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파도소리에 귀기울이다 까무룩 잠이 들고는, 어느새 아침. 주인아저씨는 아예 집을 맡긴 채로 옆섬에 마실가시고.


나머지 섬을 한바퀴 돌아보며 설렁설렁 산책하고 뭍으로 나가기로 했다.




언제부터 저기에 방치되었던 건지, 온통 초록 풀떼기에 점령당해버린 봉고차.



조그마한 승봉분교도 구경해보고. 낮은 이층짜리 건물의 따끈한 현관문 앞에는 초등학교 때 했던 실험, 흙과 물에


각기 온도계를 꼽아놓고 어느쪽에 더 온도가 높이 올라가나를 체크하는 (아마도) 실험이 진행중.


간소한 골대와 손바닥만한 운동장. 그렇지만 학교 밖이 온통 놀이터일 테니 어쩌면 운동장은 승봉도 섬만하겠구나.



아직 여물지 않은 논을 보면 꼭 어느 농촌같은데, 이렇게 보트 몇대가 정박된 풍경 덕분에 섬이라는 게 새삼 실감.


조금씩 정비중인 수변공원이랑 산책로도 있고.


하릴없이 바닷바람에 시달리다 온통 빛바래고 허물어져버린 어느 횟집의 메뉴판도 있고.


뭍이나 다른 섬들과 이어지는 유일한 창구인 항구의 한적한 풍경.



작다 못해 귀엽기까지 한 성당, 앞마당의 잔디가 푸릇푸릇 싱싱하다.


슬쩍 안을 구경해보니 더 귀엽다. 위엄서린 제단도, 딱딱하게 열맞춘 신자석도 없다. 개다리소반 하나가 정겨운 곳.



바닷가에는 어느 회사에선가 야유회를 온 듯 청백으로 팀을 나누어 2인3각도 하고 짝맞추기 게임도 하고.


그리고 섬 한가운데 예기치 않은 연꽃밭. 동네 꼬맹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노니는 나와바리인 듯 하다.




슬쩍 꾸물거리는 날씨, 뭍으로 떠날 시간이다.



항구 옆에서 여유롭게 망중한을 즐기고 계신 강태공.



근처 섬이나 모래사장으로 놀러다녀온 배 한 척이 긴 포말을 그리며 지나간다.




뭔가 이 세상의 끝이라는 느낌을 주는 막다른 마침표. 막막하게 저기 주저앉아 있는 쇳덩이처럼 시뻘겋게 부식되고


상해갈 수 밖에 없는 걸까, 하는 조바심을 달래는 건 조만간 배 한척이 들이닥쳐 마침표를 쉼표로 바꿔주리라는 기대.


이렇게. 



이제 뭍으로 다시 가는 참, 승봉도에서 이쁜 쉼표 하나 잘 찍고 돌아가는 셈이다.






섬에 대한 로망이 늘 있었다. 제주도처럼 너무 커서 육지에 사는 것과 별반 느낌이 다름없는 거 말고-제주도가 


섬이라면 왠지 호주도 섬이고 유라시아 대륙도 섬이라고 해도 별로 억지스럽지 않은 것 같달까-섬 끝에 서면 섬의 


반대편 끝이 보이는 그런 작은 섬에 머물고 싶단 생각. 울릉도가 그랬고 그보다 더 작게는 가파도가 그랬으며


승봉도 역시 그런 섬이었던 셈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자월도, 이작도를 거쳐 승봉도까지 닿는 뱃길은 대충 한시간. 새로 제작한 게 틀림없어 보이는


구명조끼 입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을 관람하고 잠시 바다구경을 하고 나면 금세 닿는 거리지만, 바다를 사이에 둔


덕분에 분위기며 풍경이 확 다르다. 


피서철을 지난 때문이겠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 여행자들, 그저 곳곳에 점점이 박힌 듯한 현지 주민분들.


숙소는 되는대로 도착해서 구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왔던 터라 무작정 선착장에서부터 바다를 따라 걸었다. 


내키는 풍광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를 잡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멋진 바닷가를 앞에 품은 곳에


맘씨 좋은 아저씨가 살고 계신 민박집이 있었다.


(라면에 소주를 함께 기울이며 이런저런 좋은 말씀 해주신 아저씨, 감사합니다~*)



내가 도착한 날 아침에 들였다던 따끈한 강아지. 어미품에서 떨어진 충격이 커서인지 엄청나게 낑낑거리던


녀석의 이름은 개똥이.



그리고 나비.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던 순둥이 개냥이의 이름치곤 다소 새초롬하다지만,


눈빛의 요염함이 뒤지지 않으니 인정.



민박집 앞마당의 낡고 닳은 파라솔, 저 그늘에 의지해서 책도 읽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참 좋았던 곳.


그리고 설렁설렁 돌아봐도 세네시간이면 한바퀴를 돌아본다는 승봉도 산책에 나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인 화장실.


남자화장실은 도약하는 돌고래, 여자화장실은 해바라기(?) 그림을 붙여둔 게 뭔가 의미심장하다.



확실히 서해바다는 갯벌이다. 물이 쓸려나간 전장에 남은 흔적과 잔해를 헤집고 다니는 자잘한 생명체들.


그 와중에는 제법 우아하게 뒤뚱거리며 이런 자국을 남기는 녀석들도 있고.




갯벌길을 따라 한바퀴 돌기에는 중간중간 바닷물로 끊긴 구간도 있고 제법 난코스여서 다시 섬으로 상륙. 



승봉도 삼림욕장 안내도. 피톤치드를 듬뿍담뿍 흡수하실 수 있으시단다.



무성한 녹음, 그리고 잘 닦였지만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찻길.




김인지 해초인지 뭔가 양식을 위한 구조물이 설치된 해변가를 따라 섬의 끄트머리, 나무가 많이 나서 목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섬으로 설렁설렁.



나무데크로 길도 잘 갖춰져 있고, 걷는 와중에 쉼없이 우측으로 지나는 거대한 고래같은 화물선들 보는 재미도 쏠쏠.




목섬 역시 썰물 때는 이렇게 육지랑 이어진 채, 밀물 때나 조금 바닷물로 가로막혀서 섬다운 모양새가 되는 곳이다.


조그마한 섬이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길을 벗어나 아무렇게나 섬의 반대편으로 접어든 참인데..숲이 우거지고


풀떼기가 무성하게 자란 곳에는 역시 함부로 발딛는 게 아니다. 미아되서 해경에 신고할 뻔.


이름붙여진 돌들에서 그 이름에 걸맞는 형상을 찾아내기란 또다른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이다. 차라리 그냥 내멋대로


딱 보여진 형상으로 새롭게 이름을 붙여주는 게 좀더 유쾌한 수수께끼일 거 같지만. 대체 촛대바위가 무슨 돌에 


붙은 이름인지 몰라 사방을 헤매다가 포기, 내눈엔 그저 황량하고 거친 돌들 뿐인데. 


굳이 이름붙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가 솔직한 심정이겠다.






시화방조제 위를 열심히 달려 대부도, 포도밭이 지천인 대부도를 주파해서 도착한 선재도 입구. 대부도와 선재도를


잇는 선재대교의 끄트머리가 선재도에 닿자마자 바로 왼켠으로 보면 그야말로 자그마한 언덕 하나가 모래사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침 물때가 맞아 흔히들 '모세의 기적'이니 '바닷길'이니 하는 그게 열려서 선재도와 목섬을 이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고작 이삼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다가 저걸 섬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작아서 그렇게 


떠들썩하게 알려진 포인트는 아닌 것 같지만, 바닷길을 건너서 이리저리 다니다보니 여긴 나름 굉장한 매력이 있다.


도톰하게 일어선 저 '신비의 바닷길' 이외에도 내키는 대로 목섬 너머 발길 닿는대로 걷다보면 어느새 이렇게 


멀리까지 나가게 되는 거다. 서해가 워낙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니까 물이 훅 빠지는 거 같은데, 물때만 신경써서


자칫 바다에 고립되는 불상사만 조심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렇게 한참 바다 쪽으로 나아가서 보이는 풍경은, 뭐랄까, 바다 사막이라고 해야 하나. 물기를 머금어


촉촉하면서도 굉장히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 그와중에 단단하고 찰진 갯벌을 밟는 기분은 상쾌했다.




대충 한두시간 가까이 갯벌을 정처없이 걸었던 것 같은데, 불과 여섯시간 전에만 해도 물이 꽉 차 올랐을 바닷속


땅바닥을 걷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강추. 그리고 보다 안전하게 목섬 안 쪽으로 들어오면 이렇게 경운기를 개조한


갯벌 전용 트럭으로 체험학습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갯벌에서 빨강 '다라이'를 끌고 다니시며 게니 조개를 채취하는 어민들도 보이고.



목섬을 한바퀴 빙글 도는데는, 이렇게 길이 불편하고 뾰족뾰족한 바위가 많다고는 해도 이십분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목섬에 조그맣게 세워진 비석. 


두세시간 동안 목섬과 그너머의 서해바다 갯벌을 산책하다가 슬슬 돌아서는 길, 마침 채취를 다 마치셨는지


어민 한분이랑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선재도로.








마음이 답답하던 어느 날, 서해의 섬들을 돌아보기로 하고 무작정 나섰던 날. 


대부도로 가서 선재도니 승봉도니 돌아볼 생각이었다. 마침 백령도 아랫쪽 섬들에 가닿는 뱃삯을 50% 할인해준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급할 것은 없었으니 설렁설렁 달리다가 잠시 차를 멈춘 곳은 인천에서 대부도로 넘어가는


시화방조제. 덕분에 대부도로부터 선재도, 영흥도까지는 연육교로 이어진지 오래다..


그리고 대부도와 오이도를 잇는 시화방조제 중간 어디메쯤 낚시배들이 들고 나는 선착장,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이 


아이스박스를 깔고 앉은 왼켠에는 파란 옷을 입은 남성이 쪼그려 앉아 그들의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가봐야 총알받이밖에 더 되나요?" 연평도 사건이 딱 터졌을 때, 사무실에서 나이 좀 있으신

분들이 내게 그랬다. 너도 총 들고 나가서 싸워야 하는 거 아냐?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분위기는 조금 싸해졌고, 요새 젊은이들 애국심이 어쩌고 후렴구가 들려오길래 조금은 수습해야

되겠다 싶어서 '요새 전쟁을 어디 총으로 하나요' 운운, 얼버무리고 치웠지만, 그리고 들려온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사망 소식에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조차, 국가가 지켜야

할 국민의 생명을 저토록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다니. 전쟁나면 도망가야겠구나.


서해5도에 군사령부를 창설한다느니, 세계최고 수준의 무기를 갖다 놓는다느니, 국방비 예산이

6% 가까이 증액된다느니, 심지어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중국 코앞까지 들이쳐 군사훈련을 한다느니

연일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무서운 소식 뿐이다. 전쟁 무기의 쓸모라곤 오로지 전쟁을 벌이는데

있으니 거기 들어가는 돈은 아무 생산유발효과도 없을 뿐더러 언제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 위기만 고조시키는 거다. 심지어 중국땅에까지 이미 수송된 북한의 수해

구호물자를 다시 한국으로 회수해 오겠다는 통일부의 발언까지.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있고 나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국가가 존립할 수 있고 외적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유지되고 난

이후에야 평화공존이든 뭐든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조갑제가 이명박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라고 까지 이야기한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보/보수를 떠나서 현 정부는 대북 정책과 국방 정책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아마추어스럽단 거다.


문제는, 지금 마구 쏟아내듯 국방비를 증액하고 접경지역에 군사적 대결구도를 강화하는 걸로

과연 요새 드러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군대의 허약함과 무질서함이 해결될까
하는 점이다.

우리의 군사력이나 국방비 예산, 무기 수입 비중 따위들의 수치가 보여주듯 우리 나라는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절대적 견지에서는 군사 대국에 가깝다. 이미 돈과 무기와, 한달에 몇 만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싼 '총알받이'까지 충분히 보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가 부족한 건, 내게 총이 쥐어졌을 때 '이쪽'의 대가리들이 아니라 '저쪽 인민'들을

살해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싶다. 근본적으로 '전쟁'에 나가는 쫄따구들은 상대 쫄다구의 몸에

총구멍을 내고 목숨을 빼앗으러 가는 것, 그런 살해행위의 비도덕성과 야만성과 죄악을 국가의 이름으로

사해 줄 수 있는지, 기꺼이 살해에 동참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야겠지만, 전쟁이 일단 벌어지고

내 손에 총이 쥐어졌을 때만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게 이쪽 대가리나 저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는

쫄다구 '인민'들 사이에서 꼭 저쪽을 쏴죽여야 할 필요나 정당성이 있는가.


비단 병역 기피의 문제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쫄따구로

전쟁에 임하는 내 위치에서, 나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 이토록 박하게 대하며 함부로 내팽개치는 '이쪽

대가리'들의 책임 방기에 대해 나 역시도 파업을 선언하겠다는 거다. 전쟁을 불사하고 내 목숨이라도

내걸겠다는 의지가 생길만한 국가가 아니다. 사실 저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나 이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나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굳이 그들의 장단에 발맞추어 내가 손에 피를 묻히고 목숨을 그들

손에 내맡기지는 않겠다는 거다. 그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며 맏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던 어쩌던,

나는 이 나라의 모든 전쟁에 반대하며 총알받이를 거부한다는 거다.


대체 지금의 한반도 위기를 점점 고조시키는 자들은 무엇을 판돈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건가.

혹시 그 판돈은 대가리 이외 자들의 목숨과 재산은 아닌가. 전쟁 위기 앞에서 분명하게 말하지만,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여느 때나 비슷했지만 특히나 이명박의 국가는 이미 누차에 걸쳐

필요하면 힘없고 돈없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임을 선포했으니, 이 나라가 내

목숨과 재산과 일상을 지켜줄 거라고 믿기는 힘들다. 제각기 자신의 목숨 보전은 알아서 해야 할 일.


북한에 두세배의 복수를 해야 한다느니, 왜 (성능에 열배에 달한다는 포탄을) 80발 밖에 쏘지

않았냐느니, 전면전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느니, 그들에게도 자식과 부모가 죽은 슬픔을 안겨야

한다느니 온갖 되먹지 않은 소리들이 사방에서 번져나온다. 그렇지만 난 아무래도 당신들의 권력놀음을

위해, 북조선의 세습 기도와 남한의 '반공신도'들의 놀이판 위로 '애국심'에 홀려 들려올려가 무익하고

무의미한 개죽음 당하기를 거부한다. 전쟁나면 도망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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