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즐기는 해외여행 3, 외국 분위기 물씬한 음식(윤성의)-


* 2016. 8. 18(목)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 (타협하지 않은 아프리카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오늘 함께 돌아보고 싶은 한국의 이국적인 여행지는 서울 이태원 일대입니다. 서울 중에서도 특히 이태원은 외국인 관광객이나 한국에 체류중인 외국인이 많은 곳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한국의 유일한 이슬람 모스크도 있고, 아랍이나 인도, 남미의 독특한 음식들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라 이미 많은 분들이 이 곳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나름대로 즐기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소개하고 싶은 건 이러한 이태원을 더욱 이국적으로 맛볼 수 있는 두가지 아이템, 아프리카 음식과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 머물러 보기입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소개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나서는 것부터 왠지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은 설레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면도구와 옷가지까지 구겨넣은 가방을 메고 이태원의 가파른 골목길을 헤매며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짐을 풀면 왠지 배낭여행객들의 성지라는 태국 방콕의 카오산로드에 막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죠. 이야, 이제부터 여행이 시작되는구나, 라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짐을 풀고 찾아간 곳은, 늘 눈여겨보기만 하던 그곳이었습니다. 이태원에 갈 때마다 늘 지나치는 골목, 늘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아프리카 음식점. 아프리카 음식점이라니 대체 어떤 맛의 음식을 파는 걸까, 친절하게도 요리 하나하나 사진과 제목이 적혀 있는 메뉴판같은 커다란 간판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 가늠해 볼 수가 없어서 호기심을 잔뜩 자극하던 곳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아프리카 음식은 대중화되고 세계화된 다른 지역의 음식들에 비해 그 고유하고 독특한 맛을 타협하지 않고 지켜내고 있을 거 같아서 약간의 주저함도 있었구요.

오늘 하루는 여행객이니깐, 기세좋게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안에는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마치 동네 사랑방처럼 둘씩 셋씩 모여앉아 못 알아들을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한국인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쪽 벽면에 조그맣지만 단호하게 액자에 넣어져 걸려있던 사업자등록증이니 그런 서류들에서 보이는 낯익은 한글의 분위기 말고는 온통 낯선 이국의 분위기. 순간 나이지리아쯤 되는 아프리카 어딘가로 휙 순간이동해버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메뉴 중에서 더듬듯이 주문을 하고 나서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비누랑 핸드로션의 용도를 알 수 있었습니다. 주문한 음식들을 손으로 먹고 나서 함께 나온 분홍빛 양동이에 담긴 물에서 손을 씻으라는 의미. 사실 다른 아프리카인 손님들에겐 전부 기본으로 주어졌던 이 양동이 대신 우리 테이블엔 스푼과 포크가 제공됐지만, 괜히 특별대접받고 싶지 않아 손으로 먹겠다고 양동이를 달라 굳이 부탁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생활을 다룬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면 하얀 쌀가루나 나뭇가루 같은 걸 물에 개어서 떡처럼 해서 먹는 이란 음식이 있죠. 생각보다 풀기도 없고 미끈한 느낌, 그야말로 '무미'해서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빵을 손으로 떼어 돌돌 말아서 먹듯이, 알아서 적당량을 떼어 손으로 매만지곤 스프에 찍어 먹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함께 주문했던 볶음밥 역시 향신료나 재료가 꽤나 독특한 느낌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직접 손으로 떡처럼 만들어먹는 재미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더니, 문득 낯선 느낌이 들었습니다. 왠지 아프리카에서 한국으로 훌쩍 돌아와버린 느낌, 약간의 아쉬움이나 섭섭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이태원은 온갖 이국적인 음식점과 술집이 가득한 거리, 하룻밤을 머물기로 맘먹은 여행자에게는 또다른 도전과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평소 벼르고만 있다가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곳들이 있다면, 이렇게 하룻밤 여행자로 머물면서 시도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가끔 들르곤 하는 술집, 연말이 다가오니 가게 밖으로 온통 치렁치렁 꼬마전구들을 늘어뜨렸다.

가게 전체를 작고 따스해보이는 주홍불빛으로 감싼 느낌, 안으로 들어오니 그 불빛들의 기운이

온통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다. 얼음상자 안에 즐비하게 꽂혀있는 세계맥주들이 반짝반짝.

사실 손님들이 잘 찾지 않거나 쉽게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메뉴판에만 존재하는 것도 많다.

이날따라 뭔가 안 마셔보던 게 땡겨서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뺀찌먹고, 그냥 벨기에산 '스텔라 아르토아'랑 미국산 '허니브라운'.

벨기에 맥주는 레페브라운이니 뭐니 무얼 마시던 늘 만족하게 된다. 라거류가 되었건 에일류가

되었건, 기본적으로 전부 맛있는 듯. 스텔라 아르토아 역시, 라거답게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

느껴지면서도 쌉쌀하다기보다는 구수함에 가까운 그 향취가 좋다. 허니브라운은, 이름에서

느껴지듯 꿀이 들어갔는지 달콤한 맛이 강조되었긴 하지만 그렇다고 텁텁하진 않은 정도.

원래 맥주는 병으로 마시는 게 아니라 잔에 따라 마셔야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고 한다.

좋은 맥주는 그래서 맥주잔이 함께 제공되는 법인데, 스텔라 아르토아잔은 손잡이가 특이했다.

둥그렇게 배부른 유리잔 목부분이 슬쩍 깎여나가서는 저런 장식이 들어가서 오톨도톨, 잔을

쥐기에도 미끄럼없이 편한 거 같다.




종로의 피맛골, 왠지 추석 연휴에는 한번씩 가게 되는 곳이다. 오세훈 시장이 디자인 서울 어쩌구하면서 금세라도

다 밀어버릴 듯 하더니 아직도 '피맛골 고갈비집'은 건재하다. 워낙 추억이 촘촘이 서린 곳이라 참 반가운 곳.

몇 년전이더라, 불이 나는 바람에 가게 절반이 날아가고 그때부터 그냥 이렇게 공터로 놀리던 곳, 그 우켠에 선

건물 역시 완전완전 허름해서 무슨 폐가같기도 하고 쓰러지기 직전같기도 하지만 추석에도 쉼없이 맛있는

고갈비와 막거리를 팔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일렀는지라, 가게 안에는 혼자 와서 막걸리를 드시고 계신 머리 희끗한 아저씨 한 분을 빼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모양새도 색깔도, 짝도 제대로 맞지 않는 삐뚤빼뚤 제각기 놓인 의자들.

메뉴판이 있긴 하다. 얼마나 오래전에 붙여놓은 건지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베니어판 벽면과 비슷한 색깔로

누렇게 변해버렸지만, 사실 여기서 다른 건 맛본 적도 없다. 앉으면 그냥 갖다주는 막걸리 한 사발과 고갈비.

메뉴판에도 벽면에도 온통 낙서투성이다. 낙서라기엔 꽤나 그럴듯한 시간과 사건들을 이겨낸 것들.

나왔다. 양은으로 만들어진 양푼에 담긴 막걸리랑 고갈비 한 마리. 여기 막걸리는 뭔지 모르겠는데 탁하면서도

단 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랄까. 살짝 짭조름하면서도 담백한 고갈비랑 같이 먹으면 딱 좋다.

조명은 늘 그렇듯 어두침침하다. 드문드문 박힌 채 테이블 하나만큼의 공간을 겨우 밝히는 전구, 그리고 창밖에서

슬몃슬몃 넘쳐흐른 햇살이 조명의 전부. 아,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푸르스름한 불빛도 있구나.

누군가 창문에 깃발을 붙여두었다. 지난 지방선거때 붙였두었던 깃발인 듯. 창밖으로 보이는 리어카들이 왠지

살풍경하다. 저게 혹시 서울시 표준형 리어카인가, 반듯반듯 주차된 그들 앞에서 현란한 녹색 거죽이 입혀진

리어카 한대가 반갑다.

어떻게 보면 토굴같은 느낌도 들고, 나지막한 천장과 울퉁불퉁 고르지 않은 바닥 높이 때문에 행동거지 하나가

조심스러워지는 게 기분이 색다르다. 올 때마다, 여긴 뭔가 정겨움이 그득그득.

이런 화장실 표지판도 넘 좋다. 촌스런 초록색의 왠지 촌스런 남자 여자의 그림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단호하고

선명했을 화살표 앞뒤꼭지에 누군가 짖궂게 장난쳐둔 모양새들까지, 웃음지을 수 밖에 없는 그림들.

온통 낙서투성이인 벽면, 여기도 뭔가 신품의 냄새를 가득 풍기던 그런 때가 있었을까.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어디서 누구 한명 담배라도 피워올리면 금세 가게 전체에 티가 나는 그런 곳이지만 나름 환기는 잘 되어서 다행,

안 그랬음 무슨 수산시장 같은 냄새가 늘 배겨있었을지도.

이런 낙서들, 추억과 즐거움을 증거하는 흔적들. 이런 게 언젠가 무지하고 둔탁한 포클레인의 무쇠 이빨에

산산이 부서져나가리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싸하다. 그야말로 수십년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 작품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이 벽면을 통째로 어디에든 전시한다고 해도 훌륭할 텐데. 사람들은 자신이 이 공간에서

함께 했던 사람, 나눴던 이야기, 서려있는 추억을 기억하며 자신이 남겼던 낙서 한 줄을 곰곰히 찾아보지 않을까.

무엇보다 좋은 거야 그냥 이 공간이 계속 남아있는 거지만.

기둥이라고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화이트로, 검정펜으로, 누군가의 기록 위에 또 누군가가 기록을 덧씌우고

차곡차곡 쟁여간다. 심지어는 전등 스위치까지. 모든 곳에 공평하게 내려앉는 눈송이처럼, 허름한 가게 안

모든 장소에 아낌없이 내려앉았다.

아니, 눈송이는 천장에까지 채워지진 않는다. 낡고 깨져서 여기저기 덧대인 천장 쪼가리에도 어김없이 새겨지는

누군가의 메시지들.

막걸리 한 동이를 기분좋게 비우고, 고등어를 남김없이 해체하고 나서 돌아나오는 길. 들어설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웬 달마도가 입구 앞에 그려져있었다. 저건 정말, 작정하고 그렸겠구나 싶다. 기록을 남기고 전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한순간의 장난이나 술기운으로 끼적인 것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

이 집 이름이 와사등이었나 보다. 몰랐다. 벌써 수십번은 왔을 텐데, 오는 사람들끼리는 그저 '피맛골 고갈비집',

이렇게만 말하면 통했으니까. 가게 주인 할머니한테 물었다. 여긴 안 없어지죠? 할머니가 그랬다. 여긴 절대

안 없어져요. 계속 있을 거야.


부디 계속 남아있었으면. 맛있는 고갈비도, 누군가의 메시지들도. 그래서 내 추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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