은 참혹한 독재”로 규정했다. 또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민주사회 구현과정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질서 이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 기념관의 국고 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기념관 건립은 추종자나 지지세력에 맡기고 정부는 지원하지 말 것. 둘째, 굳이
 
정부가 지원하려면 역대 대통령 모두를 대상으로 한 자료전시관, 또는 기념도서관을 지을 것.
 
아울러 그 장소로는 각 전직 대통령들의 고향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명분으로 내세운 ‘화해(지역화합, 민족화합)’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빈약한 역사의식이 빚은 정략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화해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연세대 행정학과 최평길 교수(60)는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를 짓는 것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꼭 필요한 일”이라면서도 “정부가 나서는 것은 옳지 않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제스처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교수는 “민간이 주도해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도서관을 지을 경우 정부의 역할은 관리비를 보조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DJ의 역사적 월권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 제2부속실장을 지낸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42)의 생각도 최교수와
 
비슷하다. 정의원은 “기념관이든 자료관이든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는 귀중한 국가 자산”이라며
 
“전임 대통령의 추종자들이 건물을 지으면 정부는 그 내용물을 제공하고 관리비를 지원하면

된다”고 말했다. 정의원은 또 “DJ의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DJ 개인 돈으로

(기념관을) 짓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고 꼬집었다.


유시춘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를 존중하는 철학은 좋다. 하지만 박정희 기념관 건립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개인적 은원(恩怨)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며 “명분은 지역화합이지만
 
영남 유권자에 대한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김재열 신부는 “기념관 건립이 과연

지역화합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박영규씨는 “이 나라에 영호남만 있는 건 아니다.
 
영남에서도 (기념관 건립을)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김대통령이 내세우는 명분에서

전형적인 우중(愚衆)정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또 “기념관을 세울 경우
 
박정희 옹호세력의 기세만 키워줄 뿐이다. 오히려 화합의 저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용운 교수는 “대통령이 명분으로 내세운 화합이 오히려 국론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역사적 월권이자 분별력을 잃은 행위”라고 비판한 홍윤기 교수는 “김대통령이 화해를

내세우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정 화해하고 싶으면 추모회에 가서 개인 자격으로 꽃다발을 놓고

오면 될 일”이라고 ‘권고’했다. 박종웅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에 짓는다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기호 신부는 “명분도 잘못됐고 실효성도 없다”고 비판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


강정구 교수는 “지역화합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경상도 표를 의식한 정략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며 “권력 기반이 약한 DJ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고 비판했다. 조희연 교수는 “정치적 효과 없는 정략”으로 평가하면서 “진정

동서화합을 원한다면 기념관을 지을 것이 아니라 탈지역주의 정치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직전 펴낸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의 서장에
 
이렇게 밝혔다. “민주주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그러나 박정희는 집권기간 내내 여론의 자유를
 
막았고 토론의 자유를 막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혁명은 실패했다.


그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민주정권을 불법으로 뒤엎은 5·16도

그에겐 “내적(內賊)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군의 작전상 이동에 불과”했다. 그의 독재 기질은
 
혁명 초기단계부터 엿보였다. ‘국가와 혁명과 나’ 제1장(‘4·19 혁명의 유산과 민주당 정권’)에서
 
그는 “민주적 정치권능보다 일관성 있는 강력한 지도원리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제3장 ‘혁명의 중간결산’에는 “다시 한번 그들의 반성을 일방 기대하였다” “본인은 이 이상 더
 
관용이나 이해를 그들에게 베풀 수는 없게 되었다” 따위의 표현이 등장한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 그는 이미 ‘전제군주’의 위치에서 정치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45)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일찍이 이렇게 진단했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박정희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단지 복고주의니 향수니 하는

문화현상만은 아니다. 그건 정치·경제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금력을 가진
 
기득권층, 그리고 엘리트층의 절대 다수는 박정희 시대에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언로를 장악하고 있다… 박정희가 주도한 근대화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박정희는 욕을 먹어야 한다. 그건 결코 모순이 아니다. 그건 박정희 시대에 고통받은

인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인물과 사상’ 2권, 1997.6)


국민연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희연 교수는 국민연대의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무엇보다도 100억원의 추가예산 편성을 막기 위해 기념관 반대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치겠다.
 
그래도 강행한다면 건물 착공을 저지하기 위한 고강도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과연

훗날 역사는 박정희에 대한 화해와 단죄 중 어느 쪽을 더 의미 있게 평가할까.

[옥중인터뷰|김용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11월13일 오후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는 김용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을
면회했다. 초췌해 보였지만 표정은 밝았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건강은 어떤가?

“심장이 조금 좋지 않지만 견딜 만하다.”

―적용된 혐의 내용이 뭔가?

“특수공무방해죄와 폭행죄다. 재물손괴죄 정도로 생각했는데 뜻밖이다. 재판과정에 시비가
가려질 것이다.”

―언제 어떤 동기로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마음을 먹었나?

“박정희의 가장 큰 죄는 민족을 배반한 죄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사람이다.
 4·19혁명 후 ‘김구 선생 암살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암살에 관련됐던 사람들이 속속 자수하는
상황이었는데 5·16쿠데타가 진상규명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5·16은 또 4·19혁명의 영향으로
막 움트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싹을 잘라버렸다. 흉상을 철거하기로 맘먹은 것은 그 자리가
바로 쿠데타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국민연대가 출범한 9월2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조직부장과 함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는 동안 그에게 흉상을 철거해야겠다는 내 뜻을 밝혔다. 한 달 뒤 저녁 회식 후 방학진에게
이 일에 협조할 수 있는 단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11월2일까지 4개 단체가 참여의사를 밝혀왔다.”

―구속을 각오했나?

“역사적 정의 차원에서 구속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정법에 저촉될 것은 각오했다.”

―박정희 부활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나?

“친일파들이 박정희를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그의 범죄실상을 가리고 왜곡하고 있다. 민족 반역자를
 기리겠다고 국민의 돈을 쏟아 붓는다니 말이 되는가. 더욱이 세계가 주목하는 장소에 반역의
바벨탑을 세우려 하다니. 이는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김대통령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역사의식이 올바른 분으로 믿었고, 통일지향적인
대북정책에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통일정책은 국민이 적극 밀어줘야 한다.
그런데 친일을 한 박정희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보다 더 화려하게 기념하려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박정희 기념관은 김대통령의 역사적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는 대통령
개인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끝)




[2010 연중기획]경부고속도로 반대 ‘일리 있는 논리’

(2010 02/09위클리경향 862호)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당시 야당 ‘남북종단’보다 도로 열악한 ‘동서횡단’ 우선 건설 주장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야당 정치권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했습니다. 국가를 팔아먹는다, 업자를 위해 그 일을 하느냐,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 나라를 망가뜨리려 하느냐, 그 예산을 차라리 복지에 써라 등 내용을 보면 요즘과 비슷한 반대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코로나 승용차와 그 옆을 걷는 할아버지. 1970년 7월 7일.

“도로 건설 찬성하나 우선순위 의문”
지난해 11월 28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날 이 대통령은 청계천과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반대에도 무릅쓰고 관철시켜 결과적으로 좋아진 예’로 거론했다. 당시 언론, 학계, 야당의 반대에 맞서 관철시킨 박정희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발전이 있었겠느냐는 인식이다. 이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꺼낸 것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4대강 사업 이전에 ‘한반도대운하’를 추진할 때도 이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의 예를 자주 거론했다.

실제 야당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당시 신문자료를 뒤져 경부고속도로와 관련한 쟁점을 검토해 보았다. 동아일보는 1968년 1월 11일자에 ‘밝은 정치를 위해 유진오 신민당수에게 듣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유 당수는 인터뷰에서 히틀러의 아우토반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근대화의 기간인 도로 건설이라는 데서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춰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발언은 당시 신민당 당론을 반영하고 있다. 즉 ‘취지를 반대하지는 않으며, 남북 간보다는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근거는 무엇일까.

1968년 2월 22일 오후 2시 국회에서는 63회 건설위원회 3차 회의가 열렸다. 김형일 신민당 의원의 바통을 이어받은 김대중(DJ) 신민당 의원이 질의한다.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그러한 교통망이 필요하다, 이것은 누구나 알다시피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남북종단에 철도와 도로를 치중하였기 때문에 그 유산으로서 이와 같은 교통 체제가 되어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재원 또 한정된 능력을 가지고 지금 가위 우리나라 현실로 보아서 그래도 가장 발달된 그 노선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 급한 것은 뒤로 미루고 안 급한 것은 먼저 한다, 이런 일을 정부가 하고 있다는 건데….” 김 의원의 주장 요지는 이미 일제 시대 때 대륙 병탄 목적으로 남북종단 교통체계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군사용 도로를 제외하고는 철도·도로 시설이 거의 없는 강원도를 연결하는 동·서 고속도로 건설사업이 더 필요하며, 세계은행(IBRD)의 결론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김 의원의 질의에 대한 주원 당시 건설부 장관의 답변이다. “전국에서 교통량 수송량 전체를 볼 때 가장 폭주하고 있는 것을 완화하는 것이 긴급한 문제이며, 그래서 이것(경부간 고속도로)이 된 것이다. 지역을 개발하거나 도로의 선을 결정한다든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권력이나 정치적 압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조작된 기억’
IBRD가 내놓은 한국 고속도로 건설 관련 의견 보고서. 김대중 등 당시 야당 측은 이 자료를 근거로 경부고속도로보다 동서횡단 건설 우선론을 주장했다.
“정치에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박 전 대통령도 강조한 말이다. 경향신문 1969년 3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그는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업체 대표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조기 완공을 당부하면서 “일부에서 말하듯 정치에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7개월 뒤 언론은 박정희의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앞두고 여당 쪽에서 만들어진 정치 신어(新語)로 ‘하이웨이 전술’이라는 것을 꼽았다.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을 내세워 정부 실적 PR를 최대한 활용키로 한 것. 지난번 오산~천안간 고속도로 개통식 때 많은 시민의 운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이후 부상된 것.”(경향신문 1969년 10월 7일) 그리고 1971년 대선.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우선은 지방 국도 포장, 2단계로 고속도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여러 고속도로 동시 착공”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논쟁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란 책에 ‘고속도로와 지방불균형발전’이라는 장을 저술한 한상진 울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김대중이나 야당의 논리는 고속도로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가 아니었고, 실제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소외된 전라도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급속한 이농현상 등이 발생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했다. DJ의 주장대로 서울~강원 간 고속도로가 우선 만들어졌다면? 교양역사서 <타르타르스테이크와 동동구리무>를 펴낸 정창수 박사는 “강릉은 대도시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부산은 부산대로 지리상 발전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해상교통이 발달하고 해안지역의 전반적 개발이 있었을 수도 있다”면서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야당의 반대가)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주장은 만들어진 기억”이라고 말했다. 실제는 경부고속도로 개발 반대론이라기보다 차선론이었고, 나름대로의 대안적 논리가 있었음에도 박 전 대통령이 선거 유세 등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딱지를 붙인 이후 진실로 둔갑한 ‘조작된 기억’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야당사’와 관련해 여러 권의 책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전 대한매일 주필)은 “박정희는 당시 야당을 두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고 몰아붙여 왔지만 야당이 그런 정도라도 비판했기 때문에 국회에서 통과되기도 전에 줄부터 긋고 그런 것은 막을 수 있었다”면서 “이런 측면에서 4대강 관련 예산안이 국회에 통과되기도 전에 착공부터 하는 현 정부는 박 정권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경부고속도로 반대’ 야당 시위 사진은 조작?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이후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 인사들이 건설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며 인터넷에 유포된 사진. 사진은 일부 내용 변조 등으로 미뤄볼 때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인식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야당은 ‘목숨을 건 반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을까. ‘국민과의 대화’ 전후로 인터넷에는 한 장의 사진이 돌았다. 굴삭기 앞에 두 남자가 누워 있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밑에는 다음과 같은 사진 설명이 붙어 있다. 

“공사현장에 몸소 드러누워 진보, 개혁, 민주화운동을 몸으로 실천하신 ‘움직이는 양심’ 슨상님.” 굴삭기 앞에 누워 있는 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던 1960년대 후반부터 완공되던 1970년,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국회의원이었다. 그러나 출처 불명의 이 사진 속 인물은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야당 인사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뒤에 도열한 사람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의 ‘끝까지 결사반대’라는 글씨는 원래 글씨로 보이지만 이것이 경부고속도로와 관련된 사진이라고 주장이 가능한 ‘고속도로 반대’라는 글씨는 누군가가 사진에 가필(加筆)한 것이다. 사진을 살펴본 장신기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은 “실제 누워 있는 사람의 옷차림이나 체형 등은 김대중 당시 신민당 의원과는 다르다”면서 “일부에서는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이 김 전 대통령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IU에 지친 남자: 심형래'감독'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돈주고 본다는 건, 그것보다 진중권에 이빨을 드러내는 건 얼마나 천박하고 상스러운 짓인지. 불량품보고 불량품이라는데, 자기는 보고 싶지 않아 안 보겠다는데 뭘 잘못했지?



A: '불량품 논란에도 130만 돌파'라. 문화의 과잉소비이거나, 방학인데 애들볼 영화가 딱히 없고 해리포터 시리즈가 덜 재밌어졌다 해도 납득불가능한 수치. 근데 내가 왜 창피할까요.



A: 진중권이 대체
A: 뭐라했길래 난린가 볼라고 트윗 찾아보는데
A: 넘 많아

IU에 지친 남자: ㅋㅋㅋ
IU에 지친 남자: 별거 없어
IU에 지친 남자: 한번 불량품 판 곳 다시 안 간다고
IU에 지친 남자: 안 볼거라고
IU에 지친 남자: ㅋ

A: 그 한마디에
A: 그난리였어?
A: 이슈메이커로서는 대한민국 최고네
A: ㅋㅋ

IU에 지친 남자: 그니까
IU에 지친 남자: 근데
IU에 지친 남자: 그 영화를 보고 싶어 너는?
IU에 지친 남자: 영화관에서?

A: 아니
A: 디워도 안봤어
A: 그냥
A: 무관심

IU에 지친 남자: 좀 이해가 안 돼

A: 진중권이 돈받은거야.

IU에 지친 남자: ㅋㅋㅋㅋ
IU에 지친 남자: 노이즈마케팅?

A: 심형래가 제발 한마디만 해달라고

IU에 지친 남자: 하지만 이미 그 전에
IU에 지친 남자: 100만이 넘었다구

A: 헐

IU에 지친 남자: 그 싸구려 B급 영화에
IU에 지친 남자: ㅋ

A: 문화과잉소비.
A: 방학이고
A: 애들볼영화가 없었나...
A: 해리포터가 재미없어서?
A: ㅋㅋㅋ

IU에 지친 남자: ㅋㅋㅋㅋ
IU에 지친 남자: 기껏 진중권 까는 게
IU에 지친 남자: 니가 영화를 만들어봤냐
IU에 지친 남자: 영화만든 심형래의 고충을 아냐
IU에 지친 남자: ;

A: 영화평론가도 아닌게 왜그러냐며.ㅋㅋ

IU에 지친 남자: 아 정말? 그럼 자기들은 왜 떠드나..
IU에 지친 남자: 근데 진중권 미학자자나..;;;; 영화의 미학을 이야기한 거 아냐?ㅋ

A: 애국심에 불을 질렀다기에도, 헐리우드만 가고 해외 수출만 노린다면 전부 먹어주나.

IU에 지친 남자: 심형래 나온 영화에 대한 향수로 해석해야 할까.
IU에 지친 남자: 뭐, 디워를 빼고 생각하면
IU에 지친 남자: 그의 계보는 분명히 있지
IU에 지친 남자: 우뢰매 영구와 땡칠이 따위

A: 그치만 그런 향수를 수백만이 자극받는다고?

IU에 지친 남자: 그것도 아무래도 아닌 거 같지? 이건 미친 거야
IU에 지친 남자: 그냥
IU에 지친 남자: ㅋ

A: 우리나라는 미친나라자나
A: 지금 130만이 넘었대
A: 후덜덜이다.

IU에 지친 남자: 응
IU에 지친 남자: 진짜. 쪽팔리다

A: 영화는 안봤지만
A: 안봐도 뻔하긴 하니.ㅋ


IU에 지친 남자: 천박하고 상스럽고
IU에 지친 남자: 보는 거 자체까지 뭐라 할 수야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백만이 훌쩍 넘는단 거
IU에 지친 남자: 게다가 진중권 한 마디에 미친 듯이 달겨들어 입닥치라고 비난하는 거




* 약간의 재구성을 거친, 배부른 오후의 객쩍은 한담.

영화를 보러 간 건 2010년의 마지막 밤, 무려 세시간여의 영화가 끝나고 나온 시각은 2011년의 첫 밤.

그다지 크지 않은 상영관 안이었지만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서 열명이나 되었을까,

사람에 치이지 않고 유난스럽지 않게 해넘이를 하는 방법으로 꽤나 추천할만한 방법인 듯 싶다.


영화는 굉장히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80년대에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을

그대로 읽는 식의 말투를 구사한달까, 도무지 일상생활에서 쓰이지 않을 법한 말투와 표현, 종결어미를

쓰는 거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따위의 말을 또박또박 읊는

그들의 말투는 영화에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든다. 이 영화는 대체 어디로 나를 끌고 가려는걸까,

저런 배경에서 배우들의 저런 연기와 대사는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거다.


풍경도 마찬가지, 영화가 국내에서 근 일년여 늦게 개봉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2008년 어간의 서울

풍경일 텐데 왜 이다지도 낯설까. 남산타워의 모습이, 한강너머 트레이드타워의 모습이, 그리고

청계천과 덕수궁 인근의 모습이 내가 알던 그 곳들이 맞나 싶다. 풀칼라의 화면과 모노톤의 화면을

넘나들어서가 아니라, 워낙 날 것의 모습들로 나와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분칠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이되 그때그때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가 짙게 투영된 풍경들이어서 더욱 생경한 거 같다.


구성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정서와 아포리즘이 반복해 등장하는 전반부,

그리고 영화가 시작한지 한시간 반쯤 후에야 불쑥 '아 까먹었네'라는 느낌으로 등장하는 영화제목과

배우, 제작진 소개라니. 그리고 나서 '백야'의 정서와 아포리즘으로 넘어가는 후반부랄까. 게다가

영화 도중 계속해서 하얀 화면에 글씨로 새겨진 몇몇 대사들은, 실제 내러티브와는 살짝 빗겨나면서

더욱 풍부한 해석이나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복잡하고 낯선 장치들, 풍경들을 빌려 영화는 얼핏 세네개의 사랑이야기를 슬쩍 겹치며

흘려낸다. 신하균이 사랑하는 그녀, 신하균을 사랑하는 그녀, 신하균이 새롭게 만난 그녀, 그녀가

품고 있던 이전의 남자..가망없는 사랑 앞에 지쳐버려 죽음만을 생각하던 사내가 문득 새로운 가능성

앞에 가슴뛰고 열중하고, 그렇지만 다시 새처럼 날아가버린 그녀 앞에서 세상은 시간을 알 수 없는

흑백으로 물들고. 베르테르의 비극적 사랑과 그 결말을 백야의 여주인공이 그래도 조금 유예해줄 수

없을까, 했다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건너뛰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연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홍대여신' 요조가 연기했던 퀵배달부, 그녀의 역할이 결코 작지않았던 건, 그녀가 전하는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좌절하는 소식들을 받아드는 사람들의 제각기 반응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이별을 고하고, 이별 앞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복수심에 이를 갈고, 그 중의 한두명은 신하균과

같이 사랑에 지쳐버려 죽어버리거나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또 누구는 그렇게 죽어버릴지도 모르고.


계속 화면 한 구석에서 적잖은 존재감을 과시하며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고 있던 남산타워, 그건

사랑으로 채 덮이지 않는 뾰족한 한 '현실' 아니었을까. 학생의 어머니를 향한 신하균의 사랑은 그

남산타워의 첨탑에 걸려 찢기고 말았고, 신하균을 향한 동료교사의 사랑 역시, 신하균의 정유미를 향한

사랑 역시.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었다. 디워 논쟁 때 진중권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야기하며

불합리하고 비문맥적인 스토리를 비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렇지만 사랑은 대개 그런 거 아닐까.

불합리하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딱히 명료한 맥락을 잡아내기도 힘든.


성모상 앞에서 배신한 남자의 뺨을 때리는 대신 꼭 안아주고 돌아섰던 어느 여자아이, 그녀가 남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친구와 나누던 말은 신하균에겐 너무 늦은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래된 걸까.

이제 어떡할거야. 낳아야지. 어떡할 거냐고. 길러야지. 아니, 어떡할 거냐고. 살아야지. 살아야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하며 살아야지. 그 여자아이는 깨달은 걸까, 아님 너무 어린 걸까.





진중권(@unheim)은 "허영만 화백의 선견지명? 이 만화가 2003년 거라니... 이 분, 돗자리 까셔도 되겠네요."

지인(@tradepoli**)은 "저 강을 아끼는 사람들의 심정으로.."라며 답답함을 호소하며 리트윗을 했고,

나(@ytzsche)는 "이미 2003년에 상식이 되어가던 이야기, 그치만 2010년엔 낯설어지고 만 이야기."라며

프레시안에 오른 기사를 재트윗. ( 허영만 화백의 예언? <식객> 한 장면, 4대강 논란과 흡사 )



어제 4대강에 대한 피디수첩을 보면서도 계속 분통이 터졌댔다.

"아니 정말, PD수첩에서 하는 얘기 누가 몰랐나. 별거 없잖아. 상식적인 차원의 비판과 온건한 수준의 문제제기일

뿐이다. 그 정도의 제도권내 비판조차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다는 사실이 더 비극이다. 우리 가족 모두 총평은

싱겁다, 라는 것."

"솔직히 정권과 언론상층부에서 그토록 무리하게 방송을 금지시켰길래 대체 뭐가 있나 했었다. 근데 이건

너무나 상식적이자나. 그들은 '상식'의 기준을 어디까지 끌어내리고 싶은 걸까."


그 답을 보여주듯, 2003년 허영만 화백이 기록한 '상식화되어가던' 당대의 (준)상식. 2010년 지금은 오히려

그 방향이 뒤집어진 채 상식이 비상식의 낯선 영역으로 내몰아지고 있다.



그 와중에 다른 트윗 친구분(@vleee**)은 "오늘로 이명박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을 채웠답니다!! 이제????"

라며 경악하고 말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 아, 슬프다.



#1.

어젯밤 꿈에 전지현이 나왔다. 그녀는 내 앞에서 해실해실 웃으며 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따내려고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없었다. 당황해서 가방을 뒤졌지만 역시 핸드폰은 나오지 않았다. 울고 싶은 마음이 되어 그녀에게
 
말했다. 명함 한 장 주세요.


#2.

저번주 목요일 밤부터 2박 3일, 제주도에 다녀왔다. 예기치 않은 일정, 생각지 않았던 장소였다. '올레길'이란 건 뭔가

심각한 고민이나 결정할 사항들을 싸짊어지고 걷는 게 제맛 아닐까 했는데, 가족들하고 도란도란 걷는 것도 좋았다.

덕분에 포스팅거리는 잔뜩 늘었다. 캄보디아도 갈 길이 먼데, 제주도부터 차근히 올려야겠다.


#3.

일요일밤에 만난 군대친구는 부산에서 올라왔다. 벌초하러 갔다 오는 길에 문득 서울행 버스를 탔다고 했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면서 또 물었다. "어떻게 살 건데?" 아마도 2002년께 군대에서부터 서로에 대해 계속되었던 질문,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 보러 가서 밤새 술을 펐을 때의 대답과는 달랐나보다.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은, 내게서 그가 기대했던 마지막 말이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지"라는 말로 시작되는 구구한 말들,
 
"핑계인지도 모르겠지만"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핑계들. 내가 이미 그 녀석에게 '황소만한 개구리'라고 뻥을 얼마나 잘

쳐놨었는지는 몰라도, 아닌 게 아니라 요새 스스로에 불만이 많다. 자유란 건 단순히 물리적인 시공간에 대한 개념이

아니니까.


#4.

슬슬 바빠지고는 있다. 할 일은 늘어나고, 하고 싶은 건 많고. 당장 이번주 월요일에 있었던 '시사IN 강연회'는

가지도 못했다. 진중권이 강사로 나왔는데, 다음달 출장 준비다 뭐다 바빴다. 오늘도 노종면 YTN노조위원장의

강연이 있는데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가 아는 '황석영'이라는 분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의 집권을 막기 위해 시민단체들 그러 모아 비장하게 비상시국선언까지 했던 분입니다. 그때는 이명박씨를 '부패연대세력'이라 부르며, 이명박의 집권을 막기 위해 반MB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요. 제 기억에 그 움직임은 결국 문국현 후보에게 가하는 사퇴의 압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자 뉴스를 보니, 자신을 황석영이라 부르는 또 한 분이 나서서 이명박 정권이 실용적인 중도정권이라며, 그 정권을 적극 돕겠다고 하는군요. 부패한 세력이 집권 1년 만에 자연치유되어 싱싱해졌다는 얘긴가요? 아니면 이명박이 '부패'한 세력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치즈나 요구르트처럼 '발효'한 세력이었다는 얘긴가요?

더 황당한 것은 아직도 진보세력이 '독재 타도'나 외치고 있다는 그의 비판입니다. 2007년 대선 때 철지난 독재타도 외치던 사람은 바로 황석영씨였습니다. 그때 '비상시국회의'라는 단체의 결성식에서 황석영씨는 "척박한 독재의 동토에서 민주화를 위해 분투한 초심의 열정으로 다시 돌아가"겠노라고 했었지요. 그런데 이제 와서 사돈 남 말 하고 계시니.... 

사진에 나타난 생물학적 특성은  이 개체가 영장류에 속한다고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기억력이 2초라는 금붕어도 아니고, 세상에 명색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이 했던 언행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욕도 웬만해야 하는 거지, 이 정도의 극적인 변신이라면 욕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웃고 넘어가지요. 

정작 코미디는 따로 있습니다. 황석영의 문학적 영감이란 게 '몽골 + 2 korea'라는 발상이라네요. 이 대목에서 완전히 뿜어버렸습니다. 요즘 그러잖아도 크로스 오버가 유행하던데, 아예 개그계로 진출하시려나 봅니다. 민족문학 한다고 북조선 넘나들더니, 이젠 민족의 단결을 넘어 몽골 인종주의, 알타이 종족주의 문학 하시려나 봅니다. 이 분, 생기신 것보다 많이 웃기세요. 풋~ ^^ "

@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각하께서 드디어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신 듯합니다. 그럼 국민들은 어이를 상실하게 되지요. 외국 다녀오더니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며 자화자찬 하시는군요. 이제까지  외교는 말만 하고 돌아왔는데, 자기는 실질적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고 말만 하고 있네요. 평가는 언론에 맡겨둘 일. 피겨 선수들이 언제 자기 연기에 자기가 점수 먹이던가요? 우리 각하, 자기가 자기를 알아주기로 했나 봅니다. 그 동안 남들이 자기를 안 알아줘서 스트레스를 받으셨나 보죠? 

첫 증상은 기자들을 향해 "잘 한다, 잘 한다 해야, 잘 한다."라고 말할 때 이미 나타났지요. 일반적으로 언론의 사명은 권력에 대한 감시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각하의 생각은 다릅니다.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 언론은 권력의 옆에서 '잘 한다, 잘 한다' 추임새 넣는 언론이지요. 그래서 각 방송사에 낙하산 부대 내려보내, 공중파로 '각하, 잘한다, 잘 한다' 명비어천가 방송을 내보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권력자가 뭘 하든 옆에서 '잘 한다, 잘 한다' 추임새 넣는 것은 북조선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언론이지요. 전체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언론을 정권 프로파갠더의 수단으로 간주하지요. 지금 그 선봉에 선 사람이 문화부의 신재민 차관이지요. 제가 보기에 그가 이 정권에서 맡은 임무는  나치 정권에서 괴벨스가 맡았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정권 홍보,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언론 공격. 지금 문화부의 기능은 3공때 문화공보부와 똑같습니다.

민주국가에서는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반면, 독재국가에서는 권력이 언론을 감시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애먼 기자들이 해직 당하고, 앵커가 중징계를 당하고, 방송 프로그램이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됩니다. 정권이 뿌리는 떡고물을 받아먹으며 해괴한 우익 관변단체들이 극성스럽게 설치고, 이들이 MB 완장 차고 비판언론에 생트집을 잡으며 극성스럽게 앞잡이질을 하면, 방통심의위라는 검열기관에서 그걸 냉큼 받아 마구 징계를 때려대는 식이지요. 

각하께서 국민의 "극히 일부분"이 정부에서 하는 일에 반대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국민의 3분의 2가 이 정권의 주요한 정책에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3분의 2가 이 정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대통령 잘 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 거의 못 봅니다. 그런 얘기 했다가는 돌 맞는 분위기입니다. 각하 주위에 몰려 있는 "극히 일부분"의 사업형 아부꾼들만이 위대하시며 영명하신 그 분의 탁월한 영도력을 찬양하고 계실 뿐이지요. 

이 정권이 완전히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래놓고서 하는 얘기가 외국 야당이 부럽다고 하네요. 언젠가 TV에 나와서, 위기의 시대니 미국과 같은 나라의  통합적 지도력을 본받으라는 취지의 얘기를 하니까, 거기에 각하께서는 대뜸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우리가 미국 같은 선진국입니까?"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통합적 지도력, 민주적 리더쉽은 아직 한국이 후진국이라 본받을 때가 못 되고, 다만 야당질만큼은 선진국스럽게 해라, 뭐 이런 얘기죠. 

각하는 외국 야당이 부러우시답니다. 그런데 국민은 외국 여당이 부럽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선거 때 손가락 하나 잘못 눌린 죄가 이다지도 크단 말입니까? 지금 국민이 당하는 고난은 지난 대선 때 저지른 실수에 비해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입니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747 공약, 믿어서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믿고 싶어서 찍은 것 뿐인데, 그게 그렇게도 큰 죄라서 그 죄값을 이런 가공할 규모로 받아야 합니까? 이제 겨우 1년 지났는데, 한 10년 산 것 같습니다. 

반대만 해야 하는 국민도 정말 괴롭습니다. 도대체 국민이 찬성할 만한  정책들을 내면 어디가 덧납니까? 어떻게 내놓는 정책마다 모두 국민이 나서서 뜯어말려야 합니까. 공약 지킬까봐 겁나는 대통령은 그가 아마 처음일 겁니다. 내놓는 정책들이 양계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니, 영장류의 본능상 국민들이 생물학적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거죠. 국민들이 정권에 반대하는 이유는 철저히 진화론적인 것입니다. 과거로 퇴행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진화하고픈 본능이라고 할까요?

- 09.03.09.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 가장 멋졌던 댓글은, "어머, 제목만 봐선 여태까진 현실감각 있었는 줄 알겠어요."ㅋ
왜 주경복을 지지하는가
[진중권 칼럼] '미친 교육'에 대한 '촛불'의 심판 보여주자
등록일자 : 2008년 07 월 26 일 (토) 15 : 28  
 

  한여름이라 그런가? 납량특집이 유행이다. YTN 낙하산 인사, KBS 사장 퇴진 압력, MBC에 대한 공격. 촛불민심을 만들어낸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대한 온갖 규제들. 노골적으로 정권의 충견으로 나선 경찰과 검찰은 촛불을 물어뜯는 데에 여념이 없다. 임기 초에 지지율 20% 초반이면 사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정권. 무덤에 누워 반성해야 할 이 좀비가 다수의석이라는 형식적 권력에 기대어 도처에서 산 사람들을 공격하며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좀비의 이 주제넘음은 물론 다음 총선과 대선까지는 앞으로 4~5년이나 남았다는 여유에서 나온다. 한 마디로 '너희들이 아무리 끓어봤자 4~5년 동안은 합법적으로 우리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는 자신감이다. 그래선지 최근 촛불에 대한 정권의 전방위적 압력은 실로 극한을 향해 치닫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강압적 통치가 그들을 구원해줄 것 같지는 않다. 시대착오적 억압은 시민들 마음속에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쌓여, 또 다른 분출의 순간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싱가포르에서 또 다시 외교적 해프닝을 연출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뺨 맞고, 중국에게 침 맞고, 일본에게 뒤통수 맞다가 이제는 북한에게마저 절절매는 신세가 된 무능한 정권. 이 '글로벌 호구'가 제 국민을 향해서만은 왜 이리 기세등등하게 서슬이 퍼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황당한 상황에 긍정적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반 년 간 이명박 정권은 '선거 잘못 하면 나라가 어떤 꼴이 되고, 시민이 어떤 신세가 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계몽적 역할을 충실히 해오지 않았던가.
  

▲ ⓒ프레시안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선거 다시 하려면 4~5년을 기다려야 하는 촛불시민들에게, 이번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놓쳐서는 안 될 기회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돌이켜보건대 촛불과 교육의 문제는 사실 애초부터 서로 맞붙어 있었다. 처음 거리로 나온 촛불소녀들의 피켓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여기서 '밥 좀 먹자'는 구호는 미국산 쇠고기 급식에 대한 두려움을, 그리고 '잠 좀 자자'는 구호는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 앞에서 중고생들의 신체가 느낀 위협을 표현한 것일 게다.
 
  "학생들이 공부하다 과로해서 죽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서울시의회에서 교육문화위원장을 하는 분은 얼마 전 이 가공할 망언으로 MB식 교육철학의 정수를 보여준 바 있다. "저소득층이 늘어나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 강남에 임대아파트 짓지 말라고 서울시에 공문을 보낸 서울시교육청의 행각은 MB식 교육철학의 또 다른 기둥이다. 이게 과연 제 정신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인가? 이러니 '미친 교육'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촛불은 처음부터 이 병든 교육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투표권도 없는 내가 주경복 후보 지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주 후보야말로 이 촛불의 정신을 대변하는 후보라고 믿기 때문이다. 투표율이 낮은 선거에서는 늘 조직력과 동원력을 갖춘 보수층이 쉽게 승리해 왔고, 이번 선거 역시 유감스럽게도 투표율이 그리 높을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촛불후보가 기어이 승리를 한다면, 그것은 '촛불 민심이 이명박 정권의 미친 교육을 심판했다'는 확실한 사인이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정권으로부터 공격당하고 모욕당하는 촛불을 지키는 길이라 믿는다.
 
  과거의 경쟁력
 
  하지만 주경복 후보를 지지하는 데에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 교육의 경쟁력을 위해서다. MB의 교육철학을 공유하는 이들은 저마다 입으로 교육의 '경쟁력'을 외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경쟁력은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형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들의 게을러서 굳어버린 돌머리는 경쟁력마저도 70년대식으로 이해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70년대가 아니라 21세기에 살고 있다. 필요한 것은 미련하게 애들 잠 안 재우는 경쟁, 부모들이 벌이는 소모적인 소득수준의 경쟁이 아니다. 미래형 경쟁은 창의성과 상상력의 경쟁이다.
 
  경쟁력을 떠든다고 경쟁력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억하는가? 대통령 이명박씨는 "국내에 나의 경쟁자는 없다"며, 자기 상대는 미국의 부시, 러시아의 푸틴이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말하던 그의 국제경쟁력은 어느 수준이던가. 한 마디로 글로벌 호구가 아니던가. 하루에 네 시간 밖에 안 잔다고 자랑하는 게 MB 정권에서 생각하는 경쟁력이다. 생산력의 발전이 노동력의 단순투입만으로 이루어지던 70년대 초의 마인드. 그런 구식 경쟁력으로 세계로 나갔다가는 외교에 이어 경제에서도 글로벌 호구가 될 뿐이다.
 
  미래의 경쟁력
 
  후진국의 산업화는 대개 선진국에서 기계를 들여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조금 발전하면 기계를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때 쯤 선진국은 기계를 디자인만 하고 있을 게다. 개도국이 기계의 설계에 뛰어들 때쯤이면, 선진국은 원천기술의 개발을 인도나 중국과 같은 개도국에 떠넘긴 채 기술 경영만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창의성 없는 기술은 급속하게 단순한 기능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교육 경쟁력이란 바로 이런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 창의적 인력을 양성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MB노믹스의 한계는 곧 MB식 교육의 한계다. MB와 철학을 공유하는 후보들은 저마다 '경쟁력'을 떠든다. 하지만 그 '경쟁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뜯어보면, 산업화 초기 단계의 마인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문제 푸는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은 다르다. 문제 푸는 능력은 결국 알고리즘에 익숙해지는 문제다. (사교육의 본질은 바로 그 알고리즘을 상품으로 제공해주는 데에 있다.) 반면, 문제 해결 능력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라, 무엇보다 학생 스스로 자료를 검색하여 솔루션을 모색하는 주체성을 요구한다.
 
  나아가 문제 해결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게 문제 제기 능력이다. 이미 던져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다.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아직 제기 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것. 이는 최고의 창의성을 요구한다. 이미 세계 경제는 이런 종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MB주의자들이 떠드는 경쟁력이 어디 이런 것을 말하던가? 하루에 네 시간 밖에 안 자는 대통령. 이게 저들이 생각하는 교육의 모범이자 이상이다. 하루에 네 시간 밖에 안 자는 것은 부지런한 게 아니라, 그냥 미련한 것이다.
 
  경쟁과 협력
 
  주경복 후보는 공약으로 핀란드식 교육을 얘기한다. 세계 최고의 교육경쟁력을 자랑한다는 핀란드. 이 나라의 운영원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MB이념과는 대극을 이룬다. 노무현 정권마저 '좌파'라 부르는 가재미들의 눈에 핀란드와 같은 북구 사회는 아마 극좌 공산주의 사회처럼 보일 것이다. 핀란드의 고교내신은 달랑 '잘 함', '중간', '못함'의 세 등급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소수점 아랫자리까지 따져가며 학생들 줄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중고등학교까지 성적 별로 서열화하는 게 교육경쟁력의 요체라 믿는 이들은 아마 이게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가장 사회주의적인 나라가 동시에 가장 높은 자본주의적 경쟁력을 갖추었다. 이 사실이 미래를 헤칠 머리가 없어 과거에 집착하는 굳은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상상력의 한계다. 자본주의적 생산도 어차피 사회적 생산, 그것도 거대한 사회적 협업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한 사회의 경쟁력은 바로 이 협업이 얼마나 효율적이며 창의적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달려 있다. 교육의 이념도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의 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친구를 밟아야 내가 생존하는 소모적 경쟁은 반(反)사회적인 것이다.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 미학에서도 이미 100년 전에 포기한 낭만주의적 천재론이 한국에서는 경제학의 행세를 한다. 대통령이 CEO를 하고, 전 국민이 그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면 경제가 성장한다는 전근대적 미신이 한국에서는 버젓이 경영학의 행세를 한다. 한 사회의 경쟁력은 자신을 천재 혹은 엘리트라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경제 주체 하나 하나의 능력, 그것들의 효율적 결합, 그 결합이 만들어내는 전체적 창발 효과에 달려 있다. 교육의 이념은 이 상식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내 안의 MB
 
  마지막으로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게 있다. MB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은 사실 우리들 내면의 명박스러움이었다는 점이다. '경제만 성장시켜 준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게 지난 대선의 표심이 아니었던가. 교육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MB식 교육정책을 낳은 것 역시 우리들 내면의 명박스러움이었다. 요란하게 사교육을 탓하는 학부모들에게 솔직하게 물어 보자.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든 내 아이만 잘 가르치면 된다.' 아니, '다른 아이들이 못할수록 내 아이에게는 유리하다.' 솔직히 당신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아이야 어떻게 되든 내 아이의 점수만 높이면 된다.' 이것이 사교육을 성행하게 만드는 우리 내면의 명박스러움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얼마나 효율적일까? 애들은 애들대로 고생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허리가 휘고, 교육은 교육대로 망가질 뿐. 진정으로 공교육을 살리고 싶다면, 우리 내면의 명박스러움부터 척결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 우리가 함께 잘 가르쳐서, 나중에 그 결실을 함께 나누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공교육의 이념이다. 정의로운 것이야말로 효율적인 것이다.
 
  내가 주경복 후보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와 관련이 있다. 나는 그의 당선이 한국의 교육현실을 일거에 바꾸어 놓을 거라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당선이 이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을 뿐이다. 진정한 승리는 그저 특정 후보를 교육감으로 당선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괴물 정권과 괴물 정책을 출산한 우리 내면의 괴물을 반성하고 척결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는 우리 내면의 명박스러움을 태워 없애는 또 하나의 촛불집회, 즉 정신적 성숙과 정화의 의식이 되어야 한다.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

"나는 나의 과거를 싫어하고 다른 누구의 과거도 싫어한다. 나는 체념, 인내, 직업적 영웅주의, 의무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을 혐오한다. 나는 또한 장식미술, 민속학, 광고, 발표하는 목소리, 공기 역학, 보이스카우트, 방충제 냄새, 순간의 사건, 술 취한 사람들도 싫어한다."

2월은 진중권의 마그리트 강연회, 그리고 시립미술관에 가서 마그리트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확정.


이번달에 언어교육원에서 3월개강프로그램 홍보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두번이나 했었다. 엊그제에

친한 후배랑 같이 경영대서
301동까지 걸어다니며 200장 가까운 포스터를 붙였는데, 그만 내 실수로 포스터

종이에 그녀석 손을 베어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종이에 손을 많이 베어본지라, 베일 때의 화끈함과 살꺼풀이

쫘악 갈라진 그 선명한 비주얼함, 그리고 그 따꼼따꼼한 느낌같은 것들이 그대로 내게 재현되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문제는,
그리고 나서 학교 곳곳에 우리가 붙인 포스터를 보거나, 그러한 빳빳한 종이로 된

포스터 종류를 볼 때마다 내 손에서 그런 감각이 되살아난다는 것.

종이베임공포증..이랄까. paper-scar phobia.(이런 단어가 있으려나 몰겠다)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오늘은 어떤 종이를 보던 그 느낌이 생생히 살아난다.

순서도 :

종이를 본다 -> 종이가 칼날처럼 내 손을 가르는 걸 상상한다 -> 화끈한 느낌이 손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

살이 열린다 -> 빨간피가 스물스물 배어나온다 -> 찌릿찌릿하게 아픈 느낌이 이제야 전해진다 -> 호기심에

상처를 잡고 양쪽으로 벌려본다 -> (휴지로 피를 닦고 나면) 안쪽의 하얀 부위가 보이는데 뼈가 보이는 거라고

내맘대로 생각해버린다 -> 겁먹는다 ->약처바르고 일주일동안 밴드감고 다닌다, 너넨 뼈본적 있냐고 자랑한다

-> 이 상처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가까운 이들이 안타까워하며 울부짖는 모습을 그리며 눈시울이

붉어진다..이상의 사고과정 도합 2초 어간.


흠..빨리 치유해야겠다. 이놈의 종이베임공포증. 일부러 종이 모서리에 슬슬슬 손가락을 비비대고 있다.

공포의 대상과 친숙해지는 것이 효과적일 거라는 나름의 처방.ㅋ

#1. 엊그제는 성대에서 진중권의 르네마그리트 강연을 들었다. 진중권이 애초 미학자였단 사실은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왕의남자'나 '타짜'에 나왔던 유해진과 똑같단 생각은 들을 때마다 하게 된다.

개인적으론, 내가 많이 겹친다고 생각하는 인물. 정치적인 입장이나 그걸 표현하는 방식, 그리고 말투도 조금.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체험'이라는 단어로, 일상성에 함몰된 사물을 복권시키는 마그리트의 예술을 해명하려

했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이미지를 고립시키거나, 중첩시키는 잡종화의 기법은 우리가 사물에 부여한 도구적,

실용적 의미를 벗겨내고자 하는 시도라는 해석.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메타적 해석과 비판적 재구성, 그건

내가 마그리트를 예술적 의미의 좌파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2. 그의 그림인 줄 모르고 좋아했던 몇개의 작품들이 있었다. 진중권의 강연회 다음날에는 세시간동안 그의

전시회에서 놀았다. 일단 한번 쭉 돌고, 빽빽한 인파를 피해 다시 한번 거닐면서 맘에 들었던 그림들만 다시 보기.
 
이런저런 작품들이 내 걸음을 잡고서 놔주지 않았지만 그다지 리뷰는 내키지 않으므로 생략. 그저..단지 나뭇잎과

비둘기를 합쳐놓은 그림들보다..'눈물의 맛'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훨씬 맘에 들었다. 이런 그림에다가, 송충이

하나가 커다란 나뭇잎-새(?)를 갉아먹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요새 주위에 하도 사랑 문제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와닿았다. 눈물의 맛은 누가 보고 있는 걸까. 새의 가슴을 갉아먹는 송충이? 가슴이 휑하니

갈아먹힌 새? 둘다? 누가 누구를 울게 했고, 누가 누구의 눈물을 맛보고 있는 걸까..라는. the flavour of tears.

오케이, 그림 찾았다.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이레네, 혹은 아이린(Irene)이라는 인물의 발굴.
 
첫째, '이레네 혹은 금지된 책'이란 작품. irene의 철자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계단이 그려져 있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둘째, '대화의 기술'이란 작품. 다소 해석하기 쉬운 듯한 이 그림에는, 그려진 글자가 숨어있다. 내가 보기엔

IRENE정도로 보이는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셋째, 마그리트가 찍은 무성영화를 보면 Irene이란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뭉실대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도슨트에게 질문했더니, 그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와이프였다나. 음..그래서 저 그림의 밑에는 남자 둘이

서 있는 건가. Irene이 저만큼 커보였을 수도, 그녀를 저 불분명한 글씨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혹은,

위태롭지만 아름답게 쌓아올려진 저 돌들처럼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걸 수도. 어쨌거나, 어쩐지 공식적인

사생활이 깔끔하다했다. 머..말년까지도 마그리트 부부는 무지 행복해 보이긴 했지만. 아, IRENE을 마그리트와

묶어보는 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



#4. 부모되긴 무지 힘들 거 같다. 평일이었고, 오전이었음에도, 인간들이-특히 학부형과 아이들이-파도처럼

철썩댔다. 애들한테 쉼없이 질문하거나 설명하거나..이건 뭘까, 저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열린 질문은 그래도

무언가 귀를 기울일 만한 아이의 대답을 유도하지만, 표현기법이 어떠니 저 사물은 무엇을 의미한다느니 등의

진부하고 꽉 막힌 설명은 참..힘들어 보였다. 열을 올리며 설명하는 어머니나, 지루하고 다리아파하는 아이나

서로 못할 짓 같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이번 전시회 관련해 뭔가 찾아봐도 마찬가지다. '검증받은' 작품들만

그림파일로 쉼없이 전파되고, 그에 대한 '검증받은' 감상 역시..들불처럼 번져나간다. 작년 피카소전때도, "난

뭔지 잘 모르겠고 뭐라 의견을 낼 만한 자신도 없지만, 내가 긁어온 글에 의하면 대단하다더라, 이그림이

대단하다더라"..거개가 이런 '안전한' 태도다. 흠...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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