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alaxy7, during short trip to 청주.

- 한국에서 즐기는 해외여행 4, 외국 분위기 물씬한 마을(윤성의)-

 


* 2016. 8. 19(금)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 (부산 감천문화마을, 4년만의 재방문.)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오늘 함께 돌아보고 싶은 한국의 이국적인 여행지는 부산의 산토리니, 혹은 마추픽추라고 불리는 감천동 문화마을입니다.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이쁜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켜켜이 오붓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페루의 마추픽추처럼 가파른 산경사를 따라 층층이 세워진 건물들이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이런 별칭이 생긴 마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을 찾았던 오년전만 해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동네였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놀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님께 가자고 해도 전혀 모르셨거든요. 감천 문화마을, 태극도마을, 아니면 감정초등학교 앞으로 가자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전혀 모르셔서 네비게이션을 켜고 직접 안내해 드려야 했습니다. 도착해서 돌아봤을 때도 외지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구요. 그렇지만 올해 다시 다녀온 그곳은 이미 꽤나 말랑말랑하게 상업화된 분위기랄까, 많이 알려진 관광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이 문화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건, 산비탈을 따라 쭉 올라세워진 달동네 마을이 낡고 허름해진 위에다가, 예술가들이 채색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조형물도 설치하며 마을 주민들과의 협업으로 일군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제법 여기저기에 유쾌한 조형물들이나 벽화들이 늘어난 것도 보기 좋았고, 곳곳에 공방이나 까페, 게스트하우스가 생겨나는 것도 지역 경제가 살아나는 표시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관광객들을 인도하는 화살표는 곳곳에서 발견되어 길을 잃거나 엄한 데로 빠지기도 더욱 쉽지 않아졌습니다. 굳이 길을 비틀어 다른 곳으로 가도 금세 어디선가 안내를 발견하게 되어 내심 안심도 되고 했지만, 그런 친절한 화살표 아래에도 이 곳의 풍경은 묻어납니다.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 곳에 사시는 할머니 몇분이 따뜻하게 덥혀진 시멘트 계단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앞서 걷고 있던 두 여학생들에게 뭐라뭐라 촬영하기 이쁜 데나 전망대를 알려주시는 분도 계셨고, 우리는 찍지 말라며 굳이 자리를 피하려 하시는 분도 계셨으며, 여기 뭐 볼게 있다고 이리들 기어와 귀찮게 구냐고 한소리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도 골목 곳곳에서 만나는 길냥이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한발 앞에서 알짱거리면서 길앞잡이를 자처해주기도 하고, 곳곳에 숨은 자그마한 벽화나 센스넘치는 조각들은 감천문화마을의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 숨겨진 보물들입니다. 산비탈을 따라 다랭이논을 일군 사람들, 그리고 다랭이논처럼 비탈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그네들의 파란 네모집들. 빈틈없이 공간을 구획한 야트막한 옥상들은 그대로 빼곡한 모자이크가 됩니다. 부산 앞바다로 그대로 흘러내려갈 것만 같은 기하학적인 문양들입니다.

워낙 경사가 가팔라서, 굳이 골목들을 들여다보지 않고 몇개 건물들만 슥슥 지나치면 금방 산아래 아스팔트 차도로 내려올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연두빛 분홍빛 파랑빛 페인트들이 골고루 이쁘게 칠해진 집들이나 공중화장실처럼, 그 사이로 놓인 시멘트 계단을 자근자근 밟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빛깔따라 조금이라도 화사해진다면 좋겠습니다.

다만 '산토리니'마추픽추란 이름이 갖는 묘한 설레임과 이국적인 향취, 그 별칭을 가벼운 마음으로 붙여주기엔 여전히 이 곳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가볍지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건물들의 군집이 이루는 그 전체 그림만을 보고 감상하며 '산토리니' '마추픽추'니 하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좀 실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니까요. 그곳에 사는 분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꼭 이름난 곳, 유명한 곳을 따라 다니는 것말고도 재미난 일들은 많다. 동네 마실삼아 설렁설렁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풍경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으니. 낯선 눈으로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1만 있다면.


특별한 뭔가가 있지는 않지만, 그냥 짠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천천히 낡아가는 마을의 살아있는 풍경들.


인공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너머에는 야트막한 울타리, 그리고 바로 짙푸른 남해 바다.


몇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샛노란 스쿨버스 두대가 얌전히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논밭 한켠에는 이렇게 생활하수가 흘러내리는 '싱크홀'.


그리고 이름과 외관의 이 아이러니도 참, 온통 낡고 헐어보이는 아주아주 오래된 새마을농업창고. 


그리고 이 오랜, 담쟁이조각이 눌어붙어있고 온통 붉은 녹물이 흘러내리는 철문짝.


언제 마지막으로 열렸을까 싶도록 오랜시간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듯한 철문이었다. 


그리고 등이 굽은 자전거 라이더.


굴양식을 위해 바다속에 걸어두는 조개껍데기들. 여기에 매달려 자라는 건가.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쪽에서, 이 나무 울타리는 왜 때문에 설치해 둔 건지 모르겠지만 새들의 좋은 쉼터가 된 듯.






바닷가 아스팔트길은 온통 갈라터지고 깨져있기 일쑤, 그 틈새에 머리박고 자라난 물색없는 이파리들.


바닷가를 떠나 크게 우회해서 마을로 돌아가는 길. 각기 다르지만 오묘하게 비슷하게 바랜 빛깔의 슬레이트로


누덕누덕 기워진 지붕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벌겋고 퍼런 차양이 갈기갈기 찢겨있는 어느 헛간.



그나저나 사람 한명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동네다. 아까 배 떠나갈 때 두어분의 어르신이 타시는 거 보고 계속 혼자.


이 가로등은 언제 이렇게 기세가 꺽여서는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걸까. 지난 태풍쯤이었으려나.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운봉읍에서 금계까지 이어지는 10km여의 구간은 마을의 수호장승으로부터 시작.


 

함께 걸었던 군대친구들. 어느덧 십수년의 세월동안 참 잘도 지내는게, 이리저리 갈린 길에서도 용케 잘 뭉쳐다녔다.


  

 

 

모내기를 위한 모판을 무논 위에 둥둥 띄워놓고. 모판을 실제로 본 건 꽤나 오랜만인데, 이렇게나 빽빽했던가,


그리고 이렇게나 싱그럽도록 연둣빛이었던가 싶다.


뭔가 일을 하시다 잠시 쉬시는 농부아저씨. 논두렁에 멋진 포즈로 딱 버티고 서서는 대지와 산을 바라보는.


 

둘레길 옆으로는 염소젖 짜는 체험도 해볼 수 있다는 조그마한 염소농장도 있고.


이런 아름드리 나무들도 쉬이 눈에 띄는 시골길이다.


 

또다른 아름드리 나무 옆에는 나무의 자연스런 곡선을 그대로 살려서 지은 정자도 있고.

 

잠시 길을 잘못 든 통에 차들이 씽씽 다니는 도로변에서 걸어야 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논두렁 태우는 연기와 냄새가 훈훈한 시골의 봄길을 걷는 건 꽤나 유쾌한 경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그리고 솟대들이 온통 삐죽거리며 솟은 곳은 어느 마을의 입구.

 

 

 봄의 빛깔은 누가 뭐래도 연두연두. 그리고 저렇게 한풀 꺾여 수그러든 낡은 벽돌빛의 배경이라면 더 좋다.


 

이제 슬슬 금계마을에 도착, 길이 민가로 접어들었고 이렇게 사람사는 풍경들이 나타난다.

 

골목길에 딱 버티고 선 나무도 싱싱하고.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천의 발랄한 물소리와, 그쪽으로 귀기울인 나무들의 휘영청한 모습도 참 좋고.



 

 

* 비좁고 비싼 서울에서 복닥거리며 버티느니 근교의 괜찮은 땅을 구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시겠다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오랜 꿈이셨다. 마침 건축 쪽에 종사하시는 아버님이신지라 벌써 십여년전부터 어떤 집을 어떻게 지을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고치기를 여러번, 그러다가 올해 4월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전원주택을 짓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제부터 올릴 사진들은 드문드문 내가 가서 찍은 사진들과 아버지가 현장을 관리하며 찍으신 사진들이 뒤섞일 예정이며, 가능한 집이 세워지는 시간순으로 실시간에 가깝게 업데이트하려 한다. 관련한 문의나 궁금한 점들이 있다면 비밀댓글로 남겨주시길.

 

 

13. 내부바닥 단열재 시공 및 옥상빗물 홍통파이프 설치

 

2015년 4월 25일, photo by father

 

 

 

건물의 기초를 다지는 것을 보더니 주위에 먼저 집을 짓고 살고 계시던 분들이 물어보셨다고 했다. 지하실을 파는 건줄

 

알았다고, 엄청 단단해 보이게 짓는 게 지진이 나도 괜찮겠다고 하셨다나.

 

이제 다음스텝은 땅의 습기가 올라오지 않게 내부 바닥에 비닐을 먼저 깔고 단열재를 시공할 차례. 두툼한 단열재가

 

매트리스처럼 집의 바닥을 빈틈없이 덮었다.

 

그리고 옥상에서 흘러내릴 빗물을 받아낼 홈통 파이프의 위치를 잡고 설치 완료까지.

 

 

BGM. 이화동, 에피톤 프로젝트

 

 

 

 우리 두 손 마주잡고 걷던 서울 하늘동네

 

 

 

좁은 이화동 골목길 여긴 아직 그대로야

 

 

 

 

 

 

 

그늘 곁에 그림들은 다시 웃어 보여줬고

 

 

 

 

하늘 가까이 오르니 그대 모습이 떠올라

 

 

 아름답게 눈이 부시던 그해 오월 햇살

 

 

 

푸르게 빛나던 나뭇잎까지 혹시 잊어버렸었니.

 

 

 

 

 우리 함께 했던 날들 어떻게 잊겠니?

 

 

 

아름답게 눈이 부시던 그 해 오월 햇살

 

 그대의 눈빛과 머릿결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해

 

 

 아직 난 너를 잊을 수가 없어

 

 

 

 

 그래, 난 너를 지울 수가 없어...

 

 

 

 

포항 호미곶,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이 곳을 가본 사람이던 안 가본 사람이던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바로 이렇게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커다란 손의 형상. 갈매기들이 쉬어 가는 다섯 개의 봉우리이기도 하다.

 

 

사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보다 작아 보일 수도, 혹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이 청동 조각상은 '상생의 손'이라는 이름으로

 

새천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99년 12월에 완공된 상생의 손,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로,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 이렇게 두 손이 함께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 손이 육지에도

 

하나 더 있다는 사실. 처음 알았다.

 

 

 

성화대에 있는 화반은 해와 달을 의미하고, 두 개의 원형고리는 화합을 의미한다던가.

 

바다에 있는 오른손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진 육지의 왼손. 그 앞에는 독도 일출과 피지의 일출에서 얻어온 불씨가

 

2000년 1월 1일 이래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본 왼손과 오른손, 상생하라는 두 개의 손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공을 쥐고 있는 듯

 

살짝 움켜쥔 모양새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호미곶에 와서야 알게 된 손 조각상의 진실이랄까.

 

호미곶에 도착하면 딱 보이는 꽃마차들. 말갈기를 쉼없이 희롱하고 있던, 제법 쌀쌀한 바닷바람에도 말들은 꿈쩍없었다.

 

상생의 왼손을 에둘러 바다쪽으로 훅 들어가는 전망대. 바다 쪽에서 육지를 배경으로,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시야를 가리는

 

갈매기들 틈새로 상생의 오른손을 볼 수 있다.

 

 

전망대 걸어들어가는 길에 한번씩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거대 문어상. 포항이 문어로도 유명한 데다 심지어 문어축제도 있다는 사실.

 

 

더이상 나갈 곳 없는 전망대의 끝단에 서면 정확히 동쪽을 가리키고 선 꼬마 아이의 동상이 있고, 호미곶의 위치가 잡혀 있는

 

한반도 지도와 나침반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분분히 날아다니며 상생의 손을 향한 시야를 여지없이 가리는 정신사나운 갈매기들. 사람들이 자꾸 과자를 던져댄 탓이다.

 

이쪽에서 보이는 상생의 오른손 측면샷. 아무래도 육지의 왼손보다 크기도 크거니와 그림도 훨씬 이쁘게 잡힌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서, 미처 보지 못했던 가로등에 눈길이 간다. 포효하는 호랑이 형태의 한반도가 장식된 가로등이다.

 

같은 형태로 동해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상 , 검고 노란 줄무늬가 선연하던 가로등 호랑이와는 달리 흰색과 하늘색의 줄무늬를 가졌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둥싯 떠있는 하얀 달을 움켜쥐려는 듯 내뻗은 육지의 왼손상.

 

 

광장에는 지난 새천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전국 최대의 가마솥이라거나 각종 기념물들. 그 와중에 수쳔년 전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기념한 기념탑이 하나 숨바꼭질중.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로 가는 길은 엘레베이터와 계단. 계단으로 갔더니 대충 4층에서 5층 정도 높이가 되는 거 같다.

 

 

옆에 나란히 선 풍력발전기 한 대. 시험삼아 돌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뭔가 효성의 광고판 같아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바닷바람이 매우 세게 몰아치기는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얼레를 하나씩 손에 쥐고 연을 날리고 있었고,

 

호미곶에 갓 도착한 아이들은 일단 부모손을 끌고 연 하나씩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으니. 그나저나 바닷가의 소도시답게,

 

혹은 바닷가의 명소답게 저런 연들을 담은 종이박스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잡힌다. 돌자반.

 

 

 

 

 

김이 펄펄 끓어오르던 커다란 양은솥. 아궁이에서 삼엄하게 번져나오던 화염. 그 와중에 살짝 풍기는 달콤한 냄새.

 

그것은 가히 '화염'이라 부를 만한 정도의 불길이었다. 빨갛다 못해 샛노랗게, 투명하게 달아올라 뿜어오르는 빛과 열.

 

부뚜막에 정좌하고 앉으신 며느리 할머니는 빨간 잠바를 이쁘게 걸치시고 파란 물바가지를 젓고 계셨다.

 

 

천천히. 그렇지만 쉼없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파란 물바가지가 끈적하게 아우성치는 조청에 휘감기는 느낌으로.

 

 

 

 

군산의 유명한 '경암동 철길마을'.

 

기찻길 옆 오막살이~ 라는 노랫말이 무색하도록, 그 옛날옛날 한옛날에나 있었을 거 같은 기찻길 옆 오막살이들이

 

여전히 고스란히 살아있는 곳. 옛 군산역에서 페이퍼코리아 회사까지 원자재 및 제품을 실어나르던 화물열차길인데,

 

놀랍게도 1944년에 개통된 이 노선이 2008년 6월에야 폐선이 되었다고 한다. 좀더 일찍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좁은 일차선 철길 옆으로 기차가 다니는 풍경은 어땠을까. 지금은 이렇게 철길에 다닥다닥 붙여서 온갖 잡동사니들을

 

늘여놓았다. 과거에도 그 자투리 공간을 주민들이 어떻게든 활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데 덕분에 영화촬영지나

 

출사지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근데 왜 난 전혀 몰랐을까..)

 

이제 열차가 지나다닌지도 오육년이 흘렀고, 철길 옆으로 다닥다닥 어깨를 겨루는 허름한 슬레이트 건물들 지붕을 따라

 

떨어진 낙숫물들이 철길 위에 고드름을 만들었다.

 

지나는 사람도 흔치 않은, 칼바람이 심하던 12월 중순의 어느 평일날에 찾아든 사람을 보고 강아지가 신났다.

 

 

 이런 식으로 약 일 킬로미터 이어지는 단선 철로, 그리고 그 양쪽으로 늘어선 슬레이트 가건물과 엉성한 외벽 건물들.

 

 

 그리고 페인트칠이 벗겨져 나가는 철문, 그야말로 '우드득 우드득'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얼음이 꽁꽁 얼어서 손수레 안은 온통 작지만 두꺼운 빙판이 되어 버렸고, 어디고 물방울이 떨어지던 곳은 고드름이 익었다.

 

 빨간 기본칠에 더해 초록색 페인트칠을 했던 슬레이트 벽면에 자글자글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딱 보자마자 생각났던 건,

 

최근 루이비통과 콜라보레이션 작업중인 '도트의 여왕' 야요이 쿠사마의 작품들. 시각에 문제가 있어 세상 모든 물체가

 

점들의 배열로 보인다는 그녀의 작품 세계랑 저렇게 균열진 벽면이 묘하게 닮은 거 같다.

 

 

 

야요이 쿠사마와 루이비통의 콜라보레이션, 이런 식의 디스플레이를 두고 혐오스럽다는 사람도 있었던 거 같지만,

 

그녀의 집요하고 강박적이랄 수도 있을 작품들은 어찌됐건 굉장한 시각적 임팩트를 남기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특히나 위에 스크랩한 야요이 쿠사마의 작품 중 마지막 작품을 보고 나서 다시 보면, 정말 그렇게 보이지 않나. 나만 그런가;

 

기찻길 철로 위에는 발이 걸리적거리지 않게 아예 나무로 판판하게 덮어버린 구간이 태반이고, 아예 이렇게

 

길 옆에 초막이랄까, 지붕 달린 평상이 하나 지어져 있기도 했다.

 

 

샛길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채 곤죽이 되어버린 선거 홍보물. 18대 대선이 아무리 시끄러웠다고 해도 이런 볕이 덜 드는

 

공간에까지 커버하지 못하는 대선이었으니 무슨 좋은 결과를 바라랴 싶기도 했다. 실제로 그랬고. 

 

 

 

아마도 이전에는 철길 건널목이 있었을 골목통, 지금은 거침없이 차들이 달리는 길을 지나 계속 철길 따라 가는 길.

 

흘러내릴 듯한 슬레이트 지붕이 켜켜이 쌓인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지 야트막한 집이 한층 더 낮아보인다.

 

 

덧대고 이어붙이고 다시 쪼아맨 그물망 뒤로는 개인지 닭을 기르던 공간 같은데, 지금은 하얀 눈만 망사를 뚫고 한가득.

 

어느 녀석이 참 꼼꼼히도 그려놨다. 누군가의 이름, 그리고 볼록하니 풍요로워보이는 하트가 두근두근.

 

바로 옆에 이어지는 학교가 있길래 슬쩍 들어갔다가, 무려 20년짜리 타임캡슐이 줄줄이 묻혀있는 곳을 발견.

 

구암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이십년 후라고 하면 대충..서른 초반인가. 별 거 없다 흥.ㅋ

 

좀더 가까이, 철길마을의 널판지와 얼기설기 엮인 벽면 너머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 잔뜩 녹슬어 언제 마지막으로 열렸는지

 

알 수 없는 자물통들이 대개 더이상의 접근을 막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흔적들. 지금도 여전히 텃밭을 일구고 고추를 말리고 빨래를 널어놓는다더니, 지난 여름에 썼을 호미가 널렸다.

 

아리랑 티비에서 취재를 했던 적이 있는지, 그래피티 아래 아리랑 로고가 보인다.

 

아마 텃밭을 일구다가 흘렸던 땀방울을 닦을 수건을 널어두고 싶으셨던 걸까. 조금 부서지고 이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수건 몇 개 걸어두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자바라 옷걸이.

 

 

 

흔친 않지만 2층 이상 되는 건물들도 철길 옆으로 바싹 어깨를 겯고 있었는데, 발이 숭숭 빠질듯 보이는 사다리는 참.

 

철로에 머리를 대고 아예 누워버린 국화꽃 화분 위에 하얀 눈이 이불처럼 덮였다.

 

 

안전하려나, 싶을 만큼 붉게 녹슬어버린 양철판으로 지어진 (그것도) 2층 집. 카드로 만든 집처럼 위험해 보이는데..

 

 

눈이 흠뻑 언덕처럼 올라서 버린 어느 곳에서 불쑥 머리를 세우고 있는 맨드라미. 살짝 색이 바랜 느낌의 도돌도돌 맨드라미.

 

그러다가 평상 밑에서 눈을 피하고 있는 꼬맹이 블랙앤화이트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고.

 

'당신이 불편해 했을 거란 생각도 했었죠' 라는 시적인 문구가 적힌 장독대도 만나고.

 

그 근처에서 또 발견한 문구 하나. '그래서 다음 만남은 편안하게'. 누가 누구에게 남긴 메시지일까.

 

또다른 문구가 남겨진 게 없나 찾아보는데 계속 뒤를 졸졸 쫓아오는 고양이 녀석.

 

물기도 모두 날려버린 채 바싹 마른, 얼어버린 행주가 빨래집게에 찝혀서는 너울너울 그림자를 흔들어 주었다.

 

다 타버린 살색의 연탄이 구멍을 송송 드러낸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던 경암동 철길마을변 풍경.

 

 

군산에 가면 꼭 들러보아도 좋을 곳. 가는 방법은, 군산 이마트를 찾아가면 바로 그 입구 맞은편에서부터 시작된다.

 

 

 

 

 

강릉 앞바다가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호텔. 대체로 경포해수욕장이나 그 옆의 사근진해수욕장에 인접한 호텔/모텔들은

 

바다쪽 오션뷰와 경포호쪽 마운틴뷰 중에 하나를 골라잡게 되는데, 이 곳 같은 경우는 높이나 위치나 딱 바다 옆이다.

 

창가 밖 테라스에 나가 아래를 굽어보면 용궁민박집도 보이고, 담백하고 고졸한 기와지붕과 색색으로 널린 빨래를

 

몽창 삼켜버릴 듯한 파도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밀려들어오고 빠져나가고.

 

비치 하우스라고 적힌 간판의 '스'를 가만히 보면 나름의 센스랄까 미감이 느껴져서 훈훈하기도 하다.

 

해안도로와 바다 사이, 갈수록 쓸려나가며 좁아지기만 한다는 모래톱에 바닥을 뉘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파랗고 벌겋고 희끄무레한 단층 민박집들이 쪼르르 늘어섰다.

 

 

 

이리저리 창밖으로만 둘러봐도 속이 탁 트이는 동해바다 풍경.

 

다음날 아침, 졸린 눈 부비며 테라스로 나가 게으르게 몇 방 찍어본 일출 사진. 날이 흐려서 조금 찍다가 말았지만.

 

언제고 이런 풍경을 가진 방이라면 와서 머물고 싶다는 생각. 몸이고 마음이고 금세 충전될 거 같다.

 

호텔방을 나와 잠시 해변가를 산책하다 눈에 띈 들꽃 한 무더기. 11월 중순이니 제법 추웠는데 지지 않았다.

 

지지 않은 건 노랑 꽃잎들 말고도 싱싱한 젊음들 역시. 저러다 따뜻하게 덥혀진 방에 들어가면 바로 뻗겠지만서도.

 

아무래도 겨울 바다란 건, 이렇게 휑한 게 정상이다. 일말의 로맨스나 낭만을 꿈꾸지만 이내 차갑게 몸이 식고 마니까.

 

 

조금 차로 내달려 강릉초당순두부마을을 가다가 만난 텅빈 들녘. 어느새 산너머 가라앉는 해가 단말마의 비명을.

 

뙇. 하고 내지르다.

 

바다를 옆에 끼고서, 잠시잠깐의 침묵도 존재하지 않도록 파도소리가 우르릉거리며 맥놀이 중인 곳이기도 하지만.

 

살짝살짝 변주되며 쉼없이 이어지는 파도소리가 어느 순간 먹먹하게 사라져버리는,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유후인 료칸의 체크아웃 시간은 보통 오전 10시, 그때쯤 나서서 후쿠오카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 마련이지만 아예

 

하루를 유후인 마을에서 보내기로 했다. 유후인 역의 라커에 가방을 보관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걷기 시작.

 

인력거 아저씨가 토막난 한국어로 흥정을 걸어왔지만 기력이 쌩쌩한 상태에서 저런 걸 탈 리가 있나.

 

 

전날 밤에 미처 걷지 못했던 골목을 좀더 헤집어 보기도 하고, 밝은 대낮에 보니 또다른 풍경에 감탄하며 연방 사진을.

 

 

 

뭐지, 여기가 유후인의 긴자 거리쯤 된다는 걸까. 잔뜩 색바랜 간판을 보면 도저히 그럴 리는 없는데.

 

자판기 왕국답게 담배 자판기가 네다섯대 즐비하게 늘어선 건 제법 장관이었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숯의 정령을 만났던 곳, 여러 귀여운 아이템들이 많았다.

 

 

이렇게 굵은 터치로 파내어진 등불이 반짝반짝거리기도 했고.

 

 

이 정도 인테리어에, 이렇게 사람 없는 샵이라면 한번 앉아서 쉬어주는 게 예의지만, 아직은 몇 걸음 떼지도 않아서 패스.

 

 

샵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조그마한 왕복 이차선의 길거리. 그런 샵중엔 퇴마 효과를 연구하는 샵도 있다.

 

 

이런 류의 사이비 과학이랄까, 운명론이 발달한 나라답게 손가락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반지를 끼라고 유혹하는.

 

그러고 보니 일본은 아버지의 날이 있었다. 6월 17일, 아버지의 날.

 

조촐하지만 확연한 메인도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골목길은 틈틈이 나타나서 손짓했지만, 꾹 참았다. 일단은

 

긴린코 호수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준보석이라 불리는 돌멩이마다 '능력치'를 표시하고 있던 그림. 우와, 이런 건 역시 온갖 종류의 게임이 발달한

 

나라라서 그런지 굉장히 시각적이고 확연하다. 마치 삼국지의 장수들 능력치를 따지는 것 같잖아. 지력, 매력, 무력..

 

이 복을 던져주는 고양이는, 그 주인의 복을 사방으로 던져버릴 셈인지 굉장히 몸값이 비쌌다. 무려 28만엔. 헉.

 

 

그리고 완전완전 귀여운 것들이 가득하던 샵 하나 발견.

 

 

 

날씨도 적당히 따뜻하다 싶었다. 아직 오전이라 그랬겠지만, 5시 버스로 유후인을 뜰 생각이었으니 근 6시간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었다. 흐느적흐느적 걷다가 쉬고 배고프면 군것질하고 차마시고 그러기로 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서 이렇게 샅샅이 샵을 순례하며 사진도 찍고 이것저것 살까 말까 재보기도 하고.

 

 

이 고양이는 가게 앞에 놓인 의자에 배를 깔고 누워서는 슈퍼맨 놀이 중이었다.

 

이 곰인형은 어메리칸 스타일의 바이크에 기우뚱 앉아서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역시 고양이, 고양이. 일본은 왜 이리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걸까.

 

그리고 술을 파는 가게 앞에서 빗자루를 쥐고 있던 고질라.

 

잠시 앉아 쉬었다. 사실 직선거리로만 따지면 얼마 걷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샵들이 많아서 꼬불꼬불 걸었던 걸 헤아리면

 

마치 꽁꽁 감겨있던 실타래를 풀어놓은 것처럼 왕창 늘어날 거다.

 

 

너무너무 유명한-아마도 한국인 사이에서 특히?-롤케잌집 비스픽은 이미 가게 안이 바글바글하길래 스킵.

 

다리를 건너고 나서 만난 또다른 샛길. 개울을 따라 쭉 걷는 길 옆에 색색의 꽃들이 만발해서 유혹하는 중.

 

어느 길 모퉁이에는 누가 만들었을까, 페트병을 잘라서 어찌어찌 만들어낸 바람개비가 팽글거리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군부대의 움직임. 뭔가 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유후인에는 자위대 주둔지가 인접해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더 고급스럽고 세련되어 보이는 상점들, 음식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간단하게 브런치랄까, 가볍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여행 중에는 가볍게 여러 끼를 먹는 게 현지의 다양한

 

음식도 맛볼 수 있고 특히나 유후인 같은 데에서는 길거리 음식이라거나 군것질거리들을 위한 여지를 남기는 방법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막상 메뉴판을 보니 이것저것 맛있어 보이는 게 잔뜩. 치즈 케잌이니 단팥죽이니 고구마 세트는 뭘까.

 

그래서 이것저것 맛보고 일본의 맛난 커피도 마시고, 시원한 에어콘 바람 맞으며 쉬다가 정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그렇게 유후인 마을을 샅샅이 살펴보기로 한 하루 일정의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을의 분위기만큼 고즈넉하고 여유롭게.

 

 

 

가평에 있는 쁘띠프랑스, Petite France. '조그만, 작은, 이쁜' 프랑스라는 의미일 텐데 워낙 잘 알려져 있는 곳이고,

사진으로도 많이 담긴 이쁜 곳이니만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려니 이미 차들이 그득그득, 인도해 주는대로 길가에 차를 대고 매표소입구로. 아직 바람이 차갑다.

입구를 지나면 나타나는 이국적인 풍경. 파스텔톤의 벽면이나 따뜻한 색감의 기와들, 다양한 표정의 실루엣들이다.

자그마한 분수 광장을 둘러싼 노란 파라솔들, 그리고 다시 파라솔들을 에워싼 색색의 건물들. 그치만 위압적이진 않은.


빨간 제라늄꽃이 창틀에 놓인 건물 사이로 마을의 다른 건물 지붕들이 내려다 보인다.

겨우내 추위와 찬바람에 시달렸을 것들이 이른 봄볕을 찹찹찹 게걸스레 핥고 있다.

제법 복잡하게 이리저리 꼬인 계단들, 산토리니의 새하얀 계단형 건물들을 살짝 떠올리게 만드는.


아직은 누렇게 말라죽은 채인 풀밭이지만 조금만 더 날씨가 풀리고 따뜻해지면 꽃과 잔디가 융단처럼 깔릴 꽃밭.

갤러리 앞에는 벼룩시장이 열렸다. 도자기 인형들이나 접시가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노랑 우체통.

양철 주전자들이 띄엄띄엄 바닥에 늘어서 있는 폼이 불규칙하면서도 제법 느낌있다.

갤러리 안에 전시된 마리오네트 인형. 얼굴표정이나 옷감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굉장히 섬세하다. 툭 튀어나온 앞니까지.


마리오네트 인형들은 왜 이렇게 전부 인상적인 표정과 기괴한 외양을 갖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눈을 높이 맞추고 있다가 문득 바닥으로 내렸더니 왠 화관을 쓴 처자가 비둘기를 한마리 건네주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공간이 넓고 길다. 그 공간을 온통 꽉꽉 채운 프랑스 느낌 가득한 소품들과 장식품들.

프랑스를 상징하는 새, 프랑스의 국조는 수탉이란 걸 갤러리에서 새삼 실감했다. 온통 수탉을 형상화한 장식품들.




근데 한국의 나라새, 한국의 국조는 뭐더라. 까치였던가 싶긴 한데 확신이 없어서 검색해보니 역시 '까치'가 맞단다.

갤러리를 나와 조그마한 프랑스 마을 같은 쁘띠프랑스 내부를 걷는데 딱 나타난 사진찍기 좋은 곳.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를 나란히 내려놓고 카메라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쁘띠프랑스의 전경, 그리고 청평호수까지 멀리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오르내리는 계단이 워낙 좁단 게 에러지만.

이렇게 쁘띠 프랑스의 색색 빛깔의 이쁜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거나,

청평댐이 버티고 막아서서 바다처럼 넓은 청평호수와 어른거리는 산그림자까지도 보이는 전망이니 올라갈 만 하다.


야생화 산책길을 지나 '사랑의 종탑'으로. 어린 왕자의 스토리에서 '사랑'과 관련한 경구들은 무수히 뽑아낼 수 있겠지만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을 오르며 사랑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이르고는 비로소 종에 다다른다. 대앵~ 대앵~

3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는 유럽동화 인형극축제, 평소에 하던 샹송공연이니 마임쇼에 더해서 인형극도

열리고 목각인형 콘서트 같은 것도 열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후가 무르익을수록 점점 늘어나는 꼬마손님들.

안내 포스터에 나왔던 그 여자분이 그대로 나와서 샹송을 부르는 공연. 조금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저씨들이

문득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를 치더니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만 하는 수준의 샹송 가수를 받침해주던 악기는 기타, 그리고

약 백오십년 전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전통악기, 그리고 아코디언 한대.

따님의 초등학교 시절 아코디언을 들고 와 연주하시던 이 분이 활을 이용해서 켜는 방식의 프랑스 악기, 무려

한국에 한대밖에 없다는 이 악기도 연주하셨다. 건반이 감겨있는 모자라거나 어깨의 금색술이 인상적인 분.

 

쁘띠프랑스가 워낙 잘 알려진 명소가 된 데에는 장소 자체가 워낙 이쁘게 잘 꾸며진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몇몇

방송에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얻은 것 같기도 하다. 베토벤바이러스라거나 시크릿가든, 러닝맨까지.

특히 '베토벤 바이러스'의 경우는 메인촬영지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서 전출연자들이 사인도 남겨놓고 세트장의

배치도 고스란히 간직해두었다고 한다. 뭐, '베토벤바이러스'던 '시크릿가든'이던 드라마를 안 봤으니 별 감흥은 없지만.



그 옆에 바로 인접해 있는 건물은 '프랑스 전통주택관'. 근 이백년 가까이 된 프랑스의 고택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전시관이라고 하는데, 주름살처럼 깊이 골이 패인 기둥 하나만 봐도 이 집의 범상치않은 연륜이 느껴진다.

천사가 호롱불을 들고 날아다니는 천장에는 슬쩍 단발 비행기도 날아다니고 있지만 현란한 접시장식들로 숨겨졌다.

이것도 한 이백년쯤 되었으려나, 애기들이 타고 놀았을 목말이랄까, 세발자전거랄까.

집 한채를 통째로 옮겨왔다고 하니 이런 전등갓처럼 세세하고 고풍스런 장식물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백년전 프랑스의 저택에 살던 사람은 이런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겠구나. 세련된 색감이나 문양이 참.

화장실의 전경. 앞에서부터 세면대, 변기, 그리고 욕조 하나. 끝.

그런데 이 변기는 남성 전용인 걸까 아니면 남성 소변 전용인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모든 걸 다 저기서 해결?

인형극장 앞에 있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의 기념사진 촬영용 판넬. 선그라스를 멋지게 낀 애기가 백설공주의

얼굴을 훔치고는 활짝 웃고 있었다.

프랑스나 유럽의 인형극을 부정기적으로 여는 극장이라고 하는데, 'Guignol', 기뇰이란 건 프랑스 전통의

손 인형극을 말하는 거라고 한다. 4-50석 되어보이는 자리가 꽉 차서는 빨간망토 소녀 인형극을 관람.

15분쯤 되는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에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이야기, 간단한 구조와 심플한 등장인물들까지

아이들이 보기에 딱 좋은 내용과 분량인 듯. 감탄할 만큼 현란한 손놀림이나 부드러운 움직임도 관람 포인트.


처음에 한바퀴 돌아보면서는 그리 크지 않은 조그마한 마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볼 것들도

많고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들이며 걷게 되었지만, 각도마다 달라지는 풍경도 한 재미.




돌아나오는 길. 샹송 공연에 인형극 공연까지 챙겨보느라 한 세네시간 정도 걸린 듯 하다. 그렇지만 까페에 들어가

커피랑 츄러스도 맛보고, 중간중간 앉아서 쉬기도 했으니 완전 널럴한 페이스였단 걸 감안하면, 작긴 작구나.ㅎ


쁘띠프랑스에서 체크아웃. 조금만 더 날이 따스해지고 야생화니 잔디가 불긋푸릇해지면 더욱 이쁜 풍경이지 않을까.




 


부산 감천 문화마을의 껍데기, '부산의 산토리니'라고들 하는.


이전 포스팅에서는 그래도 최대한 '껍데기'의 아름다움, 전체적인 외견상의 풍경을 담으려고 했지만 곳곳에서 물이 새듯

현실의 신산함, 고단함이 묻어나는 걸 피할 수 없었던 거 같다. 그치만 사실 그 몇겹의 페인트칠로 달동네의 가파른 경사와

그만큼 가파르게 짊어진 무게감이 가려질 수 있을까. '산토리니'란 이름이 갖는 묘한 설레임과 이국적인 향취, 그 별칭을

갖기엔 여전히 이 곳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가볍지가 않다. 그런 헛되고 헛된 별칭 따위, 자꾸 그렇게

부를수록 사람들은 껍데기만 구경하고 그 안의 사람들을 잊지는 않을까 저어스러울 뿐이다.


풍경 안에 최대한 사람 냄새를 담으려 했다는 핑계로, 나 역시 카메라를 들어 풍경을 담았지만 이건 참. 예의가 아니다.


온통 색바랜 채 아귀힘조차 잔뜩 풀려버린 듯한 빨래집게들이 때가 꼬질꼬질한 빨랫줄에 턱을 괴고 매달려 있었다.

태극기와 무궁화가 주렁주렁 박혀있는 깃발대. 왜 저것들이 보이는 풍경은 늘 적당히 촌스러워 보이는 걸까.

골목길 한켠의 구멍가게 하나 겨우 차릴법한 공터에 윗몸일으키기용 기구와 자전거, 아령 두개가 놓였다. 그리고 이름붙기를,

"운동하는 곳 소변금지". 아닌 게 아니라 적당히 술이 오른 사람들이 슬쩍 가로등 불빛을 피해 바지춤을 내리기에 딱 좋은 곳.

온통 불룩불룩 부풀어오른 슬레이트 지붕 위의 커버. 의도한 건지 아니면 가스같은 게 찬 건지 모르겠지만, 롯데월드어드벤쳐의

그 펑펑 소리가 울리는 가짜 성벽과 동굴벽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이곳이 뭔가 7,80년대 달동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찍기에 맞춤한 세트장 같단 생각이 계속 들어서일까.

화려한 몸빼바지와 셔츠가 내걸린, 벽과 벽과 슬레이트지붕으로 둘러싸인 채 한줌도 안되는 하늘 아래 바람을 기다리는 곳.

계단이라고 반듯하게 만들어졌다거나, 보폭을 감안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적당히 시멘트를 개어서 적당히 척척,

발딛을 곳만 층층이 만들어주면 끝. 그래도 이 황량한 풍경을 견디게 해주는 건 곳곳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꽃화분들.


그리고 믿기지 않게도, 그 좁다란 골목을 따라 쇠봉을 두개 세우고는 여차할 때 빨래 거는 용도로도 쓰기도 했다.

이런 풍경들. 누군가에겐 그냥 조금 '불편'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일은 아니다.

자칫 우범지역으로 화하기 쉬운, 사람들이 떠나간 빈집들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는 낡고 허름하고 가로등도 귀한

골목인지라. 범죄가 발생했을 때 바로 신고할 수 있도록 해둔 위치 정보. 근데 이런 건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나 쓸법한

방법 아닌가. 말하자면 여긴 동네 야산보다 높은 수위의 안전 장치가 요구되는 곳이다.

삐뚤빼뚤 대강 그어진 선들이 건물을 이루고, 옹벽을 이루고, 길가에 앉아계신 할머니 몸위로 쏟아져 내릴 듯한

시멘트 덩어리를 윤곽짓고 있었다.

어느 집과 집 사이, 여지없이 가스통이 세워진 그 틈새 사이에 지압 효과까지 겸한다는 훌라후프가 박혀 있었다.

저 커다란 훌라후트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방안에서는 택도 없을 거 같은 조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곳에서, 아마도 사람들의 운동장은 그네들의 집 옥상이 아닐까. 파랑색 수조통이 거개의 공간을 차지한.


이런 정도의 가파른 비탈, 한결같은 그 비탈 위에 건물들이 쓸려내려오다 가까스로 멈춘 듯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 감천동 문화마을이란 곳에 붙은 '부산 산토리니'라는 별칭은, 그리고 '문화마을'이란 이름조차, 어쩌면

이렇게 날것의 시멘트 위에 살짝 엉켜붙은 석회 같은 거 아닐까 싶다. 언제고 쉽게 씻겨나갈 수 있는 분칠.

그 아래에서 시멘트는 여전히 거칠하게 차가운 냉기를 내뿜으며 퇴락해 가고 있는 거고.

신속하고 전화비는 무료,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112를 안내하는 저런 거창한 광고 문구라니.

이곳저곳에 내걸린 빨래들이 바람에 함부로 휘둘리고 있었다. 무기력하게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몸을 내어맡긴

빨래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허탈해지는 느낌마저 들더라는.


한때 그래도 마을의 가게였을 곳, 위에 덮였던 차양은 전부 뜯긴 채 앙상한 뼈대만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바람에

희롱당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쇠가 삭아나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하는 걸까. 그리고 언제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되었을까.


외벽이 없는 계단이란 건, 굉장히 위태해 보인다. 더구나 이곳처럼 경사가 급한 마을에서 아랫쪽으로 한없이

굴러떨어질 수 있는 곳으로 휘감아 돌아가는 계단이란 건.

야트막한 집들 사이로 불쑥 솟아있는 저 고층 아파트는, 왠지 서울로 치자면 강남의 타워팰리스랄까. 그런 위화감.




위태한 계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이 기우뚱해 보인다. 아랫쪽의 철사를 두른 장독 하나와 풀떼기가 심긴

항아리가 신기해서 요리조리 살펴보았는데, 좀체 그 커다란 장독의 쓰임을 알 수가 없다.

전봇대가 힘겨워보이도록, 사방팔방에 십육방위로 하늘을 쪼개고 있는 전선들.


이 곳에서도 곳곳에서 보이던 교회의 십자가, 첨탑들. 비탈길의 각도를 완만하게 버혀내고 산뜻한 페인트로 건물을

단장해줄 수 있다면야 약간의 '마약'은 꽤나 유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기도 훌라후프 하나가, 공사가 진행되다가 만 건물인지 아니면 부수다가 만 건물인지 모르겠으되 뾰족하니

위태롭게 튀어나온 철근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이 동네, 훌라후프 보급운동이라도 벌어졌던 건가.

우리누리공부방 가는 길, 무슨 사막처럼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나 했더니, 흙바닥인가 했더니. 온통 시멘트가 부어져

꽁꽁 굳어있던 시멘트바닥.

그리고 터키니 대만이니 일본이니 프랑스니, 글로벌한 국기들의 휘황하던 공부방 옆에 만들어져 붙어있던 타일들,

그곳에 씌여진 말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당연한 거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이렇게 허물어지기 직전처럼 보이는, 폭삭 삭아버린 슬레이트 지붕이 바람에 날려갈까 시멘트 벽돌로 눌러둔 공간.

빨간 대야들이 온통 집밖에 전시된 채 비바람과 햇살에 바래가는 공간.

미용실에 붙은 스티커가 온통 잘근잘근 찢기고 터져나가도록 간판조차 바꾸지 못한 채 문닫은 공간.

그리고, 언제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사진들 속 사람들이 온통 하얗게 바래지도록 남겨지고 지체된 공간.

오락실조차 온통 기계들이 불을 끈 채 잠들어있던. 사람들의 생기나 온기를 바로 느끼기가 쉽지 않던 공간.


그런 것들이 이 곳, 감천동 문화마을이 감추고 있던 속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건물들의 군집이 이루는

그 전체 그림만을 보고 감상하며 '산토리니'니 '마추픽추'니 하는 건 좀 실례가 아닐까 싶은 거다.

간판 대신 거북이 박제가 걸려 있는 가게도 있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원하면 저거 사가라고 걸어둔 거라며

친절하게 말씀해주시던 할머니도 계시고.


아, 그리고 이곳 감천동 문화마을이, 감천2동이, '부산 산토리니'가, 태극도 마을 혹은 태극마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 1950년대부터 이곳에 형성된 '태극도'라는 종교 집단의 집단거주구역이 감천동 이 곳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 들어가서 '도인'께 들은 설명에 따르자면 현재 이곳 문화마을에 살고 계신

어르신들 중에도 상당수가 여전히 '태극도' 신도인 '도인'이라고 하던데 진위 여부는 모르겠고.

감천동 문화마을, 그곳엔 사람이 살고 있다.

산토리니 따위 허명에 속아 이쁘게 담으려 하는 것보다, 그곳에 사는 분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게 우선일 듯 하다.

그리고 사실, '산토리니'라는 포장으로 이곳이 관광상품화되고 팔린다 치자. 지역경제에, 이 곳에 사는 분들에게

어떤 혜택이 얼마나 주어질까, 주어지기나 할까. 도리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는, 최소한의 자존감마저 망가뜨리는

건 아닐까, 그치만 또 이런 건 너무 앞선 걱정은 아닐까, 여러가지 고민들이 일어나는 건 결국.


어딘가로 가서, 누군가의 일상이 전개되고 있는 공간을 침범해서 렌즈를 들이대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도 이기적인 탓인지도 모른다.






대체 '부산의 산토리니'는 어디를 말하는 걸까.


부산에 '그리스 산토리니'마을처럼 이쁜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켜켜이 오붓한 마을이 어딘가 있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었었다. 다만 그 어딘가가 정말 어딘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상의 정보가 워낙 분분하고 혼란스럽다고 느꼈던 게,

'부산 산토리니'로 찾으면 '감천동 문화마을, 태극마을, 태극도마을, 영도 흰여울길, 영선동, 이송도 마을..' 등등 굉장히

다양한 지명들이 쏟아져 나온 탓이다. 직접 가보고서야, 그 혼란스러움은 어느정도 정리가 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부산 산토리니 = 감천동 문화마을, 태극(도) 마을, 감천2동, 감정초등학교 골목..전부 같은 곳을 말함.

부산의 또다른 산토리니 = 영도 영선동 이송도 마을(영도 절영 해안 산책로)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노닐다가 택시를 타고 '감정초등학교'를 가자고 했는데, 기사분이 잘 모르신다. 왜 그 부산의

산토리니가 있다는 곳 모르세요, 해도 모르신다 하고 자꾸 감천초등학교 아니냐고 되묻기만 하시기에, 손가락을

바싹 여며서 내비게이션에 찍어드렸다. 그리고 도착한 감정초등학교 앞. 이 벽화사진은 이미 숱한 블로그에서

잔뜩 본지라 꼭 많이 와본 곳 다시 방문한 느낌이었다. 여기서부터 감정 문화마을, 혹은 '부산 산토리니'의 골목길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출발하기 전 우선 옆에 있는 안내지도 하나 찍어두고 출발. 빨간 길을 따라가는 게 정석이라는데 뭐, 골목길이란 게

가다가 내키는대로 요리조리 비트는 맛에 다니는 거니까 위치 확인만 할 정도로 참고할 생각이다.

문화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건, 산비탈을 따라 쭉 올라세워진 달동네 마을이 낡고 허름해진 위에다가, 예술가들이

채색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조형물도 설치하며 마을 주민들과의 협업으로 일군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입구는

제법 여기저기에 유쾌한 조형물들이 심심찮게 보이고 있었다.

입구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얼굴 모양의 새, 인면조들.


감천동 문화마을, '부산의 산토리니' 안으로 들어서는 길은 기본적으로 저렇게 생긴 화살표를 따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파스텔톤의 색색가지 물감으로 칠해진 건물 외벽에 절대 놓칠리 없는 크고 작은 화살표들의 무리가 지긋이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골목은 좁았지만 말끔했다. 페인트칠이 위부터 아래까지 꼼꼼하게 칠해져 있었고, 골목 양쪽에 마주본 벽면의

색감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데다가 여기저기서 쉽게 눈에 띄는 꽃나무들이 분위기를 한결 화사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야트막한 건물 위에서부터 슬몃 기어들어오는 분무기로 뿌린 듯한 햇살까지.

경사는 매우 가팔랐고, 이 곳에 사시는 할머니 몇분이 따뜻하게 덥혀진 시멘트 계단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앞서 걷고 있던 두 여학생들에게 뭐라뭐라 촬영하기 이쁜 데나 전망대를 알려주시는 분도

계셨고, 우리는 찍지 말라며 굳이 자리를 피하려 하시는 분도 계신듯 했으며, 여기 뭐 볼게 있다고 이리들 기어와

귀찮게 구냐고 한소리 하시는 분도 계셨다. 그렇지만 사진은 말이 없고, 찍고 나면 그뿐. 풍경속 할머니들의

등저리로 내려쏟는 부드러운 햇살이 노곤해 보인다.


낡고 녹슨 사다리가 단층 건물 옥상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인 듯 했다. 페인트칠이 잘 되어있는 벽면에 비해

벌써 많이 녹슬고 피곤한 모습이라 눈에 띄었다. 벽을 칠할 때 같이 칠했을 텐데, 생각보다 페인트가 오래 못

버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한번 칠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달동네의 고되고 신산한 풍경에 '산토리니'의

느낌을 부여하고 유지하기란 생각보다 많은 페인트통이 소요될 거다.


골목을 걷다 어느 탁 트인 시점에서 내려다본 풍경. 다닥다닥, 서로의 어깨를 내주고 모서리를 공굴리며 세워진 집들이라

집 모양이 네모반듯한게 아니라 삼각형, 마름모, 사다리꼴..유치원생들 도형 공부하기 딱 좋겠다. 그런 분방한 집들이 버틴

틈새로 차마 길이랄 것도 없는 골목들이 이리저리 꺽이는 게 또 매력적이다.

그리고 나름 배합에 신경을 쓴 듯 연두빛 분홍빛 파랑빛 페인트들이 골고루 쓰인 집들, 그 사이로 놓인 시멘트

계단을 자근자근 밟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그 빛깔따라 조금이라도 화사해졌다면 좋겠다.

감천 문화마을, 이 '부산 산토리니'를 표방한, 혹은 '마추픽추'를 표방한 동네의 또 하나 특징은 온통 전선이 하늘을

달리고 있다는 점. 고작해야 이삼층 짜리 야트막한 건물들이 가파른 비탈 위에서 미끌리고 있는 와중에 우뚝 솟은

갸냘픈 전봇대 위에서 사방팔방으로 뻗는 전깃줄이 한뭉치다.

어느 집 슬레이트 지붕에 살짝 몸을 얹은 채 내려다본 풍경. 완만하게 휘어진 산비탈을 따라 맞은편 등성이에 비슷한

높이에 있는 집들이 보인다. 파란색 물탱크는 하나씩 죄다 옥상 위에 올린 건물들.

저렇게 사람 하나 지나기도 힘든, 지나면서 가방이고 겉옷이고 다 거칠하기 그지없는 시멘트 맨벽에 긁고 지나는

골목길을 품고 있기도 했다. 감천동 문화마을.

전깃줄이 사방으로 뻗은 하늘 아래, 조그마한 공간이 남아 푸른 빛이 맴돌았다. 사람과 건물과 골목이 온통

서로에게 한곁을 내어주고 살고 있는 듯한 풍경이 정겹기도 하고, 살짝 서글프기도 하고. 혹은 운치랄 수도.

빨랫감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여기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고, 골목을 다니며 만나는 건 커다란 카메라를

이고 진 외부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소리없이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빨랫줄에

도달하기 위해 밟아야 하는 네칸짜리 사다리가 앙증맞다.

여행객들, 관람객들, 관광객들을 인도하는 화살표가 곳곳에서 발견되어 길을 잃거나 엄한 데로 빠지기도 쉽지 않겠다.

굳이 길을 비틀어 다른 곳으로 가도 금세 어디선가 안내를 발견하게 되어 내심 안심도 되고 했지만, 그런 친절한 화살표

아래에도 이 곳의 풍경은 묻어난다. 누군가 내어놓은 쓰레기들, 그리고 누군가 써둔 '재활용 분리바람'이란 문구.

워낙 경사가 가팔라서, 몇개 건물들만 슥슥 지나치면 금방 달동네의 바닥 아스팔트 차도로 내려올 수가 있을 거 같다.

굳이 같은 높이에서 좌우로 돌아보며 이것저것 찾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야, 저런 화살표 무더기들을 보고서

얌전하게 내려온다면 생각보다 금방 끝나버릴 '부산 산토리니' 투어가 될 듯.

그 길위에는 이렇게 아직도 생생하게 보랏빛깔이 살아있는 벽도 있고. 색색이 재미있게 칠해진 공중화장실도 있다.

멀찍이 가파른 옹벽 위로 차곡차곡 놓인 화분들도 보이고. 그 위로 분홍빛 상아빛 페인트칠이 곱게 된 건물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그러고 보면 저렇게 좁디좁은 옹벽 위에 화분을 하나씩 끌어다 놓았을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느 집 앞, 온통 유리테이프와 누렁테이프로 발린 우체통 위에는 북어 한 마리가 제물로 바쳐져 있었다. 가게나 집에

들어오는 입구에 저렇게 북어 한마리를 걸어두면 복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면 언젠가 티비에서 생활풍수,

어쩌구 내용이 나온 이후로 어머니도 변기 뚜껑을 잊지 않고 꼭꼭 닫아두셨었다. 그런 마음 아닐까.

이렇게 국자를 재활용한 듯한 풍차도 지붕 위에 얹어놓고 있는 집이 있는가 하면.

차갑고 거친 시멘트 벽면 위에 스마일 표시가 하얗게 웃고 있는 집도 있었고.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인 것처럼 비탈길 한 면에 위태하게 솟은 다용도 공간. 지붕조차 없는 그 옆면으로 자유롭게

만들어져 달린 스텐레스 문짝과, 지붕 없이 그냥 흉내처럼 달려있는 문 아닌 문.

이렇게 부분부분 끊긴 채 담긴 사진으로는 감천동 문화마을, 혹은 태극마을, 태극도마을, 혹은 부산 산토리니라는

거창한 수식을 가진 이 마을의 풍경이 오롯이 담기지 않아서 아쉬울 뿐.

옹기종기 모여앉은 장독들, 위에 하나씩 얹힌 돌멩이, 시멘트덩어리, 벽돌 따위 모양과 형체는 다르지만 그런 다름조차

장독대 위에선 별달리 다툴 의미를 잃고 만다. 멀찍이 보이는, 이 골목들을 쏘다니며 사람보다 더 많이 발견했던 가스통.

곳곳에 잘 정비된 깔끔하고 귀여운 색감의 공중화장실이 있단 건 꽤나 인상적인 일이었다. 꼭 방문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가파르고 좁고 불편한 달동네에 사시는 분들에 아주 실용적인 도움이 될 거 같아서다.

그리고 발견한 공부방 하나. 왠지 모르겠지만 일본, 터키, 중국, 프랑스, 베트남, 대만..온갖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는 벽면,

그리고 각국의 언어로 쓰인 응원의 말들이 발길을 잡았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국기 아래 씌인 문구가 참 좋았는데.

"감천동, 난 너희들이 좋아. 그저 너희들과 함께 하고픈 마음 뿐이야." 미래에 대한 약속도, 현재에 대한 위로도 없이 그저

지금 이순간 함께 하고 싶다는 그 마음만으로 충만한 메시지. 그만큼 솔직하고 절절하게 느껴지는 거 같다.

아마 각국에서 봉사활동으로 왔던 교육 활동가들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그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꽤나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 보이는 '우리누리 공부방' 나무 현판 옆으로 보이는 에펠탑이니 뭐니 글로벌한 풍경을 보니 그런 거 같다. 이곳이 비단

부산 사람들, 혹은 한국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곳을 알고 챙기려는 사람이 있다는 훈훈함.

 

그렇지만 문이 닫힌 채 불이 꺼져있던 공부방, 아이들을 볼 수 없던 감천동 문화마을 어딘가의 골목에서 내려다본 풍경에

옥상에서 열심히 줄넘기를 하는 소녀가 잡혔다. 아이들은 전부 옥상에서 날아갈듯 맹렬하게 줄넘기를 하고 있는 걸까.


누가 여기를 '부산의 산토리니'라고 이름붙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편하고 럭셔리한 이름이 이 곳에 맞는 옷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산토리니를 연상케하는 파스텔톤의 껍데기는 말고, 좀더 골목을 헤집으며 살폈던 속살 사진들은 다음 포스팅에...


부산 감천 문화마을의 속살, '산토리니'란 별칭은 내려놓는 게 어떨지.







어느 야트막한 담장을 따라 이파리를 늘어뜨린 채 해바라기 중이던 초록빛깔 덩굴식물. 삼지천 마을,

혹은 삼지내 마을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나 차분함이란 건 저런 덩굴이 꼬물대며 이파리를 밀치는 소리와

움직임이 보일 거 같은 그런 정도의 질감을 갖고 있었다.

A탐방로니 B탐방로니 일견 복잡해 보이는 코스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어려울 거 없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눈길 닿고 마음 동하는 대로 걷다보면 어느새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거다. 미처 못 가본 샛길의 풍경이 못내

궁금하다거나 아쉽다거나 하면 그저 또다시 휘적휘적 걸어가면 될 일. 그런 게 '슬로우시티'의 호흡이 아닐까.

이리저리 휘휘 감기며 이어지는 돌담길이 끊긴다 싶은 곳엔 반쯤 열린 나무대문이 버티고 섰다. 안 그래도

나뭇살이 조금씩 휘어지고 뒤틀려 안의 풍경이 속살처럼 드러나고 있었는데, 대청마루가 시원해 보인다.

마을 곳곳에 빈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들. 이 곳에서 민박을 하는 집들이 꾸며 놓은 거기도 하겠지만

딱히 광고나 영리 목적의 홍보가 아니라 마을을 치장하고 소개하는데 더 마음을 쓴 거 같다.

 

한눈에 확 매료되고 만 전통 가옥 한 채가 있었다. 지붕에 촘촘이 얹은 기와 한장한장이 비바람에 씻기고

세월에 퇴락해선 저마다 다른 얼룩과 상처를 갖고 있었지만, 그 제각기의 표정과 분위기를 가진 기와들이

삐뚤빼뚤하는 듯하면서도 제법 정연하게 늘어서서 풍겨내는 그 느낌이란 건 참. 틈새 하나 벌어지지 않고

기왓장 한장한장 반짝거리며 단정한 검은색을 뽐내는 새로 올린 기와지붕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람 냄새 나는 흐트러짐과 깨어짐. 얼마나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저 기와지붕은 표정이 있었다.

 

좀처럼 돌아나오기 아쉬웠던 가옥. 아마 집 주인이신 듯한 분께선 왜 이 쪽만 계속 사진을 찍냐고, 새로

기와를 올린 다른 쪽도 좀 보고 그러냐고 하시며, 며칠 전에 다녀간 건축학과 학생들도 이 건물만 죽어라

사진을 찍어대더라며 은근히 뿌듯해 하셨다. 그 건축학도들이 봤던 건 뭘까. 내가 본 건, 건물의 표정.

나팔꽃을 푸짐하게도 얹고 있던 돌담에 자전거 두대의 무게까지 얹혔다. '슬로우시티'라는 인증마크 없이도,

나른하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게 딱 어울리는 풍경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지 못할, 박물관이나 민속촌 같은 느낌도 절대 아니었다. 품위있게 올라간 기와지붕이나

재래의 냄새 가득한 초가지붕만 있던 게 아니라 잔뜩 삭아버린 슬레이트 지붕도 한쪽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고,

지금도 이곳에선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흔적과 냄새가 여기저기서 남아있었다. 그 흔들림없는

증거로 이렇게, 사람들이 더께를 밀어내고 씻어내는 목욕탕에서 여전히 뜨거운 김이 펄펄 오르고 있던 거다.

마을의 구석구석 풍경들. 어느 골목에선가 뜬금없이 조우한 저 석상은, 원래 커다란 무덤을 지키는 문신상

무신상 뭐 이런 거 아닌가. 덜렁 혼자 남아서 파란 하늘을 이고 있었다.

 

기왓장 위의 고양이, 시멘트담벼락을 거칠하게 기어오른 나팔꽃, 멀찍이 보이는 (여기도 예외없는) 교회

첨탑만큼이나 뾰족뾰족하게 선 녹슨 철문.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주기도 한다는데, 걷는 것도 좋지만 자전거로 슬슬 다니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 사이 목욕탕 남탕 문이 열렸다. 돌담길 옆 나무가 Y자 모양으로 가지를 벌렸다.

 

누렇게 녹슨 형광등 갓이라거나, 문짝을 걷어올려 걸어둘 수 있는 새모양 등자,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둥이며 마룻바닥이라거나. 게다가 담쟁이덩굴이 온통 건물 벽을 따라 기어올라 처마까지 매달린 이런 집,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맘이 물씬 드는 곳이었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 그리고 마당 앞 귀퉁이에서 피어있는 별모양의 이름모를 꽃,

그리고 고랭지배추 꼬갱이같이 찌글찌글 얄포름한 호박꽃잎하며, 의외의 곳에서 만나는 의외로 어울리는

영단어들, LETTERS.

다음에 이곳에 오게 되면 꼭 한옥 민박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골 할아버지댁같은 느낌이면서도

아기자기한 풍경이라거나 둥글둥글하게 깍이고 다듬어진 사물의 모서리들이 넘 좋은 거다. 게다가

활짝 열린 문이 겸연쩍었던 듯 얼기설기 낡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둥 마는 둥 해둔 저런 제스쳐까지.

눈길 함부로 밟지 말라고 했던가, 갓 부어놓은 시멘트길도 역시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되겠단 걸 보여주는 사진.

저 멀리 마을 입구까지 이어지는 저벅대는 발걸음이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할머니였을까, 무슨 급한

일이 있던 건 아닐까, 손주 녀석이 소식도 없이 내려온 건가.

아직은 신선한 노랑빛이 반짝거리는 논, 좀더 햇살을 먹고 가을바람에 다독여지면 한층 가라앉아 무겁고도

차분한 누런 빛깔을 띄게 될 거다. 논두렁길을 따라 걸어 나오며, 비로소 삼지천마을의 마법같은 시간의

흐름에서 차츰 벗어나는 걸 느꼈다. 조금씩 빨라지는 초침 소리.




 


전주한옥마을,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 중의 하나는 '경기전'. 마치 덕수궁 돌담길이

하염없이 이어진 듯 보이는 이 길을 걸었다. 날씨가 워낙 추워서 사람들이 얼마 보이지 않았고

저만치 앞에서는 혼자 온 듯한 외국인 관광객이 새하얀 얼굴이 빨개진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왠지 이런 날 이렇게 마주치면 웃음부터 주고받게 되는 거다.

길바닥이 온통 반짝반짝하게 얼어붙었다. 경기전 내부로 들어와서도 바로 옆 전동성당의

멋진 풍모는 가려지질 않는 게 묘한 느낌이다. 조선시대 한옥 마을과 고풍스런 성당이

한 장면에 담기다니, 어디선가 유생들이 '야소'귀신 물러가라며 뛰쳐나올 법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법 이쁜 그림이 된 거 같다. 시간이 쌓여 공자귀신과 야소귀신도 화해를 한 건가.

그리 높지 않은 한옥이지만 오르락내리락하는 처마의 윤곽선을 눈으로 더듬다보니 뭐랄까,

리듬을 타는 기분마저 느껴졌다. 야트막한 담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은 이 곳 경기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식을 만들고, 떡을 찌고, 제기를 보관하는 등 온통 제사를 위해

마련된 건물들이니 그런 기분은 조금 안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영정)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이라고 한다. 대략 500년 전에

그려진 이성계의 초상화를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노릇을 하면서 바라보고 기리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할아버지의 얼굴을 익혔을 거라고 생각하니 나름 절실하기도 했겠지 싶다. 사진도

없고, 딱히 그 이미지를 남겨둘 방법이라고는 그림밖에 없을 텐데 그걸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


그렇게 1410년, 태종때 처음 지어져서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이래 이 곳의 중요성은 계속

높아지기만 한 거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네 곳의 사고 중 하나인 '전주사고'도 여기에

있으니 꽤나 중요한 공간인 거다. 게다가 전주이씨와 경주김씨의 시조묘까지 있다고.

기와지붕위로 나뭇가지들이 살얼음처럼 번져나간 풍경. 잎새 한두장이 남아서 더욱 추워보인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된 건물, 내부를 찍거나 영정 자체를 찍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니

슬몃 카메라를 돌려 모퉁이 사진이나 찍을 수 밖에. 깨끗하게 칠해진 단청이 선명하다.

영정이 모셔진 경기전 내부 깊숙한 건물로 들어서는 가운뎃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다.

이름도 '신도', 아마도 이성계를 위시한 조선왕조의 이씨 혈족들, 그들의 영혼만이 다닐 수

있는 영혼길인 셈. 아쉬웠던 건 가운뎃길도 그렇지만 주변 길도 좀 정비 좀 잘 해두었으면

어땠을까 싶도록 삐뚤빼뚤 들쭉날쭉하던 바닥돌들의 배열이었다.

아마도 '전주사고' 건물을 복원이나 수리 중인 듯한 곳, 홍살문의 살들이 무언가에 잔뜩

치이기라도 한 듯 삐뚤빼뚤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부디 '잘 보존된 우리문화'로

이 곳이 좀더 정비되면 좋을 거 같다.

햇볕은 좋았지만, 꽁꽁 언 바닥에서 튕겨나오는 햇살들이 눈을 찔러대던 겨울날의 아침나절.

톡톡 튀어나온 문짝의 장식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눈에 바깥세상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이런 걸 솟을대문이라고 하던가.  차곡차곡 늘어지던 담벼락이 어느 한 곳에서 불쑥 튀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슈퍼마리오가 머리로 벽돌을 찧을 때 저런 느낌이었는데. ㅋ

한옥마을같은데 가면 꼭 궁금하게 만들던 이것의 정체, 이건 바로...굴뚝이었다. 기와집

앞마당에 불뚝불뚝 솟아있는 조그마한 탑같이 생긴 이곳에서 김이 펄펄 올랐던 걸까.

밑에서 올려볼 때는 꽤나 커보였지만 실제로는 저런 조그마한 쓰레기통 크기, 소복하니 눈을

덮은 채 정갈한 담벼락에 기대 선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따뜻해 보인다.


경기전은 어진박물관을 깊숙이에 품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비롯해 다른 조선왕들의

어진을 모아둔 박물관. 어진들은 모두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눈으로만 담았고, 한양에서

이곳으로 이성계의 어진이 옮겨지던 당시의 행렬을 재현한 모습은 파노라마로. 세 면에 걸쳐

구비구비 늘어선 아이들을 한 화면에 평면으로 구겨넣다니 역시 신기하다.

어진박물관을 나와,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신기한

곳을 발견했다. 우물인데, 온통 담벼락으로 둘려진 채 작지만 잘 갖춰진 솟을대문까지 있다.

여기에서 퍼올린 물로 제사밥도 짓고 떡도 찌고, 여하간 음식을 준비하는데 전적으로

쓰였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경기전 내부에서 보이는 전동성당의 뾰족하고 둥근 외양. 기와지붕 틈틈이 소복하니 나려든

하얀 눈뭉치들도 소담스럽고, 희끗희끗 눈이 얼어붙은 바닥도 (미끄러워 위험하지만) 정겹다.

아까 함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경기전 바깥 돌담길을 걸었던 외국인 여행객이 슬쩍

사진에 잡혔다. 웃음만 주고 받던 우리는 슬쩍 방향을 틀어 각자의 길을 걸었는데 어느새

내 카메라에 잡혔던 걸까. 이제서야 발견하고 새삼 반갑다는.

아무래도 이 곳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모셔진 건 국가적인 차원의 의미라기보다는 혈족

혹은 씨족 차원의 의미가 더 부여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경기전 출입문 단청에 온통 적혀있는

복(福)자와 희(喜)자를 보면 그렇다. 나라를 연 건국시조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예우, 그리고 그 후손에 대한 복과 기쁨을 비는 커다란 사당 같은 느낌이랄까.

돌아나오는 길, 사실은 좀더 있고 싶었는데 손도 곱고 다리도 시렵고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서 도망치듯 돌아나와야 했다. 온통 하얗고 차갑게 얼어붙은 공간에서도 홀로 파랗게

섰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아, 이래서 옛 선비들이 그렇게도 소나무를 좋아했구나 싶다.

그랬는데 어라, 돌아나오는 길에 나무 한그루, 등저리에 온통 이끼를 안고 서 있었다.

겨울이라 파란 게 소나무만이 아니라 저런 선태식물, 이끼도 있는데 옛 선비들은 역시

가오를 따졌던 것인가 싶어졌다. 아무래도 이끼보다는 소나무의 덕을 칭송하는 게

보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으니, 인지상정이겠다.

다음에는 좀더 화사한 계절에 다시 한번 오고 싶어졌다. 어딘가를 가서 제대로 그 모습을

보려면 최소한 일년에 네 번, 사계절의 모습은 모두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요새들어 정말

그 말이 맞다 싶을 때가 있다. 봄의 경기전, 여름의 경기전, 가을의 경기전이 궁금해졌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가다가 청담역에서 내렸다. 무심하게 플랫폼을 밟고 계단을 향하는데,

문득 시선이 간 반대편 쪽에 전철이 문이 활짝 열린 채 뭔가가 바글바글한 거다. 그냥 잠시

정차해 있는 지하철이겠거니 했는데 다시 출발하지도 않고 그냥 계속 잠잠하다.


그러고 보니 양파자루도 보이고, 노랑 플라스틱 박스도 보이고, 어라 저게 뭐지.

궁금증을 못 참고 슬쩍 객차 안으로 들어갔더니 이건 무슨 마을 장터다. 손님들이 앉았던

의자는 박스들을 쌓아두는 간이창고로 바뀌었고, 서서 손잡이를 잡고 있어야 할 위치에는

오이니 양배추니, 채소들이 진열된 채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 제법 사람도 복작한 게

너무 재미있는 거다.

아예 저렇게 커다란 현수막도 내걸고, 냉장고도 들여놓고 본격적으로 장사하는 분들을

보니까 이게 한두번으로 끝나는 일회성 행사는 아닌 듯 싶다. 아는 분들은 알음알음해서

퇴근길이나 어디 다녀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내리기 전 두손을 무겁게 해서 전철역을

나설 것만 같다. 그동안 전혀 몰랐던 지하철 마을 장터, 주변분들은 애용하시면 좋을 듯.







안동 가일마을 앞머리 300년 묵은 나무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원래 마을마다 오랜 나무 하나쯤

소중히 여기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 정도로 생각하는 일이야 왕왕 있다지만, 그리고 300년쯤

나이먹은 나무가 그렇게 아주 희귀한 건 아니라지만, 정작 이 나무에는 용이 꿈틀거리는 문신이

그려져 있었던 거다.

나무 자체의 모양새도 위풍당당하니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수형이 눈에 들어온 건 한참동안이나 굵은 가지 두 곳에 그려진 그림을 훑어본 다음이었다.

노랑색 몸통에 파란 갈기를 가진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치솟는 그림이 마치 조폭들

등짝에 그려진 문신처럼 살짝 으스스하기도 하고, 굉장히 멋져보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 나무가 이렇게 멋져 보이는 건 이 용그림, 타투를 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나무 거죽이 벗겨져 매끈하게 드러난 속살이 자칫 밋밋하고 부족해 보일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그 빈 공간을 화려한 색감의 그림으로 채워넣고 나니까 오히려 더욱 당당해진 느낌.

안동 가일마을, 이 마을에는 조선 정조 때 권씨 가문이 지은 수곡고택 등 오랜 고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양반마을 안동'의 분위기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이런 멋진 마을 지킴이

나무를 갖고 있으니 아무래도 다른 마을들보다 훨씬 외부의 나쁘고 삿된 것들로부터 잘 버티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 안동 가일마을.






어둠에 짙게 깔린 주펀의 길거리, 이번엔 내리막을 따라 내려오던 그 길에서 문득 고양이 한마리를 만났다.

길에 면한 풀숲 사이에서 시원해 보이는 돌판을 돌침대 삼아, 역시나 쿨쿨 자고 있던 녀석.

고지대에서 내려다본 타이완의 동북부 지역의 해안선. 타이완은 커다랗고 토실해서 먹음직스런 고구마처럼

생긴 섬인데, 이렇게 한쪽 끝 바다를 보았다.

낮에 햇살이 지글거리던 때 들렀던 사당에도 다시 들러보고. 뭔가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중앙에서부터 강렬하게

쏟아져내려 주변의 불그죽죽한 빛깔을 전부 탈색시키는 느낌에 되려 섬뜩하기도 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방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이 정겹다. 아마 이곳이 금광촌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에도

일확천금의 꿈을 바라던 사람들이 저런 곳에서 하루를 마감하며 내일을 기대했겠지.

슬슬 인적이 끊겨가는 산비탈의 작은 마을, 관광객이나 여행자들이 떠난 자리에 가로등 불빛만 남았다.

더이상의 촬영은 무리, 완전 깜깜해져 버려서 불빛들이 너울대다 픽, 하고 꺼져버릴 듯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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