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싱가폴이 건국한지 50년이어선지 거리 곳곳에서 'SG50'이라는 로고와 함께 각종 현수막들을 볼 수가 있다.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에서 놀다가 나와보니 바로 옆에 저런 현수막으로 온통 시선을 끌고 있는 '싱가폴 시티 갤러리'


라는 곳이 있길래 덥썩 들어가봤다.


뭔가 큰 기대는 없이 그냥 싱가폴에서 운영하는 관제 느낌 물씬한 도시 홍보관이겠거니 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이렇게 도시에 대한 조감이 가능한 모형이라거나 곳곳에서 찍은 이쁜 사진들, 싱가폴이 어떤 곳인지 등등


뻔하디 뻔한 구성은 피할 수 없었지만, 도시국가로서의 싱가포리안들이 가진 고민이 얼마나 깊고 진지한지 보여줬달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한된 도시부지을 어떤 비율로 각각 녹색공간으로, 상업공간으로, 그리고 주거공간으로


할당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도시국가로 20%가량의 부지를 군시설에 할당하고 나머지와의 연계를 어떻게 이룰지에


대한 고민. 간척사업으로 땅을 넓히고 재개발로 초고층 빌딩을 세우는 등 가능한 효율적으로 땅을 사용하려는 고민.


그러다 보니 입체적으로 땅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들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나라나 지역에서도 유례가 없을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거다.


그리고 싱가폴 남단에 있었던 트레일 코스, 마운트 페이버 파크에서부터 주욱 이어지는 그 길을 따라 이렇게 


녹색으로 표시가 어김없이 되어 있는 것도 재미있었던 포인트. 



혹시 도시이자 국가이자 한개의 주로서 기능하고 있는 유별난 싱가폴의 도시계획이라거나 그 실행에 대해서


호기심이 인다면 한번 꼭 들러봐도 좋을 곳. 온갖 도면과 모형들, 그리고 게임 형태로 된 시청각 자료들은 덤이다.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눈이 뜨이고 나니 온몸이 아팠지만, 뒷꿈치는 얼얼함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나섰다. 천부항의 아침.

 

 

바다를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현포를 지나 태하등대까지 가볼까 하는 참이었다. 울릉도의 북쪽 해변가를 따라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에어콘 바람같은 시원한 강풍이 불어오는 쉼터가 있길래 일단 쉬고 보겠다며 엉덩이를 붙였다.

 

 

 

 

조금이라도 일찍 나서길 잘했다 싶었던 게, 날이 삼일 내내 흐리리라던 예보와는 달리 둘째날엔 아침부터 햇볕이 쨍쨍.

 

 

바닷가와 도로를 구획하고 있는 콘크리트 블록이 해풍과 파도에 온통 삭아내려 페인트가 벗겨지고 자갈들이 드러났다.

 

버스 정류장. 제법 띄엄띄엄 눈에 밟히긴 했는데 막상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던 한적한 울릉도.

 

 

울릉도 북쪽 해변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선 송곳산. 그 앞으로는 추산 몽돌해변이 펼쳐지고, 해변 너머 바닷가에는

 

코끼리 바위가 보인다. 툭 튀어나와 몸뚱이랑 떨어져 있는 굵은 기둥 하나가 영락없는 코끼리 코다.

 

 

각도를 달리 해서-한참 더 서쪽으로 걸어가서- 확인한 코끼리 바위의 코끼리 코.

 

 

 

 

 

투명하고 시퍼런 파도가 넘실거리며 둥글둥글한 돌멩이들을 희롱하는 소리에도 아랑곳않고 부동자세중인 새들.

 

그리고 뒷꿈치가 온통 까져버려서 급기야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기 시작한 시점. 그다지 현명한 짓은 아니었던 게,

 

얼마 걷지 못하고 맨발바닥 아래에 물집이 잡혀서 다시 신발을 꿰어차야 했다.

 

 

바다에 이랑을 내고 씨를 뿌리러 갈 기세인 산뜻한 색감의 경운기 한대가 바다에 찰싹 붙어 주차 중이다.

 

그리고, 들어갈까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입장했던 예림원, 문자조각공원. 망설였던 이유는 4,000원의 입장료도 아니고

 

구경온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한적한 분위기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해안도로에서 걸어가려면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꽤나 걸어야 했다는 이유, 게다가 발바닥에 콕콕 박혀오는 잔돌멩이들이 너무 많은 길이었어서.

 

 

 

 

이 바위의 이름은 얼굴바위였던가, 얼굴의 옆 실루엣이 어찌어찌 잘만 따져보면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전망대 아래를 잘 살피면 파도가 철썩이며 부딪히는 전복 바위랑 조개 바위도 찾을 수 있다는데.

 

 

 

 

 

얼굴바위 위까지 이어지는 전망대로 오르는 길. 오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저 높이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궁금해졌다.

 

 

 

 

얼굴바위 위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아침에 꾸역꾸역 걸어온 길. 맨발에 느껴지던 서늘한 콘크리트의 감촉이 서서히

 

달아올라 뜨거워지기에 이른 시간만큼 해가 내달려선 하늘 높이 솟았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이내 도착할 곳, 현포항이 미리 내다보인다. 빨갛고 하얀 등대가 배들을 항구로 이끄는 곳.

 

반듯한 직선에 가까운 도로가 섬세한 물결이 새겨진 에메랄드빛 바다와 싱싱한 초록의 보들보들한 기슭을 가른다.

 

 

 

그리고 전망대에서 발견한 '젖봉' 또는 '찌찌봉'이라 불린다는 제법 리얼한 느낌의 봉우리 하나.

 

 

현포항의 모습을 좀더 바싹 땡겨보고는, 저쯤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구나 가늠해보았다.

 

 

 

정말 향기가 그윽하던, 그리고 한번 손으로 훑고 나니 한참이나 손과 온몸에 향기가 배어있던 섬백리향. 이름도 참 이쁘다.

 

예림원, 특히 예림원 안쪽에 자리한 얼굴바위 전망대는 꼭 한번 올라가 보시길 권하고 싶다.

 

 

 

 

어느 순간까지는, 사랑하던 남녀의 이별, 갑작스레 '차인' 상황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녀, 빵빵하게 부풀었던 질긴 풍선처럼 자신의 세상 구석구석까지 채웠던 그녀가

 

남기고 간 결핍감, 공허감,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현실부정의 몸부림까지. 대체 왜 사라져버린 건지 감도 잡지 못한채

 

그저 몇몇 단서로 더듬거리듯 추측이나 해볼 뿐인 상황에서 남자는 때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비통함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라져버린 여자에 대한 광기어린 분노와 질투, 증오를 폭발시키던 거다.

 

 

살아가면서 맺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게 고작 핸드폰 번호 하나, 이메일 주소 하나 만으로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를 떠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참 쉬운 건지도 모른다. 전화를 꺼버리고 이메일 계정을 삭제한 채

 

커다란 알사탕에 바글바글 꼬여있는 개미떼같은 인간들 틈속으로 슬쩍 스며들면 그뿐이니까. 그렇지만 급속도로 불어난

 

인류의 비대해진 몸집을 전혀 따라잡지 못한 인류의 마음이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남자는 칼처럼 자신을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만 여자를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이제 그녀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어떻게 웃었으며 말할 때 버릇이 뭐였는지, 자신이 알던 그녀가 그녀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믿기지 않는,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현실에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온기를 찾는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잠시일지언정

 

함께 누웠고, 웃었으며, 꿈이 아닌 '레알'로 존재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간과 기억을

 

배반하고 부정하지 않으려는 그 숭고한 의지는 대개의 경우 상대의 싸이나 카톡 사진을 들춰보는 걸로, 술에 취한

 

새벽 두시쯤 전화 한번 해보거나 여차하면 집앞에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로 귀결되기 마련이지만, 영화 속

 

남자는 여자의 뒤를 쫓으며 예기치 않은 어둠의 장막을 들춰보게 된다. 계획된 살인과 본격적인 정체성의 은폐공작.

 

 

스릴러가 풀려가는 방식보다 더욱 재미있었던 건, 그 모든 걸 일종의 메타포로 읽어내렸을 때 남자의 반응이었다.

 

남자는 왜 여자의 뒤를 기를 쓰고 쫓으려 했을까. 남자는 왜 여자의 옛 남편까지 만나보려 했을까. 남자는 대체 왜,

 

기어이 여자를 만나고 껴안고 다시 놓아줬을까. 자신이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랑의 순간들이 그녀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부질없는 조각들로 무화되는 걸 막아내려 필사적이었고, 그렇게 지켜낸 사랑의 이야기(서사)에 나름의 소망이 담긴

 

엔딩을 그려보려 하는 안간힘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는 그녀가 시든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낙화하는 그 순간을 막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내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던 건, 그녀가 끝내 살아남는 것. 자신과 함께 했던 순간들, 마지막으로 마주서서 끌어안았던 순간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은 채 그래도 한조각 가슴에 품고 살아갈 만한 진심을 건네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대 잡히지 말고

 

어디서던 무슨 이름으로 어떤 얼굴로 누구로 살아가던 간에 꼭 살아남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가 했던

 

사랑을 지켜내기를,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랬던 게 남자의 깊숙한 속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여자의 선택은, 코너에까지 몰려버렸다고는 해도, 그의 기대와 소망을 다시금 흔들어버린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그녀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의 '사랑'에 대한 남김없는 배신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건 일종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같은 쿠데타 반란세력, 군대를 뒤집고

정치를 뒤집고 나라를 뒤집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두른 범죄집단의 수괴를 국민의

손으로 처단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혼란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고 그의 지도력, 그의 '조국근대화' 능력, 그의 카리스마, 그의 청렴함,

그의 인간미 따위에 대한 상찬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며 재구성되는 건, 그 독재자와

추종세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이다.


지들끼리의 자리다툼을 벌이다 자중지란에 빠져 붕괴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최소한 눈에 보이는 성과는 이뤄냈던 박정희 도당들보다도 못한 문어대가리 일파들이

다시 그 정권을 찬탈했으니. 제대로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고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더 나쁜 놈이 나타나버렸으니 기억이 왜곡된 건 아닐까. 때리던 놈 다음에 칼로 찌르는

놈이 나타난 셈이랄까. 칼로 찌르던 놈들 두 명은 법정에까지 겨우겨우 세웠다지만,

여전히 때리던 놈에 대해서는 요원한 거다.


박정희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상식, 무조건적인 찬양은 여전히 가실 줄을 모르고

일종의 '신앙화' 경지에서 굳어진지 오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설복시키거나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라지만, 최소한 서로의 인식이

공통의 지평에서 뻗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 몇가지 팩트와 분석자료가 담긴

글들을 공유해 본다.




[심층취재|박정희기념관 파문]
“박정희 개발독재는 시장경제 발전의 암세포”
고려대 경영대학장 이필상 교수 인터뷰 (신동아, 2000.12.01 통권 495 호 (p134 ~ 143))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mairso2@donga.com

”IMF 위기의 씨앗은 바로 개발독재입니다. 박정희전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이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공은 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역사의 형틀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를 쓰러뜨린

책임도 있는 겁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향수엔 그의 경제개발 치적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민주화운동 탄압과 인권 말살 등 피로 얼룩진 독재정권에 대한 비난을 상쇄시켜온, 유일한 또는

최후의 보루 구실을 해왔다.

찬양론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실적을 들이대며 개발독재론을 옹호하고 정당화해왔다.

한마디로 경제발전을 위해선 민주주의 유보가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단기간 초고속성장의 신화를 낳은 개발독재. 그것은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나. 역사의 저울추는

개발독재의 성과와 폐해 중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가. 고려대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겸하고 있는 이필상 교수(53)는 인터뷰에서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고 비판했다.


인터뷰는 11월13일 오전 고려대 경영대학장실에서 진행됐다. ‘재무관리’ ‘관리경제학’ ‘신국제금융’

‘경제정책과 기업활동’ 등 다수의 경제 관련 책을 펴낸 이필상 교수는 그간 인터뷰나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왔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어 혹시 인터뷰 주제가 그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기우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 신화의 허구성


―최근 박정희 전대통령 흉상 철거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동안 꾸준히 진행돼온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기념관 문제를 떠나 흉상철거행위 자체에 대해선

법질서를 들어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싶습니다.


“그 자체는 불법이므로 잘못된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 전대통령의 업적이
 
잘못 해석되고 신화가 돼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흉상 철거행위는) 거기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의사표시 방법은 잘못됐지만 그 뜻을 다함께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박 전대통령의 업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죠. 불법행위로 간주해

무조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념관 건립에 대한 반대여론이 강하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박정희 기념관 논란은 박 전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초부터 박정희 신드롬 또는 박정희 부활현상이 일어났는데, 찬양론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것이 경제치적입니다. 먼저 박 전대통령의 경제업적을 살펴보지요.


“경제가 어렵다보니 사람들이 정신적 돌파구를 찾게 됐는데, 막연히 과거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을

동경하면서 그것을 신화로 삼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박정희 경제신앙으로

굳어졌죠. 그 배경이 뭐냐. 첫째, 우리 민족은 6·25를 거치며 엄청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그 힘들던 보릿고개를 극복했습니다. 초가지붕 개량으로 상징되는

새마을운동, 그것이 후세에 길이 남을 박 전대통령의 업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둘째, 신화창조의 계기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입니다. 당시 건설비용이 1년 국가예산보다 많았습니다.

일본이 주도한 아시아개발기금이 원조하는 자금을 바탕으로 착공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역사였습니다.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끝내 성사시켰는데 그것이 산업발전에 대동맥이 됐죠.

또한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줬습니다.


셋째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저 먹을 거나 제대로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에게 국토는 좁지만 경제영토는 전세계로 무한히 펼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섬유라든가 합판 가발 등을 수출하면서 우리 경제의 잠재력을 일깨운 것이죠.


넷째로, 두드러진 업적은 중화학공업 발전입니다. 60년대 말부터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등

네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했습니다. 과잉·중복투자로 국가 경제를 주름지게 했지만, 기간산업을
 
구축하고 우리 경제가 세계적 경제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죠.”


이교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긍정성을 뛰어넘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는 게 우리 경제의 비극이다.



정경유착과 성장제일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큰 문제는 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 형성입니다. 정통성 없는 독재권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보겠다는 재벌과 불법공생관계를 형성한 것이죠. 권력은 재벌에

각종 인·허가상 특혜를 비롯해 금융·차관·세제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권력과 재벌의 유착이라는 불법구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 정당성 없는 지배계층이 지금까지 사회·경제·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지배구조라는, 역사발전의 큰 걸림돌을 만든 거죠.


그 둘째 병폐는 빈부격차입니다. 무조건 고속성장을 해야 한다, 가난을 탈피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성장제일주의로 나갔거든요. 그것을 위해 정부가 경제를 통제했어요. 통화증발과

관치금융에 의해 인위적으로 돈을 풀어 특정기업에 지원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그러다 보니

특혜를 받는 쪽은 자꾸 발전하고 부가 축적된 반면 일반 기업과 서민 계층은 인플레이션의

피해를 입으며 소득이 자꾸 떨어지고 빈부차이가 계속 벌어졌습니다.

빈부격차의 배경이 된 또 하나의 문제는 지하경제입니다. 정경유착 테두리에서 돈을 마구

뿌리고 고속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부동산 값이 폭등했어요. 권력의 특혜를 받은 계층은

부동산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부동산 값은 일반 물가보다 몇 배 상승하는

경향이 있어요. 공급이 제한돼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땅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지배계층은

그걸 이권으로 삼았어요. 증권시장도 비슷한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부동산과 증권시장이

지하경제의 온상이 된 것은 고속성장의 큰 부작용이죠.


셋째 문제는 경제력 집중이에요. 재벌을 집중지원해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정책을 펴다보니

일반 중소기업이 빈사상태에 빠진 거죠.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직적 주종관계가 돼버렸습니다.

중소기업이라는 게 산업의 풀뿌리로 상품 개발과 기술력 향상을 통해 경쟁력의 저변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재벌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해 산업발전에 엄청난 불균형이
 
생겼죠. 각종 인·허가 특혜를 받은 대기업이 조금씩 대주는 걸로 연명하다보니 자생적 기술이나
 
상품을 가지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죠.

가장 큰 문제는 조립수출산업 위주로 산업이 발전된 데 있습니다. 흔히 가마우지 경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마우지라는 새는 훈련을 시키면 고기를 잡아오는데, 그것을 삼키지 못하게

목을 묶어 놓습니다. 고기를 뺏고 나서 풀어주면 다시 고기를 잡아와요. 잡아온 고기를 빼앗기고

날아가는 일을 되풀이하죠. 우리 경제가 그렇다는 거예요. 외국에서 부품과 기계를 사들여

조립해 만든 상품이 주종을 이루다보니 수출로 해외에서 돈을 벌어와 봐야 부품값 갚고

기계값이나 기술료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죠. 진짜 이익인 부가가치는 뺏기고 조금씩
 
던져주는 먹이나 얻어먹고 사는 가마우지 경제를 만든 겁니다. 자생적 경쟁력의 기반이

처음부터 형성되지 않은 겁니다.


넷째 부작용은 지역격차입니다. 대개 동쪽에서 집권세력이 나오다 보니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동서간 경제력 격차가 커지고 그것이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이 됐어요. 지배계층은 그것을 또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경제의 동서분단선을 만든 겁니다.
 
그에 따른 사회갈등이 선거 때마다 극단의 형태로 표출되면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골이 깊어진 것입니다.” 



지역감정의 뿌리


이교수는 지역간 불균형 경제발전이 오늘날 지역감정의 뿌리가 됐다고 단언했다. 그가 지적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는 끝이 없을 듯싶다.


“지역격차의 또 다른 측면은 도시 농촌간 격차입니다. 재벌들에게는 한국은행을 독촉해 돈을
 
지원해주면서 농촌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지원엔 인색했습니다. 지배자들의 횡포였죠.

그렇지 않아도 산업화과정에는 농촌경제가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인위적으로 육성하고

발전시키지는 못할지언정 거꾸로 황폐화를 가속시켰어요. 농촌 사람들이 안 되겠다 싶어
 
다 도시권으로 옮겨가면서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는 비대해지고 농촌은 황폐해지는,

기형적이고 비효율적인 국토발전이 이뤄졌습니다.


다섯째 폐해는 천민자본주의의 만연입니다. 고속성장을 독재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성장제일주의가 사람들에게 사치와 허영을 부추긴 겁니다.

부동산 투기로 돈 벌어 흥청망청 쓰고 해외에 나가 낭비하고 사치품을 사들이고… 그런 게
 
소비미덕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이 그걸 부러워하는 사회가 돼버렸어요. 그 과정에 가난한

이웃과 나누며 살던 전통적 가치관과 따뜻한 가족관, 공동운명체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회파괴라고 생각해요. 전통문화가 파괴되면서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됐다고
 
봅니다.


여섯째로 관료주의 확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독재권력을 장기간 유지하려다 보니 입법부

기능을 축소하고 사법부를 마비시켜야 했습니다. 반면 행정부는 굉장히 비대해졌죠. 사회를

지배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기업들을 길들이기 위해 엄청난 규제가 양산됐습니다. 관료주의가

엄청난 힘을 갖고 경제를 지배하다 보니 정부와 유착하지 못한 기업은 아예 발전 대열에 진입도
 
못하게 됐죠. 말만 시장경제지, 사실은 관치경제였습니다.


일곱째로 빚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로부터 금융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다들

자기 돈이 아닌 은행돈으로 사업을 벌이다 보니 부채비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죠. 특정 기업이
 
좀 어려워지면 그때마다 한국은행 돈 풀어 구제해줬습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좋은 기업이란

시장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물건 판 돈으로 스스로 발전하는 기업입니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돼야 하는데, 거꾸로 됐죠. 금융특혜를 받은 부실기업에 자꾸 돈을 대주니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부실이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기업들을 빚 먹고 사는 공룡으로 만든 겁니다.

외국 차관도 끌어다 그런 기업에 대주고. 기업들이 시장에서 평가받고 스스로 자본을 축적해
 
투자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돈 대줘 발전하는 기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다 보니
 
산업구조가 매우 취약해졌어요. 위험도도 높아졌고.


여덟째. 부패공화국입니다. 경제가 부패공화국의 희생물이 된 거죠. 정경유착에 따라 재벌과
 
권력층이 경제를 독식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경제가 희생됐습니다. 관료주의가 확대되고

규제가 양산되다 보니 뇌물이 판치는 비리구조가 위에서부터 형성됐고 그 영향이

민간부문에도 미쳤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가 그 씨앗을 뿌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죠.”


IMF위기 씨앗은 개발독재


이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개발독재의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들의 책임이 크다. 어쩌면 오늘 인터뷰에서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자의 ‘불안감’도 아랑곳없이 그는 마치 한칼에 끝장을

내기라도 하듯 설명을 계속한다.


“79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서거한 후 들어선 전두환 체제는 오히려 독재권력을 강화했지요.

시장경제는 더 멀어지고. 특히 정권이 정통성을 갖지 못했기에 정경유착이 더 악화됐어요.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개발독재의 구조적 문제가 심해졌습니다. 두 사람이 쓰고 남은
 
돈, 들킨 돈만 각각 5000억원, 4000억원이었어요. 그렇게 따지면 독재정권의 집권자들이

재벌보다 더 큰 재벌이었던 셈입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뭔가 고쳐질 것으로 다들 기대했지요. 그런데 가장 큰 걸림돌인

정치질서 체제가 바뀌지 않고 관료주의도 여전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혼자 개혁하려

애썼는지는 모르지만 체질화된 관료주의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이 둘러싼

상태에서 도저히 뭘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금융실명제라는 미증유의 개혁이 변질된 것도
 
그런 사정 때문입니다.

개혁을 하려면 끝까지 제대로 해야지 실패하거나 변질되면 경제에 오히려 더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문민정부가 경제를 망치고 말았는데, 그 배후엔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단이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선 국민의 정부도 크게 다를 바 없어요. 구태의연한

정치체제와 관료주의가 여전히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요. 개혁의 성적표를
 
따진다면 크게 내세울 게 없죠.”


이교수의 개발독재 비판논리는 IMF 책임론으로 연결된다.


“IMF 위기의 씨앗은 바로 개발독재입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이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공은 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역사의 형틀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를 쓰러뜨린 책임도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건 IMF라는 큰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의 틀을 바꿔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짊어진 국민의 정부가 제몫을

못 한다는 점입니다. 정경유착과 관료주의를 타파하는 근본적 개혁을 해야 하는데

그것 없이 재벌개혁을 한다고 나섰다가 저항에 부딪히자 기껏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근로자나 정리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아직까지 박정희 개발독재의

패러다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들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이 잘못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과거 고도성장의
 
향수에 빠져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는 건 굉장한 모순이 아닐 수 없죠.”



독재와 지도력의 혼동


―박정희식 경제성장에 대해 학계에선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절대 긍정론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고 지금도 그 패러다임이 유효하다는 겁니다

. 둘째, 개발독재 자체는 비판적으로 보지만 산업화 초기단계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견해죠. 즉 한시적 긍정론입니다. 셋째 견해는 완전 부정론입니다. 개발독재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독재를 정당화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독재는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속성장했다, 빈곤에서 탈피했다,
 
그것을 당시 독재 덕분으로 돌리는 건 굉장히 잘못된 해석이고 위험한 일이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독재와 지도력을 혼동해서 그래요. 독재가 아니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시장경제체제를 발전시켰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선진형 경제구조를 갖게 됐을 겁니다.”


―교수님은 그러면….


“셋째 견해에 해당하죠.”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지요. 그런데

민주주의를 내세운 장면 정부가 허약하고 무능해 군부가 일어났다는 것 아닙니까. 당시 장면

정부가 더 기회를 가졌다면 박정희 못지않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이 점을 구분해야 합니다. 당시 장면이라는 사람, 장면 정부가 허약했지 민주주의가 허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곧 장면 정부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장면 정부가

무능하고 지도력이 부족했다면 민주적 절차로 정권을 교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빌미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독재를 정당화한 것은 잘못된 일이죠. 그때는 각 나라에서

경제발전이 시작되는 단계였어요. 어떤 정부가 들어섰더라도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3세계, 특히 동남아국가들의 경제 발전 시기와 배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고, 특히 우리에게 굉장한 자극을 준 나라는 일본이에요. 일본이 전쟁에 패한 후
 
그 잿더미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걸 봤거든요. 그걸 보고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당연히 우리도 해보자, 이렇게 나온 거죠. 그때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합리적 경제발전

체제를 만들고 시장경제 개념을 발전시켰다면, 모르겠어요, 빈곤탈피속도는 좀 느렸을는지
 
모르지만 훨씬 의미 있는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어쨌든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한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경제발전의 질보다
 
외형적인 수치나 가시적인 성과에 더 감동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당시 경제지표를 보면,

경제성장률만 해도 5·16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해인 1962년부터 박 전대통령이 죽은

1979년까지 연평균 9.3%를 기록했습니다. 1인당 GNP도 1961년 82달러에서 1979년엔

1640달러로 커졌어요. 수출액도 4000만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엄청나게 늘었지요.


“맞아요.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죠. 그런데 지금과 그때 상황을 비교해 지금 어려우니

그때 그런 일이 또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잘못된 일이죠.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였어요. 사람들이 일을 하면

뭔가 이뤄지는 게 막 보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경제발전이 시작되고 소득이

늘어나니 다들 놀랐죠. 그런데 지금은 경제구조가 달라요. 경제여건도 달라요. 지금 만약

박정희 방식을 적용한다면 경제, 마비됩니다. 현 경제구조에서 정부가 모든 걸 통제하고

특정기업을 지정해 특혜를 주고 정경유착을 강화한다면 경제가 쓰러지죠.” 


관치경제에 희생당한 금융



―단기 고속성장이 갖는 단점은 무엇입니까?


“몸집이 아주 왜소한 사람이 별안간 쌀밥과 고기 먹고 몸집이 커졌다고 했을 때, 과연

몸집만 보고 그 사람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나라 경제는
 
초고속성장을 하며 몸집은 굉장히 커졌어요. 그런데 그 몸에 피를 돌게 하는 심장 구실을
 
하는 금융 부문이 관치경제에 희생되고 정경유착의 수단이 되면서 기능이 마비됐습니다.
 
심장에 병이 든 거예요. 심지어 플라스틱 인공심장을 달기도 했어요. 그럼 그 사람의

건강이 제대로 유지되겠어요? 계속 성장하며 힘을 발휘할 수 있겠어요? 고속성장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경제의 심장을 망가뜨렸다는 점, 나아가 문화 측면에서 볼 때

머리도 정신도 완전히 잃었다는 거예요. 별안간 큰다는 게 좋은 건 아니에요.”


―고도성장의 요인 중 하나로 박정희 전대통령의 리더십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경제발전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일관성 있는 전략,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비전 등이지요.


“그런 것들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한 건 사실입니다. 고도성장에 견인차가 됐죠.

그건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통치수단, 정권연장 수단으로 악용했고 그 결과
 
경제 전체가 병들었다는 점은 구분해 평가해야죠.”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이나 신념은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덕목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철학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그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릇된 경제철학과 신념이 결합한데다 정치논리가 개입되면서 그 폐해가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바깥 세계의 평가도 무시할 순 없지요. 1993년 세계은행 보고서엔 한국이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공사례로 소개됐습니다. 박 전대통령의 수출지향 전략과

거시경제적 안정화 전략을 그 요인으로 꼽았더군요.


“결과만 놓고 보면 엄청나게 성장한 건 맞아요. 그러니 성공이냐 실패냐, 이렇게만 따질 때
 
바깥에선 당연히 성공으로 보죠. 그런데 그들이 우리 내부의 상황이나 경제발전의 내용,

예컨대 독재나 정경유착 부정부패 경제집중 등 개발독재의 폐해를 따지진 않는다는 겁니다.
 
내용을 따지면 실패죠.”



시장경제 철학 없어


―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공 모델로 ‘네 마리 용’이라는 표현이 있지요. 이 나라들은 경제발전
 
배경이나 시기, 정치적 여건이 비슷하지 않았습니까. 그중 우리나라가 가장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다 지금은 가장 처졌다는 평을 듣는 것 같습니다. ‘네 마리 용’의 유사성이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겉으로 보기엔 네 마리 용이지만 실은 세 마리 용과 한 마리 공룡입니다. 우리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몸집은 오히려 다른 세 마리보다 컸을 겁니다. 그런데 내면적인 모순
 
때문에 먼저 주저앉아버렸어요. 또 몸집이 크니까 그만큼 일어나기도 힘들고. 그 내면적인
 
병이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인 것입니다.”


―독재라는 공통점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홍콩만 빼고요.


“독재라는 형식은 비슷해도 내용과 결과가 크게 다르죠. 대만은 중소기업 발전을 기반으로 한
 
경제구조가 탄탄했어요. 결정적 차이는 우리나라처럼 정치지도자가 재벌로부터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받는, 재벌과 정권의 불법공생체제가 없었다는 것이죠. 좁은 국토에

자원도 없는 싱가포르는 일찍이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개방 정책을 추진했어요. 지금

싱가포르는 세계 속의 싱가포르입니다. 반면 폐쇄성이 강했던 우리 경제는 결국 억지로

개방하게 됐는데 경쟁력이 약해 맥없이 무너져버렸어요.”




암세포 도려냈어야



박 전대통령이 사망한 직후인 1980년 한국 경제의 각종 지표는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렸다.

20년 가까이 늘기만 하던 1인당 GNP가 처음으로 줄었고 실업률은 3.8%(1979년)에서

17.9%로 뛰어올랐다. 1979년 경제성장률은 6.8%였으나 1년 뒤엔 마이너스 3.9%를 기록했다.
 
물가도 50% 가량 올랐다. 직접적인 원인은 석유파동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비판론자들은

이를 개발독재의 후유증에 따른 구조적 위기로 본다.


―1980년의 경제지표는 각 부문에서 곤두박질쳤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80년대 초반 공장 가동률이 50%대로 떨어졌어요. 박정희 경제의 한계가 폭발한 것이죠.

그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습니까. 당시 5공 정권의 김재익 경제수석이 경제안정 정책을
 
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것이 다시 힘을 축적하는 계기가 됐는데,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 때 비록 엔화 가치의 절상 덕을 톡톡히 본 것이긴 하지만, 무역수지에서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는 힘이 됐죠.”


이교수는 경제 정책에 관한 한 김영삼 전대통령보다 전두환 전대통령을 높게 평가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자기가 모르면 전문가한테 다 맡긴다는 것이죠.

경제분야는 김재익 수석에게 일임했는데 당시 물가를 3%로 잡았어요. 김영삼 전대통령도
 
경제를 모르니 맡기긴 했는데 사람을 잘못 썼지요. 정부 주변에서 관치금융 논리나 제공하고
 
영화를 누려온 사람한테 단지 부산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맡겼거든요. 김영삼 정부 초기
 
‘신경제 5개년계획’이라는 걸 추진했는데, 5년 동안 한 일이라곤 한국은행에서 돈 푼 것과

외채 끌어온 것밖에 없어요. 처음 ‘신경제 100일계획’을 추진할 때만 6조8000억 원을

풀었어요. 외채는 400억 달러에서 1500억 달러로 늘었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가장 극대화한 사람이 김영삼 전대통령입니다. 구시대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답습했습니다. 구조조정은 안 하고.”


―IMF의 뿌리가 박정희 개발독재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부 경제학자들은 김영삼 정권도

억울한 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덤터기를 썼다는 것이죠.


“IMF 위기를 초래한 데 대해선 책임을 져야죠, 문민정부가.”


―뿌리는 박정희 개발독재에 있지만….


“뿌리는 그렇지만 그 뿌리를 잘랐어야죠, 명색이 문민정부인데. 새로 시작했어야죠.

그런데 오히려 문제를 확대시켰습니다. 암세포를 더 키운 거죠. 돈 풀어가면서,

외채 끌어들이면서.”


화제는 다시 박정희 개발독재의 문제점으로 돌아갔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그 두 가지는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핵심요소 아니었습니까?


“수출 드라이브 정책 자체는 좋은 거죠. 문제는 실적 위주의 드라이브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양만 강조하고 질적인 측면은 외면했어요. 기술개발보다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수출상품들, 예를 들어 옷이나 가발 등을 수출하는 데 주력한 겁니다.

중화학공업 투자의 경우, 아무리 좋은 투자라도 그 나라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마치 아무리 좋은 보약이라도 그 사람의 소화능력에 맞아야지, 좋다고 무조건 먹으면
 
설사 나는 이치와 같은 거죠. 중화학공업에 과감히 투자한 건 좋은데 과잉·중복투자를 하는

바람에 우리 힘에 부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후유증이 컸죠. 70년대 중반부터 엄청나게

투자했는데, 1·2차 석유파동의 충격이 가해지자 가뜩이나 부담이 큰 상태에서 견디지

못하게 된 겁니다. 80년대 초반의 산업공황은 그래서 생긴 겁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공통점



―재벌정책은 어떤가요. 일부 경제학자는 박 전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위해 재벌을 적절히
 
이용했다고 평가하더군요. 고속성장과 대형사업을 벌이는 데 재벌의 힘이 필요했다는 것이죠.


“재벌은 우리 경제를 발전시킨 반면 주름지게 한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권이

재벌과 결탁했다는 것이죠. 재벌 불가피론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이 잘 발달한
 
대만의 경제발전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우리나라의 경우 잘못된 재벌 정책의 폐해가 너무
 
큽니다. 재벌에 돈이 집중되고 각종 특혜가 몰리는 바람에 너무나 많은 중소기업이

죽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산업이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했죠.”


이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박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과 신념을 다시 한번 높게

평가했다. 반면 그것이 경제논리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치논리에 오염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는 데 대해선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끝으로 박 전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정책 면에서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


“박 전대통령은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일어나서 해보자, 하면 된다,

이런 정신을 갖고 있었지요. 반면 김대중 정권은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요.

그런 점에서 대비가 되죠. 공통점이라면 역시 정치논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끝)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는 사람들 (신동아, 2000.12.01 통권 495 호 (p112 ~ 124))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mairso2@donga.com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불길이 뜨겁다. 지난 9월 시민단체들을 비롯한 학계 언론계 노동계
 
문화계 등 각계 247개 단체의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결성으로 기세를 떨친 이 운동은
 
최근 서울 문래동의 문래공원에서 벌어진 박정희 전대통령(이하 박정희) 흉상 철거 사건으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국민연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념관 반대운동을 범국민 차원으로

확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1월8일 오후 문래공원은 적막감과 평화로움에 휩싸여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칼바람이 공원 여기저기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낙엽들을 들들 볶고 있었다. 놀이터에선 몇몇 아이들이 한가롭게 미끄럼을 즐기고

있었다. 기자는 오랜 세월 인간들의 삶을 지켜봐왔을 성싶은 아름드리 고목들의 연륜에
 
위압감을 느끼며 문제의 박정희 기념탑이 자리잡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래공원의 박정희


문래공원은 약 7000평.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 따르면 하루 평균 700∼800명의 시민들이

찾는다. 자연학습장과 놀이터 동물원 등이 주요 시설물이다. 공원 정문 쪽에서 박정희 기념탑
 
쪽으로 가다보면 금계와 인도공작, 일본원숭이 등이 놀고 있는 동물원이 눈에 띈다. 그 앞에서
 
직원 한 사람이 부지런히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기자는 그의
 
왼손 손가락 두 개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언론에 보도된 윤아무개씨(52),
 
바로 그였다.


보도에 따르면 윤씨는 3일 전인 11월5일 낮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5개 기관·단체 회원

30여명이 이 공원에 세워져 있던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때 이를 저지하다가 전치2주의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기자가 “얼마나 다쳤냐”며 아는 체를 하자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조금 다쳤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더 말을 붙일 틈을 주지 않고 잰걸음으로 동물원 뒤쪽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따로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손가락이 부러진 건 아니고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간 정도”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김용삼씨(50)에게 적용된 폭행 혐의는 바로 이 손가락 상처와 관련된 것이다.


동물원을 지나 20발짝쯤 걸으면 박정희 기념탑과 마주친다. 공원의 거의 동쪽 끝이다. 몸통인
 
흉상이 떼어진 기념탑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높이는 2m쯤 될까. 윗부분에 흉상과의

연결고리인 듯싶은 철근 2개가 삐죽 솟아 있다. 탑 앞면엔 ‘5·16 혁명발상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이 이곳에 세워진 배경은 이렇다. 5·16 당시 이곳엔 서울을 관할하는 육군 제6관구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58년 별 두 개를 단 박정희는 이듬해 6개월 동안 6관구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런 인연으로 6관구사령부는 5·16 당시 쿠데타군의 지휘부 구실을 했다. 기념탑이 세워진 것은
 
1966년. 6관구사령부의 요청으로 홍익대 조소과 최기원 교수(65)가 제작했다. 이번 흉상 철거

사건에 홍익대민주동문회가 관련된 데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기념탑 뒷면엔 문인 박종화(1981년 사망)가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이 새겨져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 불의 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라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7.7‘

 

 

DJ의 선거공약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숙제인 박정희. 그는 과연 한국민에게 어떤 존재인가.

1961년 5월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당시 44세)는 일단의 군대를 끌고 한강을 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한국사회는 ‘영원한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포박됐다.
 
3선개헌, 유신헌법 제정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통치기간을 연장한 그는 1979년 10월26일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서야 절대권력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절대권력의 혼란기를 틈타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헌법 전문에서 ‘5·16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박정희와 다름을 애써 강조했다. 이후 상당수 한국인들은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구국의 결단’이라던 5·16은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혁명이 아닌
 
불법 쿠데타로 굳어졌고, ‘민족중흥의 지도자’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입에서 박정희 기념관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7년 대선 유세 때였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경북 구미를 방문, 박정희의 생가를 둘러본 후 그 지역 유권자들에게 박정희
 
기념사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현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 추진은 이처럼

김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해 5월13일 대구를 방문한 김대통령은 이의근 경북지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적극 지원할 의지를 밝힘으로써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은 곧이어 5월19일 김대통령이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지시한 직후 싹트기
 
시작했다. 5월20일 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 등은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 인권 분배정의 등의 가치를 부정한 박정희식 근대화를 기념하는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역사의식에 왜곡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대구참여연대와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 등 대구 지역 시민단체들도
 
반대성명을 냈다. 또 4·19혁명 관련 4개 단체는 “김대통령은 독재자와 화해하기 앞서

민주화투쟁을 하다 의문에 싸여 죽었거나 감옥 갔던 사람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부터
 
먼저 해야 한다”며 지원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 7월26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신현확

전국무총리가 회장을, 김대통령이 명예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국민회의 권노갑 고문

(현 민주당 최고위원)과 자민련 김용환 의원(현 한국신당 대표) 및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현 한나라당 부총재)이 부회장으로 추대됐다. 정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비(100억원)와

기념사업회 운영비(5억원) 등 모두 105억원을 2000년 예산에 책정했다.

10·26 2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해 10월25일 서울에선 두 가지 상반된 모임이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선 옛 공화당 출신들이 주축이 된 박정희 어록집

(‘우리도 할 수 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반면 정동의 세실 레스토랑에선

전국역사학자모임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등 역사학자 1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국고지원 중단을 촉구했다. 


역사학자들의 분노



역사학자들은 성명을 통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모순의 대부분이 박정희 시대에
 
이뤄졌으며, 경제성장을 내세우며 그가 자행했던 인권탄압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전국역사학자모임은 전국의 대학교수, 강사 및 연구원, 대학원생,

중·고교 교사 등 역사 연구자 11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11월25일엔 71개 단체가
 
연합한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박정희 기념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해가 바뀐 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정희 기념관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은
 
7월20일 이후. 전날 정부가 2002년 월드컵이 열리는 서울 상암동에 5000∼7000평의
 
박정희 기념관을 짓기로 확정한 것이 촉발제가 됐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가운데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성명(7.21),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대구·경북지역 40개 시민단체의 국회 및 청와대 앞 항의시위(7.31),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학단협(학술단체협의회) 소속 교수들의 기자회견 및 서명운동(8.3)

등이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은 마침내 9월28일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이하 국민연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국민연대엔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연합 녹색연합 등 이른바

빅4 시민단체를 비롯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전교조, 민족문학작가회의, 4월혁명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민언련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전국역사학자모임 등 모두 247개의 사회·시민단체가 참여했다.

국민연대는 정관 제정과 함께 고문단 공동대표단 상임집행위원장단 등을 구성, 모양새를
 
갖췄다. 국민연대는 이날 결성선언문을 통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민족사를 유린하는
 
범죄행위”라고 규정하는 한편 김대중 대통령에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직을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10월17일엔 전국 대학교수 649명이 10월유신 선포 28돌을 맞아 박정희 기념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국민연대는 박정희 사망 21주기인 10월26일 오전 덕수궁 앞에서 회원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열었다.

11월5일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4개 단체 회원들이 서울 문래동에 있는 박정희
 
기념탑에서 흉상을 끌어내린 것은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첫 ‘실력행사’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간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가 199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그간 주로 친일파들의 행적을 고발하는 책을 펴내는 한편
 
그와 관련된 각종 시위와 집회를 주도해왔다.

11월9일 서울 청량리동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몹시 분주해 보였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가운데 직원들은 관련단체들의 지지성명을 챙기는 한편 이번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싶었다. 기자와 마주 앉은 서우영 기획실장(36)은 박정희 기념관
 
국고 지원에 대해 “김대중 정부의 천박한 역사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 “영남권 지지표를
 
얻으려는 단세포적 정략”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밤 10시께 방학진 조직부장(29)과 홍익대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이중기씨(35)가 경찰에서
 
풀려났다. 철거현장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던 곽태영 4월혁명회 대표(64·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하루 전인 8일 귀가조치됐다. 이제 경찰서에 남은 사람은 김용삼 운영위원장뿐이다.

다음날 오전 방학진씨와 통화했다. 방씨는 “문래동의 흉상은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기념비가
 
아닌, 쿠데타 찬양 기념비이므로 그것을 철거하는 것에 국민이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정통성을
 
갖춘 정부라면 당연히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노숙자와 실직자들이 박정희 흉상
 
앞에 술을 올리는 것을 본 적 있다”며 “이런 퇴행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정부가 막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기념관 건립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가치관을 혼란케 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 곧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시시비비다. 반대론자들은 대체로 박정희는 기념관을 세워 기릴 만한 업적이

없으며, 오히려 역사적 과오가 크다고 주장한다. 논쟁의 또다른 초점은 국고 지원의 타당성

여부. 기념관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국민의 세금으로, 곧 정부 지원으로 기념관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정희 찬양론자 또는 추종자들이 사비를 들여 박정희의 고향에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박정희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민주주의 억압과 인권 탄압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기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2년을 포함하면 총 18년에 이른다. 1963년 군복을
 
벗고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박정희는 1979년 사망 당시 9대 대통령이었다.

장기집권의 포석이 된 것은 1969년의 3선개헌이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던 이 불법개헌을 성사시킨 1등 공신은 공작정치의 산실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였다.

그러나 이는 독재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제정, 영구집권의
 
길을 닦았다. 이른바 총통시대의 출현이었다.

박정희 절대권력을 뒷받침한 것은 공포정치와 공작정치였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는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교수 학생

문인 노동자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의문사했다.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과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야당 의원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95만 표 차이로 선전해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대중

신민당 의원은 일본 동경에서 괴한들에 납치 당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1979년엔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며 박정희 체제를 비판한 것을 문제삼아서였다. 이 일은 부산·마산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역사적
 
가정이다. 김재규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죽기 8일 전인 1979년 10월18일 “부마사태가
 
전국적인 민중봉기로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김재규의 보고를 받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김재규는 이때 박정희의 심복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이나 200만 명 정도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고 진술했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부에선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다면 부산이나 마산에서 1980년 5월의 광주학살처럼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는 주장마저 제기하고 있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18년 동안 집권하면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세 차례(31개월) 발동했다. 군대가 주요 시설물을
 
점거해 경비하는 위수령과 각종 비상조치를 포함하면 총 105개월 동안 ‘비정상적’ 통치를

했다(한국정치연구회, ‘박정희를 넘어서’, 도서출판 푸른숲, 1998). 이는 그의 통치기간인
 
220개월의 약 절반에 달하는 기간이다. 1974년 1호로 시작해 1979년 9호까지 이어진
 
긴급조치는 체제비판을 원천봉쇄하는 초헌법적인 명령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자는 영장도 없이 체포돼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벌받았다. 한성대 사학과

윤성로 교수의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그 부정적 유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1970∼

1979년까지 10년 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노동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죄로 구속된

양심수는 총 2704명(그중 1184명은 구류)에 이른다.

한국의 파시스트 논리를 비판한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로 유명한 진중권씨(36)는
 
박정희를 파시스트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진씨는 지난 11월7일 민언련 강당에서

열린 ‘박정희와 조선일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유신 이후 한국 정치는 파시스트 체제였으며
 
이는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휘두른 독일의 나치즘, 반미·반공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신우익과
 
맥락이 닿아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론자들은 박정희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는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한마디로 개발독재의 폐해다. 개발독재가 낳은 경제성장보다는 그 폐해가

한국 경제에 끼친 악영향에 더 주목하는 것이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경제력의 지역격차,

소득분배 불균형 등을 대표적 후유증으로 본다. 또한 가시적인 성과와 실적 위주의

성장제일주의에 따른 구조적 모순이 한국 경제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다카끼 마사오


박정희의 과오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다. 지난

11월9일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조문기씨(76)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22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중단을 촉구하며 발표한 성명엔 이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젊은 시절 일제에 맞서 싸울 때 박정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는데
 
앞장선 일본제국주의의 선봉대였다…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결과 일본군 장교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민족의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박정희가 교직을 떠난 것은 1939년.
 
일본인 아리마 교장을 폭행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의 행적. 이듬해 23세의 그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그 해
 
그는 창씨개명을 했다. 다카끼 마사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한 다카끼 마사오는 우수한 성적 덕분에 일본 본토의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944년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그의 첫 부임지는
 
관동군 635부대. 이어 만주군 보병 제8단장 부관으로 임명됐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만군장교 박정희는 소속을 잃었다. 8월29일 중국 베이징으로 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잠시
 
몸담았다가 이듬해 5월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신동아’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각계 인사 15명을 집중 인터뷰했다. 현 정부 초대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64)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근로자 권익을 짓밟는 등 강압적
 
요인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며 성장의 질을 문제삼았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성장한 데 대해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는 데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폭군이자 반역사적 인물이다.

역사를 보면 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를 내세워 독재를 정당화한 예가 많다.”


소설가 유시춘씨(50)는 박정희 흉상 철거행위에 대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양심범의 정당한 행위”라고 평가했다. 유씨는 “박정희는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짓밟고 인권탄압을
 
일삼은 독재자다. 도대체 박정희의 어떤 점을 기리겠다는 것인가”라며 분노했다.


“우리 민족을 가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개발의 공을 박정희의 카리스마로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온 국민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인권탄압 일삼은 독재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김재열 신부(61)는 “광복 후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군대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 자체가 민족의 불행”이라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비판했다. 김신부는 또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경제성장 대 인권’의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경제는 속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언제든 발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다운 삶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베스트셀러인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36). 박씨는 지난 7월26일 동아일보에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담은 의견광고를 내 화제가 됐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국가에서라면
 
쿠데타를 기념하는 흉상이 세워질 수 없다”며 박정희 흉상 철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똑같이 독재를 했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이라도 했다”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좌익 전력으로 체포됐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 동지들을 밀고하는 등 인간성에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4·19 이후 부패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5·16이 앗아갔다.
 
2공화국이 무능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부를 어떻게 그렇게 평가할
 
수 있나. 2공화국도 경제개발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며 5·16을 비판했다.


“학교 다닐 때 그 사람(박정희)이 사라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정희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세뇌라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 여파가 최소한 30년은 간다고
 
봐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박정희 추모 열기는 그 시대가 제대로 종결되지 못한 데 따른
 
후유증이다.”


고려대 사학과 박용운 교수(58)는 “쿠데타로 역사를 후퇴시킨 사람에 대해 아무런 역사적 평가 없이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돈명 변호사(78)는 김지하 국보법위반사건, 김재규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 유명하다. 이변호사는 “박정희 흉상을 계속 놔둔다는 것은 민족의 정서에
 
유해한 일”이라며 흉상 철거를 “정당한 역사적 행위”로 평가했다. 그는 또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며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강요당했나”라며
 
유신독재를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의 경제발전 공적에 대해서도 이론을 폈다.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박정희 방식이 아닌, 더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했다면 폐단 없이 경제개발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10·26재평가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이변호사는 특별히 김재규의 ‘진실’에 대해 말했다.


“나는 변호사로서 ‘유신체제의 종결을 위해 박정희를 죽였다’는 김재규의 증언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증거도 있다. 김재규 재판은 재판도

아니었다. 일부에서 CIA 배후설이 제기돼 김재규에게 물어보니 펄펄 뛰더라.”




”기념관은 박정희에게도 부담”


경실련 정책협의회의장인 건국대 경제학과 최정표 교수(47). 최교수는 “쿠데타 주역들이

생존해 있는 지금 박정희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며 개발독재론을 비판했다.


“개발독재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뤘다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고도성장을 이룩한 싱가포르도 우익독재를 겪었지만 오늘날 선진국가 대열에
 
올라섰다. 그 차이는 우리의 경우 정권유지를 위해 독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교수는 박정희를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았다. 경제발전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며

특히 지금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박정희 탓만으로 돌리는 데 대해선 반론을 폈다.


“박정희의 국가경영철학과 리더십은 인정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폐해가 한국 경제의 구조를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에 일리는 있지만 그후의 위정자들 책임도 크다. 전임자의 잘못을

고쳐나갔어야 했다. 재벌 문제만 해도 그렇다. 박정희는 재벌을 고도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정경유착의 폐단이 심화된 건 80년대 이후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기호 신부(51·시흥4동 성당)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독재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신념화한 추종자들이 생긴다. 그들과 변혁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신부는 또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정신세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정신세계는 경제와 달리 하루아침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건설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다.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44)는 박정희를 ‘반국가사범’으로 규정하고 기념관 건립을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박정희의 정책 구조는 한국형 부패구조의 원형”이라며

“박정희 부활현상은 허약한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것은 미숙했던 우리 정치사의 시행착오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불행히도 기릴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경제를 조금 발전시켰다고, 국민을 있는 대로

짓밟아놓은 그를 기념하는 것은 애들 교육에도 좋지 않다. 그것은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아마 박정희도 지하에서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홍교수는 또 “경제발전 방식이 잘못됐다”며 개발독재의 폐해를 지적했다.


“민주화나 인권을 논하기 전에 박정희의 경제논리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분배가 시작된 것은
 
1987년의 6월 항쟁 이후다. 새마을운동만 해도 그렇다.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경쟁하기 위해

시작한 그 운동은 농민들에게 거대한 환상만 심어주고 결국엔 농촌을 폐허로 만들었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11월3일 박정희 기념관 건립 논쟁을 다룬 MBC의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55·학단협 대표). 강교수는 경제발전의 공을 박정희에게 돌리는 것을 경계했다.


“당시 경제발전의 배경엔 미국이 주도한 냉전구도가 있다. 미국은 대만과 남한을 주변의

공산주의국가들에 맞서는 보루로 삼기 위해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5·16 직전
 
장면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짜 놓았다. 그것이 박정희 경제발전계획에
 
토대가 됐다. 당시 세계는 자본주의경제가 팽창하던 때다. 한일협정도 미국의 압력으로 맺은
 
것이다. 박정희는 그때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가 발전한 것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경제성장은 가능했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발전?


그는 또 박정희 리더십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했다.


"리더십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만드는 지도력이다. 박정희 정권을 유지한 것은

일관된 무력이었다. 무력에 바탕을 둔 철권통치와 폭압정치는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희연 교수(44·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는 “1997년부터 일기 시작한

박정희 신드롬은 경제위기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며 “대중은 위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영웅을 상상했고, 그것을 대선 과정에 일부 정치인들이 이용함으로써 증폭된 점이
 
있다”고 박정희 부활현상의 원인을 진단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핵심적 가치는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 경력과 독재는 정신적 뿌리가 같은 것으로 민족적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다.

5·16은 반혁명이자 반역사적 쿠데타다. 특히 유신체제는 극단의 전체주의체제였다. 피해자가
 
엄존한 상태에서 충분한 국민적 합의 없이 독재자의 기념관을 짓는 것은 국론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그런지 드러내놓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다. 먼저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47).

박의원은 “YS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 잘못된 재벌정책 등 개발독재의
 
폐해가 문민정부 때 폭발해 IMF 위기를 불렀다”며 문민정부의 경제실정을 박정희 탓으로

돌렸다. 그는 또 “당 지도부가 정체성을 못 살리고 있다”며 “박근혜 부총재도 진정 자신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무엇이 유리한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라며 박정희 기념관 문제에
 
관한 한나라당 지도부의 대응방식을 비판했다.


서울시 국감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부당성을 제기한 민주당 심재권 의원(54)은 “박정희
 
흉상 철거 당시 기자들도 있었다.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데 구속한 것은 잘못된

처사”라며 경찰의 ‘과잉대응’을 비난했다. 심의원은 “박정희는 공보다 과가 훨씬 많은 사람”이라며
 
박정희 체제를 “세계사에 흔치 않은 참혹한 독재”로 규정했다. 또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민주사회 구현과정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질서 이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 기념관의 국고 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기념관 건립은 추종자나 지지세력에 맡기고 정부는 지원하지 말 것. 둘째, 굳이
 
정부가 지원하려면 역대 대통령 모두를 대상으로 한 자료전시관, 또는 기념도서관을 지을 것.
 
아울러 그 장소로는 각 전직 대통령들의 고향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명분으로 내세운 ‘화해(지역화합, 민족화합)’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빈약한 역사의식이 빚은 정략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화해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연세대 행정학과 최평길 교수(60)는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를 짓는 것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꼭 필요한 일”이라면서도 “정부가 나서는 것은 옳지 않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제스처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교수는 “민간이 주도해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도서관을 지을 경우 정부의 역할은 관리비를 보조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DJ의 역사적 월권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 제2부속실장을 지낸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42)의 생각도 최교수와
 
비슷하다. 정의원은 “기념관이든 자료관이든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는 귀중한 국가 자산”이라며
 
“전임 대통령의 추종자들이 건물을 지으면 정부는 그 내용물을 제공하고 관리비를 지원하면

된다”고 말했다. 정의원은 또 “DJ의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DJ 개인 돈으로

(기념관을) 짓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고 꼬집었다.


유시춘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를 존중하는 철학은 좋다. 하지만 박정희 기념관 건립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개인적 은원(恩怨)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며 “명분은 지역화합이지만
 
영남 유권자에 대한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김재열 신부는 “기념관 건립이 과연

지역화합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박영규씨는 “이 나라에 영호남만 있는 건 아니다.
 
영남에서도 (기념관 건립을)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김대통령이 내세우는 명분에서

전형적인 우중(愚衆)정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또 “기념관을 세울 경우
 
박정희 옹호세력의 기세만 키워줄 뿐이다. 오히려 화합의 저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용운 교수는 “대통령이 명분으로 내세운 화합이 오히려 국론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역사적 월권이자 분별력을 잃은 행위”라고 비판한 홍윤기 교수는 “김대통령이 화해를

내세우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정 화해하고 싶으면 추모회에 가서 개인 자격으로 꽃다발을 놓고

오면 될 일”이라고 ‘권고’했다. 박종웅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에 짓는다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기호 신부는 “명분도 잘못됐고 실효성도 없다”고 비판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


강정구 교수는 “지역화합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경상도 표를 의식한 정략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며 “권력 기반이 약한 DJ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고 비판했다. 조희연 교수는 “정치적 효과 없는 정략”으로 평가하면서 “진정

동서화합을 원한다면 기념관을 지을 것이 아니라 탈지역주의 정치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직전 펴낸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의 서장에
 
이렇게 밝혔다. “민주주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그러나 박정희는 집권기간 내내 여론의 자유를
 
막았고 토론의 자유를 막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혁명은 실패했다.


그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민주정권을 불법으로 뒤엎은 5·16도

그에겐 “내적(內賊)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군의 작전상 이동에 불과”했다. 그의 독재 기질은
 
혁명 초기단계부터 엿보였다. ‘국가와 혁명과 나’ 제1장(‘4·19 혁명의 유산과 민주당 정권’)에서
 
그는 “민주적 정치권능보다 일관성 있는 강력한 지도원리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제3장 ‘혁명의 중간결산’에는 “다시 한번 그들의 반성을 일방 기대하였다” “본인은 이 이상 더
 
관용이나 이해를 그들에게 베풀 수는 없게 되었다” 따위의 표현이 등장한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 그는 이미 ‘전제군주’의 위치에서 정치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45)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일찍이 이렇게 진단했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박정희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단지 복고주의니 향수니 하는

문화현상만은 아니다. 그건 정치·경제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금력을 가진
 
기득권층, 그리고 엘리트층의 절대 다수는 박정희 시대에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언로를 장악하고 있다… 박정희가 주도한 근대화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박정희는 욕을 먹어야 한다. 그건 결코 모순이 아니다. 그건 박정희 시대에 고통받은

인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인물과 사상’ 2권, 1997.6)


국민연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희연 교수는 국민연대의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무엇보다도 100억원의 추가예산 편성을 막기 위해 기념관 반대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치겠다.
 
그래도 강행한다면 건물 착공을 저지하기 위한 고강도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과연

훗날 역사는 박정희에 대한 화해와 단죄 중 어느 쪽을 더 의미 있게 평가할까.

[옥중인터뷰|김용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11월13일 오후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는 김용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을
면회했다. 초췌해 보였지만 표정은 밝았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건강은 어떤가?

“심장이 조금 좋지 않지만 견딜 만하다.”

―적용된 혐의 내용이 뭔가?

“특수공무방해죄와 폭행죄다. 재물손괴죄 정도로 생각했는데 뜻밖이다. 재판과정에 시비가
가려질 것이다.”

―언제 어떤 동기로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마음을 먹었나?

“박정희의 가장 큰 죄는 민족을 배반한 죄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사람이다.
 4·19혁명 후 ‘김구 선생 암살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암살에 관련됐던 사람들이 속속 자수하는
상황이었는데 5·16쿠데타가 진상규명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5·16은 또 4·19혁명의 영향으로
막 움트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싹을 잘라버렸다. 흉상을 철거하기로 맘먹은 것은 그 자리가
바로 쿠데타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국민연대가 출범한 9월2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조직부장과 함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는 동안 그에게 흉상을 철거해야겠다는 내 뜻을 밝혔다. 한 달 뒤 저녁 회식 후 방학진에게
이 일에 협조할 수 있는 단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11월2일까지 4개 단체가 참여의사를 밝혀왔다.”

―구속을 각오했나?

“역사적 정의 차원에서 구속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정법에 저촉될 것은 각오했다.”

―박정희 부활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나?

“친일파들이 박정희를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그의 범죄실상을 가리고 왜곡하고 있다. 민족 반역자를
 기리겠다고 국민의 돈을 쏟아 붓는다니 말이 되는가. 더욱이 세계가 주목하는 장소에 반역의
바벨탑을 세우려 하다니. 이는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김대통령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역사의식이 올바른 분으로 믿었고, 통일지향적인
대북정책에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통일정책은 국민이 적극 밀어줘야 한다.
그런데 친일을 한 박정희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보다 더 화려하게 기념하려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박정희 기념관은 김대통령의 역사적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는 대통령
개인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끝)




[2010 연중기획]경부고속도로 반대 ‘일리 있는 논리’

(2010 02/09위클리경향 862호)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당시 야당 ‘남북종단’보다 도로 열악한 ‘동서횡단’ 우선 건설 주장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야당 정치권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했습니다. 국가를 팔아먹는다, 업자를 위해 그 일을 하느냐,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 나라를 망가뜨리려 하느냐, 그 예산을 차라리 복지에 써라 등 내용을 보면 요즘과 비슷한 반대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코로나 승용차와 그 옆을 걷는 할아버지. 1970년 7월 7일.

“도로 건설 찬성하나 우선순위 의문”
지난해 11월 28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날 이 대통령은 청계천과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반대에도 무릅쓰고 관철시켜 결과적으로 좋아진 예’로 거론했다. 당시 언론, 학계, 야당의 반대에 맞서 관철시킨 박정희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발전이 있었겠느냐는 인식이다. 이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꺼낸 것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4대강 사업 이전에 ‘한반도대운하’를 추진할 때도 이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의 예를 자주 거론했다.

실제 야당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당시 신문자료를 뒤져 경부고속도로와 관련한 쟁점을 검토해 보았다. 동아일보는 1968년 1월 11일자에 ‘밝은 정치를 위해 유진오 신민당수에게 듣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유 당수는 인터뷰에서 히틀러의 아우토반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근대화의 기간인 도로 건설이라는 데서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춰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발언은 당시 신민당 당론을 반영하고 있다. 즉 ‘취지를 반대하지는 않으며, 남북 간보다는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근거는 무엇일까.

1968년 2월 22일 오후 2시 국회에서는 63회 건설위원회 3차 회의가 열렸다. 김형일 신민당 의원의 바통을 이어받은 김대중(DJ) 신민당 의원이 질의한다.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그러한 교통망이 필요하다, 이것은 누구나 알다시피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남북종단에 철도와 도로를 치중하였기 때문에 그 유산으로서 이와 같은 교통 체제가 되어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재원 또 한정된 능력을 가지고 지금 가위 우리나라 현실로 보아서 그래도 가장 발달된 그 노선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 급한 것은 뒤로 미루고 안 급한 것은 먼저 한다, 이런 일을 정부가 하고 있다는 건데….” 김 의원의 주장 요지는 이미 일제 시대 때 대륙 병탄 목적으로 남북종단 교통체계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군사용 도로를 제외하고는 철도·도로 시설이 거의 없는 강원도를 연결하는 동·서 고속도로 건설사업이 더 필요하며, 세계은행(IBRD)의 결론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김 의원의 질의에 대한 주원 당시 건설부 장관의 답변이다. “전국에서 교통량 수송량 전체를 볼 때 가장 폭주하고 있는 것을 완화하는 것이 긴급한 문제이며, 그래서 이것(경부간 고속도로)이 된 것이다. 지역을 개발하거나 도로의 선을 결정한다든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권력이나 정치적 압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조작된 기억’
IBRD가 내놓은 한국 고속도로 건설 관련 의견 보고서. 김대중 등 당시 야당 측은 이 자료를 근거로 경부고속도로보다 동서횡단 건설 우선론을 주장했다.
“정치에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박 전 대통령도 강조한 말이다. 경향신문 1969년 3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그는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업체 대표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조기 완공을 당부하면서 “일부에서 말하듯 정치에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7개월 뒤 언론은 박정희의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앞두고 여당 쪽에서 만들어진 정치 신어(新語)로 ‘하이웨이 전술’이라는 것을 꼽았다.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을 내세워 정부 실적 PR를 최대한 활용키로 한 것. 지난번 오산~천안간 고속도로 개통식 때 많은 시민의 운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이후 부상된 것.”(경향신문 1969년 10월 7일) 그리고 1971년 대선.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우선은 지방 국도 포장, 2단계로 고속도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여러 고속도로 동시 착공”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논쟁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란 책에 ‘고속도로와 지방불균형발전’이라는 장을 저술한 한상진 울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김대중이나 야당의 논리는 고속도로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가 아니었고, 실제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소외된 전라도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급속한 이농현상 등이 발생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했다. DJ의 주장대로 서울~강원 간 고속도로가 우선 만들어졌다면? 교양역사서 <타르타르스테이크와 동동구리무>를 펴낸 정창수 박사는 “강릉은 대도시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부산은 부산대로 지리상 발전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해상교통이 발달하고 해안지역의 전반적 개발이 있었을 수도 있다”면서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야당의 반대가)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주장은 만들어진 기억”이라고 말했다. 실제는 경부고속도로 개발 반대론이라기보다 차선론이었고, 나름대로의 대안적 논리가 있었음에도 박 전 대통령이 선거 유세 등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딱지를 붙인 이후 진실로 둔갑한 ‘조작된 기억’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야당사’와 관련해 여러 권의 책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전 대한매일 주필)은 “박정희는 당시 야당을 두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고 몰아붙여 왔지만 야당이 그런 정도라도 비판했기 때문에 국회에서 통과되기도 전에 줄부터 긋고 그런 것은 막을 수 있었다”면서 “이런 측면에서 4대강 관련 예산안이 국회에 통과되기도 전에 착공부터 하는 현 정부는 박 정권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경부고속도로 반대’ 야당 시위 사진은 조작?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이후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 인사들이 건설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며 인터넷에 유포된 사진. 사진은 일부 내용 변조 등으로 미뤄볼 때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인식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야당은 ‘목숨을 건 반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을까. ‘국민과의 대화’ 전후로 인터넷에는 한 장의 사진이 돌았다. 굴삭기 앞에 두 남자가 누워 있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밑에는 다음과 같은 사진 설명이 붙어 있다. 

“공사현장에 몸소 드러누워 진보, 개혁, 민주화운동을 몸으로 실천하신 ‘움직이는 양심’ 슨상님.” 굴삭기 앞에 누워 있는 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던 1960년대 후반부터 완공되던 1970년,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국회의원이었다. 그러나 출처 불명의 이 사진 속 인물은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야당 인사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뒤에 도열한 사람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의 ‘끝까지 결사반대’라는 글씨는 원래 글씨로 보이지만 이것이 경부고속도로와 관련된 사진이라고 주장이 가능한 ‘고속도로 반대’라는 글씨는 누군가가 사진에 가필(加筆)한 것이다. 사진을 살펴본 장신기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은 “실제 누워 있는 사람의 옷차림이나 체형 등은 김대중 당시 신민당 의원과는 다르다”면서 “일부에서는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이 김 전 대통령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올 한해동안 쓴 다이어리를 책상 서랍에 쟁여넣으려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겨버려 정리는커녕

서랍 안의 이전 다이어리들을 전부 헤집고 꺼내어 버렸다. 여태 내가 썼던 다이어리들이 전부

거기에 있었다. 아무래도 글로 쓰인 최초의 다이어리는 초등학교 1학년때의 일기장.


대체 머릿속에 생각이 있었을지도 의심스러운 1학년이긴 하지만 나름 1학년도 한참 지난 11월께

일기여서 그런지 뭔가 이야기의 흐름이 단순하지 않다. 휙휙 뒤바뀌는 사고의 흐름을 그대로

일기장에 옮겨놓은 듯한 내용. 잠시 여기저기 내키는대로 펼치고 읽다가 부끄러워져버렸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도 꽤나 열심히 일기를 썼다. 조금씩 공책의 줄간격은 좁아졌고 디자인은

덜 유치해졌으며, 선생님이 바뀌며 매년 색깔과 필체가 다른 첨삭이 더해졌지만, 무엇보다

조금씩 글이 길어지고 그나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달까. 서른 권은 채 안되지만

거의 매일같이 꼬박꼬박 썼던 그 때의 일상들, 지금 다시 보니 참..얘는 뭔가 싶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쓰던 다이어리들. 그러고 보니 그때는 학습지를 시키면 예외없이

저런 다이어리를 선물로 주곤 했었던 거 같다. 따로 파는 속지랑 스티커 연초면 으레 잔뜩

사서는 내키는대로 재구성하고, 삼공 펀치로 구멍을 뚫어서 심은하나 최지우 사진이나 엽서도

함께 꼽아두고. 아, 좋아하는 만화캐릭터도 빌린 만화책에서 몰래 오려서 붙여놓곤 했었다.

아..베르단디, 스쿨드, 울드.;;


차마 그 낯뜨거운 잔해들을 옮겨놓진 못하겠고, 속지만 남겨놓은 어느 일년의 기억들, 그리고

나중에 혹 다시 쓸까 싶어 남겼던 껍데기 몇 개만 슬쩍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군대 때 쓰던 다이어리. 어디에선가 한눈에 번쩍 띄었던 디자인의 공책인데, 그냥

틈나는 대로 날짜 '12/30' 요렇게 적고서 끄적이려고 들고 들어갔었다. 아마 일병 때부턴가

들고 갔던 거 같은데, 그 척박하고 비인간적인 돼지우리 속에서 전우 아닌 친구들과 함께

내 위로가 되었던 녀석이다. 어린 왕자, 다시 땡큐.

안에는 따뜻한 캔 하나에 감격하고 누군가의 편지 한통에 행복한 깨알같은 군바리의 일상이

깜장색 153모나미펜으로 꾹꾹 눌러 적혀있었지만, 그런 일상 이외에도 휴가계획이나 제대후

배낭여행 일정 같은 것들, 졸업논문 아이디어들이 제법 빼곡히 적혀있었다.


제대하고 터키-이집트-시리아-요르단을 가려던 계획을 세우고 저렇게 지도도 직접 그리고,

어디 갈지 여행정보나 참고사이트도 모아두고, 여행 예산을 잡고 휴가 때마다 얼마씩 벌었고

이제 얼마가 더 필요한지 모든 걸 닥치는 대로 모아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다이어리에 더해

여행가이드북, 가계부, 지도 역할까지. 제대할 즈음 머릿속에 꽉 들어찼던 저 지도.

내무실 내 관물함 안에다 만들어서 하루하루 두근대며 그어나가던, 제대맞춤형 디데이달력.

아무리 기분좋고 그럴듯한 하루였다고 해도 "제대만이 살 길이다"라는 문구는 저녁무렵이면

으레 절실하게 다가왔고, 휴가라도 다녀와서 한꺼번에 대여섯개를 긋는 날이면 마치 제대가

내일모레인 양 흥분하고 말았던 거다. 그렇게 하루하루 소중하게 바라보던 이 녀석, 어디있나

했더니 다이어리 속에다가 접어서 보관했구나. 서랍을 뒤지는 소소한 즐거움이 이런 거다.

그리고 2007년으로 훌쩍. 대학 다니면서는 사실 대학수첩을 쓰느라고 따로 다이어리를 사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대학수첩을 충실하게 쓰지도 않았는지라..아마 당시 '나우누리' 과게시판을

워낙 열중해서 이용한 탓인 듯. 그래서 2007년, 저 이쁜 고양이 다이어리를 썼다.

다이어리를 펼치니 툭 떨어지는 건, 여기저기 꼽아본다고 써봤던 영어 이력서 한 장. 사진만

첨부하지 않았어도 합격률이 더 높았을 텐데, 실수였다.


다이어리가 굉장히 이쁘고 화려했던 게, 페이지 곳곳에서 고양이들이 갸르릉거리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새를 쫓기도 하고 털실이랑 놀기도 했지만 어깨죽지에서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날기도 하고, 여하간 굉장히 매혹적인 다이어리였다는.

내 마지막학기 시간표였다. 그러고 보면 은근 다이어리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넣은 게

적지 않았다. 시간표도 그려넣고, 만화캐릭도 그려보고, 기린도 그리고, 대체 왜인지는

몰라도. 아..2007년 상반기까지는 학생이었는데, 세월 참 빠르구나. 진부하게도 빠르다.

학생수첩을 들고 다니던 그 이전 어느해, 2005년 김기덕 감독이 우리학교에 와서 강의를 했었다.

그의 영화를 빼놓지 않고 챙겨보며 일일이 감동을 먹다가 아마도 그때 최신작 '시간'을 보고

뭔가 영화에 대한 질문 겸 이야기를 한 후 받았던 사인. 좀처럼 사람들 사인은 안 받지만, 그는

기꺼이 사인을 부탁할 만한 사람. ([리뷰] 날 환장시키는 김기덕, 시간.)


아, 그리고 왼쪽은 취직준비할 때 지원했던 수많은 회사들. 저거 말고도 더 있을 텐데.

2008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기엔 좀 진부하지만, 여튼 학교를 벗어나 방학도 없고 조조영화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 첫 해의 다이어리다. 뭔가 이제 학생이 아니니까 좀 단정하고 평범한 걸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름 고심해 골랐는데, 아무래도 넘 심심하다.

원래 그런 건 안 하는데 유일하게 한해동안 본 영화니 공연, 전시회 티켓을 몽창 다이어리에

붙여보던 한해기도 했다. 갈수록 어찌나 두꺼워지고 뻣뻣해지던지, 다시는 안 하리라 다짐.

그래도 이런 신기한 공연도 봤었으니 기억해둘 만 하긴 하다. 한예종에서 있던 공연인데

제목이 무려 '카마수트라, 꿈', 대략 내 취향에 수렴되는 전위적이고 그로테스크했던 공연.

그리고 2009년, 다이어리가 이뻐야 한 해동안 곱게 품고 다니며 쓰게 된다는 간명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 한 해였다. 물론, 다이어리 뒤에 있는 꽁짜 쿠폰은 좋았지만.

그저 한해 일정만 설렁설렁 연초에 적어두고는, 그다지 수정하거나 추가하지도 않고서

일년이 지나버렸던 거다. 다이어리가 안 이쁘다기 보다는, 뭔가 레디메이드된 형태로

우르르 뿌렸다는 느낌이 워낙 강해서 '내꺼~♡'라는 애착이 안 간 거 같다.

그래도 빈 칸은 생각보다 적었던 건, 영화나 공연을 보고 나서, 혹은 여행을 다니면서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공책처럼 이렇게 저렇게 글을 쭉쭉 써댔기 때문인 듯. 아마도

이 페이지는 하루키의 1Q84를 읽고 나서 어딘가로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끄적끄적해둔.

([1Q84] 삶에 대한 '방법적 회의'의 밑장, 그리고 '리틀 피플'의 공갈협박.)

2010년 다이어리는 역시 너무 무거웠던 게 패인이었다. 노란색 가죽이 너무 맘에 들었지만

두껍고 무거워서 다소 부담스러웠달까. 그래도 대충 몇월 며칠에 뭘 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까진

적어두었지만, 소소한 생각들, 낙서들은 연초, 그리고 몇 번 마음을 다잡은 타이밍에 몰려있다.

이제 이틀 앞으로 다가온 2011년 새 다이어리, 고양이가 온통 뛰노는 표지가 그간의

다이어리 중 가장 이쁜 거 같다. 참 잘 샀다 싶어 맨날 자랑질하고 다니는 중.

2011년 잘 부탁해, 다이어리군&만년필양.

그렇게, 신발주머니 옥상으로 날려먹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기쓰듯 하루하루의 궤적을

적었던 다이어리를 한번 일람하고 나니까 왠지 급 나이들은 느낌이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몇 글자 두들김에 선명하게 내 안에서 살아나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정리하자면, 2011년에도 계속 잘 남겨보려는 의지 +5, 노화로 인한 우울증 +10, 시간낭비 1시간.





@ 도쿄, 도쿄에도건축공원.



가족들은 전부 어디론가 떠나고, 혼자 외로이 남아 집을 지켜야 하는 추석 연휴.

마음 속에서 바람소리가 휑하니 들리는 듯 하지만.


9월 20일(월) 저녁부터 9월 23일(목) 밤까지 어떻게 놀아야 재미있게 추석 연휴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가 볼만한 곳이나 재미있는 꺼리들에 대해 가장 매력적인 조언을 해주신 여섯 분께 초대장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제가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으로는, '좌우파 사전'같은 새로운 책을 몇 권 주문해 놓았고 '반지의 제왕'

디비디를 전부 빌려두어 한번도 쉬지 않고 이어서 볼 생각입니다. 미술관 전시나 하나 둘러볼까 생각중이기도

하구요. 그런 것들에 더해서 뭘 해야 추석 연휴를 쓸쓸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까요?


미리~ 감사합니다~*




* 참고 : 제 거주지역은 서울, 제 성별은 남자..또...




제대 전날까지도 작업 절라게 시키는 이넘의 부대인지라 나역시도 원래는 오늘부터 쭈욱 작업이 있었던 게다.

콘크리트 비벼서 흡연장 다시 만들고-저번 외박때 경력을 쌓아놔서 다행이다..그땐 칠만원이었는데..ㅠ.ㅠ-

내무실 건물 도색 다시 싹 하고..젠장, 더이상 말하기도 짱나는군. 그나마 직전에 나간 녀석들처럼 위험한

제초작업이 아닌게 다행인가.


어쨌거나, 시간이 해결해 줄테고, 여행 계획 다 짰다.

터키 11일, 그리고 이집트 17일.

애초에 생각했던 터키-시리아-요르단-이집트가 무리였다 싶어서, 일단 글케 경로를 축소하고 깜냥을 줄여낸담

계획을 짜다 보니까 처음 생각했던 것보단 덜 아쉽네. 내 첨 계획을 본 누군가 그랬듯 유격훈련 가냐는 식의

일정이 아니라, 터키-이집트를 좀더 여유롭게 '즐기는' 데 충분할 거 같기도 하고.


뭐랄까, 못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가게 될 길에 대한 기대나 설렘..이 역시 훨씬 크다. 단순해서 그런건지,

아님 '현실적'인 틀지워짐을 납득한 탓인지 간에, 의외성과 불확정성이 점차 줄어가고 일종의 '정향'이 가다듬어

질수록 일말의 안도감이 드는걸 스스로 느끼고 있다. 흠...글타고...내가 무슨 계획만능주의자라거나

짜여진 대로 안가면 클나는줄 아는 넘일 턱도 없고, 여전히 이집트 쪽의 일정은 닫혀 있지 않으니...


여행 계획 '대략' 다 짰다고 얘기해야 할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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