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의 마지막날, 싱가폴은 이미 한달 가까이 인도네시아로부터 불어온 헤이즈(Haze)로 고생하던 중이었다.


헤이즈란 인도네시아에서 경작지를 마련하기 위해 울창한 숲을 대량으로 태우면서 발생하는 희뿌연 연기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왠지 어디선가 캠프화이어를 하는 느낌이 확 들었던 것.


중국에서 비롯한 화학물질로 그득한 황사에 혹독하게 단련된 한국인이니만치 나무들을 태우는 거니까 딱히 건강에


안 좋을까 싶기도 했고, 나름 나무 타는 냄새가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했지만. 시내 중심가까지 나오면서 


택시 기사님이 해준 말로는, 공기중 미세먼지가 많아지면서 실제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심지어 


휴교령을 내리기도 했단다.


오전 아홉시 열시 어간의 싱가포르강변 풍경. 아닌게 아니라 생각보다 무지 살풍경하다. 출근중인 사람들은 두명 건너


한사람 꼴로 마스크를 쓰고 움직이는 중이고. 



이런 헤이즈는 저번주말 싱가폴에서 돌아올 떄까지 계속 됐는데, 중간에 천둥번개가 치는 큰 비에도 좀체 걷히지가


않아서 한국의 파란 하늘이 꽤나 그립더라. 날씨라거나 하늘의 표정이 사람 맘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장면 #1.

강호순이 현장검증을 다니며 여기저기 야산에서 살인과 매장을 재연할 때마다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렸다.

'동네주민'이라고 소개되는 이들은 한결같이 사람이 어찌 저럴 수 있느냐, 사형시켜야 한다 등등 극한 언사와

폭언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저게 인간이야?!", "저 XX한테 인권이 어딨어?!", "마스크를 왜 씌우냐고!!"

수백명의 강호순'갤러리'들이 그의 범죄 현장을 따라다니며 혀를 끌끌 차대고 고래고래 욕해대기에 바빴다.


마치 팬클럽처럼 졸졸졸. 스트레스 제대로 풀 화풀이감 하나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장면 #2.

대중을 끊임없이 자극시켜, 행여나 그 날선 분노와 눈먼 증오가 무뎌질까봐 두려운 기자들은 오늘도 이런 기사를

쓴다. 강호순, 유치장서 코까지 골며 잘 자고 잘 먹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02/2009020200054.html)

현장검증을 하는 강호순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방송멘트는 으레 이렇게 시작된다. 희대의 연쇄살인범

강호순은 살인행각을 별다른 동요없이 태연히 재연했습니다, 이틀째인 오늘도 태연히 재연했습니다, 대체로

무덤덤한 표정으로...망설임없이...(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278278_2687.html)


대체 강호순이 어떤 표정과 태도를 보이면 만족할지 궁금하다. 직접 손으로 찢어발기지 못해서 아쉬운가.


장면 #3.(고백)

어렸을 적 나를 놀래키고 겁먹게 했던 배가 빨간 독개구리, 셀수없이 많은 발을 꼬물딱대던 지네, 그리고

새까맣고 반들거리는 눈에 분홍색꼬리를 가진 쥐를 '말살'시키면서 어떠한 쾌감을 느꼈는지 고백한다.

*                          *                          *

마스크를 벗겨야 하네 어쩌네 말이 많았다. 그 와중에 법질서 수호를 걸핏하면 핏대높여 외치던 조선과 중앙이

가장 먼저 '공익'을 위한답시고 마스크를 벗겨냈다. 그리고 사람들의 흥분한 욕지거리와 삿대질,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느껴지는 광기는 점점 짙어지는 것 같다. 집단적인 폭행을 가하고, 멸시하며, 침을 뱉고 돌을 던진다.

그리고 언론은 그런 비이성적인 흥분과 감정과잉의 상태를 부추기고 보도하며 보도하고 부추긴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라는 탄식. 그건 위선일지 모른다. 사람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런 사람도 있구나, 라고

자신은 어떤지 돌아보지는 않더라도-'너희 중 죄없는 사람만이 돌을 던지라'는 가르침을 주는 어느 종교가

성행하고 있으니 기대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굳이 사이코패스니 뭐니 나와는 다르다는 부적들로 덕지덕지

분리시키고 격리시키는 건 왜라고 생각하는가.


다르다고 항변할 수 있다면, 지금 이렇게 사냥감의 목덜미를 한번 물면 놓을줄 모르는 충성스런 사냥견같이

강호순에 극악스럽게 달려들고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는 당신들은. 피냄새를 맡고 온 건 아닌지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신들이 발가벗겨진 그보다 훨씬 선하며 인간답다는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는

마치 말못하는 못생긴 짐승과도 같은 그에 비해 압도적인 힘의 쾌감을 은근히 만끽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어쩌면 그건 강호순이 다른 여자들을 죽이면서 얻었던 쾌감과도 같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내가 어렸을 적

혐오스런 생명들을 짓밟으면서 느꼈던 잔인한 희열과는 분명히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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