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즐기는 해외여행 4, 외국 분위기 물씬한 마을(윤성의)-

 


* 2016. 8. 19(금) KBS제1라디오 '라디오 전국일주' 방송분입니다.

* 아래글은 제 블로그의 글 (부산 감천문화마을, 4년만의 재방문.)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원고입니다.

 



오늘 함께 돌아보고 싶은 한국의 이국적인 여행지는 부산의 산토리니, 혹은 마추픽추라고 불리는 감천동 문화마을입니다.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이쁜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켜켜이 오붓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페루의 마추픽추처럼 가파른 산경사를 따라 층층이 세워진 건물들이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이런 별칭이 생긴 마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을 찾았던 오년전만 해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동네였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놀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님께 가자고 해도 전혀 모르셨거든요. 감천 문화마을, 태극도마을, 아니면 감정초등학교 앞으로 가자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전혀 모르셔서 네비게이션을 켜고 직접 안내해 드려야 했습니다. 도착해서 돌아봤을 때도 외지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구요. 그렇지만 올해 다시 다녀온 그곳은 이미 꽤나 말랑말랑하게 상업화된 분위기랄까, 많이 알려진 관광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이 문화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건, 산비탈을 따라 쭉 올라세워진 달동네 마을이 낡고 허름해진 위에다가, 예술가들이 채색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조형물도 설치하며 마을 주민들과의 협업으로 일군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제법 여기저기에 유쾌한 조형물들이나 벽화들이 늘어난 것도 보기 좋았고, 곳곳에 공방이나 까페, 게스트하우스가 생겨나는 것도 지역 경제가 살아나는 표시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관광객들을 인도하는 화살표는 곳곳에서 발견되어 길을 잃거나 엄한 데로 빠지기도 더욱 쉽지 않아졌습니다. 굳이 길을 비틀어 다른 곳으로 가도 금세 어디선가 안내를 발견하게 되어 내심 안심도 되고 했지만, 그런 친절한 화살표 아래에도 이 곳의 풍경은 묻어납니다.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 곳에 사시는 할머니 몇분이 따뜻하게 덥혀진 시멘트 계단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앞서 걷고 있던 두 여학생들에게 뭐라뭐라 촬영하기 이쁜 데나 전망대를 알려주시는 분도 계셨고, 우리는 찍지 말라며 굳이 자리를 피하려 하시는 분도 계셨으며, 여기 뭐 볼게 있다고 이리들 기어와 귀찮게 구냐고 한소리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도 골목 곳곳에서 만나는 길냥이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한발 앞에서 알짱거리면서 길앞잡이를 자처해주기도 하고, 곳곳에 숨은 자그마한 벽화나 센스넘치는 조각들은 감천문화마을의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 숨겨진 보물들입니다. 산비탈을 따라 다랭이논을 일군 사람들, 그리고 다랭이논처럼 비탈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그네들의 파란 네모집들. 빈틈없이 공간을 구획한 야트막한 옥상들은 그대로 빼곡한 모자이크가 됩니다. 부산 앞바다로 그대로 흘러내려갈 것만 같은 기하학적인 문양들입니다.

워낙 경사가 가팔라서, 굳이 골목들을 들여다보지 않고 몇개 건물들만 슥슥 지나치면 금방 산아래 아스팔트 차도로 내려올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연두빛 분홍빛 파랑빛 페인트들이 골고루 이쁘게 칠해진 집들이나 공중화장실처럼, 그 사이로 놓인 시멘트 계단을 자근자근 밟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빛깔따라 조금이라도 화사해진다면 좋겠습니다.

다만 '산토리니'마추픽추란 이름이 갖는 묘한 설레임과 이국적인 향취, 그 별칭을 가벼운 마음으로 붙여주기엔 여전히 이 곳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가볍지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건물들의 군집이 이루는 그 전체 그림만을 보고 감상하며 '산토리니' '마추픽추'니 하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좀 실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니까요. 그곳에 사는 분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낯설게만 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 윤성의였습니다.

어렸을 때 봤던 '백 년 동안의 고독',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랄까, 혹은 소개글이랄까.

 

게다가 연애감정을 단순히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만으로 묘사하는 단순한, 그래서 그만큼 거짓된 이야기들이 창궐한 세상에서

 

이렇게 정서적 혼란이 난무하는 것 자체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란 걸 짚어주는 것 자체로도 위로가 되는 글이다.

 

 

 

 

이별 통보하며 던진 말 "널 지독히 사랑해!" (프레시안, 2012-05-11)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연재를 시작하며

사랑에 빠진 젊은 당신에게 묻는다. 행복하세요?

허세를 좋아하지 않는 청년이라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말씀 앞에서 청년은 기가 죽는다. 그리고 한탄한다. 실은 나 사랑에 빠진 죄로 피를 뚝뚝 흘리며 고통 받고 있는데, 어디 가서 하소연할꼬? 어떻게 말로 할 수 없는 이상한 마음에 빠져 있는데, 이 혼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다가 내가 미치는 게 아닐까?

선남선녀가 첫눈에 반해서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연애담의 다가 아니듯이,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연애 심리의 다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종종 극심한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더욱 곤란하게도 그들은 혼란의 정체조차 모른다. 연애는 기묘한 인간 심리가 난투극을 벌이는 장이다.

훌륭한 소설들은 이런 미친 듯한 기묘한 심리들을 발견하고 묘사했다. 이 연재는 명작 소설에 나타난 기이한 연애 심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각 이야기의 서두에는 민, 경, 희, 연, 도 등 익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설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이다. 연애 때문에 고민하는 혹은 고통 받는 독자이다. 그들은 소설에서 비슷한 증상(?)을 발견하고 공감하거나 위로 받거나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그들의 실제 연애담을 먼저 이야기하고, 본문에서 그와 관련된 소설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또한 질문한다.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경증인가? 판타지인가? 유일한 구원인가? 이 질문 앞에서도 명작 소설들은 이미 멋진 답안들을 제출하였다. 연재를 진행하면서 이 답안들, 유식하게 말해서 '사랑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훔쳐보는 즐거움도 누릴 것이다.

사족

그런데 필자 양반, 왜 이런 글을 쓰세요?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본 게임 전에 하는 말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우선 연애 때문에 마음 아픈 당신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당신의 기묘한 심정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명작 소설이 아픈 마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담은 '마음의 백과사전'임을 보이고 싶었다고, 아울러 소설을 깊이 읽는 한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이런 식의 소설 읽기를 통해서 점점 독자를 잃어가는 소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기적도 아주 가끔 꿈꾼다고만 이야기해 두겠다.

 


첫 번째 상담

민이 연인에게 결별을 고했다. 일방적으로. 사람들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민을 부러워했는데. 그녀의 연인은 보기 드물게 자상했다. 어디에 가든, 그는 그녀와 동행했다. 우습게도 그는 혼자 있는 그녀가 혹여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들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녀의 안부였고, 그녀는 사소한 걱정이나 부끄러운 험담을 그에게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 그녀는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였고, 그는 그녀의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쏟아지는 질문에 그녀는 침묵으로만 응대했다. 그와 그녀의 이별 후유증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을 읽는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해했으므로 드디어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붉은 화인으로 남은 청춘의 한 때, 그녀가 빠져든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어리석음을 애도하면서 혹은 찬란함을 질투하면서.

그때, 난 천국에서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어. 천국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외줄 아래는 무시무시한 낭떠러지야.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다리가 늘 후들거렸어. 끝장나게 행복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했단 말이지. 그 상태를 더 이상 지속할 힘이 없었어. 무엇보다 외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어.

사랑은 왜 그렇게 피곤한 걸까? 그리고 그 피곤한 사랑을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정열과 고독, 그 기이한 함수관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불안감은 침대 안에서가 아니고는 평화를 찾지 못하리라.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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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사랑할수록 처절하게 외롭다. 말장난이 아니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체험적 진실이다. 이 소설의 레베카와 아마란타 역시 사랑 때문에 외롭다. 그들은 동시에 피에트로 크레스피를 사랑하지만, 레베카는 사랑을 차지하고 아마란타는 그러지 못한다. 정황이 다르기에 그녀들의 외로움의 색깔은 다르지만, 이는 사랑의 짝패인 고독의 두 가지 전형적 사례이다.

우선 사랑에 응답 받지 못한 아마란타의 외로움은 쉽게 납득된다. "변소를 닫아 잠그고 안에 들어앉아서 절망적인 정열의 고뇌를 쏟아버리려고 정열적인 편지를 써서는 그 편지들을 트렁크 깊이 감추"(81쪽)기를 반복하는 아마란타의 고독한 정열. 응답 받지 못한 정열은 고독을 부추기고 고독은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외사랑이 깊어질수록 저 홀로 타는 정열의 불길은 거세어진다. 응답을 받았으면 평범했을 정열은 종종 응답을 받지 못했기에 더욱 광포하게 날뛴다. 걷잡을 수 없게 된 정열 때문에 점점 더 사랑을 얻기 어려워지고, 더 고독해진다. 아마란타는 고독하기에 정열적이고, 정열적이어서 더욱 고독하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아마란타 못지않게 사랑을 얻은 레베카도 외로우니, 어쩌면 더욱 처절하게 고독하다. 레베카는 피에트로 크리스피의 편지를 매일 기다린다. 우편배달부는 2주에 한 번씩 온다. 그런데 실수로 다른 날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매일 오후 4시마다 배달부를 기다린다. 그러나 다른 날 우편배달부가 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와야 할 날에 오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 레베카는 "절망에 미칠 것 같아서 레베카는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고통과 분노로 흐느껴 울면서 흙을 닥치는 대로 손으로 퍼서 집어삼켰고, 매끈매끈한 지렁이를 막 씹어먹었으며, 달팽이 껍질이 입안에서 아삭아삭 바스러졌다. 레베카는 동이 틀 때까지 먹은 것들을 토해냈다. 열병에 걸린 듯 레베카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79쪽)

광란에 빠진 레베카는 실연을 당했거나 외사랑에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이다. 피에트로는 극진하게 레베카를 사랑했다. 편지가 오지 않는 경우도 피에트로가 무성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우편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편지는 대개 정기적으로 도착했다.

이렇게 보면 레베카의 광적인 절망은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것이 된다. 드높은 인격과 향기로운 미덕을 갖추신 분들은 레베카를 맹목적인 탐욕에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맹목적인 탐욕이란 사랑이 필연적으로 거느리는 것, 사랑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사랑의 응답은 언제나 모자란다. 충만하다 못해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사랑의 응답도 필경 결핍만을 부각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야차와도 같이, 사랑에 빠진 자는 악무한의 굶주림에 시달린다. 사랑에 빠진 자의 이런 허기를 마르케스는 '고독'이라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속뜻을 품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 레베카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사랑에 빠진 아우렐리아노뿐이었다.

열애 중인 연인은 고독이라는 인간의 천형을 사면 받는가?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열정의 노예가 된 사람은 연애 중에 오히려 더한 외로움을 느낀다. 아마란타와 마찬가지로 레베카의 사례에서도, 고독은 정열의 크기에 비례해서 깊어진다.

정열이 깊을수록 상대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많아진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자연스럽게, 만족하기보다는 결핍을 느끼기 쉽다. 그러니 고독할 수밖에. 또한 그는 고독하기에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결핍을 느끼면 그것을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어지간해서는 체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맬망정 배고픔을 잊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열이 고독을 부르고 고독이 정열을 부르는 이 원환(圓環).

냉혈한인 그녀, 사실은 두려워서 사랑을 포기한 연약한 영혼

여자는 거리낌 없이 그를 만져댔고, 그는 그 여자의 손길에 몸을 부르르 떨며 쾌감보다는 두려움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38쪽)

상대의 마음은 대체로 나와 같지 않고, 마음이 맞는다 하더라도 이른바 '맺어지기' 전 결별의 요인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 사랑이 '맺어지기'란 구우일모(九牛一毛)나 다름없는 진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운 '맺어짐'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과연 기쁜가? 진실을 토로하라면 그때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질투에 휩싸인 아마란타는 레베카와 피에트로의 결혼을 극성스럽게 방해하고 레베카를 독살할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레베카는 피에트로와 헤어진다. 아마란타가 방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레베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피에트로와 아마란타는 자주 만나서 조용한 사랑을 키워간다.

피에트로는 미쳐 날뛰는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따뜻하고 고요한 사랑에 도취하여 아마란타와 결혼하려고 결심한다.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쫓겨서라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따르자는 뜻"(125)에서. 그런데 청혼을 받은 아마란타의 대답은 어떠했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당신하고는 결혼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앞으론 다시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요." (126쪽)

이제 피에트로는 흐느껴 울며 비굴하게 애원한다. 비 오는 밤이면 아마란타의 침실을 바라보며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목소리"(127쪽)로 노래를 부르며 그녀를 설득한다.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절망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살하고 만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서 석탄불에 손을 지진다. 평생 화상의 흔적 위에 시꺼먼 붕대를 감고 산다.

아마란타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외롭게 했고, 질투심에 불타게 했으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던, 그리고 여전히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피에트로의 청혼을 고집스럽게 거절했을까? 피에트로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마란타의 어머니 우르슬라는 이렇게 분석한다.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의 마지막 분석 과정에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여인이었음이 분명해져서, 우르슬라는 아마란타에 대해 동정을 느꼈고, 피에트로로 하여금 부당한 고통을 받게 만든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자신이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시 사건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으며, 마침내는 아마란타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280쪽)

그 비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다고 한다. 냉정하다는 평판과 달리 누구보다도 마음이 여린 아마란타는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에 굴복한 가엾은 영혼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피에트로를 깊디깊게 사랑했으나, 사랑의 동반자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꼿꼿한 직립이 가능한 굳은 땅 위인가, 천길낭떠러지 옆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좁은 비탈길 위인가? 마음이 연약하고 깊은 이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깊은 사랑과 동시에 두려움에 몸을 떠는 사람은 이렇게 되뇐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토록 모자란 나를. 그는 언젠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사랑은 변하게 마련이니 결국 나는 사랑을 잃게 될 것이다. 잃은 후의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나. 게다가 미쳐 날뛰는 정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열이 벼려 낸 내 안의 칼이 그를 찌르면 어쩌지. 사랑 속에서 나 자신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많다.

사랑에 빠진 자가 모두 사랑을 쟁취하려고 동분서주하는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경우 그는 사랑의 성취 바로 앞에서 비겁하게 몸을 사리고 도망쳐 버린다. 사랑의 깊이와 두려움의 깊이는 비례하므로, 피에트로를 죽음으로 이끈 아마란타의 냉혹함은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아마란타는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폭력적인 사랑의 심연을 두려워했을까. 그랬을 수도.

어쩌면 두려움은 행복 자체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란타는 눈앞에 다다른 행복 앞에서, 단지 행복해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오랫동안 꿈꿔 왔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어떤 이는 환희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행복이란 워낙 드문 것이기에, 사람은 그것을 만나면 낯설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모른다.

행복은 과거와 미래 속에서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과거에 행복했다고 다소 왜곡해서 기억하거나, 미래에 행복하기를 기대할 뿐이지, 현재 행복하다고는 거의 느끼지 않는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청미래 펴냄, 2007년), 197~200쪽).

지금 이곳에서 행복은 항시 부재중이다. 없어야 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순간 닥치는 행복은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인데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이므로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편,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줄기차게 추구해온 욕망의 정점에 아무것도 없음을. 그 텅 빈 정점을 보는 순간 느낄 참혹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기에, 꿈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에 도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꿈꾸는 대상이 허상이었음을 인정하기 두려워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마르케스를 만나면서도 되풀이 두려움을 느낀다. 여러 해에 걸쳐서 거듭 사랑을 고백하고 정성을 기울인 게리넬도에게 아마란타는 "자기 자신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면서, "죽는 그 날까지 혼자서 울면서 고독하게 평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하고는"(187쪽)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그녀의 이런 처사가 그동안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사람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후 우르슬라는 피에트로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이 깊은 사랑과 두려움의 싸움에서 두려움이 사랑을 이긴 결과라고 이해한다. 사랑이 깊기에 사랑이 사랑을 죽인 것이다.

내적 분열, 사랑의 핵(核)

그는,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만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39쪽)

인간의 마음은 본디 분열적이다. 무엇을 하고 싶을 때 동시에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이러한 내적 분열을, 연애하는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게 체험한다. 사랑하면서도 밀어내고, 도망치면서도 사랑한다. 아마란타가 게리넬도를 대하는 모습은 내적 분열하는 연애 심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게리넬도에게서 과거 피에트로에게 느꼈던 정열을 되살려보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쓴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정열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을 만큼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게리넬도를 거절한 후에도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에게 전쟁에 대한 최근의 형세를 알려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으나 밖으로 나가서 그를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겨우겨우 그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160쪽)

사랑의 빛깔은 형형색색이라, 격렬한 정열이 아니어도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심정도 있고,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으면서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심정 또한 있다. 이런 분열적인 심정은 노년에도 그대로여서,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노인을 만나면서 추억으로 마음이 아파질 때면 공연히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서 그를 괴롭힌다.

 

ⓒ프레시안(손문상)

/박수현 문학평론가

 

 

"감정은 욕망과 그 욕망의 달성 사이에 있는 시간 속에 숨어 있다."(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올더스 헉슬리)

 

 

 

 

 

 

가면의 고백 - 10점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잔뜩 힘이 들어가기 쉽다.

자신의 지난 사랑, 심지어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토록 진실되고 아름답고 뜨거웠던 사랑은

두 번 다시 못 올 거라는 듯이,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또 자신에 대한 상대의 마음이 단색으로 칠해진다.


사실은 아니다. 금송아지라도 껴안고 있었던 듯한 지난 삶은 사실 적지않이 누덕누덕한 채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모인 것에 불과했으며, 지난 사랑 역시 어거지로 강변했던 단심(丹心)의 모노톤이 아닌

선명하고 흐릿한 스펙트럼 내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쉼없이 급변하며-그렇지만 역시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냉온탕을 거쳤던 거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렵다. 나의 삶, 나의 사랑 이야기란.


미시마 유키오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가면의 고백'이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자신의 삶과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탄생부터 유년시절, 청년시절에 이르는 성장기를 자세히 묘사하며 동시에 자신의

성 관념이 어떻게 변전해 나가는지, 동성애적 성향이 어떻게 발현되고 자신을 괴롭혀 왔는지 고백한다.


그의 첫사랑은 아마도 동성과 이성, 양자를 나누어 따져야 할 듯 하다. 동성애적 성향을 발견시켜주고 이후

하나의 전범이 되었던 동성의 첫사랑,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싸우며 키워나가다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던

이성의 첫사랑. 그러니 어쩌면 '첫사랑'이라는 무디고 닳아빠진 단어에는 잡히지 않는 게 그의 복잡다단하고

종잡기도 어려운 첫사랑 이야기, 혹은 첫사랑을 경과하는 그의 심리관찰 이야기다.


아니, 비단 '첫사랑'이란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불연속적이고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총보를 악장별로, 파트별로 구별해 채보하는 작업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덩어리진 채 자신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 뿐인 그런 불안감, 초조감, 만족감, 기대감...그런 것들의 카오스적인

혼합물에 제각기 이름을 붙여내고 인과관계의 레시피를 구성해 내는 것. 비록 어느순간 자신이 실제와는 한참

동떨어진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지라도.
 

실제 삶이란 건 정신병자의 읊조림같은 분절적인 자동기술법에 지나지 않거나,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미친년 널뛰듯 하는 조증과 울증의 연속과 오히려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위태롭고 위험하다. 사건과

감정의 선후, 인과관계에 대한 명료하고 선명한 정리가 필요한 거다. 자신의 불안정하고 규정불가능한 감정선에
 
규칙적이고 모범적인 법칙을 부여하고 특정한 이름을 붙여내어 가닥가닥 구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안스럽도록

구체적인 카오스 덩어리는 그저 하나의 식별가능하고 이해가능한, 그리고 무독무해한 추상으로 변해버린다.



그의 고백은 그런 '가면'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너무도 잘 의식하고 있어서, 차라리 그 '가면'과의 대결이라

하는 게 낫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가감없이 철저하게 되새기고 손실없이 전달하고자 한문장 한문장

심혈을 기울여 뽑아낸다. 너무도 무디고 둔탁한 언어와 어휘를 가지고 종횡무진 사방으로 뛰노는 감정선들을

추스려 표현하기란, 거의 잠자리채로 바람을 잡아보겠다고 나대는 꼴과 같을지 모른다. 비록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가면'을 벗을 수야 없겠지만, 잠자리채로 바람을 낚을 수야 없겠지만, 그는 정말 낚아챌 기세다.


그의 삶의 행적과 사고과정을 오늘의 시각에서 아귀가 딱딱 맞도록 시간과 인과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몇가지
 
대표적 감정으로 칠하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행동하는 그 순간, 심지어

그 이후의 순간까지도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고 중첩되는 수만가지 온갖 단상들이 머릿속에 가득차 윙윙대고

있었음을 힘들여 기억해내고 있다. 거기에는 삶과 사랑을 미화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 단지 자신의 내면에

철저하게 솔직하고자 한다. 그게 그의 '고백'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삶이 마치 모네의 '수련' 작품과 같음을 보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는 그 형체란 게 사실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물감 범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그가 왜 단순하여 아름다울 '사랑'과 '삶'의 궤적을 그토록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아 온갖 진창과 같은 감정과 진실들을 떠올리고 말았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과

지난 사랑을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일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상해엑스포장 내의 한국관, 멀찍이서부터 뽕뽕 구멍뚫린 듯 표기된 글자가 한국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포서 지역보다 포동 지역에 중국관을 비롯한 국가관이 모두 모여있는지라 관람객들이 훨씬 많이

바글대고 있었고, 비단 한국관만이 아니라 일본관, 중국관 모두 사람들이 잔뜩 줄을 선 채 입장을 기다려야 했다.

최근에 중국 칭하이에서 큰 지진이 나고 또다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각 국가관에서 모두 조기를 게양해

비극을 애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관은 조기를 게양하지 않아 중국 내 반한감정을 건드리는 불씨가 되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여튼 아이티 지진이 났을 때와는 너무 달랐던 국내의 분위기는 내 생각에도

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똑같이 사람 목숨이 날아간 비극이었는데.

벽면 가득 색색의 한글이 차 있었다. 무슨 200자 원고지에 빼곡히 글자를 적어 건물 벽면에 둘둘 바른 느낌.

근데 심지어 그 글자들이 이어져 문장이 된다.

"그림을그릴때눈을반쯤감고그려야좋은그림이나온다가장좋은냄새는학교앞문방구에서방금산책받침냄새다서울서인천까지걸을만하다파송송잘끓인라면을당할음식이없다감싸고보듬으면살아난다남자들은대체로피부가맑은여자를좋아한다 서울은잠을자지않는다흐린날밤산속에서는손바닥도안보인다라면은양은냄비에끓여야한다전기통닭은무맛이다지하철에서나와방향을모를때는맞다고생각하는쪽의반대로가면된다얼짱사진각도는사십오도가아니라사십팔도라고한다 양손을가슴에얹고자면꼭가위에눌린다붐비는식당이맛있다코가닮은사람끼리친하다 계란을좀더오래삶으면껍질이저절로까진다토끼는토끼굴에여우는여우굴에서산다"

1층은 한국기업연합관과 마찬가지로 파시드, 벽면이 없이 기둥만 세워져서 트인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5월의 뜨거운 상하이 햇살을 피해 줄을 선 사람들. "닌더펑요따한민구어", 당신의 친구 대한민국.

한국관 벽면은 참, 한글을 가지고 이쁘게 만들어냈지 싶다. 평면으로 글자와 음가들을 배치하기만 한 게 아니라

툭툭 모음과 자음이 튀어나와 있다. 벽면에 빼곡히 들어차다 못해 밖으로 튕겨나오는 듯한 단어들.

한국관 관람은 커다란 대형 패널을 사용한 티비 사이를 걸으면서 시작된다. 한국의 태권도, 영화, 제품, 그리고

미술이니 전통문화 등을 소개하는 영상들, 그리고 연예인들의 축하 노래까지.

녹색 성장을 모토로 잡고 있는지라 역시 녹색 차양이 잔뜩 드리워져있고, 이것저것 뭔가 자연친화적인 냄새를

풍기도록 기획된 것 같다. 기업관에 비하자면 부지가 두배가 넘어서 그런지 공간이 아주 널찍하다.

나무의 느낌을 살린 다른 한켠의 전시공간. 시간이 많지 않아 휘 둘러보고 나오고 말았지만, 따뜻한 느낌의

백열등 조명과 은은한 나무결이 괜춘하다.

한국관 내부의 이동통로에 매달린 등의 갓. 한국어, 영어, 혹은 그림과 기하학적 무늬까지. 한 개만 있으면 꽤나

썰렁하고 어색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러 개 있으니까 제법 그럴 듯 하다.

한국관의 하이라이트,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이거다. 2012 여수 엑스포를 홍보하는 공간, "자신만의 물고기를

만들어보아요" 던가. 화면을 터치해서 물고기 종류를 고르고, 물고기 등에 업히거나 채울 수 있는 기계 종류를

고르고, 그렇게 물고기를 "만들어서" 바다로 내보내면 위쪽의 커다란 모니터에 본인이 만든 물고기가 유유히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다는 거다.


뭔가, 익숙한 그림 아닐까. 4대강에 풀어놓겠다는 그 물고기들. 수온 측정하고 오염도 측정하고 하수 방류

감시하는 그 물고기 발언에 이어지는 과학과 조직의 공명이다. 하아. 끔찍해라.

한국관 마지막 전시물은 이 나무다. 설명에 따르자면 한국과 중국을 상징하는 나무 두개가 칭칭 얽혀 올라가는

듯한 모양이라는데(마치 연리지처럼), 글쎄 잘 모르겠다. 그냥 자세히 보면 엽전을 이어붙여서 나무둥치를

만들었구나 정도, 주렁주렁 매달린 종들이 땡그랑대는 것도 그렇고 엽전으로 만든 둥치도 그렇고, 돈 좋아하는

중국인들 굉장히 즐거워하는구나 라는 인상.

그리고 정말 마지막, 요새 트렌드가 워낙 3D 티비 이런거다 보니까 부랴부랴 세팅되었다는 쌈쏭의 3D TV.

아무리 3D면 뭐하나, 콘텐츠가 별로 재미가 없어서, 게다가 안경을 쓰고 멈춰서서 여유있게 관람하기엔 동선도

전혀 배려가 되어있지 않아서 걍 나와버렸다.

크게 중국어로, 그리고 작게 한국어로, 한국관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잘 가라며 다시 만나자며 인사를 건넨다.

안에서 가장 임팩트있었던 것은 그 뭔가를 연상케 하는 불쾌한 물고기 만드는 체험프로그램, 그리고 밖에서

가장 임팩트있었던 것은 이 건물의 외관. 한글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는데 성공한 거 같다.

그리고 한 100여미터도 채 못 가면, A-10 지역. 조선관(북한관)이 기다리고 있다.

엑스포 사상 첫 참가한 'Paradise for people' 조선관(북한관).







낯설게 만드는 CG효과라거나, 구름갖고 장난치거나 뜬금없이 환타지틱한 화면이 중간중간 끼어들어간 것.

그리고, 마냥 냉막한 듯이 보이던 금자씨가 아파트 계단에서 화들짝 놀라는 장면, 끝내 자기가 살포시 엎어주었던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고 딸에게 돌아가는 장면..복수가 진행되어 정점에 달한 상황에서도 최민식은

야릇하게 끙끙거리는가 하면, 금자씨와 딸 사이의 대화는 정말 실감나게 '더빙'이 되고.

영화가 뱉어내는 스토리에 그저 함몰되려 했다면 순간순간 무기력해짐을 느끼게 되고 만다.


복수 삼부작 시리즈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생각하더라도, 금자씨 이 영화는 글쎄..복수에 어울릴법하지 않은..

다시 말해 온몸으로 '복수'에만 몰입할 수는 없는 인간들의 불철저한 감정과, 복수를 위한 불성실한 자세..그런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아무리 이를 갈고 13년 반동안 계획을 세워나왔대도, 복수란 순식간에 해치워지는 작업도 아닐

뿐더러, 인간의 감정이란 순식간에 평온모드-복수모드-평온모드로 구획지어 구분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금자씨는 착해보이지 않으려 하고 감정을 죽인 듯 목소리를 깔고 눈빛을 예리하게 떠보지만..목사의 예기치 못한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억지로 쓰고 있던 가면을 순간 노출시키고 만다.


딸을 찾으러 간 호주에서도 마찬가지, 금자씨의 행동은 장중하고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우울함과 비장함을

계속해서 가볍게 만들고 점점 금자씨 스스로 복수에 대해 몰입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그래서

결국 아주 크리에이티브한 그런...복수 전략의 생중계..그리고 집단적 복수의 이벤트까지도 끌어내며 최민식에

대한 복수심의 총량을 키워내려 한거고. 그치만 무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순수한 '복수심'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해져가는 복수심을 다시 불붙이려 했던 금자씨의 기도는...그들의 혼란스럽고도 현실적인, 그리고

속물적이랄 수도 있는 감정의 비빔속에서 허망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조커처럼, 입을 쫙째고

웃는듯 우는듯..그렇게 총을 버린다. 13년여의 수감생활을 통해 얻어냈던 그 총을 버리는 순간 복수는 끝나지만.


역시, 그녀가 유괴했던 그 아이는 금자씨에게 웃어주지 않는다. 그나마 함께 백선생을 처단했던 가족들은

뜬금없이라도 '천사가 지나간다'며 상상속에서 자신의 복수심과 그로 인한 모종의 후련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금자씨는 아무도 없다. 그저 속죄의 의미로 잘라냈던 손가락의 깁스가 그녀의 과거 행위와 현재의 감정을

이어주는 하나의 가시화된 상징일 뿐, 조만간 그것은 시간에 쓸려갈 부질없는 이미지.


그래서, '화이트' 두부 케이크를 얼굴에 마구 부비며라도, 하얘져서 다시 딸과 행복해졌으면 한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복수를 마쳐서 행복해져도 된다? 아님 복수를 한 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렇다고 무작정

용서해라.라 이야기할 생각은 감독도 없는 듯한게..관객을 끊임없이 흔들고 낯설게 하며, 봐라봐 나지금 복수에

살짝 질렸거든? 살짝 이쯤서 갸우뚱해보는 건 어때?라고 의도하는 것 같아서.


13년간은 삶의 희망이자 의지였을지도 모르지만, 막상 그걸 직접 실현하는 중에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흐르다

보니 '복수'에 애초 부여했던 순수함이 퇴락하고, 몰입했던 감정이 시들어버렸다.

그다음에는 마치 의무와도 같은 방어전으로, 복수심에 떠밀린 채 스스로 갈피를 못잡게 된 듯한. 하긴 순수한

감정으로 쭉 복수 하나만을 그리는 캐릭터는 영화속에서나 그럴듯 하다.


올드보이에서 느끼던 비장미와 그 파괴적인 아름다움이 금자씨에서 안 느껴지는 이유, 대신 올드보이에서 안

느껴지던 다차원적인 인간의 감정과 흔들림..좀더 인간적이고 불순하며 잡종틱한 혼란스러움이 금자씨에서

부각된 이유. 내가 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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