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엠립에서 프놈펜으로 이동하려는 참,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노 머니, 노 허니'의 격한 티셔츠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이 티셔츠가 작년 여름에 캄보디아에서 대유행이었던 게 틀림없다.

시엠립의 재래시장통을 옆으로 스쳐보내고, 이 조그마한 마을이 옆에 품고 있는 거대하고 웅장한 고대 유적들을

돌아본 기억을 차곡차곡 갈무리.

시엠립 시외버스터미널, 어딘가에서 모여 작은 미니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옮겨가는 식이었다. 처음엔

이런 미니버스를 태워서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지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얼마 달리지 않아 대형 버스들이

잔뜩 주차해 있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황량한 공터에 도착했다.

버스에 짐을 싣고, 아직 출발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6시간이나 시골길을

달려야 시엠립에서 프놈펜에 도착한다니 미리 좀 먹어두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다행히 우리네 버스터미널이 그렇듯 슈퍼가 있어서 다양한 간식거리나 음료도 많이 팔고 있었고, 요기거리가

될 만한 것들도 노점에서 많이 팔고 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저 소세지들은 딱 보기에도 위생상 뭔가 문제가

있어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름에 다시 지글지글 튀길 테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은근 맛있어 보이기도.

노점 말고도 건물로 된 음식점에서도 전부 이런 류의 소세지를 파는 게 왠지 안 먹으면 후회하겠다 싶어 주문.

칼로 잘라놓고 보니 꽤나 먹음직스러운 조리 예 시현, 무슨 고기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맛도 꽤 좋았다.

숙주랑 함께 볶아진 닭고기-아마도..?-요리도 간단히 맛보고,

닭요리처럼 보여서 시켰는데 왠지 뼈도 자잘하고 맛도 살짝 다른 것이, 주인 아저씨한테 몇번을 물어봤지만

영어도 손짓발짓도 (심지어) 한국어도 안 통한다. 결국 이게 무슨 고기인지 밝혀내는데 실패, 왠지 찝찝해서

다른 것들은 싹 먹어치웠지만 이 녀석은 조금 남기고 말았다는.

가게 한 켠에 놓인 평상에서 오수를 즐기고 있는 아저씨, 그리고 선풍기 앞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대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아이 하나. 시선은 티비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벌거벗은 가슴 가득 선풍기 바람을

부딪기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슬금슬금 가게를 빠져나가던 고양이 한 마리, 잘 못 먹었는지 바싹 야윈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 닭인지 비둘기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한 점을 던져주려 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버스 껍데기는 그래도 제법 깨끗하다. 더구나 내부에는 이렇게 화장실도 있었던 것. 여섯 시간쯤 달리니 필요하겠다

싶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아무리 그래도 중간에 휴게소도 설 테고 한국에서도 그정도 달려도 차에 화장실은

없는데 싶어 새삼스레 신기하게 바라봤댔다. 언제든 필요할 때, 급할 때 쓰라는 세심한 배려.ㅋ

그리고 뭔가 우스운 방석. 버스의 각 좌석마다 전부 이 알록달록한 핑크 톤의 방석이 매달려 있었다. 이건 뭐지.

버스 앞에는 그래도 티비도 달려 있고, 캄보디아의 대중 가요를 뮤직비디오랑 함께 쉼없이 틀어줬다. 뭐랄까,

80년대 한국 트로트 가요에 맞춰 성인 배우들이 80년대풍의 과장된 감정 연기를 하는 스토리다. 해변에서 함께

손잡고 하하호호 웃으며 뛰어다니다가, 어느 순간 그 해변에 홀로 앉아 눈물 글썽이며 옷을 쥐어뜯는.

바깥에서 휙휙 풍경이 지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복 2차선의 외길, 이대로 쭉 프놈펜까지 가는

길이라 했다. 엔간한 차 한대 보이지 않는 구간을 한동안 달렸고, 드문드문 스쿠터가 앞에서 알짱대기도 했고.

프놈펜에 거의 들어와간다 싶을 무렵, 똔레 쌉강인지 메콩강인지, 뜨겁던 태양이 한풀 꺽인 듯한 하늘 아래

강폭이 잔뜩 벌여진 수면 위로 배들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강변으로는 수상가옥스러운 가건물들이 비탈지게 세워져 있기도 하고, 양철판을 이어붙인 선박들이 쭉 정박해

있기도 하고. 목욕탕의 쑥탕같은 이벤트탕 색깔이랑 비슷한 강물 색깔이 묘하다.

프놈펜 시내에 들어섰다. 아줌마들이 열맞춰 서서는 쿵짝 리듬에 맞춰서 에어로빅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프랑스 식민지 시절 '인도차이나의 파리'라 불렸다는 이곳은 아무래도 시엠립 같은

시골의 조그마한 동네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비교적 높은 스카이라인도 그렇고 북적대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리고 웃통도 제대로 챙겨입은 꼬맹이들이나 아저씨들도.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쉽게 보이던 원숭이들도. 좀처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얼굴 표정이 역력하면서도

막상 가까이 가거나 관심을 보이면 슬금슬금 도망가 버린다. 뭔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떠나가는 듯.

어떤 면에서는 서울의 골목길에서 자주 보이는 길냥이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프놈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숙소까지 가는 길에 잠깐 들러본 왓 프놈, '언덕 위에 세워진 사원'이란 의미의

왓 프놈은 프놈펜 시민들의 도심 공원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위치도 딱 프놈펜 시내 중심쯤에-약간 북쪽에

치우친 감이 없진 않지만-자리잡고 있다.

얼핏 보면 세느강변 옆의 파리 시내 분위기도 얼추 느껴진다. 가로등과 건물들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렇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저녁의 어슴푸레한 풍경 속에서 촛불빛을 밝혀 바치는 걸로 보아 뭔가 종교적인

지도자 아닐까. 동상에 장식되어 있는 목걸이도 그렇고.

숙소, 호텔 캄보디아나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나니 객실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건 벽면에 찰싹 붙어있던

도마뱀 한 마리. 안뇽.

똔레 쌉강과 메콩강이 합류하는 지점쯤에 호텔 캄보디아나가 서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어디서부터가 똔레쌉강이고

어디까지가 메콩강인지 뚜렷하게 구분하는 거 자체가 좀 넌센스다. 두 줄기 모두 홍수로 잔뜩 탁해진 한국의

강들처럼 온통 흙탕물인걸 뭐. 그치만 조금 낡긴 했지만 꽤 괜찮았던 오성급 호텔에 걸맞는 뷰라고 해두기로.

저녁이나 아침에 해넘이, 해돋이 보기엔 딱 좋은 위치다.

메콩 익스프레스, 시엠립에서 프놈펜까지 여섯 시간 걸려 달리는데 요금은 USD 11$ 이었다.(09. 8월 기준)

버스 짐칸에 짐을 실어주면서 가방에 묶어 두고 식별하기 위한 표찰을 떼어주기까지 하니까 나름 체계는

갖추고 있는 셈이다. 짐표에 그려진 저 돌고래..는 메콩 익스프레스의 로고. 근데 메콩강에 돌고래가 사나.



씨엠립에서 프놈펜으로 가던 길이었다. 털털대는 버스가 흙길과 아스팔트길을 번갈아 달리다가 문득 멈춰섰다.

뭔가 노점이 길게 늘어서 있고 차들도 좀 보이는 게 말하자면 휴게소인 양, 잠시 멈춰서서 휴식도 취하고

화장실도 가고 그러라며 시간을 내준 거다.

노점상들에 쪼르르 달려가서 구경하기 시작, 몇 개 돌아보기도 전에 깜짝 놀라고 만 장면 발견. 다리가 우글우글,

털도 복슬복슬, 게다가 똥배는 오동통통 너구리. 색깔도 먹음직스런 갈색이다.


처음에는 무슨 후렌치 후라이인가 했는데, 날씬한 막대기들이 이리저리 서로 얽혀 있어서.

세부명칭은 싱가폴블루(Cyriopagopus sp.) 교목성(나무위성) 타란툴라, 수명은 10년, 성체가 되면 25cm까지 큰다니..이 아름다운 바디와 화려한 컬러는. 쿠하. 이제 날 타란툴라 브리더라 부르시오.

학명 : CYRIOPAGOPUS SP.

이름 : 싱가폴 블루

서식지 : 싱가폴

성체시 크기 : 25Cm까지 자라는 대형종

적정온도 : 26~32°C

적정습도 : 70~80%(바닥제는 습하게 해주는것이 좋다고 한다)

바닥제 : 바크,에코얼스,피트,버미큘라이트

성격 : 매우 공격적(꺄아~~^0^*)

성향 : 나무 위성

기타 : 싱가폴 블루는 구티오너멘탈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타란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타란입니다.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아직 발색이 나온 성체가 없기에 자세한 정보를 알수없거 대부분 외국사이트에 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유체와 아성체를 구할수있습니다. 유체의 경우는 유목이나 바닥제를 이용하여 약간의 버로우성 은신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이때는 약간의 충격과 진동에도 반응하며 더깊이 숨어버리는 모습을 보이는 걸로 보아 사유난이도가 약간 있는편이지만 아성체의 경우는 지구타이거류의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므로 주의가 필요한 편입니다.



2007년쯤 반년동안 내가 길렀던 타란툴라가 생각났다. 슬슬 손바닥만하게 자라나며 저 신비한 파란빛이 몸통에

드문드문 배어나기 시작하던 녀석은, 2007년 겨울을 못 견디고 얼어죽어 버렸댔다. 집에 저 녀석이 왔을 때

질색팔색하던 어머니에게 "구워먹으면 초콜렛맛이 난다더라"며 설득했었는데 차마 구워먹기에는 반년간 쌓은

정이란 놈이 무서워서. 거미가 일찍이 '사랑은 없다'고 울먹였거늘.





타란툴라야 타란툴라야 거미줄을 뱉어라 안 뱉으면 구워먹으리 초콜렛맛.

타란툴라야 타란툴라야 꾸물대는 밀웜을 사냥해 보아라 꼼짝않고 버로우하면 구워먹으리 초콜렛맛.

거미튀김만 있던 건 아니었다. 정말 거대한 귀뚜라미들이 폴짝 뜀뛰려는 자세 그대로 뒤엉켜서는 난리다.

껴안고 뽀뽀하고 뒤집고 때리고, 지들끼리 난리가 난 그야말로 아수라장. 생명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저 지독하게

밀집된 인구밀도에서 벗어나도록 종이봉투에 좀 덜어갔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종이봉투에 담아 번데기씹듯

오도독 오도독. 나름 빨간 고추와 고수도 들어가 있어서 캄보디아 특유의 향신료 냄새도 부족하지 않을 듯.

이 녀석들은, 뭐랄까. 좋게 말하면 딱정벌레. 나쁘게 말하면 거대 바퀴벌레. 딱정벌레라고 하면 왠지 1그램쯤은

먹고 싶은 마음이 동할 수도 있겠는데, 바퀴벌레라고 하면 전혀 먹고 싶지가 않은 거다. 반질반질한 껍질이

기름에 튀겨졌으니 꽤나 바삭바삭할 거 같긴 한데. 근데 사진상의 에러는 저 절대 먹고 싶지 않은 빛깔의

징그럽게 생긴 곤충 하나. 아니다, 쓰면서 생각해 보니 왠지 색깔이 빨갛게 잘 찜쪄진 꽃게 같기도 하고.

그 외에는 여느 시골의 노점과 딱히 다른 풍경은 없었던 거 같다. (워낙 저 거미와 귀뚜라미와 바퀴(딱정)벌레의

생생하게 튀겨진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길가에 연해서는 간이 '구루마' 옆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숫기없는 소년이 하나 있었다. 왠지 저 녀석,

거미튀김을 한 입 물려주면 기운이 번쩍 나서 구루마라도 뒤엎지 않을까, 마님을 찾진 않을까 싶은 상상의 나래.

차에 다시 올랐는데 바지만 입고 자전거를 타는 까무잡잡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안장 높이나 전체 크기가

자신에 비해 훨씬 커보이는 자전거를 타고는 노점에 와서 뭔가를 사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계속 안장에

찡겼는지 엉덩골 사이에서 옷을 잡아빼는 번거로운 손길이 눈에 밟혔다.

이내 출발, 다시 평화롭고 뜨겁지만 나른한 캄보디아의 시골길을 따라 먼지 풀풀 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시엠립에서 프놈펜까지는 버스로 6시간, 중간에 몬도가네 튀김들을 보고 놀란 가슴 진정시키다 보니 그 정도

시간은 금방 흘렀다.







뚜얼슬랭 박물관의 리플렛. 프놈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킬링필드'에 갈 짬이 안 난다면 시내에 있는

여기는 꼭 한 번 들러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

(관련 포스팅 : 캄보디아. 2만명의 원혼이 1명의 귀중함을 일깨우다, 뚜얼슬랭 박물관)


75년 폴 포트가 집권하여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견될 만큼의 극단적이고 광적인 정책을 펴면서, 외국어를

알거나 책을 보는 사람, 가르칠 능력이 되는 사람 등 지식분자스러운 사람들은 전부 수용소에 갇히고 외국과

내통했다거나 민심을 교란시킨다는 혐의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런 광기가 이어진 게 약 4년.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 혹은 열등감, 부자에 대한 억울함과 불공정한 제도에 대한 멸시, 구조와 개인에 대한

감정과 이성적 판단이 뒤엉켰고, 그에 더해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경험이나 트라우마 따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다. 그렇게 잔뜩 난마처럼 뒤얽힌 맥락에서 모두의 모두에 대한 증오만 남지 않았을까.

평범한 고등학교였던 곳이 보안본부이자 수용소로 전환되면서 약 2만명의 사람들이 끌려들어가서는 단 6명만

살아나왔다는 대표적으로 무시무시한 수용소, 프놈펜 시내의 뚜얼 슬랭 수용소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꺽어

도착한 건물은 웬지 스산한 느낌, 아침나절의 선선한 공기조차 위축시키는 느낌은 뭘까. 검정개도 웬지, 지옥문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개처럼 흉맹스러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거겠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다. 맘편히 아침부터 관광할 만한 장소는 아니니까.

매미니 뭐니 곤충들의 소리라도 있어야 할 법 한데 온통 조용한, 어딘가 추모공원이나 국립묘지에 온 듯한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나무에 그어진 칼자국 하나도 범상해 보이질 않았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안에 들어서서 돌아본 바깥의 풍경. 여기가 수용소였을 때도 밖의 건물들은 저렇게 바싹

세워져 있진 않았겠지. 사방에서 총을 든 병사들이 초소에 올라 감시하고 있었을 테고, 서치라이트가 문득

깜빡했다는 듯 한바퀴씩 빙글빙글 돌았을 거고.

기괴한 웃음이다, 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 올려 웃고 있는 느낌, 눈은 전혀 안 웃고 있는 걸. 아마

이 피비린내나는, 셀수없이 많은 생명이 집중적으로 죽어간 공간에 붙을 표지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웃는

표정을 지으려 해도, 그리려 해도 저렇게 딱딱하고 경직된 표정밖에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웃지 말라는 표지와 더불어 붙어 있는 규정들, 방문자에게 요청되는 규정인가 하고 읽다가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 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었다...뭐 하나 제정신박힌 규정이 없지만 특히 6번. 하아...

고문하다 소리지르면 안된다라니, 개꼽창들이 죽도록 갈구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꼬투리잡겠다는 얘기.

1층에 있던 누군가의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조각 하나 없이 앙상한 철망만 남겨놓고 있으니, 게다가 이런 공간에

있으니 상상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고문기구로 쓰였을까, 팔다리를 묶고 때렸을까, 설마

이게 침대길이보다 신체가 길면 잘라버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아니겠지..하며.

뚜얼 슬랭 박물관은 총 4개의 동으로 되어서, 고문실, 살해하기 전에 찍어둔 '영정사진', 고문도구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여기는 아마도 수용자들의 생활동쯤 되었나보다. 혹은 고문실이었거나, 고문실도 겸했거나.

낡아빠진 창문틀, 아무런 칠도 안 된 채 나무 그대로의 헐벗은 색깔과 질감을 드러낸 것들, 그리고 저 뜬금없는

농구골대 같은 건, 고문시설. 저기에 사람을 매달아 커다란 물독에 머리를 박아놨다고 한다. 날것의 폭력이다.

상상해보면 정말, 무지막지한 야만이다. 시키는 사람이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나, 짐승처럼 저기에

매달린 채 허우적대며 목숨을 구걸했을 사람이나.

아마도 행정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거다. 살해하기 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겁에 질린

그들의 표정이 보여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6월 광주항쟁을 다룬 책들에서 저런 사진들은 처음 접했었다. 겁에 질렸던 표정이었겠지만, 경직되면서 표정은

빳빳하게 굳었고 더이상 생전의 이름으로 신체부위를 하나하나 식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단정히 눕혀져 있는 가죽가방같은 존재들. 사람 한 명 죽인다며 달려오는 살인마에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욕하고 삿대질이라도 하겠지만, 이 엄청난 대규모 도살 앞에선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듯한 쇠사슬, 수용자들을 둘둘 엮어서 끌고 다니기 편하도록 쓰이던 장치가 아닐까 싶다.

시멘트 건물의 묘한 냉기가 선뜻한 기분을 돋게 만들었다. 2층으로 오르던 길에 발견한 낙서들. 아, 여긴

1975년까지도 아이들이 가득하던 학교였던 거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란이 가득했을 곳.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울부짖고 절규하고 죽어가는 소리로 지옥도를 그려냈을 곳이기도 하다.

누굴까, 간수가 쓰던 책상인 거 같기도 하고. 70년대 후반에 쓰이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니,

더구나 이런 장소에서 저렇게 보존된 걸 보면 왠지 섬뜩하다. 아마도 이런 섬뜩함, 인간이 얼마나 흉폭하고

무지하게 야만스러울 수 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런 장소가 필요한 거다.

그 뒷켠에 서 있던, 캄보디아가 잠시 '캄푸챠'라는 국명으로 광기어린 폴 포트 치하에서 신음하던 때 공산당

지도자들의 면면. 이들은 뭐가 좋아서 저리 활짝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가장 무서운 거다.

사실은, 그들의 교조화된 신념이 무서운 거다. 부르조아, 쁘띠부르조아, 인텔리겐챠가 조장한 자본주의와

뿌리깊은 봉건적 질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빈농과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열정이 단순화된

선악구도의 복수전으로 치달으면서 사회 전반을 퇴행시키고, 문명과 인류 지성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쉽게 재단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런 식의 맑시즘을 빙자한 근본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악에 대항하는 일종의 도덕적, 이상적 혁명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였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서구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기까지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눈먼 광신이 빚어낸 참극은 이토록 생생할지언정, 무엇이 이들의 문제의식을

자극했고 심지어 득세하게 했는지 그런 부분은 짚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기득권에 기댔던 정치세력에 대한

반감, 기득권 세력만이 호의호식하며 풍기는 부정부패의 구린내에 대한 혐오, 그리고 양극 세계질서의 패권성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이런 참극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애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순수해지라느니, 깨끗해지라느니, 그런 도덕군자같은 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그렇다.

이들이 자라나서 제각기의 위치에서 이해관계를 겨루게 될 테고, 그 와중엔 어쩔 수 없이 갈등과 큰 소리가

빚어지게 되는 거고, 그 문제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진지하게 해결하려 노력하는지가 관건이어야지 시끄럽다고

혹은 '날것의 소란스러움/폭력'이 싫다고 그저 조용히 하라며 무질러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 싸우는 거 보고

애들보기 부끄럽지 않냐고 흔히들 말하는 건, 그래서 대개 무지의 소치다. 정치인들은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조용히 입닫고 있다가 이런 대량 학살도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터져서 내전도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마도 수용자들의 숙소로 쓰였던 듯한, 철조망이 한층 삼엄하던 한쪽 건물. 잔뜩 녹슨 철조망이지만 여전히

날선 이빨은 그대로다. 뚜얼슬랭 수용소는 안전하고 독성없는 '역사'의 한장면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사실

그때의 제3세계가 부딪히고 있는 국제정치적, 국내정치적 문제는 대부분 그대로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

미국의 피벗(pivot)으로 제한된, 게다가 무능한 외교, 계층간 부의 격차 심화, 기득권의 부정부패...

안에 들어가니 이건 수용시설이라기보다는, 사육시설이다. 좁디좁게 구획된 공간,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발이나 손에 채워졌을 철제 차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정말 불결하고 간소한 화장실까지.

크메르어인지 뭔가 언어가 잔뜩 휘갈겨져 있는 한쪽 벽, 수용소로 쓰이기 전 아이들이 해둔 낙서일까 아니면

수용시설에 갇힌 누군가가 적어둔 글일까. 혹은, 비극이 벌어진 후 찾아온 누군가가 사람들을 기억하며 남긴

추도문일까.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확연히 짧아졌다. 남국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손발도 차갑고 가슴도 냉막하다. 이 공간은 그토록 서늘했다. 서늘하고, 시큰하고.

어딘가 굉장히 폐쇄된 채 어두침침한 공간, 바깥을 내다보기엔 너무 시늉만 해둔 창문, 하얗게 번지는 햇살.

마지막 건물동에서는 78년에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최초로 둘러봤던 한 서양인의 기록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폴포트의 초대를 받고 당시의 캄보디아 이곳저곳을 둘러봤던 그는, 그 거침없는 파괴와 재건의 움직임을

다소간 경탄의 눈으로 바라봤고, 일종의 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우호적이었던.

이런 식으로 당시의 사진과 감흥을 남겼고, 오늘날의 시점-역사적 평가가 어느정도 고착된-에서 다시 평가한

아이디어들을 함께 남겨 놓아서 훨씬 의미심장했던 거 같다. 훨씬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물론 그렇다고 당시라 해서 그 비판의식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유의해 볼 만한 점.

아마 그가 자신의 과거 사유를 반성하고 남들 앞에 이렇듯 샅샅이 끄집어내어 재평가하는 이유는, 이 메세지를

남기기 위함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돌봄, 배려를 망각한 채 진행되는 래디컬한 혁명. 누군가의 피와

목숨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의 비정함이나 과격함의 틈바구니에서 개별 인간들을 챙긴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제 그런 폭력적인 형태의 전복은 가능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경로든 핵심은 그거다. 사람을 생각하기.

더구나 일국 차원에서의 '변혁'이 가능한지도 문제. 자립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도 참 지난한 문제거니와,

자립경제를 갖춘다고 해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 이후 외부로부터

지원받는 백군세력이 정상적인 국가 경제발전을 방해하고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로 이탈하게 했듯.

꽤나 많던 전시물들을 다 돌아보고 문득 답답해져서 수용소의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모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한 곳이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층은 물론 2층, 3층에도 건물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을 틈에는 전부 꽁꽁

철조망이 둘려 있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하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혁명 국가'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단하겠다는 집요한 의지일 거다. 사실 이건 모든 국가에서 법을 집행하며 국민을 규율하는

방법이랑 똑같다. 다만 조금 더 날것의 형태일 뿐. 사형수의 자살을 막고 목숨을 붙여놓은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한 거다.

그들 수용자들이 행정적인 이유로, 아마도 세상에서 '제거'되기 이전의 서류 절차를 위해 저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간 2만명, 여섯 명을 제외하곤 전부 저 의자를 거쳐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거다.

참. 단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무참히도 해치웠다. 사람 한 명의 목숨이나 만 명의 목숨이나 경중을 따질 일도

부등호를 사이에 꼽을 일도 아니지만, 참 적나라하게 막장이었던...

나오기 전, 그들에 대한 위령탑이 서 있는 마당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이런 광기 어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념과 신앙과 이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길. 사람 만 명이나 한 명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그런 인식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민주주의, 사람을 위한 정치체제는 피를 먹고 자란다. 사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렇게

시뻘겋게 피에 물든 장면들 한둘 이상씩은 갖고 있는 거다. 이런 비극은 어느 한 지역, 한 시대에 국한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연되고 되살아날 수 있는, 다만 잠복해 있을 뿐인 사건일지 모른다.

앙코르 톰에서 승리의 문을 지나, 톰마논과 차우 싸이 떼보다 사이를 가로지르고 나면, 문득 쌓여있는 돌무더기가

보인다. 예전에는 돌로 쌓아 만들어진 돌다리였을 것만 같은 아치형이 반복된 형태의 돌무더기. 많이 허물어졌다.

울룩불룩하게 힘이 들어간 근육과 다이나믹하게 꼬인 채 돌무더기를 움켜쥔 모습은, 금세라도 돌을 집어던질

듯한 살벌한 기세다. 조용하고 침착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랄까.

그런 무시무시한 나무들에 꼬불꼬불 흔적이 남아있다. 나무들은 돌들에 상처를 내고, 개미들은 나무에 상처를 낸다.

바로 이 녀석들. 지금도 쉼없이 꼬물대며 나무를 바스라뜨리는 녀석들.

뭔가 수박씨만한 녀석들도 보이고, 작은 놈들이라고 해도 여기 녀석들은 원체 먹을거리가 많아서 그런가 굉장히

억세보이고 강인해 보인다. 딱 보기에 덩치도 그렇고 딴딴해 보이잖아.

꺄아...징그러. 저번에 올린 타이완 화시제 야시장의 뱀 사체들과 더불어 혐짤이랄 수도...있으려나.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묘사된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세 개의 제국을 묘사하는 듯 한,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뚜얼슬랭 박물관에서 발견한 시.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집권했던 약 5년간 2만여명의 크메르인들이 끌려들어가

단 6명만 살아남았다는 악명높은 뚜얼슬랭 수용소,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기를 상상케 해주는 시.


사랑, 결혼, 웃음, 게임, 학교, 신발, 빵, 온통 금지된 것들의 목록으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No hope, No life

A third of the people didn't survive.

The regiem died.




앙코르톰 동쪽 입구에 연해 있는 두 개의 사원, 톰마논과 차우 싸이 떼보다. 동쪽 입구에서 뻗어나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사원의 위치나 형태가 흡사하여 쌍둥이 사원으로 여겨진다고 하지만, 앙코르 유적에 대한

흥미를 더해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톰마논은 앙코르 왓을 세운 수리야바르만2세 때 세워진 사원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에서 그 유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직 앙코르왓을 보기 이전이었는지라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닮았는지는.

천년도 넘은 사원의 무게감, 천년을 두고 돌덩이에 뿌리를 내렸을 이끼들도 돌의 무게감을 배웠다.

그리 크지는 않은 사원이라 한 바퀴 훌쩍 돌아보는데 한 삼십분 정도. 사실 반대쪽의 '차우 싸이 떼보다'란

기묘한 이름의 사원이 신경쓰여서 조금 살살 돌아봤다.

글쎄 길건너편엔 무슨 테마파크에서 봄직한 반짝반짝거리는 사원이 세워져 있었던 것. 똑같은 생김이고 방금

돌아본 톰마논과 같은 장식의 구조지만, 때깔이 너무 생경하다.

대충 뜨거운 태양에 눈먼 채로 보면 나이를 좀체 가늠할 수 없고, 부분부분 과거의 원형이 보전되어 있는 곳들이

있어 그래도 완전 복제품이라거나 100% 신품은 아닌 거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중간중간 두드러진다.

이런 식으로. 감히 인간의 손으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시간의 씻김, 그 자연스런 흔적과 함께 할 때 너무도

티가 나는 반듯반듯하고 번쩍번쩍하는 복원 부위. 시간이 지나면서 갓 지은 티가 좀 씻기고 나면 톰마논과

쌍둥이 사원으로 지어졌다는 게 좀더 실감이 나려나.

사원들 옆에 간단하게 지어올려진 천막, 그리고 보기만 해도 너무 편안해 보이는 해먹.

오랜만에 보는 봉긋한 사자녀석의 엉덩이. 이 녀석은 왠지, 봉긋보다는 불룩하단 표현이 맞을 듯 하기도.




박쎄이 참끄롱(Baksei Chamkrong), 박쎄이 참끄롱, 박쎄이 참끄롱, 뭔가 묘한 운율감과 리듬감이 혀끝에서

대롱대롱 살아난다. 앙코르왓과 앙코르톰 사이에 끼어있는 조그마한 사원, 그냥 모른 채 휙 지나기 쉬울 정도로
 
조그맣다. 더구나 다른 후대의 사원들과는 달리 탑 하나 덜렁 있는 일탑형 사원이어서, 이후의 화려하고

울룩불룩한 사원들의 실루엣과는 영 달리 한번 볼록, 하곤 끝이다.

꼭대기까지 끙끙대며 기어올라가 보았다. 저 구멍 안에는 뭐가 있을까 싶어서. 팔을 괴고 누운 와불이 놓여있고

앞에는 향과 꽃이 빼곡하게 들이차있었다. 원래 이 곳은 시바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라던데, 사실 이 땅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불교도인 거다. 지금처럼 민족 국가 단위로 그 땅위의 소유주를 주장하고

승인했으니 망정이지, 과거의 힌두교 선인들이 보았다면 당장 제단을 뒤엎고 불상을 깨뜨렸을 일이다.

가파른 벽돌탑, 붉은 기가 언뜻언뜻 배어나는 모퉁이에서, 벽면 귀퉁이에서 마성의 매력이 뿜어져

나온다. 저런 색깔은 아마 캄보디아의 사원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낑낑대며 내려오는 길, 70도의 각도라곤 하지만 체감하기론 거의 90도에 가깝다. 모로 비튼 발바닥이 겨우

지탱해낼 만큼 깔려있는 계단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어느 순간 에잇, 귀찮은데 훌쩍 뛰어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 박쎄이 참끄롱은 '날개로 보호하는 새'를 의미한다고. 그냥, 사원 안에서는 그다지 새라거나 날개라거나

따위의 이미지가 구현된 부분은 못 봤던 것 같다.

뚝뚝을 타고 첫날 자전거로 돌며 만났던 앙코르 톰 내부를 다시 한번 돌아나오는 길. 정말, 자전거로 달릴 때와

차로 달릴 때, 그리고 걸어서 볼 때 눈에 잡히는 풍경이 다르다. 자전거로 달릴 때는 물론 언제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차 안에서나 걸어가면서 뒤로 흐르는 풍경 따라 고개를 한없이 돌릴 수는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시 만난 앙코르 톰 '승리의 문', 안녕, 크메르의 미소씨?

왠지 전에 봤을 때랑 분위기도, 뉘앙스도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아서 잠시 뚝뚝에서 내렸다. 이 녀석,

햇살의 강도니 각도니 그런 것들에 따라 느낌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거 같다.

45도쯤 비튼 각도, 약간 아래에서 위로. 조명이 살짝 위에서부터 스미도록.

'크메르 미소'씨의 얼짱 각도 뽀샵사진.





정오의 햇볕이 내리쬐어 그림자라곤 발밑에서 조금 채일 뿐인 시간, 근 세네시간 동안 돌아보아도 아쉬움이

남던 앙코르왓. 다른 곳을 먼저 돌아보길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야말로 크메르 문화의 정수, 롤루오스 유적부터

북쪽 반띠아이 쓰레이의 모든 시도들은 앙코르왓에서 만개하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치 않다면 정말 여기만

봐도 괜찮겠다, 싶기도 하고. 물론 다른 자잘한 사원들이 갖고 있는 나름의 매력과 운치는 모두 생생하지만.

내려서 돌아나오기 전, 포즈를 잡고 계신 스님을 보고 슬쩍 풍경에 담았다.

명예의 테라스 위에서 바라본 앙코르 왓의 참배로. 저 끝에 서문이 보인다.

참배로를 걸어나가면 느꼈던 충만함. 앙코르왓의 구석구석까지 스며있는 과거와 현재의 다감한 손길, 여기가

어딘지 언제인지도 잊을 만큼 강렬하게 감각을 자극했다.

다섯번째 선물상자를 지나 서쪽문, 앙코르 왓 선물 오겹상자를 품고 있던 해자 위로 나왔다.

연못 위로 요요한 구름들이 유영중이다.

앙코르 왓의 전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연못, 아니 그 이상을 담아내고 있다. 앙코르 왓이 이고 있는 하늘까지.

그리고 앙코르 왓을 떠받치고 있는 벽돌로 다져진 지면까지.

돌아나서는 길, 무려 200여미터나 된다는 해자를 걷는다는 행위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더욱 뚜렷이 느끼게

해주었다. 왠지 정말 어딘가 '피안'에서 '차안'으로 돌아온 느낌. 조금씩 사물이 일상적인 것으로 돌아오고,

바닥의 돌 하나, 돌사이 품어진 풀 하나를 조금은 범상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조금은 둔감하게 세상을

받아들여도 된다는 것, 그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한 게다.




내부에는 거의 장식이 없는 밋밋한 벽면으로 일관하던 앙코르 유적들, 앙코르 왓쯤 오니까 내부에도 무엇인가

장식을 하려 했던 시도들이 남아있다. 가슴엔 동그라미 두 개가 선연한 미완성의 압사라 여신들. 완성되진

않았지만 압사라 여신들의 둘레를 휘감고 있는 오오라같은 불꽃 장식이 멋지다.

많은 불상들이 머리가 부러진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유독 해맑게 웃으며 머리를 지키고 있던 불상 하나.

입술엔 누가 뭔가 발라놓았는지 쥐를 잡아먹었는지.

천장 드문드문 도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도안 자체가 꽤나 복잡한지라 일일이 구분지어 색칠하려면 굉장한

수고로움이 따랐을 거 같은데, 어느 한 군데라도 온전히 남아있으면 미루어 짐작이라도 하련만.

여기도 도서관이란다. 왜 이렇게 사원 내부에 도서관 건물이 많은가 했더니, 그런 건물들은 당시의 귀중품이던

'책'과 함께 제사용 집기나 향료, 심지어는 음식물까지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고 한다. 게다가 도서관 위치에

따라 담당하던 의례의 대상과 운영시간이 달랐다고. 남쪽 도서관은 달이 떠오르는 기간에, 북쪽 도서관은 달이

지는 기간에 각각 다른 신에게 의례를 바쳤다고 한다.

네모난 상자 안에 작은 상자, 그 상자 안에 더 작은 상자, 그런 식으로 앙코르왓을 까는 재미가 있다. 그러려면

우선 상자 하나를 열고 들어가기 전 상자의 네 바깥면을 꼼꼼히 살핀 후 상자 안쪽 네면을 다시 또 살피게 된다.

그리고 나선 다음 상자로 옮겨가는 식이다.

상자에 비기자면 앙코르왓은 총 다섯 개의 상자 안에 있는 셈이다. 그 중 두 개의 상자를 열어젖히고 나면

명예의 테라스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크메르 왕이 외국사신이나 고관대작에 베푸는 연회가 열렸을 이 테라스는

이제 여행자를 위한 '통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앙코르 왓의 선물상자 중에서 가장 포장이 화려한 건 세번째 상자, 명예의 테라스를 휙 지나치지 않고

외곽으로 한 바퀴 삥 돌면 나타나는 '포장지'다. 사면에 가득 벽화가 그려져있는데, 혹자는 앙코르왓의 백미는

건물의 조형미나 실루엣이 아니라 이 벽화라는 이야기도 한다.


남북으로 187미터, 동서로 215미터, 둘레가 총 800여 미터에 이르는 '세번째 상자 겉면 포장지' 회랑을 따라

각각의 주제를 가진 8개의 벽화가 조각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오른쪽으로 돌며 관람한다고 한다. Godorization.

가장 섬세하고 볼만하다고 생각했던 서쪽회랑 남쪽방면, 그러니까 바로 '명예의 테라스' 오른쪽에 펼쳐지는

'쿠륵세트라의 전투' 부조. 아무래도 인도 역사에 길이 남는 대회전을 새겼으니만치 스케일도 장대하고 등장한

사람들 하나하나의 묘사가 꼼꼼했다.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난투극의 한 장면을 펼쳐 보이는 이 '쿠륵세트라'

전투가 바로 체스와 장기의 게임 규칙으로 전승된 것이라 한다.

수리아바르만 2세의 행렬도를 조각한 두번째 벽면을 넘어, 세번째 주제는 '천상과 지옥'. 굴비처럼 둘둘 엮인채

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도 보이고, 소처럼 코뚜레를 하고 끌려가기도 한다. 판결을 받는 영혼들의 모습, 그

판결에 따라 지옥으로 던져지는 영혼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칼로 베이는 벌을 받기도 하고, 온몸에 못이

촘촘하게 박히는 형벌을 받기도 하는 모습들이 적나라하다.

앙코르왓이 지금과 같은 '관광자원', 혹은 '인류유산'으로 보전받게 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300년

전만 해도, 이렇게 자신의 아내 무덤을 앙코르 왓 내부에 세워두기도 했던 거다. 지금 만약 누군가 여기에다가

자신의 가족을 몰래 묻는다면 심각한 문제로 비화되고 끝내 쫓겨나겠지만, 그래도 300년쯤 먹은 건 나름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획득해 버렸다. 덕분일까, 천년짜리 앙코르왓과 놀다보니 무덤이 조로했는지 꽤나 오래고

낡아 보인다. (그리고 조잡해보이기도 한다.)

이곳을 당시 다스리던 사람이 아내 무덤을 여기에 썼다는 내용을 담은 기록이 남아있다. 뭐랄까, 한국으로

치자면 '음택'을 잘 쓰고 싶었던 욕심일까. 그치만 이렇게 사람이 늘상 붐비는 곳이 되고 말았으니, 그 사람이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다.

약간 중국식의 냄새가 난다 싶었다. 명예의 테라스 정반대쪽, 그러니까 동쪽 회랑에 있는 그림들은 애초 기획된

기간에 끝나지 못하고 무려 400여년 동안 미완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미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서

중국풍이 섞이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세력이 예전만 못했어서 그런지 딱 한눈에 보기에도 이전 벽화들만

못하게 다소 치졸해 보인다. 저기 저건, 무슨 도인이 하나 캄보디아에 등장해 버리셨다. 이런.

세번째 선물상자의 마지막 네번째 바깥면, '신과 악마와의 전쟁'이 묘사된 곳이다. 여기저기서 거대한 동물과

신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악다구니를 쓰는 중이다.

싸움 장면에도 지쳐버려서, 잠시 앉아서 쉬려는데 바깥쪽 풀밭에 꼬물꼬물 뭔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저게

뭔가 했더니 원숭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이리저리 노닐고 있었다.

털의 상태로 보건대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곧게 뻗은 꼬리는 저 아이들이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임...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 캄보디아에선 원숭이를 쉽게 볼 수 있다더니, 앙코르왓에서도 원숭이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도 드문드문 골목길에서 원숭이를 발견해서 첨엔 깜짝깜짝 놀랐지만

나중엔 익숙해져 버렸댔다.)

마지막 부조 벽화, 왠지 원숭이들이 우글우글 나오는 게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서유기'의 오리지널 버전인가

싶다. 서유기의 등장인물 '손오공'이 동남아 신화로부터 유래했다더니. 마침 원숭이들이 정글에서 뛰노는-

정확히 말함 네 발로 꼬물대며 기어다니는-모습을 보고 나서인지 부조된 원숭이 얼굴들이 확확 다가온다.

수고했어요~ 세번째 포장지는 다 둘러봤으니 이제 들어가 보도록 해요, 라며 금방이라도 미사일이 튀어

나올 것 같은 강철 가슴을 가진 압사라가 말했다. 명예의 테라스에 올라서니 앙코르왓 중심부가 보인다.




앙코르 왓으로 향하는 길, 며칠째 들어서는 길목이라 낯설지 않은 그 길에 노란색 풍선이 떴다. 앙코르 왓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다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그렇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이미 세계의 이름난

유적들의 전경은 눈에 많이 익숙해져 있는 거다. 그것들을 실감하기 위한 첩경은 그 전체적인 그림에 세세한

자신만의 디테일을 새겨 넣는 것,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며 세세한 부분들을 가슴에 담는 것이라 생각한다.

앙코르 왓에 들어서려면 무려 이백여 미터에 달하는 해자 위에 놓인 한 줄기 참배로를 지나야 한다. 바닥에

깔린 포석들이 불규칙한 듯 하면서도 잘 짜맞춰진 채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렇게 천년을 버티고 있었다.

참배로 가운데, 이를테면 중앙선 같은 위치 왼쪽으로는 살짝 돌들이 일어서있긴 했지만 유독 그곳만 무너진 건

뭔가 이유가 있어보일 만큼, 다른 곳의 포석들은 탄탄하게 자기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중앙선 왼쪽과

오른쪽의 건축 연대가 다르거나 건축 책임자가 다를지도 모르겠다.

참배로 옆으로 보이는 해자, 그리고 무성한 정글의 수풀. 해자는 방어의 목적으로 건설되기도 했지만 이 사원,

앙코르 왓에서 행해지는 의례로 참석하기 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기 위한 정화의 공간이기도 했다고 한다.

더러운 진흙속에서 싹을 틔워 미끄덩대는 녹조류 가득한 연못물을 헤치고 나와 봉긋 피워올려지는 연꽃봉오리.

게다가 아침에 꽃잎을 열고 저녁이 되면 꽃봉오리를 다시 닫는 그 모양이 세계의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고

여겼댄다. 앙코르 왓의 연꽃봉오리 모양 사원보고 여봐라는 듯한 진홍빛 연꽃.

해자 안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공간이 열린다. 예전에 살던 곳 근처 올림픽공원이 1kmX1km의 사이즈였다고

하는데, 이건 그보다 더 크다. 동서로 1.5km, 남북으로 1.3km. 그 공간이 오롯이 앙코르 왓을 위해 바쳐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코르 왓은 비슈누를 위한 힌두교 사원이니까, 비슈누에게 바쳐진 셈이다.

아침에 들어서니 태양이 스물대며 떠오르는 걸 바라보며, 동쪽을 향해 걸어야 했다. 구름이 슬쩍슬쩍 태양을

가릴 때마다 격하게 달라지는 빛의 농밀함.

앙코르 왓은 무려 37년 동안 지어진 사원이라고 한다. '왓'은 불교 사원을 뜻하는 단어로, 애초에는 단순히

'앙코르'라고 불렸다고 하며 왕궁이자 사원이자 도시의 역할을 겸했다고 한다. 비록 목조로 지어졌을 왕궁과

가옥은 사라져버렸지만 약 2만명이 거주했던 도시의 분위기는 얼핏 상상해 볼 수 있다. 아직 조금은 이른

시간임에도 바글대기 시작하는 여행객들.

앙코르 왓은 단순히 사원 하나가 아니라 도서관, 연못 등의 각종 '부대시설'을 포함한 공간이다. 참배로를 따라

가는 길 좌우에 포진해 있는 신비한 느낌의 도서관. 건물이 저렇게 '꼬질꼬질'해지기 전에는 얼마나 이뻤을까

싶을 정도로, 뭐랄까 다보탑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언뜻언뜻 비치는 것 같다.

도서관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보니 내부는 너무 단촐하다. 장식도 없고 담백해서, 문밖 풍경에 눈에 간다.

앙코르 왓 중앙성소를 바라본 사진들. 구름이 두껍게 내려앉았다가도 깜빡했다는 듯 금세 고개를 내미는 햇살

덕분에 앙코르 왓의 실루엣이 선명하다.

앙코르 왓은-물론 다른 힌두교사원들도 그렇지만-좀더 선명한 피라밋 구조를 느낄 수 있다. 중앙으로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한 층씩 고도가 올라가는 거다. 힌두신들이 산다는 메루산, 그 세계 자체를 지상에 구현해 놓으려는

의지가 담겼지 않을까, 사방에서 사원을 수호하고 있는 동물상들.

본격적으로 사원 내부로 들어서기 직전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아직 해가 본격적으로 성내기 전이라 그다지

힘들진 않았지만,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쯤 되면 그늘이 귀한 꽤나 고생스런 길이 될 거 같다.

사원의 북서쪽 귀퉁이, 꽤나 많은 여행객들이 사원 내부로 들어섰는데 워낙 큰 공간에 풀려서 그런지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연밥무늬 창살은, 외부로부터의 가혹한 햇살을 막고 내부의 습기를 밖으로 원활히 빼내는데 적합한

형태로 고안된 것이라고 한다. 그에 더해 안에서는 밖을 잘 볼 수 있지만 밖에선 안을 잘 볼 수 없단

점도 고려된 게 아닐까 싶다.

입구에서부터 건물 내부를 휘휘 도는 회랑이 시작하는 지점, 두 명의 여신이 양쪽을 지키고 서있었다.

근데 왜 저렇게 가슴과 코가 맨들맨들 닳아버린 거지, 여기도 뭔가 저런 데를 부비부비하며 소원을 빌면 애기가

생긴다거나, 남자아이를 잉태한다거나, 로또 대박이 될 거라고 믿는 분위기인가.

원래 여기는 물이 저만큼 차 있어서 목욕재계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앞선 해자에서

'상것'들과 함께 몸을 섞기 싫은 '높은분'들을 위한 VIP용 욕탕이랄까.

오랜 연원의 유적들을 보면 늘 돌빛깔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잊기 쉽지만, 사실은 당대의 모습은 꽤나 화려한

채색과 치장이 되어있었던 게 대부분일 거다. 이집트의 피라밋이나 오벨리스크, 상형문자 가득한 사원들도

사실 굉장히 현란하고 화려한 아프리카풍의 색감이 가득했었지만 전부 씻겨지고 벗겨지고. 여기 역시 마찬가지

채색의 흔적만 아스라히 남아있었다.

반띠아이 쓰레이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정교한 문양들, 각진 모서리가 여전히 쫑긋 서있는 게 신기하다.

중앙사원의 턱밑에서. 아쉽게도 앙코르왓의 최중심부에 서있는 중앙성소에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무려 70도에 이른다는 가파른 계단은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인간이 아닌 신을 위한 계단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이라고 저런 계단을 잘 오르리란 보장은 없을 텐데. '신성'이 꼭 가파른 계단 오르기 따위로 증명될

건 아니겠지만,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드러내는 참신한 기제인 거 같기도 하다. (다른 식으로 신적인 걸 어떻게

증명하고 나타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꽤나 골치아픈 문제인 거 같다.)

중앙사원을 바라보며 둘레를 한바퀴 탑돌이하듯 돌아 보았다. 돌로 반듯하게 다져진 바닥, 돌로 만들어 세워진

벽, 돌로 만들어 끼워진 창, 그리고 돌로 만들어 올려진 지붕과 장식들까지. 온통 돌이다.

중앙사원에 있는 탑들마다 사받으로 뻗은 계단이 있지만, 서쪽으로 향한 계단들은 약간씩 경사가 완만하다고.

사람들이 탑에 오르내리려면 서쪽 계단으로만 다녔다고 한다.

한쪽 벽에 조각된 압사라 댄스를 추고 있는 여신들. 딱히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듯한 분방한 자세와 표정이 딱

맘에 들었다.

앙코르 왓은 항상 어딘가 조금씩 보수 중이라고 한다. 그래도 전체 그림을 망칠만큼 흉하게 넓은 부위를

덮고 보수 중이거나 탁 튀는 색의 휘장을 둘러놓고 하는 게 아니어서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아마 그 때문에

중앙사원 내부로 들어가는 게 금지되었던 것 같지만, 이 정도 거리를 두고 보는 것도 충분히 좋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 다듬지도 않은 돌들을 그냥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쌓아둔 듯한 중앙사원의 탑 꼭대기.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봉긋한 곡선이 아름답기도 하고, 삐쭉삐쭉 솟은 날카로운 돌의 모서리조차 잘 안배된

것처럼 보인다. 중앙사원탑 위에 짧막하니 올라 있는 저건 현대에 들어와 보완한 피뢰침인 걸까.

아침에 앙코르왓으로 오면서 보았던 노랑색 풍선, 이제 꽤나 높이 올라섰다. 아니, 이미 몇 차례 뜨고 내리기를

되풀이했을 거다. 저 위에서는 이 오돌토돌한 질감이 또 어떻게 느껴졌을까, 궁금해졌다.

차츰 햇살이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원 내부는 마치 동굴 내부에 들어온 양 시원하고 약간의 촉촉한

습기마저 느껴졌던 것 같다. 어디 바람 잘 불고 그늘진 곳을 찾아 잠시 쉬어 가기에 딱 좋은 타이밍.

앉아서도 계속 두리번두리번, 아름다운 사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뭐라더라, 앙코르 왓의 도면을 그리려면

슈퍼 컴퓨터로도 삼년이 걸린다던가, 그런 식의 '선정적'인 이야기는 그다지 믿기지도 않고 의미도 없지만

굉장히 세밀하고 구석구석 아름다운 사원인 건 실감했다.

문득, 창 너머에서 압사라 여신들이 나타났다. 회색빛 돌벽에 퀴퀴한 색감으로 조각되어 있던 그녀들이 입고

있던 옷은 기실 저런 화려한 색감과 금빛 장식이 반짝이는 거였을 터. 여행객들이 얼마인지 모를 돈을 내고

그녀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어서, 살짝 무임승차.




프놈 바껭(Phnom Bakheng)에 올라 바라본 캄보디아의 석양.

처음에는 두껍두껍한 구름들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하니 달려나가는 걸 보며 오늘 해가 지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조금씩 상앗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그렇지만 태양이 뜨겁던 대낮에 보았던 파란 하늘은 한점도 남지

않은 채 안개처럼 풀어진 구름이 하늘가득 점령해 버렸다.

프놈 바껭의 사암 돌덩이 건물에 노란 햇살이 스며들어 자체뽀샵의 경지에 올랐다.

휙휙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만큼 순식간에 구름이 쓸려나가더니 노란 햇살이 본격적으로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점차 커지기 시작한 빗소리, 쏴아...

하늘은 이렇게 노랗게 밝아져 가는데,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우왕좌왕이다. 열대의 스콜을 제대로 실감하는 순간.

빗방울이 들이치는 우산들 너머로 하늘만 혼자 청청하다. 발딛은 이 곳과는 다른 세상,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풍경 같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고. 몽롱해지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도 하늘 풍경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당장 눈 앞의 비구름조차 휙휙 어디론가 내달리던 상황, 저 멀리

두꺼운 구름장막이 매초 새로운 질감과 두께감을 과시하며 만화경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울렁울렁 노랗게 빛나는 햇살을 배경으로 막 결혼을 한 듯한 신혼부부의 드레스가 흠뻑 젖어버렸다.

악플처럼 까맣게 몰려오는 먹구름.

어느새 이곳도 비가 멈추고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이 만만찮게 뿜어내는 온기가 공기가득 충만해졌다.

한순간 눈을 떼기가 아쉬운 풍경들이 계속 이어졌다. 굳이 말이 더 필요하지 않았던 장면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가 떨어져내리는 궤적을 좇았다. 석양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불러내어지는 센치한 감정,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사그라들고 어느새 어둠 속에 묻혀버린다는데야.

돌아갈 길이 멀어 한 걸음 먼저 프놈 바껭에서 내려섰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지킨 채 저물어가는

남국의 태양에 젖은 옷을 말리고, 지친 몸을 쉬이고, 하루의 기억을 다독다독 갈무리하고 있었다.

프놈 바껭은 야트막한 산 위에 세워진 사원이다. 예전엔 일출이나 일몰을 보러 몰려들었던 여행객들이 어두운

발치를 조심하지 못해 대형 사고도 난 적이 있다고 한다. 여전히 남아있는 야트막한 경사를 따라 조심조심

내려오면서도 끝내 눈을 떼지 못했던 하늘.





압사라댄스 :

'물 위(apsu)에서 태어났다(sara)'는 뜻으로 압사라(apsar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압사라는 '천상의 무희' 또는 '춤추는 여신'이라는 뜻이며, 앙코르와트 사원의 외벽을 이루는 1,500개 이상의 부조에 섬세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에는 캄보디아 왕실에서만 공연되었는데, 이때 압사라들은 천상의 존재를 표현하는 신성한 임무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 왕궁에서 기거해야 했으며,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느리면서 섬세한 춤 동작은 느리고 우아한 전통 음악에 맞추어 진행되는데,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동작이나 몸 동작들에 제각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춤 동작은 왕자와 공주, 거인, 원숭이 등 4가지 주체에 의해 변화하고, 전통 무용의 손 동작은 앙코르와트 사원의 부조 벽화에 나오는 압사라 무희들의 손 모양과 일치한다. 금색을 위주로 하는 화려한 의상과 정교한 분장으로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격식이 매우 까다롭고 손동작이 화려하여 습득하기 어려운 춤으로 알려져 있으며, 캄보디아에서는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이 춤을 전수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무용지도자들은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화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춤사위를 만들어가고 있다. 무용 기법도 세월이 지나면서 약간 변하고 있는데, 특히 의상이 매우 타이트하게 변하고 있다. 타이와 그 주변국의 전통 무용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네이버)

씨엠립에는 공연을 볼 수 있는 몇 군데 극장 내지 공연장이 있는데, 그 중 하나 Koulen에서 보여주던 공연.

비슷한 가격대 수준에서는 가장 괜찮다는 평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원 내 벽화나 조각에서 쉼없이

보이던 여신들의 몸동작이 실제로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그녀들의 손동작 하나하나, 잠시 멈춘 듯한 포즈의 뒷태, 앞태, 이미 어느정도 앙코르 유적들에 익숙해져버린

후라 그런지 낯설지 않기도 했고,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우아하고 신비스런 느낌이 자욱히 피어났다.

이 아가씨 누구랑 좀 닮았지 않나...? 많이 본 것 같이 낯익기도 하면서, 굉장히 매혹적이기도 하고..
롤루오스 유적군에서 씨엠립 시내까지는 약 15킬로, 뚝뚝을 타고 열심히 달리면 반시간이면 도착하는 듯.

교통 정체도 교통 신호도 딱히 발견치 못했던 씨엠립 근교의 도로들에서 그래도 가장 많이 발견해 냈던 건

'아이 조심'(을 의미하는 듯한) 표지판.

뚝뚝, 자전거, 오토바이, 트럭, 승합차, 승용차..탈 것들이 뒤엉킨 채 차선도 없고 중앙선조차 없는, 게다가 더러

포장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길 위를 종횡한다. 시장 주변을 지나며 조금은 복잡해지는 도로는,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가로등조차 없어 꽤나 위험해질 수 있다.

뚝뚝의 생김이란 이렇다. 오토바이 뒷쪽을 잘라내 버리곤 이륜차랑 연결한다. 쇼바 따위 특별히 갖추지 않은

이륜차인지라 노면의 굴곡이 고스란히 엉덩이로 치받아 올라오지만 나름 푹신한 쿠션을 배려해 놓은데다가

햇볕을 막아주는 차양이 믿음직하니 꽤나 만족스러운 탈 거리다.

정말 놀랐던 장면,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지만, 저 오토바이는 무려 세명이 타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도 계속 맞고 있는 듯한) 수액 링겔병을 몸소 받쳐 들고 있는 아주머니 한분과

젊은 여성 둘이다. 자신이 맞고 있는 링겔을 저렇게 높이 들고 오토바이에 낑겨 타고 가시다니, 굉장히 급한

무슨 일이 있거나 대장부이신 거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듯한 자전거도 지나간다. 마대자루 네 개를 자전거 뒤에다가 이어놓았는데, 저 분이

청소부는 아닌 거 같고 어쩌면 자전거를 탄 '넝마주이' 분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참 오랜만에 기억해내는

단어, '넝마주이'.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부쩍 그 단어를 많이 듣고 썼던 것 같은데.

꽤나 신선한 충격을 주고야 만 저 티셔츠의 문구. No Money No Honey. 간결하면서도 직설적이다. 그리고

와닿는다. 뭔가 재밌다고 생각했더니 시장 내 판매대마다 색색깔로 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길거리에서 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잖이 봤더랬다. 말하자면 씨엠립은 지금 'No Money

No Honey' 티셔츠 홀릭중인 건가.

재래시장에서 발견한 '거칠은 한국어' 표현.

밤에는 빵빵하게 틀어놓은 팝송을 들으며 느긋하게 쉬어 앉아 라임 모히토(Lime Mojito) 같은 칵테일을 홀짝댈

수 있는 공간이지만, 아직 해가 중천에서 내리쬐어대는 시간대인지라 조금 기다려야 한다.

(그게 어느 부위던 간에) 원숭이 성분으로 만든 연고인 줄 알고 깜짝 놀랬었다. 점원을 붙잡고 이게 정말

원숭이로 만든 거냐고 일부러 묻기까지 했는데, 일부러 물어본 보람이 있어 이건 이름만 'monkey balm'일뿐

실제 재료는 온갖 허브들이고 원숭이같은 동물성재료는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스 신들이 올림푸스 산에 오밀조밀 모여살고 있다 하면, 힌두신들이 모여사는 산 이름은 '메루산', 바로

바꽁(Bakong)의 사원이 바로 그 메루산을 형상화한 힌두교 사원의 최초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기운을 이미지화한 사원의 중앙성소가 바로 메루산, 힌두신들의

고향이다. 중앙성소로 올라가는 길은 완만한 피라밋처럼 층층이 쌓인 채 동물상들로 수호되고 있다.

중앙성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는 여신상 조각들. 뭔가 아름다운 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잡기가 필수적인 것 같다. 너무 가까워도 전체 그림과의 조화가 뭉개지고, 너무 멀어도 디테일의 섬세함이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군대에 있을 때 일년에 한 번씩 했던 '동계전술훈련', 대체 공군에 가서 하이바에 꽃꽂이하듯 풀떼기를 꼽고는

뛰어다니는 경험을 한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그냥 저 화분처럼 되어버린 사원을 보고 그 하이바가 생각났다.

중앙성소를 오르는 길에 마주했던 코끼리상, 길쭉하게 뻗어나가야 할 코가 부러져나가버리고 없지만, 그래도

얄포름하니 쉽게 펄럭일듯한 큼직한 귀의 묘사라거나, 완고하고 굳건해 보이는 네 다리와 넙데데한 발바닥,

그런 걸로 충분히 코끼리의 특징을 잘 잡아내고 있는 것 같다. 굳이 진짜 코끼리 가죽처럼 거칠거칠하고 완전

건조한 채 두툼한 느낌의 조각상 표면 감촉을 들지 않더라도.

사원이 드리워낸 시꺼먼 그늘, 강렬한 태양 아래 고스란히 노출된 세계와 극명하게 대비된 채 어둠이 내린 듯

어둡고 촉촉한 느낌의 또다른 세계.

중앙성소로 올라왔던 길과는 다른 편으로 내려가면서 돌아본 풍경. 여기저기 풀들이 자리를 꿰어차고 앉아

조금씩 사원을 허물고 있었다.

거의 완전히 허물어져내린 전탑 하나. 어디로도 이어지지 못하는 가짜문 하나만 간신히 남아있다.

얼핏 보면 앙코르왓 사원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알고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원래 바꽁의 중앙성소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는데 전쟁으로 파괴되고 나서는 그새 건축된 앙코르왓의 중앙탑 모양을 따서 재건되었다는 얘기.

사원만 바지런히 따라다니며 보다보니, 퍼석퍼석하고 낡은 느낌의 누런 사암색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나 보다.

광택이 번쩍거리는 생생한 샛노란 꽃 한송이를 보니 생명이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바꽁 사원, 혹은 힌두신들의 고향이라는 메루산의 전경. 뭔가 느낌이 달라진 거 같기도.

시바신의 화신이라는 소 한마리, 메루산에 안 오르고 사원에서 돌아나오는 길 뚝방에서 풀을 뜯고 계셨다.

롤루오스 유적군은 롤레이, 쁘리아꼬, 바꽁으로 이어지며 얼추 돌아본 셈이다. 다시 씨엠립 시내로 들어가기 전

아쉬워서 슬쩍 돌아본 주변에서 발견한 캄보디아의 쓰레기통.

그리고 여기도 시바의 화신,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뽄새가 아늑해 보이기는 하는데, 지천에 깔린 녹색 풀들을

두고도 넌 대체 왜 이리 갈비뼈가 앙상한 거니. 소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영 풀지 못하는 궁금증 하나.




쁘리아 꼬(Preah Ko)는 씨엠립 동남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롤루오스 유적군 중 하나다. 롤루오스 유적군은

앙코르 왕조의 초기 유적, 대개 900년대를 전후한 유적지여서 훼손도 그만큼 많이 되었고, 또 기교도 전성기만

못해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지는 않는 듯 하다.

'쁘리아 꼬'란 말의 의미는 '신성한 소'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목걸이도 하고 커다란

코를 위풍당당하게 벌름거리는 듯한 제법 그럴듯한 소 조각. 뒤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버섯같은 흰구름도

놓칠 수 없는 풍경이다.

쁘리아 꼬는 크메르 왕국의 시조부터 세 쌍의 왕/왕비 부부를 모셔 놓은 사원이라 한다. 그래서 탑도 총 여섯개

쌓아올린 거라고 하고, 탑마다 계단 아랫쪽에는 이런 특이한 모양의 기단을 받쳐놓았다. 부부의 금슬을 좋게

한다는 '월장석'이라 하여 달을 형상화한 돌조각이라 하는데, 저게 왜 달일까 한참 고민하게 만들었다. 왜

보통 '달'이라 하면 똥그랗거나 반달이거나 이지러졌거나 여하간 동그란 원의 형태로 상상하기 마련인데, 이건

무슨 말미잘처럼 너울너울 달빛이 퍼져나가는 것까지 형상으로 잡아낸 건가. 그때의 사람들은 달을 그리라하면

저렇게, 똥그란 원이 아닌 달빛 파장까지 반영된 그림을 그렸지 않을까. 아니면 어쩜 그때는 정말 저렇게 생긴

달이 이 '쁘리아 꼬' 사원을 비쳐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된 만큼 손대어 복원할 곳도 많은가 보다. 아예 탑 맨 아랫단부터 촌스럽도록 신선한 새 벽돌로 괴어나간

귀퉁이. 저렇게 '난 새 벽돌이요~'라고 티내는 것들이 대체 이 천년묵은 돌탑하고 융화될 수 있을까. 만약

진품 부분과 복원된 부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차라리 자연스레 무너진 부분에서

더이상의 붕괴를 막되 저렇게 어줍잖은 복원은 안 하는 게 차라리 보기 좋지 않을까 싶다.

사원 한 귀퉁이에서 길다란 목줄을 질질 끌며 유유자적 풀을 음미하고 계신 하얀 소님. 힌두교의 영향권 하에서

소는 파괴와 창조의 신인 시바의 현현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 캄보디아는 이제 힌두교의 영향력에서 완전 벗어났다고 해야 하나. 식당에선 쉽게 소고기

음식을 찾아 볼 수 있고, 딱히 소를 존경하지도 않는다. (캄보디아는 소승불교가 95%를 차지하는 불교국가다.)

오랜 세월을 견딘 인간의 건축물들은 조금씩 '인공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어느순간 그냥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연'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인간의 것으로 본다면 정말 남루해지고 퇴락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신비로운 느낌이 피어오르는 바윗덩이같은 거다. 저렇게 이삼천년 더 지탱해낸다면

이제야 기자의 피라밋처럼 그냥 '산'이 되고 '언덕'이 되어 버릴 거다.

지금도 벌써 드문드문 초록 이끼가 끼어 있는 바윗돌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바윗돌 깨뜨려 자갈돌,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 모래알 깨뜨려, 뭐 그런 식으로 나가면서 차츰 닳아빠지고 없어져 버린다. 어떻게 보면 허무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정작 신비로운 게 그런 가차없는 풍화, 무화의 과정 자체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건 왠 오동통한 참새냐, 했는데 가이드북 상으로는 '사자상'이랜다. 뭐 입도 쫙 찢어졌고 가슴에 불룩한 저게

탄탄한 근육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참새 몸뚱이에다가 괴물딱지 머리를 갖다 붙여 놓은 느낌은 피할

수가 없다. 아마 앙코르 문화의 초기니만치 조금은 서툴렀던 것일까.

이 다소 현대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건물은, 위에 구멍이 뽕뽕 나 있다는 것에 주목해 '화장터'로 여겨진다고

하지만 왠지 믿음이 안 간다. 아무런 기록도 없다고 하니 좀더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사실 경주의

'첨성대'를 두고도 수많은 설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인 거다. 실용적 천문관측대였다느니, 하나의 상징에

불과했다느니, 커다란 기준표지였다느니, 주술적 의미가 담겨있다느니 등등. 그런 종류의 '여지'가 남아있어야

흥미로워진다.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의 것을 대면하고 있을 때의 낯섦, 생경함 따위의 감정이 살아나는 거다.

쁘리아 꼬 옆에는 캄보디아의 유수한 사원들을 자그마한 사이즈로 줄여서 전시해둔 미니어쳐 전시관이랄까,

그런 게 있었다. 제대로 구색을 갖춘 건 아니고 그냥 마당 한복판에 앙코르왓이 있고 반띠아이 쓰레이던가

그런 유명한 사원들의 모형이 놓여 있었던 곳이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무심하게 자기들끼리의 놀이에 열중해

있었다. 어이 이봐, 나는 이런 거 보겠다고 한국에서부터 몇 시간씩 날아온 거란 말이다. 왠지 저런 걸 보면

억울해질 때가 있다. 피라밋 옆에서 나른하게 파리를 쫓거나 졸고 있다거나, 에펠탑엔 눈도 안 주고 시크하게

걸어가는 파리지앵들, 혹은 9/11 전 쌍둥이 빌딩 전망대를 오르는 여행객들에게 웃어주던 뉴요커들..그런 거다.




이제 조금씩 인가가 밀집한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 제법 표지판도 구색을 갖춘 '숲길'이 나타났다. 노란 바탕에

아이둘이 어정쩡하게 서있는 걸로 보아 아이들이 많으니 조심하란 표지 같다. 근처에 학교라도 있다거나.

가만히 보면, 조금 더 큰 남자아이는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라거나 중공 등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히 보일
 
법한 모자를 쓰고 책가방을 옆춤에 차고 있다. 저걸 뭐라 해야 하나, 베레모도 아니고 약간 빵모자스럽다고

해야 하나. 모자 가운데 별모양 배지라도 붙어있을 것 같은, 색깔도 왠지 핏기없는 풀색이나 갈색 계열일 듯한.

롤레이는 씨엠립 인근의 앙코르 유적군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라고 한다. 9세기 말에 완성되었다고 하니

다른 사원들에 비해 짧게는 백년, 길게는 이삼백년을 앞선 셈이다. 그 이삼백여년의 차이가 이토록 컸던지

사원이 거의 황폐해져 있었다.

총 네 개의 벽돌탑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미 저렇게 옆구리가 터져나가서는 토사가 잔뜩 흘러나온 탑도 있고,

가운데 중앙성소 역시 연꽃이 봉긋하니 피어오른 형태가 많이 이지러져서 끝이 뭉툭해졌다.

오히려 시선이 가던 건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던 아이들. 내 어렸을 적 오징어 모양 그림을 그려놓고

뜀뛰기하며 놀았던 것처럼, 비슷하게 뭔가를 그려놓고 폴짝거리며 놀다가 여행객을 보고는 살살 눈치보며

장난을 걸어온다. 먼저 앞장서서 사원을 함께 돌아봐주기도 하고, 카메라를 의식하고 자세도 잡아주고.

다른 곳에 가면 귀엽지만 그악스럽게 달라붙던 꼬마 상인들이 여기는 아예 보이지 않는 거로 보아, 또 여기에

있던 동안 다른 여행객은 전혀 보지 못한 것으로 보아 꽤나 조용한 동네인가 보다. 그래서 그만큼 더 아이들도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것 같고. 역시 환경이 중요하다. 사람손을 많이 타고 안 타고의 환경적 요인이 아이들의

눈망울을 바꿨다.

사원 한 귀퉁이에서는 노인 한 분이 돗자리 위에다가 새하얀 뭔가를 고르게 펴놓고 말리고 계셨다. 뭘까, 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까 하얀 쌀. 말려서 뭔가 누룽지처럼 해드시려는 건가.

아이들이 아무리 다가가서 장난을 걸고 툭툭 찔러봐도 그저 귀찮아 그늘 아래 널부러져 있던 강아지 한마리.

이 곳의 더위는 개들의 성미조차 노곤하게, 혹은 온순하게 만들어버렸다.

롤레이 옆에 불교 사원이 있는지, 밝은 감색의 승려복이 깨끗이 빨아진 채 널려 있었다. 저걸 그냥 몸에 둘둘

감으면 옷이 되는 건가 싶고, 빨면 참 금방 마르겠다 싶기도 하고.







반띠아이 쓰레이에서 롤레이 유적군으로 달리는 길, 한참 불붙은 정오의 햇살이 내리쬐는 아스팔트길 위에서.

사실은 뚝뚝 운전수 칭이 헬멧 안에서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너무 좋아서 그 노래를 '채취'하고 싶었는데, 정작

이글대는 햇볕 소리와 오토바이 엔진 소리만 시끄럽게 녹음되고 말았다.

캄보디아에는 거의 산이 없다고 한다. 저 정도의 높이만 되어도 꽤나 높은 산 축에 들어간다고 했다. 도로

양쪽의 블록에는 무슨 자동차 서킷장처럼 빨갛고 하얀 페인트를 알록달록 칠해놓았다.

문득 고개를 올려 발견했던 뚝뚝의 부적. 안전운행을 기원하는 의미의 부적이라는데, 워낙 운전을 조심스럽게

잘 해주어서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계속 눈똑바로 뜨고 부적값 톡톡히 해주시길.

앙코르 유적지가 있는 씨엠립에서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야 있는 반띠아이 쓰레이,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잔뜩

내려와 애초 올라갔던 것보다 더 오래 가야 나오는 롤레이 유적지. 거기까지 가는 길은 온통 정글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도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여윈 소떼만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지만, 그 너머엔 또

삼엄하다 싶을 만큼 빽빽하게 짙은 녹색의 정글.

길가에 뚜욱 뚜욱 떨어져있는 집들에서 튀어나왔을 아이들은, 포장된 길 바로 옆 웅덩이에서 발가벗고 물놀이

하느라 여념이 없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선 가게, 무려 "튀긴 개구리"요리를 파는 굉장히 캄보디아 현지의 '타협하지 않은 맛'을

고집하는 음식점이었다. 개구리 요리를 시도해 볼까 했으나. 그냥 좀더 노멀한 캄보디아 전통음식을 맛보기로

맘을 고쳐 먹었다.

아마도 코코넛 열매인듯, 화분도 공중에 매달아 놓고.

아무리 뙤약볕이 내리쬐도 그늘 안으로만 들어오면 또 시원하다. 한국의 무더위처럼 습기가 끈끈하다거나

찜통 속의 후텁지근한 느낌이 아니라, 보송보송하게 더운 느낌. 중동 지역의 그것과 비슷했다.

뭘 시켜 먹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안 날 뿐이고. 뭔가 굉장히 색다른 향신료의 향과 맛이 강렬했던, 푸짐하고

독특한 진미였다는 이미지만 남아있다. 고기류와 생선류로 골고루 시켰던 거 같은데 결국 다 먹어치웠었다.

(저것들이 뭔지 아시는 분은 댓글로 좀...^^; )




아무리 반띠아이 쓰레이라 해도 역시 크메르 사원 양식을 벗어나진 않는다. 내부는 의외로 담백하고 밋밋한

그대로 인 거다.

조금씩 기울어져 있는 외벽들, 물론 중앙성소가 있는 중심부로 갈수록 화려함은 더해가고 보존상태도 훨씬

훌륭해지지만, 이 곳 역시 천년의 시간을 빗겨나가진 못한 거다.



이빨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벽면, 그리고 황토를 개서 만든 벽돌을 딱딱하게 말려서 반들반들하게 만들었을

벽돌은 조금조금씩 비바람에 갉아먹혀서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단단한 부분만 남았다.

링가의 늠름한 자태.

그러고 보니 이런 장식들도 우선 라테라이트 벽돌을 쌓아올린 후에 저렇게 입체감 넘치도록 조각을 해버린 거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복명'의 자세로 나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원숭이들. 얘들은 근데 최근에 복원한 건지

전부 색깔이 다르다. 주변의 때묻고 빈티지스러운 느낌과는 전혀 이질적이다.

도마뱀도 더러 지나가던 곳, 어찌나 빠르고 귀엽던지. 문득 초등학교 때 괌에 이민 사전조사차 갔다가 맥도널드

앞 유리창에 떼로 몰려있던 도마뱀들을 콜라 빨대 속으로 몰아놓고 장난치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중앙사원의 네 대문 중 세 개는 역시 가짜문이다. 동쪽으로 난 문만 진짜. 가짜문이라고는 해도 외관상으로는

진짜 문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이 장식을 해 놓았다.

얼핏 보면 원숭이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한담을 나누는 거 같기도 하고. 멀찍이 등돌리고 앉아있는 녀석을

나머지 네 녀석이 뒤에서 뒷담화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신 뒤의 남신, 여신상에 비해 참 담백하다. 그냥 뭐, 아무 장식이 없이 지팡이 같은 거만 하나 들었다.

저런 식물들, 돌 틈새에 들어가서 뿌리라도 내리면 조각들 떨어져나가는 거 금방일 텐데. 다른 사원들에선

시간을 거슬러 아등바등 외관을 유지해보겠다고 애쓰는 게 안쓰럽고 조금은 치사(?)해 보였지만, 여긴 달랐다.

좀더 잘 지켜졌으면 좋겠고, 좀더 잘 보존되어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참 간사하고 기준도 없다, 그러고 보면.





링가와 한쌍을 이루는 '요니'의 바닥. 어디론가 연결되어 샘물이 솟아오를 거 같기도 하고.

또다른 요니, 여기는 연꽃무늬 벽돌이 네모반듯한 요니를 막고 있었다.




또다시 화장실 앞의 넓게 펼쳐진 연꽃밭에서. 아직 봉오리가 터지지 않은 탐스러운 연꽃송이는 정말 크메르

사원의 정형적인 형태와 닮아 있었다. 그 터지기 직전의 봉긋한 옆구리도 그렇고, 봉오리 위쪽의 삐쭉거리는

꽃잎매들도 그렇고. 연잎마저 탐스럽게 늘어졌던 반띠아이 쓰레이.

그 앞에는 상점들의 정비작업이 진행중이었다. 제대로 외관을 갖춘 높은 지붕의 건물들에 입주한 각종 상점들.

지붕을 덮은 갈색 짚이엉이 야무지다.

크메르 전통 공예가인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무를 깍아만든 '크메르의 미소'에 색깔을 입히는 모습이

굉장히 몰입해 있었다. 가격을 슬쩍 물어보니 왠지 씨엠립 시내의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비싸다 싶어서 그냥

돌아나왔다.




반띠아이 쓰레이는 앙코르 유적지에서 약 38km, 한 시간정도 툭툭을 타고 가야 하는 길 위에서 소 달구지도

만나고, 자전거 레이스를 하겠다고 덤비는 꼬맹이들도 만나고.

밝은 감색 승복을 나부끼는 스님들과 허술한 기념품 가게 옆도 씽 지나쳐버렸다. 역시 여행은 속도가 느릴수록

재미있는데 말이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으니 자꾸 압축적으로 보려는 마음이

동하게 되는 거겠지만. 그래서 사실 가끔 여행 많이 다니는 자칭 '고수'들이 그렇듯 패키지로 나가는 '관광객'을
 
낮추어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빠알간 꽃의 무게를 못 이기고 축 처진 것처럼 보이는 줄기들.

반띠아이 쓰레이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눈에 번쩍 띄었던 꼿꼿한 나무 한 그루. 뭔가 왼쪽의 무성한 이파리의

가지와 앙상한 오른쪽의 가지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드디어 반띠아이 쓰레이다. 근 한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달려 여기까지 꼭 와야 했을까, 살짝 반신반의하는 맘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여긴 입장권 판매소부터 다르다. 깔끔히 정비된 간판에 사원 주변을 둘러싼 듯한 연꽃밭.

입구서부터, 뭔가 조각이 다르다. 선명하고 섬세하고, 빈틈없이 화려하다.

'링가'들이 두줄로 정렬한 채 순례자를 중앙사원으로 인도하는 통로. 바닥의 포석은 더러 유실되고 이리저리

비틀어져 버렸지만 링가의 불끈한 형태는 그대로다. 상상 그대로인 것이, 저 링가란 파괴의 신 시바를 추상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시바신이 사람처럼 상상되기 이전 그의 존재를 나타낸 조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건

고대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남성의 성기 모양을 따서 상상되었다고 하는데 벌써 모양새가 딱 그렇다.

사원 중간중간 부서진 조각들에도 꼼꼼하게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건, 이 사원이 한번 철저하게 스캐닝되어

관리되고 복원되고 있다는 의미와 같지 않을까. 이 조각이 있어야 할 곳, 소용되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단

것일 테니 말이다.

얼마나 깊고 정교하게 조각을 했는데 살짝이라도 손을 대면 으스러져 떨어져나갈 것만 같다. 무슨 부드러운

붉은 색 목재를 조각한 것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건 모두 붉은 사암, 돌이다.

링가가 세워져 있던 장소, 성소가 흐르는 곳이라 하는 곳을 '요니'라 한다. 옆을 지나가던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훔쳐들은 바, 이것 역시 여성의 성기를 본따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링가와 요니가 만나는 이

곳을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었다고. 미루어 추측해 보자면 아마 성기 그 자체가 창조나 풍요, 생산력을 상징할

수 있었겠구나 싶다.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굉장하다. 멀리서 볼 때부터 충분히 그 돌출감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깊고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엇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건 무슨 부드럽고 다루기 쉬운 코르크 재질로 만든 장식 같기도 하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던 당대의 장인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을까,

캄보디아의 전통 사회에서도 '사농공상' 같은 유교적 위계가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원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온통 조각으로 가득해서 밑에서부터 훑어올라가는 시선이 위에까지 가 닿으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을만큼 강렬한 매력을 가진 반띠아이 쓰레이.

그러고 보면 '반띠아이 쌈레', '반띠아이 쓰레이' 등등 '반띠아이'로 시작하는 사원들이 적지 않다. 반띠아이란

크메르어로 '방으로 둘러싸인 사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쓰레이'는 (발음을 잘 해야겠지만)

'여성'을 의미한다고 하니, 반띠아이 쓰레이는 사원의 여성적인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걸맞는 이름을 가진 셈.

앙드레 지드가 소싯적에 여기서 '동방의 모나리자'라 불렸다는 이 여신상을 도굴하려다가 잡혀서 6개월 실형을

살았다고 한다. 그가 여길 도굴하려던 게 1924년,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아름다운 사원이 발견된 게 고작 그

십년 전, 1914년이라는 사실이다. 얼마나 잊혀져 있었던 걸까.

하아...할 말을 잃게 만드는 저 조각들. 천년 전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엣지있게' 생생하다. 슬쩍

손을 뻗쳐 모서리를 만져보니 여전히 빳빳한 게, 막 조각해 내었을 때의 뚜렷한 각도가 그대로인 게다.

약간 사원 옆으로 튕겨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아기자기한 높이에 그다지 크지 않은 스케일의 사원임엔

틀림없지만, 붉은 빛을 가득 품은 정말 아름다운 사원이다. 해가 뜰 때나 질 때 보면 햇살에 붉은 빛이 반사되어

더욱 이쁘다고 하는데, 빈약한 상상으로나마 그 풍경이 대충 감이 간다. 아니, 그때의 감동이 어느만큼일지

대충 감이 간다는 게 맞겠다.

육체적 피로나 따꼼한 발바닥 따위는 잊고 아무리 감격한 채 사원을 헤집고 다녀보려 해도 한가지, 뜨거운 불볕

더위는 어쩔 수 없다.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도 사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반띠아이 쓰레이에도 외부를

빙 둘러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자취가 거의 남지 않을 만큼 사라져버렸지만, 어쨌건 흔히 '유럽의 성'에서

연상하는 해자는 캄보디아에서 연원했다는 것.

3개의 탑을 앞세운 중앙성소는 원숭이 상들이 빙 둘러 수호하고 있고, 외벽에는 빼곡하게 여신상이나 코끼리상

혹은 나가(뱀)상, 덩굴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었다. 굉장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기까지한 느낌이었는데, 아쉽게도

사진상으로는 색감이 좀 날아가버렸다.

근데 대체 지드가 훔치려 했던 '동양의 모나리자'라는 여신상은 어떤 걸까. 하나씩 꼼꼼이 살피며 대체 뭘까,

했는데 약간씩 표정과 몸짓의 뉘앙스가 다르다. 뭐였을까. 지드가 반해 버려서 도굴까지 꾀했던 그 여신상은.

사실 여신상은 중앙성소의 벽면마다 하나씩 안배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수가 조각되어 있는 데다가, 사이즈도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아 맨눈으로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극히 드물게도 이곳은 사원 보호를 위해

일정 거리를 확보한 채 출입제한선을 설정해 두고 있는 거다.)

어느 문화재나 그렇지만,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를 알고 보면 더욱 재밌다. 그렇다고 여기에 직접

가이드북에서 읽은 배경 이야기들을 그대로 옮기는 건 의미없는 짓 같고, 그저 비주얼과 개인적인 이야기만

털어놓아도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동하지 않을까 기대해 볼 뿐. 사실은 여행 가기 전 열심히 관련 책도 읽고

힌두교 신화와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입에서 술술 나올 만큼 익숙하게 공부를 했었는데, 어느새 다

까먹어 버렸다.;

또다시 중앙성소 주변에서 발견한 '요니'. '반띠아이 쓰레이'는 시바신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바신을 형상화한 초기 형태랄 수 있는 남성 성기 모양의 '링가', 그리고 그것과 한짝인 '요니'가

곳곳에서 모셔지고 있는 거라고.

여기에 조금 남아있는 해자의 흔적. 원래는 해자 바깥 쪽으로 외벽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하는데 거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해자너머로 보이는 반띠아이 쓰레이의 중앙사원과 그곳을 향한 통로들이 장난감같이 귀엽기도

하고, 테마파크처럼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너무 거리를 두었는지 사원의 디테일한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초록빛 정글과 대비되는 붉은 사암

재질의 벽돌들이 또다른 미감을 자극한다.

가루다(조류의 왕)도 보이고, 비슈누(코끼리)도 보이고, 말탄 시바도 보이고, 머리만 남고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었다는 악마 칼라도 보이고. 아니 저토록 정교한 덩굴장식은 대체 어떻게 천년을 버티냐고.

연꽃밭 한 가운데 잘 꾸며진 화장실이 있다. 아마 캄보디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연꽃들. 여행객들의 영양분을 먹고 살아 더욱 아름다워졌으리라.

화장실에서 발견한 어이없는 그림 하나. 휴지걸이 옆에 붙은 그림이 뭔가 보고 실소(失笑)해 버렸다. 샤워하지

말랜다. 워낙 더운 나라, 더구나 반띠아이 쓰레이까지 왔을 여행객들이면 얼마나 꼬질꼬질 힘이 들었을까.

이런 어이없는 그림이지만, 오히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기길래 오죽하면 그러겠어 싶기도 하다.

캄보디아에서 봤던 개 중에 가장 활기차 보이던 개. (다른 개들과는 달리) 그래도 불볕더위가 내리쪼이는

시간대에 그늘에 숨어 퍼지지 않고 네 발로 당당히 버티고 서서는 화장실 다녀오는 사람들 냄새를 맡던 녀석은

꽤나 똘똘해 보였다.



반띠아이 쌈레의 건물은 좀 묘한 느낌을 준다. 붉게 산화한 라테라이트석의 색깔이 기이한 느낌을 뿜어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태 둘러보았던 앙코르 유적군의 다른 유적들과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 확연하다.

뭘까, 뭐가 다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보통 사원 외벽을 장식하기 마련인 무수한 압사라와 여신들,

그리고 정형화된 형태의 조각들이 하나도 없이 맨벽인 거다. 아마 벽돌이 저렇게 풍화되기 전에는 맨들맨들한

벽이 조각가의 손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서 있었던 게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셈.

드문드문 부조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건 위로부터 흘러내린 다크서클같은

검은 얼룩, 그리고 때가 낀 건지 이끼가 낀 건지 알 수 없는 세월의 자취.

그래도 연씨 무늬를 차용해서 만들어진 창은 훼손되지 않고 그 모서리마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창살 사이로 환하게 스며들어오는 햇살. 사원 내부의 매끈한 벽면은 뭔가 외부와는 다른 마감재를 써서

그런 걸까, 천년 세월에도 여전히 시멘트를 바른 양 매끈하기만 한 표면.

그리고 그 안에는 여전히 '신'이 모셔져 있었다. '신'이 모셔져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은 쉼없이

향이 피워올려지고 싱싱한 꽃이 바쳐지는 기적을 만들어내었다.

사원 위에 삐쭉삐쭉 올라있는 공룡 등뼈같은 뿔들은 그냥, 적당히 다듬어낸 길쭉한 돌들을 세워놓은 거였다.

여기 상당한 폭우가 무시로 쏟아져내리는 열대기후의 땅일 텐데, 저렇게 작은 돌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것들이

단단히 붙어있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정감가는 형태, 연꽃이 활짝 만개한 형태의 중앙사원. 보통 정사각형 형태로 꾸며진 크메르사원은 사방에서

중앙성소로 접근할 수 있지만, 중앙성소에 있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 중 동쪽으로 난 문을 제외한 세 개의

문은 문의 형태만 조각된 가짜문이다. 역시, 해뜨는 동쪽이 대세.




사원 내부는 너무 어두컴컴하다. 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창문 역시 외부의 빛을 잘 들여보내주지 않는

구조여서, 자칫 발을 헛딛거나 미끄러지기 쉽다. 그나마 이렇게 창문이 조금 깨져 나가 빛이 들어오는 곳은

나은 편이고.

내부에서 장식을 발견하긴 쉽지 않지만 중앙성소쪽으로 가는 가짜문에는 나름의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 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겠지만, 어찌 생각하면 괜한 크메르 노동력의 낭비다.

캄보디아의, 크메르의 푸른 하늘. 그리고 정글의 침투와 시간의 부식을 막고 천년을 버틴 그들의 석조 문명.

반띠아이 쌈레는 꽤나 큰 사원이고, 앙코르왓의 3층 성소탑을 재현했다고 할 정도로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일부러 반띠아이 쓰레이와 앙코르왓은 마지막 일정으로 빼놓은 게, 거길 보고 나면 어쩌면 다른 곳들이 굉장히

시시해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도 하고 사전 조사했을 때에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기 때문.

사원 내부에는 종종 이렇게 천장이 무너져 내린 채 방치된 방들이 있다.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내린 듯, 무너져

내린 모양 그대로 꽤나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사원의 방과 방을 잇고 있는 문턱은 어찌나 높은지 좀 돌아보다가 발이 무거워지면 툭툭 걸리기 일쑤다.

커다란 입을 귀밑까지 찢고는 무슨 벌레알같은 이빨을 우르르 과시하고 있는 괴수. 이거 호랑이인가?

창틀 밖을 내다본다는 것, 창틀과 함께 바깥 풍경을 기록한다는 건, 어쩌면 관음의 욕구를 반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안에서 밖을 보는 것, 창틀에 기대어 '액자'처럼 외부를 훔치는 것.
 
구석구석 새싹들을 품고 있는 돌덩이 사원. 길게만 자라 축축 처진 잎사귀들은 대체 뭘 먹고 자라는 건지.

사진 모델을 자처한 꼬맹이들. 카메라를 보곤 슬쩍 자세를 잡아주다간 좀 찍어볼라 하면 수줍게 도망가버리는

순진하고 귀여웠던 꼬맹이들이었다. 근데 밑의 꼬마는 다시 보니 킬빌의 그녀가 오버랩되는 듯.

어딘가 사원 구석에서 발견한 조각상의 잔해. 무슨 슬리퍼 두 짝이 남아있는 거 같아 재미있다. 무슨 조각이

이 슬리퍼를 신고선 자세잡고 서있었을까. 조각이 서있었을 자리에는 이제 무슨 연장통같은 나무상자가.

사원에서 빠져나가는 길, 이제 반띠아이 쓰레이로 간다.

뚝뚝이 기다리고 있는 사원 입구 쪽에 도착하니, 내가 그랬듯 수많은 아이들에 포위된 채 어쩔 바를 몰라

당황한 미소만 짓고 있는 여행객들이 있었다. 저 아이들의 애교 공세를 넘어서 반띠아이 쌈레 구경 잘 하시길.




'쓰라 쓰랑'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다. 호수라기엔 좀 작고, 애초 존재하던 천연 저수지를 키워내어 왕실 전용

목욕탕으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왕실의 목욕탕이라곤 하지만 딱히 그럴듯한 장식이나 화려한 부속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물이 깊지는 않아 보이는데  저쪽 너머에선 몇 사람이 수영도 하고, 목까지 물에 잠근 채 물놀이도 하는

걸로 보아 바닥 깊이가 생각보다 꽤나 깊은가보다. 날이 좀더 더우면 나도 같이 뛰어들겠구만.(실은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ㅡㅡ;)

앙코르와트 동편에 있는 동바라이 지역을 지나 반띠사이 쌈레로 가는 길, 거길 거쳐 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올라가면 '크메르 예술의 보석'이라 칭해지는 반띠아이 쓰레이가 나타난다. 참 소략하게 지어진 움막같은 집,

그렇지만 참 실용적으로 보이는 집 옆을 뚝뚝타고 지나면서 한 장. 

길가에서 조그마한 바나나도 구워팔기도 하고, 과일도 팔고 있는 행상.

모자도 주렁주렁 매달고 팔고 있는 가게도 있었다. 내려서 구경도 하고, 집들 사이를 거닐며 사람들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자전거를 타거나 걷거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러겠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한가닥 외길을 따라 꾸역꾸역, 대체 여기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걸까, 출퇴근 같은 도시인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 이어지고 있을 정글에서의 삶은 어떤 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뿔이 곧추선 물소 두마리가 끄는 수레에 앉아 나름의 호흡으로 일을 하고 움직이기도 할 테고.

제법 돈 좀 모았다 하는 사람은 이렇게 네 벽이 제대로 갖춰진 건물, 게다가 1층엔 달구지 주차장을 마련해놓은

'그럴듯한' 집에서 살며 다른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기도 할 거고. 저기를 보라, 달구지에 더해 자전거

한 대까지 우아하게 주차되어 있는 럭셔리함의 극치를.

이렇게 정글이 집앞 마당까지 밀고 들어오면 어느새 꽤나 풍성한 정원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자연스레 집안

내부의 프라이버시까지 보호되는 커튼 효과까지 생기곤 하는 것이다.



앙코르왓을 보러 씨엠립을 갔다가 유이를 만났다. 꽃으로 장식을 하고 캄보디아의 전통춤인 압사라댄스를

추고 있었는데, 역시나 여기서도 다른 멤버들을 압도하는 탁월한 춤실력을 선보였다는.




굉장히 화려한 치장을 했지만, 그녀의 미모에 가리어 꽃잎마저 빛을 잃었다. 압사라댄스란, 네이버의 해설을

빌건대 "'물 위(apsu)에서 태어났다(sara)'는 뜻으로 압사라(apsar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압사라는 '천상의 무희' 또는 '춤추는 여신'이라는 뜻이며, 앙코르와트 사원의 외벽을 이루는 1,500개 이상의 부조에 섬세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에는
캄보디아 왕실에서만 공연되었는데, 이때 압사라들은 천상의 존재를 표현하는 신성한 임무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 왕궁에서 기거해야 했으며,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느리면서 섬세한 춤 동작은 느리고 우아한 전통 음악에 맞추어 진행되는데,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동작이나 몸 동작들에 제각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춤 동작은 왕자와 공주, 거인, 원숭이 등 4가지 주체에 의해 변화하고, 전통 무용의 손 동작은 앙코르와트 사원의 부조 벽화에 나오는 압사라 무희들의 손 모양과 일치한다. 금색을 위주로 하는 화려한 의상과 정교한 분장으로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격식이 매우 까다롭고 손동작이 화려하여 습득하기 어려운 춤으로 알려져 있으며,
캄보디아에서는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이 춤을 전수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무용지도자들은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화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춤사위를 만들어가고 있다. 무용 기법도 세월이 지나면서 약간 변하고 있는데, 특히 의상이 매우 타이트하게 변하고 있다. 타이와 그 주변국의 전통 무용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 한다.

굉장히 엣지있게 뻗어올린 손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우아하게 나풀거리는 손가락들,

그리고 내리깐 듯 묘한 눈매가 격하게 매력적이었다.

뒷태 역시 예술.

별로 말이 필요없던 포스팅. 이번 건 비쥬얼로 승부하는 포스팅인 거다.


* 사실 별로 유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ㅋ




반띠아이 끄데이, '방으로 둘러싸인 사원'이라는 의미라고 하지만 방이라기 보다는 '벽'으로 둘러쌓였다는

느낌이다. 벽도 사방이 온전히 둘러쳐진 그런 벽이 아니라, 네 면중 한 면쯤은 꼭 허물어져 있는 듯할 정도로

허술해져 버린, 그런 사원이다.

그런 사원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띄었던 건 마치 방금 조각해낸 것처럼 선명한 윤곽과 신선한 색감이 살아있는

여신상들. 이 여신상 말고도 다섯여섯 걸음마다 사원 외벽에 여신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약간씩 다른 표정

다른 몸짓을 한 채 세워져 있었다.

피사의 사탑이 유명해진 이유는 건물이 살짝 기울어서. 이 정도 어긋난 채 기울어진 출입문은 어떤지.

그런 출입구를 지나면서, 또 다른 통로를 지나면서도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위험' 표지판들.

표지판이 아니어도 이미 눈으로 보기에도 충분히 스릴있어 보이는 데다가, 굳이 '노 터치' 같은 사인을

붙이지 않아도 손을 대면 금세라도 폭삭 무너지지 않을까 싶어 아주아주 조심스런 행동을 유발하는 사원.

멋진 부조가 조각되어 있는 기둥. 압사라댄스를 추고 있는 여신들이 좀더 활짝 웃었다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님 그냥 지금처럼 살짝 웃음을 물고 있는 표정이 더할나위없이 좋아보이기도 하고.

조금씩 기둥이 녹아내리는 걸까, 아마도 철분 성분이나 비슷한 게 기둥 위에서부터 녹아내리는지 까만 얼룩이

기둥을 타고 다크서클처럼 내려왔다. 저만큼 얼룩이 내려오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 백년에 일센치?

안쓰럽도록 꽁꽁 동여매어진 사원의 연꽃모양 탑.

문틀을 액자삼아 넘겨다본 저 너머의 풍경들.

그러고 보면 사원의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건 기와가 아니라 기와무늬 돌들이다. 커다란 돌을 올리고는 그렇게

기와무늬를 조각해 넣었나보다. 그 기와무늬 하나하나에 공들여 내려앉은 초록빛 이끼가 화려하다.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기우뚱 무너져내리기 직전의 벽면까지.

여기저기서 펼쳐져 있는 거미줄들. 저렇게 사람만한 크기의 거미줄이 펼쳐지고 유지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사람의 손을 여전히 많이 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앙코르왓'으로 대변되는 앙코르

유적지가 세계적인 명소라고는 해도, 그 세세한 디테일까지 고루 살펴보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테니.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강렬한 사원 내부의 공간들, 예전에 이 건물들을 막 지어올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거

같다. 아마도 그래서 건물 외부에 정성을 쏟아 조각을 하고 장식을 한 것과는 달리 내부는 거의 아무런

장식이나 무늬를 더하지 않았을 거다.

교정이 필요할 만큼 심하게 들쑥날쑥한 치열처럼 이리저리 어긋나 있는 기둥들. 술취한 녀석들이 우르르

어깨동무하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그림 같기도 하다.

사원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왠지 사원과 스펑나무가 이렇게 사이좋게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 본 거 같았다.

대체로 사원을 스펑나무가 잡아먹고 있는 듯한 무시무시하고 치열한 광경이었는데, 아마 이들도 수백년내에

그렇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꽤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중인 듯한 사원과 나무.

사원에서 돌아나오는 길, 한쪽에 좀 본격적으로 마련된 기념품 샵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캄보디아 전통

의상을 입은 허수아비 인형들.




캄보디아#3. 앙코르왓 3일 코스짜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외곽지역의 유적들을 둘러볼 작정이라, 아예

하루종일 뚝뚝을 대절했다. 씨엠립 시내에서 분쪽으로 약 40킬로미터를 달려야 나오는 '반띠아이 쓰레이'라는

곳 주변과 씨엠립 남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를 달려야 나오는 '롤루오스 유적군'까지 가기로 하고,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25달러에 흥정을 마쳤다. 원래 씨엠립 시내 근처에서 종일 뱅뱅 돌아도 15달러 정도 한다고 하니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여행자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아마도 유적을 돌아보고 나와서 바로 찾기 쉽도록

뚝뚝 운전사마다 저렇게 등록번호가 적혀있는 조끼를 입고 있다.

씨엠립에 흔치않은 보행 신호등. 여긴 아직 교통법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나라다. 

씨엠립 시내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는 한국어 광고판. 시원한 소주가 있다고 하지만, 글쎄...캄보디아에 왔으니

캄보디아의 술을 마셔주는 게 인지상정.ㅋ

오토바이를 개조해 삼륜차로 만든 뚝뚝이 부앙~ 오토바이 엔진의 얇고 경망스런 소음과 함께 달려나가는데

전날 자전거를 타고 헥헥대며 달리던 거리가 금세 뒤로 멀어진다. 이렇게 길가에서 다그닥거리며 달리던

마차도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버리는 정도의 속도. 뜨거운 햇살은 차양이 가려주고 시원한 바람이 맹렬하게

들이치니 한량놀음이 따로 없다.

앙코르 왓 우쭉에 쁘라삿 크라반, 그 위의 반띠아이 끄데이, 쓰라쓰랑을 거쳐 북쪽으로 내달리기로 했다.

쁘라삿 크라반은 씨엠립 북쪽 앙코르 유적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앙코르톰/앙코르왓에 가까이 붙어있는

힌두교 사원이다. 정갈한 인상의 담홍색 벽돌탑이 다른 잿빛 돌덩이로 이루어진 사원들과 다른 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연꽃 형태를 형상화한 모양의 건물이야 비슷하다고는 해도 색감과 따스한 벽돌의 질감때문인지

영 다른 느낌이다.

가운데 있는 중앙 성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와서 향을 피우고 꽃을 봉헌하고 소원을 비는 곳으로 쓰임이

있었다. 이런 건 '문화유산'에 대한 훼손인 걸까 아니면 문화유산 이전의 '삶의 공간'으로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 걸까.

벽돌탑 안에는 네 개의 팔에 각각 원반과 연꽃, 법라패와 곤봉을 쥐고 있는 비슈누가 있었다. 원반은 비슈누의

가장 중요한 무기이자 상징으로, 실제 고대에는 전투 무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곤봉 역시 오랜 연원을 가진

무기임에는 틀림없으며, 연꽃은 해가 뜨면 피고 지면 봉오리를 닫는 속성을 따서 '세계' 그자체를 상징한다고.

법라패란 건 뭔지 모르겠는데 무슨 악기인가 보다. 법라패를 불면 신들은 힘이 생기고 악마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어라, 근데 무수한 팔을 가진 비슈누들이 조각된 벽면을 따라 눈길을 훑어 올리다 보니, 천장이 뚫려 있었다.

간결한 형태의 피라밋처럼 조금씩 주둥이를 오무려가는 벽면 위쪽으로부터 쏟아지는 하얀 햇살.

캄보디아어인가, 아니면 이전에 쓰였던 문자인가, 사원의 문틀에 빼곡히 조각되어 있던 기기묘묘한 글자들.

글자라기보다는 무슨 함축적인 그림이나 아름다운 기호 같다.

아침 일찍부터 나선 덕분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둘러볼 수 있었다. 대략 삼십분, 휘적휘적 걸으며

아직은 기분좋게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구경하고 나니 조금씩 여행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앙코르 유적군 쁘레룹(Pre Rup)에서 바라본 캄보디아의 석양 무렵. 천지창조화에 그려진 뭉게뭉게 구름들이

그림만은 아니었구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하늘.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길을 자전거로 한시간 넘게 달려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어쩔

도리없이 서둘러 일어서야 했다. 자전거로 앙코르 유적지를 돌아보는 건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이런 단점이

있는 셈이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게 쉽지는 않고.


...어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윌 스미스가 지는 해와 경쟁했듯, 그렇게 정신없이 페달을

밟아 최대한 달렸고, 일단 어두워지고 난 이후에는 길가로 바싹 붙어 조심조심 안전운행에 신경썼다. 사실

차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쌩쌩 달리지도 않는 터라, 달릴 만 했다. 현지 캄보디아인들의 주요 교통수단 역시

뚝뚝이라는 3륜으로 개조된 오토바이나 자전거라고 하는데, 아마도 퇴근하는 듯한 자전거 탄 사람들의 인파

속에 섞여드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씨엠립 시내는 자그마한 마을 같은 느낌이지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바글대는 활기넘치는 곳이다. 마치

배낭여행자들의 성지라 칭해지는 태국의 카오산 거리 같은 분위기이기도 하고.

2층의 한 레스토랑에 올라 저녁을 주문하고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넘실넘실대고 있었다.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여행자' 특유의 여유넘치고 열린 분위기랄까.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도 반갑게 웃으며 말을 섞어줄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중간중간 가게들의 차양에는 '론리플래넷'에서 추천한 명소라느니, 누가 왔다 갔다느니 하는 광고성 문구들이

적혀 있기도 했다. 가이드북 중 가장 좋은 건 역시 '론리플레넷'이 아닐까 (근거없이) 믿고 있는 나로서는 저

가게를 한번 꼭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압사라 댄스는 더 괜찮은 곳이 있다고 들었으니 일단 참기로.

외국에 나가면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밤문화'다. 아무리 태국의 카오산 거리라거나 캄보디아의 씨엠립이라고

해도 밤이 으슥해지는 12시 어간이 되면 거리가 한산해지고 가게들도 대략 정리하는 분위기가 된다. 이래서

한국이나 일본만큼 밤 늦게까지 놀 수 있는 도시가 참 드물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거 같다. 아니면 이런

유명 여행지역은 아무래도 다음날 아침부터 다시 일정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일찍 마치게

되는 걸 수도 있겠고.



앙코르왓 인근 주택가에는 마당-마당이라고 딱히 뚜렷한 구획이 지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에서 이런 새들이

자유로이 활보하고 있었다. 저게 칠면조인지 오골계인지, 조류의 이름이래봐야 후라이드치킨 양념치킨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인지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이국적인 장면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마주치는 소들은 다들 갈비뼈가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말라붙었을까. 일을 많이

시켜서일 수도, 혹은 더워서 힘이 드는 건지도. 먹을 게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얼추 해가 저물어갈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앙코르 유적군 외곽에서 씨엠립 시내의 숙소-그것도 하필

꽤나 외곽에 잡아버린-까지 자전거로 가려면 또 두시간여 밟아야 하기 때문에 그걸 감안해 보면 얼른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마음이 살짝 조급해져서 그런지 하늘도 조금 어두워진 느낌.

길 양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촌에서 보이는 그런 무논이다. 빼곡하게 집약적으로 모를 심어놓지는 않았는지

듬성듬성 비어 있지만, 아열대 기후 덕분에 일년 삼모작까지 가능하다는 이 나라에서도 싱그런 녹색이다.

쁘레룹에 가서 석양을 보는 걸로 3-day Pass의 첫날은 시마이하기로 했다. 기어 따위 없는 자전거에서 쉼없이

페달을 밟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중간에 잠깐 내려붓던 스콜, 열대성 강우의 물방울이 따꼼거렸지만 차라리

시원해서 좋았다. 그것도 잠시, 채 십분이 되지 않아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다시 후끈거리는 찜통 속으로.

쁘레룹 앞에 도착하니 이미 석양을 보러 온 듯 여행객들을 실은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앙코르 유적지에서

석양을 보기에 좋은 장소중 하나로 꼽히는 쁘레룹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냥, 많이 파괴된 채 중앙 성소를 감싸고 섰는 네 개의 보조 사원, 총 다섯 기의 연꽃모양 건축물이 비바람에

쓸리고 닳아빠져 있었다. 쁘레 룹은 사실 이 곳에 올라 석양을 보고 싶단 이유만으로 들른 사원이었다.

위에 오르니 별로 넓지도 않은 공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일찌감치 명당을 차지한 채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은 전부 한국어로 된 가이드북에 한국말을 시끄럽게 쓰고 있었다. 왠지 그 압도적인 한국인 여행객

비율에 민망해져 버렸다. 외국인들은 석양 보는 거 별로 안 좋아하나? 아님 이 장소가 석양보기에 좋다는

팁은 한국어 가이드북에만 있는 거 아닐까?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았지만, 단일 장소에 이렇게 특정 국가

여행자들이 몰려있다는 건 어쨌거나 그다지 건전한 현상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해가 넘어가려는 즈음, 서늘한 바람이 하늘끝에서부터 불어왔다. 구름들도 물통 속 담궈진 붓에서 잉크가

빠져나가듯 삽시간에 쏴아, 하고 하늘 바깥으로 번져나간다.

파노라마로 어떻게 연결해 보려고 찍어 보았으나 실패. 그치만 해가 구름에 가리고 조금씩 땅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타이밍의 하늘이란 너무 이뻐서, 계속 질릴 줄 모르고 하늘을 보고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고.

약간씩이지만 다 다르다. 잠깐 사이에도 구름의 모양과 위치는 급변하고, 구름에 반사되는 햇살의 양과 강도에

따라 그 풍부한 느낌과 질감마저 달라지는 것 같다.

구름이 많아 해가 떨어지는 장면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아마 조금 더 뭉개고 있었다면 찍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버스나 뚝뚝을 대절한 게 아니라 두 다리만 믿고 자전거 페달을 한 시간 넘게 밟아야 할 몸인 거다.

가뜩이나 교통법규도 안 갖춰진 동네, 가로등 따위 정비되어 있지 않은 동네에서 어둑한 길에 자전거를 타는

불상사는 피하고 싶어 아쉬움을 가득 머금은 채 자리를 떠야 했다.

안녕 사자야~ 인사하고 쁘레룹을 내려섰다. 뒤에서는 여전히 한국말이 다른 나라 언어들을 위압한 채 우렁차게
들리고 있었을 만큼 한국인이 '쁘레룹 석양전망대'의 대세였다.

그래도 아쉬워서, 가파른 각도의 계단을 내려서면서도 연신 눈과 카메라는 하늘을 찾았다.

와중에 두 번째 등장하는 '나'.

급변하는 일기 상태가 고스란히 구름의 형상에 반영되는가 싶다. 저 멀리에서 유유히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여기저기서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두터운 구름, 그리고 눈앞에서 내려앉기 시작하는 깜깜한 먹구름.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하늘, 그리고 남국의 구름이었다.


때로 어떤 사원들은 다른 사원을 짓기 전 공법을 시험하고 디자인을 구현해 보기 위한 '시험판'의 역할을 맡게

되기도 하고, 임시로 다른 사원의 역할을 대행하기 위한 '가건물'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한 큰 규모의 사원인 쁘리아 칸(캄보디아#13. 파괴된 듯 이어지는 사원의 명맥, 쁘리아 칸(Preah

Khan)
)을 세우기 전 그보다 작은 사이즈로 지었던 사원이 바로 따쏨이다.


아마도 그래서 중요성에서 많이 밀리기 때문일까, 사원 내부는 어찌 할 수 없이 드러나는 퇴락과 붕괴의 조짐을

억지로 막아놓는 안간힘의 뚜렷한 흔적들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세라도 비바람 한차례면 무너져 내릴 듯 기우뚱한 입구. 이미 돌덩이가 몇개씩 빠진 이빨처럼 듬성거린다.

입구 하나를 집어삼켜 버린 나무, 처음에 과연 어디에서부터 씨가 싹을 틔우고 가냘픈 연두빛 잎을 내밀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나무 뿌리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 입구를 움켜쥔 채 땅 위로 끌어올린 느낌이기도 하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균열과 붕괴의 조짐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왜, 저렇게 지키고자 하는 걸까.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 혹은 '현대'라고 규정짓고 시대구분을 하면서부터 본격화된 박물, 역사 박제화의 시도들.

그 이전까지는 무너지고 부서지면 그 뿐, 이렇게 처절하게 시간을 거역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 (대체 지금이

'현대'라고 규정지어 버리고 나면, 백년이백년 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시대를 어떻게 규정지을까. 현대를

넘어서도 몇번은 넘어섰을 테니, 탈탈탈현대쯤? post-post-post-modernism? 늘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차라리 무너지고 사그라들도록 냅두는 것은 안 될까. 어쩌면 '인간이 왜 죽도록 냅둬서는 안 되는지'와 같은

도덕률과 당위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잔뜩 얽히고 섥힌 나무뿌리, 혹은 줄기. 어디서부터 줄기고 어디서부터 뿌리라 해야 할지. 차분하게 가부좌

틀고 앉아 수인을 맺고 있는 부처들의 자태가 고고하다.


 

앙코르 유적지의 스몰투어와 그랜드투어, 그 중에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얼추 하룻동안 돌아보게 되는

그랜드투어 루트를 자전거로 밟고 있다.

앙코르 왓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앙코르 왓은 앙코르 유적지 중 하나,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하나의 사원이고, 근처에는 아기자기한, 혹은 거대한 사원들과 유적들이 즐비하다. 그렇게 유적지와

유적지를 이어주는 이차선 도로 옆으로는 이따금 소가 풀을 뜯고, 원숭이가 지나가는 정글이다.

그렇게 도착한 니악 뽀안, 사실 그렇게 하나하나 다 돌아봐야 하나 하는 회의도 얼핏 스쳤지만, 어차피 루트를

따라 가고 있는 중에 마주치게 된 것이라 잠시라도 들러보기로 했다.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도로, 게다가

경사도 살짝 있어서 당장은 좋지만 나중에 돌아나갈 땐 어쩌나 싶은 코스를 오분 정도 달리니 당도했다.

니악 뽀안은 '꽈리를 튼 뱀'이라는 뜻이다. 가운데 분수대처럼 조성된 사원의 계단을 가만히 보면 두 마리의

뱀이 둘둘둘, 흔히 표현되는 잘 싸질러진 Ddong처럼 감겨 있는 걸 볼 수 있으니 이름의 의미는 충분히 알겠다.

사방으로 부조 조각이 있고, 그 중에서도 아직 많이 훼손되지 않은 조각들은 꽤나 그럴듯한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원래 이 곳은 물이 가득 차있는 수상사원인데, 우기에나 물이 찰 뿐 다른 때에는 걸어서 사원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 있는 거다.

주위에도 네 개의 조그마한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체 물이 어디까지 잠겨들어간다는 건지 그리고

조그마한 연못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짙푸른 하늘을 보며 잠시 누워 쉬기로 했다. 딱히 여기가 어떤 곳이고 역사적으로 어떻고 조각은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재질은 뭔지, 그런 거 모르고도 그냥 정글 한가운데 커다란 운동장 벤치 같은 거 있고 마침맞게

짙은 그늘도 있으니 쉬기 딱 좋은 타이밍인 거다. 그럴 듯한 운치. 잠시 낮잠을 즐겨도 좋을 만큼 기분좋은

따뜻함, 땀이 식으며 몸이 조금씩 '찰져가는' 느낌, 게다가 쉼없이 달린 자전거로 묵직하지만 유쾌한 두 발의

나른함까지.

잠시 누웠다가 가운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이 웃긴다. 아마 물이 들어차 있었으면 가운데

사원으로 헤엄쳐 가는 말의 형상이 그럴듯 했을 텐데, 지금은 무슨 부적붙은 말 강시처럼 두 팔을 앞으로

내뻗고는 꽁꽁 굳어있는 모습이다. 

중앙성소에서 한번 둘러보며 구경하고 있는데 저쪽 입구에서 우르르,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의 매력은 정글 한가운데서 사람 소리없이 편안히 누워 쉴 수 있었단 게 가장

컸었는데 그 평화가 깨지기 직전이다. 사람의 파도를 피해, 서둘러 다시 돌아나가기로 했다.




쁘리아 칸, 크메르어로 '신성한 검'이라는 의미의 남성적 기풍이 물씬한 사원에 도착해 자전거를 내리자마자

쫄래쫄래 쫓아오는 아이들.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거나 웃음을 보이면 안심한 아이들은 마음놓고 말을 걸고

물건을 내밀고 지칠줄 모르고 따라온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이들이 어떻게 그리도 하나같이 이쁘고 눈이

맑은지 웃음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숨바꼭질이나 얼음땡이라도 하듯 쫓고 쫓기는 정신사납고 부산한

놀이를 좀 하다가 끝내 털썩 주저앉아 항복하고 만 내게 사진찍어달라며 활짝 웃어주던 아이.

쁘리아칸은 앙코르톰 바로 북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사원이다. 한때 불교 승려가 천명을 헤아리던 거대 사원인

동시에, 왕궁이자 도시의 기능도 병행되었던 네모반듯한 계획도시이기도 하다. 정글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포위하고 슬금슬금 침투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사원 내부의 통로들.

사원 중간중간에 배치된 경비원은 딱히 여행객들의 움직임을 제재하지는 않는다. 관람 동선이나 제한구역 등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않아 그냥 발길 닿는대로, 거대한 사원을 돌아다니다 보면...길을 잃기도 한다.

좌우대칭에 엄격했던 크메르 유적들 안에 들어서면 어쩔 수 없다. 어디가 남쪽인지 이글대는 태양을 보고

가늠해 볼 밖에 없는 거다.

가루다, 한국에서는 불교적 전통에서 '금시조'라고 이야기하는 이 조류의 제왕은, 비슈누를 태우고 다니는

커다란 새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커다란 사원을 이고 있다는 듯 튼실한 '꿀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통로. 아무리 캄보디아, 앙코르왓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라고는 해도 워낙 많은

건축물들이 산재한 터라 생각보다 여행객들로 붐비지는 않았다. 몇몇 주요 건축물만 빼고.

얼핏 보면 조그마한 집 하나가 옆의 나무에 치여서 붕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눈의 착각. 실제로는

꽤나 큰 사원인데다가 그보다 훨씬 징그럽도록 크고 거대한 나무다.

사람과 비교컨대 이정도 사이즈. 스펑나무라는 이 나무의 발육속도나 생장력은 어마어마해서 삽시간에 건물을

잡아먹곤 한다고, 그나마 이건 계속해서 신경써 통제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좀 늦춰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벽면을 움켜쥐려던 거대한 나무뿌리를 잘라서 생장억제제를 투여하기도 한다고.

틀림없이 이 사원 어딘가에 자신의 위치가 있었을 돌들이, 더이상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지 못한 채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려버렸다. 그렇지만 그 위에는 이미 또 다른 사람들의 소원이 조그마한 돌멩이로 쌓이기 시작한

셈이니, 결국 어쨌거나 여전히 충실하달까.

무희의 홀이라 이름붙은 공간으로 들어서는 들머리, 사원에 소속된 무희들이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했던

장소라 해서 '무희의 홀'이라고 한다. 공간에 맞는 인테리어, 무려 열세명의 무희들이 춤을 추는 동작이 조각된

문틀.

뱀의 신, 나가를 타고 있는 새의 신, 가루다. 아주아주 전형적인 크메르 유적군의 난간 '액세서리'.

잠깐 앉아서 쉴 만한 그늘을 찾고 나니 딱 이녀석과 눈이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뒤엣녀석은 이미 두 발만

남긴 채 자연으로 돌아갔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천년 가까이 사원을 수호하는 사자 한마리.

다소 이국적인 건물이다 싶어 가이드북을 펼치니 역시, 그리스풍의 건축물이라고 딱 찝어놓았다. 여기가

바로 '쁘리아 칸', 신성한 검을 모셔놓았던 곳으로 추측되는 곳이라 하는데 대체 어떻게 생긴 검이었을까.

유난히 촘촘하게 세워진 기둥 사이로 언뜻언뜻 고이 모셔져있었을 과거 '신성한 검'의 잔영이 보이는 듯 했다.

나의 상상 : 뱀의 형상을 한 왕의 침대같은 곳에 누워 육감적인 여성으로부터 크메르식 마사지를 받고 있는

오만한 표정의 남자. 이건 당대 크메르 왕국의 생활상을 드러내는 걸까.

가이드북의 '정답' : 힌두신화에 따라 한 우주의 주기가 파괴되고 지금의 세계가 오기 전에 비슈누가 우유의

바다에서 큰 뱀 위에 누워 다음 세상을 명상하고 있는 장면.

나의 상상 : 퍼덕퍼덕 날아다니는 천사들을 배경으로 한 수레 위 가부좌 아저씨가 벌거숭이 아저씨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받는 장면.

가이드북 : ...(침묵, 설명없음)

연씨무늬 창문살이란다. 뜨거운 햇살을 막으면서도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바깥 풍경을 볼 수 있게 하려는

'조상님의 지혜'인 거다. 꼭 한옥이 어떻네 온돌이 어떻네 하면서만 찾을 수 있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조상님의 지혜',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간 선배 인류에 대한 존중, 경탄의 표현이니까 말이다.

중간중간 세워져 있던 No Touch. 흔히 '노다지'라고 하는 말의 어원은 구한말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지금의

북한 지역 금광을 채굴하던 서양인들-대개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인들-이 갱도 안에서 금을 캐던 한국인 인부가

금을 발견하고 나면 손대지 말라고 하면서 '노 터치! 노 터치!', 그로부터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어쨌던

'노터치'란 표지판이 기우뚱 위태롭게 선 저곳도 캄보디아 현대인들에게, 인류에게 '노다지'와 같은 곳.

비록 이렇게 새초록한 이끼가 무성해지고,

문틀 가득 세심하게 조각된 무늬들이 손을 타 닳아갈 지언정,

여전히 사람들은 중앙 성소를 찾아 순례하는 마음으로 사원을 돌아 보는 거다.

앙코르왓 지역 내 어느 사원에서든, 영어/프랑스어/일본어/중국어 등 세계 언어로 가이드를 해주는 캄보디아

현지인 가이드들이 일군의 여행객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는 걸 볼 수 있다. 그 중 한 영어 가이드가 설명하던

이야기를 훔쳐들으며 함께 감상했던 자야바르만 7세의 어머니를 본딴 여신상이라던가.

같은 여신인데, 조명이 없을 때의 은은하던 미소가 조명 아래에선 '쥐잡아먹은 듯한 입술'로 덮여버렸다.

여기는 그 가이드가 은밀히(?) 안내해주며 팁을 요구했던 또다른 숨겨진 여신상. 보존 상태도 훨씬 양호하고

표정도 훨씬 당당하다. 여신이 아니라 여왕의 풍모가 풍겨난다.

한시간반 정도 둘러보니 다 둘러봤다 싶다. 나오는 길에 다시 돌아본 통로.

갈수록 문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 느껴지는지. 사원의 네 개 대문에서 중앙성소로 이어지는 통로 중

서쪽에서 이어지는 통로는 중앙으로 갈수록 문의 크기가 작아지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중앙, 왕이

있는 곳으로 갈수록 신하들의 머리가 숙여지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인 셈.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심지어는 수원화성에서도 왕이 지나다니는 문과 신하들이 다니는 문의 크기가 다르듯 여기 역시

마찬가지 아이디어가 건물에 반영된 거다.

머리가 날아가버린 수문장의 상이다. 이 곳을 공략했던 외적들이 크메르의 기운을 쇠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파괴했다는 건데, 그런 식으로 '기운'을 꺽기 위해 이러저러한 상징을 깨부수고 파괴하는 일은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조금씩은 자취가 남아있는 듯 하다. 백두대간의 쇠말뚝도 그렇고, 태국의 무수한 머리없는

부처상들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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