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상징과도 같은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라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 장대한 모습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흥미를 끌었던 건 바로 그 남쪽에 인접해 있던 '메모리얼 투 더 머더드 쥬스 오브 유럽', 그러니까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정도로 번역될 법한 기념공원이었다. 저렇게 네모 반듯한 시멘트 덩어리를 마치 관짝처럼 제작해서는 오와 열을 맞추어 빼곡하게 설치해 두었다.

마침 내가 갔을 때, 왠지 굉장히 고독하거나 심난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있는 젊은 친구가 있길래 뒷모습을 살짝. 이럴 때 온갖 상상을 해보게 되는 거다. 유대인일까, 친지 중에 희생자가 있는 걸까, 2차 대전의 상처가 어떤 식으로 남아있는 걸까. 등등.


어떻게 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 단순한 네모반듯한 오브제들로 인해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골목이 생기고, 그렇게 서로 예기치 않게 만나는 순간들이 반복되는 경험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유대인들이 겪었던 역사적인 희생과 마녀사냥, 그로 인해 흘린 피가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도 없지만, 최소한 이런 기념공원에서 한번 되짚어 생각해 볼 수 있단 점에선 절대 헛되지 않았다.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는 과선배랑 모처럼 만나서 진하게 술을 마시던 날.

보궐선거라거나, 북한 핵 문제, 남북관계라거나 동아시아 정세. 북한 내 정책결정자를 개인으로

볼지 그룹으로 볼지라거나, 대북정책의 근간이 되는 북한의 자멸 여부에 대해서라거나, 한-미,

한-EU FTA에 대해서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라거나, 진보정당들이 원내외에서

어떤지라거나. 근대국가니 현실주의니 따위, 오랜만에 듣는 국제정치학의 jargon들이 우르르.


뭐, 대학다니며 늘 나누던 이야기들이었다. 근대니 탈근대니, 국제정치가 어떻고 세계 정세가

어떻고. 국내 정세가 어떻고 어떤 정치인은 어떻고, 파급 효과는 어떨 거 같고. 개별 이슈에

종횡하는 표피적인 것들이 아니라, 구조와 동학에 대해 집중하는 이야기들. 국가 차원이나

세계 차원에서 정치와 정세를 논하는, 말하자면 정말 '고담준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일 수

있지만 학문쪽으로 계속 나갔다면 굉장히 진지하고 중요했을 이야기들.


누구는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이 정부의 외교라인 씽크탱크로 들어간 교수진이 어떻고,

우리과 교수 누구는 한국의 대표선수로 외국 정계, 학계에서 인정받았고, 누구는 D.C로, 뉴욕으로

유학을 가서 아카데미아로 빠졌다거나 따위의 이야기들, 그리고 선배도 외교분야 보좌를 하다보니

공부를 더해야겠다며 유학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냥 나도 서른 즈음 되면 그렇게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 무작정 생각했었다.

나름 '이데올로그'가 되겠다며 정치학이던 IR이던, 사회학이던 뭔가 잡고서 책상물림하며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국가 이외의 다른 행위자들이 등장하는

국제관계를 볼 수 있는 국제정치이론을 만들겠다느니. 그런 식의 '고담준론'을 교환하며 머릿속에

세계를 집어넣고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왠지 그런 이야기들이 내 일상과는 맞지 않게

붕붕 뜬 이야기 같기도 하고, 왠지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사실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열의도 그다지 많진 않은 거 같다. 못 가본 길에 대한 호기심이나

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던 공부란 건 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공부였던 거다.

뭔가 대단한 논리나 통찰을 제공해서 바뀔 세상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아카데미아로 빠진

삶에서 내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올곧은 선비의 이미지보다는 왠지 낙향해 초야에 묻혀사는

폐포파립의 한량 이미지에서 더 매력을 느끼는 거 같기도 하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