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이곳에 존재했음을 실감하는 데에는 East Side Gallery과 The Wall Museum을 무엇보다 추천하고 싶지만,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 구역을 보려면 베를린 장벽 메모리얼을 둘러보는 것도 추천함직 하다.


앙상하고 얄포름한 콘크리트 장벽의 골간이 되었던 철근만 뾰족하니 남아있는 그 곳에는 과거 이 장벽을 넘기위해 애썼던 사람들의 순간들이 주변 건물 벽화로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인근의 불타버린 성당 자리에 새롭게 꾸며진 자연친화적인 공간에서는 이 곳에서 흩뿌려진 피와 희생에 대해 묵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미니멀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회상하거나 추억하는 듯 했다.



어느덧 3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역사, 뜯어낸 장벽을 둘러싼 울창한 초록빛 식물들의 생명력이 왕성하다.


메모리얼에 들어가면 실제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며 사람들의 이탈과 움직임을 막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내부까지 둘러보진 못했고 그저 바깥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



 

포항 호미곶,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이 곳을 가본 사람이던 안 가본 사람이던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바로 이렇게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커다란 손의 형상. 갈매기들이 쉬어 가는 다섯 개의 봉우리이기도 하다.

 

 

사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보다 작아 보일 수도, 혹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이 청동 조각상은 '상생의 손'이라는 이름으로

 

새천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99년 12월에 완공된 상생의 손,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로,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 이렇게 두 손이 함께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 손이 육지에도

 

하나 더 있다는 사실. 처음 알았다.

 

 

 

성화대에 있는 화반은 해와 달을 의미하고, 두 개의 원형고리는 화합을 의미한다던가.

 

바다에 있는 오른손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진 육지의 왼손. 그 앞에는 독도 일출과 피지의 일출에서 얻어온 불씨가

 

2000년 1월 1일 이래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본 왼손과 오른손, 상생하라는 두 개의 손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공을 쥐고 있는 듯

 

살짝 움켜쥔 모양새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호미곶에 와서야 알게 된 손 조각상의 진실이랄까.

 

호미곶에 도착하면 딱 보이는 꽃마차들. 말갈기를 쉼없이 희롱하고 있던, 제법 쌀쌀한 바닷바람에도 말들은 꿈쩍없었다.

 

상생의 왼손을 에둘러 바다쪽으로 훅 들어가는 전망대. 바다 쪽에서 육지를 배경으로,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시야를 가리는

 

갈매기들 틈새로 상생의 오른손을 볼 수 있다.

 

 

전망대 걸어들어가는 길에 한번씩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거대 문어상. 포항이 문어로도 유명한 데다 심지어 문어축제도 있다는 사실.

 

 

더이상 나갈 곳 없는 전망대의 끝단에 서면 정확히 동쪽을 가리키고 선 꼬마 아이의 동상이 있고, 호미곶의 위치가 잡혀 있는

 

한반도 지도와 나침반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분분히 날아다니며 상생의 손을 향한 시야를 여지없이 가리는 정신사나운 갈매기들. 사람들이 자꾸 과자를 던져댄 탓이다.

 

이쪽에서 보이는 상생의 오른손 측면샷. 아무래도 육지의 왼손보다 크기도 크거니와 그림도 훨씬 이쁘게 잡힌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서, 미처 보지 못했던 가로등에 눈길이 간다. 포효하는 호랑이 형태의 한반도가 장식된 가로등이다.

 

같은 형태로 동해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상 , 검고 노란 줄무늬가 선연하던 가로등 호랑이와는 달리 흰색과 하늘색의 줄무늬를 가졌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둥싯 떠있는 하얀 달을 움켜쥐려는 듯 내뻗은 육지의 왼손상.

 

 

광장에는 지난 새천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전국 최대의 가마솥이라거나 각종 기념물들. 그 와중에 수쳔년 전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기념한 기념탑이 하나 숨바꼭질중.

 

 

새천년 기념관 전망대로 가는 길은 엘레베이터와 계단. 계단으로 갔더니 대충 4층에서 5층 정도 높이가 되는 거 같다.

 

 

옆에 나란히 선 풍력발전기 한 대. 시험삼아 돌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뭔가 효성의 광고판 같아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바닷바람이 매우 세게 몰아치기는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얼레를 하나씩 손에 쥐고 연을 날리고 있었고,

 

호미곶에 갓 도착한 아이들은 일단 부모손을 끌고 연 하나씩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으니. 그나저나 바닷가의 소도시답게,

 

혹은 바닷가의 명소답게 저런 연들을 담은 종이박스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잡힌다. 돌자반.

 

 

 

 





@ 도쿄, 에비스.


일본의 칠복신 중 한 명이라는 에비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에비스(EVISU)라는 맥주,

그 맥주 공장의 이름을 따서 에비스라는 동네가 생기고, 에비스 역도 생기고.


앞으로 세계의 맥주공장 견학을 다녀야겠다, 는 다짐을 하게 됐다. 아무래도 맥주는 맥주공장의 시음장에서

맛보는 게 최고인 듯.





쑨원을 기념하는 국부기념관은 몇 걸음 안 떨어져 타이베이101 빌딩과 함께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슬쩍 치켜

올라간 기와가 위풍당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의 느낌이 더욱 짙은 지라 그렇게

인상적인 건물은 아니었다. 조금 거뭇거뭇해진 시멘트 외장이 남루해 보이기도 했고, 벌써부터 약간 퇴락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쑨원, 열 번에 가까운 혁명을 시도하고 결국 성공시켜 낸, 철학과 실천력을 겸비했던 사람이다. 1911년 신해혁명의

결과 중국 대륙의 '앙시앙레짐'이 무너지고 비로소 근대적인 정치형태가 실험되기에 이르렀지만, 자력으로는

도저히 혁명을 완수할 수 없었던 그는 위안스카이와 같은 군벌의 힘을 업고 말아 이후의 혼란을 자초하기도.


어쨌든 대만, 타이완의 건국 시점은 신해혁명으로부터 기산한다. 올해는 그래서 중화민국(中華民國) 99년.

2010년이란 서력보다 민국99년이란 표기가 더욱 흔하게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쑨원의 자그마한 동상들보다 더욱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 뒤의 반짝거리는 검정 대리석 앞에서 뭔가

뒤를 돌아선 채 연습하고 있던 아이들.

쑨원의 필적이나 그를 기리는 다른 사람들의 필적을 새겨둔 것 같은 검정대리석들이 쭉 이어져 있었고,

아이들은 거울처럼 말갛고 반짝거리는 그 대리석 앞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 이 '국부기념관이 외국인

혹은 관광객에게야 눈도장찍는 장소겠지만, 이들에게는 그저 동네 공원, 춤연습하기 좋은 장소인 게다.

국부기념관 앞의 잘 꾸며진 정원 너머로 보이는 타이페이101.

국부기념관의 정문,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듯한 처마가 슬쩍 쳐들려진 정문.

꺼뭇꺼뭇한 뭔가가 하늘에서 걸리적댄다 싶더니, 박쥐처럼 생긴 연이었다.

높은 좌대 위에 거대한 의자 위에 앉아있는 쑨원, 뭔가 명문이 금빛 글씨로 새겨져 있었는데 저렇게 거리를

멀쩍이 떨어뜨려두고 어떻게 읽으란 이야기인지. 그냥 데코레이션이겠거니 했다.

쑨원의 산민주의를 소개하고 있던 국부기념관 내부의 홀. 민족(자유), 민권(평등), 민생(박애). 그가 이런 기치를

들고 신해혁명에 성공한지 99년이 지났지만, 얼마나 성취했는지 답하기란 참 어려운 것들이다. 뭔가 수치화될

수 있는 것들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개념도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얼마만큼 진척되었다고
해서 아 이제 됐어, 충분해,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가치들도 아니니까.

국부기념관  처마 아래에서도 아이들의 댄스 열정은 뜨겁게 타올랐다. 시멘트 벽면과 두툼한 기둥에서 내뿜는

냉기와 머리 위 지붕 덕택에 시원한 공간에서 꿈틀대는 뜨거운 열정들.

국부기념관 정문 앞 바닥에 그려진 방위표. 중샤오동루(충효동로), 이름 참. 이런 식의 유교적 가치들이 여전히

길이름 위에, 지하철 역이름 위에 유령처럼 서성이고 있으면 쑨원이 말했던 삼민의 가치가 오히려 훼손되는

건 아닐까. 국가에 대한 충성, 가족(가부장)에 대한 효심, 그런 식으로 조직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소속감을

강조하는 것, 가뜩이나 개인이 제대로 서지 못한 동양적 풍토에서 조금은 절연해 두어야 할 가치들 아닐지 싶은데.

어느 순간 시원하게 내뻗기 시작한 분수. 그너머 타이페이101, 국부기념관 정문 돌계단에 걸터앉아 바라보이는

타이페이 시내의 풍경.





타이완의 '국부' 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한 중정기념당의 메인 건물은 바로 요것, 커다란 팔각 정자처럼 생긴

하얀색 대리석 건물이다. 그렇지만 그 양쪽에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위풍당당한 콘서트홀과 공연장이 버티고

섰을 뿐 아니라 입구참엔 그럴듯한 정문이 서 있어서 조금은 위축되어 보이기도 한다.

우선 이게 중정기념당에 들어서는 입구, 현판에는 '자유광장'이라고 쓰여 있다. 천수이볜 전 총통이 몇년 전

대만에서의 최초 평화적인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고 나서 시행했던 일종의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애초 '중정기념당'이라던가 '장개석광장'이라던가, 적혀 있던 현판을 내리고 '자유광장'으로 개명했다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보다보니, 다른 일반적인 한자 현판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히기 마련인데 이 현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다는 점이 뭔가 생뚱한 느낌을 주고 있던 것이었다.

중정기념당에 올라 돌아보면 양쪽에 커다란 건물 두 채가 버티고 섰고, 잘 꾸며진 정원과 제법 큰 '자유공원'의

앞마당이 보이는 거다.

양쪽 건물은 거의 비슷해 보이면서도 사실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다. 한쪽 건물은 음악당, 콘서트나 연주회가
 
열리는 공간이라고 한다.

중정기념당을 에워싼 건물 유리벽에 비치는 으리으리한 처마의 그림자.

또 하나의 건물은 오페라니 뮤지컬이니, 그런 공연을 위한 공간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양산을 하도 많이 쓰고 다녀서, 가끔은 비가 오는 게 아닌가 하고 헷갈리기도 했다. 특히 지하철을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올 때, 사람들이 지하철역 입구에서 일제히 양산을 펼치는 장면을 보고 비가 오는가 싶어

당황했던 기억.

북경 자금성에 갔을 때도 그렇고, 서울의 궁들을 돌아볼 때도 그랬지만 왕이나 황제를 위한 주된 건물의 가운데

길은 아무나 함부로 밟을 수 없게 해 놓았다. 용을 조각해 두거나 여기처럼 이렇게 커다란 태양을 조각해두어

정면으로 바로 걸어들어올 수 없게 만든 거다.


저 태양 문양은 타이완의 국기인 '청천백일기'에 등장하는 그것과 같다. 파란 하늘의 하얀 태양. 그리고 땅에는

시뻘건 피가 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타이완의 청천백일기.

생각보다 계단은 높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양옆 금빛 건물에 다소 눌려보인다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크기도 생각보다 많이 크고 높기도 높다. 고궁박물관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무늬의 하얀 계단 기둥들에

난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문득 나타난 꺼뭇한 동굴 안, 뭔가가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 하얗고 강렬한 태양에 길들었던 시야가 좀체 내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 슬리퍼 신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표지만 크게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쪼리는

슬리퍼랑 다르니까, 라 스스로 정당화하며 동굴 속으로.

중정기념당의 천장, 바깥에서처럼 하얀 태양이 내리쬐이고 있었다.

이 아저씨가 장개석, 혹은 장제스, 혹은 중정. 일제와 맞서 싸우기보다 공산당을 먼저 패퇴시키겠다면서도

부정부패를 방관하여 민심을 잃고 급기야 중국대륙을 잃어버린, 타이완까지 쫓겨들어와 권위적 독재체제를

십여년간 구축한 인물. 20세기 초중반의 격변기를 지나면서 개인적으로야 참 극적인 삶을 살았겠지만, 대부분

피식민지의 처지에 있던 지역들의 정치지도자들의 궤적과 딱히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이승만처럼.

그에 대해 타이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우리나라랑 비슷하게 천수이볜의 집권 몇년동안 심각한

내부갈등과 정치적 지향논쟁이 있었던 만큼, 이제 '반공'과 '친미'를 국시로 삼던 이 나라도 조금씩 과거사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을지 모른다. '국부'라는 모호하고 위압적인 칭호 뒤에 가려진

사실들을 발굴해 내고,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 싶다. 더구나

남북 관계와는 달리 중국과 대만간의 양안 관계는 천천히, 그렇지만 확고한 우호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으니

어쩜 우리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다.

중정의 커다란 동상을 지키고 있는 병정놀이 중인 군인. 워싱턴의 링컨도 그렇고, 타이페이의 장개석도 그렇고

다들 너무 크다. 그들은 너무 크고 으리으리한 건물 한 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거다. 게다가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들, 이런 호두까기 인형같은 병정들과 반짝이며

내려꽂히는 후광같은 조명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고 차가운 질감의 대리석, 기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뱉게 만드는 그 공간의 깊은 침묵과 아스라한 공명 소리까지. 아, 양쪽으로 거대한 국기를 둘둘 말고 있는

데코레이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높은 곳에서, 그렇게 커다란 몸집을 하고, 주위의 온갖 것들이 다 당신만을 떠받드는 공간에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니 참 좋겠수. 그냥, 그런 정치인들의 거대한 동상들이 조금은 눈높이를 맞추고

소탈하게 내려와 있으면 안 될까 싶어서 괜히 장개석에게 툴툴거려 보는 거다.

돌아나오는 길, 현판까지 대리석인가 보다. 햇살이 내리쬐이자 거울처럼 말갛게 빛나며 처마끝을 반사시켰다.

왠지 씁쓸했던 거대 건축물. 누군가를 높이고 금칠하기 위한 기색이 너무 역력해 보였다. 그가 실제로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지 아닌지를 차치하고라도, 그냥 누군가를 그렇게 추앙하고 떠받드는 것 자체가 불편했던
 
거다. 장개석=타이완=국가=숭배의 대상, 따위 그가 의도했을 도식이 거칠게 머릿속에 막 떠올랐다.

장개석은 '신생활운동'을 전개해 국민들에게 유교적 가치를 보급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일종의 새마을운동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인지 이 '중정기념당'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문들은 대효(大孝), 대충(大忠) 따위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타이완 거리에는 지금도 여전히 '신의信義로', '인애仁愛로', 심지어, '애국愛國로'같은

지명도 있어서 완전 경악하고 말았었다. 손발이 오글오글.

그들이 이공간을 어떤 의도로 기획했던 간에, 타이완을 어떤 국가로 구상했던 간에, 젊은이들은 모여서 춤추고

웃는다. 뭔가 수화로 된 공연을 연습중인지 손으로 수인을 짚거나 쉼없는 제스쳐를 펼쳐보이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단청과 처마의 기울어짐에 대해서는 중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 때 몇 가지 지문들을

읽으며 가늠할 수 있게 된 거 같은데, 정말이지 딱딱한 녀석들이다. 살짝 올라가려다 말았다는 느낌.

경직된 그만큼 완고해 보이기도 하고, 강건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뭔가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겠다는

결기가 꽉 차 보이는 거다.

돌아나오는 길, 아까는 없었는데 음악당 옆에서 붉은 기를 휘두르며 깃발춤을 연마중인 아이들이 보였다.

묘하게도 펄럭이는 붉은 기를 보면 일단 가슴부터 뛰고 만다. 우와..멋지다 이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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