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폴 차이나타운에서 이십분 정도 남쪽으로 걸어가다보면 나오는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 red dot design museum.


매년 디자인이 출중한 제품들에 수여하는 상인 레드닷 어워드를 받았거나 그에 준할 만큼 훌륭한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인데, 아직 한국사람들한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듯 하다. (가이드북에도 안 나와있는 듯)



이쁜 빨강색으로 온통 칠해진 맵시있는 건물이 멀리서부터 눈길을 끈다. 


그 건물 전체가 뮤지엄인가 했지만 그렇진 않고, 이렇게 생긴 샵을 포함해 일층을 쓰고 있었다. 샵에도 디자인이


살아있는 제품들을 꽤 많이 전시, 판매하고 있었지만 가격대가 만만치 않아 패스.


샵 안을 둘러보고 이렇게 생긴 문을 지나 뮤지엄으로 입장. 입장료는 성인 8싱가폴달러, 학생 4싱가폴달러.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전시품은 이제 꽤나 널리 알려진 이 시계. 한국인 디자이너가 만든 이 시계는 시각장애인들이


시계를 감촉하는 것으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고안된 시계다. 가운데서 뱅글뱅글 도는 쇠구슬이 시침이던가.


그리고 3D 퍼즐형태로 조립분해할 수 있는 반지. 



디자인이 매끈한 자전거다 싶더니 역시. BMW에서 만든 자전거.


목하 국내에서도 대유행중이라는 인디언텐트의 원조. 



눈꽃 모양의 육각형 부품들이 이어져 만들어진 커다란 전등갓.



싱크대라거나 주방용품에 대해서도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고민은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보관 및 활용이 용이하도록 고안된 물병으로 장식된 한쪽 벽면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입체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디자인된 타일로 꾸며진 한쪽 테이블 위엔 올해의 레드닷 수상작 도록이.


갈수록 기계적 아름다움에 대해 눈이 돌아가는 건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이런 식의 나염이 살아있는 의자라거나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미려한 휠은 누가 봐도 이쁘지 않으려나.



제품들이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빙 둘러선 가운데 공간에는 기업 디자인과 포스터 작품들이 전시.



중간중간 한국어도 보이고 한국에서 쉽게 접했던 것들도 보였는데 예컨대 AP통신의 한국어 버전 명함 시안이라거나


NHN의 환경친화적 명함 아이디어 시안이라거나. 


그리고 현대차에서 진행했던 전화기-우산 디자인 아이디어도 전시되어 있었다. 전화기를 쓰기 편한 우산, 이라는


컨셉을 생각해 내는 것도, 또 그걸 어떻게 구현시킬지 방법을 생각하는 것도 모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각종 전시회라거나 공연, 아니면 공공 목적에 부응하기 위한 포스터들. 꽤나 많고 한장 한장 디테일한 설명이 있었지만


몇몇 눈길을 잡아끌던 아이들만 사진으로 담아봤다.


포토그래퍼들을 초대해 강연을 연다는 걸 고려한 포스터. 사진기에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피아노학원의 포스터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다. 블라인드를 피아노 건반인 듯 어루만지는 장면들로 가득.


전쟁과 평화 뮤지컬(인지 오페라인지)의 포스터. 전쟁시와 평화시의 레드크로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으랴만은 한장의 이미지는 백마디 말보다 강력하다.


아동 성폭력이라는 불편하고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이미지화할 수 있을까. 얼음에 갇힌 꽃이라면 어떨까.


혹은 쇠고랑으로 구속받는 꽃의 이미지라면 어떨까. 


와인의 맛과 향과 색을 포스터에 담고 싶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코카콜라의 광고나 디자인적 요소들은 이미 평판이 자자하지만, 여전히도 이렇게 신선할 수 있는 거다. 워낙 깊이


각인되어 버린 로고 디자인의 일부만을 활용해서도 바로 코카콜라를 연상시킬 수 있는 유려한 디자인.

이건 내가 사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들었던 아웃도어 용품. 가볍지만 단단하고 심플한 테이블과 의자.


이제 뮤지엄이나 갤러리에서 애플의 제품들이 예술품인 양 전시되어 있는 건 놀랍지도 않다. 


이렇게 예술 작품처럼 핀 조명을 맞으며 홀로 서 있어도 전혀 주눅들거나 허름하지 않은 디자인이라니.


이 시계를 샵에서 팔길래 사고 싶었는데. 돈이 웬수랄까나.ㅋ


그리고 모빌처럼 모양이 변화하는 전등갓. 꽉 오무리고 있을 때도 활짝 열려 있을 때도 빛이 좋다.


스토케(Stokke)의 각종 아기용품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BMW의 차량용 베이비시트가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대나무로 만든 안경같은 것도 있고.


다소 민망하지만 참신하고 단아한 형태의 성인용품도 전시되어 있어서 꼼꼼히 살펴보기도 하고.


GPS기능이 내장되어 지갑의 위치를 실시간 파악할 수 있는 지갑. 자주 잊어버리는 사람들에겐 희소식인 아이템.


플라스틱으로 만든, 그렇지만 세련된 플루트. 중학교 때 싸구려 모양 플라스틱 단소로 맞았던 기억이 왜 나는 거지.


디지털 저울이 자체에 내장된 여행용 캐리어.


아주아주 매끈하게 생긴 알루미늄 책꽂이. 


해바라기 모양의 샤워기.


집에서 조립해서 쓸 수 있는 컴퓨터. 예전엔 라디오를 조립하는 키트가 있더니 이제 컴퓨터 조립 키트가 파는구나.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꼼꼼히 볼 만한 아이템들이 한 가득. 그래도 세시간 정도면 충분했던 거 같다. 


출장으로 싱가폴을 갈 때마다 자주 들른다는 친구의 이야기로는 전시품들도 규칙적으로 바뀌니만치 갈 때마다


만족스럽다고. 다음에 또 싱가폴 갈 일이 있으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뮤지엄이다.




샌프란시스코, 정확하게는 나파밸리를 진원으로 하는 강도6.0의 지진이 발생한지 일주일 후. 여진이 있지는 않을지, 피해가 크다던데

 

제대로 돌아볼 수는 있을지 걱정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막상 가보니 아무런 특이점을 찾아볼 수 있었던 나파밸리.

 

작년말에 돌아본 곳이 주로 소규모의 작은 와이너리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나파밸리에서 세번째로 크다는 베린저Beringer 와이너리를

 

찾아보았다. 확실히 포도밭도 넓고, 와이너리 투어도 훨씬 더 체계적인 모습. 우선 이렇게 각지의 토질을 비교해놓은 장면부터.

 

운좋게도 9월초는 포도를 수확하는 타이밍이라 한다. 곳곳에서 검은 보랏빛으로 통통하게 익은 포도송이들이 보인다.

 

 

 

 

 

독일에서 넘어온 와인제조 장인의 후손들이 가업으로 잇고 있는 곳이라, 와이너리의 이름도 그렇지만 건물이나 정원도 독일 느낌.

 

 

 

열시부터 시작한다는 와이너리 투어 이전에 여유있게 도착했는지라, 마치 조그마한 공원처럼 이쁘게 꾸며져 있는

 

와이너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큼한 포도향과 허브 향기가 진동하는 아침공기를 흐트려놓았다.

 

 

 

그리고 와인 테이스팅 투어 시작.

 

 

베린저 와이너리의 가장 큰 와이너리는 독일식을 따서 만든, 야산에 서늘한 동굴을 파고 이를 꾸며놓은 와인저장고.

 

그 앞으로는 건물을 세워 와인 저장과 포도 착즙, 숙성 등의 과정을 같은 공간으로 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와인저장고에서의 사진은,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밖에 없어 노이즈가 엉망.

 

 

그리고 테이스팅. 베린저의 대표 와인들 세 가지를 고루 맛보는 기회였는데, 단순히 일정 시간내에 부어라 마셔라

 

하는 테이스팅이 아니라, 기본적인 와인 마시는 방법에서부터 어울리는 안주를 고르는 방법까지 세심하게 교육해주었다.

 

와인과 안주와의 마리아주가 흔히 생각하듯 레드와인-고기, 화이트와인-생선 식으로 간단하지만은 않단 이야기.

 

 

 

 

테이스팅을 마치고 둘러본 샵. 고풍스런 느낌의 스테인드글라스하며, 어두침침한 가운데 농밀하게 깔린 와인 향기하며.

 

나파밸리나 소노마밸리나, 와이너리들의 기념품샵은 왠지 제각기 개성있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와인 관련 악세서리들이나, 비네거 소스, 와인향을 첨가한 비누 같은 것들.

 

 

 

 

 

그렇게 테이스팅과 와이너리 투어를 마치고 샵에서 한보퉁이 지르고 나니까 어느덧 두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글쎄, 시간내 무제한 리필을 해주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소규모 와이너리 투어도 좋았지만, 소믈리에 급의 가이드가

 

와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재미있게 풀어주는 체계잡힌 투어도 무척이나 좋은 경험이었던 듯.

 

 

* 와인과 음식과의 궁합에 대한 다이아그램 (by Beringer)

 

 

나파밸리와 쌍벽을 이룬다는 미국 서부의 와이너리 마을, 소노마밸리. 오늘 아침 갑작스런 강진 소식에 깜짝 놀라서

 

새삼 작년 11월경의 사진들을 되찾아보게 되었다. 소노마밸리를 상징한다는 일곱개의 깃발 의미부터 되새기기.

 

 

 

 

나파 밸리나 소노마 밸리의 여느 와이너리들이 그렇듯 이 곳 역시 초창기 시절의 허름하고 낡은 착즙기라거나 기타 와인 제조에

 

필요한 장비들을 한켠에 전시해 두고 있었다. 먼지 내려앉고 허름한 그 자체로 이 와이너리들의 전통이 숙성되는 모습이다.

 

 

오크통에 저렇게 새겨넣는 와이너리들만의 문양과 브랜드 네임들,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통들은 여전히 반질반질하다.

 

 

 

 

제법 서늘한 냉기가 감돌던 와이너리의 와인 저장고이자 시음장, 맛을 음미하면서도 최대한 신속하게 최대한 많이 마실 수 있도록

 

몇 잔을 마시고 나니 오전에 들렀던 나파밸리에서 축적한 취기와 맞물려 더욱 기분이 업되는 느낌.

 

와이너리를 이끌게 될 젊은 피 중 한 방울의 와이너리 소개와 더불어 포도 품종에 대한 설명도 듣고.

 

 

마치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열주문을 연상케 하는 대리석 빠방한 공간들을 둘러보며 얼콰한 술기운을 즐기다 보니,

 

와인 익는 냄새만으로 어느결에 만취해 버린 듯한 단풍나무를 마주하기도 하고.

 

건물 안에서는 또다른 팀이 와인을 시음하며 느긋해진 매무새로 즐기는 중이다.

 

 

 

'세바스차니'였던가, 와이너리의 이름. 이름이 뭐였던간에, 내겐 나파와 소노마에 산재한 수많은 와이너리는 비슷한 이미지로 남았다.

 

 

붉은 단풍빛 와이너리, 바싹 마른 채 바람에 나뒹구는 포도잎들, 그리고 한층 더 짙고 무거워진 와인의 맛과 향.

 

꼭 같은 와인이었대도, 이런 날씨와 이런 햇살이 아니었다면 좀더 맛이 가볍고 연했을 거 같다. 아무래도 신세계 와인이다보니.

 

지진 피해에서 모두 무사하시기를. 더이상의 피해는 없길 바라며.

나파 밸리의 중심가, 나파 다운타운에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트렌디한 와인샵들과 함께 레스토랑과 베이커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점가가 형성되어 있다. 제법 와인 관련한 아이템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캘리포니아 와인과 함께

 

간단한 점심을 챙겨먹는 것도 좋을 법한 지점이다. 마침, 11월의 나파밸리는 담쟁이가 익어가는 계절.

 

 점심을 간단하게 먹으려는 사람들의 심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유명하게 인지도가 높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프렌치 베이커리 앞에서 어마어마하게 늘어선 줄.

 

 

 샵들에서 구경할 수 있는 재미있는 소품들과 와인 관련 아이템들을 구경하면서 이곳저곳에 인심좋게 널려있는 음식들을

 

시음시식하다 보니 딱히 배가 고픈 줄도 모르겠더라.

 

 

 

와인병을 재활용한 생활 소품들도 많이 판매되고 있었는데, 이런 그럴듯한 조명 역시 와인병을 그대로 활용한 사례.

 

와인병을 녹이거나 이어붙이거나 아이디어가 반짝거리는 상품들도 있었지만 촬영이 금지된 경우도 왕왕 있어 촬영 실패.

 

 

 나파 밸리의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는 와인 트롤리, 저속으로 운전하는 버스라 그런지

 

창문도 없고 관광객들은 모두 탁 트인 창문을 바라보고 옆으로 앉아있다.

 

 

 온통 빨갛고 노랗고, 그리고도 푸릇푸릇한 나파밸리의 가을.

 

 

캘리포니아 와인의 본산 나파 밸리에서는 자전거 보관소도 와인 숙성을 위한 오크통을 재활용해 만들어 놓았다.

 

다운타운에서도 중심가에 있는 마켓플레이스를 가로지르는 길. 골목 곳곳에서 향긋한 와인 향기가 번져온다. 

 

 

  

다운타운 곳곳에서 마주하는, 그야말로 그림같은 집들과 잘 가꿔진 정원. 그리고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단풍.

 

오퍼스 원의 양조장이었던가, 나파밸리의 아름다운 길을 달리며 가이드 아저씨가 알려줬던 커다란 와이너리.

 

 

 

 

샌프란시스코의 11월초, 짙푸른 청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 아래 높다란 나무 전봇대들이 사이좋게 서로를 지켜선 나파 밸리.

 

보통 샌프란시스코 북쪽의 나파 밸리, 소노마 밸리는 당일치기 와이너리 투어로 많이들 간다는데, 그 편이 시간도 절약하고

 

비용 면에서도 나쁘지 않으며, 게다가 운전 걱정없이 와인을 맘껏 '테이스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참가했던 투어는

 

아침 9시 출발해서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 두 곳, 소노마 밸리의 와이너리 한 곳을 돌아보고 오후 6시에 돌아오는 코스.

 

 10월말에 막 수확을 마쳤다는 야트막한 포도나무 줄기들이 홀가분해 보인다.

 

 

첫 와이너리는 가족들만으로 4대째 운영하고 있다는 소규모지만 착실한 와이너리였다. 4대째면 근 백년에 가까운 시간을 버틴 셈이다.

 

 

 

 주로 피노누아와 샤도네이를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다는 와이너리의 향긋한 내음 가득한 창고 안에서 입맛을 다시며 설명을 듣고는.

 

 

 거침없는 시음. 가이드 아저씨는 적당히 세네 잔 마시도록 권유했으나 품종별로 네댓잔을 마셔버린 듯. 벌써부터 보람찬 투어다.

 

 

 와이너리 바깥을 둘러보다가, 조금만 더 일찍 와서 수확 전의 포도밭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짙게 남기고.

 

 

 건물 외벽에 농담처럼 붙어있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웃어주기도 하고,

 

 시뻘겋게 익어가는 담쟁이 덩굴 잎사귀에 렌즈를 이렇게 들이댔던 걸 보니 벌써 취했던 거 같기도 하다.

 

잠시 차를 달려서 도착한 두번째 와이너리. 이번에는 좀더 대량생산을 하는 커다란 와이너리였다. 미국의 슈퍼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브랜드이기도 한, SUTTER Home 와이너리.

 

 

 

 아무래도 좀더 규모가 커서 그런지, 이전에 쓰였을 법한 장비들이 곳곳에 진열되어 있기도 하고 와인병들도 이쁘게 전시되어 있고.

 

좀더 전문적인 와이너리 혹은 시음장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가오잡고 일렬로 늘어놓은 와인잔의 그럴듯함과 테이스팅을 권하는 아저씨의 박식하고 전문적인 설명까지.

 

 시음했던 건 이렇게 세 가지. 레드와 화이트, 그리고 로제 와인이었는데 역시나 거침없는-무제한에 가까운-테이스팅의 향연.

 

 

 

  이 곳 역시도 그리 만만한 역사를 가진 곳은 아니어서, 곳곳에서 오랜 세월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듯 하다.

 

  

 그리고 이 곳의 장점은 시음장과 매장 밖으로 나가면 이렇게 이쁜 정원과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다는 점.

 

급하게 마신 와인에 잠시 혼몽스러워질라 치면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 한모금 마시고 다시 들어가서 다시 시음을.

 

그 정도로 테이스팅을 위한 시간이나 배려가 여유로워서, 와인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만큼 편안했던 거 같다.

 

 

어느 와이너리나 자체의 기념품샵 혹은 매장을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 이날 돌아본 세 곳의 와이너리 중에서

 

가장 큰 매장을 갖추고 있었던 SUTTER 와이너리. 색색의 병들도 이뻤고, 와인과 함께 할 스낵류나 안주 시식도 넉넉했다.

 

 

그리고 기념품점에서 마주쳤던 와인에 대한 온갖 상찬의 문구들이나 그림들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끌었던 셔츠 한 장.

 

 

 

 

블레드 호수를 천년동안 내려다보고 선 블레드 성은 무려 100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 자리한 옛성이다. 올라가는 길은 이리도 험하다.

 

 

 

이런 휘장, 중세 시대 성벽에 나부낀다거나 기병대 간의 전투가 벌어질 때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하늘로 올라가는 그런 깃발이다.

 

 

조금 가빠진 숨을 가누며 성 안에 들어서면 블레드 호수와 그 주변을 둘러싼 호텔이니 레스토랑이니 까페들이 한눈에 내려보인다.

 

 

그리고 옛날에 쓰였을 우물이니 초소니 건물들이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나름 굉장히 집약적인 공간활용.

 

 

그리고 성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블레드 호수의 한쪽 둔덕.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에서 되려 촉촉한 느낌의 풍경이다.

 

 

 

그리고 호수 한 가운데 있는, 아무래도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는 이걸 참조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블레드 섬.

 

블레드 호수 주변에 있는 높고 낮은 구릉들은 관광객들이 즐기는 트레킹 코스 여러곳을 품고 있다고 한다.

 

단 이렇게 흐리거나 비가 왔거나,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중간중간 끊겨있는 경우에는 입산 통제.

 

 

이때만 해도 아직 비가 오지 않아서, 저렇게 꼬물꼬물 조그마한 배가 블레드 섬에 오가는 걸 보며 나도 저걸 타면 되겠구나, 했는데.

 

 

 

 

동전을 넣으면 기념주화로 바꿔준다는 조그마한 프레스기. 궁금하긴 했는데 나 이외엔 여행자도 안 보여서 걍 포기.

 

 

덩굴손이 건물 외벽을 꼼꼼히도 감싸버린 운치있는 옛 건물은 빨간 지붕조차 적당한 느낌으로 퇴락했다.

 

성 내에 있는 '대장간' 공간에서 여전히 쇠를 만지며 이러저런 기념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나 보다. 역시나 용의 형상이 지천이다.

 

성 안에 있는 역사관이나 유물관 같은 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옛 시절의 용 이미지들.

 

 

이렇게 생긴 사람들이 블레드 성과 호수 주위에서 수렵을 하고 농경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때에도 역시 드래곤이 짱.

 

 

성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블레드 섬. 그리고 그 너머 더욱 꾸물거리는 하늘.

 

 

대장간 내부에 들어왔더니 망치와 모루, 그리고 온갖 공예품들과 장식품들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요녀석이 땡겨서 슬쩍 만져보기도 하고 가격도 물어보고 디스카운트를 시도하다가 실패. 깨끗하게 포기. (너무 비쌌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성당. 제단 위에 있는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성모상이 너무 맘에 들어서 슬쩍 사진을 찍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고, 나는 망루 같은 곳에 잠시 기대어 비가 금방 그치지는 않을지 가늠해봤지만, 갈수록 굵어지는 빗발.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망루 주위를 두른 울타리랄까, 비둘기와 하트 문양이 번갈아 교직하는 그런 하얀 울타리.

 

 

블레드 성의 입장료는 8유로, 그런데 티켓에 1.5유로 짜리 쿠폰이 붙어있어서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음식을 사먹을 때

 

할인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일 쌌던 커피가 3.5유로였던가 하여 결국 돈을 더 쓰게 만드는 마법의 쿠폰.

 

그리고 블레드 성에 가게 되면 꼭 들르라고 강추하고 싶은 와인 저장고! 중세 수도사처럼 생긴 수염 북실북실한 아저씨가 직접

 

오크통에서 와인을 병에 옮겨담아서 저렇게 마개를 하고 라벨을 붙여서 마지막엔 봉인까지 해준다.

 

그런 특별한 와인 말고도 슬로베니아에서 나는 온갖 와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인근 지역에서 '블레드'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들도 꽤나 많이 보였다. 가격대도 다양하고, 아저씨도 굉장히 친절하고 수다스럽게 와인도 소개해주고

 

북한의 핵실험과 일본/중국의 단체여행객이라거나 싸이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최근엔 일본의 단체여행객들이 깃발을 하나 들고 우르르 왔다갔다 하는데 시즌이고 뭐고 없이 엄청 많이 온다고 하길래,

 

이제 이삼년 후면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올 거라고 지금부터 한국어 한두마디는 연습해두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해줬다.

 

그렇게 아저씨랑 실컷 떠들며 한잔 따라주신 와인을 홀짝대다가, 결국 와인 한병을 사들고 뚜껑을 따달라고 부탁해선

 

더욱 거세진 빗발 속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와인을 한 병 들었으니 뭐 딱히 걱정할 것도 없고 하여.

 

 

 

 

 

원래는 가족의 무슨 좋은 일이 있다거나 큰 일이 있을 때 따겠다고 아껴뒀던 돔페리뇽.

 

스파클링 와인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프랑스 샴페인 지역의 대표적인 명주, Dom Perignon의 발음과 표기에 대해서는

 

마치 미국식 발음인 샴페인 대신 프랑스식의 샹파뉴가 맞다느니 왈가왈부가 있겠지만, 일단은 '돔 페리뇽'으로 통일된 듯.

 

차 트렁크에 넣어두고 서울에서 포항까지 달렸더니 자연스레 칠링을 되어서 선뜻하고 서늘한 유리병의 촉감.

 

유럽식 방패 모양의 라벨이나 세밀한 포도덩굴 그림, 색감이 고급스럽다.

 

 

 여느 와인들과는 달리 스파클링 와인의 경우 코르크마개가 굉장히 단단하고 압축적으로 박혀 있어,

 

한번 빼내고 나면 다시 꽂기도 힘들다. 마개를 처음 뽑을 때 힘든 건 말할 것도 없고. 코르크마개에도 새겨진 방패문양.

 

한 때는 이런 코르크 뚜껑도 다 모아놓고 그랬었는데.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 버렸다.

 

(습관을 버리다. 그리고 남은 것.)

 

이번에도 못내 아쉬워서 사진만이라도 남기겠다며 이리저리 굴려가며 사진으로 담는 중.

 

1999년산이라 그런지 코르크 마개의 절반 가까이 샴페인이 흡수되었다. 아무래도 집에서 보관할 때도

 

기포가 빠질까봐 눕혀서 보관했으니 저렇게 스며드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코르크마개, 그리고 철사로 된 와이어의 이중 안전장치. 그렇게 1999년부터 지금까지 유리병 안에서

 

잠자고 있던 돔 페리뇽의 맛은 못 전할지언정 색깔만이라도 전해야 옳겠으나, 펜션에 와인잔이 제대로 된 게

 

없어서 잔에 담긴 사진은 찍을 수가 없었다는 게 아쉬울 따름. 작고 가벼운 탄산방울이 보글보글했는데.

 

 

맛에 대해서는, 그렇게 상큼하고 산뜻하면서도 그윽한 후향이 남는다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정도.

 

 

 그리고 이전에 포스팅했던, 쓰잘데기없이 모아놓기만 했던 와인 코르크마개들 사진을 다시한번.

 

 

 

 

 

이쁘다 싶은 까페 안에서도 막상 손에 들린 카메라를 여기저기 향하며 사진에 담기란 쉽지 않은 거 같다.

 

그런 흔치 않은 기회는, 까페 안에 손님이 달랑 나 혼자라거나 각자의 뭔가에 열중한 사람들이 조금 있을 때 정도랄까.

 

 

 올림픽 공원 근처 우유빙수가 제법 맛있는 어느 까페에 갔을 때, 마침 시그마 18-250렌즈 신형을 시험하던 차에

 

잔뜩 찍어본 까페 안 풍경.

 

 

 

간결하고 매끈하면서도 뒤로 무난하게 잘 젖혀질 거 같은 의자들이 쿠션을 하나씩 품고 있기도 하고.

 

 

 벽면에 장식된 그림이나 자잘한 소품들에 눈길이 간다.

 

 의자 위에는 잡지가 자연스레 누워있기도 하고.

 

 

 고양이 인형이 발딱 서 있는데 저건 태엽시계인 거 같은데 움직이질 않으니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고.

 

 

 까페 공간보다 훨씬 크게 마련된 공간에는 와인을 팔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나름 독특한 소품들이 보였다.

 

 

 이런 와인 창고를 하나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어느 주류 매장에 가던 꼭 한 번 해보는 생각.

 

 

일어서기 전, 방금까지 내 옆에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따뜻한 빛을 떨궈주던 스탠드를 한번 슥 봐주고 바이바이.

 

 

 

 

 

뉴욕의 문화 거리, 소호에서 찾은 멋진 레스토랑 B&B. 무슨 약자였더라, 버거 앤드 비어였던가, 그 원래 의미는

 

잊어버렸지만 바에 서서 저렇게 열렬히 손님을 환영해주던 그녀는 꽤나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온통 소호의 골목을 향해 열린 창문 틀 위에는 와인병들이 빼곡하게 빛을 가리고 섰다.

 

그리고 그녀는 바에서 초가 담긴 컵들에 하나씩 불을 붙이며 테이블마다 한 개씩 세팅하도록 했고.

 

 

때로는 손님이 주문한 칵테일을 만드느라 쉐이커를 출렁거리며 구불구불한 금발 웨이브를 출렁거리도 했고.

 

우리가 주문한 수박 샐러드는 언제 만들었나 몰라. 어쨌거나 신선한 조합이었다. 수박과, 치즈와, 살짝 튀긴 고추까지.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니 더욱 배가 고파져서, 선그라스라도 썰어먹을 듯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오후 내내 걸어다니고 있었던 거다.

 

선그라스를 큼지막하게 토막치기 전에 다행히 눈앞에 나타나주신 고기.

 

두툼한 스테이크 고기는 미국 어디서 먹으나 마찬가지인 듯. 마음껏 레어의 육질을 즐기며 핏물을 흩뿌렸지만 사진은 없다..

 

사진이 좀 흔들렸지만 그녀의 머리칼을 보고 있으면 어차피 뭔가 계속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으니, 그닥 나쁜 사진은 아니..랄까.ㅋ

 

그녀 뿐 아니라 그 역시, 바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멋졌던 멋진 레스토랑이자 와인 펍인 소호의 B&B.

 

 

 

어버이날 전날, 부모님께 조용필 콘서트를 보여드렸다. 다녀오시더니 정말 너무 좋았다 하시며

나처럼 타투를 했노라고 자랑스럽게 손등을 펼쳐보이시던 부모님, 손등을 모아 사진을 찍어드렸다.

엄마의 두 손, 아빠의 한 손, 총 세 손등 위에서 용필 오빠 스티커가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침 아버지 생신이 어버이날 즈음인지라, 겸겸해서 동생이 준비한 케잌과 아이스와인.

초에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훅 불어 끄는 그런. 참, 초 갯수가 많기도 하구나 싶다.

촛불이 뭉쳐져서 화르륵, 굉장한 불길을 뿜어내는 통에 야윈 초가 구부러지고 다 녹아내리는 작은

불상사도 있었지만 여하간. 케잌이 잘리면 바로 처묵처묵할 수 있도록 일렬로 대기중인 앞접시들.


금요일 회사에서 기회가 닿아 어버이날 맞이 꽃바구니랄까, 도자기로 된 사각그릇에 담긴 거니까

바구니라긴 어폐가 있고, '꽃사발'이라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 큼지막한 놈을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드리기도 했다. 케잌과 와인을 마시는 테이블을 장식한 내 꽃사발.

와인을 따는 건 늘 내 몫이다. 와인을 따고 손목을 돌려 잔에 따르는 것, 이제 꽤나 능숙해져서 엔간한

레스토랑의 어설픈 웨이터들 보다는 훨씬 그럴듯하게 안정적인 거 같다.


술은 캐나다의 아이스와인, Inniskillin. 미리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원하게 칠링해두었던 덕분에

금세 병이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질세라 홀짝홀짝 달달하고 상큼한 아이스와인을 마시며

케잌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뒤로 보이는 꽤나 큼직한 화분같은 게 나의 '꽃사발'.

얇고 긴 아이스와인병은 역시 모양새만 봐도 알 수 있듯 용량이 많지 않다. 고작 300미리 조금 넘는

정도라서, 게다가 와인 한번 따고나면 바로 마셔버려야 나중에 맛도 안 변하고 자칫 버리게 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는 거다. 잠시 코르크마개로 닫혔던 와인이 재개봉되고,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5월 7일 '조용필&위대한 탄생' 콘서트에서 있었다는 에피소드 하나. 아니 글쎄 용필오빠가

가왕은 가왕이지, 노래 부르다가 중간에 벨트를 끊어버렸다지 뭐니. 어찌나 뱃심이 좋았으면

노래부르다가 중간에 벨트가 끊어져서 손으로 잡고 불렀다더라. 라는 게 어머니의 전언.





마루 소파에 딩굴딩굴, 하면서 티비도 보고 술도 마시고.

역시 와인은 코와 입 외에도 눈으로 보며 즐기는 술이란 게 맞지 싶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붉은 빛.

그럴 때면 무슨 고민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뭘 그리 아둥바둥 맘쓰며 사나 싶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스파클링 와인, '아랄디카 브라께토 다뀌'. 빛깔은 로제 와인처럼 산뜻한 핑크빛에 가깝고,

탄산가스가 계속 뿜어올라서 와인잔에 달라붙었다. 제법 달달하지만 시원상큼한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느낌. 원래 스파클링 와인은 저런 넓은 잔이 아니라 뾰족하고 긴 잔에 마셔야

기포가 송송 솟아오르는 걸 볼 수도 있고 맛도 오래 즐길 수도 있다지만, 뭐 아쉬운 대로.


그러고 보면 이런 식의 스파클링 와인을 통틀어 대충 '샴페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랄까. 샴페인<스파클링와인,

이런 포함관계인 셈인데, 어쨌거나 샴페인이란 호칭도 좀 웃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니
 
Champagne란 이름은 당연히 프랑스식으로, '샹파뉴'라고 읽혀야 할 텐데 영어식으로 '샴페인'이라

굳어져 버린 거다. 왜 그렇게 된 거지. 20세기초까지도 세계 외교, 파티의 중심이었던 파리일 텐데.


늘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다 보면 샴페인, 샹파뉴에 생각이 미치고 늘 '샴페인'의 패권 장악과정이

궁금해지는 거다.


요새 자꾸 이런데 맛들여서 큰일이다. 강남역 근처의 까페에서 아메리카노랑 티라미슈 조각케잌을

먹다가, 같이 갔던 친구가 (또!) 술 한병과 새 컵 두어개를 들고 와서 에라 모르겠다, 소주를 꽐꽐꽐.


맥도널드에서 상하이스파이스버거를 안주삼아 발렌타인17년을 마시다.

맥도널드에서 빅맥을 안주삼아 프랑스와인을 마시다.


그냥 이런 식으로 먹는데 요새 조금 재미가 들린 거 같다, 딱히 술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의외의

장소에서 술을 따서는 홀짝대는 게 재미있는 듯. 본격적으로 많이 마시거나 부어라 마셔라 강권하거나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집에서 혼자 홀짝거리듯 부담없이, 적당하게.

다음번엔 또 어디서 뭘 마셔볼까, 내가 의지를 갖고 술을 막 챙겨다니는 건 아니고, 무슨 교통사고처럼

어디서 누군가와 무슨 일이 생기면 마시게 될 텐데. 기대기대.





주말을 보내고 나니, 성질급한 시계가 벌써 월요일을 알렸다.

더이상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 되어버린 월요일.

흥, 시계 따위가 째깍거리며 아무리 나를 재우쳐댄다 할지라도

나는 일요일과 마지막 후희를 즐기겠어, 라며 조그만 와인을 두 병 마셔버렸다.

주말과의 만남은 늘 금욜밤의 전희, 일욜밤(혹은 월욜 새벽)의 후희로.


상큼한 화이트와인, 칠링은 되어있진 않았지만

좀처럼 꾸물대는 인상을 펼 줄 모르는 춘래불사춘의 봄날이 곱게 싸쥐고 있던 병이라 나쁘지 않았다.

오늘의 네이트 대화명은 Green Thumb for Spring. 꽃구경 가고 싶은 월요일.



또다시 M에서 와인 한 병을 마셔버렸다.

발단: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왠지 선물로 받은 유리컵과 와인 한병을 들고 왔다.

전개: 간단히 치맥을 먹으며 놀다가, 나가서 길가 벤치나 공원에서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위기: 방사성 물질이 섞인 바람이 차가웠다.

절정: 다시 떠오른 이전의 추억. 맥도널드에서 상하이스파이스버거를 안주삼아 발렌타인17년을 마시다.

결말 :

치킨집에서 챙겨온 쇠젓가락 하나로 코르크를 박박 파내는데 성공. 조금씩 젓가락으로 뜯어내 보면서도

이게 파내어지겠나 싶었던 거다. 여차하면 걍 안으로 밀어넣을 생각도 했었지만 의외로 간단히 성공.


빅맥을 먹기좋게 커팅하고 감자칩을 씹으며 콜라로 헹궈낸 유리컵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

조용히 조근조근 이야기하며 놀다가 기어이 병을 비우고, 뒷정리도 잘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얼음만 남기고 홀딱 마셨던 라떼, 얼음이 녹은 자리엔 물이 들이찼다.

물과 기름이 미끌거리며 서로 버텨내듯 가만히 녹아내린 얼음은 잔뜩 흐려진 라떼의 잔해와 버텨낸다.

창밖에서 볕이 손가락을 뻗쳐왔다. 이미 봄볕에 사로잡힌 꼬마아가씨는 분홍빛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룰루랄라 스텝을 밟으며 봄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조용히 스며들어온 봄볕은

꽃무늬가 커다란 테이블을 지나 보랏빛 쿠션이 보드라운 의자위에 느긋이 몸을 눕혔다.

풍성하게 바람넣은 머리처럼 불룩한 화분을 둥지삼아, 붉은 새 한마리가 가만히 앉았다.

주체못하고 쏟아져들어오는 봄볕, 강물에 빠져버린 자동차의 깨진 창문으로도 저렇게 쏟아져

내리지는 않을 거다.

예전에 왔을 때도 눈여겨봤던, 그렇지만 별다른 감상없이 봤던 곰 두 마리. 사선으로 그어진 채

첫째 곰의 몸뚱이를 두개로 쪼개놓은 햇살 아래서 보니 표정이 떠오른다. 저 녀석들의 조심스런

손의 위치는, 살짝 외로 꼬은 고개의 각도는, 조금 우울하게 늘어진 표정은. 뭘까.

그리고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몇 장의 도자기 접시. 몇 장의 도자기도 붙어있고, 몇 장의 흔적도

여전히 붙어있다. 벗겨진 페인트로 그 존재를 주장하려는 것들은 깨져서 떼어낸 걸까 아니면

억지로 떼어내어 다른 곳으로 옮긴 걸까.

이층과 일층을 잇는 계단, 아래로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은 종종 수평감각을 희롱한다.

이렇게 보니 계단이 아니라 격자처럼 좁아져 나가는 통로같기도 하고 거울은 천장에 붙은 듯.

여기에 올 때마다, 뭔가 삼청동에서 숨겨진 잠수함 같은 곳에 올라타는 느낌이다. 의미상

잠수함이라면 수면 밑으로 내려가는 게 맞겠지만, 여긴 위로 부상해있음에도 조용하고,

사람들 눈에도 딱히 안 띄는 거 같고. 그리고 저 제법 든든해 뵈는, 잠수함 창문같은

이중 유리창들을 활짝 여는 건 뭔가 역설적인 즐거움을 준다.

제법 선명하고 튀는 색감의 테이블, 의자들, 쿠션들이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지만 나름 분위기는

어찌어찌 정돈되는 게 신기하다. 창문이라고 뚫려있는 곳에 보이는 곳은 이웃한 건물의 붉은 벽돌

뿐이라지만, 그것도 나름 호의적으로 봐줄 수 있다.

벽에 있던 이집트 냄새나는 조각상 하나. 쭉 찢어진 눈이라거나 칼처럼 날카로운 콧날들이 좀

영특하다 못해 교활한 분위기를 주기도 하지만 화려하고 정교한 꾸밈을 보면 대충 만들어진

물건은 아닌 거 같다. 하긴, 이집트가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음..어디려나.

이층에서 삼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많은 사람들의 발이 나무를 조금씩 깎아낸 거다. 색깔이

빠지고, 나무의 이빨이 빠지고, 그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궤적이 남았다. 무질서하게 늘어선

와인병들이라지만 일정한 수량이 넘어서는 순간 나름의 미감이 생겨난다. 규칙없이 내걸어둔

티스푼 장식장들이라지만 역시, 나름의 균형이 잡히고 미감이 떠오른다.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 고만고만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탑처럼 우뚝 솟아난

나무하며, 해가 지면 바통체인지해서 불을 밝힐 야트막한 가로등 하나. 밑을 내려다보면 여느

때처럼 줄을 늘어선 채 삼청동을 순례중인 사람들. 여기서 저쪽은 잘만 보이는데, 왠지 저쪽에서

여긴 안 보이는 거라고 자꾸 의심하게 되는 거다.

자리에 앉아 가져간 책을 조금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위로 들린 창문에도 불빛이 하나 떠있다.

앨리스가 빠져들어간 거울나라, 원더랜드의 시작은 이런 조그만 균열감, 일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약간의 낯선 기미부터 시작했을 거다. 이곳의 불빛과 저곳의 불빛. 저 창문을 거울삼아 비치고 있는

풍경 속에는, 좀더 각도를 틀어서 여기저기 이쪽 세상을 비쳐본다면 뭐가 더 보일런지.

가져갔던 책을 다 읽고 라떼를 다 마시고 다이어리를 다 정리하고 이곳의 추억들을 조금 되씹고도

못내 아쉬워서, 이리저리 고개를 휘휘 돌렸다. 이미 나보다 늦게 들어온 몇몇의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나가버린, 그래서 다시금 혼자가 된 공간이었다. 그때 발견한 외계인들의 우주선. 까페를

침공하는 중이었다. 스크류 모양으로 생긴 메탈빛 강한 것들이 짙은 그림자를 바닥에 새기며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외계인들이 이층 혹은 삼층에 불시착할 것을 일찌기 예측이라도 했다는 양, 까페 주인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이런 안내문을 계단 내려오는 길목에 붙여놨댔다. 머리 조심. 제법 가파른 그 계단은

보통의 지구인들도 자칫 머리를 부딪힐 가능성이 농후한 곳인 거다. 마지막으로 아쉽게 주위를

둘러보고 까페를 떠나는 나를 배웅한 건 역시, '머리 조심'. 또 올께요.



몇 년 전부터 와인을 마실 때 꼭 코르크마개를 모으려 들었던 윤OO씨(29세, 서울). 덕분에 테이블

건너편 끄트머리에 놓인 코르크마개를 집으려다 물잔을 엎지르기도 하고 넥타이를 와인잔에

빠뜨리기도 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고 술회한다. "와인색으로 넥타이를 염색한 건 차라리

양반이었죠, 처음 마셔보는 와인의 마개를 잔뜩 눈독들이고 있다가 재빨리 집었는데, 마침 동석했던

상무님이 본인과 같은 취미를 가졌다며 은근슬쩍 내놓으라고 압박하실 때는 어휴. 옆구리 찔리기

전에나 드렸음 갈비들이 아프지나 않을걸."

그 뿐만 아니다. 럭셔리하고 우아한 와인 바에서 멋진 손목 스냅을 보여주는 웨이터들이 '그깟

코르크마개'를 탐하는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보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고백이다. 사실,

코르크마개가 별건가. 코르크나무 껍데기가 발바닥 각질처럼 두텁게 자라나면 적당한 사이즈로

잘라서 일정한 약품처리를 거쳐 와인병을 막아두는, 말그대로 '병뚜껑'인데 말이다.


햇살이 사방으로 번지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깨물면 이가 시리거나 깨지는 콜라병 뚜껑,

얄포름하고 오묘한 질감을 차마 훼손치 못해 플라스틱 밑창을 물어뜯게 만들던 요쿠르트 뚜껑과

전적으로 같은 부류에 속하는 거다. 뚜껑, 혹은 따꿍이라고도 불리는 그런 것들.

그렇지만 이 녀석들은 뭔가 달랐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무서울 게 없었어요." 윤씨가 말했다.

세계 곳곳에서 넘어온 녀석들을 한 곳에 모아놓으면 서로 포도덩굴도 잡아당기고 이탤릭체의

글자들도 분지르고 투닥투닥 싸우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덩굴을 꼬아 만든 해먹 위에서

향긋한 코르크 내음을 풍기며 뽀골뽀골 재미지게 놀더라는 그의 백일몽.


그들의 가장 큰 위기는 알제리에서 왔던 코르크가 프랑스 아이들과만 놀겠다며 편을 가르려

들었을 때, 그리고 중국에서 넘어온 정체불명의 과실주뚜껑이 자기도 와인코르크라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을 때였다고 추억하는 윤씨의 눈가에 화이트와인인 듯 눈물이 맺혔다.

마지막으로 보내기 전 열맞춰 늘어세운 녀석들. 모아봐야 잡동사니, 코르크마개에 집착하는

것도 일종의 병. 습관 하나를 버렸고, 그들이 꼬물대던 공간엔 다소 텁텁해진 코르크 냄새만

남아버렸다. 굳이 더하자면 또하나, 코르크의 매끈하고 보드라운 촉감도.





스마트카가 곰실곰실 기어다니는 파리 시내, 엷은 잿빛의 대리석만큼 하늘이 우중충하던 날 거리를 거닐었다.

스마트카가 참 귀엽다며 서울에서도 저런 차들이 많아졌음 좋겠다고 생각하던 즈음, 거의 달구지 수준으로

낡은, 그렇지만 또 어찌 보면 굉장히 유니크하고 귀여운 녀석이 하나 지나갔다. 네모 반듯하게 각진 '월-E'의

캐릭을 처음 봤을 때 그 가공할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저런 투박한 생김에서도

뭔가 귀여움을 찾아낼 수 있게 되어 버렸다.

화려한 장식이 주렁주렁 꾸며져 있는 다리, 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위에, 구릿빛 주물들을 포인트마다 조금씩

얹어 놓고, 반짝반짝하는 금칠로 마무리. 밤에는 그 위에 주홍빛 불빛이 한겹 내려앉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느강변, 어느 아가씨가 둔덕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사과를 깨물어 먹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한참을

쳐다봤댔다. 그녀가 가버리고 남은 자리.

한강 고수부지와는 다른 느낌, 뭔가 좀더 풍경들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느낌이다. 바닥에 깔린 포석부터. 한강은

그냥 시멘트로 맨들맨들, 아무런 질감이나 요철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죽이 대부분인 거다.

가방을 앞에 앉힌 채 근처 까페에 들어갔었다. 까페 이름은 퐁뇌프. 바로 그런 이름의 다리 옆이었다.

잔이 넘치도록 찰랑찰랑 따라진 화이트와인을 홀짝홀짝. 빵을 담았던 종이봉투가 꼬깃꼬깃해지도록 손에

쥐고 다녔으니 여기서 저 와인의 마지막 한 방울이 사라질 때까지 같이 다 마셔버릴 셈인 거다.

일요일날에 나왔을 적엔 차들의 통행을 막은 채 거리 축제 분위기를 한껏 풍겼던 바로 그 거리, 평일의 찌뿌린

하늘 아래에선 왠지 살짝 쓸쓸한 분위기의 한적한 길가로 변해버렸다.

성 샤펠성당을 지나며 다시 한번 그 뾰족뾰족한 외양을 눈길로 슬쩍 쓰다듬어 주고.

관광객도 잘 눈에 띄지 않던 어느날 오후, 금세라도 비가 꾸물댈 듯한 날씨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

틈에서 왠지 나도, 여행자가 아니라 현지인인 양 무심하게 한번 올려다 보았다.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 삼색기에 담긴 그럴듯한 뜻도 그렇지만, 프랑스의 국가 역시 피 냄새가 가득하다.

피를 먹고 세워진, 자라난 그네들의 국가 이미지. 최소한 그 정도의 피값을 주고 기억해 내어야 나라의 기풍이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만한 건덕지가 생기는 걸까.

노틀담 성당. 프랑스 파리의 중심부는 딱히 랜드마크라 할 만큼 두드러지게 높은 건물이 눈에 안 띄지만, 그래도

단연 노틀담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이 시선을 잡아끄는 거다. 자연스레 시선을 붙잡아 두는 효과.

오르세 미술관 지나는 길. 철도역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오르세 미술관 옆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언뜻 옛 서울역의

풍취가 떠오르기도 하고, 그리 작지는 않은 사이즈의 도시에서 마주쳤을 법한 철도역사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었다.




kR@ 충북 영동군.


싱그럽고 하얀 버섯갓이 뽀도독뽀도독.


일제시대 탄약저장용 및 피난용으로 강제동원되어 파내어졌던 토굴이 이제는 포도주 저장고로 쓰이고 있었다.

어둑어둑하고 퀴퀴한 냄새 가득한 동굴 속에서 오크통에 비스듬히 기대선 삽, 사방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들,

그리고 그 물방울과 함께 삽자루에 남은 사람의 땀 등 온갖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났을 버섯.




날씨가 다시 추워졌다. 이런 날 마시라고 누군가 와인을 한 병 건넸었다. 따뜻하게 데워먹는 와인이다.
 
겨울철 유럽의 거리에서는 한 잔씩 팔기도 한댄다.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특별한 경험이 될 듯 하다.

왠 아가씨가 방긋 웃고 있는 사진이 라벨 맨 위에 올라붙어 있지만, 뭔가 너무 산만해서 잘 눈에 띄지가

않는다. 독일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그냥 술은 맞겠지 대책없이 믿어본다.

처음에 받아봤을 때도 똑같은 프로세스를 거쳤다. 앞을 보고 잠시 황망해하다가, 뒤를 보곤 당황했다. 어라,

한국어네. 정식 수입된 와인인갑네. 이름은...크리스트킨들스 마르크트 글뤼바인...?;;;;


집에서 정종 덥혀먹을 때 그러듯 자그마한 주전자에 붓고 살살 끓였다. 60도에 딱 맞출 재간은 없고, 그냥

적당히 김이 오르고 와인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싶을 때 불을 껐다.

잔에 가득 따라붓고는 홀짝홀짝, 따뜻한 사케 마시듯 두손으로 잔을 감싸쥐었다. 안경에 뽀얗게 김이 서리곤

이내 사라진다. 레몬향과 계피향이 진하게 섞여든 게, 와인이라기 보다는 따끈한 차 같기도 하다.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방긋 웃어주는 아가씨. 가만 보니 머리엔 금색 왕관도 썼다. 금발에 금색 왕관이라니,

무슨 초록색 개구리가 초록색 똥 눈 거 같이 티가 한개도 안 난다.




몇 달 전 마셨던 샴페인, 크룩 그랑 꾸베(Krug Grande Cuvee). 집에 들어온 건 그보다 훨씬 이전.

샴페인을 터뜨릴 만큼 축하할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은 까닭이다.

마실 때도 그다지 요란스럽게 흔들어 뻥, 하니 터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흘러넘치는 술이 아깝기도 했고

함께 했던 대하와 조개구이 친구들이 무엇보다 '샴페인'과의 마리아주(Marriage)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그리고 숙취처럼 남은 것. 한번 빼낸 코르크 마개를 다시 닫기란 좀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샴페인 마개는

더더욱 그렇다. 고집스럽게 펼쳐진 콜크 마개의 아랫도리. (그리고 효용을 다한 채 하얗게 반짝이는 철사조임)

적당히 칠링된 샴페인은 굉장히 깔끔하고 상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혀끝에서 톡톡 터지던 그 자그마하고

부드럽던 반짝임들이 이제는 코르크 마개 위로 옮겨왔다. 미각에서 시각으로.



와인은 원래 포도를 원료로 하여 숙성시켜 만드는 술, 포도주를 이르던 단어였을 텐데, 어느 순간 '포도주'란

단어가 촌스러워보이기 시작하던 즈음 새로운 원료로 빚어진 '와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거 같다. 복분자니

오디니, 그런 것들이 '와인 열풍'을 입고 마구 생겨나는 것 같은데 해외에도 비슷한 열풍이 일고 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여러 원료로 '와인'을 빚어내는 건지는 모르겠다.

마우이 블랑. 하와이의 커다란 네 개 섬 중 하나가 마우이섬 아닌가?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무려

파인애플을 원료로 하여 빚어낸 와인이라고 한다. 카라멜 색깔의 파인애플 와인이라 라벨에는 써져있지만

글쎄, 카라멜 색깔이라기보다는 약간 형광빛 느낌마저 도는 누런빛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노란색

형광펜 액상을 물에 풀어넣고서 약간 탁하게 하면 저런 색이 나오려나.

9.99달러짜리니까 꽤나 저렴한 와인인 거다. 물론 국내에 들어온 와인들은 대개 현지에서의 가격보다 네다섯배

정도는 우습게 뛰어오르니까, 만약 이 와인이 국내에서 팔리고 있다면 한 50달러 정도에 맞춰져 있으려나. 뒷면

라벨엔 'soft, dry, fruity'한 와인이라고 적혀 있는데 사실 맛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이걸 대체 화이트

와인이라 해야할지 레드와인이라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대략 색깔이 붉은색보다는 백색에 가까우니까

화이트 와인이라 치고, 부드럽고 드라이하다기보다는 맛이 시큼하고 텁텁했다. 딱, 파인애플 맛.

와인이라기엔 좀 많이 예외적인 맛과 향을 가진, 차라리 레드와인과 오렌지주스를 섞은 '샹그리아'처럼

이름을 달리 붙이는 게 나을 법한 '마실거리'였다.




어느 날, 퇴근 후 송년회를 빡시게 가졌던 다음날 내 방 책상 위에서 발견된 중국산 와인. 때이른 산타클로스

놀이는 혈관 속에서 맥놀이하는 알콜 성분과 저질 체력 덕에 가능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만, 왠지

나는 이 와인병이 무슨 별똥별처럼 우주에서부터 내 방 책상위로 내려앉았다고 상상해 보고 싶은 거다.

중국에서도 와인을 만들었단 말인가, 새삼 중국 대륙의 힘을 느끼면서 거의 새 것과 다름없이 코르크만 한번

열렸다 닫힌 듯한 와인 맛을 음미해보기로 했다. 중국과 프랑스의 조인트 벤처 와이너리에서 만들었다는

무려 '다이너스티' 와인인 거다. 라벨지 색깔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계열이고.

라벨 뒤, '다이너스티DYNASTY'의 중국어 표현, '왕조'. 중국 톈진지구에서 만들어졌다는데 거기가 포도 재배

그리고 와인 숙성에 적합한 지역이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왠지 자꾸 의심병이 도지는 이유는, 공항 면세점에서

파는 마오타이주조차 메틸알콜로 만들곤 한다는 그네들에 대한 불신과 일종의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와인은 포도로 만든 건 확실하겠지? 유통기한이 지났다거나 상한 포도로 만들었다거나 제조 과정이 지극히

비위생적이라거나 따위 온건하고 상상가능한 거 말고, 예컨대 포도가 아닌 붉은 색 돼지간으로 만들었다거나,

(그저 상상일 뿐) 알고 보니 헌혈의 집에서 폐기된 붉은 피를 재활용했다거나(워워워)...


중국에 대한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고량의 냄새를 좋아하고 고량주를 좋아하며 중국제품도 사실 굉장히

품질이 높고 좋은 제품이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그냥 상상해 보면 그렇다는 거다. 중국에서 나온 와인,

한국에서 복분자니 뭐니 이러저러한 것들로 와인을 빚어놓은 것도 꽤나 의심스러울 때가 많은데 더더욱

요모조모 생각해 보고 조심하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 맛만 좋으면 된다. 그치만 코르크 마개를 따고 확 풍기는 냄새는 살짝 매콤한 냄새, 어릴적 우뢰매를 보러

자주 갔던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곧잘 맡았던 최루탄을 백분지일 정도로 희석시킨 냄새랄까. 잔에 따라서

비춰본 와인의 색깔도 그닥...살짝 갈색이 도는 붉은 빛, 게다가 공기와 닿아 향이 좀더 숙성되면서 매캐한

냄새는 좀더 강해져 버렸다. 맛 역시, 라벨에 소개된 것처럼 light하고 fruity하다기보다는 그냥 가볍게 맵다.


좀 많이 실망해서, 담부터는 술에 취해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걸 챙겨오자고 대오각성.








어제 배철수가 그랬던가, 비오면 비온다고, 추우면 춥다고, 어떤 핑계든 대고 찾는 게 술이라고.

그렇게 비온다고, 눈온다고, 밤이라고, 춥다고 찾는 게 또 하나 있으니 음악이라고 했다. 그래서,

음악과 술은 언제 어느때고 내키면 꺼내들 수 있는 창과 방패인 듯 하다.


부드러운 음악으로 실드치고 톡 쏘는 술로 찌르기 들어가고.


그렇게 싸우다 보니 저녁밥으로 술을 마셔버렸다. 아 무슨 술꾼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은 공부가주 마시고 야근중..)




#1.

어제 '내사랑 내곁에'를 보았다. 적잖이 눈물을 흘렸다. 사실은 이런저런 핑계김에 울고 싶었는데, 눈물이 흐르기만 했다.

발랄하던 하지원은 울부짖고, 김명민의 '메소드 연기' 역시 훌륭했다. 일부 평론가의 악평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감독의 의지에 휘둘렸다. 눈물이 울음으로 발전토록 냅두질 않았다. 화면이 휙휙 넘어가고, 현실만큼 어색한 유머가

맥을 끊었다. 
 

뭔가 아쉬운 게 많은 영화였다. 죽음에 익숙한 장례업체 여직원, 착한 척 하다가 무너지는 루게릭병 환자라는 등장인물,

감정이입하기엔 쉽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원과 김명민의 연기는 좋았다. 스토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너는 내운명'을 울며 보고 나서 느낀 후련함이 없었다. 눈물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2.

포르투 와인 두 잔 째다. 안 보려고 애썼는데, 결국 1Q84 1권을 방금까지 다 봐버렸다. 얼마전 누군가와의 대화 끝에,

하루키를 탐닉한 전력이 있되 그를 극복, 혹은 경과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루키가 창조해낸

존재들이 갖는 공통점은, 자신의 영역 밖으로는 세계가 펼쳐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 지독히 이기적인 점이란 거다.


보통의 '이기적'이란 단어와는 뜻이 달라서, 내 한몸 제대로 추스리지도 못하니 그것부터 해보겠다는 겸손함도 담겨있고,

나부터 바로 서서 누군가를 품어보겠다는 건설적인 의지도 담겨 있겠지만. 아직 1권밖에 못 봤는지라 인물들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시니컬하며 세상에 대한 환멸에 젖어있다. 그러고 보니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이 와인을 불렀댔다.


#3.

10월말까지는 꽤나 바쁠 예정이라 했는데, 원래 시험 전날에 더욱 만화나 책들이 땡기기 마련. 장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읽고 있고, '내 심장을 쏴라'나 '오늘의 거짓말' 등등의 소설들을 하룻밤새 다 읽어 버렸으며, 최장집교수의

'민중에서 시민으로'를 찬찬히 읽고 있는 중이다. 리뷰어로 받던 책들도 다 끊겼으니 이제 살림살이 좀 나아질 것 같다.


바쁜 거 다 끝날 때까지 보고 싶던 책들을 끊는 거보다, 그냥 가능한 재빨리 전부 해치워버리는 게 낫겠다.


#4.

나만의 블로깅 원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중이다. 인기 블로그나 파워 블로그 따위 허명들과 덧없는 거품을 지우고,

공짜에 현혹되어 자처한 온갖 리뷰들을 걸러내고,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블로그'라는 게 어떤 공간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원칙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중이다. '리뷰'를 쓴다는 행위가 어느새 '그 무엇'의

사주를 받은 마케팅에 (결과적으로) 포섭되고 만 건 아닌지 싶어서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나의 육체를 끌어모아 글자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꽉 닫는다"(이선영, "글자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中)

내게 블로그란 그런 공간이다. 일기를 쓰고 낙서를 끄적대듯, 그런 내밀하면서도 솔직한 공간의 의미가 우선인데 어느새

'미디어'라는 측면, 가능성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여러 편향이 생겼다. 단순하게는 글투의 문제에서부터, 이야기꺼리,

심지어는 '수익'에 대한 고려까지. 리뷰 신청을 끊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5.

와인 세 잔째다. 어쩌면 내가 아직 '하루끼적으로' 이기적인 티를 못 벗은 건지도 모른다. 요새 정말 보고 싶은 영화는

'똥파리', 그 영화의 감독이 영화를 찍고 나서 이건 나를 위해 만든 영화다, 라고 했다지. 대체 어떤 영화일까. 그는

어떻게 '나'와 '그들', 혹은 '우리'를 불러내고 있을까. 당당하게 '나를 위해 만들었다'는 그가 부러운 건지, 아님

그 말 뒤에 숨어있는 원초적인 암담함과 답답함이 처연한 건지는 모르겠다.




흔히 강화와인이라 부르는 이것, 보통 10도를 오르내리는 와인보다는 훨씬 높은 도수의 fortified wine이다. 무려 20도.

포르투갈에서 처음 만들어진 강화와인은, 배를 통해 와인을 수출/수입할 때 중간에 상하는 걸 막기 위해서 일부러

발효 중인 와인에 브랜디를 섞어버리면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진짜인지는 모르겠다.)


보통 와인보다도 향은 좀더 끈적하면서도 강렬하게 달콤하고, 맛 역시 레드와인을 응축시킨 건가 싶을 만큼

진하고 사치스럽도록 화려하다. 대개의 레드와인이 가진 달콤함이나 매콤함, 쌉쌀함이나 새콤함이란 게

세필로 언뜻언뜻 그어진 가느다란 선에 비긴다면, 강화와인의 맛이란 그 선들이 모조리 bold처리된 느낌이랄까.

특히나 단 맛이 많이 강화되어서 대체로 이 술은 식후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일종의 디저트 삼아. 화려함이 지나쳐
 
그 미묘함과 섬세함이 다소 죽어버린다 느낄 때에는 차갑게 해서 마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20도의 도수란 것도 매력적이다. 한잔 가득 따라 놓으면 잠들기 전 몇 시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정도랄까.

그렇지만 보통 강화와인을 찾는 날의 마음가짐이란, 상콤하고 발랄한 '양가집 규수'같은 와인을 마다하되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헤롱대는 눈빛의 '날잡아잡수' 위스키나 꼬냑도 피하고 싶은 날이어서 한 잔으로 끝나기가 쉽지 않다.

고혹적인 자태로 가끔, 잊지 않을 만큼의 방심한 눈빛을 쏘아주시는 달콤한 님과 만나고 싶을 때 마시게 되는 술이라서,

한 잔이 또 한 잔을 부르고 두 잔이 세 잔이 되고 나면 하룻밤이 훌떡 지나버리기 일쑤.








주차장 한 켠에서 뒤뚱맞게 어기적대던 오리. 어디선가는 개 대신 오리더러 집을 지키라 시킨다던데, 이 녀석도

목청은 타고 났다. 꽥꽥 꾸엑 그엑 구웩~ 좀만 있음 피토하며 득음하시겠다.

실컷들 사랑하라 가슴이 있을 때, 죽은 뒤에도 네 사랑 간직할 가슴 있겠니.

두 가지다. 가슴이 무슨 밥사발도 아니고 거기에 사랑을 무덤밥모냥 퍼담는 것도 아닐진대, 그리고 '사랑하라'는
 
여리고 고운 메시지를 이렇게 반말투로 해서야 되겠니.

그 옆에 천지호. 윙버스였던가, 에서 보았던 천지연의 대표 이미지였던 거 같은데 이 돛의 그림은.

천지연 폭포를 보러 가는 길은 두 갈래, 보통 오른쪽으로 걸어들어가 폭포를 보고는 왼쪽길로 돌아나온다. 몇 번쯤

제주도 올 때마다 들렀던 거 같은데, 좀체 기억이 안나신다는 동생님의 기억상실증 치유를 위해 다시 간 길이었다.

구멍 송송난 현무암 재질의 돌하르방, 최근 모아이석상의 모자를 어떻게 씌웠는지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던가,

서태지의 공연이 보고 싶어, 왠지 방구석에 기대어 앉아 두 무릎을 잔뜩 끌어당긴 채 움츠러든 모습 같지 않나..

라는 식으로 마구 자유연상을 뻗게 해준 돌하르방들.

드디어 천지연 폭포, 온통 대기를 젖게 만드는 폭포의 포스도, 엠씨스퀘어나 아이도저처럼 규칙적인 음향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의 호쾌한 소리도, 동생님의 기억상실증을 치유하진 못했다. 다만 이제 다시 기억을 꾹꾹 눌러

담았을 테니 됐다.

여름에 수량이 좀더 많았었을 때 왔던가, 내 기억에 비해보면 조금 수량이 줄은 거 같기도 하다.

천지연 폭포 앞에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길, 다른 때에도 그랬듯 폭포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무리무리 자리잡고 있었고, 친구끼리 여행온 듯한 유쾌한 녀석들 몇몇은 폭포수로 가글하는

사진 연출에 여념이 없다. 왜 그런 거, 피라밋을 손끝으로 잡아올리고 에펠탑을 두손으로 미는 사진처럼.

삼복이 온다고 했다. 거북이와 원앙과 또 하나가...뭐였더라. 장수, 금슬, 또 하나는 백방 출세의 아이콘이었을 텐데,

여튼 다리 아래 저들이 붙잡고 있는 바구니 속에 동전을 넣는데 성공하면 출세도 하고 사랑도 지키며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 원래 안 그런데 단번에 성공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바뀌었어, 라고 훗날 말하게 될까.ㅋ

천지연 폭포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저 절벽 어딘가를 잘 보면 사람 얼굴이 나타난다던가. 기본적으로 너무 어둡게

찍은 탓도 있지만, 맨눈으로 봐도 난 잘 모르겠더라. 차라리 그 커다란 바위 병풍 위에 우거진 나무들의 짙푸른

녹음이 와닿았다.

천지연 물줄기가 돌틈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흐르는 길.

천지연 물줄기가 돌틈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흐르는 길을 찍는 사람이 찍힌 사진.

감귤초콜렛은 이미 익숙해졌을 만큼 성공한, 안정된 상품인 거고, 새롭게 등장한 응용상품들이 눈에 띄었다.

제주감귤주, 감귤와인, 백년초초콜렛, 감귤크런치초콜렛...감귤와인이 정말 궁금했다. 복분자와인이니 뭐니

많지만 늘 궁금했던 건, '와인'이란 단어가 애초에 '포도로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감귤와인이 아니라 감귤(과실)주 정도가 맞을 거 같은데. 그런 건 차치하고 일단 맛이 너무너무 궁금했지만

운전을 해야 했어서 안타깝게도 패스.

딱 이거다. 돌하루방 중에 가끔 찐따같은 포즈와 표정을 가진 것들이 있다고 느꼈었는데, 딱 이거다.

이녀석의 속마음. "흥, 아무리 옆에서 아줌마들이 날 떼어놓고 자기들끼리 좋다고 웃으며 떠들고 있어도 괜찮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보이는 건 한라산의 용암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기억하기

때문일 뿐이고, 두무릎을 바싹 땡겨 안은 채 안쓰러워 보이는 포즈를 굳이 잡고 있는 건 그저 무릎이 시려웠을

뿐이야. 기억할지 모르지만 난 제주 할방/하루방이라구. 건방지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것들이 말야."


미안해 할방...풋.

* 천지연 티켓. 티켓에 나온 사진이나 지금이나 별반 유량의 차이는 눈에 안 띈다. 원래 이런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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