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사자 #애비게이터커 #마티 #캣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고양이 #애묘 #집사필독서

오랫동안 cat-person을 자처해왔지만 문득문득 그런 의문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 앙증맞고 새침한 동물은 대체 뭐하는 동물이길래 사람 맘을 홀리는가. 딱히 쓸모도 없고 충성심도 없어 스크래치를 온사방에 내기 일쑤인 이 이기적인 동물이 어떻게 길과 거실을 온통 장악해버릴 만큼 번식하고 넘쳐나 버렸는가. 심지어 이제는 사진첩과 SNS피드를 정복해 버렸으니 말이다. 의문들은 으레 일종의 경외감과 숭배의 마음으로 찜찜하게 마침표를 찍곤 했었다.
 
이 책, 거실의 사자는 그런 고양이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애초 거대고양잇과 육식동물의 간식에 지나지 않았던 인류가 그들의 고기를 훔쳐먹고 차츰 도구로 무장하며 세력이 비등해지는 것에서 고양이의 가축화 아닌 가축화가 시작된다. 고양이는 개나 소와는 달리 가축화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특별한 동물이란다.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복속되지 않고 종적인 일관성을 유지한 채 골격과 체형을 지금까지 유지했다고. 개와 달리 종 자체가 고작 털색으로 구분되는 얄팍한 다양성을 가진 걸 감안하면 알 만하다.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양이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개와 달리 고도의 육식동물인 고양이는 인간에게 소처럼 편하고 안정적인 단백질원이 될 수도 없었고, 쥐를 잡는다는 오랜 통념과 달리 쉬운 먹이를 취하느라 쥐 박멸엔 큰 효과를 내지 못했고, 다양한 표정과 감정표현을 진화시킨 개와 달리 단독사냥꾼 고양이는 늘 새침한 표정으로 곁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번식기계 고양이는 폭발적인 번식속도와 인류 이동에 힘입어 전지구로 퍼져나갔다. 이집트에서 발원한 고양이는 신대륙과 남극까지 퍼지며 토착생물의 씨를 말리고 급기야 인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번성하는 동물이 되었다. 미국에서만 하루에도 길고양이 수만마리가 살처분되고 있지만 숫자는 줄어들 줄 모르고 중성화조치(TNR)는 애묘인과 인도주의자를 의식한 요식적인 눈가림일 뿐이란다.

이쯤되면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 만물의 영장이 맞나 다시 물어볼 때다. 고양이님들의 집사를 자처하는 인류는 먹이사슬의 맨꼭대기를 고양이에 양보한 건 아닐까. 소위 '양육 본능의 오발'을 유발할 만큼 귀엽고 애기같아지는 식으로 진화한 고양이의 매력 앞에 저항할 수 있는 인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책중에 소개된 '톡소플라스마'의 전인류적 감염으로 고양잇과 동물에 대한 저항력과 경계심이 제거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토록 귀여운 책표지를 만든 디자이너는 분명히 그런 환자임에 틀림없다.

고양이의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왜 스스로 고양이 앞에선 애기 어르듯 하며 집사를 자처하게 되는 건지 궁금한 사람에게 강추강추하고 싶은 책. 냐옹♡

#서푼짜리오페라 #브레히트 #희곡 #책스타그램

브레히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공산당에 가입한 적 없는 자칭 맑시스트란 점, 그리고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하며 고전적인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낯설게 하기'의 선구자란 점 정도. 희곡을 텍스트 자체로 읽는 건 상상하며 읽을 여지를 남기기 마련이지만, 합창과 대사와 방백이 뒤섞인 그의 희곡은 곳곳에서 제동을 걸어왔다.

서푼짜리오페라에서 그는 등장인물로 하여금 계속해서 초기 자본주의시기, 아마도 19세기 초반쯤을 냉소하는 대사를 내뱉도록 한다. 거지 왕초와 갱 두목간의 이야기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고, 또 누구와 대척하며 누가 자신들을 억압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그게 무엇이든, 우정이던 애정이던 전부 돈으로 환전되는 모습도 적나라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갱 두목이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끝나나 했던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왁스럽게 방향을 틀어버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할 수 밖에, 맥락없고 뜬금없는 사면령에 더해 귀족 작위라니. 피첨 부인과 피첨이 관객에게 직접 던지는 마지막 대사는 씁쓸하고 당황스러운 울림을 남긴다. "왕의 말탄 사신이 항상 온다면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손쉽고 평화로울 텐데."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끝은 비참하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는 주문이자 집요한 요청.

#문상 #김금희 #책스타그램

매듭. 매듭. 옮겨온 흔적. 꽁꽁 싸맨 채 이고지던 보퉁이를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과거, 라고 퉁쳐버리고 나선 다시 시작하는 현재란 거. 그런 매듭. 매듭진 삶.

#미국의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 #교유서가 #리처드호프스태터 #지식인 #책스타그램

책을 손에 쥐면서부터 이유모를 겸연쩍음이 계속됐다. 반지성주의란 단어가 활자화되어 다뤄진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우르르 몰려다니는 대중 따위 반지성적이라며 냉소했던 나 자신은 정작 뭔가 싶은 혼란스러움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대학 새내기시절 읽었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책이 던졌던 오래된 질문을 환기시킨다. 지성은 뭐고 지식인은 누구이며 뭘 하는 존재들인가. 관료나 작가가 지식인인가, 월급노예는 그럼 뭐지. 나이와 위치에 맞게 좀더 현실화된 고민이다. 그리고 왠지 낯간지럽고 겸연쩍은 고민.

지성과 지식인의 특별함을 말하는 건 이제 그런 간지러운 느낌인 시대다. 혹자는 X선비질하지 말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민주주의와 평등이 보편가치가 되었고, 지식과 정보는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데다가 교수와 철학자의 이야기는 온라인 상에서 댓글과 과히 다를 것 없는 무게감을 갖는다. 정치와 역사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특허나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닐진대 대체 저 '척'하는 먹물들은 왜 그걸 독점하려 드는가 말이다. 그리고 쉽고 짧게 말하면 될 걸 왜 괜히 어렵고 복잡하게 말이 길어지냐 말이다. 그냥 실용적이고 돈되는 이야기나 하지, 구름잡는 이야기 따위 일자리 한개라도 만드는데 보탬이 되나 말이다.

저자는 미국의 건국과 대서부시대 이래 1950년대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 시점까지 지식인들의 역할과 지식인사회-대중간의 긴장을 국면국면의 스냅샷처럼 찍어 세밀히 묘사한다. 미국의 특유한 '반지성주의'가 형성된 곳을 크게 종교와 정치, 사업과 교육에서 찾고 있다. 엄밀한 의례와 교의를 갖춘 종교와 대척하여 개인의 신비체험을 강조한 복음주의교파들, 지성보다 인성을 강조하며 귀족계급의 리더십을 타파한 평등주의적 정치이념, 고급문화의 정신적 가치 대신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삼은 교육과 사업에서의 실용주의자들. 미국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흐름을 '지성 vs 반지성'의 오랜 갈등사로 재구성한 스토리는 굉장히 설득력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실한 프레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유지하고 있는 지식인상이 정치와 문화, 체제에 대한 비판정신으로 표상되는 점이 여전히 난 맘에 든다.

그렇지만 몇가지 떠오르는 질문들을 남겨놓자면. 1.이게 정말 미국만의 상황이었을까. 유럽 이외의 모든 국가에 보편적인 양상은 아니고? 어쩌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유럽의 '지성주의'가 예외적인 건 아닐까 싶어서 하는 이야기다. 2.2000년대를 경과한 미국도 같은 프레임으로 읽을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 같은 표피적인 사건말고 예컨대 서부 IT기업들의 기업문화는 반지성주의와 어떻게 엮일까. 실용성과 기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반지성주의의 흐름에 있다고 봐야 할지. 3.AI 등의 논의는 인간과 지성이란 테마에 어떤 자극을 줄까. AI를 둘러싼 논의가 온통  정보처리에 집중되어 있어 지성 따위 잊혀진 건 아닐까 싶은데 그럼 안되는 거 아닌가.. 4.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따져본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미국의 그것과 별반 차이없이 종교와 정치, 비즈니스와 교육이 큰 요소인 건 변함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한국이 타파해야 할 귀족적/특권계급적인 지적공동체, 앙시앙레짐이 애초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쇼와육군 #글항아리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일본 #전쟁 #쇼와 #육군 #위안부 #박유하 #제국

저명한 르포르타주 작가이자 '자성사관'의 주창자인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그중에서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견인한 세력이 누구이며 어떤 관점과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천착한다. 그저 '일본이 나빴다'거나 도조히데키 개새기,라는 두루뭉술한 선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여전히 피가 흐르는 동시대사를 갈무리된 역사로 넘기기 위해서도 구체적이고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단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일본의 정치와 전쟁을 줄곧 주도해온 세력을 육군, 그중에서도 대본영 육군부(참모본부)의 엘리트 군관료집단이라 본다.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국민에 대한 통치권보다 우위를 점한 채 전혀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던 시대. 육군은 오로지 천황의 재가에 따라 움직이는 황군이라지만, 천황이 허울뿐인 총괄을 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변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육군 엘리트들은 군대조직의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자존 자위를 말하며, 그에 따른 안보선은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내지를 보전하기 위한 중국 침략, 중국을 보전하기 위한 러시아 견제 혹은 동남아 침략, 급기야 미국에 대한 침략으로. 그렇지만 빈약한 정보와 준비되지 않은 병참, 무엇보다 국가총동원체제로 치뤄지는 전쟁에서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정신력과 충성심만으로는 중과부적.

책을 덮으며, 그간 우리는 승자의 기록에 손쉽게 편승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해방이라는 혜택을 입은 이해당사자로서(얼마나 다행인가, 일본이 폭주하여 스스로 자멸했단 건!), 엄밀하고 냉정한 분석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1년말 진주만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 그리고 그전의 독이일 삼국동맹과 연합국간 다툼을 두고 단순히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나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은 뒤늦게 시장쟁탈전쟁에 가담한 국가 중의 하나였을 뿐.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과 자유민주의 원칙들은 기실 타국의 대외정책을 견제하고 자국의 통상이익을 수호하는 국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증거로 뒤늦게 제출되었지 않나.

책의 한계 하나, 저자는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데올로기가 허위적이고 가식적으로 쓰였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그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와 서양을 대비시키며, 식민지 지배자와 해방자를 대비시키는 구도는 너무 단순하고 나이브하지 않나. 게다가 동남아 전선에 버려진 수천의 무명용사들이 각국의 해방전쟁에 자의로 가담했음을 근거로 대동아공영권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건 비약이다. 그들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분석없는 점프의 결과는 보편적인 인류애나 가치관이 아닌, 인종과 지역을 근거로 한 대동아공영권 아이디어 자체가 복권될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두번째 한계를 굳이 더하자면, 천백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월간지에 연재된 원고를 근간으로 쓰여지다보니 압축적이지 못하다. 관련자에 대한 심층취재의 생생함을 더하려 했다 해도 겹치는 내용과 장면이 많아, 예컨대 위안부나 전후배상 문제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이 아쉽다. 전시는 평시와는 다른 가치관과 결정을 필요로 하며 또 당대는 지금과 다른 감각으로 위안부 정책 등이 수행되었다, 는 다소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들이 뭉뚱그려졌다. 저자 말대로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야 그에 따른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한 부분일 텐데, 1991년에 씌여진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후 그다지 계승되지 못한 듯 하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봐야겠다.


단지 착취나 억압의 피해자가 된다고 해서, 혹은 그에 저항한다고 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남성들도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것이 트렌드라곤 하지만, 페미니즘이 무엇이며 어떤 문제의식과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인지 차분한 이야기를 나누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저자는 명료하게 말한다. 페미니즘이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남성을 여자 아래로 끌어내리고 여성을 남자 위에 세워올리는 게 아니다. 남성과 여성간의 젠더 전쟁을 벌이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를 바꿔나간다는 건 그저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 남성'에 분노한다는 것 이상을 말함이다.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선 내면의 적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스스로 바뀌기 위한 진단과 공부가 필요한 거다. 자신과 타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 하나하나 철저히 되짚어 보아야 한다. 여성 내부에 체화된 가부장제적인 감수성과 인종적, 계급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태도를 유지하고서는 기득권에 편승중이라며 공격받는 남성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종, 계급, 민족 등 스스로가 놓인 지형에 대한 성찰과 고민없는 일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기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수혜자들인 남성과 얼마나 닮았던가. 강자와 약자가 그대로 온존하는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로라면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개인의 출세나 자기만족을 위한 하나의 발판처럼 쓰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비단 페미니즘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이런 '미러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성과 남성 모두, 페미니즘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풍경을 조심스레 따라가볼 필요가 있는 거다.


#모두를위한페미니즘 #페미니즘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코스모스 #칼세이건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기념비적인 과학교양서, 라는 말은 다소간의 경계를 요한다. 기념비에 먼지가 채 내려앉기도 전에 속속 밝혀지는 많은 오류와 논쟁중인 해석이 대중화를 위한 설탕옷을 입고 간명한 진실인양 행세하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자가 쓰는 비유와 전문영역이 아닌데서 끌어오는 배경지식은 자칫 오해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깐.

그런 점에서 1980년에 첫 출간된 이 고전 역시 비켜갈 수 없는 한계들은 엄존한다. 과학에는 전혀 전문성이 없는 내 눈에도 당장 보이는 건 DNA에 대한 과한 기대감이라거나, 우주공간에서의 핵 사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라거나, 무엇보다 그가 그렸던 수십년 후의 미래를 살고 있는 지금이 그의 상상과는 꽤나 다르다. 인간 이성을 신뢰하고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 공헌할 거라던 그의 신념 혹은 의지는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책의 주된 메시지는 여전히 엄청나게(!) 유효하다. 과학 자체와 과학의 결과물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하기'의 과정과 문제의식에 대해 바쳐진 그의 열정과 단호함이 인상적이다. 결론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 관건은 그 결과물이 왜 잘못 해석되었거나 예견되지 못했는지, 그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틀거리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과학 정신을 궁극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건 안으로는 인간 내부와 기원을 향하고 밖으로는 지구와 별과 우주로 향하지만, 결국 이는 만나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자 그대로 인간은 우주에서 생겨났으니까. 그런 통찰을 가로막았던 건 지상의 왕들과 신들과 권위자들이었다. 그렇게 기원전 깨인 자들의 탐구 대상이 되었던 우주가 수십세기동안 미신과 미망의 원천으로 전락하고 나서야 다시 인류는 우주에서 코스모스, 질서와 규칙을 찾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초판 내지 개정3판 정도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언젠가 천문대에서 별들을 바라보고 은하계 변방의 작은 티끌의 티끌에 불과한 지구를 실감했던 날의 소름이 오소소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보잘것 없는 곳에서 찰나를 살다가는 인류라니. 게다가 난 그 인류의 아주아주 작은 점 하나일 뿐이라니. 그건 일종의 신비체험이기도 했고, 내가 찾아낸 겸손해질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한 이유이기도 했던 것 같다.



#히틀러의비밀서재 #히틀러 #서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어떤 책을 읽어왔고 어떤 책을 소장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근거가 될까. 적어도 1만6천권의 장서를 개인소장했고, 그의 사상과 행동이 역사를 뒤흔든 사람이라면 그의 독서이력과 서재는 큰 힌트가 된다는데 이견은 없겠다. 사실 나는 그보다 자취가 작은 일반인, 한국같은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라거나 평범한 갑남을녀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애서가를 자처했고 늦은 밤까지 하루 한권의 책을 읽어내는 것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의 제3제국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철학자로 니체나 쇼펜하우어를 들먹인 것도 주효했을 거다. 지독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뒤범벅된 그의 이른바 민족사회주의는 그래서 더욱 파악하기 어려워보이는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대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어떻게 엮어내겠단 건지, 거기서 파생되는 논리적 귀결들이 서로 절그럭거리는 건 어떻게 해소하겠단 건지. 유대인은 왜 이렇게 늘 인류의 적이 되어 왔으며, 아리아인종이란 건 대체 어디서부터 순수하고 어디서부터 '오염'된 건지도. 등등, 끝이 없다.

그렇지만 과연 그가 그만큼의 소화력을 갖고 있었는가 하면, 아니었단 게 이 책의 일관된 메시지다. 그는 체계적인 독서를 한 적이 없고, 그의 사고는 독서와 함께 부딪히고 발전하고 변화한 게 아니었단 이야기다. 문제는 그의 독서법. 그는 자신의 근거없는 신념과 망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조각들을 찾는 방식의 독서를 했고, 개별 철학이 진지하게 구축하려 한 세계와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그런 아전인수식의 발췌독은 현란한 수사와 웅변에 필요한 벽돌은 제공할지언정 본인의 사고와 사상을 위한 자양분은 뽑아내지 못한단 이야기렸다.

이 대목을 아전인수식으로 다시 인용해보자면, 글쎄. 양보다 질이다. 몇권을 봤는지가 아니라, 개개의 책들이 어떤 맥락과 통찰력을 갖추고 본인에게 도전해왔는지가 중요하단 말이다. 교양을 진열하기 위한 지대넓얕식의 지식 소비가 갖는 위험성은, 혹은 장학퀴즈/일대백식의 퀴즈쇼에 특화된 암기지식이 갖는 위험성은 전혀 본인을 흔들지 못하는 그 무독한 지식에 있다. 백번을 흔들리고, 아프고 또 아파야 하는 건 청춘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개개인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지식이라면 결국 애서가이자 웅변가 '히틀러'가 되는 게 고작일 테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 독서 경험과 서재의 구비를 통해 히틀러의 뼈대가 될 신조와 인생을 짚어준다는 것. 사실 지금까지 과문한 바 히틀러의 삶과 그의 신념에 대해 제대로 짚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투쟁'을 읽어보는 건 고사하고 그가 외계인도 남장여자도 사이코패스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반인류적인 짓을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조각 하나 찾지 못했으니깐. 그렇지만 그의 사고퍼즐을 담당한 책들이 직조되면서, 그 역시 평범한, 혹은 다소 지적으로 부족하거나 성찰력이 부족한, 그래서 결단력만 가득한 멍청이였지 않을까 상상하고 이해해보게 만든다.


#우리는어떻게괴물이되어가는가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신자유주의인격의탄생

왜 이렇게 '또라이'가 많아진 걸까. 터무니없이 공격적이거나 패배적이고, 온갖 심리장애 증상들은 날로 늘어만 간다고 정신분석학자인 저자는 진단한다. 직장이나 학교의 왕따 문제는 글로벌해진지 오래고, 묻지마범죄에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범죄 등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전반적인 사회 풍조,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상식'화된 신념들이 문제인 건 아닐까. 그것들이 사회 안의 인간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윤리체계를 설정해준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건 아닐까. 저자가 책의 절반을 할애해 꽤나 설득력있게 그 연관성을 논하고 있듯이.

그 기반에서 신자유주의라는 포괄적인 이데올로기를 호명하며 저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건 경제 능력주의와 교육 능력주의의 결합이다. 호봉이나 직급이 아닌 능력에 따른 평가를 강조하는 시스템이 초기엔 효율적인 듯 보이나, 이내 숫자로 환산가능한 지표와 결과에만 매몰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 체제의 중기 이후를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시스템 효율화를 위한 능력주의는 기존의 노동윤리와 공동체윤리를 해체하고, 아무것도 그자리를 대체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깨어진 지점에서 남는 건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일 뿐인(Homo homini lupus est) 계약 이전의 정글상태. 그게 현재 사람들이 병든 이유이며, 신자유주의가 주조하는 인간형이라는 결론이다.

길게 써봤지만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진다. 책이 그렇다. 사회가 정체성과 윤리 체계를 형성한다는 부분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은 꽤나 매혹적인데, 이를 신자유주의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헛점들이랄까 말해지지 않은 부분들이 보이기 때문일 거다.

우선 신자유주의가 최악인 시스템이란 것에 대한 분석이나 합의가 부재하다. 모든 사회는 나름의 지배사조와 그로부터 주형된 정체성과 윤리체계가 있을 텐데, 신자유주의 하에서 유독 정체성과 윤리체계가 파괴되었다는 진단이 과해보이는 거다. 그래서 또라이가 양산된 현상이 현대 사회에 고유하거나 유별나다는 것에 대해 납득시키지 못했다.

둘째로는, 서유럽에 기반한 분석이 과연 기타 지역, 한국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의문이다. 예컨대 한국의 전통적인 노동윤리와 공동체윤리는 서유럽의 그것과 같았던가. 능력주의의 부작용은 공통될 수 있으나 그것이 타파한 과거의 온정주의적 평가는 한국과 서유럽이 같았을까. 등등.

마지막으로, 서유럽의 실업률이 높은 것에 대한 원인을 능력주의와 성공에 대한 환상으로 인한 미스매치로 치부하는 것, 젊은 세대에 대한 능력주의식 교육의 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올바른 분석일까.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교육(과 자기계발열풍)에 미친 영향에 한정하여 이야기를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젊은이는 자신을 미니 기업으로 보아야 하며, 경제적 의미 차원에서 지식과 능력이 처음이자 마지막 심급이다."같이 잘 정제된, 까기 좋은 언명을 모처럼 잘 골라놓았는데 말이다.



#예술과경제를움직이는다섯가지힘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비추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한다. 자라와 솥뚜껑이 닮았다는 관찰은 제법 참신하고 재기넘쳐보일 수 있지만, 본질이나 근본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란 의미로 새길 수도 있을 거다. 예술과 경제를 함께 얽어내는 이런 책이 인문학을 살짝 얹은 천박한 교양서나 잡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대체 예술과 경제를 비교하기 위한 잣대가 뭔지부터 살펴보자. 머릿말에서 저자는 그걸 '명쾌하게' 다섯가지로 집약한다. 투시력, 재정의력, 원형력, 생명력, 중력-반중력. 각각에 대한 자의적인 설명은 그렇다치고라도, 그 다섯가지가 왜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간다. 게다가 정의상 서로 충돌하거나 중첩되는 것들까지.

다소 참신하고 풍부한 시각으로 예술의 표피로부터 경제에 대한 메타포를 끌어낼 뿐인 책이다. 경제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이리저리 썰어내고 구부러뜨린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 다시금, 이런 류의 '통섭'이나 '지적 네트워킹'을 말하는 자들에 대해 실망하고 말았다.


 

 

작년 9월말, 처음으로 저작권 계약서를 써보았다. 그리고 3개월 동안 (낯간지럽게도) 집필 활동이랄까,

 

그간 찍었던 사진과 글들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했지만 사실상 거의 새로 쓰고 보정하는 작업이었던 듯.

 

 

 

그리고 드디어, 책이 나왔다!

 

온전히 내가 한 권을 다 채우지는 않은 책이기는 하다. 챕터 10개 중에 한부분, 1번 챕터만을 맡았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고, 또 이렇게 책으로 낼만큼 컨텐츠가 풍부한 다른 나라들도 많은데 동북아시아로 한정되었다는 것도

 

못내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 글과 사진들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책으로 세상에 나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나무에 미안한 책들이 범람하는 세상에 그래도 미안하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니, 혹여 서점에라도 가는 길이라면 한번 들척여 보시길!!

 

 

덕분에 더 큰 꿈이 생겼다. 이제 내 이름으로 된 온전한 책 한권을 내는 것. 이번에는 두번째이니만치 더욱더 노력해서

 

나무에 미안하지 않도록 분발하는 것. 그러고 보면 여태까지 공저/사진책 수록/좌담회 녹취록/사진 제공에 더하여

 

교열을 위한 독자모니터단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식으로 책에 이름 석자를 실어왔으니, 이제 자연스레 다음 순서로

 

넘어갈 때가 됐지 싶다.

 

1. 애니메이셔 사랑을 탐하다, 전윤경 지음 : 사진 제공 및 블로그 소개

          (갓 출간된 '예술서적'에 내 사진과 블로그 소개가 담겼어요.)

2. 2030크로스, 참여사회연구소 기획 : 좌담회 패널(30대, 직장인) 담당

          ('2030크로스', 손쉬운 세대론을 거부하는 세대론 이야기.)

3. 113인이 함께 만든 5대양 6대주 이야기, 대한항공 펴냄 : 사진 다수 수록

          (대한항공의 '5대양 6대주 여행이야기'에 수록된 사진들.)

4. 문학동네 다수의 책 : 독자모니터단 활동

          (신간 소설에 숨은 이름찾기.)

 

 

 

 

책 소개(알라딘) :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843005

 

 

 

Chapter 1 같은 듯 다른 섬세한 낯섦: Japan, China, Singapore, Hongkong, Macau


나만의 여행 포인트
제가 뭘 잘못했나요, 할아버지?
배 아프고 열이 나면 어떡할까요?
풍경 사진만 남길 수는 없잖아
화장실이든 변소든 중요하지 않아
낯선 음식 앞에서는 문답무용!
공짜에는 살짝 뻔뻔해져도 돼
현지인의 마음을 얻는 팁
무슨 선물이 좋을까요?
분실·도둑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어디로 가야 하죠? 그런데 여긴 어디죠?

 

 

이벤트!!

 

'삼거리에서 만나다'의 집필 취지는 영어를 못해도 여행 다니는데 전혀 문제 없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여행에서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던 경험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간단하게 적어주시고, 추가로 비밀댓글로 성명/전화번호/주소(우편번호 포함) 를 전달해주시면 5분을 선정하여 책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4. 5. 13. 

 

대한항공이 진행했던 여행사진 공모전, '5대양 6대주 여행이야기' 사진책을 제작하는데 무려 열일곱 점에 이르는

 

사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113명의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괜한 치기에 한번 쭉 찾아보니 아무래도 제일 많은

 

분량의 사진이 올라간 거 같다.

 

 

아쉬운 점은 대한항공에서 이벤트나 선물로 활용하려는 취지에서 만든 사진책이라 비매품이라는 것. 서점에 가도

 

이 책을 찾아볼 수는 없다고 하니 그게 좀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그간 찍었던 사진중에서 맘에 드는

 

것들을 이렇게 출판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도 대만족.

 

 

 

 

 

 

 

 

작년 말, 2030세대에 대한 선험적이고 편의적인 규정과 비난이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자성에 기반해서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가 기획한 2030세대와 4050세대 간의 이해를 도모한다는 좌담회가 있었다.

 

 

어쩌다보니 '30대 직장인' 대표 패널로 나서게 되었는데, 사실 세대론 따위는 (비록 그 편의성과 명료성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세대' 대신 '계층'이나 '계급'을 통한 사회 분석이 적절하다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말을 많이 하게 되어버려서 다른 패널분들께 민폐를 끼친 거 같기도 하고,

 

'세대론'이란 걸 깔고 이야기를 하려 했던 애초 취지를 상당부분 불식시켜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여튼, 사실 대선 이전에 출간되어 2030세대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바탕으로 범진보 야당세력을 정신차리게 하려던

 

이 책이..이제야 나오게 되어 제2의 박통 시대를 맞게 된 건 아닐지, 하는 생각도 해보고.

 

 

또 하나는, 대선 후 평가 국면에서 또다른 반편향으로 치닫던 5060세대 ㄱㄱㄲ론 같은 것도 결국 '세대론'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데, 그 역시 마찬가지로 뭐 하나 설명하지 못하는 동어반복에 가까운 주문일 뿐이란 생각이다.

 

 

단적으로, 대형차 타고 골프치러 다니는 60대 부부와 리어카 끌고 폐지줏으러 다니는 60대 부부가 하나로 묶일까.

 

해외어학연수 다니고 온갖 학원 등록해서 다니는 소위 있는 집 대학생과 등록금 하나 감당하기 힘든 없는 집 대학생이 같을까.

 

 

아래는 참여사회연구소에서 내보낸 보도자료, 그리고 본문 중 내가 발언했던 부분들 중 일부 캡쳐.

 

 * 보도자료, "참여사회연구소, 단행본《2030 크로스》출간, '불임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붙임의 세대론'" 中

1.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소장 :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3월 4일 단행본 ≪2030 크로스 ― 불임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붙임의 세대론≫(참여사회연구소 기획, 양정무‧윤홍식‧이상호‧이양수 엮음, 이매진 펴냄)를 출간했다. 이 책은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백수와 음악가, 의사와 시민단체 활동가, 결혼을 앞둔 20대와 비혼주의자, 동성애자 등 다양한 20, 30대와 참여사회연구소의 40, 50대 편집위원들이 필자로 참여해, 2030세대의 현실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세대 간 이해와 통합을 위한 단초를 고민한다.

 

 

2. 1부에서는 2030세대 24명이 직접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고, 2부에서는 이른바 사회분석 전문가들이 세대 담론을 되짚었으며, 3부에서는 청년과 기성세대가 모여 진행한 난상토론을 글로 담아냈다. 불안하고 불평등하며 불합리한 ‘불임’의 시대를 사느라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채 살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보수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끊임없이 ‘오해’를 받는 2030세대가 과연 어떻게 4050세대와 ‘크로스’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

 

5. 3부 ‘2030 크로스 4050’에는 20, 30대와 40, 50대의 난상 토론을 담았다. 2030과 4050이 한자리에 모여 왜 자꾸 2030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세대 구분의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지, 2030은 동질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세대를 넘어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6. 지금의 청년들은 정치에 관심도 없고 이기적이며 보수적인 집단이라고 비판받는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불임의 시대’에서 청년들에게만 진보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비겁하다. 따라서 4050세대는 어설픈 위로 대신 2030세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혐오하는지 제대로 보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자신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이젠 2030세대와 4050세대가 함께 불안을 잘라내고 희망을 붙이는 ‘붙임’의 세대론을 모색해볼 시간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 4점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김영사
 

돌려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 맘을 잡고 읽어본 정의란 무엇인가 나부랭.

 

베스트셀러니 어쩌구 하는 책들을 전혀 신뢰치 않기에 좀체 볼 마음이 동하지 않은 채 반년이 지난 셈이다.

 

마침 최근에 방한한 샌델이 스타 대접을 받으며 동시에 각종 찌라시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읽지 않은 채로

 

돌려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본심이다. 책을 읽기 전이나 읽고 나서나, 그런 양면의 거품은 불편하다.



간단한 소감. 이 책은 결국 '성찰'에 대한 책이다. 세사에 대해 신문 찌라시나 일상에 (잘난 척) 횡행하는 단언들과

 

자극적인 타이틀에 절어버린 입맛 앞에 대령하는 수십수백 페이지짜리 각주랄까. 세상사 간단하고 확실한 정답이나

 

규정은 없으며 난망한 이러저러한 면이 있다면서 각종 사례들을 사방으로 뒤채며 보여주고 있는, 그야말로 역시나 교과서다.

 

사고와 성찰이란 건 이런 베이스로 작동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학교 교양섭 기본 강의 수준.


 

예를 들어 최근 술마시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이른바 '주폭' 문제가 갑작스레 부각되고 있는데, 이를 보고 단순히

 

"술을 못 먹게 해야 돼"라거나 "술값을 올리면 돼"라는 처방을 제시하는 게 한국사회다. 심지어 '주폭' 문제를 진단한다는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이런 수준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는다. 샌델 식으로 말한다면 어떨까.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높은 스트레스와 불만지수, 저소득층 성인의 유일한 즐길거리, 전반적인 놀이문화의 부재를 살피고,

 

조금 다른 면으로는 '주폭'을 방지하기 위해 술을 막아야 할지 범죄가 발생한 후 일벌백계해야 할지 등등 한없이 뻗어간다.

 

 

그런 수많은 결들이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 뒤에 숨어 있다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따지기 위해선

 

이쪽과 저쪽에 서서 가능한 모든 측면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 사실 일종의 상식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영어 원제가

 

그러한 의미를 함축한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걸 생각하면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좀 '정의'라는 단어를

 

앞세웠다는 느낌이 있다. 그건 한국 사회가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있다는 걸 감지한 영리한 상술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사회의 또다른 상식은, '전봇대가 걸리적거리면 불도저를 동원해 깡그리 밀어버리'는 걸 추진력과 유능함으로

 

치부해 왔으니까. 내 판단으로는 성찰을 말하는 이 책 역시 베스트셀러로, 일종의 유행으로 소비해버리고는 저자에 대한 '팬질'을

 

시작해 버린 굉장한 나라다. ('팬질'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대상이 가진 입장과 의견에 대한 숙고 과정과 성찰이 생략되어 버린단

 

점에서 샌델의 메시지와 반하거나 최소한 무관하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화려하고 선정적인 답을 찾을 게 아니라 답찾는 과정,

 

자못 지루하고 고루하며 담백한 그런 입맛을 길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책이, 우리 사회에 어떤 유익함과 성찰, 자기 반성을 남겼고 남기고 있을까. 2010년 '올해의 책'에 선정되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지 이미 수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정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은 채 '부자'가

 

되겠다는 야만과 몰상식이 횡행한다.(심지어 자장면 한 그릇 먹는데도 맛있게 먹고 부자되란 말이 복음처럼 전파된다.) 샌델에 대한

 

팬질은 물론이고 나꼼수니 노무현이니 김연아니, 보다 오랜 대상으로는 박정희니 박근혜니 등등 팬질은 거침없이 하이킥중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단숨에 밀어붙이고 싶은 열망은 곳곳에서 파열하며 총선과 야권연대를 말아먹었고, 사람들은 '140자'로 표상되는

 

 SNS 시대에 걸맞는 짧고 자극적인 이야기에 열중하는 와중에, 성찰을 말하는 책에 대고 '정의'가 뭔지 말해달라며 개미떼처럼

 

달려들고 말았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례없이 대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나라의 이야기다. 암울한 세상이다.

 

 

 

 

 

 

 

 

불안 - 8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은행나무

문득 불안해질 때가 있다. 내가 뭔가 길을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진 건 아닐까.

지금 살고 있는 게 제대로 사는 거 맞는 건가. 남들은 다들 잘 살고 있는 거 같은데 난 왜 아직도 이런 걸까. 왜 나만.

남들보다 뒤쳐지는 건 아닐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너무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건 아닐까. 뻔한 삶이 되는 건 아닌가.

흔히들 하는 말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혼란감에 젖어들면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일종의 발작과도 같다. 아무 문제없는 듯이 평온하게 혹은 무탈하게 지나던 일상에 '불안'이라는 돌멩이가 하나

던져지고 나면 그 파장은 삽시간에 전신을 훑고 오르내리며 점점 큰 울림을 일으킨다. 강변 테크노마트를 흔들었다던

공진현상의 생체적 발현인지도 모른다. 앙상하게 헐벗은 겨울나무가 문득 불어온 칼바람을 온몸으로 버티며 그저

바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듯, 그렇게 불안감과 뒤이은 자학, 자괴감, 패닉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불안의 대부분은, 남들과의 비교에서 온다. 알랭 드 보통은 그걸 '지위'에 대한 불안이라 말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그렇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피고, 남들이 어떤 가치를 좇아 달리는지 살피고, 남들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

살피면서, 그들을 따라 어깨 나란히 달리며 같은 것을 좇고 심지어 보다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너무도 당연해서 다들

의식조차 않고 '평범한', '주류적인' 길을 따라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다가, 문득 불안해지는 거다.


남들보다 더 갖고 더 사랑/존중받고 싶다, 라는 마음.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질리 없는 그 만족감,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가 눈앞에 나타나는 무한한 쳇바퀴 위를 달리는 것 자체도 지치는 일인데, 자기보다 앞서는 남들이 보이는 것은

더더욱 힘빠지고 좌절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이러다가 쳇바퀴 위에서 아예 탈락하고 낙오자, 패배자, 루저 낙인이

찍힌 채 게임 오버되는 건 아닐까 싶어 가슴이 타들어간다. 더구나 실체도 불분명한 '능력'으로 열세우는 현대사회에선.


특히나 한국에서는 더더욱 심해지는 거 같다. 중고등학교부터 성적으로 줄세워지고, 직장에 들어가면 연봉으로

줄세워지며, 이후엔 결혼이니 사는 곳이니 집 따위로 다시 줄세워지는 끝없는 비교의 연속. 천박하고 단순한 잣대일 수도

있겠지만, 알랭 드 보통이 말하듯,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창궐한 이 시대에는 남들보다 앞서고 성공하는 건

도덕적으로도 올바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선전되고 있는 거다. 그 결과 대부분의 경우 불안에 불안이 더해진다.


알랭 드 보통이라고 뾰족한 답을 갖고 있진 않다. 다만 그 불안감을 만들어내는 음습하고 악의적인 기반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는 성공과 실패, 명예와 수치의 기준선을 바꾸고 개념을 흔들어보려 한다. 그런 작업들은

사실 철학과 예술,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뿌리깊게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것들이기도 하다. 주류적인 가치관과

위계감각에 기대지 않고, 나름의 가치와 철학을 갖고 중심을 세워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이미 걸었던 길을 따르는 과정.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이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능력이 있으면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 마련이라는 '능력주의' 아닐까. 한국의 경우 IMF 더욱 노골적으로 재물과 부유함만을 쫓아 달리는

물신주의는 굉장히 단순하고 명료한 기준 하나를 제시한다. '스펙'이라 이야기되는, 연봉과 가격으로 말해지는 화폐숫자들.

그렇지만 다들 체감하듯 그 '능력'이란 건 대개의 경우 우연적이고 필연적이다. 운, 그리고 환경과 조건의 영향이다.


여기가 자기최면적인 자기계발서가 파고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이 멈춘 지점이기도 하다. 별 생각없이도

남들만 따라가면 그뿐인 편하고 자연스러운 길, 물론 그길을 가다보면 만성적으로 불만에 휩싸이고 주기적인 공황상태에

빠질 지언정 그로부터 벗어나 곁길을 트고, 남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러난 행복을 찾는 길이란 건

말이야 쉽지, 참 난감하고 막막한 일이다. 종교적인 메시지나 자기최면을 거는 진통제 같은 메시지 말고, 뭐 없을까.


글쎄. 책장을 넘기다 드문드문 맘에 와닿는 구절들은 있었다.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던 건,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것들이 어느 시점엔가 나 혼자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불안감, 조바심에 대한 것들이었단 사실. 알고 보니 나 혼자만

갖고 있던 불안과 열패감이 아니라 모두에게 잠재해 있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와 같이 그 쳇바퀴에서 내려서서 다른 길과 가치를 모색할 준비가 되었거나 모색하고 있다는 것.


어쨌거나, 불안과 싸우는 건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불안을 지워내고 걷어낼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불안감의 정도를 통제하고 그에 잠식되지 않을 만큼 스스로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는 게 관건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와중에 필요한 건, 주어진 잣대와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의 기준과 가치를 발견하고 세워내려는

노력,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함께 일구어갈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 계속해서 교류하는 것 아닐까.



* 아래는 책에서 발췌한 몇몇 구절들.


"세상의 선은 역사적으로 거창하지 않은 행동들 덕분에 확장되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나나 더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반은 드러나지 않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덕이다."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즉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연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해본다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창피해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힘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어떤 것에 계속 눈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자꾸 보게 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임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정상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직업에 포함된 많은 것들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격분한다. 그들이 냉혹하게 유혹의 책략을 썼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유혹을 당할 만큼 허영심이 컸다는 사실에도 화가 난다...아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 것인지 생각해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낡은 돌들을 보다 보면 성취에 대한, 또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들, 우리를 기리는 기념비나 행렬이 없다 한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돈과 실용적인 직업이 영혼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또는 스탕달의 말을 빌리자면 "부드러운 감각"을 향유하는 능력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보헤미아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월든'의 소로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그래서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살았다."



부의 미래 - 2점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청림출판

(2008년 입사 후 연수 과제로 제출한 글.)

시대를 막론하고 다들 자신이 살던 시대야말로 격동기이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 시대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시대 역시 초강대국인 미국 중심의 일극 세계질서가 공고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순간 근대 국가 중심의 세계질서가 흔들리며 국경의 개념, 시간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다. 누구는 이를 미국 제국주의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자본의 거침없는 확장이라 보기도 하며, 혹은 전례없는 수준으로 인간 문명이 비약해 나가는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책 『부의 미래』의 저자 앨빈 토플러는 이러한 비관과 낙관 모두가 얼마나 취약한 현실인식에 기대고 있는지, 또한 지금의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에 대해 심도있는 성찰을 시도한다.


앨빈 토플러에 따르면 기존의 경제학이 갖고 있는 기계론적이고 몰역사적인 전제들에 대한 중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물질로 이루어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지식이 그 가치의 중심을 이루는 지식상품들이 시장의 태반을 차지하고 비화폐경제가 갈수록 중요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경제이론에 기대어 사회 변화를 탐구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새로운 심층 기반, 즉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공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탐지하여 새로운 가설과 이론을 세워나가는 것이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상용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인해 시간이라는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더이상 범용 인재를 생산하기 위한 규격화된 교육과 일반화된 커리큘럼으로는 지식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할 수 없으며, 포드식 공장제에 적응시키기 위한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체화시키는 것 역시 창의력과 개인의 영감에 기대야 할 미래 사회에서는 지양되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가 제시한 큰 문제 중 하나인 시간의 비동시성으로 인한 사회 발전의 지체 현상은 사실 한국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이다. 농업에 기반한 전근대적인 시간개념, 산업화시대를 특징짓는 근대적 시간개념, 그리고 일부 첨단산업을 기반으로 한 탈근대적인 자율적 시간개념이 혼재되어 있으면서, 토플러가 말한대로 특히 관료 집단이나 구체제 세력이 사회 전반의 발전을 가로막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한 혁신적인 집단이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려 할 때, 이를 가로막는 구태에 젖은 집단들의 방해를 좀더 제어할 수 있다면 비동시적인 시간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 소모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공간상의 변화 역시 한국에서 여실히 감지된다. 한국이라는 일개 국가가 통제하기 쉽지 않은 가상 공간이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고, 황사나 우주 산업 등 국가 차원에서만 접근할 수 없는 수많은 이슈들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어로 된 사이트가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의 히트 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은 이러한 공간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다만 북한 사이트를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거나 영어병용 사이트가 많지 않아, 실제로 타국과의 자유로운 소통은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지만 이는 향후 개선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최근에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선정사업을 통해 우주산업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인 바 있지만, 이 역시 외국의 발사대, 선진적인 교육 기술, 우주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여러 국제적 합의들에 근거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토플러의 말대로 이 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전기는 무엇보다 우주를 인간이 경제적으로 개척하기 위한 단초를 열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역시 이러한 대오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토플러가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은 바로 지식 자체가 갖고 있는 혁신성이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한 부를 가능케 했던 것은 바로 과학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회의를 지속시키며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과학에 근거한 지식만이 이후 우리가 계속 발전하기 위한 원동력인 것이다. 프로슈머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유행하고 있지만, 생산하는 소비자라는 프로슈머는 과거의 상품경제가 지식 중심의 경제로 진보하는 하나의 중대한 지표로 이해하는 토플러의 깊은 통찰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며 자본 경제에 더 많은 공짜 점심(free lunch)를 제공하고 있는 프로슈밍은,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기존 관료와 구체제를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측이 전부 옳으리라 생각지는 않으며, 근본적으로 경제 기반이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석 연료에 기반한 지금의 경제가 분명히 난관에 봉착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과, 지식재를 다루는데 기존 경제학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압축적인 성장 경로와 그로 인해 누적된 사회적 피로를 감안했을 때,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만난 책 한 권, 책을 슬쩍 열어보니 미스코리아 머리를 한 어느 여자가 보인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 모르겠지만, 93년 11월에 나온 책이니만치 그 이전에 찍은 사진일텐데 지금이나 그때나

별 차이가 없다. 표정이 어색한 건 비슷하려나.

93년까지 썼던 일기들을 모아 발간했다는 책인데, 다시 한번 실감한다. 말이나 글을 그럴 듯하게 잘하기는 참 쉽다.

문제는 그런 번드르르하고 군자연한 말들이 아니라, 꾸준히 관찰하고 지켜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행동의 격.

93년 11월 1일 발간된 박근혜의 일기 모음집,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눈에 띄인 책, 사실 눈에 뜨이게 전면에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상실의 시대니 문화유산답사기가 저렇게 빼곡히

꽂혀있어 찾기가 쉽지 않은 것에 비하면, 책방에서도 공주 대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이 참 자극적이다 싶었는데-자기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지 못해 아쉽다는 함의 속에 약간의

선민의식과 잘난척하는 '공주' 냄새가 난다면 과한 걸까-아니나 다를까, 몇년 후 이 일기 모음집은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라는 이름으로 증보된다. 그 이름은 근데 더 잘못 지었단 느낌을 지울 길 없다. 고난과 진실이라.


기념삼아 사둘까 하다가 말고서는 집에 와서 찾아보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이 책은 이미 오래전 절판된 책.

헌책방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그렇지만 다소 찝찝한 책이다.

당신이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생색내기 식 김치담기 쑈를 하면서 스티로폼 박스에 그대로

김치를 담지는 않았겠지요. 아이들한테 환경 호르몬을 잔뜩 주입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사진은 연합뉴스)




소금꽃나무 - 10점
김진숙 지음/후마니타스

3차에 걸친 희망버스, 연인원 수만명의 자발적인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앞을 찾았다.

이제 조남호 회장에 대한 청문회가 내일(18일)에 있을 예정이고, 진보 정당들 이외에 민주당까지도 이 문제를

적극 이슈화하며 조남호 회장의 불법적인 정리해고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겠다며 벼르고 있으니, 어쩌면

조금은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렇게 한진중공업 사태가 조금이나마 전향적인 방향으로 해결되리라는 희망이 보이게 된 건, 거의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다. 반년이 넘도록 영도조선소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중인 그녀, 김진숙 민노총 지도위원.

그녀 스스로 한진중공업의 전신 대한조선공사의 불법 정리해고 희생자인 채 아직도 복직되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로서, 오십이 훌쩍 넘은 '중늙은이 아줌마'가 죽을 각오로 크레인 위에서 버텼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떤 삶이었기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에, 이미 두명이나 죽어내려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갈 각오를 했던 걸까. 한진중공업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그녀가

무슨 요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그녀의 이름 석자, 김진숙을 알고 감동하고 감탄하고 더러는

욕하는 시대, 그녀를 편들던 아니던 그녀를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닐까.


조금씩 그런 우려들이 나오는 거 같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의 외침 대신

그녀에만 집중하는 지금의 모습들이 꼭 달 대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 같다는 우려다. 그렇지만

그녀의 안부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그녀가 지금 목숨을 걸고 그곳에 있는 이유로 관심이 옮아가는 건

생각보다 쉬울지 모른다. 더구나 그녀 김진숙이 지난 시간 써온 글, 뱉은 말들과 행동의 연장선 상에서

마치 나침반의 자침처럼 한 곳만을 흔들림없이 향하고 있다면.


이 책, '소금꽃나무'를 낼 때 김진숙 그녀는 먼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따위 게 책으로 만들어낼 만큼

가치가 있는 걸까, 그따위 걸 책으로 만들어 내자고 나무를 베어내도 되는 걸까." 그리고 펴낸 책 앞머리에

이렇게 글을 박아 넣었다.

"소금꽃나무를 읽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살았냐고 묻곤 한다.
난 내 삶을 살았던 것 뿐이다. 누구에게든 삶이 있듯 내 삶은 그랬던 것 뿐이다.
내가 지닌 이력 중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채 쉰둘.
살아 내려간다면 단 한가지만큼은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꿈꾸며
85호 크레인, 169일을 맞는다.
_2011년 6월 23일 김진숙."


그녀 김진숙의 지난 생을 기록하고, 그녀가 만난 노동자들의 삶과 고통을 기록하고, 그렇게 2011년

한국 사회로 치달아온 야만의 세월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망이 담긴 책, '소금꽃나무'를 읽으며 줄곧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비정규직 문제나 소규모 사업장 노조 문제와 같은 문제를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싸워온 그 대담하고도 치열한 순수함 앞에서, 열정 앞에서, 부끄러웠다.


그 눈물은 김진숙 때문이라기보단, 그녀가 온몸으로 가리키고 있는 이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란 게

더 맞을 거 같다. 1970년 전태일이 스스로를 불태웠던 시대로부터 멀리 나아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기껏 비정규직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짐을 전가시킨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건 너무나도 아픈 일이다.

김진숙 그녀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기엔 그런 손가락조차 귀한 시대, 'Golden Age'

도금시대를 살고 있는지라 그녀의 존재 자체, 목소리와 몸짓 모두를 아끼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렇게 달을 보기 전, 김진숙이라는 손가락 앞에서조차 이토록 부끄럽고 아파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랄까, 세례식이 필요한 거 아닐까. 이런 야만과 부조리 앞에서 이토록 무감각한 우리라면.

그게 내가 이 책을 모든 사람에게 떠맡기듯 기어이 강권하고 싶은 이유다.



* 아래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2003년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며 바친 추모사 동영상.

 
"1970년대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죽는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2003년 김주익 열사 추모사)



* 그리고 '소금꽃나무'를 굳이 사서 보진 않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부분 발췌.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 싸워서 얻은 해방감을

단 하루도 누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목숨까지 거는 이들은 무모해

보인다. 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




"동지 여러분. 저는 우리가 참 멀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뒤돌아보니 우리가 떠나온 자리에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제는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날 되돌아

보니 우리가 벗어던졌다고 믿었던 사슬이 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돼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2006년 부산지하철 고용승계쟁취 결의대회,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나는 교향악단을 구경한 적도 없고 오케스트라 같은 건 지나가다라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만약 단

한 번만이라도 여러분들의 연주를 듣고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거다. 한 달에 70만원을 받고 그마저도 잘릴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그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누가 그 음악을 듣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모멸감을 느끼면서 만들어진

음악이 도대체 누구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겠는가." (마산 예술 노조 복직 투쟁)



"요즘 십대들이 무섭다지만 그때 십대들이 더 무서웠다. 먹고사는 일에 목숨 걸었던 그 무서운 십대들이

결국은 독재를 유지시켰던 균주였고 지금도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인권이나 환경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건 삽시간에 나발이 되고 마니까. 먹고살기 위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넘어간 일이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으나 내가 무슨 힘이 있냐는 체념과 타협한 일은 오죽이나 많았겠는가."



"정문 앞에서 끌려 나가던 동료들을 창문 너머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무수한 자괴감에 대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료들을 밖에 둔 채 들어가서는 수많은 시간을 죽고 싶은 채 살아 있어야 했던

열패감에 대해, 그리고 비겁이라는 감옥을 제 손으로 짓고 들어가 10년(전교조가 합법화되기까지)을

장기수로 복역해야 했던 그들이 그 감옥에서 이제는 출감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하여 따뜻한 밥상 앞에서 더 이상 목 메지 않기를,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시위 장면을 보더라도

더 이상 채널을 돌리지 않기를, 빨래를 걷다 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기를, 아이들에게

정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도리 같은 단어를 말할 때, 공연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더 이상은 없기를..."



"노무현 정권의 필살기는 투쟁이나 구속이나 수색 같은 특수하고도 전문적인 분야들을 좀 더 대중화해

일반인들도 누구나 향유할 수 있도록 한 점과 음지에서 했던 일들을 양지에서 내놓고 하게 한 게 아닐까.

이게 절차적 민주주의다. 저 시절엔 기가 질려 "동네 사람들아!"를 못했다면, 이 시절엔 절차대로 한

일이니 아무리 불러도 동네 사람들이 안 오는 거다."



"사람들은 이제 내가 땟국이 빠져서 얼굴이 허여멀건 게 도시 티가 난다고 했지만, 나는 햇빛을 못 봐서

허옇게 뜬 얼굴을 볼 때마다 설움이 왈칵 솟고는 했다. 회사 옥상에 높다랗게 붙어 있던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큰 간판이 언젠가 '수출강국'으로 바뀌어도 전혀 강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그 간판 아래

짓눌린 채 배추 잎사귀처럼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 책(전태일 평전)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똥구덩이 같은 현장에서 혼자 비단신을 신고 내내 똥을

탈탈 털고 있었던 넌 뭐냐. 시집을 끼고 다니며 니체도 모르는 아저씨들을 비웃으며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던 넌 누구냐. '노동자'란 말에 멸시를 보내며 '회사원'이라는 자만의

웃음을 질질 흘리던 넌 도대체..."



"'자네 살었을 때 열심히 살게나. 죽어서 천당이 뭔 필요냐. 현실에서 앗싸리 끝내 불제. 천당에도 사장이
 
있다먼 아무리 좋아도 난 거그 안 갈라네. 왜? 그거 가 봐야 읎는 사람은 또 노동자로 살아야헝께. 사실
 
하난님도 썩은 디를 포크레인으로 파다파다 못 파서 도로 덮어버린 디가 우리나란디 그 냥반 붙잡고

나가 먼 야글 더 허간디.' 그라먼 우리 마누라가 '당신은 하난님헌티도 팍 찍힌 사람잉께 잘혀 보씨요'
 
그러면서 웃어 불제라." (대우조선 노동조합 상집 인터뷰 취재 중)



"내 조카는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다. 다만 민주노총이 어떤 합의를 하면, 자기는

알지도 못하는 그 내용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일 뿐이다...

나는 내가 민주노총이라는 게 참 자랑스러웠다. 운동한답시고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면서도,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다. 늙은 아버지까지 안기부에 경찰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면서도,

그까짓 상처쯤이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걸로 다 덮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았는데, 점점 안 좋아지는 세상. 지 잘난 맛에 살았던 그 잘나 빠진 이모가 조카를

파견 노동자로 만들어 버린, 아......나는 20년동안 뭘 한 걸까. 내가 20년동안 한 건 뭐였을까.

일요일도 없고, 재고 조사하는 날은 밤도 없는 조카 앞에서 나는 이모가 열심히 싸워서 민주노총

사업장은 대부분 주40시간이 됐다고 자랑할 수가 없었다. 상여금도 없고 체력 단련비도 없고 효도

수당도 없고 하다못해 월차도 없는 조카의 1,000만원도 안 되는 연봉 앞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심히 싸워서 그들의 성과금이 너의 1년 연봉을 넘는다는 자랑도 할 수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투쟁이건 산하노조의 투쟁이건 비난이 난무할 때, 조중동만 탓하기엔 참 옹색해져 버렸다."



"제일은행 노동자들이 잘릴 때 주택은행 노동자들은 시금치를 무치거나 아이의 장난감을 고르는 일이

더 중요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잘릴 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대부분 잔업을 하거나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잘릴 때 남성 노동자들은 이제 시집이나 가라고 농담처럼

말했고 형님들이 잘릴 때 동생들은 '헹님도 인자 낚시도 실컷 댕기고 땡잡았네.'라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으면서 했던 똑같은 말을 울면서 듣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백만의 머리에 총알이 박혔지만 아무도 자기가 그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이 짜릿한

러시안룰렛게임. 이미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지만 아직도 내가 비정규직이 되리라는 걸

예상하지 않는 이제는 자본과 노동의 전선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전선이 돼 버린 이 스릴

넘치는 치킨 게임."



"우리 사회에는 학번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고

나는 믿는다. 학교를 떠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아마 학번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학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빛나는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 한 번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대에서 이루지 못한 학번의 꿈을 자식 대에서라도 이루기

위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무모한 돌진. 그 무모함이 만들어 내는 온갖 왜곡되고 기형적인 현상과 구조들.

그건 우리가 바꿔야 할 모순의 가장 밑바탕이기도 하다."



"담당 검사님은 그러시더군요. 병원에서 폭력을 휘둘렀다면 사진을 찍어놨다고 고발을 하지 그랬냐고.

물론 노조 측에서도 사진을 찍었지요. 역시 카메라는 빼앗겨서 박살이 났구요. 그들 숫자가 훨씬 많았고

힘도 훨씬 셌으니까요. 그중 심하게 다친 조합원들 열 명이 전치 10일에서 4주까지 진단서를 첨부해

폭력을 주도했던 병원 측 관리자 스물한 명을 고발도 했구요.


그러나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더군요. 노조 측에선 열세 명이 사법 처리당하고 세 명이

구속되었는데도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되는 게 아니냐며 흥분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겪은 법은 늘 그래 왔으니까요. 그걸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생생하게.

그래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라는 검사님의 충고도, 목적이 아무리 옳아도 불법에 대해선 처벌할 수

밖에 없다는 판사님의 지엄하신 판결에도 얼른 고개가 끄덕여지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한 항소이유서를 쓰는 거구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래도 할 수 없고 대답 없는 메아리래도 어쩌겠습니까. 힘이 약해 만날 당하고

깨지기만 하는 약자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그렇게라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조합원 대부분이 스물을 갓 넘은 아가씨들인 일흔여 명의 작은 노동조합. 병원 측의 잔인하고도 악랄한
 
탄압과 일상적인 폭력을 그들만의 힘으론 도저히 막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들과 함께
 
했고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 노조가 지켜졌다면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거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가슴이 뿌듯합니다.


이 땅 어느 구석에선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가 외면한다면 도대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

(1995년 동래봉생병원 노조파업과 관련, 3자개입, 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었을 때의 항소이유서 중)



* 그리고 그녀, 김진숙의 크레인 위 유일한 소통의 끈 트윗.(@JINSUK_85)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주익 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 씨가 살아생전 나지막이 봤던 세상의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분노하라 - 10점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돌베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책읽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도 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 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런 '꼰대'가 좋은 게 좋다느니, 철 좀 들으라느니 따위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하라'는 거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우리는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책들은 읽고 나면 숙성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사방팔방으로 울림이 번져나가는 책,

그게 소설이던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되었던, 들불처럼 사방으로 번질 수 있는 의미의 갈래들을

하나씩 새겨보고, 그게 어떤 의미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되짚어보는 과정은 읽는 것 자체와는

또다른 큰 쾌감을 준다. 그리고 그런 책들에서 자신이 애써 고삐를 추스려 잡아 자신의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 중의 아주 조금에 불과하다. 뭐, 고작해야 학사 나부랭이인 내 수준에서

그렇단 얘기다.


민중에서 시민으로 - 10점
최장집 지음/돌베개

최장집 교수의 이 책, 그의 다른 책들처럼 굉장한 책이다. 나는 그저, 내 나름의 맥락에서 그 중

일부를 떼어서 조금이나마 사고를 자극하고 정렬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리뷰'라기보다는 일종의 발제문.


'갈등'과 '분열'을 조장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전제로 한다. 특정 주제에 대해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두 개의 집단이 맞서고, 두 집단은

모종의 타협이나 정치적 과정을 거쳐 적절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그런 무조건적인 통합의 메시지는 국가주의나 집단주의를 초혼할 뿐이다. 시끄러울 수 밖에

없다. 국회는 안건을 갖고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게 당연하고, 시민들 역시 떠들어댈 광장이 필요하며,

시스템이 안배한 통로 속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괴로운 사람은 초법적 수단조차 동원해야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갈등선'이 비로소 그어지는 거다.


갈등을 부정하고 묵살하는 사회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런 '갈등'에 대해 그 존재부터 부정하고, 묵살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시스템 내의 '갈등

발견&해소 프로그램'은 협소하고 취약하기 짝이 없어서, 모든 갈등은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환된다. 결국 사교육비 많이 부담하라는 교육문제, 애기 외롭지 않게 키우라는 출산율문제, 손 많이 씻고

쇠고기는 알아서 골라 먹으라는 보건문제, 우유 많이 먹고 성형외과 찾아가라는 젠더문제, 눈높이를 낮추고

기술을 배우라는 취업문제. 사실은 사회 문제, 즉 사회적인 갈등선을 빚어내는 문제들이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소하도록 종용되고 있다.


복불복 마인드로 순치되어 버린 파편화된 개인

그리고 조용한 사회. 누군가 '노'라고 이야기하면-갈등을 말하려 하면-사회 불만세력, 반정부세력, 심지어는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를 조장하는 매국노로까지 매도당한다. 지금의 비정규직 정책에 반대한다, 한미FTA에

반대한다, 재개발 정책에 반대한다, 등등 이어지는 '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무조건적인

사회 통합의 강요, 국가발전 한길로 매진해야 할 시기에 힘 빼지 말자는 국가주의적 교시였다. '노'라고 말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스템적 안배나 기제가 없는 상황에서 번번이 '불법'으로 밀려나는 최악의 상황에선, 1박2일식

'복불복 마인드', '나만 아니면 돼'라는 파편화된 개인들은 그러한 무서운 국가 앞에 무력할 뿐이다.


똘레랑스는 갈등 인정 이후의 문제다

그게 민주주의일까. 황장엽이 말하고 보수세력들이 떠드는 '한국식 민주주의'가 그런 거라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 혹은 다른 무엇이다. 민주주의는 최장집의 표현을 고대로 빌건대 "폭력을 배제한 갈등과

타협에 기초한 정치체제"에 가까운 무엇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똘레랑스는 고사하고 갈등 자체를 터부시

하고 있는 거다. 시끄러운 국회가 싫다, 시끄러운 광장이 싫다, 결국 '시끄러운 게 싫다'란 정도로 요약될

갈등 상황 자체에 대한 혐오나 염증이 문제다. "정치인 아저씨들은 왜 맨날 싸워요?"라고 묻는 어린애의 똘망한

눈망울 앞에 무조건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실제적인 갈등을 대체하는 추상적 전선(戰線)

혹은 갈등을 묵살하고 없는 것 취급하는 것과 동시에, 추상적인 양극 구도로 몰아간다.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 '평화개혁세력 대 냉전수구세력' 따위의 갈등선은 뭔가 선명하고 뚜렷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이상

내용도 없고 실천적 의미 또한 던져주지 못하는 죽어버린 그림이 아닐까. 87년을 기점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나서, '민주', '진보', '개혁' 따위의 단어로 지시되는 내용은 그때그때 바뀌어 버렸다. 이미 갈등선이

그 고도로 추상화된, 그렇지만 그래서 오히려 쉬운 단어의 세계를 넘어서 복잡다단한 현실세계로 넘어온 거다. 


'부러지지 않는 쌍쌍바', 자잘한 균열선들의 긍정적 역할

두 개의 그림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쌍쌍바 여러개를 고르게 포개어 쪼개는 그림, 그리고 쌍쌍바 여러개를

무질서하게 포개어 부러뜨리는 그림. 첫번째 그림에서 쉽게 부러질 쌍쌍바가 '민주 대 반민주'니 '진보 대

보수'니 따위의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갈등선으로 일관하는 사회의 파국 혹은 불건전성을 의미한다면, 둘째

그림에서 좀처럼 부러지지 않을 쌍쌍바들은 예컨대 '동성애 찬성 대 반대', '증세 찬성 대 반대', '등록금 무료

찬성 대 반대', '모병제 찬성 대 반대' 따위 수많은 이슈에 대한 자잘한 갈등선을 품어내는 사회의 건전성을

의미한다. 최장집은 정당정치가 그러한 자잘한 갈등선을 반영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부재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떠할까. 정당 정치는 마비되었고, 광장 정치(광장 민주주의라 높이 평가되기도 한)는

고양되지 못한 채 배설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근대 정치에 걸맞는 '자유주의적 인간형'조차 제대로 세워지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 거대한 국가와 동등한 계약관계로 묶인(혹은 묶였다고 상정되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시민' 대신에 NL(민족민주)이니 PD(민중민주)니 통일조국, 민주국가건설을 위한 '민중'만이 화석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광기에 가까운 월드컵 응원 열기, 골프와 피겨, 축구 선수에 대한 과도한 국가적 상징화,

새롭게는 '국격'이니 '국위 선양'이니 따위의 국가주의적 수사에 푹 절어 있는 것이 하나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면 '네티즌 수사대'가 몰려들어와 융단폭격을 하는 원시적/집단주의적 작태가 다른 하나다.


'민중'에서 '시민'으로 바꿔내지 못한 한국 민주주의

최장집이 이른바 386세대, 운동권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득권 세력,

구조에 대한 거울 이미지로서 스스로를 형상화하고 안티화해내면 되었을 뿐인, 역사적인 한계기도 하지만 능력

부족이기도 했던 부분이다. '민중'이란 불분명한 역사적 집단에 기대어 '역사의 정방향으로의 발전'을 믿었던,

지금과는 정반대의 뒤집어진 세상만 꿈꾸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불철저했던 문제의식은 곧 김대중/노무현

두 자칭 '진보성향' 정권의 실패 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결국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은

동일한 문제를 내재하고 있다, 혹은 이명박은 10년 '좌파 정부'의 예정된 귀결이었다고 판단한다.


김대중과 노무현, 그들을 박제화한 '민중'의 배신은 당연하다

과연 그런 걸까. 판단은 유보하되 의견을 말해 보자면,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의 죽음에 비통해 하던 이들은

'민중'이었지 '시민'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세속된' 이해관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갈등을 시스템 내에서

해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민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에서, 또 이명박이 퇴행시켰거나 노출시킨

허술한 민주주의에 놀란 상태에서 '민주 대 반민주'라는 손쉬운 갈등선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한 '민중'이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이명박 덕분에 갑자기 '민주'의 화신, 실패한 영웅으로 부활했지만, 사실 그들은 재임 중

수많은 이슈에 대해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도 시스템 내로 그런 이슈, 갈등을 들고 들어와

해결하는 기제를 마련치 않았다. 그 결과다. '민중'은 속되고 삿되다 하여 정치권에서 다루지 않는 온갖 생활

밀착형 이슈들, 부동산과 주식과 교육과 취업과 세금의 문제에서 또다시 '김대중과 노무현'의 가치를 배신하고

있다. 이명박의 지지율을 보면 알 일이다.


운동권 세력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그건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을 10년을 날려버린 정치권의 실패다. 그들은

"샐러리맨 세금낮추기 정당", "공휴일에 지하철 막차시간 연장하기 정당", "대학생 일자리 보장 정당" 따위, 좀더

세분화되고 생활에 발딛고 있는 이슈로 자잘한 찬/반 균열을 그어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이슈들의 묶음으로

커다란 '진보'를 형상화할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곧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라는 구호의 함의였을 거다.

사실 국가 발전을 위해 다른 갈등들을 묵살하는 기득권 세력의 몸짓은 지금의 '운동권' 세력에게도 여기저기

발견된다. 조직 내 성추행 사건을 덮는다거나, 전경과 대치하기 위해 필요악으로 동원되는 '사수대'의 군대식
 
규율,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개인의 도덕률과 사명감의 차원으로 모든 것을 치환해 버리는 방만함까지.


자잘한 이슈들을 그어내고 반영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좀더 갈갈이, 중층적으로 찢겨야 한다. 무슨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반공이니, 신자유주의니, 혹은 친미/반미니,
 
심지어는 희화화된 형태의 '보수꼴통'과 '친북좌파'의 굵고도 무식하며 무시무시한 일도양단식 균열말고. 그런

세속화되고 일상적인 형태의 자잘한 균열들이 좀더 촘촘하게 그어지고 나서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고착되고

성숙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서구처럼 국가 이전에 '시민'이 먼저 형성되는 것이 실패하였다 치더라도,

이제라도 강력한 국가 앞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시민'을 불러내는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분열을 말할 때다. 지금처럼 인터넷 상에서 서로 ^^해가며 좌빨이니 우빨이니 맞지 않는 화살만

잔뜩 주고 받는 소모적인 이야기로 분열하는 게 아니라, 정말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입장이 다름을

확인하기 위한 분열 말이다.



덧댐.

어쩌면, 이명박을 뽑은 국민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경제발전'에 대한 감수성과 비판의식을 키워내야겠지만

'돈을 많이 벌게 해줄 것'에 대한 디테일과 방법론이 경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진보'를 자처한 진영이

그 이슈를 송두리째 방기했음을 반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의 삶의 부유함을, 어떻게 창출할 건지에

대한 미시적 수준의 갈등선을 역시 그었어야 한다는 거다. 이 역시 이명박의 집권이 김대중/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운동권 세력이 정치적 발전에 소홀했던 덕택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보집권플랜 - 6점
조국.오연호 지음/오마이북

노무현은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말했다. "1948년 이래 가장 나은 정부가 1987년 이래 가장

나쁜 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이 역설을 고민해야 한다"고. 노무현 정권이 어쩌다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이야기일 거다.


왜일까. 왜였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무현의 사후 1년이 지나고 어느 잡지에서

'우리시대 노무현의 정의'를 모으는 기사에 내가 썼던 한 줄이 여전히 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재임 시절에도 늘 생각하던 것.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ytzsche "노무현은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다."

그를 대통령으로 앉혀놓고 진보적인 정책을 강제할만큼 그도 우리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덜컥 그가 대통령이 되고, 돌아갔죠. 삑사리로 들어간 뽀록구, 실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 “노무현은 마라톤 42.195Km이다.”(2010.5.23, 시사IN)



이 책의 내용보다 더 궁금했던 것


사실 이 책을 읽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나름 2000년을 전후해 대학에서 '돌과 빠이'를

쥐었던 데다가 '진보신당의 (페이퍼)당원'이 내 정체성 중의 큰 부분이라 생각하는 '좌파'로서,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경제민주화, 교육과 남북 문제, 권력 등의 내용은 내게는 너무

'상식'적인 내용이었던 거다. 진부하고 심심했다.


꾸역꾸역 읽어나가며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렸다. 왜 이 책일까. 왜 갑자기 이 책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일까. 대담이란 형식의 특성상 정식화하고 나면 몇 페이지에 불과한

팜플렛 밖에 안 될 내용인데, 딱히 새로운 발상이나 아이디어도 없는데, 이런 정치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데, 대체 왜 사람들은 갑자기 '진보집권플랜'을 집어들었을까.


몇가지 음흉한 음모론이 있을 수 있다. 노회찬의 사상이 섹시하다며 그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던 이들에게 잘 생기고 젠틀하며 사상도 섹시한 조국 교수는 가히 팬덤을 몰고 올만한

인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에서도 그랬으니까 새삼스럽지도 않다.) 때론 경악스러운

트렌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와아~ 하며 우르르 달려가는,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 따위

책들에 달려간 새삼스럽고 집단주의적인 구매 성향의 일환일지도. 너무 시니컬한가.



'진보'정권의 집권을 위한 공부 열풍

조금은 희망적이고 싶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거치면서, 준비되지 않은 집권이 결국

그를 죽이고 우리 모두를 질곡에 몰았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기적이나 요행처럼 대통령 하나 바뀌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고. 그저 구습에 대한

부정이나 분노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우리 모두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고.


새로운 비전과 플랜이 필요한 거다. 뽀록구도 실력이라지만 그런 거 금방 바닥이 드러나고

마는 거니까, 다행히도 이제는 '진보'라 자처한다 하여 '빨갱이'로 등식화되는 지경은

벗어난 거 같으니까 좀더 본격적이고 시끄럽게 이야기를 할 때가 온 거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국과 오연호가 말을 주고 받은 이 기록은 '진보'를 위한 최소한의 상식선,

최소한의 공유 가치를 품고 있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진짜 리뷰는 여기부터.


그렇다. 이 책은 '시작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교과서같은 이야기만 있는 듯

보이면서도 현실정치에 적용이 가능해보이는 수준의 정책적 구상과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 제언들이 들어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 책은, 조국 버전의 '진보'와 조국

버전의 '집권플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건 또다시 민주당 위주의 일치단결,

한나라당 말고 될놈 찍자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불러내기 십상이란 점이다.


조국의 통큰 '진보'는 누구인가

그는 계속해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통칭해 민주정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리고

현재의 야권을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지만, 그런 전제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두 정권을 두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급격히 이루어진 시기라 평하기도 하고, 현재의 야권 중 민주당의

적잖은 의원은 수구/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DNA를 갖고 있다 평해지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의 입장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적잖이 보인다. 한미FTA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 일반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입장이나, '친미'와 '반미'를 넘어선 '용미'를

하자는 그의 그럴듯하지만 모호한 입장-이미 외교학과 하영선 교수가 익히 말해온

개념이지만 역시 알맹이를 알 수 없는- 따위가 그렇다. 그리고 북한의 3대세습이나

인권 문제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진보'와는 균열을 그을 거 같다.


'진보'의 가치를 어떤 정치세력에게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집권,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 자체가 정당을 기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했기에

수구/보수의 집권기라고 말하듯 특정 정당이 집권해야 '진보'가 집권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조국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그거다. 현재의 민주당이 집권하면 진보가

집권한 건가. 민주당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통령 김대중과 대통령 노무현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조국 버전 '진보집권플랜'의 한계

물론 조국은 이 책에서 이야기한 여러 이슈에 대한 진보적이고 전향적인 입장을 밝히는

정치세력이 집권하도록 대중이 강제할 수 있다고 말할 거다. 현재의 민주당은 부족함이

많지만 나름 '복지'니 '무상급식'이니 좌향좌하는 기색도 있으니 지켜보자고 말할지도

모르고 연정의 가능성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이 책에서 제기된 진보적인 의제들을 받아서

어쨌든 다음 정권에선 '진보'가 집권하자는 게 그의 취지이고 충정이라는 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현실 정치에서 돌아가는 판세는 이미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언급된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을 뛰어넘은 것 같다. 그는 고작 두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일반론 차원에서

언급하고 만 '복지를 위한 증세' 부분에 대해 지금 얼마나 많은 논란이 일고 지향이 갈라지고

있는지만 봐도 그렇다. 그밖에 해외파병이나 다문화사회에 대한 원칙적인 답변도 막상 현실에

닥쳐 결정을 해야 할 시기에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야기다.


책의 말미에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희망차게 이야기했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의 민주당이

보여주는 노선, 행태, 리더십을 진보 쪽에 가깝게 끌어갈 수 있을까. 그의 표현을 빌어 개혁

담당 민주당과 진보 담당 소수 정당들이 서로 이해를 조율하여 하나의 진영으로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진보가 밥먹여준다'는 걸 보여주고 '밥의 품격'을 논하는 게

사람들의 표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도 하다. 그나마 노무현의 정책 이상으로

진보적 가치에 접근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이 책의 진보정책 구상들이 실현될 수 있을까. 
 

'반MB' 명분 하의 진보개혁 진영의 소통합 결과는.

결국 우려스러운 지점은 그거다. 이 책의 온갖 장점과 '진보'정책 일반의 지향을 세워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보집권플랜이 결국

지극히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반MB'로 뭉치게 되는, 혹은 뭉쳐야 한다는 절박하고

긴급한 요청으로 수렴되는 건 아닐까. 그의 '통큰' 진보는 MB와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수구/보수'를 뺀 여집합과 같기에, 쉽게 말해 한나라당 말고 될 놈, 민주당 찍으란

이야기로 돌아가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다.


조국도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2012년이던, 2017년이던, 언제가 되었건

진보진영이 집권했을 때 제대로 해서 더이상 후퇴하지 않는 단단한 기반을 만들자는

게 그의 반복된 주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잉대표되고 승자독식하는 한국의

선거제도에 대해서도 깊이있는 통찰과 제안이 있어야 했지 싶다. 그리고 '진보'라는

단어를 그렇게 느슨하고 통크게 써서 '진보/보수'의 구도로 한국 정치를 보는 것보다

'(진보)/중도/보수'의 구도로 읽는 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진보집권플랜'은, 그래서 시작점이다. 여기로부터 논의가 만발해서 다양한 집권플랜이

짜이고 더욱 가다듬어지도록 맨처음 부어진 마중물의 역할이라면 부족함은 없어보인다.






어느 까페에 갔다가 문득 발견한 책 한권. 제법 노래도 좋고 분위기도 괜찮았던 데다가, 한 쪽에

책꽂이가 걸려있고 책들이 십여권 꽂혀있어서 호기심이 동했던 내 잘못이다. 이럴 수가.


이런 책이 아직도 살아남아있으리라곤, 정신빠진 노친네들 책장도 아니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그런 류의 까페에 꽂혀있으리라곤 정말 생각도 못 했었는데, 완전히 똥 밟은 기분.

아, 눈이 썩는 듯한 느낌. 붉은 띠지까지 아직 살아남아있다니,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박정희를 다시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멸사우국 혼까지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랜다...하아...붉은 띠지는 온통 박정희 찬가,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 따위보다 백만배는 훌륭했고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다는 식이다.


제목 위에 저 촌스런 느낌표 붙은 문장은 또 뭐냐. "그대가 진정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대와

이야기하리라!" 그니까, 박정희 니가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언론과 이야기하지 않고

잡아가두고 탄압한 건, 그들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거구나. 교활한 말장난,

토할 것만 같다. 박정희 자신은 이미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있단 음흉한 전제.

표지랑 띠지에 이렇게 글자가 많은 책은 첨 보는 거 같다. 차마 안에까지 열어볼 엄두가 나지않아

무슨 폭발물을 조심조심 대하듯이 살짝 뒤로 돌려봤다. 아아...괜히 돌렸어.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거나 까페주인한테 태워버리라고 조언하거나, 여하간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더이상 손대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이런 평가. 참 대단하다.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을 합해 놓은 인물이라니. 그야말로 문무겸비,

성군 세종에 더해 충무공의 전설같은 무공과 애국심까지 한몸에 지닌 우리의 위대하고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님각하폐하대왕이신 거다.


...하아. 혈압. 사실, 이건 일종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같은 쿠데타 반란세력, 군대를 뒤집고

정치를 뒤집고 나라를 뒤집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두른 범죄집단의 수괴를 국민의 손으로

처단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혼란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고

그의 지도력, 그의 '조국근대화' 능력, 그의 카리스마, 그의 청렴함, 그의 인간미 따위에 대한

상찬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며 재구성되는 건, 그 독재자와 추종세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이다.


지들끼리의 자리다툼을 벌이다 자중지란에 빠져 붕괴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최소한

눈에 보이는 성과는 이뤄냈던 박정희 도당들보다도 못한 문어대가리 일파들이 다시 그 정권을

찬탈했으니. 제대로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고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더 나쁜 놈이 나타나버렸으니

기억이 왜곡된 건 아닐까. 때리던 놈 다음에 칼로 찌르는 놈이 나타난 셈이랄까. 칼로 찌르던

놈들 두 명은 법정에까지 겨우겨우 세웠다지만, 여전히 때리던 놈에 대해서는 요원한 거다.


게다가, 뭐어, 박정희 딸이 차기 대선후보 1위? 2012년에 지구가 망한다는 소리가 차라리

반갑달까. 박정희 책이 여전히 여기저기서 설설 기어나오고, 박정희 딸이 여전히 아버지를

그리는 정치인과 국민들 사이에서 먹히고 있다니 최악이다 정말.


책도 슬쩍 펼쳐보았지만, 뭐라고 논할 건덕지도 없는 찌라시 수준의 이야기들. 단언하건대

저런 책을 읽는 건 시간낭비 돈낭비 에너지낭비. 그냥 조용히 버려야할 책이다.




읽고 나면 그 소설의 한 장면이 유난히 남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읽고 나서 소설에서 쓰인 소재나

묘사의 대상이 된 행동이나 장면을 재연하고 싶어지는 작품이 있다. 예컨대 체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을 읽고 나서 나도 어디 한번 다시 체스에 재미붙여 볼까, 하는 식인 거다.


스토리는 그렇다. 아무런 영특함을 갖추지 못한 시골뜨기가 유독 체스에는 재능을 보여 급기야

세계 챔피언이 되었는데, 그런 그가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대양 위의 한 유람선에서-맞닥뜨린

상대는 나치 치하에서 수개월간 독방 고문을 겪으며 체스를 독학했던 지식인인 거다. 활자 중독에

빠져 있다 해도 좋을 지식인이 수개월간 아무것도 못 읽고 고작 체스 교본 한 권만을 갖고 있었으니

그는 그 한 권을 달달 외우고 머릿속에 체스판을 구현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경지.

그들의 경기는 역시나 일반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서 펼쳐지지만, 끝내 무너지는 건 

실제 체스판과 말이 없으면 수를 생각하지도 못하는 혐오스런 챔피언이 아니라 지식인이란 반전까지.


결이 굉장히 많은 건 사실이다. 체스 게임을 둘러싸고 등장인물 간에 벌이는 심리적 갈등과

등장 인물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머리싸움이 긴박하게 묘사되는 것은 기본이고, '무지하고

교활한 챔피언 vs 생각많고 교양있는 지식인'이란 구도는 나치와 유럽 지식인이라는 역사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듯 보인다. '독방 고문 vs 체스'에서 인류의 무지와 지적 탐구의 대립 구도도

선연하고, 느닷없이 치닫는 결말의 파국이 보이는 냉소와 배신감은 이차 세계대전 말기를 못 견디고

자살한 작가 자신의 비극적인 생의 결말과 맞물려 더욱 극대화되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런 결들을

하나하나 포개보면 초점이 은근슬쩍 하나로 맞춰진다. 8*8의 체스판에 구현된 인간의 정신.


여느 소설과 같이 작품 속에 등장인물이 존재하고 등장인물간의 사건과 그들 사이의 대화도

존재하지만, 이 작품 '체스 이야기'의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스'라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인간의 사고 흐름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처럼 보인다. 나치 치하에서 인간이 겪었던

극한의 고문이나 반이성적인 처사들 모두 그렇게 체스에 몰입해 있는 상황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기

위한 조건인 것 같다. 체스 이외의 다른 점에서는 모조리 무지하고 천박한, 그 속내를 작가가 굳이

드러내지 않는 챔피언 역시 그렇게 체스에 불붙은 인간을 보여주기 위한 불쏘시개 같달까. 심지어

그 지식인에 대한 상세한 묘사조차 그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체스' 플레이어로서 그를 이해하고

설득력있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함은 아닐지.


체스의 공간 속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사고하고 승리를 기획할 뿐인 순수한 인간 이성이 어떻게

작용하고 반응하는지, 그 과정과 깊이를 하나하나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밖의 것들이 전부 곁가지라거나 부수적인 해석은 아니겠지만, 정말이지 그의 작품에서 읽혀지는

체스 플레이어의 심리와 체스 게임 자체의 묘사는 집요하고 섬세하다. 당장이라도 체스판을 펼치고

말을 들먹이고 싶도록. 그렇게 체스판 위를 놀며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과정을 조금 멀찍이

떨어져 주시하고 뜯어보고 싶도록. 그리고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체스' 판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사고와 반응이 다른 인간세계의 일들, 나치의 비인간성, 전쟁의 광기, 무지와 독선의

잔인함..같은 것들마저 모두 포괄하고 마는 거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체스라는 게임이 원래 그런 거 같다.

"(체스는) 절대적으로 우연의 독재에서 벗어나 있고 그 승리의 영광은 오로지 정신에, 아니 어떤 특정한 형태의 정신적 재능에 있었다...체스는 태곳적인 것이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것이요, 그 구도가 메커니즘적이면서도 판타지를 통해서만 작동하며, 기하학적으로 일정 공간에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그 조합에서는 무제한적이고...그 존재 자체가 어떤 책이나 작품보다 영속적이며,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에 속하는 유일한 게임이면서도, 지루함을 죽이고 감각들을 예리하게 하며 영혼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신이 이 땅에 가져온 게임"

이렇게까지 격찬을 받는 게임, 그리고 그 게임플레이어의 내밀한 속내를 샅샅이 핥아서 보여주는

소설의 흡인력있는 묘사가 더해졌으니 당장 체스판을 꺼낸다고 해도 이상할 거 하나 없겠다.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반양장)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문학동네
벤야멘타 하인학교 - 10점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문학동네

하인, 누군가를 위해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 보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로는 "남의 집에 매여 일을 하는 사람".

한자로는 더욱 웃긴다. 그야말로 하인이라도 알 수 있을 법한 쉬운 한자들, 下人. 아랫사람.


학교가 있다. 그런 하인이 되라며, 누구보다 하인다운 하인을 키워낸다는 하인양성학교가 있다.

의외로 그런 학교에도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또 한명이 입학하겠다고 학교 문안에 들어선다.


시대는 19세기 후반. 앙시앙레짐의 귀족들이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들이 기계 문명과 함께 떠오르는 시기,

예술과 소비의 주체가 특정의 '고귀한 핏줄'만이 아닌 '대중'으로 확장되었다 믿어지기 시작한 시기.


아마도 그는 몰락귀족의 핏줄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동시에 오만해진 대중과 배나온 부르주아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고 발버둥치기를 거부하고자 했다. 귀족의 오랜 피는 이미 잔뜩 안정되고 녹슬었음을 알아챘고, 또한

부르주아와 대중의 치기어린 범속함을 알아채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고귀해지기 위한 경쟁'의 링 위에

올라서기를 거부해 버렸다.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올라서길 열망하며 위를 바라볼 때, 그는 차라리

충직한 하인이 되어 주인님의 반짝이는 구두와 지팡이를 맡아 놓기 위한 예의바르고 순종적인 태도와 더불어,

의심하지 않는 마음, 한결같은 복종과 주인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한 마음을 갈고 닦으려 한다. 시니컬하고

독립적이며 재기발랄한 그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하강'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그의 사유가 자동기술식으로 기록된 궤적을 가만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Vertigo에 빠지고 만다. 어디가 위인지 어디가 아래인지, (당위적으로) 뭐가

옳고 발전적인 방향인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 건지. 그렇게 스스로를 혼란 속에 던져놓고 스물스물 삐져나오려

버둥대어 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다.


그리고 실은, 그들의 하인학교는 지금의 세상과 뭐가 크게 다른지 곰곰 따져보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단순하게만 뒤집어보아도 하인이 되기를 자처한 그가 빠져드는 모순과 욕망의 좌절들은 외려 세상에

적응해가며 겪는 그것들과 과히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  vertigo (영어).  물리적 감각이 두뇌에 상충하는 신호를 보내 발생하는 공간 방향 감각 상실.









@ 상하이.

경제발전만을 향해 치닫던 중국의 상해도 이제 미적 감각을 거리에 도입하기 시작한 거다,

비록 내용물은 전부 살색그림 충만한 찌라시들일지언정.




선물로 받은 프라하산 고양이 한 마리. 자그마한 비닐백 속에 담긴 채, 빨간 끈뭉치랑 놀고 있었다.

비닐백에서 풀어놓으니 앞다리도 움직이고, 뒷다리도 움직이고. 세모꼴 귀만큼이나 쫑긋 선 꼬리가 귀엽다.

가만히 보면 표정이 익살스럽다. 코를 벌름벌름대면서 금방이라도 냐아~ 할 거 같다.

빨간 끈을 완전히 감아 버렸더니 살짝 실눈을 뜨고 나를 흘기는 듯한 저 고냥이스런 표정.

요새 보고 있는 책에 갈피해 넣었다. 하나의 땅에 사는 두 개의 민족 이야기다. 쉽진 않지만 꽤나 재미있다는.

실 끝을 부여잡고 있는 고양이의 자세가 왠지 굉장히 절실하다. 실을 놓느니 죽어버리련다, 정도의 결기랄까.

다른 쪽 끝, 고양이에겐 마치 세계의 반대편 끝이라고나 느껴지려나. 단정히 주저앉은 실타래.

내 선물 말고도, 집에 하나 새로 생긴 꼭두각시 인형. 손발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데 심지어는 걷는

모습까지 '레알' 재현이 가능하다.


 
죽음을 앞두고 발휘되는 통찰력.

'인생수업'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통찰력을 빌어 하는 이야기는 그런 거 같다. "지금의 삶으로 충분해,

더이상 바라는 것은 없어"라고 생각할 만큼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라, 지금 여기 내앞에 놓인 순간에 만족하라,

그리고 (매끄럽게 배려된) 감정표현을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을 앞두고야 깨닫지 말고, 평소부터 정말 중요한

것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조심스럽지만 강력한 제안이다.



다르지만 같아 보이는 것들.

순응과 포기는 다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고정된, 주어진 부분이 뭔지를 판단하고 그에 대해서는 더이상

떼쓰거나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순응이다. 반면 어떻게 잘 해보면 자신이 움직여볼 수 있는 것들임에도 지레

힘들다거나 두려워서 손을 놓는 것은 포기하는 거다. 그렇지만 생활로 들어가 구체적으로 보자면 어려워진다.

어디까지가 내가 손대면 바꿀 수 있을 부분일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해도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순응하는 마음자세와 포기하는 마음자세는 대체 어떻게 다른 건지.


현실만족과 현실안주는 다르다. 이른바 Carpe Diem, 지금 이순간에 대해 충만함을 느끼며 매 순간 살라는

이야기는 그럴듯하다. 인생수업의 이 부분은 이미 동양철학, 특히 불교철학에서 직접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매순간, 매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온통 주의를 집중해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나 '애인을 만날 때 온 정신을 기울여 이야기를 나누고 예컨대 담날 회의, 일거리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현대적 이야기나 핵심은 같다. 그렇지만 역시, 추상에서 구체로 들어가면 어려워진다.

HERE & NOW, '지금 여기'라는 지점이 대체 무엇일까.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지금의 현실이라 느끼는 건

아주 피상적인 껍데기 현상에 불과할 수 있다. 자신이 연기해야 할 역할도 수십가지인 판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이란 것 역시 잘 생각하면 깔끔하게 정답이 나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거다. 쉽게

던지는 '순간에 충실해'란 말이 '점심시간이지만 배가 고프진 않아'란 말과 비슷해지는 건 그래서다. 뭔가

의미는 알겠는데 어쩌란 건지 모르겠는.


감정표현과 감정전가도 다르다. 적절한 때 적절한 수준으로 감정을 표출, 화를 내는 것이던 화를 내겠다는

예고이던 해주는 게 본인에게나 서로의 관계에 좋다는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특히 나처럼 딱히

화내지 않고 시니컬하게 반응하며 해소해 버리는 스타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반면 무턱대고 화만 내는

사람이나 화낼 꼬투리만 잡으려는 듯 보이는 사람, 그런 건 감정표현이 아니라 감정전가에 불과하다. 자신이

화났으니 너도 이만큼 화나게 만들어주마, 작정한 듯 계속 갈구고 찌르고 건드리는 사람들. 역시 개념적으로야

딱 떨어지는 정의와 설명이 주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혼동스럽다.

그러한 감정표현이 자신이 감내해야 할 상황, 받아들여야 할 불만족이나 분노를 다른 이에게 배구공 토스하듯

전가시키는 일인지 아니면 정말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의 어필이 가능하도록 안배된 일인지. 또 내가 생각컨대

적절한 감정표현의 범주에 들어가는 행위가 상대의 입장에선 전혀 불합리하고 치졸한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똑같아 보인다는 문제.(당장 죽지 않는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저자들의 탓은 아니다. 그렇게 구분하기 쉽고 해내기 쉬운 일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서야

겨우 깨닫고 인생을 새롭게 반추하게 되겠는가. 심지어 평생 그런 '정말 중요한 가치'들을 깨닫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은 판에 말이다. 게다가 머리로 알았다, 라고 아무리 외친들 게으른 몸이

그에 따르는 건 별개 문제다. 죽음이 턱밑까지 쫓아왔음을 느끼고 나서야 슬그머니 마음을 돌려먹는 거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나는 이런 교훈들을 체화시켜 살라고 할 때 몇가지 문제점을 의식하게 된다. 우선 타인의

시선에 대해 신경이 쓰인다는, 지극히도 유치하고 허세스런 문제다. 마치 식물이 빛을 따라 움직이듯 사람도

타인을 따라 움직이는 '굴타인성'이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치기로 하고, 순응과 포기, 현실만족과 현실안주,

그리고 감정표현과 감정전가는 대개 거의 비슷한 외형으로 나타난다. 지금의 인생에 만족해, 라는 말을 뱉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당당한 주체성과 현실만족감이 자리해 있을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엔 현실에 안주하거나

심지어 거짓부렁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거다. 심지어 스스로도 불안해진다.


이건 사람들이 대개 타인의 이야기를 너무나 쉽게 하고-그만큼이나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지만-무책임하게

한다는 경험칙 때문에 더욱 신경쓰이는 상황이 된다. 다른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얼기설기

꼬여있는 줄도 모르면서 잘도 훑어내려 몇몇 문장으로 정리해버리는 우악스런 사람들. 게다가 스스로 그러한

무책임한 '평론가'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더욱 스스로를 검열하고 재우치게 되는 바보스런 처지에 빠지기도

하는 거다.


물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회광반조'와 당장에도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며 온갖 더러운 꼴을

보아야 하는 쌩쌩한 생활인의 마인드는 다를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생일을 맞을 때마다 살 날이 한 해

더 줄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도 더 나아가 오분후에 내가 죽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당장 초상집에 가서도 처음의 어색함과 침중함도 잠시, 금세 배고프고 졸립고 우습고 욕망하는 게

사람인데 말이다. 배울 게 많으니 수업을 듣는 거니깐, 굳이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 반잔이나, 라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있다면.

헬렌 켈러가 이야기했다는 말,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그곳에 쓰인 '삶'이라는 단어는,

혼자만의 삶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게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고쳐

읽어야 할 거라 생각한다. 결국은 '길동무'의 문제. 아무리 혼자서 인생을 두고 '물 반잔이나'라는 식으로

고쳐 생각하려 애쓰고 그에 맞춰 살아보려 해도, 주위 사람들이 전부 '물 반잔밖에'라는 마인드로 평가하고

충고하고 개입한다면 금세 꺽일 수 밖에 없을 거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지 않던가.


이런 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인생수업'은 타인을 변화시킨다거나 타인과 함께 행복해진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느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평화, 자신의 행복을 찾는 법에 집중하고

있어 보인다. 어쩔 수 없다. 자기 하나 바로세우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까지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지나친

과욕이거나 자만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모든 사람의 예스를 얻을 수도 없는 거다.

다만 인생에 대한 비슷한 자세를 가진 자기 편 한 명 정도만 든든하게 버텨주면 된다. 그저 꽃밭에서 꽃들이

제각기 자신의 무거운 꽃대궁을 쳐들고 꽃잎을 틔워내어 함께 아름답듯, 그렇게 누군가-그게 정말 단 한명이라

할지라도-와 함께 햇볕을 쪼이고 바람을 맞으며 '반잔 씩이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겸손해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르겠다.


덧댐. 제목이 인생수업, 수업의 시작과 끝이 인생의 시작-탄생과 끝-죽음과 맞닿아 있다면, 아직 이렇게도

사는 게 뭔지, 무엇을 좇아 살아야 할지 모르는 건 어쩜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 등산나오신 아줌마 아저씨들이

흔히 5학년이네 6학년이네 하는 말이 유난히도 와닿게 만드는 책이다.


인생 수업 - 8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이레

모  집

제4차 동시나눔 '멍석돌/순이'를 구합니다!

◆ 'OOO기념, 공동(동시) 나눔' 마당에 동참할 이웃지기님들을 기다리며
(BlogIcon 초하(初夏) 님)


이렇게 3차에 걸쳐 진행된 동시나눔마당을 이어받아 9월 중에
whenever/whatever/wherever/whyever 진행하실 whoever를 해보고 싶으신 분, 손들어주세요~*

(저나 초하님, 백마탄 초인님께 알려주시면 성심성의껏 도와드리니 부담가지실 것은 없답니다.ㅎㅎ)

이라 하였으나 사방이 고즈넉하여 어느 하나 손드는 이 없어 제가 다시 한번 해볼까 하던 차에,

마침 BlogIcon Adios  님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나눔블로그'(http://nanumbook.tistory.com/)가 1차 나눔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호~ 블로거들끼리 서로 나누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어느 기관 하나에 기부하는 것도 좋겠구나~♡"
 
생각이 제일 처음 들었고, "그렇다면 이번 9월 4차 동시나눔은 한번 나눔블로그와 함께 해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연이어 들었지요. 다른 분들도 저랑 같이 생각하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블로거&블로거, B2B의 관계에서 보다
 
넓혀서 블로거&사회, B2S의 관계로 한번 성큼 발딛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B2S의 세계로 입문, 꼬우꼬우~!
일시 : 2009. 9. 18(금) 24:00까지
물품 : 취학전 아동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읽을 수 있는 도서류.
장소 : '나눔블로그'(http://nanumbook.tistory.com/) 방명록!!!!
         (이 포스팅에 댓글로 의사를 밝혀주시면, 제가 님들 방명록에 쫓아가서 다시 한번 자세히 알려드리겠어요.
          기부 창구가 하나여야 원활하고 효과적으로 도서 수집이 가능할 거 같거든요, 꼭 '나눔블로그' 방명록에!ㅎㅎ)
방법 : ①'나눔블로그' 방명록에 기부 의사를 밝히시고 기부하고자 하는 책, 혹은 도서상품권/문화상품권에 대해
         글을 남겨주시면 되겠습니다.
       ② 글을 남기면 댓글이나 이메일로 '배송지 주소'를 받으실 수 있을 거에요. 
           (배송지 주소는 현재 대구SOS아동센터와 접촉하고 계신 BlogIcon 함차家님이나 대구SOS아동센터 
            두 군데를 모두 알려드리게 될 겁니다.)
       ③ 그쪽으로 책을 배송해 주시면 끝~!
           (마치 이전 동시 나눔 때 선정된 분들께 책을 배송해드렸던 것처럼요^^)

저는 집을 뒤져보니 이런 책들이 있더라구요. 이번 달 동시나눔은 그리하야 '기부'를 통한 나눔을 해보려 합니다.

동시나눔을 통해 '나눔'의 즐거움을 맛보셨던 분들, 그리고 집에 돌아다니는 책 중에서 더이상 읽지 않는 책들이

있으시다면 이번에 한번 참여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 아래 내용은 "나눔블로그"(http://nanumbook.tistory.com/)에서 퍼올린 내용입니다.

◎ 어떤 책들이 필요한가요?

도서종류는 장르는 관계없으나 다양했으면 합니다..
보호아동 연령이 다양해서 취학전아동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있습니다. 
 
예를들어 청소년권장도서 부터 세계명작단편집, 어린이동화책, 한국의 야생화, 과학도서, 문화유산관련도서, 한국의 전통한옥, 등등 아동들이 대체로 사진과 그림이 있는 도서가 SOS아동보호센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연령대가 읽을 수 있는 그 어떤 책도 좋습니다.

또한 새책을 주문해서 보내주셔도 괜찮습니다. 포인트가 남아서 그 포인트로 채 주문해주셔도 좋구요.
도서상품권이 있어 책 사는데 보템을 주고 싶은 분들 도서상품권 코드만 알려주셔도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SOS아동보호센터 사무국장 김효승입니다.
먼저 사랑의 책나누기 회원님들께 저희 SOS아동보호센터 보호아동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저희 SOS아동보호센터는 아동일시보호기관으로 6개월 미만으로 일시보호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영유아보다 취학전 아동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의 아동들이 많이 입소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님과 함께 바다에 가보지 못한 친구도 있고 혼자서 라면만 끓여먹으며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아온 친구들은 돈까스가 맛있다며 과식을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가끔 신문지상이나 매스컴에
보도된 사건의 주인공도 저희 센터로 오곤 하는데요..

이러한 친구들이 집에서 책을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결국 이러한 아동들이 학업성취도가 떨어지고 다시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렸을 때 폭력적인 가장이 되고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됩니다.  요즘은 "북스타트" 운동이라 해서 영유아기 때 부터 책을 가지고 놀며 자주 접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열악한 환경에서 아동들이 책을 통해 위로를 받고 정서적 안정을 취해가며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소설문학, 과학, 경제, 여행.. 무엇이든 좋습니다. 작은 정성하나하나 감사히 받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아동들을 관심있게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시면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우리 이웃, 학교, 사회 속에서 건강하게 자리잡을 걸로 믿습니다.
따뜻한 관심, 격려의 말씀 모두 감사드립니다. 언제든 사랑의 책나누기 회원이라 말씀하시고 방문해 주시면
따뜻한 차한잔 드리겠습니다. ^^


◎ 나눔에는 어떻게 참여하나요?


방명록이나 메일보내기로 연락처(메일주소or 블로그주소)와 나눔할 도서종류와 수량을 알려주시면 저희가 책 보낼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드립니다.
받으신 연락처와 주소로 직접 포장을 해서 택배나 등기로 발송 (배송비는 본인부담)해 주시면 저희 나눔블로그에서 책을 받아 직접 대구 SOS아동보호센터에 찾아가 전달 할 것입니다.


* 방명록에 나눔 참여 신청글 남기기:    글남기기
* 이메일로 나눔 참여 신청글 보내기:    메일 보내기 


* 9월 말에 나눔블로그로 모아진 도서를 모아 블로거들과 함께 직접 대구 SOS아동보호센터를 방문 책 정리와 도서목록작성, 아이들과 함께 독서시간 및 자원봉사 활동 도 할 계획입니다.
오프라인 자원봉사 활동에 함께 하실 분들은 방명록에 연락처 남겨주세요 ^^

* 책 전달이 완료되면 후기란에 나눔에 참여해 주신 분들 명단과 여러분이 나눔해 주신 대구 SOS아동보호센터의 나눔 모습, 기증 후 새로 생긴 도서관의 책들 모습도 보실 수 있습니다.

  SOS아동보호센터 홈페이지- http://childcare.koreasos.or.kr
  대구SOS아동보호센터관련 자료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블로그와 나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방금 [제3차 동시나눔], 혹은 2009년 8월 동시나눔을 예고하는 포스팅에서 예고한 것처럼, 이번에는 책뿐만이 아니라

뭔가 가슴떨리고 두근두근한, 예기치 못했지만 누구라도 환영하고 사랑스러우며 러블리러블리 샤방샤방한, 게다가 럭셔리한 "옵하 한번 믿어봐~" 초절정은하계대박만성최고절찬리상습적조기품절 물품

을 내어놓습니다!! ([제3차 동시나눔 함께해요!] 저는 샤방샤방 러블리한 나눔물품을 올릴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1차 동시나눔에는 화폐전쟁, 쿠오바디스 경제학을 비롯한 경제 관련 서적을 나눴구요,
[나눔] '경제'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한 책 날개달기.(보도자료 첨부)

제2차 동시나눔에는 해리포터 영어판, 유토피스틱스 영어판을 비롯한 영어책을 나눴었네요.

[동시나눔] 해리포터 최종편 개봉기념 영어책 날개달기.


왠지 계속해서 책만 나누고 있다는 주변으로부터의 압박과 모진 비난(리나님 뜨끔하시죠?ㅋㅋ)도 있었지만, 저도 뭔가

새로운 나눔을 개척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번엔 좀 참신한 것들을 나눠볼까 해요. 그것도 좀더 참신한 방법으로요ㅎ


각설하고, 나눔 물품부터 뵈드립니다~! 골라골라~~
기호 1번. "거꾸로, 희망이다!!" 음...반응이 별루인가요...ㅡㅡ;;;; 그래도 스스로를 잘못많은 무지랭이로 몰아가는

자기계발서에 담긴 '희망'보다는 훨씬 아름차고 이뿐 희망을 읽을 수 있다구요. 옵하 한번 믿어보시라능.ㅋ

[거꾸로, 희망이다] 위기의 시대, 거꾸로 희망을 찾아보지 않으련? 이라 묻는 책.

기호 2번. "여기 사람이 있다!!" 음...왠지 이번 나눔 컨셉을 잘못 잡았나 스스로 패닉상태에 빠져가는 중입니다.ㅜ

음...음...뭐랄까요,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책들마저 퍽퍽한, 아니 혈흔이 얼룩진 듯한 내용일지라도, 이런 책들이

뭘 바라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봐주고 쓰다듬어주고 나아가 용산에 또 철거문제에 한번 관심가져주고..

그러길 바라는 거겠죠. 옵하 한번...미...믿어 보시...ㄹ라우?ㅡㅡ;

[여기 사람이 있다] 우리들의 '구차한' 밥그릇싸움에 사형을 언도한 그들.

기호 3번. 술입니다 술, 술술, 술술술!! 꺄하하~♡  그러고 보니 어제 저렇게 책 두권을 하려다가 문득 술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간 고이 소장해뒀던 미니어쳐 양주들을 어디에 뒀나 뒤적뒤적하다가, 이런 걸 함께 나누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지요. 럭셔리하죠? 러블리러블리 콜? 샤방샤방 빛나는 뽀샵처리는 기술부족으로 못하지만,

자체발광 두근두근 사랑스런 '옵하 한번 믿어봐' 초절정대박최고절찬리조기품절 물품!!!

아아, 정신 좀 차리고-이거 완전 몸 속에서 알콜이 자체적으로 생산되는가 봐요 아침부터..-아리땁게 다리를 살포시

꼰 채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앉아있는(보이죠? 술병들이 다리꼬고 앉아있는거, 안보이면 응모하지 마셈ㅡㅡ+) 술병들,

내가 그대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다만 유리병에 지나지 않겠죠. 왼쪽부터, 러시아에서 온 보드카종족 레베루양,

미국산 소고기의 광우병특정위험물질(SRM)도 녹여버린다는 위스키부족 그랜츠군, 40여년전 이방인을 탈고한 까뮈

옆에서 텅텅 빈 채 나뒹굴었다던 프랑스 꼬냑마을 출신 미시즈 까뮈, 아마도 미국산 싱글몰트위스키주에서 왔다던

글렌리벳씨, 영국(?)-갈수록 병들 국적에 확신이 없어진다는..-출신 천한매력 노예 바카디(대체 왜인지는 묻지 마시길.),

마지막으로 확실히 마데 인 우스아(USA) 속삭이는 위스키 잭다니엘 할배. 얘들 전부 묶어서 한분께 드립니다!!


완전완전완전완전완전완전완전완전완전???

자, 이제 어떻게 해야 요 사랑스런 베이베들을 받을 수 있는지 설명들어갑니다~* 간단해요. 말만 잘하면 꽁짜로도 덥썩

덥썩 집어주던 재래시장, 벼룩시장의 정신을 십분 앙양하야, 말만 잘하시면 되요.

원하는 울트라초대박은하계최고절찬리상습적조기품절상품들의 기호를 말씀해주신 후,
가장 긴 댓글을 남기시는 분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제? 이 블로그에 대한 평가, 개선해야 할 점, 원하는 점...같은 거 아니어도 되요. 오늘 하루의 일기를 시간순으로 쓴다거나 소설을 쓴다거나 시를 읊는다거나 편지를 쓴다거나 의미없는 낱말들을 나열한다거나..."자유 주제"입니다.

기간? 지금부터 요이~땅! 해서 달려가면 8월 19일(수) 24:00까지 받도록 하겠습니다. 넉넉히 잡은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상품에 대해 자신보다 긴 댓글을 단 사람이 있다면 추가로 댓글을 더 달아 글자 수를 늘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죠.

기준? MS Word 2007로 그대로 긁어 붙여서 "단어개수(공백 제외)"로 검증토록 하겠습니다.


* 뭐, 강제사항은 아닙니다만, 책의 경우 읽고 나서 리뷰를 트랙백걸겠다거나, 술의 경우 맛난 안주와 함께 마시는
 
인증샷을 첨부해 트랙백 걸겠다는 등의 공약(公約)을 내거시는 경우, MS Word 2007 기준 공백제외한 단어개수

100자 인정해드립니다!

* 공정한 심사를 위해 '비밀댓글'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참고로 저번엔 티스토리 초대장을 이런 식으로 나눴었는데 무려 2,345자(공백 제외)까지 써주신 분이 계셨어요^^

말만 잘하면(!) 공짜로 막 드리는 제3차 동시나눔 이벤트, 지금 시작합니다.

(왠지 이번 나눔 멍석돌이로 활약 중이신 백마탄초인님의 글투를 닮았다고 느끼는 건 저 혼자일까요..ㅋㅋ)










시사IN 제1기 독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할 때, 시사IN에서 처음으로 단행본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였던가, 회의실 밖에 붙어있는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책 표지 가안들을 구경했고, 우리들도 각자

원하는 책 표지 도안에 스티커를 하나씩 붙였었다. 그리고 며칠 후 시사IN에서 책을 배려해주었다.

내가 스티커를 붙였던 바로 그 시안대로 표지가 나왔다. 사실은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제목이 좀 맘에 안 들었지만,

어쨌든 그 책제목을 시각적으로 살려주며 흥미를 돋구는 디자인인 거 같아 만족.


제목이 불만이라 했지만, 사실 요새같은 때 거꾸로 희망을 보자는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이빨이나 들어갈까 싶어서다.

흔히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하고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 하며 위기가 곧 기회라 하지만, 그건 꽤나 장기적인
 
안목을 유지하는 사람이거나 희망섞인 기대와 당위로 '오염'된 예측일 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야 박정희도 무너졌고

전두환, 노태우의 시대도 무너졌지만...케인즈가 시장의 자연회복을 기대하는 시장주의 경제학자들과 싸우면서 했던

말이 딱 어울린다. "장기적으로 (경제야 물론 살아나겠지만) 그때는 이미 우린 모두 죽어 있을 거다."


게다가 아침이슬의 첫대목에서 보이는 "긴밤지새우고.." 류의 인고의 정신, 지금의 고난을 기꺼이 맞닥뜨려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란 건 꼭 사회적 약자, 구조적 약자의 전유물은 아닌 거다. 뒷산에 올라 요새도 즐겨부르고 있을지

모르는 거다. 사실 그와 그의 따까리들 역시 나름 곤란한 상황을 맞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심지어 어제 동아일보는

사실을 통해 그들을 보수주의자가 아닌 '보신주의자'라 일갈했던 바 있다. 하여, 결국 '살 맛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쳐야 할 건, '거꾸로 희망을 보라'라는 무슨 자기계발서나 경영기법에 나올 법한 아포리즘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컨텐츠다. (자칫 그들이 이런 제목만 보고, 그래 위기가 기회다~하며 더 치고 나올까 무섭다.)


역시 시사IN, 책의 내용은 훌륭하다. 나름의 '특수관계'를 의식한 말이 아니라, 정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올초, '혼돈의 시대, 위기 속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벌어진 여섯 차례의 강연회를 엮은 강연록이다.

시사IN 독자위원회 때 늘 나오던 이야기 중 하나는, 좌담회 형태의 기사란 게 영양가 있고 재미있게 쓰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현란하게 짜인 액션영화처럼 잘 짜여진 '합'에 따라 정말 예술적인 수준의 문답이 오고 가야 하는데

그건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과 적잖은 준비를 통해 질문자와 응답자 간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야기의 강약에 대한

감이 서있어야 가능할 거다. 그에 더해 서로의 말하기 스타일에 대한 감까지 있다면 더욱 유려한 대담이 될 테고.


쟁쟁한 강사들에, 쟁쟁한 질문자들이었다. 하나하나 강연 내용 자체가 완결적이었던 건 강사의 온전한 이야기에 더해,

강사가 품고 있는 겉내와 속내의 이야기,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질문자가 틈새를 잘 보완하고 완급을 추스렸기 때문일

거다. 어렵거나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소재들에 대한 내용을 말글로 풀어내어 훨씬 쉽고도 깊은 내용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여섯 건의 강연 내용과 문제의식을 얼추 소개하자면 이렇다.


* '생태적 상상력'을 묻는 이문재 시인, 말하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 

경제불황 속에서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관찰이 있었다고 한다. 해고나 근무시간 단축을 통해 남아돌게 된 시간에 꽃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되려 가지게 되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녹색'의 삶이란 뭘까.

*'위기의 심리'를 묻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말하는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심리적 견지에서 대통령의 자격요건을 묻는 김어준다운 질문에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자기성찰능력이라는 명쾌한 대답. 불안한 사람들은 각자의 섬으로 스스로를 유폐하지만, 불안을 터놓고 공유할 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

* '자본의 미래'를 묻는 정태인 경제평론가, 말하는 김수행 교수 ;

정통 맑스주의자인 김수행교수는 역시 경제공황의 필연성을 이야기한다. 특히 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과 모든 국민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강조하며,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자고 한다.

* '문화적 상상력'을 묻는 우석훈 경제학박사, 말하는 조한혜정 교수 ;

문화적 자유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틈새에서 '소모성 건전지'를 자처하며 말라죽어간다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다. '소수를 살게 하고 다수를 죽게 내버려두는 체제' 말고 다른 체제를 꿈꾸자고 말한다.

* '대안경제'를 묻는 하승창 시민운동가, 말하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까지 끊임없이 시민들을 자극하려는 박원순. 경제는 경제자체로만 수직상승할 수 없으며 사회적 복지라거나 사회적 평등, 생태의식과 같은 국민들의 의식수준에 비례한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 '역사의 위기'를 묻는 정해구 교수, 말하는 서중석 교수 ;

현대사를 전공한 서중석 교수는 한국 뉴라이트와 일본 극우세력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최근의 '건국절' 논란이 그들의 태생적인 한계랄까 아킬레스건를 반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다만 오바마의 당선과 촛불시위를 한국 민주주의의 역진에 대한 전환 모멘텀으로 삼고 있는 점은...두고 봐야 할 듯.


각기 상당히 다른 부분들을 건드는 주제이면서도, 결국은 '거꾸로, 희망을 찾아보지 않으련' 정도의 메시지로 수렴된다.

골이 깊고 어둠도 짙고, 누구랄 것 없이 위기라며 한숨을 물고 사는 시대라서 그렇다.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조금은 더

낫게, 사람사는 것처럼 살고 싶으니까 고개 끄덕일 수 밖에 없다. 희망을 찾아보자고.


거꾸로, 희망이다 - 10점
김수행 외 지음/시사IN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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