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을 맞이하여 독립운동의 자취를 따르는 여행 (윤성의)-



* 2016. 8. 15(월)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디오 전국일주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19458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맞이한 한국의 제71주년 광복절입니다. 해마다 빠짐없이 전국 각지에서 경축식과 기념행사가 치뤄지는 날, 어쩌면 70년도 훨씬 전의 일이라 그저 감사한 빨간 날 휴일 하루로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를 되찾았다는 걸 광명을 되찾았다고 표현할 만큼, 그렇게 힘들게 우리 나라를 되찾아온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피와 땀 앞에 조금은 더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보내야 할 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같은 날은 그저 여느 휴일과 다름없이 보내기보다는 조금은 더 의미있는 곳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서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립운동의 자취를 따라보도록 하겠습니다.

독립운동 사적지들은 대체로 현재의 서울 종로구, 서대문구와 중구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 중 대부분은 비석 하나로만 그 흔적이 겨우 남아있거나, 새로 지어진 번듯한 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남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백년 가까운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는 오랜 사적들을 찾아 서울 시내를 돌아보려 합니다. 우선 독립정신의 뿌리를 세운 독립문부터 시작해서, 덕수궁 내의 중명전, 서대문형무소와 탑골공원, 잠시 강남으로 내려가 도산공원을 거쳐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에 이르는 길을 따르다보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간단하게나마 되짚어볼 수 있을 겁니다.

3호선 전철을 타고 독립문역에서 내리면 굉장히 이국적이면서도 오랜 세월의 향기가 느껴지는 건축물 하나를 보게 됩니다. 독립문이 바로 그것인데요, 조선시대 한양을 찾아오는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장소인 영은문과 모화관을 허물고 1897년 독립협회가 건립하였습니다. 독립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기금으로 만들어진 15m 높이의 문은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뜬 모습이라고 하는데, 당대의 천재라고 불렸던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설계했다고 하니 그 천재성에 놀라울 뿐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서재필과 이승만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독립협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토론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계급을 초월한 대중이 주체가 되는 근대사상을 도입하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찾을 곳은 비극의 현장, 중명전입니다. 19051117일 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대신들을 회유,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한 곳이죠. 중명전은 잘 아시는 덕수궁 내, 덕수궁 미술관 뒤에 있는 근대식 건물입니다만, 잘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곳인 것 같습니다. 중명전은 우리나라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중 하나로서, 1904년 덕수궁이 대화재로 인해 전소된 이후 황제의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이듬해인 1905년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고 이후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시련의 근대사를 간직한 현장이라는 점에서 한번 찾아볼 만한 곳입니다.

이렇게 국권을 상실한 대한민국을 위해 제한몸 아까워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들이 계셨죠. 그분들을 탄압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 중 하나가 바로 서대문형무소일 겁니다. 독립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이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등 국권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자, 이러한 저항을 종식시키고자 대규모의 근대식 감옥을 지었던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1910년 강제병합과 1919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수감자가 급격히 증가하자, 일제는 서대문감옥 기존 건물을 대대적으로 신축하여 수용인원 3,000여 명 규모의 대규모 감옥으로 운용하기에 이릅니다. 3.1운동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명이 수감된 것을 비롯해 의병장 허위와 유관순 열사, 강우규 의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가히 민족수난의 현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191931일 오후 2, 그날의 역사는 종로 탑골공원에 생생하게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학생대표가 공원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을 겁니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공원 밖으로 나섰고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면서 만세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3·1운동의 발화지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탑골공원 안에서는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네배 확대한 모사본을 볼 수 있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했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도 모셔져 있습니다. 탑골공원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하나, 본래 탑골공원은 종로 한가운데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내 근대식 공원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음악 연주장소로 지어졌으나, 백성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모여들면서 1913년부터 백성들도 이용할 수 있게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또 최근까지도 불탑사원을 의미하는 파고다 공원이라 불렸으나 탑이 있던 곳이라 하여 탑골이라 불리던 옛지명을 따 1991년부터 공식적인 명칭으로 탑골공원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쯤에서 잠시 옛 서울의 중심가를 벗어나 번화한 강남으로 내려와봅니다. 도산대로 옆 도산공원, 바로 도산 안창호기념관이 있는 곳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로, 독립협회, 신민회, 흥사단 등을 이끌며 활발하게 독립운동 활동을 하였던 분입니다. 민족 산업 육성과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해나갔던 민족의 지도자이자 실천가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정신과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안창호기념관에서는 안창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 그의 글과 서한, 연설물, 심지어 선생이 작사한 노래까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산공원은 1971년 기공되었고, 1973년 선생의 탄신 95주기를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의 선생 유해와 미국의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도산공원으로 이장, 합장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하니, 평소 아무생각없이 지나쳤던 도산공원의 이름부터 새삼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선생의 숙소이자 환국 후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입니다. 백범 김구선생이 서거할 때까지 3 7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아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반탁운동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는 등 감격스러운 해방 후 닥친 혼란 정국을 수습하려 노력했던, 그야말로 격동하는 현대사의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1949 6 26일 김구선생이 2층 집무실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는 당시 김구선생이 집무를 보던 공간은 물론, 당시 김구선생이 입고 있어서 총탄이 꿰뚫고 지나간 자국과 선혈이 낭자한 옷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다소 충격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대문역 옆 정동사거리에 위치한 경교장은 1930년대 금광으로 돈을 번 갑부가 지은 건물로, 1930년대의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기도 합니다. 8.15 광복 이후 그가 김구 선생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최근 원형대로 복원하여 2013년부터 전시관으로 개관해 일반인들을 맞이하고 있으니 꼭 한번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여전히 역사의 상처를 깊게 간직하고 있는 오랜 사적지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대도시 서울의 풍경 속에서도 용케도 사라지거나 잊혀지지 않고 곳곳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는 이런 역사적인 공간들, 우리에게 역사를 잊지 말라고,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도 없다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군산이란 곳은 항구에서 시작하는 도시의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쪽 끄트머리까지, 내처 걸어도 한두시간이면 관통하고도 남는

 

그런 조그마한 소도시다. 지방을 다니다보면 서울이란 데가 얼마나 큰 도시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는데, 군산 역시 그렇다.

 

그런 군산에서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곳에, 항구 가까운 곳에 있는 작지 않은 공원이 있다. 공원보다 더 눈에 띄던 건,

 

해방후 피난민들의 판잣촌이었던 '해망동'의 고불고불한 골목길과 그 둥그스름한 실루엣들.

 

 

잔설이 남아있던 월명공원 앞의 주택들. 그리고 썰렁한 겨울 날씨만큼이나 썰렁하게 헐벗은 겨울나무들.

 

 

공원이라곤 하지만 야트막한 산을 따라 오르내리는 길을 그대로 품고 있어서, 살짝 트레킹 코스라는 느낌이 강하다.

 

공원이 품고 있는 능선 한쪽 비탈, 그러니까 바다가 내려보이는 쪽에는 말 그대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네, '해망동'의

 

골목길이 고스란히 남아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궤적을 기록하고 있다.

 

 

공원의 한 모퉁이에는 전망대도 세워져 있고, 군산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아저씨의 동상도 서 있고.

 

새초롬한 댓잎이 소담히 그러쥐고 있는 새하얀 눈뭉치는 꽤나 묵직해보인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난롯불을 쬐며 담배를 태우며 맥주를 마시며 고스톱을 하고 계신 공원 안 매점에는

 

겨우내 어르신들의 온기를 책임질 까만 연탄이 집게에 코를 꿰고는 얌전하게 자리잡았다.

 

 

매점 옆에선 어디서 터져나온 수돗물인지 아니면 약숫물인지, 쉼없이 흘러넘치는 물줄기가 만든 자잘한 고드름이 주렁주렁.

 

해망동의 전경. 파노라마 사진을 블로그에 올려봐야 자동으로 크기가 설정되고 마니 좀 그렇다.

 

 

이렇게, 나무 전봇대가 서 있고, 가장자리가 쥐에 파먹힌 듯 얼기설기한 슬레이트 지붕이 지친 듯 퍼져버린 풍경.

 

볕 한줌 쬐이기 쉽지 않을 좁다란 골목길에 찍힌 몇개 되지 않는 발자국, 여전히 눈밟는 소리가 뽀드득, 그런다.

 

 

어느 슬레이트 처마를 따라 쭉쭉 뻗어나간 고드름들. 가늘고 길게 뻗은 고드름, 수정고드름 발을 만들기에 딱이겠다.

 

 

한국전쟁 때 스러져간 영혼들을 위한 위령탑. 오래 묵은 나무 그림자를 따라 잔설이 고집스레 남았다.

 

 

그리고 군산의 조형탑. 커다란 등대 같기도 하고, 꺼지지 않는 횃불을 형상화한 거 같기도 하고.

 

 

조그마한 조각공원도 품고 있었는데, 그 입구 언저리에서 날개를 활짝 편 채 손님을 맞는 반짝반짝 갈매기 한마리.

 

 

군산에도 '구불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었나 본데, 그렇게 따라 걷다가 저런 허름하지만 운치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숨도 고르고 귤도 까먹으며 하얀 입김 풍성하게 내뱉으면 좋겠다.

 

 

꾸역꾸역 이어지는 산들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 그렇게 다 걸어보려면 제법 시간도 오래 소요되겠기에

 

반절 정도만 돌아보는 걸로 만족했다. 꼭 다 돌아야 맛이 아니니, 쉬엄쉬엄 걸으며 얼음길에 이리 빼뚤 저리 빼뚤 했던 걸로

 

겨울철 산책의 묘미는 다 즐긴 걸로.

 

 

 

 

영화는 극중 영화감독지망생 영재, 그의 말대로 다소 "산만하고 수다스럽고 정신없이"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영화 제작을 위한 자금 걱정을 하다가 뜬금없이 '아~ 스크린쿼터', '아~ FTA'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나,

네그리의 '제국'을 읽으며 사회의식을 가진 문화활동을 하라던 고참이 눈앞의 부조리에 침묵하는 모습,

노동해방 조끼를 입은 노조원을 개잡듯 두드려잡는 꼰대의 광적인 소란까지. 아, 정신병력이 있는 친척이

있냐는 의사 질문에 대한 대답에 빵 터졌다. "사촌 형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어요." 정신없이 사방팔방을

손가락질하고 시니컬하게 뒤틀어놓는다. 온갖 사회문제에, 꼰대들의 고루함과, 기존 영화판에까지.


그런 감성과 지적질들이 맞고 틀렸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한다. 워낙 정신없이 사방으로 벌려진 이야기에다가

그의 이야기는 대개 맥락도 없고 지긋한 깊이도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수다스런 이야기는 외마디다.

외마디의 집합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가 문득 실어증에 걸리면서 비로소 핵심으로 가닿는다. 입닥치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여태 제대로 '말을 들었던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만들려면 우선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고 남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되짚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는 그와

함께 했던 그녀와의 관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결국 은하, 그녀를 해방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은하 3호, 4호로 바뀌어 나가고 동시에 자신도 영재 4호,

5호로 바뀌어 나가며 함께 해나가기에는 이미 그녀는 지쳐있었다. 이젠 자신이 없어, 이젠 마음이 없어.

그렇게 그는 홀로 영재 5호, 6호로 변전해 나간다. 그건 그가 여태 남의 말을 듣거나 감정을 헤아리기보다는

혼자 쉼없이 떠들어댄 대가이자, 그 '양질전환'의 임계점에 이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을지 모른다.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잘 하니까." 해방된 은하, 그리고 새로 함께 하는 은성 역시

똑같이 말해준다. 그가 애초 번다하고 수다스럽게, 마치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부유하는 온갖 말풍선들을

잘라붙인 듯한 화면과 메시지를 모자이크하듯 던져준 건 일종의 힌트 아닐까.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줄곧 머릿속에 쌓이기만 한 채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외마디 수다'로 소모되었던 그런 에너지를 조금 더 잘

가다듬어서, 그런 산만하고 정신없는 실타래로부터 하나하나 잘 정련된 '이야기', '대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마하고 조심스런 희망.


새로 함께 하는 은성이 듣지 못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혹은 '톰과 제리'같은 만화처럼,

말이 없어도 그 의미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영화를 감독은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고 나면 그의 정치적

지향과 감수성, 비판의식같은 것들도 좀더 효과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올 수 있을 거 같다. 이 영화에서

다뤄진 것만큼 유쾌하고 발랄한 방식은 고스란히 살리면 좋겠고. 그게 영화속 감독지망생에게 바라는 바이자,

(아마도) 윤성호 감독 본인이 바라는 바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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