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경제를움직이는다섯가지힘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비추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한다. 자라와 솥뚜껑이 닮았다는 관찰은 제법 참신하고 재기넘쳐보일 수 있지만, 본질이나 근본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란 의미로 새길 수도 있을 거다. 예술과 경제를 함께 얽어내는 이런 책이 인문학을 살짝 얹은 천박한 교양서나 잡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대체 예술과 경제를 비교하기 위한 잣대가 뭔지부터 살펴보자. 머릿말에서 저자는 그걸 '명쾌하게' 다섯가지로 집약한다. 투시력, 재정의력, 원형력, 생명력, 중력-반중력. 각각에 대한 자의적인 설명은 그렇다치고라도, 그 다섯가지가 왜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간다. 게다가 정의상 서로 충돌하거나 중첩되는 것들까지.

다소 참신하고 풍부한 시각으로 예술의 표피로부터 경제에 대한 메타포를 끌어낼 뿐인 책이다. 경제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이리저리 썰어내고 구부러뜨린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 다시금, 이런 류의 '통섭'이나 '지적 네트워킹'을 말하는 자들에 대해 실망하고 말았다.



싱가폴 차이나타운에서 이십분 정도 남쪽으로 걸어가다보면 나오는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 red dot design museum.


매년 디자인이 출중한 제품들에 수여하는 상인 레드닷 어워드를 받았거나 그에 준할 만큼 훌륭한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인데, 아직 한국사람들한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듯 하다. (가이드북에도 안 나와있는 듯)



이쁜 빨강색으로 온통 칠해진 맵시있는 건물이 멀리서부터 눈길을 끈다. 


그 건물 전체가 뮤지엄인가 했지만 그렇진 않고, 이렇게 생긴 샵을 포함해 일층을 쓰고 있었다. 샵에도 디자인이


살아있는 제품들을 꽤 많이 전시, 판매하고 있었지만 가격대가 만만치 않아 패스.


샵 안을 둘러보고 이렇게 생긴 문을 지나 뮤지엄으로 입장. 입장료는 성인 8싱가폴달러, 학생 4싱가폴달러.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전시품은 이제 꽤나 널리 알려진 이 시계. 한국인 디자이너가 만든 이 시계는 시각장애인들이


시계를 감촉하는 것으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고안된 시계다. 가운데서 뱅글뱅글 도는 쇠구슬이 시침이던가.


그리고 3D 퍼즐형태로 조립분해할 수 있는 반지. 



디자인이 매끈한 자전거다 싶더니 역시. BMW에서 만든 자전거.


목하 국내에서도 대유행중이라는 인디언텐트의 원조. 



눈꽃 모양의 육각형 부품들이 이어져 만들어진 커다란 전등갓.



싱크대라거나 주방용품에 대해서도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고민은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보관 및 활용이 용이하도록 고안된 물병으로 장식된 한쪽 벽면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입체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디자인된 타일로 꾸며진 한쪽 테이블 위엔 올해의 레드닷 수상작 도록이.


갈수록 기계적 아름다움에 대해 눈이 돌아가는 건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이런 식의 나염이 살아있는 의자라거나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미려한 휠은 누가 봐도 이쁘지 않으려나.



제품들이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빙 둘러선 가운데 공간에는 기업 디자인과 포스터 작품들이 전시.



중간중간 한국어도 보이고 한국에서 쉽게 접했던 것들도 보였는데 예컨대 AP통신의 한국어 버전 명함 시안이라거나


NHN의 환경친화적 명함 아이디어 시안이라거나. 


그리고 현대차에서 진행했던 전화기-우산 디자인 아이디어도 전시되어 있었다. 전화기를 쓰기 편한 우산, 이라는


컨셉을 생각해 내는 것도, 또 그걸 어떻게 구현시킬지 방법을 생각하는 것도 모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각종 전시회라거나 공연, 아니면 공공 목적에 부응하기 위한 포스터들. 꽤나 많고 한장 한장 디테일한 설명이 있었지만


몇몇 눈길을 잡아끌던 아이들만 사진으로 담아봤다.


포토그래퍼들을 초대해 강연을 연다는 걸 고려한 포스터. 사진기에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피아노학원의 포스터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다. 블라인드를 피아노 건반인 듯 어루만지는 장면들로 가득.


전쟁과 평화 뮤지컬(인지 오페라인지)의 포스터. 전쟁시와 평화시의 레드크로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으랴만은 한장의 이미지는 백마디 말보다 강력하다.


아동 성폭력이라는 불편하고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이미지화할 수 있을까. 얼음에 갇힌 꽃이라면 어떨까.


혹은 쇠고랑으로 구속받는 꽃의 이미지라면 어떨까. 


와인의 맛과 향과 색을 포스터에 담고 싶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코카콜라의 광고나 디자인적 요소들은 이미 평판이 자자하지만, 여전히도 이렇게 신선할 수 있는 거다. 워낙 깊이


각인되어 버린 로고 디자인의 일부만을 활용해서도 바로 코카콜라를 연상시킬 수 있는 유려한 디자인.

이건 내가 사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들었던 아웃도어 용품. 가볍지만 단단하고 심플한 테이블과 의자.


이제 뮤지엄이나 갤러리에서 애플의 제품들이 예술품인 양 전시되어 있는 건 놀랍지도 않다. 


이렇게 예술 작품처럼 핀 조명을 맞으며 홀로 서 있어도 전혀 주눅들거나 허름하지 않은 디자인이라니.


이 시계를 샵에서 팔길래 사고 싶었는데. 돈이 웬수랄까나.ㅋ


그리고 모빌처럼 모양이 변화하는 전등갓. 꽉 오무리고 있을 때도 활짝 열려 있을 때도 빛이 좋다.


스토케(Stokke)의 각종 아기용품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BMW의 차량용 베이비시트가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대나무로 만든 안경같은 것도 있고.


다소 민망하지만 참신하고 단아한 형태의 성인용품도 전시되어 있어서 꼼꼼히 살펴보기도 하고.


GPS기능이 내장되어 지갑의 위치를 실시간 파악할 수 있는 지갑. 자주 잊어버리는 사람들에겐 희소식인 아이템.


플라스틱으로 만든, 그렇지만 세련된 플루트. 중학교 때 싸구려 모양 플라스틱 단소로 맞았던 기억이 왜 나는 거지.


디지털 저울이 자체에 내장된 여행용 캐리어.


아주아주 매끈하게 생긴 알루미늄 책꽂이. 


해바라기 모양의 샤워기.


집에서 조립해서 쓸 수 있는 컴퓨터. 예전엔 라디오를 조립하는 키트가 있더니 이제 컴퓨터 조립 키트가 파는구나.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꼼꼼히 볼 만한 아이템들이 한 가득. 그래도 세시간 정도면 충분했던 거 같다. 


출장으로 싱가폴을 갈 때마다 자주 들른다는 친구의 이야기로는 전시품들도 규칙적으로 바뀌니만치 갈 때마다


만족스럽다고. 다음에 또 싱가폴 갈 일이 있으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뮤지엄이다.




 

홍콩에 가면 꼭 하루쯤을 할애해서 잔뜩 걸어보는 거리, 캣스트리트. 대략 소호거리와 만모우 사원이 있는 일대랄까.

 

이런 식으로 거리에까지 넘쳐나오는 중국의 전통 예술작품들이나 현대예술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들도 많고,

 

샵 하나를 둘러보는데 반나절이 훌쩍 넘어버리는 홈 인테리어 아이템샵인 '홈리스'도 있고.

 

 

 그리고 골목골목 재미있는 벽화와 풍경들을 숨기고 있기도 하다.

 

 

 

완탕면이라거나 이탈리안 레스토랑같은 이런저런 맛집들도 골목마다 숨기고 있고.

 

 

 만모우 사원에서 풍겨나오는 짙은 향내에 이끌려 사원 안을 둘러보기도 하고.

 

 이렇게 나선형으로 배배 꼬인 채 늘어뜨려진 향을 따라 시선을 뱅뱅 돌리다보면 왠지 어지러워져서 나오게 되는.

 

 

 

 특색있는 건물들, 그리고 건물 벽면을 꾸민 벽화와 디자인들.

 

그 풍경 속에서는 이렇게 모냥빠지게 입구에 찌그려 앉아있는 아이들조차 멋져 보인다.

 

 

그리고 과거 중국의 골동품들이라거나 모택동 시절의 공산당 유품들을 잔뜩 내걸고 있는 골목통까지.

 

재작년에 왔을 때는 여기서 새빨간 색으로 된 마오쩌둥의 어록집을 샀었는데, 영어와 중국어가 병기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사방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 제법 가파른 경사길들.

 

 

 

어느 집앞에 있던 우편함은 이렇게 파스텔톤으로 불규칙하게 배열된 게 꽤나 센스있다.

 

 

캣스트리트의 어느 길가를 지나다 뭔가가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와본 곳에는, 정색하고 있는 여자 얼굴이 그려진

 

오토바이 헤드라이트가 방긋거리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곳곳에 숨겨진 특색있는 박물관 중에 하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박물관.

 

미국에 이주한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박물관이라고 하길래 찾았는데.

 

두둥. 올해말까지 더 크고 새롭게 짓는다며 리모델링이었다는. 아쉽게도 언젠가의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그리고 샌프란의 그래피티들. 이전에 갔을 때는 주로 미션 지구쪽의 이름난 그래피티 골목들을 돌았다면 이번엔 그냥 랜덤으로.

 

 

 

미국의 이미지 중 하나는, 온갖 담배와 맥주를 팔고 있는 철조망 촘촘한 구멍가게. 왠지 이런 그림에 가깝지 않을까.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 앞에서 문득 육박해들어오는 그래피티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돌아보지 못한 골목에 대한 아쉬움도 한가득.

 

무슨 건물인지 모르겠지만 외벽이 온통 음악과도 같은 느낌. 악기와 음표들과 새들이 날아다니는.

 

어디보다 맘에 들었던 그림, 선연한 빨강과 파랑, 그리고 하얀색과 왼켠의 노란색 기둥까지.

 

그러다보니 불쑥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의 공터로 흘러나왔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와

 

무거워보이는 짐보퉁이를 들고서는 힘든 듯 잠시 멈춰선 중늙은이 할아버지. 뭔가 지쳐보이는 뒷모습들이다.

 

어느 건물 벽면에 누군가 그래피티..라기보다는 캘리그래피같이 그려둔 낙서. 형체를 분간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저 그 모호한 형상과 필선의 강약만으로도 느낌을 던져주는 듯 하던.

 

여기 역시. 건물의 모든 외벽을 굉장히 세밀한 그래피티로 래핑해버린 게 굉장히 인상적이다.

 

건물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 그리고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본 벽면의 그래피티.

 

실컷 거리를 종횡무진,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해떨어질 무렵 숙소로 돌아와서.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호텔인지라

 

호텔방 번호판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케이블카가 담겼다.

 

 

 

 

자전거를 타고 피어39에서 금문교를 지나, 그만큼의 거리를 또 달리고 나면 소살리토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처음 도착한 여행지에 들렀을 때 으레 그러하듯 다짜고짜 여행안내소로. 여기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요?

 

왠지 현지에서 사시는 분들의 추천은 가이드북과는 달랐던 경험에서 나온 건데, 역시나 새하얀 백발이 눈부신 할머니의

 

카랑카랑하고도 자부심 넘치는 한 마디. 꼭 봐야 하는 건 없지만, 한나절 여유롭게 거닐기엔 딱 좋은 사이즈와 분위기가 있답니다.

 

소살리토 초입에 들어서자 바다넘어 보이는 샌프란시스코의 마천루.

 

 

 

그리고 해변의 돌들을 가지고 아주아주 미묘하게 균형을 잡아 세우는 예술작업중이신 예술가 아저씨.

 

 

샌프란시스코의 도로변에도 비슷한 표지가 있었는데, 소살리토의 표지는 생선 모양으로 조금 다르다.

 

그리고 소살리토를 돌아볼 때 일종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분수. 삐에로처럼 고리눈을 한 채 활짝 웃는 표정이 괴랄하다.

 

미국의 소도시, 작은 마을에서 왠지 인도 냄새가 나는 코끼리상을 볼 줄은 몰랐는데.

 

샌프란시스코나 여기나, 시끌벅적하게 공기를 찢으며 내달리는 소방차의 위용은 마찬가지.

 

 

그런데 참 번쩍번쩍, 얼핏 보기에도 관리도 잘 되어 있고 굉장히 신형인 차들이다. 새빨간 도색은 말할 것도 없고.

 

 

소살리토의 샵들, 레스토랑들, 까페들과 자그마한 갤러리들을 휘적휘적 둘러보고 나니 두어시간.

 

 

자전거 주차는 아무데나 하지 말라고 경고판이 사방에 붙어있지만, 사실 또 그렇다고 유료로 주차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사진의 포인트가 저 자전거 주차금지 표지판인 건 아니랄까.

 

 

화단이 잘 정돈된 모양새나, 천박하지 않은 간판들이 차분하게 늘어선 모양새나. 제각기 개성있는 건물들하며.

 

 그 와중에 소살리토의 메인로드로부터 샛길로 빠지는 왼갖 골목길들이 호시탐탐 여행객들을 노리고 있다.

 

 금문교를 건너 자전거로 여기까지 온 여행자들은 대개 페리를 이용해서 샌프란 시내로 돌아가는데, 대충 두어시간이면

 

돌아갈 수 있는 길이니 그냥 사람들 배타는 것만 조금 구경하다가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비지터 센터의 호호백발 할머니 말씀이 맞았던 거 같다. 뭔가 특별히 볼 게 있다거나 즐길 게 있는 곳은 아니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맞이하는 바다와는 다른 느낌의 풍경과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이다. 소살리토란.

 

 

 

압구정동 큰길따라 걷다가 문득 나타난 이국적인 건물, 고층빌딩이 한치라도 더 비싼 땅값을 빼먹겠다고 빽빽히 들어찬 가운데

 

태평하게 잔디정원까지 앞에 펼치고는 야트막한, 유럽의 냄새가 풍기는 건물을 지어놓은 무슨 성형외과 건물.

 

 

까끌까끌하게 생긴 울타리도 눈을 끌지만, 두껍고 얇은 나뭇가지를 잔뜩 뭉쳐놓고는 말끔하게 부드럽게 깎아버린 모습이

 

왠지 성형외과의 기술력이랄까, '성능'을 과시하는 거 같아 눈에 담았다.

 

 

얼마나 삐죽거리던, 거칠거나 모가 났던 상관없이 저렇게 매끈하고 유려한 모습으로 다듬어줄 수 있다는 의지랄까.

 

성형수술에 대한 찬반과는 무관하게 저런 작품으로 은근히 돌려말하는 병원 측의 센스에 일단 박수를.

 

 

 

+ 지나다니며 몇 번이나 이 조형물을 맞닥뜨렸다는 모 씨에 따르면,

 

저것은 "베이글"을 만들어주겠다는 성형외과의 의지로 해석됨. 베이비 페이스에 글래머 바디를 만들어주마,

 

그래서 저 모양이 '베이글'이라는, 믿거나말거나식의 해석.ㅋ

구룡포항 앞에 있는 어부의 동상, 손에 실제로 두꺼운 줄이 감긴 채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마치 바다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온통 빼곡하게 들어선 채 후끈한 김을 퍼올리고 있는 대게 음식점들. 가게마다 대게 한마리씩 간판에 올렸다.

 

 

구룡포항을 굽어보는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의 탁 트인 구룡포항 풍경.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리는 시점, 항구 앞 노점들이 발갛다.

 

한쪽에서는 품바 '예술공연단'이 쉼없는 깨방정으로 장터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지만 늦은 시간 탓인지 한적하기만 하다.

 

삽시간에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장터, 과메기와 대게를 파는 노점들은 한산하고 주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서 한담중이던.

 

풍어를 기원하며 배에 꽂아둔 나뭇가지들.

 

 

게섰거라~ 찜통에서 쉼없이 뿜어나오는 하얀 연기엔 촉촉하고 탱글거리는 대게의 바다내음이 섞였다.

 

 

 

코엑스 메가박스 가는 길, 리모델링이 한창인 코엑스 곳곳에서 문닫고 사라져버린 샵과 공간들이 많아지는 시기다.

 

늘 무심코 지나쳤던 장식등들이 새삼스럽게 보이고, 마치 이 곳에 놀러온 외국인 관광객인양 카메라를 들게 만든 이유.

 

 구간구간 상점들이 빠져나가고 공사가 시작되고 있는 즈음이라 살짝 황량해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람은 많다.

 

그리고 코엑스 메가박스의 상징과도 같은, 이 텔레비전 탑.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라고 해도 믿을 법한.

 

 

어느샌가부터 메가박스 옆에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생겼다. 도슨트도 상주 중이어서 언제든 들어가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작지만 알차게 작품이 전시된 공간을 돌아볼 수 있는 것.

 

재미지고 발랄한 작품들을 볼 겸, 슬쩍슬쩍 점심시간에 산책 삼아 돌아다니는 곳 중 하나.

 

 

 

 

 

 

‎9월의 인디포럼 월례비행 작품은 박준석 감독의 '낯선 물체'.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카메라 무빙, 그리고 내러티브보다는 메타포가 갖는 의미를 전개해나가는데 집중한 작품이었다.

 

전체 비용이 백만원 들었다나, 밥값 오십 포함해서. 물론 배우들의 개런티같은 비용은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을 거다.

 

그야말로 핸드헬드 8미리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영화를 찍는 '시네마 키드'의 날것 같은 모습으로 찍은 영화랄까.

 

 

그렇지만 영화의 참신함이라거나 아이디어, 그런 독립/예술 영화 특유의 강점은 말할 것도 없고 감독이 조탁해낸

 

화면의 아름다움 역시 여느 대작영화나 상업영화-그런 식의 구분이 유의미한지는 차치하고라도-에 뒤지지 않았다.

 

한시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사방에서 야금야금 짚어내는 학교 건물의 구석구석 장면, 그리고 그 공간들을 다시

 

치밀한 프레이밍을 통해 사방에서 조망하여 선과 면과 반복적인 패턴의 스틸샷으로 잡아내는 공력이라니.

 

 

빛이 사라진 눈길의 남자가 있다.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텅빈 듯한 건물 안을 청소하고 있다. 세피아톤의 가라앉은

 

화면, 숨죽인 듯 절제된 카메라 무빙, 그리고 엉성하게 휘두르는 대걸레의 쓱싹이는 소리만 가득한 공간 안으로,

 

문득 '낯선 물체', 커다란 공 하나가 통통 튀며 굴러들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가만히 공을 굽어보다가 가만히

 

두 팔 가득 공을 품에 안고는 건물 안의 통로와 방들을 살핀다..굳이 말하자면 이런 식의 내러티브가 가능하려나.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에는 확연히 갈리는 듯한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야기 중 전반부를 영화 속 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도 읽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의 예술적 자아가 어떤 경로로 성장했는지, 마치

 

개인의 삶과 그 와중의 인간관계를 선과 면과 반복적인 패턴으로 가득한 건물 안에서 응축해보여주는 듯한 압축된 회상신이랄까.

 

그리고 그런 포부와 기대를 배반하는 현재의 열악한 환경과 무딘 재능 따위로 얼마나 답답한 상황인지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

 

 

낯선 물체. 그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에 다가온 하나의 소소한 계기라거나 고민 한줌이라고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문득 세상이 낯설게 보이고 당연하던 것들에 새삼 의문이 제기되는 계기.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처음에 주인공을

 

깨어나게 했던 그 '낯선 물체' 공 하나가, 영화 마지막엔 두개로 늘어나는 것. (감독 말로는 돈만 더 있었으면 화면 가득

 

'낯선 물체'를 채워넣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늘어난 고민, 혹은 의식된 무게감만큼 감독은 성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시간여의 상영 이후 감독이랑 이송희일 평론가, 김곡 감독과 대담하는 시간이 또 그만큼의 시간동안 있었는데

 

그 덕분에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결과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영화의 해석을 하나씩 짚어보고,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 이야기를 더불어 버무리며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말하는 건축가, 요새 대세인 건축학개론 말고. 고 정기용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사실 건축이란 거, 여태 관심이 없었던 게 이상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예술인 거다. 사람을 에워싼

 

공간을 확보하고 형체를 부여하는 것. 그런 건축물들이 이번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새로 짓는 공모전에서

 

드러났듯, 그리고 청계광장의 빨갛고 파란 골뱅이탑에서 드러났듯, 인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배려없이는

 

쉬이 위압적으로 되어 천박하고 자기완결적으로 폐쇄된 '바벨탑'이 되고 마는 거니까.

 

 

그는 등나무에 기대어 선 운동장과도 같은 무주의 공공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제주도니 어디니 전국 곳곳의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어내는 등 쉼없이 건축의 윤리성을 묻는다. 건축이 지향해야 할 바, 건축이 가져야 할

 

가치를 묻는 그의 태도는 대단히 완강하고 보수적이랄 수도 있겠지만-그래서 그의 건축은 첨단소재나 기법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한 가지 질문에 대한 나름의 성실한 답을 내놓는다.

 

 

공간을 실제로 활용할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평생 인간을 위한 공간, 형체를 만들기위해 애썼던 그가

 

자신이 지어올린 건물-목욕탕 겸 마을회관-옆에 앉아 볕을 쬐며 노인들과 담소하는 모습이란, 그가 꿈꾸던 인간적이고

 

공적인 건축물의 현현이자 그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을 보여주는 거 같았다. 그 건물을 누가 지었는지 관심조차 없는

 

노인들 옆에서, 다만 쓰잘데기없는 마을회관 대신 꼭 필요했던 목욕탕이 생긴 걸 기뻐하는 그들 옆에서, 가만히 웃는 그의 모습.

 

 

건축가로서 차츰 드러나던 그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이 보였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건축가로서의

 

시선을 갈무리하고 평생의 성취를 내보이는 회고전을 치루는 모습은, 그렇게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무리를

 

단단히 지으려는 모습은, 이미 특정 분야의 그렇고 그런 '전문가'의 모습을 넘어서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을 매듭짓는 모습 자체로 모든 이의 공감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거 아닐까.

 

 

'고양이를 부탁해'를 찍었던 정재은 감독은 그런 그의 죽음을 두고 괜히 눈물샘을 자극하지도, 턱없는 아량과

 

하릴없는 상찬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성대결절로 고생하는 병든 건축가의 갈라진 목소리를 자막도 없이 그대로

 

드러내며, 관객들이 모두 숨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꼭꼭 새겨듣도록 한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거슬린다 싶더니, 어느 순간 그 목소리가 너무도 뭉클하게 다가왔을 만큼 강력한 영화였다. 영악한 감독 같으니.

 

 

 

 

 

 

영화는 어떤 기술적 진보에 대한 '아티스트'의 반감과 편견이 끝내 녹아내리고 새롭게 진보한 '그릇'에 어울리는 형태의

 

'아트'를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소리가 지워진 영화세트장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하던 그가

 

먼 길을 돌아 다시금 모두들 소리를 죽인 영화세트장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그가 발굴하고 영감을 건넸던 젊은

 

여배우와 경쾌하게 탭댄스를 추는 장면에서 구둣발을 어찌나 감각적으로 타닥탁탁 거리던지. 타닥탁탁.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구둣발이 내는 소리를 살려내면서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내는데 일조한 셈이다.

 

 

어쩌면 영화는, 2011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인 이 영화는, 영화에 꼭 '소리'가 필요한지에 대해 새삼스레 확인해 보고,

 

영화 속 세계에 당연하게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소리'를 어떻게 해야 인상적으로, 인습적이지 않게 재발견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리의 힘을 빌지 않고 표정과 몸짓과 최소한의 대사 텍스트로

 

스토리를 진행해 가다가 문득, 남자를 괴롭히거나 희롱하다가 결국엔 화해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릴 때마다 사운드가

 

지닌 나름의 강력한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 거다. (그보다 무성영화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더욱 감탄했지만.)

 

 

영화에선 크게 두개의 갈등이 노정되고 있는 듯 하다. 새로운 기술적 발전과 그 결과물에 대한 시선의 문제에 더해,

 

'세단 지나간다니 똥차 빼주자'는 세대간의 문제랄까. 기술 혁신과 그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이란 건, 반기는 사람에겐

 

세상이 확 바뀌고 나아지리라는 열광을, 시큰둥한 사람에겐 조잡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생겼다는 기피감과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사진기술이 개발되거나 영화가 발명되거나,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거나 혹은 3D기술이

 

생기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이 생기거나 따위에 대한 찬반. 그건 대체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경계와 겹치곤 한다.

 

 

그렇지만 그건 '아티스트'에서 보여주듯, 어쩌면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서부터 웅변하듯, 그러한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요소'에 비기면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인 거다. 기술 발전이 어떠한 방향으로 얼마나 혁신적인 가능성을

 

확장시킬지라도, 혹은 그것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의 디그레이드가 될 여지가 크다 할지라도, 그걸 활용하고

 

가능성을 구현하고 제 몸에 맞는 옷으로 적응시키는 건 결국 인간. 그런 작업에 요하는 창의성과 창조성을 감안한다면

 

일종의 예술이라 해도 무방할 테니 결국 쉼없는 기술혁신기에 처한 인간은 모두 아티스트인지 모른다. 마치 그가

 

그녀와 함께 유성영화 속에서 구둣발을 타닥탁탁 하며, 목소리 대신 새로운 사운드를 들려주듯이.

 

 

그러거나 저러거나, 오랜만에 보는 무성영화-최근에 봤던 무성영화는 어느 따뜻한 나라로 떠나던 외국의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찰리채플린의 클래식이었다-는 역시나 물기를 함뿍 머금은 듯 부드럽고 촉촉한 화면의 느낌이라거나, 동작 하나

 

표정 하나 사려깊게 배치된 섬세한 세공이라거나, 그리고 무엇보다 자칫 자극적이고 번다하기 쉬운 소리의 쓰임없이도

 

보는 사람을 흡인하고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 달려가게 만드는 그 힘 같은 것들에 다시금 매혹되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2011년에 만들어진 새삼스러운 무성영화, '아티스트'를 찾아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하늘에서 본 지구,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한 컨셉일 수도 있겠다. 헬기나 기구를 활용해서 남들이 확보하기 어려운

거리를 두고 지구상의 풍경과 사람, 사물들을 사진에 담아낸다는 건. 가까이서 보았을 때 미처 한눈에 잡아내지 못했던

전체적인 이미지라거나, 흉물스럽고 무질서해보이기만 하던 덩어리에 특정한 패턴이나 리듬감이 느껴질 수 있으니까.

게다가 멀리 떨어져서 보면 웬만하면 다 이뻐 보인다는, 그런 식의 말도 있으니 '하늘에서 본 지구', 항공사진이란

장르는 어느정도 먹고 들어간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얀 아르튀스-베르트랑의 전시는 역시 기대했던 것만큼, 아름다웠다. 그의 사진들은 기껏해야 지면으로부터 1-2미터

떨어진 곳으로부터 바라볼 뿐인 인간의 시선으론 좀체 가닿지 못할 그런 풍경들을 담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의 눈'.

고도 30-3,000미터 사이에서 촬영되었다더니 그 높이란 건 정말 사람이나 자동차, 섬이 콩알 만하게 보일 만큼의

높이여서 꽤나 신선하고 새로운 각이 잡혔던 거 같다. 게다가 1990년 이래 110개국이 넘는 나라를 돌아다니며 삼천시간

이상을 비행했다고 하니 뭔가 담을 거리를 찾는 작가의 발놀림은 굉장히 부지런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을 더욱 빛나게 했던 건 단순히 아름다움을 좇거나 풍경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으려는 의지랄까

그의 마음이 사진들에 담겨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인 거 같다. "하늘에서 본 지구", "하늘에서 본 한국", "인간의 친구-동물"

그에 더해 영화감독 뤽 베송과 함께 촬영한 "HOME"이란 동영상까지 총 네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전시를 보고 있으면,

지구의 생태가 어떻게 일상적으로 인류로 인해 더럽혀지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간인지,

지구가 품고 있는 생명들이 얼마나 다종다기하고 서로 다른지에 대한 애정이 물씬한 시선을 따르게 되는 거다.


각종 광물과 대리석을 캐는 채석장에서 흘러나오는 화학물질로 범벅된 기이한 색상의 물줄기들이 거친 선의 추상화처럼

황토빛 대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거침없이 선을 그어놓는가 하면, 말려놓으려 걸어둔 바닷가 청록색 그물들은

중첩된 채 캔버스에 거칠하게 붙여둔 텍스쳐같은 설치미술품 같기도 하고, '꽃보다 남자'에서 나왔다는 그 누벨칼레도니의

하트 모양 표식은 도무지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섬세하게 장식적이고. 그런가 하면 직접

키우고 있는 말이니 돼지니 양 같은 동물들을 가슴에 품고, 사랑스럽게 껴안고 사진을 찍은 농부들의 그 표정이라니.


흔히 "지구는 인류가 후대로부터 빌려 쓰는 곳"이란 표어를 생각없이 말하지만, 얀 아르튀스는 그 이상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구는 인류의 '가정(HOME)'이다, 인류와 온갖 동식물과 생명들이 함께 모여사는. 그런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 전시의 수익금은 전부 환경기금 및 국제 어린이 기아기금 등에 전달된다고 하니

꼭 한번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이런 높이를 확보한 채 세계를 찍은 사진을 본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좋을 듯.



*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본관(2,3층), 2011.12.15~2012. 3. 15일까지.

www.하늘에서본지구.net







부산 국제시장 위로 조금 걷다보면 나오는 보수동 책방골목. 이곳저곳에 '책방골목'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간판, 그리고

서점들의 간판들이 큰소리로 호객중이다. 어느 서점 앞에 나온 앉은뱅이 의자 두개 위에 앉은 돼지 두마리가 귀엽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자갈치시장, 족발골목, 40계단, 그리고 보수동 책방골목까지. 쉬엄쉬엄 하루 걸어다니며 볼 거리.

정말 골목이다. 큰길에서 비스듬이 꺽여들어가는 좁은 길, 가뜩이나 좁은 길을 양쪽에서 툭툭 치고나온 온갖

종류의 서적들이 더욱 좁게 보이게 만든 데다가 하늘까지 차양이 가리고 있어 더욱 좁아보인다.


어느 서점에선가 헌책을 손보고 계신 아저씨. 책의 구겨진 부분이라거나 겉면에 붙은 스티커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 듯.

골목 위로 기세좋게 쌓아올려진 오르막계단길. 가파른 계단 양쪽으로도 서점들 간판이 보인다.


헌책방을 좋아하는 건, 그 책의 종이들이 적당히 누렇게 바래가며 삭아가는 냄새가 좋아서다. 대학교에서도

중앙도서관 같은 커다란 헌책방을 가면 넘 냄새가 좋아서 똥이 마려울 지경이었다. 여긴 심수봉 1집 같은

오랜 LP판도 함께 취급하는 헌책방이었다.

앗, 그런데 이리저리 둘러보던 헌책 중에서 하나 눈에 들어온 책이 한 권 있었다. 내 방에 있는 세계문학전집 중

한권이 비는데, 마침 딱 그 책이 보이는 거다.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들어있는. 덥썩 집어들고 가격을

물으니 사천원이라던가. 늘 이가 빠진 책장이 맘에 걸렸는데 횡재라는 기분으로 냉큼 들고 나왔다.

또 뭔가 건질 게 없을까 싶어서 여기저기 살피는데 가장 많이 보이던 건, 온갖 종류의 문제집 참고서들. 그리고 뭣보다도

영어교재들. 내가 중학교때 썼던 걸로 기억하는 초록색 성문기초영문법이 보이고 막 그런다.

그리고 골목 어귀쯤에서 비탈을 타고 오르는 길, 고양이 한마리가 당당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뭔가 공공미술기획이 있었나보다. 벽면을 타고 카멜레온 한마리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글자들을 풀어넣고 있었다.

색색으로 깜찍하게 정비된 풍경 덕에 회색빛 시멘트의 차가운 느낌이 많이 희석되는 거 같다.

물론 중간에 이렇게 페인트가 온통 붉게 벗겨지고 녹물이 줄줄 타내려오는 문짝같은 게 그대로 남아있기도 했다.

저런 건 발로 한방만 뻥 걷어차도 구멍이 뻥 뚫리지 않을까, 싶도록 옴팡지게 삭아내린 철문. 이미 철문 안과 밖을

가르고 버틸만큼의 힘도 없거니와 철문 안에는 막다른 골목만 남아버린, 맹장같은 철문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원색으로 화사하게 칠해진 담벼락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한아름 꽃다발같은 카멜레온을 안고 있는

흰곰 한마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책방골목 3길, 이라 씌인 푯말이 가파르게 고개를 굽혔다.


골목 위에 올라섰다가, 다시 돌아내려오는데 세상 곳곳에 왕관같은 깃털을 날리고 있는 비둘기 한마리도 만나고.


올라올 때는 미처 못 봤던, 심통 가득한 표정의 다부진 백곰 한 마리.

그리고 이녀석은 아까 보초서고 있던 고양이랑 바톤 체인지한 뉴페이스 괭이.

놓쳤던 풍경 하나. 비탈길 오르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난간 따라 이어진 줄에 조그마한 표찰들이 즐비했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살게 해주세요, 행복하면 좋겠어요, 남자친구 생겼으면 좋겠어요..저마다의 소원들이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바닥에 이름난 한국 소설들과 그 작가의 이름이 대리석으로 박혀 있었다. 이상의 날개,

염상섭의 표본실 청개구리,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읽지 않았다 해도 이름은 모두가 알만한 그런 작품들이다.

배수구 뚜껑도 특별한 보수동 책방골목. 헌책의 살짝 맵싸하고 습습한 냄새가 그득한 이곳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

딱 좋겠다 싶었고 괜찮은 까페도 요기조기 숨어있었으니 잠시 앉아 책장을 들척이기에 딱 좋을 듯.

심지어는 문닫고 있는 서점들조차 이렇게 독특한 그림들을 셔터에 그려두었고, 그 앞에 빈 책장들도 나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듯한 골목이다.

어느 일본서 헌책 전문점 앞에서. 마음껏 사진찍으라는 안내판을 보고 안심하고 이리저리 구경했는데 제일 눈에 들어왔던

건 역시 고무고무의 원피스 친구들. 니들은 대체 언제 해적왕이 되고 이야기를 완결할 셈이냐.

아, 내 방에 이빠진 책장. 초등학교 때부터 보던 책들이라 제법 손때도 묻고 애착이 있는 전집이었는데. 한국문학,

세계문학 전집중에서 유일하게 한 권 빠진 게 '오만과 편견'이 들어있는 6권.

이번에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발견한 책으로 메꿨다. 어랏. 근데 사이즈가 조금 작고 책 번호도 그게 아니다. 빠진 건

6번, 새로 구한 건 9번. 뒷장을 펼쳐보니 출판년도가 일년 차이가 나는 게 원인인 듯. 근데 분명히 오만과 편견은 있다는거.

뭐, 그러니 됐다.

 

부산에서 돌아보았던 곳곳들. 남포동을 중심으로 돌아봤던 곳들을 정리해본 지도.




대체 '부산의 산토리니'는 어디를 말하는 걸까.


부산에 '그리스 산토리니'마을처럼 이쁜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켜켜이 오붓한 마을이 어딘가 있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었었다. 다만 그 어딘가가 정말 어딘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상의 정보가 워낙 분분하고 혼란스럽다고 느꼈던 게,

'부산 산토리니'로 찾으면 '감천동 문화마을, 태극마을, 태극도마을, 영도 흰여울길, 영선동, 이송도 마을..' 등등 굉장히

다양한 지명들이 쏟아져 나온 탓이다. 직접 가보고서야, 그 혼란스러움은 어느정도 정리가 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부산 산토리니 = 감천동 문화마을, 태극(도) 마을, 감천2동, 감정초등학교 골목..전부 같은 곳을 말함.

부산의 또다른 산토리니 = 영도 영선동 이송도 마을(영도 절영 해안 산책로)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노닐다가 택시를 타고 '감정초등학교'를 가자고 했는데, 기사분이 잘 모르신다. 왜 그 부산의

산토리니가 있다는 곳 모르세요, 해도 모르신다 하고 자꾸 감천초등학교 아니냐고 되묻기만 하시기에, 손가락을

바싹 여며서 내비게이션에 찍어드렸다. 그리고 도착한 감정초등학교 앞. 이 벽화사진은 이미 숱한 블로그에서

잔뜩 본지라 꼭 많이 와본 곳 다시 방문한 느낌이었다. 여기서부터 감정 문화마을, 혹은 '부산 산토리니'의 골목길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출발하기 전 우선 옆에 있는 안내지도 하나 찍어두고 출발. 빨간 길을 따라가는 게 정석이라는데 뭐, 골목길이란 게

가다가 내키는대로 요리조리 비트는 맛에 다니는 거니까 위치 확인만 할 정도로 참고할 생각이다.

문화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건, 산비탈을 따라 쭉 올라세워진 달동네 마을이 낡고 허름해진 위에다가, 예술가들이

채색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조형물도 설치하며 마을 주민들과의 협업으로 일군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입구는

제법 여기저기에 유쾌한 조형물들이 심심찮게 보이고 있었다.

입구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얼굴 모양의 새, 인면조들.


감천동 문화마을, '부산의 산토리니' 안으로 들어서는 길은 기본적으로 저렇게 생긴 화살표를 따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파스텔톤의 색색가지 물감으로 칠해진 건물 외벽에 절대 놓칠리 없는 크고 작은 화살표들의 무리가 지긋이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골목은 좁았지만 말끔했다. 페인트칠이 위부터 아래까지 꼼꼼하게 칠해져 있었고, 골목 양쪽에 마주본 벽면의

색감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데다가 여기저기서 쉽게 눈에 띄는 꽃나무들이 분위기를 한결 화사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야트막한 건물 위에서부터 슬몃 기어들어오는 분무기로 뿌린 듯한 햇살까지.

경사는 매우 가팔랐고, 이 곳에 사시는 할머니 몇분이 따뜻하게 덥혀진 시멘트 계단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앞서 걷고 있던 두 여학생들에게 뭐라뭐라 촬영하기 이쁜 데나 전망대를 알려주시는 분도

계셨고, 우리는 찍지 말라며 굳이 자리를 피하려 하시는 분도 계신듯 했으며, 여기 뭐 볼게 있다고 이리들 기어와

귀찮게 구냐고 한소리 하시는 분도 계셨다. 그렇지만 사진은 말이 없고, 찍고 나면 그뿐. 풍경속 할머니들의

등저리로 내려쏟는 부드러운 햇살이 노곤해 보인다.


낡고 녹슨 사다리가 단층 건물 옥상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인 듯 했다. 페인트칠이 잘 되어있는 벽면에 비해

벌써 많이 녹슬고 피곤한 모습이라 눈에 띄었다. 벽을 칠할 때 같이 칠했을 텐데, 생각보다 페인트가 오래 못

버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한번 칠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달동네의 고되고 신산한 풍경에 '산토리니'의

느낌을 부여하고 유지하기란 생각보다 많은 페인트통이 소요될 거다.


골목을 걷다 어느 탁 트인 시점에서 내려다본 풍경. 다닥다닥, 서로의 어깨를 내주고 모서리를 공굴리며 세워진 집들이라

집 모양이 네모반듯한게 아니라 삼각형, 마름모, 사다리꼴..유치원생들 도형 공부하기 딱 좋겠다. 그런 분방한 집들이 버틴

틈새로 차마 길이랄 것도 없는 골목들이 이리저리 꺽이는 게 또 매력적이다.

그리고 나름 배합에 신경을 쓴 듯 연두빛 분홍빛 파랑빛 페인트들이 골고루 쓰인 집들, 그 사이로 놓인 시멘트

계단을 자근자근 밟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그 빛깔따라 조금이라도 화사해졌다면 좋겠다.

감천 문화마을, 이 '부산 산토리니'를 표방한, 혹은 '마추픽추'를 표방한 동네의 또 하나 특징은 온통 전선이 하늘을

달리고 있다는 점. 고작해야 이삼층 짜리 야트막한 건물들이 가파른 비탈 위에서 미끌리고 있는 와중에 우뚝 솟은

갸냘픈 전봇대 위에서 사방팔방으로 뻗는 전깃줄이 한뭉치다.

어느 집 슬레이트 지붕에 살짝 몸을 얹은 채 내려다본 풍경. 완만하게 휘어진 산비탈을 따라 맞은편 등성이에 비슷한

높이에 있는 집들이 보인다. 파란색 물탱크는 하나씩 죄다 옥상 위에 올린 건물들.

저렇게 사람 하나 지나기도 힘든, 지나면서 가방이고 겉옷이고 다 거칠하기 그지없는 시멘트 맨벽에 긁고 지나는

골목길을 품고 있기도 했다. 감천동 문화마을.

전깃줄이 사방으로 뻗은 하늘 아래, 조그마한 공간이 남아 푸른 빛이 맴돌았다. 사람과 건물과 골목이 온통

서로에게 한곁을 내어주고 살고 있는 듯한 풍경이 정겹기도 하고, 살짝 서글프기도 하고. 혹은 운치랄 수도.

빨랫감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여기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고, 골목을 다니며 만나는 건 커다란 카메라를

이고 진 외부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소리없이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빨랫줄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하는 네칸짜리 사다리가 앙증맞다.

여행객들, 관람객들, 관광객들을 인도하는 화살표가 곳곳에서 발견되어 길을 잃거나 엄한 데로 빠지기도 쉽지 않겠다.

굳이 길을 비틀어 다른 곳으로 가도 금세 어디선가 안내를 발견하게 되어 내심 안심도 되고 했지만, 그런 친절한 화살표

아래에도 이 곳의 풍경은 묻어난다. 누군가 내어놓은 쓰레기들, 그리고 누군가 써둔 '재활용 분리바람'이란 문구.

워낙 경사가 가팔라서, 몇개 건물들만 슥슥 지나치면 금방 달동네의 바닥 아스팔트 차도로 내려올 수가 있을 거 같다.

굳이 같은 높이에서 좌우로 돌아보며 이것저것 찾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야, 저런 화살표 무더기들을 보고서

얌전하게 내려온다면 생각보다 금방 끝나버릴 '부산 산토리니' 투어가 될 듯.

그 길위에는 이렇게 아직도 생생하게 보랏빛깔이 살아있는 벽도 있고. 색색이 재미있게 칠해진 공중화장실도 있다.

멀찍이 가파른 옹벽 위로 차곡차곡 놓인 화분들도 보이고. 그 위로 분홍빛 상아빛 페인트칠이 곱게 된 건물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그러고 보면 저렇게 좁디좁은 옹벽 위에 화분을 하나씩 끌어다 놓았을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느 집 앞, 온통 유리테이프와 누렁테이프로 발린 우체통 위에는 북어 한 마리가 제물로 바쳐져 있었다. 가게나 집에

들어오는 입구에 저렇게 북어 한마리를 걸어두면 복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면 언젠가 티비에서 생활풍수,

어쩌구 내용이 나온 이후로 어머니도 변기 뚜껑을 잊지 않고 꼭꼭 닫아두셨었다. 그런 마음 아닐까.

이렇게 국자를 재활용한 듯한 풍차도 지붕 위에 얹어놓고 있는 집이 있는가 하면.

차갑고 거친 시멘트 벽면 위에 스마일 표시가 하얗게 웃고 있는 집도 있었고.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인 것처럼 비탈길 한 면에 위태하게 솟은 다용도 공간. 지붕조차 없는 그 옆면으로 자유롭게

만들어져 달린 스텐레스 문짝과, 지붕 없이 그냥 흉내처럼 달려있는 문 아닌 문.

이렇게 부분부분 끊긴 채 담긴 사진으로는 감천동 문화마을, 혹은 태극마을, 태극도마을, 혹은 부산 산토리니라는

거창한 수식을 가진 이 마을의 풍경이 오롯이 담기지 않아서 아쉬울 뿐.

옹기종기 모여앉은 장독들, 위에 하나씩 얹힌 돌멩이, 시멘트덩어리, 벽돌 따위 모양과 형체는 다르지만 그런 다름조차

장독대 위에선 별달리 다툴 의미를 잃고 만다. 멀찍이 보이는, 이 골목들을 쏘다니며 사람보다 더 많이 발견했던 가스통.

곳곳에 잘 정비된 깔끔하고 귀여운 색감의 공중화장실이 있단 건 꽤나 인상적인 일이었다. 꼭 방문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가파르고 좁고 불편한 달동네에 사시는 분들에 아주 실용적인 도움이 될 거 같아서다.

그리고 발견한 공부방 하나. 왠지 모르겠지만 일본, 터키, 중국, 프랑스, 베트남, 대만..온갖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는 벽면,

그리고 각국의 언어로 쓰인 응원의 말들이 발길을 잡았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국기 아래 씌인 문구가 참 좋았는데.

"감천동, 난 너희들이 좋아. 그저 너희들과 함께 하고픈 마음 뿐이야." 미래에 대한 약속도, 현재에 대한 위로도 없이 그저

지금 이순간 함께 하고 싶다는 그 마음만으로 충만한 메시지. 그만큼 솔직하고 절절하게 느껴지는 거 같다.

아마 각국에서 봉사활동으로 왔던 교육 활동가들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그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꽤나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 보이는 '우리누리 공부방' 나무 현판 옆으로 보이는 에펠탑이니 뭐니 글로벌한 풍경을 보니 그런 거 같다. 이곳이 비단

부산 사람들, 혹은 한국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곳을 알고 챙기려는 사람이 있다는 훈훈함.

 

그렇지만 문이 닫힌 채 불이 꺼져있던 공부방, 아이들을 볼 수 없던 감천동 문화마을 어딘가의 골목에서 내려다본 풍경에

옥상에서 열심히 줄넘기를 하는 소녀가 잡혔다. 아이들은 전부 옥상에서 날아갈듯 맹렬하게 줄넘기를 하고 있는 걸까.


누가 여기를 '부산의 산토리니'라고 이름붙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편하고 럭셔리한 이름이 이 곳에 맞는 옷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산토리니를 연상케하는 파스텔톤의 껍데기는 말고, 좀더 골목을 헤집으며 살폈던 속살 사진들은 다음 포스팅에...


부산 감천 문화마을의 속살, '산토리니'란 별칭은 내려놓는 게 어떨지.










서울이란 동네는 워낙 순식간에 건물들이 사라지고 새로 올라가는 곳인지라, 당장 오늘 찍었던 사진이 내일이면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는 경우가 왕왕 있단 이야기를 들었었다. 옛 서울역사, 그곳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될 거라며 헐벗은 채 속살과 뼈대를 드러내며 리모델링 중이었던 모습이 오히려 사진전에
 
출품된 사진들보다도 흥미로웠었다. 이 곳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하게 단장해서 옛모습이 많이 지워지겠구나,

하는 비감함마저 들었는데 2009년 그 때 이후, 대충 3년이 꽉 차가는 시점에 다시 가본 서울역사는 또 달랐다.


재단장되어 문을 연 이곳에서 '연합국제보도사진전'이 열리고 있고, 다른 개관 프로젝트 설치미술전이 무료로

전시되고 있단 이야기를 들은 건 사실 두어달 전이었다.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이제야 갔더니, 이미 보도사진전은

끝났고 '카운트다운'이란 이름의 개관프로젝트만 내년 2월까지 열려 있었다. 3년동안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애초 1925년 복원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문화재 복원의 의미와 문화 공간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아우르는

시도로 '카운트다운'이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before & after #1.) 서울역사 1층 로비 한가운데에서 문득 고개를 들면 보이는 천장. 위의 사진이 2009년의 모습.

그리고 밑의 사진이 복원공사를 마치고는 밝고 산뜻하게 정리된 모습이다. 이전의 모습이 뭔가 공공기관의 느낌이

강하도록 무궁화니 봉황이니 태극마크가 커다랗게 압도했다면 지금 모습은 훨씬 샤방샤방하니 이쁘다.

 

(before & after #2.) 정확한 위치는 아니지만, 저 낡고 삐걱대는 문짝들이나 페인트칠이 잔뜩 금가고 깨어져나간

공간이 이렇게 말끔하게 정돈된 셈이다. 새하얗고 잔잔한 불빛이 말끔하게 칠해진 하얀 벽면과 전시물들에 반사되어,

높은 천장과 더불어 탁 트인 느낌을 준다.


(before & after #3.) 천장에 그려져있던 누렇게 바랜 두터운 벽지같던 무늬와 색감은 전부 사라지고 새하얗고

단정하게 칠해진 하얀 벽만 남았다. 그래도 마냥 하얗지만은 않아서, 기둥마다 검정색 받침으로 포인트를.


1층의 어느 창문들은 이렇게 색색으로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막 뭔가 복잡한 형체가 그려지거나 그러지 않아도,

저렇게 유리마다 다른 색을 끼워놓기만 해도 제법 분위기가 그럴 듯 하구나 싶다. 그리고 기차역이었던 이 공간의

전력을 감안한 듯 기차모양으로 쭉 이어지는 의자, 혹은 의자 모양의 예술작품. 예술작품인 거 같기도 하지만

누군가 앉았다 간 듯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슬쩍 엉덩이를 걸쳤더니 선뜻하니 차갑다.

예수와 부처와 공자? 뭔가 세계 종교를 대표하는 듯한 입상들이 서 있었는데 가만히 보면 그들의 대표적인

상징들이 혼란스럽게 뒤바뀌어 있다. 부처 머리위에 가시 면류관이 씌워있다거나, 예수가 수인을 맺고 있다거나.

그리고 작품들 너머로 보이는 말끔하고 단정한, 그야말로 새건물같은 옛 서울역사. 아, 이제 이곳의 이름은 바뀌었다.

이제 이곳은 2012년 3월부터 '문화역서울 284'라고 불리게 된다고 한다. 284는 이곳의 문화재 사적번호.

(before & after #4.) 다 찢어발겨진 벽지, 깨어진 창문, 대충 흰천으로 막아둔 썩은 나무내 풍기던 창틀 풍경이

이렇게 바뀌었다. 귀빈들이 기차를 기다렸다는 오늘날 VIP대기실과 같았던 이 공간, 그때의 우아함과 고급스런

느낌을 살려서 붉고 따뜻한 느낌의 두툼한 커튼과 함께 세련된 온기를 품고 있다.

(before & after #5.) 그리고 같은 공간, 일제강점기 쯤에는 겨울철 추운 날에 저기서 땔감을 때며 방안에 온기를

불어넣지 않았을까. 2009년 국제사진페스티벌 당시 사진작품을 올려두는 멋진 포인트 공간이었던 곳엔 역시

'우리는 모두 여행자'란 LED조명이 반짝이는 또다른 예술작품이 설치되었다.

(before & after #6.)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깨져나간 벽면은 을씨년스럽기가 그지없어서 왠지 공포영화의 한장면으로

손색이 없겠다 싶을 정도였는데, 말끔하게 정리되어선 저렇게 이리저리 뒤집히고 기울어진 숫자 작품들이 커다랗게

전시되어 있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백열등이 아니라 세련되고 도회적인 느낌의 하얀 형광등이란 것도 큰 차이.

(before & after #7.) 계단도 말끔하게 바뀌어 있긴 매한가지. 잔뜩 녹슨 철제 기둥에 드문드문 거미줄도 끼어있어

가뜩이나 차가워 보이는 시멘트계단 바닥이 더욱 차가워보였는데. 한결 나아진 모습이다.
.
(before & after #8.) 시커먼 먼지가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이 흐르는 동안 운명처럼 내려앉았던 그 곳, 조명조차 부실해서

더욱 껌껌해 보였던 그곳이 하얗게 씻겨지고 나니깐 난간에 붙어있는 무늬도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before & after #9.) 화장실도 이렇게 바뀌었다. 배선이 다 드러나고 위의 천장도 뜯겨서 이리저리 흐르는

파이프가 다 보이던 복원공사 중의 서울역사와, 이제 그런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한 말간 얼굴로 시치미를

떼며 사람들을 맞이하는.

(before & after #10.) 큰 변화 중 하나는 창문에 붙어있던 철망이 모두 사라지고 딱딱하고 무거운 색감의 창문틀이


파스텔톤의 가볍고 따뜻한 느낌을 가진 창문틀로 바뀌었다는 것.

(before & after #11.)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바로 맞닥뜨리는 두개의 방. 이전에는 화장실과 이발실로 쓰였다는

곳이다. 지금은 이 곳이 과거에 어떤 모양이었으며, 복원을 거치며 어떤 부분이 어떻게 살아남고 버려졌는지

그 흔적을 남겨두고 있는 복원전시실이 되었다.

안에 들어가보면 이렇게 이전의 빨간 벽돌 건물의 속살이 그대로 살아있고, 고풍스런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유리장이나 목재 전시장 안에서 마치 박물관의 귀한 유물처럼 옛 서울역사의 부분들이 모셔져 있었다.


1층 로비의 천장화 그림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보여주는 옛 사진들도 남아있고, 서울역사 곳곳의 문짝 손잡이도

추려져 있었으며, 심지어 과거 이방이 화장실이었다는 걸 환기시키는 벽면의 파이프 흔적까지 간직했다.

(before & after #12.) 과거에 양식 레스토랑의 대명사였다는 서울역사의 대식당 '그릴', 그 공간은 이제 커다란

다목적홀로 바뀌었다. 휘황한 불빛을 뿜어내는 샹들리에가 줄줄이 늘어져 있던 곳은 그 무겁고 웅장한 느낌을

벗어던지고 밝고 가벼운, 좀더 현대적인 느낌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여전한 인테리어들과 방 자체의

독특한 모양새에서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고풍스러움이 멋지다.

과거에 대식당, 그릴이었다는 것의 흔적도 역시 여전히 남아있다. 1층에서부터 음식들이 올라오는 엘레베이터가

두개, 고스란히 남아있었는데 워낙 깔끔한 상태여서 지금도 그대로 써도 될 거 같다.

그리고 홀 뒤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저 문을 통해 날랐었나 보다. 매표소 유리창처럼 생긴 저 두 개의 구멍은

아마도 홀 서빙을 맡은 사람과 안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창구 같은 거였을라나.

(before & after #13.) 한쪽에 있는 벽난로. 저기에서 뻘건 불빛이 날름날름 땔감을 핥고 있었을 거고, 그 불빛에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지 않았을까. 뭐 여기가 유럽의 어느 연회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그런 식의 상상을 자꾸 부채질하는 이 곳의 건축물. 애초 그렇게 서양을 따르고 상상하며 만들어진 아시아

'근대'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before & after #14.) 그 안에 있던 라디에이터들. 지금도 설마 작동이 되랴만은, 그 쓰임이 없다고 지워버리지 않고

굳이 저렇게 철망까지 만들어서 그대로 보존해둔 건 그 자체로 이 방의 분위기를 만드는 아이템이지 싶어서일 듯.

아마 앞서 보았던 벽난로는 그냥 장식적인 효과만을 노린 거였거나, 아니면 워낙 방이 큰 지라 열기가 사방에 전달되지

않아서 별도의 난방 장치가 필요했나보다.

 

그리고 전시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 건, 벽면을 따라 담쟁이 덩굴처럼 타고 오르던 이 수많은 전선들, 아니 이어폰들.

뭐라고 칙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살아있는' 이어폰들이 벽면을 따라 꿈틀대며 유리창을 한가득 덮고 있었다.

창너머에서 조명이 아래로부터 위로 비쳐왔다. 서울역사 건물 외곽에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조명들을 빙

둘러서 야경을 이쁘게 꾸미보려고 하는 거다. 근데 조명이 좀 얼룩덜룩하게 벽면에 그림자를 남겨서 새롭게

복원된 역사 건물 내부처럼 말끔하다는 느낌은 없는 거 같지만, 여하간, 창문을 넘어 천장에 울퉁불퉁 그림자를

물리쳐낸 조명의 힘.

그리고 다른 예술작품들이 역사 건물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제목을 보기 전에 먼저 작품을 한참 노려보며

대체 뭘까 상상을 해보고는, 대충 생각이 멈춘다 싶으면 제목을 보고 다시 자극을 받고 제목과 작품 간의

연관관계를 새롭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그런 감상 패턴.

그리고 이런 무지개색 아크릴인지 유리인지를 활용해서 네모난 방 공간 곳곳에 입체 형상들을 배치해둔 작품도

있었다. 다른 것들보다, 실용성이란 측면에서, 창문 옆에 기대어 선 저 핑크빛의 영롱해 보이는 수납장이 맘에 들었다.

아무거나 손닿는 대로 집어서 저기에 칸칸이 집어넣어 두면 이쁠 거 같은데.


2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건물 밖으로 돌아나오면서 다시 한번 눈여겨 본 역사의 이모저모. 복원공사를 거치고

말끔하게 타일을 바꾸거나 페인트칠을 하고 거울도 말갛게 새로 갈아 꼈다지만, 나무문짝이라거나 묵직해보이는

문손잡이, 그 나무빛깔이 워낙 생생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빈티지스럽다. 그래서 다행이지 싶다.


하늘이 파랗게 밝을 때 들어갔는데, 한바퀴 휘휘 둘러보며 작품들도 보고 서울역사의 바뀐 모습들도 살피고

하다보니 어느새 하늘이 파랗게 어두워졌다. 건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저렇게 버티고 서서, 한때 기차를

타는 손님들이 들고 나던 건물에서 이제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들고 나는 건물로 쓸모를 바꾸며

수명을 이어가는 건 멋진 일인 거 같다. 이 곳에 켜켜이 쌓였던 오랜 기억들과 시간들 위에 또 다른 추억들이

쌓여 간다는 것, 하릴없이 무너져 내리고 사라지고 지워지지 않는다는 건 참 다행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유키 구라모토 콘서트를 볼 때 찍어둔 화장실 표시 사진. 국적을 알 수 없는, 그렇지만 왠지

내 자의적인 느낌으로는 프랑스풍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것 같은 남자와 여자의 표시가 인상적이다.


좀 자세하게 살펴보면, 남자와 여자 모두 입이 그려져 있지 않고 눈은 동그란 점 하나로 처리되어 있어서

조금 시크하고 멀뚱해 보이는 표정이긴 하다. 그치만 남자는 역삼각형, 여자는 타원형의 얼굴로 표현해 두었고

몇가닥의 굵은 머리결이 중력의 힘을 거스른 채 남자는 뾰족뾰족 섰고 여자는 펄렁펄렁 나부끼고 있달까.


그런 율동감 때문인지 시크한 표정이 그렇게 거리감을 주지는 않는 거 같다. 뭐, 예술의 전당이 가진

전반적인 분위기, 웅장하고 거대한 대리석 기념물의 느낌을 감안하면 저 정도면 무난한 듯.

콘서트가 시작하기 전, 사람들이 음악 분수 주변에서 사진도 찍고 산책도 하며 바글바글하던 모습.






"이곳 금남로는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맞서 5.18 광주항쟁 기간 중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5월 18일 카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대가 이 거리를 누볐다.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금남로는 5.18광주민중항쟁을 상징하는 거리다. 5.18광주민중항쟁 이후에도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가톨릭센터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 집회가 계속 열렸다.

항쟁 당시 가톨릭센터에서는 천주교광주대교구청과 CBS광주방송국이 들어서 있었다. 천주교광주

대교구청에서는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살상행위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피어린 투쟁을

전국에 알려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전파하였다."

그런 곳이 이 곳, 광주 금남로.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500여명이 사상당한 곳이자, 항쟁

처음부터 끝까지의 중심무대였던 곳이다. 대검으로 임산부를 찔러죽이고 도망가는 시민의 뒷통수를

곤봉으로 내리치고, 심지어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총을 쏴갈긴 곳. 예전의 첫 느낌은 생각보다

굉장히 좁은 곳이란 거였고, 이번에 다시 찾고서 느낀 건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하는 민망함.

몇걸음 뗄 때마다 세워져있는 조형물들을 마주하게 되어서 하나씩 찍어보기 시작, 그렇지만 그 조형물들이

80년 광주의 기억에 이어져있는 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판단한 기준은 작품의 형태와 제목,

그 이상 판단할 여지가 없기도 했거니와 금남로 양측으로 곤두선 건물들에 수반된 공공미술작품으로

늘어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작품이 고추상의 작품이어서 결국 판단은 작품 제목에

많이 기댈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내린 결론은 역시 광주의 기억을 떠올리는 작품이 거의 없었다는 것.

제목 : 상징.

제목 : 평화를 추구하는 무등여인상.

제목 : 평화로운 나날.

제목 : 사랑.

제목 : 여심.

물론 금남로가 온통 광주의 기억으로 짓눌려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광주시내의 중심이니 박제된

역사적 공간으로만 남아있어서도 안 되고 그게 가능하지도 않은 거다.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한복판이니.

다만 금남로공원처럼 이렇게 약간의 공간이라도 조성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 아픈 사건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너무나 아무것도 안 남아있는 거다.

금남로4가 전철역 입구에 서있는 지방 무가지 신문박스. 신문은 하나도 안 들어있었다. 그것보다 눈에

거슬렸던 건 그 뒤에 저 싸구려스럽고 촌스런 노랑색 담장.

뭔가 봤더니 노란 바탕색에 돌멩이인 양 그려놓은 회색 얼룩이 얼룩덜룩한 얄포름한 합판을 억지로

세워둔거다. 차들이 지날 때 흔들흔들거리는 게 꽤나 위태해 보였는데, 가늘디 가는 쇠줄 하나가

억지로 그 담장형태의 싸구려 장애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작은 사거리에서 만난 경찰초소. 뒤로 쉼없이 지나는 버스와 택시들, 이 거리에서 100대가 넘는 대형차량들이

시위에 합세해서 도청을 향해 행진했던 그런 날, 저런 경찰초소를 온통 불태우고 무너뜨리며 전진하던 그런

날, 어쩌면 그때가 한국 민주주의 정신이 도달했던 정점 아니었을까 싶어 우울해졌다.

금남로 지하상가에도 뭐가 있나 내려가봤지만, 아무것도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생활인들의 복작복작함,

지하상가 특유의 활기와 어수선함은 좋지만 왠지 괜히 아쉽다. 지상에도, 지하에도, 어디에도 그 사건은

기억할 만한 흔적과 자취를 남기지 않았나 보다. 괜히 화장실 사진이나 한번 찍고.

올라오는 길, 대피소 사인. 80년에는 지하상가가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정확치는 않다. 그랬다면 더욱

끔찍한 참사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전경들, 군인들이 사람들을 토끼몰이하듯 쫓아다녔을테니.

제목 : 꿈(DREAM).

제목 : 추의 사념에서.

이렇게 조각들을 찍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들 무렵. 지하철 환풍구에 누군가 페인트로

박아둔 글자가 눈에 확 띄었다. **반대.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반대한다는 표시, 그리고 저렇게

오래도록 남아 뜻을 전하려는 의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하다. 단순히 미감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것처럼 보이는 두루뭉실한 조각상들을 보다가 눈에 확 꽂혀버린 두 글자. 반대.

제목 : 꿈의 나라로.

제목 : 삶(LIFE).

2011 광주비엔날레에서 채택된 시민 공모 디자인인 듯. 큐브 같기도 하고, 뭔가 이쁜 상자같기도 하고. 저런

공공 설치물에 미감을 더하는 건 대체로 맘에 든다. 물론 주변 경관이나 색감과의 조화라는 부분이라거나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부분도 따져야겠지만 기본적으로 '도시를 누비는 디자인'이란 건 긍정적인 거 같다.

제목 : 함께 부르는 노래.

어렴풋이, 꿈 대신 해몽인지도 모르지만, 광주의 역사적 기억에 그 영감이나 의도의 부스러기를 빚지고

있는 듯한 작품들이 없진 않았지만 계속 아쉬운 와중이었다. 좀처럼 딱 깨놓고 여기가 그런 공간이었다,

말하고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기념물은 왜 없는 거지. 그러다가 인도 한복판에 굉장히 어색한 위치에

설치된 벤치 두개를 보았고, 벤치에 시선이 팔려서 못본 채 지나칠 뻔 하다가 겨우 발견.

'5.18 민중항쟁 사적 4'라는 잔뜩 녹슨 글자는 쉬이 읽히지도 않는다.


사적비의 뒷면. 숫자가 4라고 붙어있는 걸 보면 다른 것들이 더 있다는 얘긴데, 요새 지자체들 잘하는 것들을

왜 여기엔 적용하지 않나 모르겠다. 포스트마다 인증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부스를 설치해 둔다거나, 사적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를 비치해 둔다거나. 사실 올레길이니 갈매길(부산)이니 바우길이니 온갖 걷기코스가

개발되고 있는 요즘에, 이런 사적들을 잇는 순례길 하나 만들면 좋지 않을까. 굉장히 차별화된,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80년 광주의 기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거 같은데. 


제목 : ~~ 문.

그렇지만 현재 금남로는 커다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메시지 불명의, 오로지 거리 미화를 위한 듯한

조각들과 '부자되세요'라는 강력한 생활형 주문에 멈춰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지만, 미술 자체에 불만은

없고, 오히려 다른 거리에 비해 많은 미술작품들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이런 거대한 역사적 공간을

그냥 묵히고 있는 게 안타까운 거다.


제목 : 풍경.

제목 : 묵시-전환기적 시점에 서 있던 이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문화전당역, 이라는 역명을 가리키는 버스정류장. 문화전당이라.

제목 : 5.18민주항쟁을 상징하는 기념조형.

제목을 까먹은 조형물 하나를 마지막으로, 짧막한 금남로 두어 블록의 산책이 끝났다. 길 양쪽을 온통

돌아보며 확연히 건물에 부속된 조형물을 빼고 길가쪽으로 설치된 작품들만 찍었는데 정말 꽤나 많다.

그리고, 광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은유가 확연한 작품은 정말 꽤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범상치 않게 보이던 시그널. 추억의 7080 충장축제라던가. 광주의 7080은, 흔히 티비에

나오는 추억의 7080쑈라느니 하면서 달달한 통기타 노래들을 공유하는 그런 게 가능할까. 단순히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그 시대의 부조리와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던 사람들이 종종 토로하듯 그 시대에

멋내고 통기타치고 고고장 다니는, 그런 문화만 있던 건 아니었던 게 분명한데 말이다. 마냥 축제인듯

아름답고 멋지게 빛바랜 추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특히 광주에서.


내가 감정과잉의 상태로 광주를 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괜히 하나하나 민감해져서, 광주에서 사는

생활인이라면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이미지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도

외지인이라 해서, 실제로 그 고통을 겪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해서-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다는 훌륭한

핑계에도 불구하고-할 말을 못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금남로에서 80년 광주가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단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http://ytzsche.tistory.com)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 비공개 포스트 : http://ytzsche.tistory.com/1486
* 비공개 일시 : 2011-06-03 18:00
* 조치 내용 : 포스트 비공개 전환
* 비공개 사유 : 청소년 유해 정보


최근 이러한 조치가 내려진 것을 이제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고자 합니다.

해당 포스팅은 대림미술관에서 연령제한없이 입장가능한 '유르겐텔러'사진전의 내용을 재촬영,

인용한 것으로 일부 신체 부위가 노출되고는 있으나 이미 타임지, 보그 등 해외 유수의 잡지에서

공개된 광고용 사진으로 수십년에 걸쳐 인용되어온 바 전혀 유해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예술과 음란물의 경계가 비록 애매하다고는 하나 해당 사진전의 전시주체로부터의 허락을 받고

촬영한 작품들을 포스팅한 것이 음란물로 취급되어 이렇게 비공개로 강제전환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고 여겨지므로, 이에 대한 적절한 입장표명과 후속조치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빠른 답변 부탁드립니다.





지킬앤하이드, 혹자에 따르면 '지구에서 가장 노래를 잘 한다'는 홍광호가 지킬이자 하이드로 나왔던,

원래대로라면 막공이었어야 했던 날이었다. 루시로는 소냐, 엠마로는 조정은이 나왔던 그날의 공연.


스피커를 터뜨려버리려는 듯한 홍지킬, 홍하이드의 굉장한 열창과 소냐랑 조정은의 매혹적이고

마력적인 목소리들이 폭풍처럼 세시간여 휘몰아치고 나니 넋이 나가버렸었다. 이런 게 예술의 힘,

다시 일주일을 살아갈 힘이 생겼다 싶었었던 순간.(뭐 집에 가는 길에 금세 휘발되어버렸지만;; )


공연이 있었던 잠실 샤롯데 씨어터의 독특하고 우아한 화장실 표시가 뮤지컬 공연장 분위기를

팍팍 내 주었다. 보통 공연을 보러 가면 캐스팅 보드를 찍어오는데 어째 난 캐스팅 보드 대신

화장실 사진이나 찍고 있다. 여하간, 거지광호 쵝오!!




@ 샤롯데 씨어터.



@ 외도, 보타니아 해상농원.


 
일시 : 2011년 2월 22일(화) PM 23:22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
              옛)異彩가 꿈꾸는 경험적세계의 유토피아적 가능성

                 (http://ytzsche.tistory.com)

● 자격 : 1) 이 작품을 보고 느껴지는 감흥을 간단히 묘사해주시고
           2) 작품의 제목을 붙여주세요. 

              + 초대장을 받을 이메일주소!^-^*


주최 : yztsche(이채, 異彩)

제공 : 초대장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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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z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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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uesday February 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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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여러 공연이나 연주회들을 다니려고 애쓰긴 했지만 이런 '공연장'은 처음이었다. 한옥의

기와지붕 그림자가 그대로 떨어지는 무대에, 공연자 뒤에 나무대문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슬쩍

열렸다 닫히는 배경,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고아하고 아름다운 전통 한옥

툇마루에 이불을 깔고 다닥다닥 앉아듣는 객석의 운치라니.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라는 경북 안동의 '수곡고택', 정조 시절 권씨 가문이 세운

건물인데 여전히 그 후손들이 살면서 수백년의 숨결을 입히고 있던 곳이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이 곳 '수곡고택'과 인근 '고산서원'이나 '묵계서원' 같은 곳에서 야간 고가공연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11월에 가서도 공연을 볼 수 있던 건 일종의 특별공연, 밤날씨가

조금 쌀쌀했지만 공연을 즐기기엔 무리없던 가을밤.

까맣고 탱탱해보이는 찰옥수수가 알알이 반짝거리는 기둥 옆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가을이라기도 뭐할만큼 기온도 떨어졌고 해도 금방 지는 11월 말의 안동. 아무래도 서울보다

지방으로 내려오면 더욱 날씨도 춥고 바람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공연장으로 변신하며 커다란 앰프도 놓이고 건반도 놓이는 옛 양반집의 앞마당, 언젠가 설치된

수도꼭지마저 나뭇빛 은은한 건물의 풍채와 운치에 묘하게 합류하는 공간에서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기분이란 건 굉장히 묘하다. 자꾸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거다. 계속 내 시선을

붙잡았던 건 그 수돗가 바닥에 꼼꼼하게 박혀있던 돌멩이들, 기왓장과 맷돌과 다듬잇돌이 얼핏

무질서한 듯, 그렇지만 흔들림없이 제자리를 박은 채 박혀있던 모습이 재미있었다.

첫번째 공연, 퇴계 이황과 단양관기 '두향'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주던 아저씨가

덥썩 대금을 집어들었다. 안동국악단에서 '450년 사랑'이란 제목으로 공연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퇴계가 48세 때 단양군수로 봉직하던 9개월 동안 18살짜리 기생 두향이와 나눴던 짧은 사랑,

그리고 20년 동안의 긴 이별동안 서로를 그리며 끝내 다시 한번 보지도 못한 두 사람의 간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게 했다. 차갑고 둔탁한 가을밤에 녹아드는 대금 소리가 그런 로맨틱한

이야기의 뒷맛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 같았다.

두번째로 나선 앳된 판소리 명창, 작고 갸름한 태와는 달리, 인사를 할 때의 발랄한 목소리와는

달리 두텁고 허스키한 목청으로 노래를 하는데에는 늘 놀라고 마는 거다. 이끼가 나무껍질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와지붕 아래 황토벽면을 양쪽 배경으로 하고는,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둥 사이에 선 명창의 노래를 듣다 보니 나 역시 한복을 입고 조선시대 어디메쯤에서 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렁인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꾸 바람이 열어놓고 도망치는 대문의 정체. 특히나 이 명창 아가씨가

노래를 하던 와중에 자꾸 문이 열리고 바람이 들어와 못내 신경이 쓰였었다.


폭신하고 따뜻한 이불이 깔린 대청마루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고구마를 까먹으며

퍼지고 앉아 노래를 듣다가 끝내 따뜻하게 덥혀놓은 내 자리와 고구마를 마다하고 마당 여기저리로

튀어나와 사진을 찍고 말았던 건, 이 아가씨가 넘넘 맘에 들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노래가 넘 좋았기

때문...정도로 해두는 게 좋겠다.

세번째 공연, 들고 나온 악기는 안 그래도 공연 전 저게 가야금이네 거문고네 말이 많던 거였다.

아무래도 줄이 스물몇개씩 잔뜩 있어서 한국악기는 아닌 거 같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중국악기인

고쟁, 연주자 역시 한국에 공부하러 왔다는 중국인이었다.

고쟁은 가야금과 거문고의 원조가 되었다는 중국의 고대 악기이자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저력있는 악기, 여러 개량이 있었고 다양한 형태로 갈려 발전하기도 했다지만, 아무래도

현을 뜯으며 내는 그 소리에 담긴 원초성이랄까, 직접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적나라함은

마력적이다. 더구나 그 연주자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줄 위에서 휘저으며 움직이는 모습까지

함께 보게 되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자체 하나의 예술이라 생각하게 되는 거다.


더구나 이런 기와 지붕의 그늘이 드리워진 공간, 이제는 문을 꼭꼭 닫아걸어 내 맘도 조금

걱정을 덜어낸 공간에서 그다지 넓지않은 양반집 앞마당을 꽉 채워내는 선율이라면야.

이런 분위기가 자아내는 묘하지만 매력적인 느낌이 훌륭한 공연에 더해지니 더욱 기억에

남을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이런 건 공연장이나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쉽지 않을 거다.

마지막을 장식했던 안동의 '소울'이라는 남성4인조 성악단. 유쾌하고 재미있던 그들의 공연 앞에

어느 때보다 많은 카메라 셔터소리를 들었던 거 같다. 솔직히 안동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의 퀄리티란

한 수 접고 너그러이 봐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맘이 처음엔 있었는데, 첫번째 대금에서부터 두번째

판소리, 세번째 고쟁을 지나 마지막 이들 '소울'의 공연을 만끽하면서 그런 맘은 싹 지워버리고

말았다. 굳이 너그러이 봐줄 것도 없이, 이들의 공연은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품위있었다.

물론 그런 후한 평가에는 이 '수곡고택'이 한 몫했음을 부인하긴 어렵겠다. 기와가 낭창낭창하게

리드미컬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담백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황토벽이 공연장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으며, 야트막하고 완만한 지붕 너머로 별빛이 쏟아지는 안동의 맑은 밤하늘까지.

툇마루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불을 깔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목도리를 머리에 둘둘 감고 공연을

즐기던 사람들. 꼭 여미고 있던 이불과 담요들을 쥐고 있던 손이 조금씩 박수치는데 동원되더니

공연 끝날 무렵에는 전부 무장해제, 추위고 뭐고 공연에 몰입해선 한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아침에 다시 둘러본 수곡고택, 옥수수가 여기저기 걸려있었는데 미처 못 봤었다. 밤에 본

나무기둥의 질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붉은 나무기둥. 까만 옥수수의 알이 탱탱하게 박힌 건

여전하고.

수곡고택 뒤로 완만하게 능선을 내리뜨리는 산이 버티고 섰고, 고택 앞에는 '야간고가 음악회'를

열고 있다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자세한 내용은 들고 온 팜플렛에 자세히 적혀 있어 아예 스캔.

2010년 4월-10월에 있었던 야간 고가공연 내용이니 2011년에도 이와 비슷하게 간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아무래도 11월 이후부터 3월까지의 동절기에는 날씨도 춥고 공연자들도 제 솜씨를

내기에는 애로가 없지 않을 테니까.

수곡고택에서 이렇게 맛을 보고 나니까, '묵계서원'이나 '고산서원'에서 즐기는 공연은 어떨까

굉장히 궁금해졌다. 그저 건물 껍데기만 이리저리 구경하고 마는 여행이 아니라, 그 툇마루에

앉아 조선시대 어디메쯤으론가 옮겨간 느낌에 젖어 이런저런 공연을 만끽하는 여행을 내년엔

떠나야겠다. 그야말로 '만끽', 흠뻑 그 정취에 젖을 수 있는 여행이 될 거 같다.





예술가들이 부러워지는 건, 아니 정확하게 말해 예술가들이 하는 일들이 부러워지는 건,

세상에 너무도 흔해빠져서 좀처럼 제대로 한 번 쳐다보거나 살펴 본 적이 없는 것들에

싱싱하고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는 것.


사랑 노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도 문득 귀에 꽂히는 가사를 노래하는 가수라거나, 실내화

넘쳐나는 세상에서 번쩍 눈에 뜨이게 만드는 실내화를 만들어내는 예술가라거나 매한가지.

슈퍼 코멧, 그 위의 빨간 줄과 파란 줄까지, 딱 내 어렸을 적 실내화 주머니에 넣고 빙빙

돌려대던 그 실내화인데 설마 이런 자태로 다시 조우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 실내화를 신고 팔짝 뛰어볼작시면 머리가 하늘까지 닿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 너머

꽃이 만발하고 젖과 꿀이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곳에까지 가 닿을 듯.




@ 안동, 우전 마진식 작업실.
반띠아이 쓰레이는 앙코르 유적지에서 약 38km, 한 시간정도 툭툭을 타고 가야 하는 길 위에서 소 달구지도

만나고, 자전거 레이스를 하겠다고 덤비는 꼬맹이들도 만나고.

밝은 감색 승복을 나부끼는 스님들과 허술한 기념품 가게 옆도 씽 지나쳐버렸다. 역시 여행은 속도가 느릴수록

재미있는데 말이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으니 자꾸 압축적으로 보려는 마음이

동하게 되는 거겠지만. 그래서 사실 가끔 여행 많이 다니는 자칭 '고수'들이 그렇듯 패키지로 나가는 '관광객'을
 
낮추어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빠알간 꽃의 무게를 못 이기고 축 처진 것처럼 보이는 줄기들.

반띠아이 쓰레이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눈에 번쩍 띄었던 꼿꼿한 나무 한 그루. 뭔가 왼쪽의 무성한 이파리의

가지와 앙상한 오른쪽의 가지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드디어 반띠아이 쓰레이다. 근 한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달려 여기까지 꼭 와야 했을까, 살짝 반신반의하는 맘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여긴 입장권 판매소부터 다르다. 깔끔히 정비된 간판에 사원 주변을 둘러싼 듯한 연꽃밭.

입구서부터, 뭔가 조각이 다르다. 선명하고 섬세하고, 빈틈없이 화려하다.

'링가'들이 두줄로 정렬한 채 순례자를 중앙사원으로 인도하는 통로. 바닥의 포석은 더러 유실되고 이리저리

비틀어져 버렸지만 링가의 불끈한 형태는 그대로다. 상상 그대로인 것이, 저 링가란 파괴의 신 시바를 추상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시바신이 사람처럼 상상되기 이전 그의 존재를 나타낸 조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건

고대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남성의 성기 모양을 따서 상상되었다고 하는데 벌써 모양새가 딱 그렇다.

사원 중간중간 부서진 조각들에도 꼼꼼하게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건, 이 사원이 한번 철저하게 스캐닝되어

관리되고 복원되고 있다는 의미와 같지 않을까. 이 조각이 있어야 할 곳, 소용되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단

것일 테니 말이다.

얼마나 깊고 정교하게 조각을 했는데 살짝이라도 손을 대면 으스러져 떨어져나갈 것만 같다. 무슨 부드러운

붉은 색 목재를 조각한 것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건 모두 붉은 사암, 돌이다.

링가가 세워져 있던 장소, 성소가 흐르는 곳이라 하는 곳을 '요니'라 한다. 옆을 지나가던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훔쳐들은 바, 이것 역시 여성의 성기를 본따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링가와 요니가 만나는 이

곳을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었다고. 미루어 추측해 보자면 아마 성기 그 자체가 창조나 풍요, 생산력을 상징할

수 있었겠구나 싶다.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굉장하다. 멀리서 볼 때부터 충분히 그 돌출감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깊고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엇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건 무슨 부드럽고 다루기 쉬운 코르크 재질로 만든 장식 같기도 하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던 당대의 장인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을까,

캄보디아의 전통 사회에서도 '사농공상' 같은 유교적 위계가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원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온통 조각으로 가득해서 밑에서부터 훑어올라가는 시선이 위에까지 가 닿으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을만큼 강렬한 매력을 가진 반띠아이 쓰레이.

그러고 보면 '반띠아이 쌈레', '반띠아이 쓰레이' 등등 '반띠아이'로 시작하는 사원들이 적지 않다. 반띠아이란

크메르어로 '방으로 둘러싸인 사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쓰레이'는 (발음을 잘 해야겠지만)

'여성'을 의미한다고 하니, 반띠아이 쓰레이는 사원의 여성적인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걸맞는 이름을 가진 셈.

앙드레 지드가 소싯적에 여기서 '동방의 모나리자'라 불렸다는 이 여신상을 도굴하려다가 잡혀서 6개월 실형을

살았다고 한다. 그가 여길 도굴하려던 게 1924년,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아름다운 사원이 발견된 게 고작 그

십년 전, 1914년이라는 사실이다. 얼마나 잊혀져 있었던 걸까.

하아...할 말을 잃게 만드는 저 조각들. 천년 전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엣지있게' 생생하다. 슬쩍

손을 뻗쳐 모서리를 만져보니 여전히 빳빳한 게, 막 조각해 내었을 때의 뚜렷한 각도가 그대로인 게다.

약간 사원 옆으로 튕겨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아기자기한 높이에 그다지 크지 않은 스케일의 사원임엔

틀림없지만, 붉은 빛을 가득 품은 정말 아름다운 사원이다. 해가 뜰 때나 질 때 보면 햇살에 붉은 빛이 반사되어

더욱 이쁘다고 하는데, 빈약한 상상으로나마 그 풍경이 대충 감이 간다. 아니, 그때의 감동이 어느만큼일지

대충 감이 간다는 게 맞겠다.

육체적 피로나 따꼼한 발바닥 따위는 잊고 아무리 감격한 채 사원을 헤집고 다녀보려 해도 한가지, 뜨거운 불볕

더위는 어쩔 수 없다.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도 사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반띠아이 쓰레이에도 외부를

빙 둘러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자취가 거의 남지 않을 만큼 사라져버렸지만, 어쨌건 흔히 '유럽의 성'에서

연상하는 해자는 캄보디아에서 연원했다는 것.

3개의 탑을 앞세운 중앙성소는 원숭이 상들이 빙 둘러 수호하고 있고, 외벽에는 빼곡하게 여신상이나 코끼리상

혹은 나가(뱀)상, 덩굴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었다. 굉장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기까지한 느낌이었는데, 아쉽게도

사진상으로는 색감이 좀 날아가버렸다.

근데 대체 지드가 훔치려 했던 '동양의 모나리자'라는 여신상은 어떤 걸까. 하나씩 꼼꼼이 살피며 대체 뭘까,

했는데 약간씩 표정과 몸짓의 뉘앙스가 다르다. 뭐였을까. 지드가 반해 버려서 도굴까지 꾀했던 그 여신상은.

사실 여신상은 중앙성소의 벽면마다 하나씩 안배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수가 조각되어 있는 데다가, 사이즈도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아 맨눈으로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극히 드물게도 이곳은 사원 보호를 위해

일정 거리를 확보한 채 출입제한선을 설정해 두고 있는 거다.)

어느 문화재나 그렇지만,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를 알고 보면 더욱 재밌다. 그렇다고 여기에 직접

가이드북에서 읽은 배경 이야기들을 그대로 옮기는 건 의미없는 짓 같고, 그저 비주얼과 개인적인 이야기만

털어놓아도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동하지 않을까 기대해 볼 뿐. 사실은 여행 가기 전 열심히 관련 책도 읽고

힌두교 신화와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입에서 술술 나올 만큼 익숙하게 공부를 했었는데, 어느새 다

까먹어 버렸다.;

또다시 중앙성소 주변에서 발견한 '요니'. '반띠아이 쓰레이'는 시바신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바신을 형상화한 초기 형태랄 수 있는 남성 성기 모양의 '링가', 그리고 그것과 한짝인 '요니'가

곳곳에서 모셔지고 있는 거라고.

여기에 조금 남아있는 해자의 흔적. 원래는 해자 바깥 쪽으로 외벽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하는데 거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해자너머로 보이는 반띠아이 쓰레이의 중앙사원과 그곳을 향한 통로들이 장난감같이 귀엽기도

하고, 테마파크처럼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너무 거리를 두었는지 사원의 디테일한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초록빛 정글과 대비되는 붉은 사암

재질의 벽돌들이 또다른 미감을 자극한다.

가루다(조류의 왕)도 보이고, 비슈누(코끼리)도 보이고, 말탄 시바도 보이고, 머리만 남고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었다는 악마 칼라도 보이고. 아니 저토록 정교한 덩굴장식은 대체 어떻게 천년을 버티냐고.

연꽃밭 한 가운데 잘 꾸며진 화장실이 있다. 아마 캄보디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연꽃들. 여행객들의 영양분을 먹고 살아 더욱 아름다워졌으리라.

화장실에서 발견한 어이없는 그림 하나. 휴지걸이 옆에 붙은 그림이 뭔가 보고 실소(失笑)해 버렸다. 샤워하지

말랜다. 워낙 더운 나라, 더구나 반띠아이 쓰레이까지 왔을 여행객들이면 얼마나 꼬질꼬질 힘이 들었을까.

이런 어이없는 그림이지만, 오히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기길래 오죽하면 그러겠어 싶기도 하다.

캄보디아에서 봤던 개 중에 가장 활기차 보이던 개. (다른 개들과는 달리) 그래도 불볕더위가 내리쪼이는

시간대에 그늘에 숨어 퍼지지 않고 네 발로 당당히 버티고 서서는 화장실 다녀오는 사람들 냄새를 맡던 녀석은

꽤나 똘똘해 보였다.



 
"니들이 경찰이면 나는 송혜교다".ㅋㅋㅋㅋ 문득 웃음이 터졌었다.

거울까지 달아놓았다. "거울아 거울아".

"이명박씨, 당신이 선택하시라!" 이미 그는 수차례 선택을 선언해왔다. 새삼스레 바랄 것도 없지 않나..는 게 갠적인 생각.

"용산 참사 해결없이 이 땅에 민주주의란 없다."  힘없는 사람들이라고 목숨값도 가벼워야 합니까...

씁쓸했던 손자보 하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언젠가 새벽은 온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민주화 투쟁시절

했던 말이다. 이만큼, 뒤로 돌아갔다.

버려진 매트리스 세개로 그려진 세폭짜리 그림. 입에서 포클레인이 나오는 그대는, 진정한 트랜스포머.

용산참사 후 2개월, "용산GAJA展"에 다녀왔습니다. 라는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만평들을 다시 만났다. 반갑다기보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때만 해도 2개월이나 지났으니 뭔가 해결이 되겠지..했는데 어느덧 6개월이 넘어간다.

"돈놀이로 사람 죽이는 이 미친 개발을 당장 멈춰라." 돈과 사람 사이에 부등호를 세운다면 아가리가 돈 쪽으로 가는 세상.
"삶 자체를 철거하는 재개발 정책."

다섯 분의 영정이 실크스크린같은 형태로 그려졌다. 그리고 그걸 굳이 다시금 지워버리려 한 누군가의 덧칠이 보인다.

이건 전쟁이다. 이 좁고도 별볼일없는 담장을 둘러싼 여론 싸움이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지우며, 다시 그 위에

글씨를 쓴다. 그리고 이 조그마한 공간은 보수언론이 장악한 거대한 체스판의 아주아주아주 미미한 한 톨의 먼지에

불과하다. 그만큼 날 것의, 그만큼 적나라한 이야기가 활자화되는 거지만, 동시에 그건 그만큼 세가 약하고 외롭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MB 퇴진. 의원내각제였다면 벌써 정권이 열번은 넘어졌을 거라고 손호철 교수가 그랬던가.

길바닥 역시 유용한 선전공간..이라기 보다는, 통로가 없다. 이들이 발언하고, 동의를 구하고, 자신들의 목청을 높일

공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온 비명같은 외침은 바닥까지 내려앉아 깊이깊이 새겨진다.

"철거하면 이명봙". 봙.

"공권력 메롱". 굳이 지난 촛불시위 때의 발랄함과 재치있는 움직임들을 들지 않아도, 조금씩 그들은 우스워지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고, 스스로를 가볍게 만들고 있으니, 풍자의 의욕은 날로 높아간다.

"우리는...더 큰 울음소리로 살아날 것이다." 그치만 때는 진보세력조차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게 만드는 시대.

울음소리가 영영 사라질까 두려워 해야 하는 시대.

어느새 용역과 경찰이 한몸이 되어 버렸다. '용역경찰 박살내자'.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란 책의 표지에 나왔던 판화 그림이 붙어있었다.

"비록 패배가 지금 우리의 삶일지라도, 우리는 사랑도 알고 꿈도 안다." ...

돌아보다 보니, 무슨 전시회나 미술관을 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짧막하지만 생생하고 강력한 아포리즘들과 그림과 사진,

판화와 만평, 때로는 설치미술작품같은 것들까지. 그래피티가 별거인가. 어쩌면 애초 그래피티 정신엔 훨씬 어울린다.

이렇게 누군가가 열심히 지우는데 여념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때론 무지막지한 상말이 난무할지라도,

용산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본 포스팅은 백마탄 초인님의 블로그 1주년 축하 이벤트 응모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

1. 미술(예술) 은 [         ]이다!!!
(간략한 설명 첨부)

미술은 뭘까. 잘 모르겠다. 미술작품을 보면 마냥 이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쁘지 않으려고 애를 쓴 듯한 모양새에 흠칫 하며 이건 대체 뭥미..하게 되는 작품도 있다. 풍경이나 사물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몰두한 작품도 있고, 혹은 뭔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가득 품은 듯한 작품도 있다.
 
정말 미술(예술)은 뭘까.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데, 전시회가 있으면 가고 싶고, 미술관도 드문드문 가주고 싶고, 이왕이면 집에나 사무실에도 그럴듯한 그림이 걸려 있으면 좋겠다. 이쁘던 안 이쁘던, 풍경화던 추상화던, 뭔가 내게 끌림이 느껴지는 그런 미술작품 말이다. 까뮈는 "매력이란 명백한 질문을 던지지 않고도 '예'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비록 내게 미술이 어떤 명확한 뭔가를 던져주진 않지만...그래도 난 대개는 항상 미술(예술)에 예, 라고 답하게 된다.

아마 내게 미술(예술)은 결국,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매력적인 그 무엇"인 것 같다.

혹은 미술은 "현실에 대한 애무"인지도 모른다. 미술(예술) 안에서 현실은 좀더 이해하기 쉽고, 좀더 의미있으며, 좀더 질서가 부여된 방식으로 잘 매만져진다. 종종 이해할 수 없고, 무의미해 보이며, 무질서 그 자체인 듯 보이는 현실 세계를 튼튼한 위장으로 소화해내고 주위 사람들의 삶을 조금은 쉽게 살도록 긍정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것도 대부분 파괴적인 충동에 의해 현실 세계를 부서뜨리고 망가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을 사는 나와 내 주변사람,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이 담긴 손길로 어루만져진다는 느낌이다. 혹 다소 거칠고 광기에 찬 무언가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애증을 표현한 것 아닐까. 그러한 애정욕구로부터 표현욕구가 비롯되는 걸 테니 말이다.


2.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와 그림은 누구이며 무엇입니콰? 
  
(국내, 국외 상관 없이 그 작가의 그림중 가장 좋아하는 그림1점을 올려 주세요! 작가명과 작품 제목은 필수!!)

피카소전시회에 다녀왔다. 미술을 모르지만 그래도 가끔은, 작품을 보며 그의 위트와 의도를 느끼고 웃어줄 수 있었다. 회뜨듯이 얼굴을 조각내어 평면에 늘어놓은 그림들은 그의 한 시기..그리고 그의 계속되는 실험의 한 연속선에 불과했다. 그가 곁을 허용했던 7명의 여자들..피카소는 그녀들을 모델로 세워두고는, 그 어슴프레한 윤곽을 몇개의 선으로 버혀내며 마치 선율처럼, 강하고 때로는 약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정말 와닿았던 작품이 하나 있었다. '여자의 얼굴'이란 작품. 그림 앞에서 족히 십분은 서있었던 것 같다. 그가 큐비즘에 빠져있던 시기, 칼날처럼 솟은 어깨'뽕'을 대담하게 그려내고는, 그위에 어두운 색채로 생략된 목에 이어붙은 직육면체의 턱쪼가리..혹은 얼굴의 아랫도리. 그리고 그 첨단쯔음에 위태하게 균형잡고 선 초승달같은 얼굴. 정면을 향한 외눈과 긴장되고 신경질적인 얼굴면 옆에는 또다른 얼굴이 그림자를 먹고 숨어있었다. 칼날같은 초승달이 품고 있던 측면부의 완만함. 피카소라면 분명히 '둔덕'이라고 표현했을 것같은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굴곡을 그리며,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와 보이는 그 초승달의 얼굴정면은 가득찬 FULL MOON과 같은 이면을 갖는다. 정면의 외눈이 날카롭고 섬세하다못해 찌를듯한 예기가 서려있다면, 그림자를 머금은 측면의 눈은..놀란 듯이 커진 눈. 예기치못하게 허를 찔린 듯한, 원치않던 사랑에 빠진 듯한..표정. 그렇게..그 정면을 향해 무표정한 '여자'는, 측면에서는 가늘고도 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측면을 파고 들수록 깊어지는 어둠..불빛조차 가닿기 힘든 내면으로 다가설수록 그녀의 미소는 깊어지고 황홀해진다.

피카소의 인물들이 으레 그렇듯, 그 '여자'가 가진 최외곽의 가면..하늘을 향해 예각을 세운 날카로운 코잔등에서 급격하고 단호한 감정선을 느껴보고, 찔리면 당장 죽을것 같은 코끝에서 사정없이 놀아나는 남정네의 가슴서늘함을 되새겨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약간만 고개를 틀어도 나타나는 방심한 듯한 눈매의 매력과 깊이를 품은 미소에 반하기도 하고. 피카소는, 잘라낸 손톱같이 신경질적이고 속알머리없어 보이는 초승달의 이면에 그렇게 둥실하고 아늑한 둔덕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었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는, 7명의 여자를 사랑했던 그는, 한사람한사람, 처음이자 마지막인듯이 사랑했을 거라고, 질리지도 않고 그녀들의 얼굴을 탐닉하고, 표정과 뉘앙스를 짜내었을 거 같다. 그는, 그녀의 미소가 시작되는 입술의 한쪽 언저리에서 다른쪽 언저리까지 가닿고 탐험하고 싶어서..불빛도 닿기 힘든 그 구석 한켠의 미소를 완전하게 찾아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으리라.

이미 한차례, 쪽당할 각오하고 '노란벨트'라는 작품을 폰카로 기어이 찍어버린 터였다. 피카소의 에로틱함..혹은 그가 추구하던 관능미가 유쾌하게 변주된 작품인거 같아서. 마치 프로이트의 심리병리학적 해석들처럼. 그런데 도무지 '여자의 얼굴'이란 작품은 인터넷에서 구할 수가 없다. 온갖 매체들이 써놓고 긁어놓은 작품사진이나 설명을 보아도..무엇이 원전인지 모르겠지만 거개가 다 똑같은 작품에 대한 똑같은 이야기뿐이다.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이 작품은..아마도 대중이나 전문가의 '인증'이란 걸 받지 못한 모양이다. 아쉽기 짝이 없어서..내가 한번 기억을 떠올려 그려볼까 생각중이다. '여자의 얼굴'이란 거.

덕수궁 돌담길의 그늘에 숨어 걸으며, 피카소는 붓으로 독심술의 결과물들을 그려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는 여자의, 사람의 얼굴이나 마음이 책처럼 편평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거다. '독심술'이란 말의 어폐..를 그는 이해하고 있지 않았을까. ([리뷰] "여자의 얼굴"-피카소.(2006.6.24))



3. 미술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콰? 

2007년에 도예의 기초수업을 들으면서 도예를 연마했던 적이 있다. 전생에 도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던 추억이다.
예술성과 실용성의 격돌
조교 : 이 작품은 이번 '도예의 기초'강의에서 나온 것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무늬에, 유약 처리에, 가마에서 예기치 않은 불의 산화/환원의 세례를 받고 나온 저 청동빛의 신비로운 색감을 보라.

윤작가 : 골판지의 따스함과 안온함을 형상화한 무늬를 넣어 진흙의 차
갑고 맨질맨질한 분위기를 조금 더 따뜻하게 덥히고자 했다. 조교가 우연이라고 착각하는 저 청동빛깔은 사실 작가의 치열한 미의식과 로맨티시즘이 현현한 것으로, 물방울과 같은 접시 안에 로마의 흥망성쇠, 나아가 인류의 흥망성쇠를 담는데 성공한 것이다. 화려한 청동조각상도 흐르는 물방울과 같은 세월에 씻겨 저렇게 녹스는 것 아니던가!

엄마 : 너무 작아, 어따쓸래? (이 때, 쾅! 하는 효과음. 실용성과 예술성의 격돌.)

광기에 사로잡힌 흩뿌림
화장토를 흩뿌리다 보면 가슴속에서 묘한 울렁임이 이는 걸 느끼게
된다. 붓 끝에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물방울들, 그것은 체셔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한다. 사방으로 튀던 흰색 물방울들은 사라지고, 휘영청 구부러진 자기 위에 얼룩점만 남았다. 남으로 창을 낸..화분? 화병? 필통? 뭐가 되었건 여튼 내가 만들어낸 아이.

안에 있던 건 안나오고.
어디에 쓸지에 대한 아무생각없이 완벽한 구형태를 만들겠다고 마냥 동글동글 동글리다가, 문득 그 안에 숨어있는 주전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여 다시 닭볏과 꼬리를 가진 주전자를
만들려다가, 다시 뿔이 듬성듬성난 형상화를 꾀하다가, 결국 나온건 돈데돈데돈데 돈데크만. 내가 봤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왠 괴물 주전자가 나와버렸었다는.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안에 있는 형체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했다던가...그는 틀렸다.ㅡㅡ;;


4. 자신이 좋아하는 컬러와 자신은 무슨색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콰? (간략한 설명 첨부)

대체로 가장 좋아하는 컬러는 검정인 듯 싶다. 시뻘건 빨강색도 무지 좋아라 하지만, 가끔 너무 부담스럽거나 감정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검정색이 세련되면서도 무난한 듯 잘 섞여들고, 또 그러면서도 자체의 존재감은 분명히 각인시킬 수 있는 색깔인 것 같다. 다만 검정 일색으로는 좀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고, 의외로 이쁘지 않은 검정색도 은근히 눈에 많이 띈다. 굳이 나누자면 무광의 죽은 듯한 검정-배트맨이나 배트카의 검정색이 무광 검정이다-은 너무 위세를 빼는 것 같아 맘에 안 들고, 어느정도 광택이 반들대며 유쾌하게 뛰노는 맨들맨들한 유광의 검정이 좋다.

스스로를 색깔로 표현한다면..글쎄, 아마도 검정색 아닐까 싶다. 검정이라면 무광의 죽은 듯한 검정은 말고, 적당히 빛에 반사되며 반짝거리는 검정색이..라고 느껴지면 좋겠지만, 그닥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을 듯. 어차피 이건 내맘대로 쓰는 거니까 뭐.ㅋ


5. 지금! 바로 자신 앞에 흰 도화지와 연필이 있다면, 무엇을 그리겠습니콰? 그 이유는?

그냥 그림판 꺼내서 그려봤다. 머..한가해서 그린 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절대로 아닌데, 정말 오랜만에 그림그려본다. 그냥 요새 기차가 너무 타고 싶어서, 그리고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떠오른 대로 그렸다. 마우스를 움직여 그리기란 쉽지 않지만..그래도 재미있었으니 됐다. 저건 내가 그렸던 태양 중 가장 그럴 듯 하다, 대만족.ㅋㅋㅋ 별모양 별들이 너무 진부하고 유치하긴 하지만...별들 하나하나도 저렇게 그리긴 힘들어서 그냥 기호화된 별을 그려넣었다.


6. 미술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콰?

방금 마우스를 깔짝대며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 영혼이 고양되는 걸 느꼈다..는 건 뻥이고, 글쎄..아무리 미술(예술)이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감동을 던질 수 있다고 해도 고양이 한마리도 아니고 무려 '인류'씩이나 구원할 수 있을까 싶다. 구원이란 게 뭐로부터의 구원인지, 뭐에 대한 구원인지도 모르겠고. 혹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 의미에서 인간 실존의 한계..죽음을 극복할 수 있냐는 거라면 예술이 인간에게 불멸의 무언가를 순간적으로 맛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인간 자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치만 그렇게 언뜻 언뜻, 인간이 먹고자고 똥싸는 존재로부터 뭔가 정신적인 존재로 고양된 느낌이 들도록 해주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도 생각한다.


7.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미술관(화랑 등)에 몇 번이나 가 본 경험이 있습니콰?   (간략한 설명 첨부)

대학 때부터 미술관 다니는데 관심이 있었다. 시립미술관을 자주 가는 편이고,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인사동, 삼청동 쪽의 화랑도 드문드문 들렀다. 외국 여행을 가서도 박물관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미술관은 좋아라 하며 다녔으니, 꽤나 많이 다닌 셈이다. 요새는 좀 못 가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언제든 내키면 불쑥 가게 되는 곳이 또 미술관이다.

누구누구 미술전이나 전시전이 있으면 혼자 찾아가서 우선 한번 설렁설렁한 걸음으로 뺑 둘러보고, 그다음에는 몇개 인상에 남았던 작품들을 찾아 두바퀴째 뺑 돌았다. 그렇게 맘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오래오래 멈춰서서 이리저리 작품을 굽어보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기억에 남는 작품에 대해서는 그나마 오랫동안 기억에 새겨둘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미술관은 여럿이 갈 때보다 혼자 갈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더구나 호오가 워낙 극명하게 갈리게 되는 영역이라 보고 싶은 그림을 맘껏 보기에도 그렇다.



Thanks to 백마탄 초인님~*

& Congratulation!! 블로그 1주년 '베리베리' 축하드려용!!^^




 

하루키의 신작, 'IQ84'가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팔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는 언제쯤 나오려나..일본어를 진즉 배웠어야 했다는 후회가 절실할 정도로, 그의 신작이 궁금하다.

어느 순간 이질적인 반짝거림과 냉소적인 아름다움을 상실했던 그의 소설에 뭔가 변화가 생겼을까.


엄마는 티비에서 유리상자를 볼 때마다 둘 중 한명을 짚으며 널 닮았다 하신다. 칭찬인지는 모르겠고,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티쪼가리 입고 돌아다니지 말고 좀 '어른스럽게' 입고 '어른스럽게'

머리도 하고 다니라는 압박이다. 근데 엊그제던가 살짝 들었던 그들의 신곡은 아주아주아주아주 실망이었다.

둘다 결혼을 해서 그럴 게다. 사랑을 하면, 왠지 예술가로서 결격사유가 되는 느낌이다.


신해철, 이승환, 이상은, 이적, 서영은..유리상자도 이제 그 샘플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예술은 그들의 비극과 허무함과 가슴공허함을 먹고 자라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그들을 무디게 만들고, 나태하게 만들며, 만족하게 만드니까. 배부른 영혼은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승환이형의 아픔은 어떤 점에선 그의 음악에 큰 공헌을 하지 않았나 싶다)


뭐, 비비 꼬인 소리였고, 밖에는 비가 그칠 줄 모르고, 잠은 올 줄 모르고.


(뜬금없이) 몇 가지 요새 반성하는 점.


아닌 척 하면서도 숫자에 휘둘려 조바심을 쳤다는 심증이 있다. 서른이 꽉 차가면서, 왠지 남들 결혼하는 거 보면서

은근히 압박도 받고 부담스러워도 하고 조급증도 나고 했던 것 같다. 바보. 그랬단 걸 알았으니 이제 피할 수 있겠지.

어차피 내가 자웅동체 달팽이도 아니고, 짝지는 만나야 뭘 하던 할 거 아니냐.


또 뭔가 다른 사람의 평에 기대어 과시하고 싶었달까. 좋은 사람 노릇하면서 여기저기에 무리를 해선, 스스로를 좀

힘들게 만들고 짜증나는 코너에 몰아넣은 격이 되고 말았다.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왜 이야기를 못해. 가끔

나는 만인의 마음을 얻겠다는 듯이 행동할 때가 있고, 예외없이 금방 후회하곤 한다.


중심이 흔들렸다. 집에도, 회사에도, 어디에도 중심이 없었다. 몸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어디선가 부유하고 있다.

크게 한번 흔들리고 나니 좀처럼 회복되질 않는다. 당분간 답을 찾아, 마음을 찾아 다녀야 할 듯 하다.

어디서 뭐하고 있냐. 이건 반성할 점은 아니다. 좀더 마음을 풀어주고, 마음을 따라야 해결될 문제인지도 모른다.


요새 새삼스레 X-Japan을 다시 듣고 있다. 그들의 감각적인 가사하며 맥놀이하듯 뛰노는 멜로디라인하며..
 

I awake from my dream

I can't find my way without you.





'정신'이라는 부분에까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시도할 수 있게 만든 게 전적으로 프로이트의 몫이라고

말하는 건 과할지 몰라도, 그로부터 정신분석이라는 '과학'이 출발한 건 사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고찰하고 분석해내는 인간의 능력이 정신 자체에까지 뻗어가 체계를 갖추고, 인과(내지
 
상관)관계를 발굴하고..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이성과 정신세계 자체를 분석 대상에 올렸다는 점에서, 자칫

외부 세계의 존재 그자체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극한의 지적 탐험이랄 수 있겠다.


흔히 정신이라고 뭉뚱그려지고 있는 것이 실은 의식의 얇은 표피 이면에 광대한 무의식의 세계(그의 후기엔 이드,

에고,슈퍼에고로 나누기도 하지만..)로 존재한다는 것 하나, 꿈이나 히스테리, 혹은 예술가의 승화된

작품세계에서 순치되거나 굴절된 형태로 그 무의식이 나타난다는 것 둘, 그리고 의식의 세계, 혹은 문명의 세계가

압박하고 있는 그 무의식 혹은 원시적 세계의 본령인 원초적 성적 본능(리비도)의 충족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는 것 셋.(물론 융 같은 경우는 무의식의 본령이 성적 본능에 있다는 전제에 문제제기를 했다지만)


모든 문학작품에서 '발견'해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보이듯 모든 것을 성욕의 충족 내지 표현으로

환원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없지 않다. 그리고 유아기의 성욕과 그로 인한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를 이후

삶의 방식들에서 확장된 은유로써 유추해 내는 건, 어쩌면 일상의 권력관계의 양태를 뭐랄까, motherous and

fatherous(이런 단어가 있다면)의 두 대표적 형식으로 대별하는데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담
 
그의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정치학으로 평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잡생각.


우야튼 이런 점에서, 무의식이 단지 유아기의 성적 욕망으로 결정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융의 비판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만인은 무의식 앞에서 평등하다." 만약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란 당위적이기만 한 속빈 선언의

내실을 채우고 싶다면, 아마도 "무의식 앞에서'라는 한정적 수식어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모나리자를 그려낸 다빈치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리고 히스테리를 앓거나 개꿈을

꾼 갑남을녀도, 무저갱의 무의식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욕망의 발생/저항/충족(혹은 왜곡된 충족)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획득한다. 어미의 젖을 탐욕스럽게 빠는 어린애의 욕정, 한용운도 어디선가 애타게 불렀던 '우리

누이'에 대한 은밀한 애정, 다빈치가 그려낸 불쾌한 '어머니의 유혹하는 미소'(@ 모나리자).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관점인데다가, 세상을 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해주는 풍요로운 만화경이다.

원하면 사서 끼고, 싫음 말고.

예술, 문학, 정신분석 - 8점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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