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의여신님.

울드와 스쿨드와, 뭐니뭐니해도 베르단디.

내 중학교 시절 그녀의 화려하고도 섬세한 머릿결을 칼로 한올한올 파서 코팅하던 녀석과 친구였는데, 유유상종이었던 것이다. 오나의여신님 극장판 ost의 라이브공연 버전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척 그 간드러지고 꿀떨어지는 목소리에 집중했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오나의여신님의 그림체는 무하의 그것과 비교함직하지 싶다.)

십년 넘도록 연재되어온 스토리를 갈수록 희귀해지는 만화방을 찾아 잘도 따라오면서, 어디선가의 애니 팬시샵이던가 전시회던가에서 사왔던 책받침, 콘티 자료집과 네컷 만화집까지 지금까지 고이 갖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면서도,

또 그와중에 종반에 이르러 케이를 고자로 만들었던 베르단디의 '속임수'라는 설정에 잠시 멘붕했다가, 초반에서 중종반을 지나며 같은 베르단디를 그리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각하게 변신해 버린 작가의 그림체에는 만성적으로 뜨악함을 느끼면서도, (갠적으론 초반의 통통함과 종반의 각진 달덩이 그 사이 어디쯤이 참 좋았는데)

이렇게 오그라들면서도 아름다운 결혼식 장면으로 완결되었다는 건 뭔가 내 안에서도 함께 슥 완결되는 느낌을 던져주는 거다. 뭐, 물론 전적으로 남성 위주의 하렘물이라거나 입맛에 맞춘 캐릭터들의 진열 등등의 부분은 이미 쇽 극복한지 오래지만서도. (코슥)

마치 픽사애니 '업'의 인트로를 좀더 디테일하게 풀어놓은 느낌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이들이 만나 사랑하고 살아가고 또 이별한다. 이렇게 삶이 피고 지는구나, 라는 짧은 탄식 속에 진하게 졸여진 감정을 표현하기엔 단어가 모자란다. 슬프다기엔 아름답고, 아름답다기엔 애잔하다.

아름답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다. 가진 것도 없고 딱히 야심이나 욕망을 품지도 않았다. 절름발이 무능력녀와 생선잡이 괴팍남의 첫만남은 그래서 좀더 잿빛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단지 어디로던 탈출하고 싶었던 여자의 니즈와 가정부가 필요했던 남자의 니즈가 가까스로 합을 이루었던 위태롭고 앙상한 조합.

말 잘 들으라며 따귀를 맞던 여자가 어느 순간 남자가 끄는 손수레 뒤를 절룩거리며 따라다니고, 또 어느 순간 손수레 위에 앉아 같은 풍경을 보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기도 한다. 여자는 이제 남자의 주먹구구식 밥벌이에도 개입해 훨씬 정연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고 있다. 마치 그의 돼지우리같던 오두막이 변신한 것처럼.

그녀의 그림이 없었어도 그와 그녀의 삶은 그만큼 아름다웠을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창문 프레임 바깥 풍경과 같은 것을 그가 보지 못한다 해도, 그래서 '고작' 난 당신-내 아내-만 본다며 서툰 경상도 남자같은 고백으로 평생을 버텨냈다 해도,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속엔 이미 그가 가득했으므로.

#내사랑 #maudie #에단호크 #세종문화회관 #소소마켓 #야외상영

#자전거도둑 #bicyclethief #italy #movie #classic #영화스타그램 #고전

1948년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고전. 이토록 강력한 영화라니. 충격과 반전의 후반부는 말그대로 입을 떡 벌리게 만들었고, 인간과 삶에 대한 김기덕 류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폭발이 아니라 세련되고 담백한 표현만으로도 그정도 성취에 이를 수 있음을 웅변한다.

2차대전후 피폐해진 이탈리아,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가족이 바라보는 건 아버지뿐이지만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직업소개소에서 용케 소개받은 일자리는 자전거가 꼭 있어야 일할 수 있다는데 정작 전당포에 팔아먹은지 오래. 침대보와 베갯잇을 다시 전당포에 잡히고 자전거를 꺼내오는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에게, 아니 그의 가족에게 자전거는 당장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수단인 셈이다. 그런 자전거를 도둑맞고서 그가 느꼈을 암담함과 좌절감은 얼마나 깊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은 러닝타임 내내 계속되는 자전거와 자전거 도둑에 대한 추적이 줄곧 무위로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짜증과 답답함으로 변질될 지경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경찰, 나몰라라 하는 주변인들, 증거내놓으라며 뻗대는 관련자들.

그러게 왜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그러냐. 같이 돌아다니는 꼬맹이 아들은 무슨 잘못인데 왜 화풀이하고 그러냐. 겨우 도둑에게까지 가닿았다 싶은데 무기력하게 빈손으로 되돌아설 때쯤에는 애꿎은 화살이 급기야 피해자인 남자에게 쏠리고 말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전개. 사실 충격이라기엔 사람 심리가 그런 거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날벼락같은 피해를 입었고, 누구도 내게 도움을 주지 않고 관심도 없다면, 어쩌겠는가. 도둑맞은 이가 도둑이 될 수 밖에. 사진이 바로 그 갈등의 순간.

그리고 한번 더 인상적인 반전이 등장한다. 순식간에 잡혀버린 그는 아이 앞에서 따귀를 맞고 다구리를 당하지만, 잡힌 도둑 앞에서, 다시금 안전하게 수중에 들어온 자전거 앞에서, 이번 피해자는 관대함을 과시한다. 경찰서로 끌고 가는 대신 그냥 아이와 함께 보내주겠다며 풀어주는 것.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망연자실한 표정이라니. 사방으로 휘적대는 눈빛은 어딘가 목을 매달 곳, 죽어버릴 곳을 찾는 것만 같다. 칼날 위에 선 듯 위태로운 파국을 맞을 것만 같은 긴장감이 팽팽한 순간, 아이가 내미는 손을 잡고 비척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 아, 이게 사는 건가, 싶은.

#옥자 #넷플릭스 #영화스타그램 #봉준호
 
소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장악한 '보여줄 권리'에 넷플릭스가 참신하게 덤벼들며 꺼내든 무기..란 측면에서, 역시나 잘 만든 오락영화가 답이었으리란 생각. 전연령이 시청이 가능하고, 특정 마켓에 한정된 소재나 장르가 아니며, 소녀와 반려동물의 이야기는 유니버설하게 먹힐 수 있는 원형과도 같은 소재랄까나. '잘 만든 오락영화'란 건 그 본령이 엔터테이닝에 있으되 이것저것 슬쩍 얹어낸 양념과 고명이 과하지도 앙상하지도 않았을 때 가능한 표현인 것 같다.

공장형 대량축산, 유전자조작식품, 먹거리를 둘러싼 신념과 현실 간의 낙차, 글로벌 종자기업들의 패권성, 육식 자체의 도덕성 등등 다채롭게 읽힐 수 있는 힌트들은 무성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그런 부분에 집중하는 건 아닌 거 같단 이야기. 조금 도발적으로는 그저 영악하게 잘 갖다쓴 소란스런 이슈들-논란을 일으켜 대중을, 돈을 끌어모을 소재들-이란 표현이 맞겠고, 조금 호의적으로는 가족영화/오락영화에도 사회적 이슈를 적절히 반영했다고 할 수도.

옥자와 미자, 반려동물과 인간간의 숱한 애정담에 대한 봉준호식의 변주. 내 기준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이건 아마도 속편이 있겠다 싶은 내 촉이 맞을까 하는 부분. 던져진 채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장면과 떡밥들이 적잖은데, 아무래도 봉감독은 속편까지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싶은데..모르겠다.

#자백 #영화 #영화스타그램 #뉴스타파

힘을 가진 그들에게 다른 보통사람들은 그저 본인을 위한 발판으로만 보이는 걸까. 사람들 눈과 귀를 가리는 건 일도 아니고, 랜덤으로 찍어걸린 이들을 윽박지르고 강압하여 자백 아닌 자백을 이끌어내는 스킬은 수십년간 갈고 닦아왔던 거다. 억울함에 울부짖던 자살시도를 하던, 남은 가족들이 울화병으로 뒷목잡고 쓰러지던,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김기춘과 그 후예들이 조작한 사건 피해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확실히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숨막히도록 끝없이 이어지는 '자백'에 근거한 사형/무기징역/수십년의 징역과 수십년늦게 바로잡힌 무죄판결의 기록들은 97년 이후 잠시 멈칫하다가 2013년부터 슬슬 되살아났다. 한참 레벨업되었던 스킬을 새삼 오늘에 되살리려니 아무래도 좀 부족한 점들이 있었던 거려나. 최고권부라는 검찰도 국정원도 일처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게, 뉴스타파의 취재로 저렇게 정면반박당하고 깨갱하고 말다니. 영화를 보다 옆자리 아저씨가 탄식처럼 크게 '저런 개새끼들', 할 수 있는 만큼의 시대가 된 덕분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주로 다루는 2013년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대법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기까지의 3년여 시간을 촘촘히 따라가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당시 이명박정부가 박원순시장을 찍어내려 간첩사건을 만들어냈다는 해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탕봉지에서 사탕 빼먹듯 북한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쥐고 흔들며 내키는대로 사건을 창작해내는 사람들,  그들의 장난질은 한순간의 정략과 정치기획이었겠지만 그 파급력은 개인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가혹하다. 그 조작으로 이득을 보려던 사람의 관심은 식었고 정권도 바뀌었지만,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조작사건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엄연한 사건이 되어 희생자에겐 길고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남기는 거다.

어처구니없지만 웃을 수도 없는 부조리극. 보통사람들에게 그건 일종의 천재지변이었고, 힘센 사람들에게는 그저 게임을 위한 장기말 배치같은 것. #이게나라냐


영화 '노마: 뉴 노르딕 퀴진의 비밀'을 보고 나서 그랬는지, 베를린에서 만난 자연주의 레스토랑의 음식이 엄청 인상적이었다. 독일식이면서도 실험적이고, 식재료를 가능한 날것으로 쓰려고 노력했다는 10코스 요리.


#죽여주는여자 #영화 #윤여정 #이재용

죽여준다는 표현이 갖는 이중성, 말그대로 죽여주겠다는 살벌한 의미일 수도 있고, 또 죽여줄만큼 좋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렇게 두가지의 '죽음'을 (남자에게) 가져오는 사신같은 여자 윤여정의 인생과 현재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마치 포스터 속 그녀의 복잡해 보이면서도 멍해보이는 표정 그대로. 대체로 그건 수동적이고, 왠지 알아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에 맞부딪힌 자의 표정이다.

등장인물들간의 욕망이 향하는 세기나 방향을 바탕으로 등고선지도를 그려보면 어떨까. 윤여정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욕망의 등고선은 두가지 죽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 모두에 있어서 그렇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탑골공원의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같이 좋은 섹스를 맛보고자 하고, 또 그렇게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조차 불러오려 하니까. 그녀는 모든 (남성들의) 욕망이 흘러내려오는 곳, 배꼽같은 저지대일 뿐이다. 그녀의 삶은 늘 그랬으니까, 어쩌면 그 표정은 지쳐 체념한 데서 비롯한지도 모른다.

주변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다소 복잡한 지형을 보인다. 오타쿠같은 장애인 남성, G-spot이라는 야릇한 이름의 트렌스젠더바에서 일하던 트렌스젠더. 이들은 영화의 욕망이 단순히 남녀의 이분법으로만 읽히는 걸 막고 좀더 건전한 욕망의 교류, 등가교환에 가까운 뭔가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섹스관광의 결과로 태어난 코피노(코리안+필리피노) 꼬맹이. 윤여정에게서 뻗어나가는 유일한 욕망 한가닥이 있다면 그것, 그 꼬맹이를 통해 과거 젖도 못뗀 아이를 입양한 기억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한가닥 욕망조차 제대로 채우기 쉽지 않다. 방해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남성들)의 욕망이 사회의 전지적인 권한을 침범하는 시점. 구성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전권을 행사해야 하는 사회는 그 통제를 벗어난 늙은 남성들의 잇단 죽음을 주목한다. 영화속 현실에 충분히 노출된 지금의 현실, 고 백남기농민이나 한상균 민노총위원장의 뉴스가 그 사회가 가진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면, 이제 그 힘으로 윤여정을 단죄해 위신을 유지할 때인 거다.

그렇게 그녀는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 평생을 살았고, 자신의 작은 욕망 하나 채우지 못한 채 삶을 마친다. 대체 그녀의 삶은 뭐였을까, 아니. 이렇게 묻는 건 스크린 너머 내가 그녀의 삶에 여전히 코박을 만큼 가깝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제각기 남들이 알 수 없는 내밀한 속사정과 맥락이 있는 법이고, 그녀의 삶 역시 나름의 만족과 안온함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손을 빌어 세상 밖으로 구출해낸/죽여버린 그들의 감사함에서 작은 의미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가돌아왔다 #넷플릭스 #히틀러 #나의독재자 #영화

2014년, 그가 삶을 마감했던 지하 벙커 바로 그 자리에서 히틀러가 되살아났다. 우선 보여줄 거리는 60여년의 시간차로 인한 어벙한 모습들, 그로 인한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기. 기울어가는 전쟁 한복판에 있던 그가 평화로운 베를린 한복판에서 거리의 공연을 펼치는 이들과 자리다툼하는 모습이라거나, 군복을 몽땅 벗어 세탁소에 맡기는 모습 같은 것들.

가볍게 그의 시대착오적인 연설을 끄집어내어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도 좋겠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그의 말투는 한소절만 들어도 웃음이 터지는 개그물일 뿐이니까. 난민, 청년 실업, 노인 빈곤, 국가 채무, 멍청한 텔레비전...어라. 생방송 프로그램에 개그맨으로 발탁된 그의 연설솜씨는 전혀 우습지 않다. 그의 주제 역시 전혀 터무니없거나 미친소리 같지 않다.

일약 사회문제로 떠오른 티비 히틀러. '히틀러의 지적이 독일 사회문제의 정곡을 찔렀다'거나 '정치가 뭔지를 아는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따위 폭발적인 찬사가 이어진다. 대중은 그를 좋아하고, 언론은 그를 잘 포장하여 대중 앞에 대령하며, 자신이 진짜 히틀러임을 셀수없이 선언한 그에게 재차 이름을 묻는 사람은 사라졌다.

영화는 집요하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마치 1933년 드라마틱한 그의 집권을 전후한 시대상과 현재의 상황을 정면으로 충돌시킬 생각인 거 같다. 그것도 있는 힘껏. 히틀러의 뼈대가 되었던 우생학과 아리안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가 얼마나 농담같이 시작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상식이 되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게 히틀러라는 악인의 등장이라는 돌발변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이름의 누구라도 대행할 수 있었을 인류의 한 국면이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건 꼭 '악의 평범성'으로 풀 이야기만은 아니다. 히틀러를 낳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무르익으면, 그 화약고에 불붙이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독일 걱정에 밤잠을 못이룹니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정작 독일을 불구덩이로 집어넣었었고 또다시 집어넣을지 모르는 역사의 반복, 이건 두번 다 틀림없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 거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이를 가진 어떤 나라에도 불길한 전조를 드리운다.

그렇게 소름돋게 만드는 영화의 마지막, 2014년의 히틀러는 이제 대중의 인기와 언론매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슬슬 본색을 드러낸다. 잡종개를 총으로 쏴죽이고 유태인의 피를 혐오하며 유색인종은 육체노동이나 하라고 농담처럼 밑밥을 깔아둔 터였다. 난민을 위한 집단수용소에 대해선 전문가라며 자신감을 보인 터였다. 더이상 그는 어릿하고 후져보이지 않는다. 눈빛은 명민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카리스마는 백퍼센트 충전됐다. 이제 어디로 독일 국민들을 끌고 갈까.

설경구가 스스로를 김일성으로 착각한다는 설정의 '나의 독재자'를 초반에 살짝 떠올렸으나,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 대충 얼버무리거나 금기시되어버린 히틀러라는 이름이 갖는 미묘한 지점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사람들을 당혹시키려고 작정한 작품이고,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그 목적을 초과달성한다.

#돼지의왕 #연상호 #부산행 #창 #영화스타그램 그림체는 낯설고 동작은 엉성하다. 움푹 패인 눈매와 불쑥 솟은 광대를 강조한 인물들은 만화의 미덕인 '뽀샤시'의 덕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보고 몇번이나 전율이 돋고 말았다.

학원폭력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보다는 어떤 사회적인 관계에서던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에 대한 집요하고 사정없는 묘사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약자라고, 피해자라고 선하거나 순할 것만 같은가. 그네들의 어둠은 오히려 가해자들의 일방적인 것보다 더욱 깊고 독하지 않을까.

표출되지 못한 분노와 폭력성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것들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다면, 그래. 이렇게 어둡고 음침하고 일그러진 세상에 사람들일 수 밖에 없는 거다.

p.s.그러고 보니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었다. 아..이 사람 뭐지.




수백년 묵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정기와 신비롭기까지한 분위기란 건 직접 맞닥뜨려야 실감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나무들이 한두 그루도 아니고 즐비하게 늘어서 아름답고 작은 성당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곳, 아산 공세리 성당이다.







#동주 #영화스타그램 막 핫하게 사람들이 찾는 건 피하고 싶은 묘한 심리가 있다. 덕분에 이제야 보게 된 영화, 동주.

언제고 세상이 순탄했냐만은, 개인의 삶이 본인 맘먹은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리라 믿는 것까진 아니라 해도 이토록 방해받은 삶이라니. 시를 쓰는 것도, 시인이 되려 한 것도, 그 와중에 시가 그저 본능처럼 쓰여지는 것도 모두 부끄러워 해야 하는 동주의 삶.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곤 해도, 역시 부끄러울 수 밖에 없는 거다.

순수냐 참여냐, 이 해묵은 논점에 대한 동주와 몽규의 언쟁은 전형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문학으로의 도피가 아니냐는 지적에 대한, 언제는 이념이나 사상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었더냐는. 그거야말로 시류에의 영합 아니냐는 이야기는 특히나 한국 현대사에 대보자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영화는 어쩌면 동주와 몽규의 로맨스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무리려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함께 하고픈 애절한 마음과 구태여 발동시키곤 했던 어깃장까지.


당진의 아미미술관, 영화나 드라마촬영, 최근에는 웨딩 셀프촬영 장소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는 곳이다. 

조그마한 시골 폐교를 그대로 살려서 지역 예술가들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정말 구석구석 애정어린 손길이 담뿍 묻어있는 것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45일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로 변신시켜버리는 호텔이 있다. 아니 그전에, 짝을 짓고 이를 유지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유배시키는 사회가 있는 거다.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발사이즈는 14인지 15인지 그 중간의 선택지는 도무지 제공하지 않는 호텔은 그렇게 결혼을 강압하는 사회의 반영인 셈이다.


짝을 찾을 의욕도 없어 보이던 사람들은 사회와 호텔로부터 탈출한 자발적 외톨이들을 사냥하는 경험과 동물로 변할 거라는 공포감에 떠밀려 짝을 찾아나선다. 거짓으로 공통점을 꾸미고 우연을 가장해 짝을 구하는 과정은, 마치 섹스중이던 채털리부인이 차가운 정신으로 한발뒤에서 바라보던 우스꽝스런 엉덩이의 움직임과 같다. 열정과 로맨스는 없고 기계적인 몸짓뿐이다.


짝을 찾은 후에 위기가 닥쳐도 걱정없다. 호텔은 그들에게 아이를 배정해주니까. 혹 그/녀의 가족 문제가 그들의 가정으로 쳐들어와도 적당히 화장실로 끌고가 사라질 때까지 발로 밟아버리면 그만이다. 짝을 이룬 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텔의 숙박공간과 서비스는 좋아지니 여하간 남는 장사 아닌가 말이다.


물론, 당신의 사랑을 15점 만점에 몇점이냐고 누가 총을 겨누고 묻는다면. 짝 대신 자신이 죽어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상대의 눈을 잃게 했으니 당신 역시 눈을 내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러한 질문 앞에서는 속절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는 건 넘어가기로 하자. 애초에 그런 질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이런가.


혹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그런 질문 앞에서 쪼그라붙고 위축된다고 사랑이 아닌 건가. 어차피 사랑이란 건 영화속 한장면처럼, 너와 나의 플레이어로 각자 듣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려는 시도같은 것으로 충분할지 모르는 거다. 같은 노래를, 같은 타이밍에 들을 수 있는 행운이란 건 그렇게 흔치 않으니. 게다가 그에 더해 너와 나의 몸짓이 아름다운 몸짓을 그려내는 행운이란 건 더더욱.




p.s. 랍스터가 되고 싶다던 남자, 바다를 좋아하는 데다가 랍스터가 백살도 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랍스터를 택했다고 했다. 나는-영화 제작사에서 준비한 퀴즈에 따르자면-고양이로소이다. (링크는 여기)




 

 

 

무드 인디고.

 

 

꽃처럼 피고 지는 사랑, 사랑처럼 피고 지는 꽃. 꽃이 은유인지 사랑이 은유인지 헷갈릴 만큼 미셸 공드리의 환타지는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사라진다.

 

그게 과연 환타지였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모두 한송이 꽃이라면 세상은 온통 꽃이 지천에 피고지는 거대한 꽃밭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국제시장.

 

 

 

작정하고 울리려드는 신파라는 점에서는 '칠번방의 선물'에 못지 않아 머리가 아팠고, 후손들에게 길이 남을 업적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끌어올리는 점에서는 '명량'과 비슷한 부담스러움이 있던 영화. 희극적이고 과장스런 연기와 앙상하고 작위적인 스토리, 엉성한 분장까지. (게다가 김윤진의 발음과 발성은 너무 어색했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냥 이정도로 충분해 보인다. 현재는 이 영화의 시선과 내러티브에 대한 진영논리에 갇힌 선정적인 비난이 교차하면서-게다가 수첩공주의 애드립이 더해서-괜시리 입소문만 더 타고 있어 보인다.

 

그보다 더 흥미로워보이는 지점은 사실, 신산한 한국사를 관통해 살아낸 그들이 아버지를 줄곧 필요로 하고 혹은 그걸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비전이나 전략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면서 거의 신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작동했다고 믿어지는) 아버지의 리더십을 초혼해내는 '명량'보다 한발 더 분명...히 나간 이 영화는, 한국의 보통사람들이 살았던 그 시절과 그때의 아버지들을 그저 무비판적으로 감싸안고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상징할 수 있는 뒷배경/자산/경험 등이 없던 시기 가정을, 사회를, 역사를 끌고 간 게 그들이었다는 이유로.

 

사실 이와 비슷한 작품들,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 왔다며 아버지들을 상찬하고 새삼 위무하던 작품들은 이미 IMF 때 있었다. 당대의 비전이나 미래가 흔들릴 때 원기회복을 위해 쉽게 돌아갈 곳은 여태 쌓아온 과거, 그리고 그 일꾼들이니까. '아버지'란 삼류소설이나 유사한 아류 작품들이 그런 건데, 경제위기 직전의 한세대만을 주목했던 그때보다 지금은 좀더 멀리 길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아마 앞으로의 비전이나 전망이 불투명하고 불안감이 확산되는 시기가 다시 올 거라는 예후 혹은 이미 도래했다는 징후는 아닐까.

 

 

+ 또다른 문제는, 이 '아버지 만세'의 퇴행적 스토리가 불가결하게 견지하는 여러 단순하고 유치한 사고방식과 관점들일 수 있다. 미군은 그저 착한 해방군이고, 베트콩은 사악한 전사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도 그렇지만, 심지어 젊은애들은 어른들의 공헌을 전혀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거짓된 세대갈등을 빚도록 피해의식을 양산하는.

 

 

 

 

 

작년말에 갔던 LA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언제 다시 또 오겠냐 했지만 이렇게 일년이 되기 전 다시 한번 오게 되다니.

 

무려 90여불에 달하는 일일권 티켓과 같은 값에 파는 'Buy a day, Get 2014' 티켓-그니까 일년 무제한 이용권을 사두길

 

잘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하니 더욱 색다르기도 하고.

 

신용카드랑 비슷한 사이즈의 티켓. 현재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대표하는 탈거리가 트랜스포머라더니 역시 티켓도

 

트랜스포머를 전면에 내세웠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내부에는 슈렉이라거나 트랜스포머라거나, 그린치라거나 온갖 영화속 인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가장 신기했던 건 역시 디테일이 살아있는 트랜스포머의 등장 로봇들.

스튜디오 내부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공간이 나뉘는 거 같다. 스튜디오 세트장 투어공간, 온갖 탈거리들, 그리고

 

이런 식의 잘 꾸며진 환상적인 거리들. 사진은 1938년대를 재현한 미국 거리에 꾸며진 크리스마스 장식들.

 

탈거리, 볼거리 중에서 손꼽히는 것 중 하나는 워터월드쇼. 실제 동명의 영화 세트장을 그대로 활용해서 지어졌다는

 

공간에서 배우들이 고난이도의 스턴트 액션과 전투신을 재현한다.

 

 

총알 대신 물대포를 쏜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렇게 펑펑 폭음이 들리고 화염이 하늘로 치솟는 장면 등은 꽤 실감난다.

 

게다가 객석과 공연장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걸 생각하면 화염이 훅 치솟을 때의 열감과 열풍은 깜짝 놀라게 되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커튼콜, 대략 20분 정도 진행된 공연은 하루에 네다섯 차례 반복되는 것 같은데,

 

기타 다른 볼거리나 탈거리들의 시간표를 입장시에 받아보게 되니 스케줄을 잘 짜는 게 관건인 듯.

 

 

그리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세트장 투어. 아무래도 가장 대기시간도 긴 것 중에 하나인 것 같은데,

 

전기기차를 타고 실내외 세트장을 돌아보며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식이다. 언어는 영어/스페인어/중국어만 지원.

 

여긴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영화 작품 중에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의 거리 장면을 찍었던 세트장이라고 한다.

 

뉴욕의 상징 노란색 택시가 딱 버티고 선 앞에 까페는 여러 작품에 등장했던 까페라고 했던가.

 

 그리고 이렇게 그간의 작품에 등장했던 차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도 지난다.

 

꼭 슈퍼카에 준하는 차들만이 아니라, 'Back to the future' 시리즈에 나왔던 차들이라거나 모형차들 역시.

 

이곳은 특수효과를 시연해 보여주는 곳. 맑은 대낮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정도야 스프링쿨러에 익숙하다 쳐도,

 

이렇게 순식간에 하천이 범람하고 홍수가 벌어지는 모습까지 보여줄 줄은 몰랐다.

 

거대한 선박이 항해중인 모습을 촬영할 때 이렇게 조그마한 모형을 두고 촬영하기도 한다고.

 

 

전설의 명작, '조스'의 유명한 장면을 재현하는 호수를 지나기도 했다. 상어 지느러미가 수면위로 나타나고

 

수영중이던 사람이 끌려들어가고는 이내 시뻘겋게 물드는 해수면.

 

 그리고 킹콩의 한 장면을 3D로 관람할 수 있는 곳도 있었고, 이렇게 비행기 추락사고 현장을 재현한 세트장도.

 

 실제로 비행기를 한대 구매해서 사고난 것처럼 실감나게 때려부쉈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이 세트장을 활용해서 찍었던 항공기 사고 장면들이 알게 모르게 여러 영화에 쓰였다고.

 

 

그렇게 한 나절, 일년여 만에 다시 찾은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온통 크리스마스였다. '심슨가족'이니 '미이라'니

 

'트랜스포머' 혹은 '쥬라기공원'이니 하는 다른 탈거리들도 조금씩 내용이 바뀌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내용을 바꾸어야 사람들을 계속 찾도록 이끌 수 있을 테니, 다음에 또 와도 실망하진 않겠다.

 

 

 

님아 그강을 건너지 마오.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일찍 죽어버려 다행일 거라던 누군가의 독설은,

 

차라리 사랑이 시든 자리에 피어나곤 하는 방만하고 권태로운 관성에 대한 자괴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삼개월이면 사랑은 끝난다느니 결혼하면 의리로 산다느니 하는, 온통 사랑이야기뿐인 시대에 외려 득세하는

 

사랑에 대한 허무주의.

 

 

그리고 여기 이들이 있다.

 

죽음으로야 비로소 잡은 손 놓게 되는 그런 사랑을 하는 이들.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한다는 그런 사랑,

 

말과 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님을. 그래서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은 십대보다 풋풋하고 이십대보다 온전하며

 

삼십대보다 원숙해보인다. 온갖 곡절이 있는 삶이었겠지만 더욱 단단하고 깊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겪어냈기에 가능했을 거다.

 

 

그야말로 가능하다, 라고 말해주는 영화.

 

사랑은, 로맨스는, 계속 될 수 있다고 아름다운 그들의 삶을 들어 웅변해주는 것만 같던.

 

 

 

이를테면 육체를 (잃어)버린 시대의 사랑에 대한 영화랄까. 영화 속의 풍경은 현실같으면서도 묘하게 비틀려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OS를 개인비서삼아 말로써 기능을 조작하고 명령을 내리고, OS와의 연애가 쿨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인공지능을 가진 OS는 한꺼번에 팔천명의 사람과 대화하고 그 중 육백명의 사람에게 사랑을 말한다. 섹스는 스마트폰 너머 누군가와의 스마트한 폰섹으로 대체되거나 인공지능을 가진 OS에 이끌린 자위로 대체되는 형편이다. 거리에 나서보아도 사람들은 전부 OS와 이야기하느라 허공에 대고 침튀겨 말하거나 손짓을 해대며 지나쳐 갈 뿐이다. 서툴고 상처받은 사람과 사람이 기껏 만나봐야 잠시 셈을 따지곤 도망칠 뿐이고.

가히 묵시록적인 풍경이지만, 지금의 모습과 멀지 않아 보인다. 스마트폰...이라는 창구로 연결된 OS와 인간들의 링크는 이미 탯줄만큼이나 단단해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거리에서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다. 육체를 빌어 이어졌던 관계는 이제 육체로 인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되기 위해 분해되는 중이다. 이미 카톡 너머, 페북 너머 당신들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육체는 불필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육체적 애정행위로서의 섹스 역시 (남자의 표현을 빌자면) 신혼시절에나 열심히 할 뿐인, 누구와 아무래도 좋은 욕망의 배설행위 정도로 격하되어버렸다. 앞으로는 구글글래스니 뭐니로 제공되는 새로운 자극만 충분하다면 굳이 육체를 통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로맨스를 표방하는 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OS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메타포 그 자체일 수 있어서일 거다. 사람과 사랑에 서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소유의 문제로 쉬이 치환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고 사랑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며 키워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사랑과 그로 인한 혼란의 감정을 처음 맛보고, 사랑하는 이의 피부와 육체를 감촉하며, 실수와 실망 속에서도 상대와 스스로를 함께 한걸음 성숙시켜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이끄는 상대. 그런 상대라면 그게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OS가 되었건 피와 땀이 흐르는 '미도리'가 되었건 사람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거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는 정말, 외모에 휘둘리지 않고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단 걸 깨닫게 해줬다.
++감독의 전작 '존말코비치되기'에서 보였던 기괴하고도 발랄하던 아이디어와 풍성한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했던 복잡한 이야기능력은 더욱 심오해진 것 같다.

 

 

 

 

남도의 끝,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한시간 못 미처 바다를 달려나가야 도착하는 호젓한 섬 청산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된

 

섬에서 느긋하게 흐르는 시간대를 담아내려면 왠지 필름카메라가 땡기는 거다. 77년생 소련제 카메라 Zorki 4K.

 

 섬을 종으로 횡으로 이어주는 청산도 슬로길을 설렁설렁 내딛는 걸음 따라 서편제의 풍경이 지나가고 누런 황소의 울음이 맺힌다.

 

 

 섬까지 물자를 실어나르기 쉽지 않아서였을까, 야트막한 단층 가옥을 짓고는 창문은 음료수병꽂이로 대신했다.

 

 

 양귀비가 시뻘겋게 피어난 붉은 밭, 그너머로 다랭이논들처럼 켜켜이 지붕을 잇고 덧붙인 마을의 울긋불긋한 슬레이트 지붕.

 

 구불구불 끊길 듯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마음도 출렁출렁.

 

 

범의 머리 모양을 닮아 범바위라는 이름이 붙은, 청산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뷰포인트 지점.

 

자성이 강해 나침반이 오작동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스캐너가 좀 문제가 있는지 사진들이 좀더 흐릿하고 어둡게 스캔된 게 틀림없지만, 그래도 뭐 일단은 Zorki와의 조우 이후

 

어떤 풍경들을 담고 있는지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몇 장 골라서 올려두는 셈이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구시가에 인접한 숙소, 우선 조금씩 에둘러 걸으며 이 곳의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했다. 바로 구시가라거나

 

유명하다는 명소로 진격하는 건 서툰 짓이라고 생각해서, 급할 거 없이 골목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적대며 걷는 중.

 

 

그 와중에 특별할 것도 없는 동네 성당이 저렇게도 이쁘구나, 지긋이 눈에 담기도 하고 벤치 아래 촘촘히 박힌 포석들의 가지런함을

 

눈여겨 보기도 하고.

 

 

어느 건물의 옆면과 앞면으로 이어지는 커다랗고 산뜻한 그래피티를 보기도 하고, 파스텔톤의 나즈막한 건물을 힘줄 툭툭 튀어나온

 

뼈마디 굵은 손으로 딛고 서려는 듯한 커다랗고 신경질적인 나무도 한 그루.

 

휘적휘적 걷는 사이에도 조금씩 류블랴나의 구시가, 그리고 중심에 위치한 류블랴나 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씨트로앵)

 

 

날씨가 조금만 더 맑았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류블랴나에선 비도 맞고 눈도 맞고 살짝 우박도 맞았지만 햇빛만 못 맞았다.

 

 

그리고 동네 곳곳에서 목격되던 저 끈을 서로 묶은 채 대롱대롱 매달린 운동화들. 왜 그 영화 '빅피쉬'에 나오듯이

 

이 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전부 신발을 벗어던지고 평생 행복하게 머물고 있다, 머물겠다는 의미는 아닐까.

 

그리고 느닷없는 용의 등장. 청동색 피부를 가진 사나워보이는 용의 뒤로 류블랴나 성이 훨씬 가깝게 보인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성을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나 최종병기일지도 모르겠다.

 

 

용이 지키는 다리는 사실 다리의 끄트머리, 그리고 그 끝의 양쪽 어귀에 모두 용을 한마리씩 앉혀놨으니 총 4마리의 용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셈이다.

 

라고 계산했다면 그건 오산. 다리 중간중간에 용의 새끼인 '해츨링'이랄까, 작지만 엄연히 용의 피가 흐르는 듯한 녀석들이

 

이렇게 매서운 눈초리로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중이다. 류블랴나성을 해치려는 나쁜 사람은 아닌지 살피려는 듯.

 

 

다리 중간에 설치된 표지판. 이 용다리가 1900년에 준공되었다는 듯 한데, 워낙 청동의 부식이 심해 글자를 잘 못 알아보겠더라는.

 

앞모습에서 풍기는 위압감과 사나움도 충분히 실감나지만, 다리에 꼬리를 말고서 기어이 지키겠다는 의지가 묻어나는 강건하고

 

단단한, 금방이라도 비상할 듯한 뒷모습도 못지 않다. 이 곳 류블랴나의 마스코트가 용이라더니, 용이 지키는 도시다운 모습이다.

 

 

 

 

메가박스의 2012 시네마 리플레이. 작년에 개봉한 좋은 영화 10개를 모아 한번씩 더 상영한다는 기획이다.

 

저번주 멜랑콜리아에 이어 봤던 건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그대로

 

영화속 영화의 소재가 되고 영화 자체의 주제가 되었으며, 끝내 감독 알랭 레네와 합일하기에 이른 거 같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못했다. You Haven't Seen Anything Yet, 2012

 


 

오르페우스 신화는 다들 알겠지만. 류트를 연주하는 예술가 오르페우스가 사랑하는 그의 아내를 죽음의 신으로부터

 

구해오려 하데스 앞에서 연주를 하곤 그를 감동시켜 아내를 구출해 오다가, 세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따라오는 그녀를

 

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버리고 영영 아내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

 

 


거기서 취할 수 있는 지점들은 다양하다. 오르페우스와 아내의 지극한 사랑, 금기를 깨버리는 그의 불안... 혹은 불신,

 

죽음의 신까지도 감동시켜 이겨낼 수 있는 예술의 힘(혹은 끝내 아내를 구하는데 실패했으니 최종적인 실패를 말하는지도

 

모른다)...그 하나하나 영화의 주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판에, 그 이야기를 모두 아우르고 게다가 영화적 문제의식마저

 

녹여내는데 성공했달까.

 

 


기억과 상상의 힘으로 시공간을 극복해왔다는 알랭 레네는 익숙한 영화적 문법과 상식을 줄곧 파괴하며 영화속 현실의 틈새에

 

분절된 시간과 공간을 촘촘이 박아넣는다. 아마 그는 영화예술의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던 거 같다. 자신의 영화로

 

지난 시간과 기억을 구원해내고, 그러나 끝내 실패하여 죽음이 도래하는 그런 반영웅담 혹은 비극.

 

 

 

지인의 평이 그랬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비관과 좌절에 대한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울줄이야."


예술이 가진 힘이란 뭘까, 예술 중에서도 영화예술로 가능한 자유로움의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그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영화는 그런 오랜 화두에 대한 구십살 노장의 단단한 비관에 발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항공기 비즈니스 클래스급으로 크고 넓고 뒤로 180도 가까이 넘어가는 좌석의 메리트도 있긴 하다지만,

 

개인적으로는 굳이 영화를 그렇게 누워서 볼 일도 없거니와 몇몇 좌석들은 이미 노후화되어 삐걱거리는 소리가 거슬리던 거다.

 

 

그러고 나면 티켓당 2만원이나 하는 CGV 골드클래스의 메리트는 이거뿐인 듯.

 

차갑게 식은 에그타르트 하나. (그리고 골드클래스 까페의 '예약석')

 

 

 

 

 

 

 

 

 

 

 

 

코엑스 메가박스 가는 길, 리모델링이 한창인 코엑스 곳곳에서 문닫고 사라져버린 샵과 공간들이 많아지는 시기다.

 

늘 무심코 지나쳤던 장식등들이 새삼스럽게 보이고, 마치 이 곳에 놀러온 외국인 관광객인양 카메라를 들게 만든 이유.

 

 구간구간 상점들이 빠져나가고 공사가 시작되고 있는 즈음이라 살짝 황량해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람은 많다.

 

그리고 코엑스 메가박스의 상징과도 같은, 이 텔레비전 탑.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라고 해도 믿을 법한.

 

 

어느샌가부터 메가박스 옆에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생겼다. 도슨트도 상주 중이어서 언제든 들어가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작지만 알차게 작품이 전시된 공간을 돌아볼 수 있는 것.

 

재미지고 발랄한 작품들을 볼 겸, 슬쩍슬쩍 점심시간에 산책 삼아 돌아다니는 곳 중 하나.

 

 

 

 

 

1월 9일 코엑스 메가박스 M2관, '클라우드 아틀라스' 상영이 끝난 후 한 시간 가까이 배두나와의 무비 토크가 이어졌다.

 

우선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그 이전 워쇼스키 남매(前 형제)의 작품-특히 '매트릭스'-에서 풍기던 철학적인 냄새가 많이

 

희석되고 좀더 호쾌하고 재미있는 즐길거리로 집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배우도 줄줄이 나오는.

 

 

물론 기본적인 베이스는 살아 있다. 수백년에 걸쳐 이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변하지 않는 약자에 대한 억압,

 

'상식'이라 당연시되는 편견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세대 갈등과 나아가 복제 인류(혹은 식용 인류)에 대한 차별까지


뻗어나가는 그럴 듯한 상상력이 그렇고, 생을 거듭하며 나타나는 삶의 궤적이나 연속성이랄까, 그런 불교적 뉘앙스도 그렇다.

 

 

그렇지만 그런 풍부한 은유와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몇 개의 인생이 퍼즐처럼 흩어진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겁거나 어렵지 않고, 기본적으로 스펙타클한 장면과 현란한 효과들에 무게를 실은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아바타의 뒤를 잇는다'는 광고 카피라거나,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배두나씨가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인 듯.

 

 

결론. 아바타 때도 사실 규모만 크고 뻑적지근했지 내용은 별 거 없다 생각했었는데, '클라우드 아틀라스'도 그렇다.

 

다만, 그 스펙타클함 때문에 영화관에서 보면 더 재미있을 영화.

 

 

 

p.s. 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2300여년의 서울을 두고, 드문드문 나오는 한글을 두고, 혹은 영화의 여주 배두나를 두고,

 

'한국부심', 애국심을 느끼는 건 정말 뜬금없지 싶다. 그때는 이미 지금과는 국가의 개념도, 민족과 국경의 개념 역시

 

달라졌다는 전제를 깐 미래의 어느 지역일 뿐. "서울이 배경인데 왜 왜색이 느껴지냐" 따위의 불쾌감을 느끼기 전에

 

그저 아주아주 먼 미래에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다룬 픽션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p.s.2. 그나저나, 가져간 Pentax의 77 limited 렌즈로 D열에 앉아서 찍은 사진들인데 역시나, 거리와 조명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이 흔들리고 선예도도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두나는 참 이쁘더라는.

 

그녀는, 아니 그녀의 연기는 '고양이를 부탁해'로부터 '공기인형'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담아두게 된다.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9월의 인디포럼 월례비행 작품은 박준석 감독의 '낯선 물체'.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카메라 무빙, 그리고 내러티브보다는 메타포가 갖는 의미를 전개해나가는데 집중한 작품이었다.

 

전체 비용이 백만원 들었다나, 밥값 오십 포함해서. 물론 배우들의 개런티같은 비용은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을 거다.

 

그야말로 핸드헬드 8미리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영화를 찍는 '시네마 키드'의 날것 같은 모습으로 찍은 영화랄까.

 

 

그렇지만 영화의 참신함이라거나 아이디어, 그런 독립/예술 영화 특유의 강점은 말할 것도 없고 감독이 조탁해낸

 

화면의 아름다움 역시 여느 대작영화나 상업영화-그런 식의 구분이 유의미한지는 차치하고라도-에 뒤지지 않았다.

 

한시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사방에서 야금야금 짚어내는 학교 건물의 구석구석 장면, 그리고 그 공간들을 다시

 

치밀한 프레이밍을 통해 사방에서 조망하여 선과 면과 반복적인 패턴의 스틸샷으로 잡아내는 공력이라니.

 

 

빛이 사라진 눈길의 남자가 있다.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텅빈 듯한 건물 안을 청소하고 있다. 세피아톤의 가라앉은

 

화면, 숨죽인 듯 절제된 카메라 무빙, 그리고 엉성하게 휘두르는 대걸레의 쓱싹이는 소리만 가득한 공간 안으로,

 

문득 '낯선 물체', 커다란 공 하나가 통통 튀며 굴러들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가만히 공을 굽어보다가 가만히

 

두 팔 가득 공을 품에 안고는 건물 안의 통로와 방들을 살핀다..굳이 말하자면 이런 식의 내러티브가 가능하려나.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에는 확연히 갈리는 듯한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야기 중 전반부를 영화 속 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도 읽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의 예술적 자아가 어떤 경로로 성장했는지, 마치

 

개인의 삶과 그 와중의 인간관계를 선과 면과 반복적인 패턴으로 가득한 건물 안에서 응축해보여주는 듯한 압축된 회상신이랄까.

 

그리고 그런 포부와 기대를 배반하는 현재의 열악한 환경과 무딘 재능 따위로 얼마나 답답한 상황인지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

 

 

낯선 물체. 그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에 다가온 하나의 소소한 계기라거나 고민 한줌이라고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문득 세상이 낯설게 보이고 당연하던 것들에 새삼 의문이 제기되는 계기.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처음에 주인공을

 

깨어나게 했던 그 '낯선 물체' 공 하나가, 영화 마지막엔 두개로 늘어나는 것. (감독 말로는 돈만 더 있었으면 화면 가득

 

'낯선 물체'를 채워넣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늘어난 고민, 혹은 의식된 무게감만큼 감독은 성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시간여의 상영 이후 감독이랑 이송희일 평론가, 김곡 감독과 대담하는 시간이 또 그만큼의 시간동안 있었는데

 

그 덕분에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결과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영화의 해석을 하나씩 짚어보고,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 이야기를 더불어 버무리며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 이 포스팅의 목적 중 하나, 홍콩 찜사쪼이 해변을 따라 조성된 '스타의 거리Avenue of Stars'의 홍콩 영화배우들 중

 

한국인들이 알만한 스타들, 유덕화, 임청하, 홍금보, 성룡, 오우삼, 서극, 주윤발, 장국영, 주성치, 장만옥, 장백지, 양가휘,

 

곽부성, 여명 등의 손도장을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고를 덜 수 있도록 하는 것.

 

 

스타의 거리가 시작되는 즈음, 영화 필름을 옷 대신 걸치고 선 여신의 자태가 당당하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 홍콩섬 완짜이와 센트럴의 개성있고 거침없는 고층빌딩의 스카이라인.

 

필름 롤의 형태로 된 금색 조형물이 길가에 세워져 있는가 하면,

 

큐사인을 위한 보드가 이 거리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스타의 거리, Avenue of Stars.

 

바닥에 돈이라도 떨어뜨린 양 다들 바닥만 굽어보고 걸어가는 사람들, 그 틈에서 아예 철퍽 주저앉아 바닥을 짚은 사람도 많다.

 

어느 영화감독의 모습을 형상화한 듯, 메가폰을 쥐고 생생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눈빛에 힘이 실려있다.

 

 

아마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카메라를 쥐고 있는 카메라감독의 손모양이나 표정도 생생한 편이고.

 

그리고 장백지. 그녀의 손은..작고 이쁘기도 하구나.

 

이소룡의 명판은 있지만, 아쉽게도 그의 손도장은 없다. 있을 리가 없나..어디라도 손도장 하나쯤 남아있을 법 한데.

 

성룡. 역시 그는 장난스럽게도 살짝 삐뚜름하게 양손을 짚었나보다.

 

게다가 이렇게 사인을 남겼는데, 마지막에 앙증맞은 하트 그림도 그렇지만 '성룡'이라는 한글도 눈에 들어온다.

 

아침나절이지만 뜨거운 햇살 때문에 사람들이 양산인지 우산인지를 전부 받쳐들고 걷고 있었다.

 

주윤발. 이 아저씨는 왜 손도장을 안 남겼을꼬.

 

유덕화. 꽤나 많은 여성팬들, 특히나 아주머니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쉽게 찾았다.

 

양조위. 그도 역시 양손을 살짝 어긋나게 짚고는 사인을 남겼다.

 

이소룡의 이미지하면 딱 떠오르는 그 포즈. 그대로 멈춰선 이소룡이 홍콩의 해안가를 지키는 중이다.

 

조명기사와 마이크 담당이 위치를 잡고서, 그 가운데쯤엔 의자가 하나 놓여있어서 꼬맹이들이 줄을 섰다.

 

오우삼.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지만, 그의 이름은 헐리우드에서도 명성을 높인지 오래다.

 

곽부성. 다소 후줄근해 보이는 그의 입성은 도무지 왜 그가 인기있는지 알쏭달쏭하게 만들었지만 여하튼.

 

 

 

스테판 초우. Stephen Show. 누구인가 했다. 다름 아닌 주성치. 요조가 좋아하는 주성치, 아쉽게도 손도장이 없다.

 

Jet Li, 영어이름이 좀 만화 캐릭터 같은 게 이연걸의 이미지에도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그는 통배권을 시전하듯 손도장을 찍었을까.

 

그리고 여명. 아마도 내가 왔다갔다 스타의 거리를 왕복하는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기념사진을 찍어간 곳을

 

고르라면 여기가 아닐까. 특히나 아주머니 팬들이 꼭 한번씩은 이렇게 손이라도 맞대어 보고 자리를 뜨셨다.

 

그리고 장국영. 음..여전히 그가 자살한 곳에는 기일에 맞춰 하얀 국화가 소복하게 헌화된다고 한다.

 

그리고 서극. 한때 그의 무협영화를 빠짐없이 챙겨봤었는데.

 

그리고 놓칠 수 없는 배우, 임청하. 아아. 내 어렸을 적 그녀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뷰잉 데크. 밤에 '심포니 오브 라이트'가 시작할 즈음인 8시경이면 발 디딜 틈조차 찾기 쉽지 않지만 지금은.

 

 

성룡과 홍금보의 손도장을 보고 환히 웃으며 기념촬영중인 사람들, 사실 저 손도장이 진짜 본인 거인지는 '신뢰'의 영역이다.

 

 

그리고 바닥에 박힌 채 하루하루 마모되어 가는 셀레브리티들의 손도장은 관심없이

 

그저 가족들과의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려는데 더욱 열심인 사람들. 사실 이 편이 훨씬 남는 게 많지 않을까.

 

(특정 스타의 열광적인 팬이 아니라면 말이다. 팬이라고 해도 온기조차 사그라든 손도장이 뭐...별 건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성화를 진짜 봉송하는데 쓰였던 것일까, 아님 그저 기념 조형물일까.

 

건너편 고층빌딩들을 압도하는 높이와 존재감으로 우뚝 섰다.

 

스타의 거리 끝까지 갔다가 다시 설렁설렁 돌아나오는 길, 시시각각 뜨거워지는 햇살에 익어간다는 느낌이 들 무렵

 

다행히도 스타의 거리 끄트머리에 있는 뷰잉 데크, 그리고 시계탑이 나타났다. 버블버블 게임에서 본 듯한 저 투명하고

 

동그란 유리막 안에 들어간 건 야간에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위한 조명 도구들.

 

 

스타의 거리 초입, '심포니 오브 라이트'의 뷰잉 데크, 시계탑, 그리고 스타 페리 선착장은 그냥 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제 스타 페리를 타고 홍콩섬으로 넘어가보려는 참인데, 글쎄, 홍콩 영화배우들에 굉장히 홀릭되어 있다거나 손도장을 꼭

 

맨눈으로 봐야겠다 하는 사람 아니라면 얼추 위의 사진들로 대리만족이 가능하지 않을까. 일정이 바쁘다면 이렇게 스킵하시길.

 

 

 

뉴욕 브로드웨이의 무수한 뮤지컬 극장 중에서도 오래전부터 맘마미아를 롱런중인 곳 Winter Garden Theater.

 

낮에 미처 열리지 않은 극장의 전면에는 각국의 언어로 맘마미아에 대한 각국의 평들을 적어놓았다. "마술의 밤!"

 

순식간에 그 '마술의 밤'으로 점프. 저녁 8시에 시작하는 맘마미아 공연이 시작하길 기다리는 관객들이다.

 

극장 안, 무대 뒤쪽으로는 음료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천장엔 화려한 샹들리에도 있고.

 

 

관객석 2층, 3층에는 두어명이 앉아서 볼 수 있는 발코니석도 있었다. 저런 데는 더 비싸려나.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강렬하게 빛을 뿜어내는 조명기구들.

 

어느새 공연을 마치고 무대인사하러 나온 배우들이다.

 

 

세 '아버지 후보'들의 무대 인사. 맘마미아는 영화로도 이미 보았었고, 국내에서도 뮤지컬로 보았었지만 여전히 재미있다.

 

 

 

뮤지컬의 주인공은 사실 이들이 아니다. 도나의 딸 소피 역을 맡았던 그녀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노래도 잘 부르긴 했지만,

 

사실 맘마미아의 주된 갈등을 이끌어내는 데까지는 그녀의 역할이다. (엄마의 젊었던 시절 분방했던 사생활을 새삼 끌어내는)

 

 

도나와 친구들의 무대인사. 딸이 새삼 끄집어낸 과거의 기억을 직면하고 해결하는 건 당당한 그녀들이다.

 

영어로 된 대사를 전부 따라잡긴 힘들었지만, 아바의 노래들 만으로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던 장면들이었다.

 

그렇게 무대인사를 마치고 전부 다 나와서는 두어곡을 더 부르며 팔짝팔짝 뛰노는 배우들. 아쉽게도 매우 불친절한 직원들이

 

카메라를 내려놓으라며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무대인사만 겨우 담을 수 있었다.

 

세시간 가까운 뮤지컬을 마치고, 무대의 막이 내려가고 난 후에도 아쉬움에 자리를 쉬이 못 뜨는 사람들.

 

뭔가 멍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정신을 못 차리겠는 기분을 표현하자면, '마술의 밤'이란 표현이 딱히 나쁘지 않겠다.

 

극장에 입장할 때 나눠주던 팜플렛 '플레이빌'. 내용은 어느 뮤지컬 극장에서나 같았고, 다만 표지만 각 극장에서 공연중인

 

뮤지컬의 타이틀 배경사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타임스퀘어의 티켓오피스에서 싸게 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는 팜플렛 하나도 첨부~*

 

 

 

 

 

 

11년만에 다시 찾은 뉴욕, 아르바이트를 했던 맨하탄의 스무디바나 그라운드제로도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뭐니뭐니해도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브로드웨이에서의 뮤지컬들. 짧은 일정이니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뮤지컬에 두고

 

두 개 보는 데 성공했는데, 그 중에서 처음 본 건 바로 '스파이더맨'!

 

 

만화적인 상상력을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구현하는데 성공한 게 영화 '스파이더맨'이라면, 그걸 또다시 뮤지컬로

 

어떻게 풀어냈을까, 하는 게 가장 큰 궁금증이었다. 최근에 개봉해서 인기몰이중이라는 핫한 뮤지컬, 스파이더맨을

 

세시간 가까이 관람하고 나니 완전 대만족. 커튼콜이 나올 때의 저 '스파이더맨 키스' 장면은 놓치지 마시길.

 

타임스퀘어 근방에 브로드웨이를 따라 수십개 극장이 늘어서서 '맘마미아'니 '위키드'니 '라이온킹'같은 공인된 대작들을

 

공연중이지만 새롭게 오른 작품이 롱런하는 건 흔치 않은 거 같다. 아마도 스파이더맨은 그 바늘구멍만한 가능성을 뚫을 듯.

 

 

극장 안으로. 오후 2시와 7시 공연이 있는 것 같던데, 워낙 휴가철이니 더욱더 그득하게 차는 것 같다.

 

 

기념품들을 팔고 있는 부스 앞을 지나고. 스파이더맨의 디자인이 이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는데, 저 빨갛고 파란

 

유니폼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 그렇지만 이제 뮤지컬까지 보러 와서 그런지 새삼스레 이뻐보이기도 하고.

 

 

앉았던 곳은 맨 앞의 오케스트라석. 1층과 2층까지 좌석이 가득차 있었지만 에어콘이 워낙 빠방한, 전기 절약 따위

 

안중에도 없는 미국의 뉴욕의 맨하탄인지라 실내는 쾌적.

 

 

 

20분의 인터미션을 포함 세시간의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 중인 배우들. 관객에 인사를 마치고 자기들끼리 하이파이브 중.

 

 

그리고 고블린 역의 Robert Cuccioli. 사랑을 잃고 더욱 삐뚤어져 버린 그의 심성만큼 삐죽삐죽 까칠거리는 외모.

 

유머도 넘치고 카리스마있던 그의 연기에 반한 누군가의 꽃다발이 바쳐지는 장면.

 

그리고 히로인, Rebecca Faulkenberry. 작은 체구지만 노래는 참 잘 하더라는.

 

 

스파이더맨키스를 마치고 몽롱해진 주연, Reeve Carney의 표정이 참.

 

 

이내 기운을 되찾고 관객들의 환호성에 답하는 스파이더맨. 무대가 좁다며 관객석 위의 천장 사방팔방을 날아다니느라,

 

또 거미줄을 쉼없이 쏴대느라 정말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무대인사 마지막 쯤에 이루어진 스파이더맨과 고블린의 화기애애한 순간. 둘이 손을 꽉 잡고 화해하는 중이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나눠주는 플레이빌, 일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전문매거진..이라고 해야 하려나.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인 작품들에 대한 기사와 정보들이 실려 있다.

 

 

 

팜플렛에 써있듯 티켓을 사는 방법은 세 가지, 그에 더해서 타임스퀘어에 티켓부스에서 조금 할인을 받고 살 수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티켓오피스의 내용을 참조~*

 

 

 

 

 

 

이미 두 편의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 네 장의 초대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영화 네 편을 보거나, 데이트를 두 번 하거나.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 영화다운 '시작은 키스(원제 : delicacy)'를 보고 난 참이었고, 조금 지치고 살짝

 

실망했던 참이었다. 홍상수식의 갈림길을 빙자한 순환도로라거나 미묘하고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원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영화를 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초대권 한 장은 남기고 일요일날 아트하우스 모모의 마지막 영화였던

 

'블루 발렌타인'을 보기로 했다.

 

 

맞다. 어떤 노래는 듣게 되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거다. 어떤 사람은 만나게 되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런 노래가,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현자같은 소리만 주워섬기거나, 이런저런 연애의 온갖 일반론들을

 

꿰차고 있는 척 해도,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는 그런 상대. 흔히 천생연분이라거나 소울메이트라거나 운명이라거나,

 

혹은 영원과 불멸을 다짐하는 그런 상대를 만나고 나면, 방법이 없다. 그런 인연 앞에 서고 나면, 마치 여태 어느 인류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처음으로 밟는 기분으로 사랑에 빠지고 마니까.

 

 

뜨거운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평소에 '사람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 따위의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과의 이런 순간들이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도 모두 옛 허물과 과오와

 

부끄러움을 태워버리고 불사조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겠다 믿었을지 모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그녀를 잡아주는 그의 손길, 한순간의 불편한 침묵도 끼어들지 못하는 남김없는 대화. 베르나르가 소설 '개미'에서 말했던

 

더듬이를 포갠 개미들의 완전소통이란 건 이런 느낌이겠구나, 어렴풋이 알 거 같은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거리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택시와 버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브루클린 다리 교각 위에 올라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모습들이 아름다운 건 더없이 오만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뿌듯하고, 거침없이 자랑스러운 그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이 뭔지 맛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그와 그녀는 감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맞다. 어른들의 경험이라봐야 누추하고 실패한 인생을 반추했을 뿐,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황홀한 건지, 한 순간 남김없이 충만함으로 가득했는지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다. 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런데. 무엇이 모자랐던 걸까. 도가니를 달구는 화력이 점점 떨어진 건,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땔감이 부족해서였을까.

 

착하고 유머러스하고 순수하던 그는 그대로 가정적인 남편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 안아주었던 그였고,

 

그의 마음은 좀처럼 변함없이 그녀를 향한다. 아마 그는 변했어야 했다. 그녀가 조금은 덜 세상에 찌들도록 자신이 조금

 

더 세상에 찌들거나, 그녀가 조금은 덜 독해지도록 자신이 조금 더 독해졌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때의 천진한 마음과 순진함을 지켜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뿐일까. 그가 조금 변했다고, 아니면 그녀가 조금 변하지 않았다고 해결될 문제였을까. 과연 이런 당황스러운

 

피로감과 거리감은, 그와 그녀의 잘못인 걸까. 무엇이 모자라 그토록 펄펄 끓던 도가니에 냉기만 감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나 그녀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와 그녀는 만났고, 사랑했으며, 기꺼이 서로를 책임지고 동반하려

 

함께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와 그녀는 서로가 상대로부터 뻗쳐나온 냉기와 거부감으로 손끝 하나 마음대로

 

옴쭉달싹 못하게 된 상황임을 깨닫고, 숨을 헐떡거리며 아귀처럼 싸우기 시작하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졌듯,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균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싸우지 않으려 애써

 

웃음을 짓고 노력해보아도 어쩔 수 없다. 굳이 찾아냈던 사랑의 이유들, 유머러스하고 천진난만하고 밝고 착하고. 그런

 

장점들은 그대로 단점이 되어 증오의 이유가 된다. 대체 왜. 대체 왜일까. 어쩌면. 사랑 따위 처음부터 환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유효기간 만년짜리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작해야 반평생 버티면 성공했다 쳐주는 게 사랑일까. 애초에

 

그와 그녀가 부지불식간에 감지했던 온갖 위험 신호와 불길한 징조를 외면하고 조롱했던 벌을 받는 걸까.

 

 

우리는, 나와 당신은,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평행선이었던 걸까. 어쩌다 한번 사다리 타듯 옆길을 타고 완벽하게

 

합쳐졌지만 어느 순간인가 다시금 옆길로 새버리고, 처음부터 그랬듯 각자의 길을 따라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평행선을

 

긋고 있을 뿐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그는, 앞으로 절대 다시 겹치지 않을 순간들을 저주해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찰나의 순간이나마 완벽하게 겹쳤던 잠깐의 순간을 기적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는 걸까. 분명한 건, 그런 겹침의 순간은

 

결혼 따위 인습적 구속이나 사회적 책임감 따위, 사랑이 아닌 '부부애'나 '정' 따위로 지속되진 않는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어른해진 눈길을 붙잡는 건 크레딧 가득 번쩍거리며 터져오르는 불꽃놀이 불꽃들.

 

그 불꽃들은 그와 그녀가 사랑하던, 그에게 그녀가 전부였고 그녀에게 역시 그가 전부였던 그런 시절의 풍경들을

 

하나씩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다시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있었다. 허름하고 난잡한 해수욕장의 싸구려 불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낀 적은 없었다. 왠지 그저 슬프고 안쓰럽단 느낌, 부질없단 느낌 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저 정도 불꽃을

 

피워낸 불꽃놀이 폭죽이라면, 내가 그런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웠길 바랄 뿐.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 '맛있는 인생'에선 차를 타고 슬쩍, 그야말로 옆동네 가는 기분으로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옮겼다는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도 강릉에서 주문진 건너가는 건 그런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던 거다. 경포 앞바다를 떠나 길을 잠시 달리다간

 

어느새 다시 나타난 바다는 좀더 본격적으로 항구도 두어개 끼고, 아저씨들은 그물을 정리하고.

 

 

 

방파제의 두 팔 안에 조심스레 안겨있는 주문진항에서 둥실둥실 여유로운 배들, 그리고 그물을 정리하는 분들.

 

그리고 항구 코앞에 바다를 바라보며 주차된 자전거와 자동차, 수면에 기댄 채 출렁이는 배까지. 탈거리 셋이 모였다.

 

주문진에서 출발하는 크루즈호의 선착장. 크루즈라곤 하지만 글쎄, 그다지 호화스러워 보이진 않던데.

 

 

주문진항 근처의 수산시장을 돌다가 만난,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가오리 떼들.

 

골목골목 누비다가 만난 '성인나이트'의 숨겨진 간판, 그렇지만 입구도 숨겨진 거 같구 지금도 하는지는 미지수.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단단한 선언조의 문구가 눈을 확 잡았던, 마치 무슨 공산당 테제같은 느낌의 광고.

 

 

골목을 한꺼풀만 열고 들어가도 재미난 풍경들이 숨어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얼기설기 얹은 허름한 집 앞 자전거.

 

 

수산시장 골목마다 김을 펄펄 피워올리며 새빨갛게 익어가던 가뜩이나 빨간 대게들, 저 녀석들은 물구나무를 서있는 건가.

 

 

주문진항의 상징물 오징어는 왠지 울트라맨에서 자주 나오던 크라켄이던가, 거대괴물이랑 비슷하게 생긴 듯.

 

수산시장 입구에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아무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그들처럼 회는 먹고 가야겠다는 다짐만

 

갈수록 단단해지던 차에, 생선을 따로 사고 회를 따로 떠서 어디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먹기로 결심.

 

광어랑, 청어였던가 제 이름으로 못 불리고 '잡어'로 통칭되는 생선들 몇 마리, 그리고 개불이랑 멍게까지.

 

그리고 주문진 앞바다. 드문드문 바닷가 깊숙하게 쳐들어간 바위 덩어리들은 이렇게 자그마한 금강산 코스프레중.

 

일만이천봉우리가 하나하나 살아나선 뾰족뾰족 하늘을 이었다.

 

 

바위들 위로 기어올라가 제법 뜨끈하게 달아오른 햇살 바라기 좀 해주고, 덥다 싶으면 아이스크림 하나 베어물고.

 

 

멀찍이 보이는 등대 아래춤에선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고. 움직이는 건 바람결에

 

살랑살랑 잔물결을 이어나가는 주문진 앞 바다뿐.

 

조금은 흐린 날씨탓에 하늘과 바다가 분간하지 어려워서 문득 망연해지는 시선을 붙잡아 주는 건, 문득문득

 

생각났다는 듯 날개를 펼치고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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