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각국의 유명 건축물들의 미니어처를 모아두었다는 제주 미니미니랜드, 삼십분의 일이라거나 십오분의 일

사이즈로 줄여놓았을 뿐 실물과 똑같다는 그 건축물들이 모인 곳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 다녀온 곳들, 보았던 곳들 앞에서 각자 인증샷을 찍으면 괜찮겠다 싶다. 간 데가 몇군데

안된다 하더라도 뭐, 어쨌든 세계 곳곳에 산재한 명소들이 한 곳에 모여있단 건 큰 메리트니깐.

건축물들 미니어쳐 앞에 섰을 때, 걸리버가 소인국에 떨어졌을 때의 느낌에 최대한 가까울수록 성공적인

거 아닐까. 소인들이 꼬물거리며 지어올리고 그 안에서 사는 건물들의 디테일이나 리얼리티란 건 그야말로

최고의 수준일 테고, 그들 소인들보다 크고 무딘 손으로 조그마한 건축물을 지어올리려면 말이다.

타이완의 중정기념당, 한 사람을 위한 공간, 중정기념당에서 장개석을 생각하다.

중국 자금성,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 내가 카메라랑 그다지 친하지 않던 시절 다녀왔던. 비가 내리는 궂은

어두컴컴한 날씨였지만 황금빛 기와지붕과 붉은 담벼락은 여전히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 캄보디아#31. 채색의 흔적을 발견하다, 앙코르 왓(1/3)

캄보디아#32. 박스 안의 박스, 무한선물상자를 열어보는 즐거움, 앙코르왓2

캄보디아#33. 앙코르왓의 전경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던 연못, 앙코르왓3

캄보디아의 앙코르톰. 사실 앙코르왓은 씨엠립의 여러 옛 사원 중 하나의 이름일 뿐.

캄보디아#4. '크메르의 미소' 바이욘(앙코르 톰)

이집트의 스핑크스. 이집트#7. 카이로 달동네를 거쳐 피라밋으로.

이집트#8. 쿠푸왕 대피라밋 안의 석관에 누워보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플랫아이언빌딩이 있었는데, 여기도 2001년..까마득한 과거에 다녀왔는지라.

뭐 자유의 여신상이나 플랫아이언에서 찍은 건 아니지만 어느날의 월스트리트.  풍요로운 땅 뉴욕의 공립도서관.


태국의 왕궁, 왕궁(Grand Palace)에서 만난 수호상, 랍스타 퍼레이드.

공원이 꽤나 넓었다. 무려 120여점의 건축물을 오밀조밀 세워둔 세계 7대 미니어처 파크라니 이정도 크기는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조경까지 생각하고 지역이니 나름의 테마에 따라 보기좋게 진열하려면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거 같다. 어느 순간 비가 쏴아 쏟아붓기 시작해서 부랴부랴 비를 피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우의를 사입고 구경을 재개했다.


인도의 타지마할, 인도#5. 우윳빛깔 풍만한 타지마할의 자체발광, 하악하악.

미국의 워싱턴 국회의사당. 여기도 2001년에 3개월동안 체류하며 불법으로 알바하며 모은 돈으로 갔던 곳.

쿠웨이트의 쿠웨이트타워, [쿠웨이트] 24시간의 쿠웨이트 체류.

중국의 만리장성, 미니어처 건축물과 건축물 사이에 뱀처럼 몸을 좌우로 뒤채며 늘어져있었다. 

역시 내가 블로그를 하기 전, 카메라랑 친하기 전에 다녀왔던 곳. 


미국의 백악관. 워싱턴을 샅샅이 훑었던 그 때, 마일스톤 앞에서 잔뜩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던 곳.

그리고 역시 미국의 링컨 기념관. 이번에 정말 재미없던 트랜스포머3에서 저 거대한 의자에 앉은 링컨을

밀어내고 나쁜 로봇이 편하게 앉았었다.

여긴 다녀오진 않았지만, 이 곳에서 가장 크고 이쁜 미니어처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어서 한 장.

이탈리아의 트레비분수였다던가.

이것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초록빛깔 잔디와 잘 어울리는 게 왠지 스위스 쯤에 있는 뭔가가 아닐까.

안 가본 나라가 너무 많은 거다. 이곳에 모인 것들은 전세계 곳곳의 50개국을 대표하는 한두점들일 뿐인데도

이 중에서도 안 가보고 모르는 것들이 이리도 많다니. 미니어처 말고 진품을 직접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그리고 한국의 불국사. 여기야 뭐,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많이들 갔었지만, 막상 혼자던 친구랑이던

한번 다시 가면 새삼스러운 구석이 참 많던 곳이다. 불국사 말고도 경주라는 도시가 그랬다.

청와대. 시화연풍, 청와대 들어가기.

남대문, 지금 열심히 복원공사중일 텐데 이전보다 더욱 오리지널에 가깝고 단단하게 복원되면 좋겠다.

건축물들만 밋밋하게 열맞춰 늘어선 게 아니라, 나름의 야트막한 언덕이나 구릉이 있었고 또 이런 나무들도

있었으며 연못도 있고 다리도 있고 그랬다. 이끼가 파랗게 낀 보슬보슬한 촉감의 나무에 덩굴 하나가 체인처럼

기둥을 휘감은 채 흘러내린 모습이 너무 이뻤다.

하루방을 뭔가 캐릭터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 같은데, 좀 아쉽다. 좀더 간결하고 참신하게 바꿨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좀더 귀여웠어야 했지 싶다.


제주도 똥돼지를 멀뚱하게 바라보는 젊은이 하루방.

아무래도 제주가 좀 습하고 따뜻하고 그래서 그런지 나무들이 조금만 그늘진 곳이다 하면 저토록 빽빽히

이끼가 끼는 거 같다. 온통 연두빛 융단을 휘감은 듯한 느낌의 나무둥치.

세계 위인들의 조각상들도 있었다. 어떻게 선정된 위인들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선수로는 충무공 이순신과

세종대왕. 아마 화폐에 활용된 인물을 기준으로 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보다 놀랍고 기분좋았던 건 바로

맑스가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단 사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맑스의 조각상 뒤에서 주먹 불끈 쥐고 인증샷 찍고는 맑스 조각상을 따로 찍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러시아어가 적혀있는 그의 조각상을 전시하다니,

미니랜드가 급 좋아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만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공간도 있었다. 스머프들이 뛰노는 마을 뒤에서 음흉하게 웃으며

쳐다보고 있는 가가멜과 그의 고양이 아즈라엘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똘똘이 스머프 뒤로 텔레토비도 보인다.

그리고 원피스! 루피와 조로, 샹띠가 멋진 포즈를 잡고 있었는데 애들 보다는 오히려 내 또래의 '어른'들이

더 좋아라하던 포토존이었던 듯. 그나저나 대체 원피스는 언제 완결되려나.

무엇보다 캐릭터들 중의 압권이자 대미는 우리의 뽀통령. 모자빨과 안경빨일 뿐, 조그만한 눈에 앞머리 탈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게 함정이라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던 포토존.

이건 태권V의 입체그림이라고 했다. 정해진 뷰포인트에 두발을 고정하고 그림을 바라보면 바닥에 그려진

그림이 마치 벽처럼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거다. 아마도 지정된 점으로 집중되도록 소실점을 잡고선

원근을 감안한 덕분인 듯 한데, 페인트칠한지 좀 오래라 발색이 선명하진 않아도 제법 일어난 느낌이다.

쥬라기공원에 등장했던 렉터, 티라노사우루스도 있었다. 꽤나 정밀하게 묘사된 피부나 이빨, 발톱의

모양새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박치기하는 애들, 이름이 뭐더라, 그 초식공룡들도 마치 산책로를

점거할 듯한 기세로 산책로 옆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은, 무료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박아두고 있던 매직거울체험관. 미로공원에서 이미

겪었듯 길 찾기에는 영 젬병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 이 기둥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듯 보이는 거울의 방에서

자칫 못 나올 뻔 했다. 두 손을 엉거주춤 벌리고 앞의 공간을 더듬으며 그게 거울인지 아님 열린 공간이지

확인하며 한참을 버벅댄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비만 안 왔으면 좀더 둘러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그래도 제법 꼼꼼하게 다 살펴보았더니 두시간 가까이

흘렀던 거 같다. 나오는 길에 눈길을 잡았던 건 오줌싸는 소녀의 상. 이건 대체 어느 나라에 있는 조각상을

소개한 건지는 전혀 확인하지 못했지만 익살맞은 표정이나 편안해보이는 자세가 매력적이었다.





1. "나를 만든 [ ]권의 책"을 제목에 적어주세요. (권수에 제한은 없습니다.)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7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5. 기타 세칙은 inuit님의 릴레이의 오상을 참조 바람

내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백설공주를 괴롭히던 왕비가 거울 앞에 서는 것과 같은 일이기도 하다.

(이전에 올렸던 독서론 [릴레이] 내게 책은 [자석], 독서는 [정렬]이다. 라는 것도 있었지만 대략 비슷한 의미다.)

지금 내가 답답한 문제들에 대해, 답답하게 옹친 감정들에 대해 한줄기 활로를 뚫어주거나, 최소한 그에 대한

힌트라도 던져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책장을 펼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니?


책아 책아, 대체 난 왜 이렇게 헛헛한 거니? 대체 세상은 왜 이렇게 굴러가는 거니? 세상을 읽기 위한 조금 더 정밀한

프레임, 안경은 어디 있는 거니? 혹은 지금 내 고민에 대한 답은 어디 있는 거니?


그런 질문과 그에 대한 적시성을 띈 답, 그런 궁금증을 품은 나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독서는 마치 DNA의

이중나선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휘영청 꼬여들어간다. 그 궤적을 되짚는 것이 아마 '나'라는 걸 형성하는 코어,

핵심가치에 대한 되새김질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책 자체가 좋고 나쁘다는 평을 떠나, 그저 내가 어떤 생각을

해왔고 거기에 가장 큰 반향을 던졌던 책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때마다 책들이 내게 원하는 답을 줬는지, 아님 최소한 답이라도 했는지는 별개 문제다. 왕비의 거울 역시

계속해서 '백설공주입니다'라 대답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가장 과녁에 들어맞은 책, 혹은 저자를 선정해 봤다.


그리고 하나 더, 나의 독서가 자꾸 '말랑말랑'해지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감성을 건드리고 내면을

성찰하게 만드는 책들도 물론 소중하고 귀한 책이지만, 그런 식으로 보다 깊고 풍부한 '느낌'을 위한 감성을 쌓는 것과

동시에 보다 성숙하고 넓은 '사고-생각'을 위한 이성을 단도리해줄 수 있는 책도 같이 섭취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느낌과 생각, 감성과 이성, 둘 중 어느 한 가지만 과잉되어 발달하는 것도 독서 편식의 폐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해서, 굳이 이번 릴레이의 테마를 "나를 만든 사회과학 서적 5권"으로 잡아 보았다. 글쎄, 좀 애매하긴 하다.

사회과학이라고 통칭하기엔 역사서나 철학서도 들어간 것도 사실이니까. (뉴에이지 류의 사조도 철학이라고 칠 수

있다면) 뭐...그래도 내가 생각하던 큰 줄기를 뚝뚝 꺽어나간 결절점이랄까, 그런 책들을 고등학교때부터 시간순으로

나열했으니만치 '나를 만들었다'는 부담스런 표현을 참아주기로 한다.


사족 하나만 더 달자면, 지금 이 책들 중에는 더이상 내가 소중히 생각지도 않거나, 심지어 코웃음치며 "그땐 그랬지"

란 식으로 넘기고 마는 책들도 있다. 뭘지는..읽어보시면 자연히 알게 될 듯. 그렇게 내가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책들조차 내 생각과 시야를 넓혀주었다고 생각하는만큼 애증의 대상이랄 수도 있겠다.


#1. 한단고기,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성경의 기원은 바빌론이요, 바빌론의 기원은 수밀이(수메르)요, 수밀이는 고조선의 12연방국 중 하나였다. 이스라엘이

선민(선택받은 민족)이라면, 우리는 천민(하늘의 민족)이다."라는 식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비주류 민족사관을

떠받치는 가장 큰 전거인 책이다. 외제품 선호사상이나 한국사람은 맞아야 한다는 식의 자학(식민)사관이 그간 천년에

걸친 사대주의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때문이라 하며, 우리가 그간의 자학사관과 식민사관을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뭐..한단고기 자체에 대한 진위 논란이 있지만, 천문학을 동원해서 몇몇 사실(史實)이 증명되었다고

하니 전부 거짓이랄 건 아닌 거 같다. (여전히 역사 강역을 논하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차원에 제한된 이야기지만...하갸 한중일 고대사 논란은 현재의 정치적 의도와 맞물려 늘 혼란스럽기만 하다.)


"정신없는 역사는 정신없는 국민을 낳는다"라는 단재 신채호의 언명과 함께 잊혀졌던 휘황찬란한 고대사의 영광을

강조하는 순간, 파생되는 부작용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통일해서 핵무장하고 중국 내 간도지방 및 조선인 자치구를

다 돌려받고, 인디언들과의 유대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적 소유권을 주장하여 홍익인간의 교리로 황인종 중심의

'황백대전환' 세상을 이끌어나간다..라는 식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적 논리로 발전한다. 80년대 대유행했다는 '다물

(김태영, 정신세계사)'이라는 소설이 단적인 사례랄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민족', '국가'를 '개인'보다 우위에 놓는 등

'민족주의자' 박정희에 대한 미화와 같은 국가주의적,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1-1.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임지현, 소나무

저자는 오천년을 내려온 단일 혈통의 한민족이라는 '신화'는 한국인들의 가장 큰 이데올로기이자 종교라고 지적한다.

그 신화가 어떻게 남한의 극우 세력과 북한 정권을 위해 이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오늘의 시각으로 '민족사'와

'민족'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아전인수격인 해석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해주었다. 결국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고 포장하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쓰여온 것이 '민족주의'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2. 금강경, 오쇼 라즈니쉬 강의, 태일출판사

"저 세상을 지향하는 정신은 억압적이고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정신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동시에 타인을 파괴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병든 정신이다. (...)
그대는 오직 의식하는 만큼만 존재한다. 더 많이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더 의식적이 되라. 의식은 존재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무의식은 존재를 앗아간다. 술에 취했을 때 그대는 존재를 잃는다.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을 때 그대는 존재를 잃는다. 그런 사실을 관찰해본 적이 없는가? 예민하게 깨어있을 때 그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갖는다. 그대는 더 중심잡히고 깊이 뿌리내린다. 주의깊게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존재의 확고부동함을 느낀다. 그러나 무의식적일 때, 그저 질질 끌려가듯이 살아 가고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존재에 대한 감각은 그만큼 무뎌진다. (...)
그대는 옷을 입을 때 기계적으로 입는다. 그대는 옷입는 방법을 기계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이 기계적으로 옷을 입는다. 그대의 마음은 계속해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달음박질친다. 목욕을 할 때에도 그대는 목욕을 무례하게 대한다. 그대는 거기에 있지도 않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다. 음식을 먹을 때 그대는 음식을 무례하게 대한다. 그대는 거기에 없다. 그대는 다만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모든 일을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붓다는 어떤 일을 할 때 전적으로 거기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사회 문제에 등을 돌린 채 개인적인 관심사들-예컨대 모의고사 전날 솟구치는 욕정과 같은-을 해결하려는 와중에

접하게 된 오쇼의 강의들. 그가 강론한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세속의 번다한 일들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으며, 그건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성숙시키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종교를 넘나들고, 동서양의 철학자들을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현명한 통찰들은 나중에 인도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이끌어내기도 했더랬다.


아무리 사회가 바뀌고 시스템이 좋아지면 뭐해, 사람이 바뀌어야지, 라는 생각이었던 듯 하다. 더구나 당시

'전생여행'이란 책이니, 피라밋 파워니, 차크라니, 기수련이니, 그저 '뉴에이지'로 묶을 수 밖에 없을 관심사들을

꿰뚫는 키워드랄까, 그건 자동인형처럼 살고 싶지 않다, 매순간 깨어서 의식적으로 살고 싶다는 의지..였달까.


#3. 공산당 선언, 맑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렇게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만큼 파괴력을 가진 선언이 있었던가 싶다. 이후 백여년에 걸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혹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움직임을 정식화하여 선포한 맑스의 문건이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 맑스를 접했을 때 느꼈던 가슴 서늘함과 일종의 스릴감, 그리고 지적인 짜릿함은 여전히 생생하다. 여전히 인간

본성이니 내면이니 하는 문제도 관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다시금 사회와 사람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맑스의 이름을 내건 숱한 철학자들, 정치학자들, 사회학자들이 있었고, 이미 그건 '애초의 맑스'(그런 게 있다면)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상당한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중요한 것은 아마도, 맑스가 당대의 현실에서 제일모순을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는 방식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맑스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이상향을 한번도 구체화해서

보여준 적은 없었다. 맑스의 공산당선언에서 시작한 그의 저작 읽기는 자본론, 독일이데올로기를 넘어 알튀세, 그람시..로

계속 뻗어나갔었지만, 남은 건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성찰 및 비판정신 정도랄까.(그정도만 남았어도 다행이겠다..ㅡㅡ;)


#4. 현대 민주주의론, 한국정치연구회 사상분과 편저, 창비

"민주주의가 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

맑스주의자라고 자처하려면 지금의 민주적 절차라거나 제도를 모두 거부해야 하는 줄 알았던 풋내기 눈에 커다랗게

띄었던 책 두 권.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손호철 교수가 감수한 일종의 이론서랄까 다소 고급한 교양서랄까. 92년에 발간된
 
이 책 앞머리말은 "민주주의가 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현존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의적 공세 하에서 무의미하고 사소한 문제로 전락해 버린 '민주주의'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게 뭘까.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에는 대체 좌나 우나 모두 옹호하고 지키고자 한다는 '민주주의'가 대체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지 명료하게 알고 싶었다는 지적 욕구가 컸었다. 지금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가 유행처럼 지난 2009년의 지금쯤에는 다시 한번 '민주주의'가 뭔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단어인지 절실하게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배부른 지적 욕구가 아니라, 뭐랄까 다소 절박한 생존 본능이

조금 발동.


#5.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너는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번, 아니 수없이 몇번이고 되살아야만 한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네 생애의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일들이 다시 반복되어야만 한다. 모든 것이 똑같은 순서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 이 책, 물론 니체는 여러 차례 신은 죽었음을 이야기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랄까,

짜라투스트라는 스스로 "신을 모독하는 자"로 불리기를 원한다. 춤추는 자, 유희하는 자인 '초인(위버멘쉬)'이 되고자

하는 짜라투스트라의 성장기랄까, 구도기랄까, 그가 어떻게 종교를 극복하고 형이상학과 염세주의(니힐리즘)을

극복해내는지 보여준다. 니체의 말에 따르자면 그의 가장 특별한 책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의 모든 저서를 집대성한

느낌이다.


물론 그의 이 책은 여러 아포리즘과 함의들을 끄집어 낼 수 있으며, 그것이 이 책에 대한 수많은 해설서들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온 이유기도 하다. 가능한 실마리 중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 것 하나는, 천국이든 내세든 일종의 이상향이든

끝이 닫혀있는 미래를 믿고 싶어하며, 자신의 삶이 왜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무언가에 기대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달콤하지만 '강퍅한' 유혹을 뿌리치라 말하는 짜라투스트라. 쳇바퀴 돌듯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황량한 현실에 대한

거짓된 희망이나 약속 따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바라보며 긍정하라 말한다. 단순화의 왜곡과 어폐를 감수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카르페 디엠'을 보다 촘촘하고 치밀하게 뒷받침한달까. 아..설명하기 쉽지 않은 책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대지를 초월한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이 의식적으로 행하든 무의식적으로 행하든 그들은 독을 타는 자들이다."


#5-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신앙의 기원-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그가 그리스도교인인 것은, 여러 종교들에 대한 통찰을 거치고 그것들 중에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영국인인 것은 자신이 영국을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포도주 산지에서 태어난 사람이 포도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에게 그리스도교와 영국 국적이 놓여 있어서 그것들을 아무런 근거없이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인과 영국인이 되고 난 후에, 그는 아마 또 자신의 습관에 들어맞는 몇 가지 근거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근거들을 뒤엎는다 하더라도, 그의 모든 입장에서 그를 뒤엎지는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속박된 정신으로 하여금 이중 결혼에 반대하는 자신의 근거를 말하게 하면, 일부일처제를 찬성하는 그의 신성한 열성이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습관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근거 없이 정신적 원칙들에 습관화되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부른다."

신앙에 대해, 종교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니체의 아포리즘 속에서 거의 꼭같이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더구나

그것이 더욱 위트있고 우아한 글투로 잘 정련된 것이라면야.



#뽀너스~* 텔레비전에 대하여, 피에르 부르디외.

최근 검은괭이2님이 바통을 넘겨주셨던 [힘내자 릴레이] 좋은 글귀, 대사 같이 나눠요~^^에서 끝까지 넣을까 말까 했던

문구 중 하나가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텔레비전에 대한 대중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 사회학에

관심을 갖고 그의 아비튀스니 사회적 자본이니 이야기들을 따라가다가 만난 책이었는데, 짧으면서도 언론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준 책이었다. 요컨대 텔레비전이나 언론의 시청률 경쟁, 상업적 성공을 위한 질주 속에서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비슷한 이야기에 둘러쌓이게 되고 만다는. 뱀이 제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듯, 언론사끼리 서로의 것을

조금씩 베끼면서 약간씩의 다른 이야기를 양념치듯 얹는데 만족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살짝 바꿔본다면? 텔레비전 대신 이른바 1인 미디어라는 상찬을 얻기도 하는 블로고 스피어 내의 블로거들이라면?

특히나 최근 출판사나 온라인서점, 영화홍보사, 심지어는 온갖 가전제품 메이커들까지 뛰어든 '리뷰' 시장에 있어서

빗대어 생각해볼 만한 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길게 인용해 본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게 독창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집단적 구속이 매우 강한, 특히 경쟁의 구속이 강한 세계에서 특별히 적용되는 말입니다...즉 무언가 말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미디어 산물들이 동질성을 갖게 되는 메커니즘 중 하나입니다. 만약 '리베라시옹'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사를 실으면, '르 몽드'는 무관심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르 몽드'는 거리를 두면서 그의 높고 진중한 명성을 지키기 위하여 조금 다른 점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다양한 기자들이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약간의 차이점은 많은 유사성을 가리고 있습니다...이런 모습은 특히 문학/예술 비평이나 영화비평의 경우에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
서로를 비추는 이같은 종류의 거울 게임은 정신적 유폐와 폐쇄의 무서운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사정에 밝고 재빠르게 행동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 다르게 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아주 작은 차이점에 기자들은 큰 환희를 느끼고, 시청자들은 이 차이를 모르는 채 지나갑니다. 이 차이는 의식을 지배하는 이 세계의 숨은 신, 즉 시청률 상승에 기여합니다.
오늘날 제작편집실, 출판사 등에는 '시청률 정신'이 있습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상업적 성공의 측면에서 생각합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플로베르와 보들레르 이후 약 30여년 간 작가를 위한 작가, 작가에 의해 인정된 작가들, 혹은 예술가에 의해 인정된 예술가들은 갑작스런 상업적 성공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시대와 돈 등과 야합한 징후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시장은 더욱더 정당화의 정당한 심급으로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최근의 심급은 '베스트셀러' 리스트입니다."


Special Thanks to 초하님~*

앞선 릴레이주자분들이 하도 빵빵하게 잘들 써주셔서..조금 다른 릴레이글을 남겨 보았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내 독서

편력의 계보를 그려본 셈인데..맘에 안 드시려나..? 쓰다 보니 너무너무 거창해진 거 같기도 하구요..ㅡㅡ;;

쉐아르 :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삼국지

brandon님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천국의 열쇠, 태백산맥, 하나님의 뜻,
                    
Parenting with Dignity

초하님 : 모모, 지와 사랑, 비둘기 외, 태백산맥, 기독교 종교 교육
이채 : 한단고기, 금강경(오쇼 라즈니쉬 강해), 공산당 선언, 현대 민주주의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Thank you in advance, 비프리박님~*

그리고 이 릴레이를 이어 받아 주실 분은...비프리박님(http://befreepark.tistory.com/)이 왠지 떠오르네요.

지난 나눔때 제게 임지현 교수-요 위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썼던-의 '적대적 공범자들'이란 책을 나누신 분입니다.

그리고 초하님도 말씀하셨지만, 누구든 자발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김수행 교수님의 아카데미시즘

김수행 교수님은 아직 상대평가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부터 수강생들에게 엄격한 학사관리를 한다는

평판이 높았다. 수업에서 듣는 내용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했던 일부 사회대 학생들은 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그런 것도 몰라주고 엄격한 출결관리와 냉정하고 야박한 학점을

고수하는 데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사실 '상대평가'와 '사회주의적 가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 따위는 찾지 못했었다. 교수님은 특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했었다.


이 책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고백한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자면 자신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을 하는 데서 그칠 뿐, 예컨대 '김수행노믹스' 식의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현실

정책이나 개별 사안에 대한 디테일한 평가가 가능할 만큼 공부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것. 지승호와

인터뷰할 때의 교수님은 때로는 시사 이슈에 대한 대중적 이해 수준에 머물거나, 혹은 솔직히 '그 부분은

공부를 안 해서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선다. 농업 경제학의 문제, 영국 복지정책 후퇴에 대한 해석의 문제..


그렇지만 한국 사회와 같은 황량한 지형에서 '자본론'에 기대어 한국경제를 읽어낼 만큼의 공력이 있는

경제학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김수행 교수님에게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내놓으라거나,

혹은 개별 사안에 대한 입장과 논평을 요청하는 건, 일개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서울대학교에서조차, 그분의 퇴임과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계량경제학의 틈바구니에서 또다시

밀려나 버리는 상황인 거다.


자본론의 부활을 말할 때

누군가 진보 세력의 특징은 개인이나 요소가 아닌 구조와 동학을 주목하고, 반대로 보수 세력의 특징은

개인과 요소에 우선적인 책임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동의하는 말이다. 맑스도 그랬지만

김수행 교수도 개별 사안이 아닌 구조 자체를 천착하고 있다. 케인즈도 '구성의 모순'이라며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전체로서의 합리적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했으니, 꼭 빨갱이만 구조적

모순과 시스템의 불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닐 거다.


실제로 주류 경제학이 'Ceteris Paribus'(다른 모든 조건이 일정하다면)이라는 비현실적 전제 하에서 완전

경쟁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정부가 시장판 자체를 유지, 존속시키는 역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능성을 최소한 이전에 그랬듯 지금 굴러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반성적

역할에 한정하더라도, 시장의 역사성이나 생산의 원천 및 분배에 대해 풍요로운 시사점을 충분히 던질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마르크스와 그의 경제학을 아예 도외시하고 있는게 문제다.


90년대 'IT 경제' 혹은 '지식경제'가 유행하면서 실물경제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다느니, 노동-자본의 구도

자체가 무화되었다느니, 혹은 비정규직 문제가 주목받으면서 '노동'을 덩어리로 보는 기존 시각과

맑시즘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느니 많은 지적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금융경제의 거품이

급속히 꺼져들어가는 세상에서 맑스와 김수행 교수가 주목하는 날것의 구조와 시스템, 실물 경제 그리고

강고한 노동-자본의 구도는 요요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상 열려있고 내용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사회'

김수행 교수님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종말론적인, 목적론적인 '닫힌 미래'를 항상

경계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에 '조응'한다고 했던, 그 '조응'이라는 애매한 단어에

기대어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자연히 사회가 발전한다는 식의

'경제주의'도 경계하고자 했던 교수님은,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말한다.


그건 어떻게 올 지, 어떠한 형태가 될 지, 언제 올 지 아무도 모른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그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을 여기저기 흘리고 있을 뿐, 기계적인 도식 따위 그린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교수님도 이야기하듯)

새로운 사회를 그릴 수 있는 상상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책 마지막 장의 우석훈교수가

말했던 좌파 경제학의 정의가 와닿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은 (주류)개발경제학이고, 말 못하는

사람-소외 받은 쪽이나 소수자나 약자들-을 지키는 것이 좌파경제학이라는 이야기.


얼마 전 만났던 기자 선배가 했던 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기자란 건, 항상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기자라고. 그렇게 지금 사회의 약자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보고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가다듬어 나가고, 또 그에 대한 반응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첩경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미 그 의미와 내용이 가득 차 굳어버렸거나, 심지어

오염되어 버린 면이 없지 않다.


남북 경협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러나.

개성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남북 경협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은 남북관계가 너무 호전되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자 관리하기도 힘들거라

염려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지금처럼 최악으로 경색되기 이전의 '배부른 고민'이었다.) 김수행 교수도
 
지금과 같은 식으로 투자해서 바로 자본주의적 이윤만을 좇는, 값싼 노동력만을 착취하는 경협은

별 의미도 없고 남북통일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경협 자체만으로도 남북간 합작의 훈련이 될 수 있고, 자본주의의 이식을 위한 훌륭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반대편 시각과 그 근거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한 내용 아닌가.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데 필요한 훌륭한 자극이 될 수 있는 꼬투리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여전히 웃기지도 않는 '불온도서' 운운하는 세력이 굳건하다.


덧붙임. 인터뷰의 미학.

마구잡이로 치고 빠지는 '합이 짜이지 않은' 날것의 싸움이 막장으로 가는 개싸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그럴 듯해 보이거나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액션 영화나, 토론회, 혹은

'리얼'을 표방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조차 기본적인 '합'을 짜두기 마련이다. 내가 이렇게 치면

넌 이렇게 막고, 니가 이렇게 반격하면 난 저렇게 피한다는 식의 '합' 말이다.


지승호와 김수행의 질문과 답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김빠진 문답도 아니었지만, 어느 한쪽의 기세가

등등한 위압적인 문답도 아니었다. 둘다 최선을 다해 질문하고, 최선을 다해 답하고 있다는 느낌, 

그들은 질문과 답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합'을 미리 짜두어서라기보다는, 서로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충실히 알고, 또 아는 것을 최대한 노이즈없게 전달할 만큼 충실히 숙성시킨 사람들이어서 그런 게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 10점
김수행 지음, 지승호 인터뷰/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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