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폴의 차이나타운 초입, 싱가폴의 상징인 멀라이온상이 원색으로 치장된 채 우뚝 서 있다. 


어느 나라나 차이나타운은 비슷한 풍경에 상품들이면서도 꼭 한번은 찾아보게 되는 매력이 있는 듯. 안 가면 아쉬운.


특히나 싱가폴의 차이나타운에는 무려 4-5층 건물 높이에 육박하는 대형 사찰이 있다. 부처의 치아 일부를 


4층에 모시고 있어 용아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절 앞으로 싸구려 잡화들이 늘어섰다.


네발달린 의자들 발치에서 네발달린 고양이 한마리가 털을 고르는 중.


차이나타운의 먹잣골이랄까, 과거 중국인 노동자의 모습이 굽어보는 그곳에는 온통 양쪽으로 식당들이 즐비하다.


어느 한 골목을 꺽으니 머리를 이쁘게 염색하신 분이 열심히 전각작업중.


그리고 용아사 입장~


향연기를 흠뻑 맡은 용의 눈빛이 개개 풀려버렸다. 


생각보다 신식의 새것같은 느낌인 사찰, 중국이 으레 그렇듯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실내. 




그렇지만 정작 제대로 금칠이 된 건 부처님의 치아 일부를 모시고 있는 4층. 엘레베이터를 타고 자유롭게 올라가면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이 나타난다. 금을 사오백 킬로그램이나 아낌없이 써서 만들었다는 좌대가 멀찍이 있고


유리로 칸막이가 쳐져있어 그 한가운데 모셔져 있다는 치아는 보이지도 않는다.


소원을 빌면서 불을 밝혀둔 유리잔 속 초들. 


4층에서 혹시 더 올라가면 뭐가 나올까 해서 올라가니 옥상 정원이 나타난다. 강화도 전등사에 가면 볼 수 있는,


경전이 새겨진 동그란 통 같은 거. 손잡이를 잡고 이걸 한바퀴 돌리면 경전을 일독하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는다나.



절 바깥으로 풍경이 이쁘게 보이는 옥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잘 꾸며둔 정원이어서 한번 올라갈 만도.


 

춘천 인근에 있는 오봉산, 야트막하니 산책삼아 걷기도 좋고 개울을 따라 빽빽한 나무그늘도 좋았던 곳이다.

 

오봉산 청평사의 독특한 발코니 형태의 창도 사진찍기에 꽤나 좋은 포인트였던 것 같고, 짧은 가을에 덜 익은 단풍도 꽤 이뻤던 곳.

 

 

 

 

 

 

 

 

 

 

 

 

 

 

 

 

 

 

 

 

 

 

 

 

 

 

 

 

 

 

 

 

 

 

 

 

 

 

경주 시내와 불국사가 이렇게 떨어져 있다는 감이 전혀 없었다. 수학여행의 기억은 몇 장 사진으로만 남았을 뿐.

 

시내에서 적잖이 차로 달려야 도착하는 불국사, 그러고 보면 불국사 안의 풍경 역시 깜깜하니 기억 하나 남지 않았었다.

 

 

산문을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구름다리. 우아한 아치를 그리고 선 돌다리가 정문과 불국사 본전을 잇고 있었다.

 

남쪽부터 슬슬 봄바람이 일기 시작하는지 연못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능수버들엔 연두빛 물이 올랐다.

 

 

너무 새빨갛거나 새파랗지 않게 적당히 세월을 머금은 단청의 빛깔이 녹록치 않은 불국사의 역사와 위상을 말해주는 듯. 

 

 

그러고 보니 여기는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짜고짜 저 높고도 날렵한 계단 앞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던 기억.

 

경내에 들어서면 좌우로 복도가 있는데, 울긋불긋한 그 단청이 적당히 까뭇한 그늘에 반쯤 가리운 풍취가 참 좋다.

 

 

그리고 어디랄 것도 없이 적당히 녹슨 듯, 적당히 이끼가 스민 듯한 분위기의 불국사 풍경이라니. 사실 불국사는 1900년대

 

중반까지 몇 채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몰락해가는 낡은 절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후 복원을 거듭하며 현재의 위용을

 

되찾았다는 건데, 그 시절 역시 적잖이 소요되어 이렇게 건물의 맵시나 색감이 자연스러워졌나보다.

 

불국사, 하면 빠질 수 없는 것 두 가지. 석가탑과 다보탑..인데, 근데 다보탑이 이렇게 컸던가. 새삼스레 놀라고 말았다.

 

아쉽게도 다보탑과 마주한 석가탑은 그 탑신을 볼 수가 없었다. 2010년 기단 덮개돌에 균열이 발견되었다나, 하여

 

지금은 완전히 해체해서 수리 중이라고 한다. 2015년이 되어야 다시 공개될 예정이라고 하니 잘 보이지도 않는 가림막에

 

아무리 고개를 들이밀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봐야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 무영탑이라더니,

 

아크릴로 된 가림막에는 과연 다보탑의 그림자만 비칠 뿐, 석가탑은 그림자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불국사 심장부에 위치한 대웅전, 살짝 이르지만 나른하니 기분좋은 봄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를 반짝거리는 스님은 어딘가로 총총걸음을 옮기고 계셨고.

 

 

대웅전의 청록빛이랄까 청동빛에 가깝도록 바랜 나무창살문을 보며 대체 이런 데를 내가 온 적이 있던가, 다시금 패닉에 빠지고.

 

도무지 단청을 화려하게 드리운 이런 오랜 사찰에 들어서면 눈을 사방으로 돌리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뭔가를 늘 놓치는

 

기분이다. 워낙에 오밀조밀한 구석까지 디테일을 챙겼던 옛 선조들 덕분에 전후좌우 위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돌리는 중.

 

 

 

휘영청 하늘을 향해 말려올라간 처마의 곡선을 따라 푸른용 한마리가 고개를 들고 금세라도 뛰쳐오를 듯한 기세로 이빨을 드러냈다.

 

금세라도 콧김으로 불기운을 내뿜을 듯한 이 형상은 날카롭고 커다란 이빨 사이로 문고리를 꽉 움켜물었다.

 

 

 

도무지 사진으로 담기가 쉽지 않은, 수평하거나 수직한 직선도 아니고 사선도 아닌 처마의 저 율동감 넘치는 은근한 곡선미.

 

 

 

그러나저러나, 도대체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우르르 불국사에 몰려와서는 대체 뭘 보고 갔던 걸까. 이토록 아무 기억이 없다니.

 

 

아마도 천년은 훌쩍 넘었을 부처님의 모습을 수호하고 있는 붉은 나무울타리. 저 나무들이 모두 삭아 스러진대도 돌에 새긴

 

부처님은 다시금 천년을 버티고도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먹먹하다.

 

 

음..절에 갈 때마다 눈에 밟히는 건 저런 크고 작은, 높고 낮은 돌탑들. 다른 돌들의 균형을 흐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돌 하나를

 

그 위에 얹는다는 행위가 갖는 기묘한 주술적 효과라거나 기복적인 요소를 인정하더라도, 여기만큼 대대적으로 벌어진 발원과

 

욕망의 탑쌓기는 처음 본 거 같다. 멀쩡한 마당도 모자라 기와가 오른 담장 위에도, 쪽문 위에도, 빗장 위에도 온통 돌탑이다.

 

 

 

워낙 사방으로 문이 나있어서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게 되는 건지 주춤거리게 된다. 게다가 한두개의

 

문만 지나와도 같은 듯 하면서도 또다른 실루엣과 풍경이 전개되는 판이라 마치 작은 미로 속에서 헤매이는 느낌이 들기도.

 

그 와중에 만난 복돼지상. 돼지라기보다는 살짝 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삐죽삐죽 묘사된 털도 그렇지만 저 얍실한 눈빛.

 

 

 

 

그리고, 무려 신라시대 화장실 유구란다. 저렇게 돌을 깍아만든 두 발디딤대 사이로 장차 비료가 될 것들이 보관되었단 이야기.

 

 

다시 돌아내려오는 길, 왠지 들어가던 길과 다르다 했더니 역시. 그러고 보니 불국사로 드나드는 길이 꼭 한 개가 아니었던 거다.

 

이렇게 넓은 부지, 넓은 정원과 수많은 전각들. 대체 난, 고등학교 2학년의 나는 친구들과 어떤 길을 어떻게 밟았던 걸까 싶다.

 

그림자 없는 석가탑과 십원짜리 다보탑의 이미지조차 온전히 간직하지 못했던 걸 보면, 아마도 친구들과 떠들고 뛰어노느라

 

정신없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고. (아마도 전날밤에 몰래 마셨던 술의 뒤끝에 잡혀서 비몽사몽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주 남산에 오르는 길, 삼릉을 거쳐 지나는 골짜기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건 다소 묘한 손모양의 목잘린 좌불.

 

석조여래좌상, 삼릉어귀의 길로부터 출발해 남산에 오르는 길은 예전부터 절도 많고 불상도 많았다나.

 

무려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한데다가 금오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라 제일 즐겨찾는 등산로란다.

 

 

어느새 싱그러운 녹빛이 솔잎바늘 끝까지 충만한 소나무들. 남녘에는 봄이 왔다.

 

바위 위에 새겨진 관세음보살상. 천수관음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은 천년을 이어지고.

 

관세음보살이 굽어보는 경주 남산의 앞마당. 하늘이 좀만 더 파랗게 맑았음 좋았을 텐데 아쉽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석가삼존과 아미타삼존이 새겨져 계시다는데, 머리에 둥그렇게 보름달같은 휘광이 비치는

 

부처님 세분이 계시니 뭔가 더욱더 강력해 보인달까. 이렇게 선으로만 새겨진 부처상은 남산에선 드문 거라고 한다.

 

하얗고 검은 바위의 육중한 옆구리에 명료하지만 가느다란 선으로 한붓그리기하듯 그려놓은 부처님들을

 

눈으로 따르다 보면 중간에 살짝 선을 놓치기도 하고 어지러워지기도 하고. 구도의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은유일 수도.ㅋ

 

그리고 석가여래좌상. 부분부분 깨어져나간 부분도 보이고 뒤의 휘광도 다시 조각붙이기를 한 거 같지만

 

엄숙하고 우아한 표정이나 진중한 앉은 자세가 여전히 당당하다.

 

 

부처님한테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요모조모 얼굴과 몸의 굴곡을 살펴보려는데, 부처님 왠지 우셨던 거 같다.

 

하긴 요새 세상이 위에서 내려다보기에 참 슬픈 일 투성이들일 테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눈물자국이 선연하다.

 

 

남산 정상까지는 안 가고 내려오는 길, 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그다지 좁지 않은 길을 꽉 채워서

 

남산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좌우로 허리를 굽힌 채 소나무 터널을 만들어주고 있던 남산의 노송들.

 

 

그리고 남산 아랫자락에 그리 오래진 않아보이는 망월사라는 절에 잠깐 인사드리러 들어가는 길.

 

나른하고 촉촉한 봄볕이 내리쬐이는 절 앞마당에는 벤치도 늘어서 있고, 가지런히 누워 몸을 달구는 기왓장들도 쪼르르.

 

댓돌 위에는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였다.

 

 

대웅전 뒤로 푸릇푸릇한 기운이 마구 돋아나는 남산을 배경으로 크고 작게 솟아오른 불상과 불탑들.

 

 

 

 

주홍빛 옷을 둘둘 감고 머리를 박박 밀은 승려들에 대한 태국인들의 존경심과 신심은

정말 대단한 거였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가 희끗거리는 할아버지가 두 승려와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았고, 할아버지가 번쩍 치켜든 검정우산이 그 두 젊은 승려의 몸위로

온통 서늘한 그림자를 내리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터미널이나 공항에 있는 의자에도 마찬가지. 늙은 할아버지가 젊은 승려들에 깍듯하게 양산을

받쳐주는 그림에야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들의 '노약자석'에는 어김없이 승려가 들어가있다.

마치 미이라처럼 온몸에 둘둘 천을 감고 있는 듯한 형상이 바로 승려, 그러고 보면 '노약자석'이란

우리나라식의 이름이 적절하지만은 않은 듯. 장애인석, 노약자석의 개념에 담기지 못했던

임산부들을 위해 별도의 스티커를 붙이곤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배려석' 정도의 넓은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지.

어느 골목을 걷다가 문득 호기심이 동해 들어갔던 이름모를 조그만 사원의 뒷뜰. 그리고 빨랫줄에

내걸린 채 산뜻하게 색깔을 내고 있는 승려들의 주홍색 천들. 정말 저 옷에는 앞도 없고 뒤도 없고,

그저 적당한 모서리를 잡고 적당하게 몸에 감으면 되는 걸까 싶어졌다.

그리고, 스님들의 거쳐 주변에서 떠들지 말아달라는 저 절박하고 단호한 손바닥 그림. 실은

저 그림이 떠들지 말라는 건지 들어오지 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스님들이 근처에

계시니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라는 의미란 건 충분히 알고도 남겠다.





타이페이 시내의 남서쪽, 화시제야시장이 바로 인접해 있는 시끄럽고 번잡한 거리에 범상찮은 누각을 과시하는

절이 하나 있다. 서울로 비기자면, 삼성동 봉은사..라기보다는 도심의 조계종이나 실상사쯤으로 비기는 게

맞을래나. 좀더 번잡하고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콕 박혀 있는 그런 느낌.

타이페이 시내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절, 룽산쓰(龍山寺), 용산사다. 근 삼백년 가까이 된 절인데 벌써 몇차례

천재지변이니 전란에 시달려 온 지라 지금의 건물은 2차 세계대전 후에 재건된 거라고 한다. 근데 이 때깔이나

분위기는 거의 이 도시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버티고 있었던 듯한 터줏대감의 포스.

밖에서는 좀 한적하고 외따로 툭 동떨어진 느낌의 사찰이었는데, 안에 들어가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이

바글바글, 단위면적당 인구밀도는 룽산쓰 주변에 비해 꽤나 높겠다.

밑에도 온통 공양물들로 가득하다. 큰 불이라도 난 양 사방에서 태우는 향에서 퍼진 연기는 가실 줄을 모르고,

사방에서 무규칙하게 내부를 돌아다니는 사람 사이에서 순간 길을 잃은 느낌마저 들었다.

사람들은 공양물을 바치고 향을 흔들며 손을 모았다. 조그마한 꼬맹이든, 머리하얀 할머니든, 자력으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많은 거다. 어떨 때는 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펄펄 피어오르는 향로 속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푹푹 찌는 지옥에 와 있는 느낌도 살풋.

본당에 안치된 영험하다는 관음보살 외에도 모시고 있는 신들이 많다. 가이드북에 따르자면, 보현보살, 마조,

관제, 삼신할머니 같은 신불들. 제각기의 목적에 맞는 신을 찾아 '성적 올려달라고', '사랑을 이뤄달라고', '돈벌게

해달라고', 그런 것 쯤일까. 문득 든 생각인데, 요새는 '오래 살게 해주세요'는 별로 신에게 빌 꺼리가 못 되는 거

같다. 보통 드라마보면 의사 소매춤 잡고 비는 거 같던데.

한 바퀴 사원을 돌아보니 온몸이 온통 땀투성이, 게다가 살짝 훈제된 햄처럼 향내랄까 탄내가 시즈닝되어버렸다.

아쉬웠던 점은, 뭐 워낙 도심 복판에 있는 절이라 그렇겠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쉴 만한 공간이 없다는 점. 사실

절이 쉬는 데야 아니라지만, 그래도 한국의 절들처럼 여유로운 부지를 가지고 숨통이 트이는 여지가 없어서.

절 자체의 생김도 그렇다. 단정한 빛깔의 기둥이 열짓고 있는 한국의 담백한 절들과는 영 딴판으로 기둥 하나씩

붙잡고 봉춤 중인 우리의 용님. 화려하고 이뿌지만 폭염 속에서 잠시 앉아 땀 식힐 곳이 넘 아쉬웠다는.

돌아나오는 길, 계속 뒤를 돌아보며 사진을 찍게 되는 건 뭔가 계속 아쉬움이 남고 좀더 돌아보고 싶은

마음때문인 거다. 좀만 더 햇살이 직사하지 않는 시간대에만 왔어도 좀더 멋지게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좀만 더 기다려 해가 기울면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쩌면 정말 어딘가의 모습을

온전히 발견하고 캐내려면, 매 계절, 그리고 하루의 아침점심저녁쯤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봐줄 여유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아마 확실할 거다.

뭔가 복잡하고 정교해 보이는 저 처마의 생김생김은, 손을 뻗어 한번 살살 쓸어보고 싶게 만든다. 나무를 깍아

만들 걸까 아니면 뭔가 틀에 찍어낸 걸까.

룽산쓰에서 벗어나 조금 걷다가 길 건너편에서 마주친 스쿠터 한 대, 갈빛 옷을 저며입고 계신 스님 한분이

운전 중이셨다. 저 분은 룽산쓰의 봄여름가을겨울, 아침점심저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다 알고 있겠지.

살짝 부러워졌다. 사람들이 이토록 꽉꽉 미어지는 곳이 정작 숨기고 있는 표정을 알고 있을 스쿠터 스님.




부처님 오신 날, 혹은 석가탄신일, 초파일이라고 불리는 하고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왜 하필 머릿속을 스친 건

'부처님의 날'이었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 작정하고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갔던 봉은사 풍경이다.

소담하게 피어오른 하얀 꽃이 절간의 처마를 가렸고, 그보다 훨씬 크고 번쩍거리는 연등이 하늘을 온통 가리웠다.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지는 2500년이 넘었는데 끝없는 윤회의 업을 넘어 니르바나의 땅에 도달한 중생은

몇이나 될런가. 이번 생도 피곤하다.

도심 속 '노른자위' 땅에 이런 절이 자리잡고 있다는 건 사실 많이 드문 일이다. 대부분 산좋고 물좋은 벽지에

둑뚝 떨어져 있기 마련이어서, 결과적으로 지금은 갈수록 협소해진 채 보호받는 '국립/도립/군립 공원'에

하나씩 겹쳐져 있는 셈이다.

초파일 연등 접수대. 연등 하나도 꽤나 적잖은 가격이 붙어있다고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연등 하나에 얼마면 여기

몇개가 달리니까 토탈해서 얼마쯤 되는 건가, 하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이뤄지곤, 그 금액에 입이 벌어지기까지.

불과 몇 초 어간에 일어난 일.

천안함 희생자들에 대한 근조 간판, 현수막은 여기저기서 봤었는데, 봉은사에도 하나 있었다. 메시지를 내건

주체에 따라 꽤나 다른 방식의 서술과 뉘앙스가 있었지만, 글쎄. 이미 천안함 사건은 팩트 차원을 떠나 그들의

소설이 단단한 현실 영향력을 갖게 된 듯.

멋지게 용트림중인 나무. 에구구구, 라는 요조의 노래를 BGM으로 깔아주면 딱 좋을 텐데.
 
에구구구, 봄이 왔구먼. 성가시고로.

뒤에 삐쭉삐쭉 선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과 아셈타워, 멀리는 트레이드타워랑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호텔까지.

그런 배경으로 이렇게 고풍스런 누각이 서 있는 풍경, 게다가 빛이 가득 배어나오는 5월의 하늘.

부처님 입상 옆에는 연등을 세팅하느라 정신없으신 분들, 아시바를 저렇게 쌓고 색색의 연등으로 부처님 주위를

뺑~하니 두를 모양. 부처님의 날/초파일/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 여기 꽤나 볼만 하겠다.

선연한 자줏빛의 철쭉..이던가, (정확히) 이름모를 꽃들과 이름표들이 빼곡히 달랑대는 연꽃들.

스님들이 거처하는 절간방, 그 신발꽂이에서 발견한 따뜻해보이는 털신발들.



점심시간, 어제 눈여겨 봐두었던 봉은사 앞의 현수막 앞에 섰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한참 노무현 전대통령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검찰의 강압수사에 대한 공분이 일던 무렵에도

봉은사 앞에는 현수막이 걸렸었다.

"대한민국 검찰의 출입을 금합니다."


종교가 이 땅을 밟고 섰지 공중부양을 하는 게 아닌 바에야, 이런 '현실 개입'은 필요하지 않을까.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이야기하며 청빈하고 정갈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분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지천으로 벌어지는 토목사업에 반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봉은사 정문 앞에는 뜬금없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대학가에도 다시 대자보 문화가 일고 있다더니, 이젠 절에도

대자보가 붙어야 한다. 원래 대자보는 문화혁명기 중국에서 잘 활용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억눌렸고 표현의

욕구가 가장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수단으로 읽을 수 있을 거다. 세련된 방송, 지면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어떻게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

A4용지에 커다란 폰트로 가로뽑기를 해서는, 전지 한장에 여덟장 정도로 붙여넣는 게 대학가의 대자보 기본형태.

봉은사 앞에는 전지 한장에 직접 출력해 낸 '일독을 청합니다'라는 글. 정말, 봉은사에 외압을 넣고 종교에

정치적 입김을 불어넣는 사람들, 일독을 청합니다.

'존경하는 총무원장님'도 한번 봐 주시길. 읽히기 위해 벌려놓아진 글이니만치.




반야사는 조그만 절, 아무리 느그적한 걸음걸이로도 금세 한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이다. 잠시 절 밖의 풍경을

볼까, 아까 버스로 지나쳤던 녹슨 수문이나 보러갈까 하는 참에 보살님 한분이 강림하사 산위 망경대로 오르면

문수전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빠른 걸음으로 오르면 십분이면 오른다길래 헥헥대며 뛰어올랐다.

가까워지는 문수전. 조그마한 전각이 산 위에 살포시 올려놓인 느낌이다.

올라가는 길..이라지만 산길이란 게 종종 오르고 내리는 길이기 마련이어서, 가파른 경사길에는 이렇게 벽돌로

계단을 만들어두기도 했다.
 
문수전에 도착, 빠른 걸음으로 십분 내에 도착하긴 했는데 폐가 불타오른다. 카메라쥔 손까지 떨려서 한참

쉬어야 했다. 날이 풀려야 어서 운동을 할 텐데.

여기서 보이는 반야사의 명물 '호랑이' 모양 돌무데기들은 살짝 야윈 듯하다. 호랑이라기보다는 고양이..?

두서없이 움직이던 시선을 멈춘 곳은 저 아래쪽, 호랑이를 바라보시는 듯한 방향으로 염불을 외는 스님들과

다른 파워블로거 일행들.

그들을 조금 거슬러 오르면 인상적인 자취를 남기며 쎄하니 흘러내리는 물살이 있었다.

파노라마를 한번 찍어서 이어만들어볼까 했지만 실패, 대신에 문수전 문짝에 대고 찰칵찰칵. 스님의 센스겠지,

철사를 도롱도롱 이뿌게 말아서 손잡이로 쓰고 계시다니. 저런 거 넘 좋다.

내려다보면 바로 깍아지른 절벽의 느낌, 안전을 담보하는 엉성한 울타리. "튼튼하게"라는 주문 대신 "불심"이

들어간 게다. 저렇게 만자가 연이어지도록 하나하나 자르고 붙이기도, 게다가 색칠까지 꽤나 품이 들었을 텐데
 
말이다.

다시 문수전서 내려가는 길. 올라왔던 길과 다른 길을 택해 내려섰지만 역시나, 전반적으로는 내려가야 하지만

곧잘 다시금 올라서기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정말 여기 때문에라도 반야사는 한번 다시 와봐야겠구나, 싶었던 문수전.

반야사와 문수전을 떠나는 길, 가을길이래도 믿겠다 이건.

길에서 만난 잠수중인 나뭇가지. 초등학생도 다 아는 '물의 굴절현상'으로 가지가 세방향으로 갈라졌다.

애초 문수전을 몰랐으면 여길 와서 이 풍경을 찍고 싶었던 거다. 파랗게 녹슨 수문이 해바라기하는 투실한

고냥이마냥 조용히 하천을 굽어보는 표정.

하아, 지금쯤이면 좀더 연두연두해지고 초록초록해져서 따끈따끈하게 데워졌을 텐데.




절을 찾아가는 길은 꼭 산과 내를 찾아가는 길이 되곤 한다.

다독다독 잘 다져진 흙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길 끝쯤, 더이상 들어갈 수 없다 싶은 깊숙한 산허리춤에서

문득 산사가 나타나는 거다.

불끈 진로를 비틀고 내려닫는 나뭇가지가 수면을 희롱하고 있다.

백화산 반야사 들어서는 입구. 커다란 대문이 반긴다.

선명한 단청보다 눈에 들어왔던 건 배불뚝한 기둥에 그려져 있던 네 마리 용.

사천왕상을 대신해서 휘감겨있는 네 마리 용인가보다.

흑백톤으로 바꾸니 또 다른 분위기가 나는 것 같다. 이른 봄 실개천을 가로지른 돌다리.

500년 묵었다는 나무가 굵고 커지지는 않고, 꼬불꼬불 안으로만 무성해졌다. 배롱나무랬던가. 메롱이다.

삼층석탑의 단단한 기단 위에 사면으로 네 명 부처가 앉았다. 그리고 그보다 많이 올라앉아 있는 돌멩이같은

납작한 동전들. 어떻게 보면 부처를 향해 가르침을 청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곳, '출입금지'라는 두꺼운 붓글씨가 멋지다. 금지의 '지'자가 살풋 앞으로 구부린 모습이

이런 딱딱한 표현을 쓰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종교인답게 양해를 구하는 것만 같다.

무너져 내릴 듯 살짝 위태로운 산방의 대나무울타리.

백화산 산신령의 호랑이가 출현하는 국내유일의 도량, 백화산 반야사. 절 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낙석무더기들이 흘러내린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는 건데, 글쎄. 그냥 저건 많이 휘어진 나이키 로고다.

아까 지나친 삼층석탑, 기교와 크기와 가용자원의 차이일 뿐 그것과 같은 정성이 땅에 발딛고 하늘로 뻗었다.

다소간 끈적해 보이는 개울물이 휘여휘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엉성한 나뭇가지로 까칠한 윤곽을 가리던 산이

너울너울해진 수면 위에 내려앉아 한결 부드러워졌다.

돌탑위에 또 돌을 올리자니 이미 완결되어 버렸다 싶은, 오를 대로 오른 돌탑들 뿐이다. 괜찮다. 위로 오를수록

작고 가파르고 위험해지는 돌탑이 정점에 달했다 싶으면 또 다시 그 옆에 큰 돌 하나부터 차분히 박아넣고

시작하면 되는 거다.  

오밀조밀 사이좋게 쌓여있는 땔나무들이 이쁘다. 그 땔나무가 토해내고 있을 흰연기가 굴뚝을 거쳐 사방으로

뽈뽈뽈 번져 나갔다.



▶◀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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