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걷고 싶은 아름다운 산책길 1, 강화도 나들길(윤성의)-

 

* 2016. 7. 11(월)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 (걷는 이의 눈높이에서 재발견한 강화, 강화나들길 제1코스.)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디오 전국일주 청취자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산책 좋아하시나요? 저는 이번 한주동안 청취자 여러분께 전국의 아름다운 산책로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저와 함께 걸어보시면, 시속 3km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꼭꼭 밟으며 음미하는 풍경은, 단지 눈에만 담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까지 차분하게 스며든다는 것을 느낄 있을 겁니다.

오늘 함께 걷고 싶은 길은 강화도 나들길입니다. 강화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마니산 참성단, 진달래 밭으로 유명한 고려산, 갈매기와 새우과자가 떠오르는 석모도, 그리고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선사시대 고인돌까지 하나씩 차근차근 이어나가 있는 곳입니다.

강화 나들길은 산책로와 옛길을 포함하는 20 코스로 이루어져 이런 지점들을 빠짐없이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중에서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이란 이름이 붙은, 강화도의 가장 번화한 시내에서부터 동쪽 해안가의 갑곶돈대까지 18킬로미터의 길을 걸어볼까요?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차를 내려 소박한 슬레이트 지붕이 이어진 골목길을 지나면 동문을 만날 있습니다. 동문은 몽고가 침입했을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옮겨와서 항전하며 쌓은 성문입니다. 야트막한 가옥들과 눈높이를 맞춘 소박한 성문을 골목 끝에 갖고 있는 동네에서 살면 꽤나 운치 있을 같아 이곳 주민들이 살짝 부럽기도 했습니다.

동문을 지나고 만나게 되는 600 묵었다는 회나무, 그늘 아래서 자동차들도 쉬어가는 그런 거대한 나무를 보면 왠지 옷깃을 여미게 된달까요. 생명력과 연륜 앞에서, 그리고 단단히 수백 동안 뿌리박은 위엄과 경이로움에 조금 압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새 고려궁지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한창 뜨거운 오후 2시쯤. 이곳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며 땀도 식히고 바람도 쐬어 봅니다. 이곳은 고려 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왕조가 강화로 옮겨 왔을 , 고려 왕조의 왕궁이 있던 곳입니다.

1코스의 끄트머리쯤에서 만날 있는 연미정은 강화 10경의 하나로,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입니다. 정말 경관이 굉장히 아름답고 500 느티나무도 그루나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는 곳이었지만, 이런 아름다움에 비하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안타까웠습니다.

꽤나 한적한 나들길을 따라 걷는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나고 드는 자유롭다는 뜻의 '나들길'. 강화도에 왔다면 어디서부터든, '강화나들길' 표지를 따라 강화의 풍경을 즐겨보시는 어떨까요. 모범답안처럼 코스를 따르지 않더라도 내키는 대로 형편 닿는 대로 걸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강화도에도 그럴듯한 걷기 좋은 길이 있다길래 정보를 검색하다가, 그런 길이 무려 8개 코스나

생겼다는 사실에 깜짝 놀랬다. 이름하야 강화나들길. 그 중에서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이란

이름이 붙은 길을 걸었다. 정비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나들길의 경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갓 내걸린 신품의 느낌이 가득하다. 여기서부터, 총거리 18킬로미터, 약 6시간이 소요되는 코스.

<강화나들길 제1코스>

강화버스터미널 - 동문 - 성공회강화성당 - 용흥궁 - 고려궁지 - 북관제묘 - 강화향교 - 은수물

- 북물 - 북장대 - 오읍약수 - 연미정 - 옥개방죽 - 갑곶성지 - 갑곶돈대



 

 

코스야 그렇게 짜였다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모범답안'일 뿐 내키는 대로 형편닿는 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조금 뻗어있는 나름의 도회지를 지나고 나니 이내

시간감각이 혼란스러워지는 풍경이 나타났다. 슬레이트지붕의 단층건물들이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골목길, 적당히 허름하면서도 정겨운, 그런 편안한 분위기다.

그런 골목을 지나다가 문득 발견한 동문, 몽고가 침입했을 때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옮겨와서

항전하며 쌓은 성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문이 있다는 건 양쪽으로 길고 높은 성벽이 이어졌을

거란 이야긴데, 아쉽게도 그 자취는 거의 사그라져 버린 듯 하다. 그나저나 저렇게 야트막한

가옥들과 눈높이를 맞춘 성문을 골목 끝에 갖고 있는 동네에서 살면 꽤나 운치있을 거 같다.

 

안내표지는 꽤나 친절하게 사방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띄었던 표지는 저렇게

파랑색 바탕의 분홍색 화살표를 페인트로 그려놓은 거였는데, 뭔가 갈랫길에 당도하거나

길이 헷갈릴 즈음 길바닥이나 벽면에서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저런 좁은 골목 뒷길도

지나고 논두렁길도 지나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앉은뱅이 허수아비도 만났다.

동문을 지나고 만나게 되는 600년 묵었다는 회나무, 그늘 아래서 자동차들도 쉬어가는

그런 거대한 나무를 보면 왠지 옷깃을 여미게 된달까. 그 생명력과 연륜 앞에서, 그리고

단단히 수백년동안 뿌리박은 그 위엄과 경이로움에 조금 압도되는 거 같다.

꽤나 한적한 나들길을 따라 걷는 건 정말 기분좋은 일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길이 채 제대로 나지 않은 곳들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있었고, 아직 상업화되지 않고 정비되지

않아 그냥 날것의 일상이 바로 옆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풍경도 생생했다.


그런 길을 좀 걷다가 마주친 건물, 110년이 넘었다는 한옥 양식의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햇볕이

슬슬 따갑게 내려쬐이기 시작한지라 땀 좀 식힐 겸, 한옥식 성당이라는 이곳을 좀 구석구석

돌아보기로 했다. '대영국 알마 수녀 기념비'가 서 있는 것부터 시선을 바싹 잡아당겼다.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걸어둔 건물이 바로 성당 본당이다. 처마의 생김이나 색감은

여느 한옥이랑 비슷하지만 기둥 사이사이로 활짝 열릴 유리문이 있다거나, 내부에 저리

길게 늘어뜨린 전등이라거나 성당의 기능에 맞게 개조된 내부 구조가 신기하다. 그리고

신부님이 머무시는 듯한 별당 건물 역시 지붕에 십자가 표지라거나 문짝에 그려진 태극

십자가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어느새 고려궁지, 오후 2시쯤 한참 뜨거운 때여서 다 허물어진 잔해 속을 거닐며 비감에 젖는

것보다는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빨며 땀도 식히고 바람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몽고 침입 때 고려 왕조의 왕궁으로 쓰였던 고려궁지는 이후 버려졌다가 조선 인조 때 다시

쓰였다가 이내 다시 잊혀졌던 곳이란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흔적이 더 큰 그런 곳이다.


코스에 따르자면 고려궁지에서 북관제묘, 강화향교, 은수물을 거쳐 북문으로 가게 되어 있지만

그냥 바로 북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기로 했다. 사실 스스로의 의지였다기보다는 그냥 내키는 대로

앞서나가는 발걸음이 이끌었다는 게 맞겠지만. 다행이었다. 나무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나무터널길이

북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미처 가려지지 않은 햇살이 아스팔트 길위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진송루, 북문. 북문은 동문과 딱히 별다르지 않게 생겼지만 좀더 지대가 높고 양쪽에

성벽을 위풍당당하게 조금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다소 녹슬고 칙칙한 그림자에 가려진

성문을 지나면 저런 짙은 녹색의 숲이 바로 나타났다.

한번 코스에서 벗어나 일탈을 해보면, 그담엔 쉬워진다. 이제 뭐 정말 발걸음 닿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찌됐건 기분좋게 걸을 수 있고 재미있으면 되지, 꼭 어디어디를 지나쳐 어디로

가야 한다는 법 따위는 없는 거니깐. 숲으로 덥썩 뛰어들어서는 사람들이 많이 밟고 지나가

풀이 돋지 않았거나 상대적으로 흙바닥이 많이 보이는, 길처럼 보이는 걸 따랐다.


그렇지만 정말 작심하지 않으면 딴길로 접어들기도 어려울 만큼, 인적 하나 없는 숲길 중간에도

이렇게 나무로 잘 만들어진 안내판이 어김없이 길을 일러줬고, 그보다 더 자주 '강화나들길'의

끄나풀이 길을 인도했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걸쭉하게 번져나온다 싶으면 꽃이 나왔고,

어디선가 나뭇잎을 사각대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금세 바람이 따라왔다.


산길을 한참 걸어올라가다가 걸어올라온 만큼 내려간다 싶던 때 오읍약수터가 나왔다. 약수터는

그냥 조그만 동네 약수터랑 비슷했고, 그 아래쪽에 졸졸 물이 흘러내리는 풍경을 따라 걷다보니

산길이 끝나고 도로 갓길로 접어들었다.

한참 뜨거운 시간, 그림자는 한뼘도 생겨나지 않는 때에 하필 이렇게 벌거벗은 아스팔트 길

위에 서게 되다니 타이밍이 좀 안 좋았던 게다. 너무 뜨겁기도 하고 아무래도 도로 갓길은

쉽게 지치고 볼거리도 없고 하여 색색으로 이쁘게 칠해진 초등학교 정자나무 아래를 찾아

잠시 쉬었더니 금세 땀도 식고 기력도 회복하고. 근데 학교 진짜 이쁘게 칠했다.

사실 다른 건 몰라도 1코스에 '대산리 고인돌군'이 끼어있다길래 걷다가 고인돌들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했었다. 근데 아무리 가도 고인돌은커녕 바위쪼가리도 안 보이고

그저 숲길이 계속 이어졌고, 또 이어졌고, 주위에 보이는 건 온통 초록색 풀떼기 뿐. 길은

그대로인데 고인돌을 바라던 내 맘이 변덕인지라 '풀떼기'가 되고 말았다.


결국 다시 큰길가로 나오고 나니 맞이하는 건 사방으로 뻗은 화살표. 현재 위치는 이미

대산리고인돌군을 훌쩍 지나친 어디메쯤. 뭐 깔끔히 포기하고 고인돌은 다음 기회에 다시

보러오기로 했다. 그렇게 월곶마을의 띄엄띄엄한 건물들 사이로 느슨하게 놓인 길을

걷다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원망할 무렵이었다. 저 파랑색 차양이 눈에 띈 건.

논쪽을 향해 불뚝 튀어나온 평상 위에 아저씨인지 할아버지인지 중늙은이 두 분이

앉아계셨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파랑색 차양을 높직이 드리우고는 한가로이 논쪽을

내려보며 쉬고 계신 듯 했는데, 가능하다면 옆에 한자리 끼어서 같이 쉬고 싶던 마음뿐.

결국 마을회관을 지나고 좀더 걷고서 도착한 '연미정'. 코스 중간에 식사할 수 있는 포인트로

연미정을 소개했던 안내지도와는 달리 근처엔 구멍가게 하나가 숨어있던 게 고작이어서,

위에 올라 바람맞고 쉬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 길 걷는데 중간중간 가게나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건 이 코스의 장점이자 단점인 거 같다. 분위기가 흐트러지지는 않되

미리 챙겨두지 않으면 목이 말라 쓰러지거나 배가 고파 쓰러질지도.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 연미정은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제비燕), 미(꼬리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다. (이전 포스팅 : 인조의 첫번째 굴욕이 있던 곳, 강화도 연미정.)

정말 경관이 굉장히 이쁜 곳이었는데, 500년된 느티나무도 두그루나 떡하니 버티고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었고, 그런 거에 비하면 참 안 알려진 곳이지 싶다. 어쩌면

그건 인조가 후금과의 기싸움에서 밀리고 억지로 맺었던 강화조약을 여전히 굴욕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치욕의 징소, 굴욕의 장소는 얼른얼른 덮고 지우려거나

최소한 소극적으로 방치해두기라도 하는 사례야 워낙 많았으니까.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서 '나들길', 강화나들길 제1코스는 이제 연미정에서 옥개방죽길을 거쳐

갑곶으로 마무리되도록 짜여있긴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굳이 첨부터 끝까지 밟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형편따라 나고 드는 게 정말 나들길을 즐기며 걷는 방식이지

싶어서, 배도 고픈데다가 서울로 돌아갈 시간도 애매해서 나머지길은 다음을 기약했다.


강화도에 왔다면 어디서부터든, 저 '강화나들길' 표지를 발견하는 순간 이 나들길에 들어서서

조금이라도 걸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강화의 풍경을 즐기다가 다시 나리는 건 어떨지.


* 강화나들길 사이트 : http://www.trekking.go.kr/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 연미정은 아래로 굽어보이는 물길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제비燕), 미(꼬리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풍경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아 강화나들길 1코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여긴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고.

그렇게 표지판에 적혀있긴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정묘호란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난 거

아니었던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싶어 '정묘호란'을 키워드로 찾아봤는데 이곳 연미정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고 '삼전도'만 줄줄이 나온다. 그리고 '정묘호란, 연미정'을 키워드로 찾아보니

또 이 곳의 표지판 내용을 그대로 딴 글들이 줄줄이 나오고. 뭐지 이게..? ctrl+c, ctrl+v 신공인가.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후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이제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이로써 12월 15일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예식이 끝난 후 인조는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당시 사공은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서로 건너려는 신하들이 몸싸움을 일으켜 왕의 옷소매까지 붙잡기도 했다. 청의 장수 용골대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자 1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강 옆 길가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아..좀 복잡하긴 하지만, 정리하자면 그런 거다. 정묘호란, 연미정, 삼전도, 인조의 삼배구고두

따위 키워드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고 있는 기사나 포스팅들이 없는 거 같아 굳이 이런 정보성

글을 쓰게 되는데, 우선 기억해야 할 건 1627년(인조 5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년)의

남한산성 항전의 차이다.


ㅇ 1627년(인조 5년) 일명 '정묘호란' :

당시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인정하는 강화조약을 강화도 연미정에서 체결

(인조의 첫번째 굴욕)


ㅇ 1636년(인조 14년) :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재침략하여 군신관계를 인정하는 예식을 삼전도에서 행함.

(인조의 두번째 굴욕)


요렇게 정리되시겠다. 삼전도와 연미정의 차이. '청'과 그 전신 '후금'의 차이.

명에서 청으로 슈퍼파워가 바뀌던 국제질서의 혼란기였으니 당시 국제관계를 규율하던

의례적인 '군신관계'를 확인하려 머리를 조아렸다고 해서 딱히 비분강개할 것은 없지 싶다.

보다 현명하게 굴어서 부드럽게 당대의 세계최강국과의 관계를 구축했다면 저렇게 적나라한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거야 위정자와 기득권 집단의 수치일 뿐 백성들이야 뭐.

정말 경관이 굉장히 이쁜 곳이었는데, 500년된 느티나무도 두그루나 떡하니 버티고 있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품고 있었고, 그런 거에 비하면 참 안 알려진 곳이지 싶다. 어쩌면

그건 인조가 후금과의 기싸움에서 밀리고 억지로 맺었던 강화조약을 여전히 굴욕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치욕의 징소, 굴욕의 장소는 얼른얼른 덮고 지우려거나

최소한 소극적으로 방치해두기라도 하는 사례야 워낙 많았으니까.


아니면 여전히 저 성곽에 딱 붙어서 북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군인들이 상주하는

군사제한구역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고. 북쪽을 향해서는 사진도 찍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는 걸 보면 두번째 이유가 더 그럴듯해 보이긴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