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마침 밤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하고 나니 3시반. 전철다니길 기다리기로 하고 여관과
아가씨를 권하는 여성분들께 죄송해하며 비됴방으로.


모든 곳에서 의미를 찾으며 모든 곳에서 이러저러한 지침을 받으려는 건 물론 아니지. 때론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보기도 하고 그저 일종의 재미만 요구하는 경우가 태반이기도 하고. 그치만 하다못해 무협지나 만화에도

무언가-말투던 단어건간에-得이 될만한 게 있다는 게 내 경험이라서. 이 영화보고 나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멋진 영화인데..무언가 완벽하게 속아넘어간 느낌. 마술을 볼때처럼, 박수를 치고 감탄을 하면서도 왠지 한구석이

미진한 느낌이랄까. 스토리 끝의 갑작스런 반전에 원인이 있었나..


그 생경함의 출처는, 숙고 끝에 다다른 답안인데 아마도 이질감인 거 같다. 전혀 말이 안 되는 환타지틱한

이야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며 '빙의(라 부를만한 것)'의 허무맹랑함을 거의 완벽히 지워버렸으니

말이지. 하긴 동감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거보다 정도가 훨씬 세지 싶네. "우리는 우주에서 왔어!" 정도로.


마지막의 히로시에 료코가 '까슬까슬' 아빠-남편의 턱을 만지는 장면에서야 군더더기같던 결혼식 장면이 이해가
 
되었다. 결국 남편이 그녀를 딸로 호명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녀는 멋지게 그 변화-아내에서 딸로의-를 이루기
 
위한 연극을 했던 거..남편-아빠는 잠시 발끈해서 그녀의 새 신랑에게 제의를 하고..두대 갈기겠다는, 한대는

딸내미를 위해. 한대는 그녀를 위해. 한대를 있는 힘껏-머리도 희끗해졌으면서-갈기고서 잠시 pause..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다. 새인생이 시작된 걸 축하해.


그저 맹목적인 애정 내지 의욕만으로는 무언가를 이루기에 턱없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이뿌게 만들어내기가

곤란하다. 그저 무작정한 친밀하고도 따스한 분위기만이 맥없이 흐르는 경우가 어찌나 많은지. 담을 그릇을

잃어버린 정신이 역할갈등을 겪으면서..어찌할 수 없는 그 변화를 수긍하기 위한 서로의 노력. 그 노력을 눈멀지
 
않게 하기 위한 이벤트가 결국 영화의 중종반간의 스토리지 싶다. 거의 성공해가는 단계에서 굳이 그걸 폭로하는

그녀의 의도가 남편에게 전해지는 순간, 주먹은 멈추고 그는 웃어 줄 수 있게 되어 결국 사랑이 성공하는 셈이랄까.


성공...이란 말보다는 매듭..이란 말이 더 나을라나. 사랑의 매듭.


어쨌거나 지금은 비됴보고 집에 와서...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ㅋㅋㅋ



(2003.12.24)
오대수(최민식)에게 이우진(유지태)이 말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니들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오대수가 찾아간 최면술사는 그의 자아를 양분하여 그사실을 아는 자아(악한 자신)를 제거해 버리는 시술을

해 놓지만, 성공과 실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여운을 남긴 것. 문득 정신을 차린 대수 위로 눈이 한없이 쏟아지고..

미도(강혜정)가 대수에게 와서 대사. "아저씨..사랑해요.."


대수의 손이 움찔 떨고는 미도의 등저리를 감싸안으며..그 우는듯 웃는듯한, 처연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이 클로접.

최면이 성공한 걸까. 그래서 그저 그 인상적인 표정은 '복수심밖에 남지 않았다던' 황량한 과거를 매듭짓고

새로운 사람, 사랑을 얻은 감개무량함인 걸까. 혹 최면이 실패로 돌아간 게 아닌지. 이미 누차 대수가 인위적인

조작을 깨부수고 온전히 자각해나갔듯이 말이지.


우진이 누이와의 일을 겪으며 그 현실을 자신이 소화해낼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강렬한 증오를 대수에게

투사하며 사건을 왜곡했던 것처럼..'문명화된' 인류의 성금기를 깬다는 일은 아마도 쉽게 묻어버리거나 긍정해

버릴만한 소사는 아닌 거다. 그걸 단지 시술자의 실력, 컨디션. 구상력이랄까, 그런 것에 우연처럼 맡긴 채

지워버릴 수 있단 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세탁소에 빨래 맡기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해서..결국 최면에의 기댐은 현실을 좀 쉽게 돌파하려는 대수의 꼼수였던 게 아닐까..혹은 조금이라도 꿈인 양

위로받고 싶었던 대수의 painkiller같은 건 아니었을까. 현실이란 건, 그게 설사 사촌과 관계를 맺던 딸자식과

관계를 맺건 결국은 자신이 어떻게든 질겅이며 소화를 시켜나가야 하는 걸 테니까. 다만, 그 와중에 제멋대로

현실을 꾸깃꾸깃 소화하기 편하게 해석하다가 우진처럼 편법을 쓰지도 말 일. 무조건 타인에게 내처 전가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 걸까. 미도라는 여자를 껴안음으로서 자신이 아프게 깨닫고 있는 그 '현실'을 인정하면서..

대수는 그렇게, 우는듯 웃는듯..처연하지만 결연한 표정을 지은게 아닐지.


사운드트랙이 참 맛깔스럽게 배치가 되었지 싶다. 효과적인 음향과 변주를 통한 분위기 일신. 2시간의 러닝타임을
 
팽팽히 유지하는 극적인 탄탄함과 설득력있는 반전들도 그렇거니와, 하드코어틱한 장면들이 극에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고 외려 받침이 되는 적절한 연기와 안배를 통해 잘 '버무려진 듯'. 멋진 영화였어.



(2003.12.24)

생각보다 그녀의 사랑은 많은 것들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극적인 반전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둘의 마음이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둘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시린 것인지를 느끼도록 하려 애쓰는 것 같다.



그래서, 대만에 간다.

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왠지 멋져 보이지 않나. 지난 번 영화 '청연(Hear you)'에 이어

'말할 수 없는 비밀' 이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대만이 가고 싶어져서 오늘 훌쩍 떠난다라면.


7/15-19, 대만 다녀오겠습니다~* 놀러가는 거여요.ㅎㅎㅎㅎ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수분간, 온갖 세상의 소음들이 삐집고 나오는 그 틈바구니에서 꽃처럼 만발하던 수화들,

처음엔 아무 대사 없이도 이렇게 흡인력있게 당겨낼 수 있다는 데에 마냥 놀랬고, 다음엔 말로 뱉는 대사들 대신

수화만으로도 참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사실 수화, '손으로 하는 말'이라 이해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는지도 모른다. 수화를 할 때 둘은 서로의 손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표정, 입모양에 몸짓까지 모두 섬세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그들의 눈빛,

입모양, 살짝 스쳐가는 빛과 그늘, 그런 뉘앙스들을 모두 잡아낼 기세로, 수화는 단지 손짓을 이용한 대화가

아니라 거의 완전소통을 지향하는 무엇과도 같다. 더듬이 두개를 완전히 포갠 채 서로의 의식 전체를 온전히

공유하는 개미의 그것과 같은 무엇 말이다.


쉽게쉽게 뱉어지고 그 누구의 귀에도 가닿지 못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상대를

등진 채로도 던질 수 있는 말이란 건 얼마나 허랑한지. "그럼 여태 너희는 만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의 아버지가 어이없어 하며 물었고, 그래서 그녀와 그는 말한다. "그동안 우리는 말이 아니라 손으로 했어요."

손으로, 온몸으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내내 한 번도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 '사랑해'. 자그맣고 귀여운 반전이 지나고 난 후에도

그들은 말할 뿐이다. "워 시환 니". 난 니가 좋아. 그 말로도 충분한 거다. 굳이 뭉게구름같은 수사와 여름철

소낙비같은 고백 말고, 이미 그들은 손으로, 눈으로, 입모양으로, 온몸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p.s1. 이런 달콤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만나면, 잠시나마 심술궂은 시니컬함이 잠잠해지고 만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씩은 갱장갱장히 이런 영화가 땡기는 이유.


p.s2. 영화에 대해 아쉬운 점은 딱 하나, '聽說'이란 (아마도) 대만 타이틀을 그대로 써버린 무성의한 제목, '청설'.

차라리 영어제목을 쓰는 게 어땠을까. hear me.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도, 내 말만 들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내 모든 것을, 내 모든 뉘앙스를 가능한 남김없이 들어주길. 그런 느낌의 영어 타이틀이다.





#1. 둘 다 모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는 게 굉장히 맘에 들었다. 용맹무비한 바이킹이 등장하니까 그런

정도 상처쯤이야 별일 아니라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애니에서 이 정도 결말이면 꽤나 인상적이다.


#2. '투슬리스'는 왠지 토토로와 슈렉고양이가 퓨전한 녀석 같다. 슈렉고양이 하니까 생각나는데, 요새 광고중인

'슈렉 포에버'에 나오는 녀석은 완전 투실투실해져 있었다. 수컷이었을 텐데, 상상임신중?


#3. 아바타 이후 3D가 대세가 될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었었지만 몇 개의 영화들이 나가떨어졌다. 덕분에 좀더

세련되고 편한 3D 안경의 보급을 기대했던 난 실망하고 말았지만, 이 영화는 다시금 그 기대에 불을 지폈다.



#0. 사실, 영화의 스토리나 메시지는 분명치 않고 의식적이지도 않다. 아바타처럼 적당한 기존의 이야기를

뒤섞고 약간의 변형된 영웅을 등장시킨 정도랄까. 또 아바타처럼 성공적이기도 하다. 3D의 기술을 만화적인

차원에서 백퍼센트 활용한 작품인 듯. 기대 이상이었다.



영화는 극중 영화감독지망생 영재, 그의 말대로 다소 "산만하고 수다스럽고 정신없이"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영화 제작을 위한 자금 걱정을 하다가 뜬금없이 '아~ 스크린쿼터', '아~ FTA'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나,

네그리의 '제국'을 읽으며 사회의식을 가진 문화활동을 하라던 고참이 눈앞의 부조리에 침묵하는 모습,

노동해방 조끼를 입은 노조원을 개잡듯 두드려잡는 꼰대의 광적인 소란까지. 아, 정신병력이 있는 친척이

있냐는 의사 질문에 대한 대답에 빵 터졌다. "사촌 형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어요." 정신없이 사방팔방을

손가락질하고 시니컬하게 뒤틀어놓는다. 온갖 사회문제에, 꼰대들의 고루함과, 기존 영화판에까지.


그런 감성과 지적질들이 맞고 틀렸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한다. 워낙 정신없이 사방으로 벌려진 이야기에다가

그의 이야기는 대개 맥락도 없고 지긋한 깊이도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수다스런 이야기는 외마디다.

외마디의 집합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가 문득 실어증에 걸리면서 비로소 핵심으로 가닿는다. 입닥치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여태 제대로 '말을 들었던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만들려면 우선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고 남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되짚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는 그와

함께 했던 그녀와의 관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결국 은하, 그녀를 해방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은하 3호, 4호로 바뀌어 나가고 동시에 자신도 영재 4호,

5호로 바뀌어 나가며 함께 해나가기에는 이미 그녀는 지쳐있었다. 이젠 자신이 없어, 이젠 마음이 없어.

그렇게 그는 홀로 영재 5호, 6호로 변전해 나간다. 그건 그가 여태 남의 말을 듣거나 감정을 헤아리기보다는

혼자 쉼없이 떠들어댄 대가이자, 그 '양질전환'의 임계점에 이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을지 모른다.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잘 하니까." 해방된 은하, 그리고 새로 함께 하는 은성 역시

똑같이 말해준다. 그가 애초 번다하고 수다스럽게, 마치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부유하는 온갖 말풍선들을

잘라붙인 듯한 화면과 메시지를 모자이크하듯 던져준 건 일종의 힌트 아닐까.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줄곧 머릿속에 쌓이기만 한 채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외마디 수다'로 소모되었던 그런 에너지를 조금 더 잘

가다듬어서, 그런 산만하고 정신없는 실타래로부터 하나하나 잘 정련된 '이야기', '대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마하고 조심스런 희망.


새로 함께 하는 은성이 듣지 못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혹은 '톰과 제리'같은 만화처럼,

말이 없어도 그 의미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영화를 감독은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고 나면 그의 정치적

지향과 감수성, 비판의식같은 것들도 좀더 효과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올 수 있을 거 같다. 이 영화에서

다뤄진 것만큼 유쾌하고 발랄한 방식은 고스란히 살리면 좋겠고. 그게 영화속 감독지망생에게 바라는 바이자,

(아마도) 윤성호 감독 본인이 바라는 바인지도 모르겠다.



#0. 하녀의 탄생.

광고전단을 나눠주던 아주머니는 한 걸음에 한 장씩 바닥에 슬쩍슬쩍 '흘리기' 시작한다. 싸구려 수족관같은

노래방 건물 안의 여자아이들은 마이크를 꼬나쥐고 담배를 꼬나물었고, 막다른 골목길에서 담배를 숨가쁘게

땡겨 피우던 아주머니는 서둘러 손을 털고 가게로 돌아간다. 건물 옥상에서 아래까지의 높이를 가늠하던

여자는 담뱃재나 광고전단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아주머니는 광고전단을 흘렸고, 아이들은 마이크에

소리소리 질렀으며, 담배는 빨갛게 타올랐다.


어지러이 바닥에 엉겨붙은 광고전단들과 함께 그려진 그녀의 빨간 흔적. 아마도 그게 '하녀'의 탄생 배경.


#1. 아더메치+유, 돈과 뻔뻔함으로 지탱되는 세상.

거대하고 견고한 성 안으로 편입한 그녀는 기꺼이 스스로의 의지를 반납하곤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찾아든 그 곳 어딘가에선, 자신 역시 그 성의 성주인 주인 내외와 같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단단하게 반짝이는 대리석 마루바닥을 밟고, 우아하게 입을 헹구듯 고급 와인을 맛보며,

모든 사람들을 한껏 내려보며 살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또 그렇게 살고 싶단 욕망에 충실하고자 한 거다. 이미 전례가

있지 않은가. 국자를 쥔 채 주방을 점령한 조여사 말이다. 주인 내외가 장악하지 못한 공간을 차지한 채 그들을

흉내내는 재미에 흠뻑 빠진 '아더메치+유'의 아주머니. 당장 전도연 그녀의 삶도 주인 내외와 닮아간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꺼우며, 치사하다. 그렇게 외치면서도 그 성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다. 가오잡힌

스탭이 엉켜 볼품없이 비틀거릴지라도, 검사 아들을 만들어낸 '인간승리의 조여사'가 하잘것없는 시정잡배 아줌마로

천대받을지라도.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이라고 뒤에서 욕할지언정 앞으로는 공손히 봉투를 건네받는다.

그래서 유치하다. 어쩌면 그들, 주인 내외를 떠받드는 그들이 더 나쁜지도 모른다. '아더메치'에 더해 유치하기까지.

아더메치유, 란 단어는 그런 식의 호가호위에 어울린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주인 내외에 대한 비난은, 그래서

뻔뻔하다.


#2. 아더메치, 그렇지만 뻔뻔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녀는 차츰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에 익숙해진다. 원했던 원치 않던 그녀는 과거의 너저분한 광고전단같던 그녀의

삶을 떠나버렸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선택이랄 것도 없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그녀가 모시는 주인 내외야말로

약육강식 세상의 정점에 선 사람들, 그런 그들과 같은 저택에 머물며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그들의 삶을

지탱하며, 돈으로 해결되는 세상 속에 한 배를 타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세상은 결국 그녀를 배반한다. 그녀가 그 세상을 배반한 게 먼저일지 모른다. 처음엔 마냥 고압적이고

근엄하게만 보이던 대저택과 주인 내외가 조금씩 우스워지고 허술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고처럼 덜컥

생기고 말았던 아이 때문만도 아니고, 남편의 외도로 인간적인 흔들림을 보이고 만 아내의 잘못만도 아니고, 주인집

아이의 맑은 눈망울 때문만도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 그들이 죽어라고 손에 꽉 쥔 가면이 보였을 거고, 결코 그다지

즐겁다고만 할 수는 없는 가면놀이가 보였을 거다. 완벽해 보였던 남자가 하룻밤을 무마하는 화댓값을 건냈을 때처럼.

그래서 배신감을 느끼고 동시에 우습고 역겨워졌을 거다.


#3. 저택, 사람들의 일용할 허영심.

우스운 세상, 그녀는 횃불이 되고 말았다. 뻔뻔하지 못해서 횃불이 되었다. 자신 역시 진흙탕에 뒹굴렀으니 순교자는
 
아니었으되, 최소한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스스로를 되찾는 방법이었다. 그녀 역시 '아더메치'에 더해 '유치함'까지

갖췄던 그 저택의 부속이자, 호가호위의 여우였다. 다만 끝까지 뻔뻔하지 못했다는 게 그녀가 허물어진 이유라면

이유일 거다. 그래서 주인집 아이의 눈망울을 이겨내지 못했고,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모성애적(?)' 본능을

이겨내지 못했고, 돈 몇푼으로 쇼부쳐 보겠다는 알량하고 빤히 보이는 주인집 사람들의 속내를 알고도 모른 척
 
넘겨내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횃불이 되어 그 거대한 저택을 정화한다. 저택, 그 저택은 주인 내외의 욕망을 남김없이

만족시키고 과시하기 위한 거대한 전시장이자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용할 허영심이었다. '허위의식'

그 자체라고 칭할 수도 있을 만큼, 저택은 단단한 실체감을 가진 채 숭배자들의 동경심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횃불이 되어 그 허위의식을 불사르고자 한 건지도 모른다.


#4. 악성 종양처럼 건재한 그들의, 우리들의 욕망.

감독은 시니컬하다. 충격적 결말 이후에 더욱 씁쓸한 에필로그를 굳이 덧붙인다. 주인 내외의 이전 저택은 전도연의

세례로 온전한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악성 종양처럼 다른 곳으로 옮겨와 건재하다. 그들의 저택은

돈으로 사면 되고, '조여사'의 대용품 역시 돈으로 사면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뻔뻔함 역시, 돈으로 사면 되고.

필요하다면 언어 역시 언제든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꿀 수 있다.


더욱 나쁜 건 전도연에게 울림을 전했던 맑은 눈망울의 주인집 아이가, 서투르게나마 샴페인 잔을 쥐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점. 전도연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던 그 아이 역시, 저택으로 '용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철렁했다. 이미 그 아이의 눈매는 텅 비어 있었다. 돈을 의식하고, 뻔뻔함을 장착하고.


결국, 전도연에게 부족했던 건 돈 뿐 아니라 뻔뻔함이었던 걸까. 돈으로 세워진 그들만의 리그, 그 옆에 바싹 붙어

호가호위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스스로에 돌아올 칼날같은 자책을 피하려 허공에 대고 빈주먹을 흔들며

'아도메치' 따위 외쳐보아도 마음 한구석쯤은 찜찜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다. 같이 '아도메치'해지며 더군다나

'유치'해지고 있음에 대한 자각 증상 따위, 끝내 눈돌리고 모른 척 할 수 있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5. 다시금 하녀의 탄생을 되짚다.

하녀는 광고전단지의 운명을 거부하려고 했다. 하룻밤 구역질처럼 토해지고 다음날 아침이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광고전단과 같은 삶이 아니라, 피둥피둥하고 축 늘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살과 비비적대는 삶이 아니라, 팽팽하고

잘 관리된 '부르주아'의 살을 맞대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누가 뭐랄 수도 없고 딱히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울 욕망이다. 그렇다면,


전도연 그녀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단지 그녀가 단단치 못하여, 뻔뻔치 못하여 스스로 몸을 던진

것 뿐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이선균이 부러웠다. 여복(女福)이구나. 그는 첫사랑인 두살 연상의 운동권 누나와, 파주에 내려와 만난

착하고 발랄한 아내와, 그리고 어리지만 강렬한 매력의 아가씨, 아내의 여동생까지 만수산드렁칡처럼

이리저리 얽힌 거다. (게다가 그녀는 근래 내가 기대감을 품고 영화를 찾아보게 만드는 '서우'란 말이다.)


그가 첨엔 멋져보여서, 나중엔 받은 게 많아서 계속한다던 철거민대책위원회 등 사회 운동, 그건 첫번째

첫사랑과의 접점이자 그녀를 기리는 그만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이상 계속하는 이유를 못

찾으면서도 추억을 되새기듯, 그녀에게 인정받겠다는 듯 철거촌에서 화염병을 던진다. 아내 역시 그의 삶에

늘 존재한다. 파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로, 첫사랑과의 관계에 대한 죄씻음의 고백으로.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고백은 아내를 여전히 놓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거꾸로 보여주기도 한다. 계속 허점을 내보이고

유인해내다가 끝내 입술을 덮치고 단추를 끌러내린 서우에 대한 맘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 걸까, 어느 순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여복이라기보다 여난(女亂)이란 단어가 가깝겠다

싶어지기도 했다. 어느 마음 하나 스쳐가거나 가짜였던 것은 아닌 거 같은데. 어느 것 하나 놓지 않은 거라면,

어느 순간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 시작된 걸까, 그건 아예 구분조차 못하겠다. 아무리 사랑이란 감정이

칼로 잘리듯 툭 끊기고 툭 시작되는 감정이 아니라지만, 어쩌면 그는 영화가 끝나도록, 그가 삶을 다하도록 

세 명 모두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우 역시 혼란스럽긴 매한가지. 그녀는 언니를 위한다며 형부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떠나고 돌아온다.

그녀가 놓인 세속의 문제들-보험금 문제라거나 사고 원인이라거나-따위가 그녀 내면의 모순과 뒤숭숭함을

더욱 강화하는 거다. 그녀는 언니에 대한 사랑과 형부에 대한 사랑 사이에 끼인 채, 언니와 형부의 사생활을

불편함과 호기심이 복합된 눈초리로 바라보고, 언니를 위한 가출에 형부 사진을 잘라 품고 간다.


파주는, 계속해서 안개 속이다. 파주로부터 나가는 길, 들어가는 길 모두 몽환적이게도 짙고 무겁게 떠도는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뭐 하나 뚜렷하지도 칼처럼 구분되지도 않는 그런 안개속, 이선균과 서우는 파주에 있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건 순간이다. 드라마나 여느 영화 따위에서 흔히 나오듯 문득 움찔하는 느낌도, 물건을

떨어뜨리는 전조도, 빠바바빰~하는 비극적인 음악도 없는 거다. 그냥, 아이가 서서 손흔들던 창가가 휑해지고

집에 불이 꺼져 있다. 촛불이 훅 꺼지듯, 그렇게 아이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내 아이를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경찰은 느리다. 다음날 아침이면 돌아올 거라고 태평이다. 꼭 좀

찾아달라는 눈물의 읍소 앞에 오만하고 위압적이다. 게다가 부패하고 비열한 경찰은, 아이의 실종 사건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실추(라고 쓰고 '폭로'라고 읽는 게 낫겠다)하는 악재가 되고 있음에만 주목한다.

덕분에 그녀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혼란에 빠져 사리분별도 못하는 못난이 취급받는다. 나쁜 엄마이자 못된

'암캐'가 된다. 온 동네를 돌며 '제 아이도 몰라보는 여자'로 낙인찍힌다. 정신상태를 의심받더니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된다. 다리를 벌려 매독검사를 받는다. 제안에 따르지 않아 전기쇼크-고문-기계 위에 눕혀진다.

준비되지 못한 해군과 당국, 프락치만 준비하다.[2010-03-30]

염장 지른 경찰… 실종자 가족 틈서 사복형사들 첩보활동(경향신문, 2010-03-31)
"함미에 산소 주입? 공급할 산소가 없다는데..."(오마이뉴스, 2010-03-31)


그녀는 운다. 울고 분노한다. 그녀의 아이를 되찾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를 되찾고 싶었지 경찰과 거물정치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도, 새삼스럽고 쌩뚱맞은 정의감과 적대감도 없던 일반인이었다. 자신의 아이만 온전히

려받을 수 있다면 경찰과 정치인들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손바닥이 닳도록 감사하고 감사했을 착한 사람.


뒷짐진 靑, 노골적 '北風 띄우기' 용인? (프레시안, 2010-04-02)
생환 기원 詩, 인터넷에 확산…국민들 심금 울려 (동아일보, 2010-04-02)
'얼 빠진' 한나라…故 한주호 준위 입관식에서 기념 촬영 (프레시안, 2010-04-02)


그렇지만 아이를 찾는 일이 점점 경찰과 시장의 썩어빠진 곳에 빛을 비추는 일과 같아지고 말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경찰과 시장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위세가, 썩어빠진 곳에서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국민의 종복'이고 '정의의 지팡이'였다면, 실종된 아이 앞에서 자신의

이미지 실추나 걱정하고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지 따위나 고민하진 않았을 거다.

 

하여 그녀는 울고 분노하고 일어선다. 아이를 찾아야 하겠으므로. 이악물며 수치심과 정신적학대를 견딘다.

그녀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이들과 싸워 버티곤,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 위압감으로 바닥까지 동댕이쳐져서도

욕지거릴 내뱉는다. "개자식들. 벼락맞아 뒈질 놈들." 



체인질링을 봤지만 천안호를 봐버렸다. 개자식들, 벼락맞아 뒈질 놈들은 여기 또 있다.



영화는 두 가지의 미친 세상을 보여준다. 디카프리오의 미친 세상, 셔터아일랜드의 미친 세상. 그들의 이야기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되 겹치지 않고, 어느 한구석 서로에게 타협할 여지는 없다. 미쳤다고 서로를

가리키는 손가락 사이에 타협은 없다. (사실은 영화는 뚜렷이 어느 한쪽에 기운 '진실'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진실'이 양측에 갖는 효용과 의미를 생각하고 싶은 거다.)


누군가에게 '미쳤다'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그의 논리적인 항변은 광인의 두서없는 헛소리로, 저항은 폭력성으로,

그의 생존의지는 방어기제의 발현으로,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나 품고 있는 내밀한 트라우마는 광증이 시작된

'딱 들어맞는' 계기로 이해된다.


미치지 않은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기란 그래서 참 쉬운 일이다. 우리와 당신이 밟고 있는 지반 자체가

다르다, 당신은 당신만의 안개낀 세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그건 맹렬한

폭풍우의 으르렁거림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우왁스런 윽박지름, 무시무시한 경멸, 싸잡아 내리누르는 일관한 무시까지. 그건 종종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만들 거다. 정신병은 '발병'이 아니라 '발견'되는 거라 어떤 사람이건 그 차가운 이론틀과 개념어로 짜인

거미줄에 걸려 비비적거리고야 말 테니 말이다. 막말로, 히키코모리 법정스님와 김수환 추기경은 두분 다 성격

이상에 변태성욕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대체 욕정을 어떻게 해소한 거지? 변태 아냐?"


결국 숫자 싸움이다. 자신이 받아들이는 지금의 세계가 미친 환상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그 세계내에 포섭되어

자신과 같은 환상을 보는 사람 숫자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누구 하나 자신이 지금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세계가 진짜임을, '레알'임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무리지어 '권위'를 보증할 밖에. 그렇게, 우악스럽게

다수결로 정하는 수 밖에 없단 건 흡사 문명 간의 충돌, 세계관의 충돌을 연상케 한다. 타협할 여지가 없이 각자

꽉 채워져 완결된 이야기로 굳어있으니, 부딪혀 힘센 놈만 살아남고 약한 놈은 부서져 버리는 거다.


여럿의 손가락질에 순순히 자신의 세계를 '배신'하고 미쳤음을 인정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

나섰다. 그 안에서는 자신이 착한 영웅으로 죽을 수 있으니까. 자신이 미쳤다며 손가락질하던 세계로 끌려나와

또라이 악한으로 죽긴 싫었으니까, 그는 번번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정합성있는 현실감을 제공하는 '미친 세계'가 '진짜 세계'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에겐 그것이

유효한 진실, 하나뿐인 세상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이 세계에 그어진 '정상성'과 '비정상성'은 그토록 우악스러운 다수결 논리에 따른 '카드로 만든

집'인지 모른다. 누군가의 트라우마는, 모두의 머릿속과 심장속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그래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균열짓고 또 동시에 이어주는 저주이자 축복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를 보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몇명 죽어나가고 인식되기 전까지는 주위에서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 뿐일지도. 


p.s. 요새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점 하나, 배우의 내적 세계와 환상을 뚜렷한 비쥬얼로 표현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이는 거 같다. 이전에는 저토록 생생하게 드러내고 보여주기보다 배우의 연기나 독백..? 여하간 좀 다른

방식으로 아리송하게 보여줬던 거 같은데. 나만 느끼는 건가..?




작년에 말그대로 (햇빛만 받으면) '샤방샤방한' 뱀파이어가 나와서는 '우쥬 매리 미'로 끝내던 '뉴문'이 개봉하던

때, 비슷한 제목으로 몇 개 안 되는 스크린수로 개봉했다가 금방 내린 영화가 있었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끝내 못 보고 놓쳤던 영화, '더문'.


공룡시대에서 세계종말까지의 시간축, 한국에서 남극 혹은 외계까지의 공간축, 그 위에서 '나'란 존재는 유일무이,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야말로 유니크하다는 믿음은 쉽사리 건들 수 없는 신앙같은 부분이다. '나'란 사람은

내가 부모의 정자와 난자라부터 이어받은 유전적 형질에 더해 지금껏 쌓아온 독특한 경험과 교육, 교훈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며, 그렇기에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엄연히 제각기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거다. 요는, '개성'이다.


조금만 거창하게 나가자면, 그러한 '개성'이 존재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자신의 개별적인 삶의

근본적인 이유이자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란 민주주의적 공리를 아무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내가 왜 숱한 사람이 앞서 걸어간 인류의 자취를 따라 굳이 수고로운 삶을 살며 하나의 자국을

남겨야 하는지, 나와 당신이 함께 지지고 볶고 싸우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바로

그 '개성'이기 때문이다. 난 앞선 누구와도 다르고, 함께 사는 누구와도 달라. 조금 깊어진 생각으로라면,

그 '다름'이 '우열'의 판단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런 관용을 발휘해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기반이 될 거다.


그렇지만, 너무도 흔히 쓰이는 단축키 두 개를 상상해 본다. ctrl+c, ctrl+v. 파일 복사, 그리고 붙여넣기의 마법.

생성된 시간만 다를 뿐, 내용은 어느 것 하나 변하거나 달라진 구석이 없다. 나중에, 그런 명령어를 지시받는

컴퓨터가 인간과 자유로이 대화할 지경이 된다면, 그(녀) 컴퓨터는 인간이 가진 그 '알량한 개성'이란 걸

어떻게 생각할까.


파일이 가진 내용, 히스토리, 혹은 약간의 특질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금세라도 ctrl+c, ctrl+v의 마법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 영화에서 그런 컴퓨터 '거티'는 두 명의 존재에게 같은 이름을 부르고 같은 친근함을

표하며 같은 '동일자'로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던 거다. '개성'이라고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자아의

원천이라 여겼던 그 뿌리가 이토록 쉽게 복사되고 다른 그릇에 부어질 수 있는 거라면, 대체 인간은 어디에서

그 삶의 이유를, 의미를, 목적을 찾아야 할 것인가 묻게 되는 영화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상상, 얼굴도 같고 성격도 같고 심지어 갖고 있는 기억조차 같다면.

그런 상대라면 우리는 아마도 그 상대를 죽여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솔직히 그런 식의 상상은

이미 했었다.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 알라인지 부처님인지 태을인지간에, 그 신이라는 작자의 상상력이 워낙

빈약하고 노력이 미천해서, 초딩 5년의 국한이와 중딩 2년의 태호, 고딩 3년의 상은이와 대딩 1년의 석훈이가

어쩌면 같은 붕어빵틀에서 찍혀나온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서로 모르고 있을 뿐 어딘가에 그(녀)와 똑같은

그(녀)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역시 그런 상상의 위험한 칼날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했을 뿐이었다. 만약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외모, 똑같은 성격, 똑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역시나 나는 칼을 쥐고 그를 향하거나 나를 향할 거라

생각한다. 내가 믿어왔던 세상, 내가 진짜라고 믿어왔던 발밑의 기반이 허물어지는 충격일 거다. 그럼 두려움,

혹은 황당함을 빌미로 생각조차 하기 싫어진단 건, 내가 지금 모종의 경계-빨간약과 파란약 중 하나를 골라

잡아야 하거나, 프로그램 속 세상의 외피가 벗겨질 즈음의 지점-에 서있다는 경고 신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서로의 곁을 얼마만큼 내주고,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는 걸까. '사랑'이란 말이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순간이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영화에서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는 이 조형물..연인들은, 아늑한 공간을 확보한 저 높이만큼 계단을

올라가서 편안하고도 행복한 포즈를 취한다. 시간이 다소 흐르면, 남자는 당연한 듯 여자에게 반말을 하고,

여자와 남자는 어딘가의 찻집에서 말다툼도 한다. 위로 오를수록 가팔라지고 위태로와지는 계단.
 
오를수록 폭이 좁아지며 제 한몸 운신하기도 벅찬 계단은, 게다가 받침대마저 없다. 그 계단은 어디로도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흔들리는 계단 어딘가쯤에서 리셋을 원했고, 성형을 해서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해보지만..결국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나락.


'관계'에 '시간'이 더해지면 예외없는 나락이다. 껍데기를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몇가지 취향과 특징을

좇아 사람을 공들여 찾는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다. 결국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나와 당신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김기덕의 답, 혹은 내가 읽은 김기덕의 답은..항상 그렇듯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변하는 것이다.

시간의 표백력은 그토록 강력한 것이고, 저 계단을 함께 설레며 올랐던 '관계'들은 어느순간 다 깨어져나간다.

행복했던 기억은 사진으로만 남을 뿐, 그 사진마저 바꿔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이래도 세상을 살아볼테냐, 이래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보겠단 거냐, 라고 그는 몰아세우는 거다. 사람이란

이토록 불완전하고 아름답지 못한 존재다라고.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초인(ubermensch)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사정없이 몰아부친 김기덕의 공격을 모두

긍정해 낼 수 있다면, 한자 남짓한 '재겨딛을' 공간조차 보이지 않는 그 코너에서 웃을 수 있다면. 하지만 영화는

수미상관, 다시 변주된다. A에서 A'로.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삶을 이어나가려면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고. 내가 생각해낸 타협점은 이거다. "Art Of Love." 우리가 함께 딛고 오르기

시작한 이 계단이 우리를 아무데로도 데려다주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다 하더라도, 그 계단 한칸, 한칸을 지그시

즈려밟으며 가능한 오래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파국의 지연..이랄 수도. 통속적이게도, 오래 관계를 유지하려면

역시나 서로의 노력이 절실하단 거다.



더하기. 혈연(이른바 귀속지위 등)으로 묶인 관계를 제한다면,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엮어내는 관계란 얼마나

귀한 걸까..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랑한다는 거. 영화 도중, 살짝 쌩뚱맞아보이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많이 사랑하시나봐요"란 대사에서, 그래서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어쩌면 연애지상주의자인가..라고 생각을 해보기도.ㅋ


더하기2. 김기덕..내가 이 감독에 환장하는 이유는, 그의 감성과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는 '계급, 계층, 젠더'같은

틀에 얽혀있지 않으며, '긍지높은 인간'이길 포기하되 관계와 소통의 가능성을 물고 늘어지도록 끝까지

몰아세운다. 어줍잖은 위로도, 환타지도 없는 그의 '보여주는(showing)' 영화 그자체는 항상 내게 모종의

좌절감을 맛보여주고, 나는 그 좌절감을 아껴 핥으며 바닥을 단단하게 감촉하는 것이다.
 
다소 드라마가 강화되고 대사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하드보일드한 장면들이 많이 거세된 '시간' 역시, 그의

실험정신과 좌절스런 주제의식은 그대로여서..언제나 그렇듯 실망하지 않았다. 13th.



(2006.8.27)
#. 자동차의 앞모습을 보고 저녀석 웃고 있구나, 인상쓰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밍숭밍숭한

헤드라이트를 가진 프라이드는 왠지 멍청해 보였고, 캐피탈 정도는 왠지 지적이란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갖고

있었고. 마티즈 정도는 내게..상당히 세련되면서도 은근 얍쌉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뉴그랜저 정도는 적당히

무게 있는 표정과 적당히 올라간 눈꼬리를 갖고 있고.


유지태의 코란도는 그런 거였다. 이영애와 잠시 분위기가 틀어져 분위기가 싸해지면 디젤엔진 특유의 덜덜거리는
 
소음이 그 공간을 더욱 야박하게 했고, 새로 뽑은 이영애의 마티즈와 엇갈려 한눈에 잡힐 때에는 더욱더 그

무지근한 덩치와 투박함이 두드러져 보이는. 봄날은간다, 이영화에서 자동차는 그 인물들의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하나의 적나라한 힌트였다.


이영애가 끌린 다른 남자, 그의 뉴그랜저는 그녀가 그에게 첨으로 관심보였던 선그라스만큼이나 짙은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보디를 갖고 있었고, 유지태의 각진 코란도는 제대로 광이라곤 났던 적이 없는 거 같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내겐 '사랑은 역시 변하는구나', 정도로 들렸다. 관계가 힘들어지거나, 유지태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시계나, 하다못해 달력이라도 나왔다. 조막만한 공간이었고, 그만큼

시계가 세상에 널려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와 그가 충일감을 느끼던 그런 시간들에는 한번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가 첨으로 화를 내던 시간 아침 10시반, 그후 혼자 남자가 꾸역꾸역 밥먹는 시간 11시, 남자의 할머니를 찾은

시간 밤 10시..그런 식으로, 계속 화면의 한구석에서 집요하게 시간이 흐르고, 안쓰러운 감정의 흐름과 관계의

변천을 의식시킨다. 결국 그런 아연스러운 시간의 흐름...그 극단의 형태는 마지막...남자와 여자가 서로 등을

돌리기까지..화면의 모서리로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몇번씩 서로 눈길이 엇갈리며 하염없이 부질없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다.
 

그간의 관계를 집약해서 보여주듯 때론 같이, 때론 홀로..상대를 되돌아보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애절하게 잠시

멈춰서 마주보지만..시간이 멈춰진다면 잠시나마 기대앉아 울어보기라도 하겠지만...


시간은 흐르고 봄날은 가고.


마티즈의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그녀였지만, 악수를 핑계로 먼저 등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사랑을

세련되게 혹은 잘 정돈된 모습으로 한단 건 불가능하다. 가슴이 터질듯한 안타까움..대체 세상은 왜 이따위인

거냐고 고래고래 내지를법한.


#. 그래도 남자에겐 기댈 곳이 없다. 이미 훌쩍 커버린 그에게는 고작 친구녀석과의 짧막한 대화나, 할머니가 주는

사탕 정도가 남아있을 뿐...떠나간 사람을 내처 못잊는 할머니에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고함치고,

울어버리지만...허물어질듯, 무너져내릴듯 하면서도 자그마한 할머니의 어깨는 너무도 야위고 약하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서 둘은 세상 한가운데서 오직 서로의 품에서만 기댈 곳을 찾았던 거였고.

그런데 더이상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거둬내고 씻어주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영혼에 스며있는 것. 둘이 되어 그 외로움이 더욱 커질 때, 빈틈이 늘어나고 균열이 깊어질 때 봄날이

가버렸다. 최악보다 차악,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남자는 다시금 시간의 흐름이 숨겨진 곳에서 바람을 느끼며 헤어진 후 처음으로 웃음을 띄우지만...글쎄,

그 뒤에는 아마도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정도...를 붙여서 생각해야 하지않을까.


봄날은 가버렸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봄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비끄러매고 태양을 묶어둘 재간이 없는 이상..

다시 봄날은 가고. 언젠가 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분홍빛 양산을 드리운채로 햇살 가득한 봄날의

끝물쯤에서 세상을 등질지 모른다.


(2005.4.25)

별 생각없이 빌려든 디비디, 저번 여름 시사회에 당첨되고도 못 갔던 영화였던지라 왠지 묵은 숙제를 해낸다는

기분으로 보게 되었댔다. 사실 별 거 없을 거 같은 영화,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겠지 싶었다.


"키스를 못하면 그게 안되잖아. 애피타이져와 메인요리같은 거지."

몰입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키스는 섹스를 부르는 마법의 언어, 키스없는 섹스란 상상할 수 없다는 남자의

말 한마디. 느슨한 눈빛을 풀어놓고 느슨하게 보던 영화에 바싹 기대어 행간을 읽어보려 애쓰게 되고 말았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사실 단순한 섹스를 이르는 건 아니다. 세상의 남자를 두 종류로 가르라면, 사랑 없는

섹스가 불가능한 사람과 사랑 없는 섹스가 가능한 사람, 이렇게 가를 수 있지 않을까. 몸과 마음이 함께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리고 그는 전자였다.


연애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자긴 내 몸이 좋은 거야 아님 내가 좋은 거야. 나와

하는 게 좋은 거야 아님 그저 함께 있어도 좋은 거야. 몸과 마음, 욕망과 마음을 구분지으며 자신에 대한

순도 백퍼센트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하기 쉽다. 영화에선 다행히도 남자와 여자는 그런 경계를 일찍이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싶도록. "뾰루지 퇴치용으로 여자를 만나는 건 싫어."


대신 그들이 봉착하는 혼란스러움은 조금은 조잡스러운 거다. 남자는 여자친구가 있고 여자는 이미 결혼한

몸, 법률적 '주인'-부부는 서로가 서로의 몸에 대한 주인이란 의미에서-이 있는 거다. 키스로 시작된 그들의

일렁이는 감정에 무엇이라 이름붙일지 몰라 서로를 시험에 들게 하고 다시금 맛보고 괴롭히는 모습은, 마치

질풍노도 십대의 그것과 같다. 키스로 불붙은 서로의 몸을 두고 이게 순수한 감정일까 아니면 잠시 환각에

취한 걸까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다.


"지루한 일상을 탈피하고픈 욕망이 만든 일탈일까. 사랑이 아니라 속궁합만 잘 맞나? 난 남들보다 나약해서
이유없이 흔들리는 건가? 난 너무 이기적이어서 내 생각만 하는 건가? 달랑 키스에 애무 갖고 인생을 뒤집어
엎을 수 있나?"

어휘는 다를지언정 그들이 겪는 혼란스러움은 어쩌면 다시, 처음이다. "난 지금 그의 몸이 좋은 걸까 마음이

좋은 걸까. 그와의 키스가 좋은 걸까 아니면 사랑하고 있는 걸까." 차마 사랑이라는 단어를 유부녀의 입과

여친 있는 남자의 입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 뱉어내기 힘들어서일 뿐, 그녀 역시 몸과 마음의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들고 말았다. 남자는 끊임없이 설득하려 하고, 우정도 사랑의 일종이며,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그런 끌림이 바로 사랑이라고 되풀이 말하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어 보인다.


여기서 싸우게 될 상대는 두 가지다. 일부일처제라는 혼인제도, 그리고 지금의 남편/혹은 여친. 싸울 맘이 

용케도 생겨서 싸워야 한다면 상대가 그렇단 얘기다. 영화는 혼인제도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대신, 멋지게

이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약간의 힌트를 남긴다. 그건 다시금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니, 제도적 측면을 우회하여 '사랑'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사람에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 이쯤에서..헤어지자. 자기 잘못 아냐. 자기 탓 안해, 탓은커녕 자긴 부족한 게 없어. 근데 내 사랑이 부족한
거 같아...더 노력해볼걸 하는 아쉬움은 남아. 요즘 내가 많이 소홀했지? 안됐지만 진정한 사랑을 만났어.
헤어지게 되서 맘이 안 좋다.." 운운.


글쎄. 새로운 사랑들에겐 과거를 닫아버리는 불쾌하지만 건설적인 '통과의례'라 해도, 남는 사람에겐 분명

치졸하고 열불 뻗치는 변명이다. 그의 여친처럼 "서툴러서 그런건데 뭐. 서툴다고 뭐랄 순 없지."라고 쿨하게

넘어갈 수 있으려면 그야말로 운명론자쯤이나 되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둘만의-셋 이상의 사랑도 있을 수

있겠지만-사랑을 위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 그런 걸 구할 수 있는 절대자가 있다면

말이지만, "그(전 남편)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할 거 같애"라는 여자의 말에서 그녀가 짊어질 짐을 헤아릴 수

있으리라.


이야기의 화자는 그녀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마지막을 가까스로 봉합한다. "미련은...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해요. 애써 알려고도 만나려고도 하지 말아요. 그냥 키스가 끝나면 떠나요. 말없이, 눈길도 주지 말고

어떤 표정도 짓지 말아요. 여운은 가슴속에 추억으로 담아두기로 해요."
키스를 마친 후 몸과 마음의 반응을

정지시켜 버린 그녀, 그렇담 그녀는 사랑한 걸까 아닌 걸까. 키스는 몸이 반응한 걸까 마음이 반응한 걸까.

어쩌면 키스는 몸과 마음이 모두 담긴, 그래서 역시나 소크라테스 말마따나 '가장 힘센 도둑'인지도 모른다.


키스를 못하면 그게 안 된다. 키스란 건 마음을 말하기도, 몸을 말하기도 한다. 마음이 안 땡기면, 몸이 안 땡기면

섹스가 안 된단 이야기. 첫번째는 (남자를 좀더 믿어도 된단 의미에서) 의미심장하고, 두번째는 뻔한 이야기.


"키스는 나누기 전엔 가벼울지 무거울지 아무도 몰라요."


 



 

자신 이외의 사람을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과도 거의 아무런 유대없이 혼자 살며, 친구, 직장동료라거나 애인도 만들지 않고 '사람은 혼자 죽는다'는

신조를 갖고 다만 자신이 세운 목표만을 위해 하루하루 조용히 살고 있다. 이따금 강연을 하러 가면, 가방을 

앞에 꺼내두곤 그 가방에 불필요한 책상 위 소품들, 챙기고 책임질 자신이 없는 친구/가족/배우자, 그 

하나하나를 모두 담아서는 자크를 닫고 내다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어서 더욱 어울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생면부지의 다른 회사 직원들에게 해고통지를 하는 역할.

그 일은 상대에 대한 집중과 배려, 세심한 말솜씨와 '밀/당'의 스킬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시

상대를 볼 필요가 없는 일회적인 일이기도 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 자살하던 말던, 그는 단지 소심한

그 회사 사장 대신 통지를 전하는 역할이었을 뿐이니 알아야 할 일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는 투다.


그는 미국 전지역을 비행기로 커버하며 온갖 마일리지와 특급회원권을 향유한다. 비즈니스석과 특급호텔의

안락하고 편안한 서비스. 그 공간에서 역시, 그는 신경써야 할 소소한 장식품이니 청소니 빨래니, 책임져야

할 강아지나 가족 따위 없는 거다. 요컨대 그의 생활은 철저하게 본인 자신에 맞춰져 있고, 책임질 수 없는 본인

능력 이외의 부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부분은 그의 생활 '밖'에 있다. 


굉장히 솔직하기도, 또 굉장히 어린애스럽기도 한 태도다. 어린애같은 태도가 아니라면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라고 이토록 명쾌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그런 태도는 또 굉장히 매력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감당할 자신도 없고 벅찰 거라는 걸 알면서 꾸역꾸역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기대를 하지만, 애초

그런 거짓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겠다는 거니까. 자신은 아직 '지상에 내려와' '청소하고 빨래하고 기념일을

챙기며' 사람들과 우격다짐하면서도 행복한 척 연기나 하는 삶은 싫다는 거니까. "쿨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영화의 최대 장점은, 그렇게 뻗대는 그를 '교화'시켜 지상으로 내려보내려 안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물론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만치) 동생의 결혼 앞에 가족애를 실감키도 하고, 24시간 늘 청결하게 유지되는

화려한 특급호텔과는 판이하게 남루한 전셋집에 익숙해보려는 노력도 하지만,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거다. 아직은 up in the air, 조금은 더 자신의 방식으로 '책임지는 관계'를 최소화한 채

살겠다는 거다.


자신 이외의 사람을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지상'으로 내려가는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는 라이언

(그리고 조지 클루니)의 순수하고 도덕주의적인 태도엔 사실 반대다. 덕분에 그 연세에도 소년같은 순수함과

섹시함을 과시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그가 해고를 통보했던 사람들이 한바탕 울분을 토하고 격한

언사를 내뱉은 후에는 꼭 가족들과 함께임을 생각했듯, 어쨌든 그건 자신이 준비가 되고 안되고를 떠난 문제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책임질 준비가 된 사람을 '어른'이라 한다면, 어른이 될 준비가 되어서 어른이 된

사람이 어딨나. 그냥 피할 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지, 라이언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비행기 안, 천만 마일리지를 달성한 그 자리에서조차 기장은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우린 돌아갈 곳이

필요하고 그 곳엔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할 거미줄같은 관계망이 버티고 있는 거다. I'm from here. 라는 그의

있어보이는 듯, 그렇지만 엉성한 대답이 살짝 망연하게 들렸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을 거다. 가방에 넣고 자크를

잠가버릴 필요도, 잠가버릴 수도 없는 게 다른 사람들 속에 어느샌가 품어진, 내 속에 어느샌가 품어진 서로의

조각들이란 것. 언제까지 호텔 직원과 비행기 승무원들이 일방적으로 챙겨주는 세상에 머물 수만은 없다는 것도.


그는 조금씩 지상으로 착륙하는 중이다. 책임을 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도,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모두 쉽지 않단 건 이미 경험했으니 조금은 더 연착륙의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는 처음이었다. 뚝뚝 끊기는 화면, 그 이상으로 뚝뚝 끊기는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상황.

The New World에서 Paradise로 어느샌가 스토리는 전개되지만 사실 그 '어느샌가'란, 꽤나 낯설고 어색한

진행에 일분일초의 흐름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끝인지라 다소간 '빠른 진행에 대한 놀라움' 따위는 날아가

버린 '어느샌가'인 것이다.


중간중간 귀신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의 어색함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지만, 그러한 효과는 러닝 타임 내내

그리고 마지막 황량함과 씨니컬함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의 폭발력을 극대화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한

운명의 귀추를 차갑고 건조한 시선으로 따라가면서, 산다는게 생각만큼 그렇게 드라마틱하거나 극적이지

않음을 잘 보여줬던 거 같다. 우리가 흔히들 지나치는-알던 모르던-온갖 순간들이 갖는 사소한 가능성,

그렇지만 그 가능성이란 것도 그다지 볼품있지만은 않음을 이야기하는 영화. 허하다.


마지막, 세 사람이 제각기 흩어져버리는 장면, 그건 천국보다 낯선-낯설단 것을 방금 막 깨달아버린-세상의
 
무미함과 광막함을 보여줬다. 그들은 꼭 사막 속으로 녹아들어가 사라지고 마는 환영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

늘 존재하는 천국, Paradise의 그것이 엄연히 딱 버티고 선 실재 세계보다 낯익다니. 우린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살고 싶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걸까.


"정말 웃긴다. 새로운 곳에 왔는데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어."

아니, 어쩌면 세상에는 새로운 곳도 새로울 것도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생각조차 없을지 몰라. 뭔가 바랬다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그리고 또 소리내어 비웃을 일도 아니지만, 어딜 가나 '내 머리'를 몸뚱이에 박아넣고

다니는 한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괜한 생각.



난 김혜자가 싫었다. 그녀의 가늘고 여리여리한 목소리, 때로는 신경질적일 만큼 하이톤의 그 목소리도 싫었고,

그 목소리가 이와 혀를 걸러 발출될 때의 발음과 말투도, 그녀의 얇은 입술도 싫었다. 쉽게 근심그늘이 고이는

웅덩이같은 그녀의 양미간, 짙은 주름도 보기 싫었고 무언가 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있는 듯한 눈매와 그

축축한 눈동자도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연기는 언제나 '엄마'였다. '국민 엄마'라는 칭호로 소개되곤 하던 그녀에게선, 정말이지

여자가 아닌 엄마의 표시만이 가득했다. 잔소리와 더러는 짜증을 예비하기 위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자식 걱정에 굵게 패인 주름, 자식놈이 커나갈수록 쉬이 축축해지는 눈동자까지. 그런 '엄마'만

있는 게 아니라지만, 그녀는 그런 특징들을 꽉 쥐고 '엄마' 역할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런 엄마, 전원일기 속 엄마, 드라마 속 엄마에 더해 봉준호의 '마더'는 그녀에게서 살짝 불온하고 불안한

엄마 모습을 캐내고자 한다. 섹스가 없는 상태에서의 엄마, 섹스를 원하지만 충족할 수 없는 엄마의 모습들.

간이 옷장 안에 숨어 젊은 남녀의 육덕진 섹스를 훔쳐보는 엄마, 고등학생의 부탁으로 생리대를 고르고

계산하며 눈치보는 엄마, 휴대폰 속 벌거벗은 남자-섹스 구매자로서-들 사진을 한장씩 넘겨보는 엄마,

심지어 자신을 막 대하는 아들 친구에 묘한 긴장감을 느끼는 엄마. (어쩌면 이미 그녀와 아들 친구놈은

한번쯤 잤던 사이라고 힌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그녀, 엄마는 조금은 지쳐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라곤 아들 밖에 없는 집에서 둘이 산 지 오래다.

다 큰 아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해 팬티만 입은 채 한 이불을 덮고 엄마 가슴을 조물딱대며 잠들곤 하니,

'엄마와 잔다'는 표현이 계속해서 중의적으로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닌 거다. 아직은, 아마 앞으로도,

상상할 법한 '패륜'의 힌트가 예기되지는 않았으니 엄마는 만족되지 못한 채 지치거나 욕구불만이거나.

그렇지 않을까. 아마도 그래서 노상에 방뇨하는 아들의 그곳에 유심스레 눈길이 간 거다.


남자의 욕구야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그녀의 다 큰 아들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빠졌어도 육체는 건전하니,
 
쌓이기만 하는 욕구는 그를 '발정난 개'로 만들어 버린다. 굳이 '오이디푸스 신드롬'이니 따위 엄마에

대한 근원적 욕구를 운운할 생각은 없지만, 그를 사랑해주고 보듬어주는 여자는 그녀 뿐이다. 비록

그녀가 다섯살즈음 농약을 먹였을지언정, 그녀는 마르지 않고 넘칠듯한 사랑으로 그를 무조건 믿고

보호하며 지지한다는 걸 안다. 그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대안은, 엄마다.


아들에게 '바보'라는 표현이 그 누적된 욕구불만을 파열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면, 엄마에겐 그

아들의 존재-하나뿐인 피붙이이자 '남자'로서-가 위기에 처할 때 방아쇠가 작동한다. 천지사방을

뛰어다니며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애쓴다. 그치만 누구를 위한 구명일까. 바보천치 아들은, 콩밥도

맛있다며 교도소 안이 편하다는 아들은 사실 창살 안과 밖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혹, 엄마 자신을 위한 구명 활동 아닐까. 그녀가 살기 위한, 그녀의 욕구불만을 해소키 위한. 
 
그러고 보면 엄마에게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남자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은 더욱 서로에 의지하고, 지쳐가며, 또 헌신한다. 다른 방법이나 대안이 없기도 하다.

특히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에 대한 보호 본능이라 이름붙이던 모성애라 이름붙이던, 그녀는 아들로

인해 욕구불만이 강화되고 아들로 인해 욕구불만을 해소한다. 달리 기댈 곳이 없었던 그들의 애정이 쏟아져

나갈 유일한 통로,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 애정이 콸콸 쏟아지는 순간, 그녀는 말랐던 댐이 터지듯 온통

뿜어나오는 피분수 속에 두 손을 담궜다. 어느 순간 구르기 시작한 파국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으면서도

그 둘의 징글징글하고도 섬뜩하기까지 한 애정, 특히 엄마 혜자의 아들 도준에 대한 사랑은 더욱 뚜렷이

선연해지기만 한다.


"엄마는 원래 그런 존재야, 모성애란 그런 거지" 등등의 따뜻하지만 통속적인 이야기로 끝낼 영화는 아닌 거

같다. 그녀의 사랑은 알게모르게 현실적인 이해타산이 맞물려 있고, 다른 통로의 유무에 따라 그 강렬함이

결정되며, 그 기저엔 엄마이기 이전 사그라드는 여성으로서의 욕구불만이 마그마처럼 꿈틀대고 있다는. 

무조건 신성하고 순결한, 지고한 데다가 여성이 가진 본성과도 같은 덕목으로 찬양받는 '모성애'가 실은

그런 육체적인 욕망과 얼기설기 엮여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던 건 아닐까. 천상의 모성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몰랐는데 '카모메 식당'과 감독이 같다. 모타이 마사코라는 주연 배우도 세번째 여자로 등장했었다. 알아채기

전에도 왠지 두 영화가 느낌이 같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조용한 이야기일 거라고.

사실은 그런 첫인상과 감독과 배우 한 명 빼고는 많이 달랐다. 가끔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하거나 심지어

능청스럽다 싶도록 느그지게 빼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닮았지만, 느낌은 영 달랐다.


전통과 인습, 혹은 전통과 전설. 그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가치'를 두고 벌이는 싸움을 이렇게 유쾌하게,

또 깊이있게 표현한 영화는 잘 못 봤던 거 같다. 금테둘린 채 무겁게 먼지 속에 가라앉은 '전통'의 이미지가

보기만 해도 앙증맞은 '바가지머리'로 치환되어 버린 순간, 파리의 최신유행 빠숑(fashion)과 촌티 사이를

위태하게 넘나드는 그 스타일을 경계로 꽤나 근본적인 이야기가 작은 마을 속에 꼭 맞게 들어앉았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사회의 동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가지 머리' 마을로 들어온 '찰랑찰랑 갈색머리'

외부인을 배척하거나 질시하는 일변도가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던 질투와 부러움을 성찰하고 솔직히

소리내어 고백할 줄 안다. 외부인을 맞아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기적인' 성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친구가 되고 덩어리로 뭉쳐든다. 그렇게 열린 채로, 나이많은 사람부터 무서운 엄마까지 모든 사람들이

'전통'이라며 예스라고 할 때 쉼없이 물음표를 매달고는 급기야 전통에 반대하며 가출도 감행하고 시위도

하는 거다. 커서 멋진 노를 외치는 멋진 데모꾼이 될 거다.


비록 살색그림 가득한 빨간 책에 열광하고, 슬슬 철봉에 거기도 문대는 맛도 알아버린 장난꾸러기 녀석들이긴

하지만, 만약 '어른이란 타인을 배려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꼬맹이 아버지의 기를 쓰고 멋져보이려는 말이

맞다면 녀석들은 이미 어른인지도 모른다. 마을의 룰, 규칙, 전통보다 먼저 새로 들어온 사람을 생각하고,

그런 '전통'이 깨져나갈 때 어쩔 수 없이 아프게 될 사람을 또다시 먼저 생각하는 녀석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바가지머리를 유지하는 건 누군가에게 싫은 일이 되니까 반대지만 그렇다고 바가지머리를 없애는

건 또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니까...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며 우는 거다.


그 아이들과 미용실 아주머니의 화기애애하고 다정한 분위기는 수미상관, 그렇지만 아이들의 머리모양은

바뀌었다. 바리깡으로 밀리고 나서는 아직 형태를 잡지 못했다. 다시 바가지 머리로 길들여지지는 않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착하게도, 강한 척 하지 않고 괜찮은 척 하지 않고 울어버렸댔다.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킨다는 건 그런 아픔을 모두에게 남긴다는 걸 고백함에 다름아니었다. 아주머니 역시 어른이니까

그 어른스러운 아이들에게 우악스럽고 일방적인 아픔을 전가하진 않을 거다. 어른이니까 조금은 더 양보하고

참아주면 좋겠다.


바가지 머리, 그런 거 하나를 바꾸는데도 이렇게 다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깔끔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모든 건 변하며 사람은 늙으니까, 실은 모두가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인 척은

아니어도 최소한 나잇값은 해가면서, 상대가 짊어지고 있는 아픔, 짊어지게 될 아픔은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떼 피워가며 빨갱이니 뭐니 난동피우는 늙은이들, '反기성세대'라며 갈아엎자느니

죽이자느니 증오의 언어를 뱉는 젊은이들, 둘다 촌티 풀풀 나는 바가지 머리다.



어디나 사람사는 곳은 똑같다지만, 핀란드는 다르다. 열심히 바닥을 훑으며 줏었던 버섯들을 어느새 흘리고

올 만큼 사람을 홀리는 숲이 있어서라고는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소박한 식당에 모여앉아 밥을 챙겨먹고

커피를 마시는 그네들의 손놀림, 몸가짐,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여유로움'과

'아늑함'이라는 단어를 깊이깊이 각인시킨다. 낯선 타지로 여행을 나선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 그런 걸까.


'성공'이란 자기 억압의 결과물이라 했던가. 그냥 여기서라면 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눌러 앉을 수도,

지도를 펼치고 눈감고는 아무데라도 찍어서 떠날 수도, 여행가방의 분실을 핑계삼아 아무 기약도 계획도 없이

머무를 수도 있는 건데. 그 곳에는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세 여자가 있었고, 그녀들은

가게 분위기를 만들고 또 그대로 젖어든다. 정정해야겠다. 핀란드라 다른 게 아니라 그녀들이 다른 거다.


핀란드가 아니어도, 그녀들이라면 어디서든 숲을 살갑게 헝클어뜨리는 바람을 불러일으킬 거 같다. 어디서든

빵을 굽고 주먹밥을 쥐며 손님들을 다정하게 불러모을 거 같다. 그런 가게가 근처에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마실 커피에 마법의 주문을 속삭여주는 주인이 있고, 소박한 가게의 인테리어에 맞는 앞치마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걸치고 있는 점원이 있고. 그런 가게가 있다면 잠시 핀란드로, 어디로던 여행을 떠난

기분으로 앉아있을 수 있을 거 같다.


물론 그녀들도 언제나 그렇게 머물러 있지는 않을 터다. 완벽하다 싶은 조합은 하염없이 멈춰있을 수는 없고,

누군가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아쉬워 하며 빈자리를 쓸쓸해 할 거다. 몸이 떠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떠나

더이상 이 잔잔하고 고요한 '여행'의 동반자이기를 부정하거나, 시덥잖은 농담에 푸짐하게 웃어줄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데모, 그렇지만, 세상의 끝날에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써서 만든 맛난 것들로 파티할 때 다시 모이리라는 기대만 있다면야. 결국은 다시 모으고 모일 수 있으리란

기대만 있다면야 그야말로 다.이.조.브.

참 니가 고생이 많다. 입으로만 친구찾는 녀석들에 낚여서 정선에 훅 떨궈져서는, 잘못 찾아간 펜션에서

박대당하고 신종 꽃뱀에 물려 바지까지 털리고, 과잉친절을 베풀고는 바지를 벗겨내려는 아저씨를 만나는가

하면 기껏 만난 친구 녀석은 전 여친과 잤다는 고백이라니. (비록 오해가 풀려 전 여친이 아니라 여동생이라는

'충격적 반전'이 있지만, 그닥 고백의 강도가 떨어지지는 않는 거다.)


실은 이 녀석, 그 모든 '비극적인'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정선에 놀러가자는 친구들 꼬드김에도,

경포대에 가서 바다라도 보라는 친구 권유에도 항상 반문하는 거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거기 가면 뭐하지?

내가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놓인 곳이 변한다 해서 현실이 변할리 없다는 냉철한 판단이요 괜한 돈 낭비하며

멀리까지 나가봐야 돌아오면 똑같다는 실리적인-냉소적인-계산이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짧막하게 줄여 말하자면 거기엔 술이 있었고, 거기 가서는 술을 마실 일만 있었다. 그 고생들, 무려 오박 육일에

이르는 대장정에는 늘 술이 있었다. 정선에 도착해 처음 들어선 해장국집에도, 티비와 함께 하던 허름한 펜션

방에도, 경포대의 횟집과 어딘가의 여관방에서도. 술은 사람들과 처음 얽히는 단초가 되기도 했고, 혹은 이미

설켜있는 관계를 해소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사실 까칠하게 보자면 꼭 술이 있어야 사람들과 말을 트고 관계를 쌓아나가느냐, 형님아우하며 부어라 마셔라

해야만 그렇게 친밀감이 쌓이고 신뢰가 쌓이냐, 등등 눈살을 찌푸리며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녀석이

근 일주일 동안 주종 가리지 않고 마셔댄 결과 몸도 축나고 나중엔 술잔도 기피하는 '교육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제대로 된 음주문화를 선도하려는 의도 따위도 없을 거고 말이다.


다만 그냥 오감에 기대어 말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여행이 땡기고 술이 땡기고 또 새로운 인연이 땡겼다.

주인공 혁진이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려는 찰나, 벤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어오는 설레는 가능성의 그녀.

그녀와 그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순간 그들이 강릉으로 함께 떠나 술을 마시는 그림이 떠올라 버렸다. 다소

들뜨고 경계심이 풀린 그들, 여행 중인 그들, 음주 중인 그들, 그리고 새로운 인연 앞에 설레어하는 그들이다.


왠지 여행과 술과 인연을 굉장히 설득력있고 강력한 끈으로 칭칭 동여매어두는 삼위일체의 신비. 꼭 술이

아니어도 된다지만 역시나 술이란 '황홀한 마취와 각성의 액체', 상대와 자신의 마음/몸을 무장해제시키고

피가 들끓게 만드는 그건..곧 여행, 그리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과 통하는 거다. 혹 그가 지금 눈앞의

그녀와 함께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어디메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어디론가 흐르는

그 골목길 어귀 어디메쯤에서라도 인연은, 그리고 술집은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 다만 '숙취'는 조심할 것. 혼자 떠난 여행에서 김빠진 기대감만 발로 툭툭 차며 돌아오는 일이란 건

부지기수인 데다가, 더러는 '변태'도 만나 단돈 육천원에 몸값을 흥정해야 하는 굉장히 유니크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경험도 쌓이기 마련이니.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마음자리 곁에서 멀리 떠나있는 가족, 밥벌이용 밥통 이외엔 공유하지 않는 직장 동료들만 있다면 더더욱.


한규(송강호)가 그렇다.

그에게는 '빨갱이 사냥'하는 국정원 대공부서 일이나 '동남아 신부 사냥'하는 흥신소 일이나 별반 '밥통' 이외의

의미는 담기지 않았다. '국민들을 발뻗고 자게 한다느니' 따위의 말이야,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준다'는 명분과

똑같이 속편한 자기암시거나 위무일 뿐 그저 그는 딸내미 집 한 채 사줄 돈만 모을 수 있으면 족하다.


그런 한규라지만, 울리지도 않은 전화에 대고 살갑게 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다. 그는 결국, 외롭다.


지원(강동원)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원에서 정리해고당한 한규처럼, 지원 역시 작전 실패로 배신의 낙인을 찍힌 채 '조국'으로부터 내쳐진다.

사실 '장군님'에 대한 그의 사상과 정조가 얼마나 투철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를 움직이던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국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딸이 있는 곳, 조국.


멀리 떨어진 가족,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6년여 시간을 기다렸지만 참 쉽지 않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란 때론, 의심스럽고 위험해보이기만 하는 낯선 남자보다 못해 보일 때도 있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 기대어 선다. 사람 둘이 서로 기대어 선 사람人의 형상에 걸맞도록, 그렇게 외로움을 삭인다.

가족으로부터, 조직으로부터, 남과 북 두 강력한 국가로부터 내쳐졌거나 강제적으로 떨어져나간 채

외롭던 그들이다. (국가 자체가 거대한 병영인 북한에서 떨어져 나간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정원이라는

국가 핵심조직에서 튕겨나간 한규가 서울이 아닌 지방을 전전하며 '외국인'신부들을 잡는다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까.)


쉽지 않았다. 한 명은 명색이 전직 국정원 직원-게다가 '간첩신고'의 의무와 상금 수령의 권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인 데다가, 다른 한 명은 최고도의 살상기술을 익혔을 남파 간첩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있을

반공회로와 반자본주의 적개심과 공포심은 어찌 다독거린다 하더라도, 상황과 조직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남한은 북한의 핵을 부르고, 북한은 핵으로 으름장을 놓고, 폐쇄 회로 속에서 꼬리를 무는 남북, 북남 두 국가의

대치 상황과 함께 '맥'장군님과 '김'장군님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득달같은 기세는 언제든 파국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의 '의리'는 통일보다 어렵다.


그렇지만 외로움이 해냈다. 인간이 외롭단 건, 때로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나보다. 빨갱이를 잡고

외국인신부에 수갑채우던 그가 '인간적으로' 바뀌었고, 웃음조차 사치인 양 냉막하고 까칠하던 그가 어느새

뜨거워졌다. 그런 그들의 관계가 굉장히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마침 두 사람 다 외롭지 않았다면 시작조차

되지 못했을 그런 드라마, 영화가 마치고 나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p.s. 굉장한 스포일러 하나,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이 척박한 세상에 그들 둘만이라도 해피해질 수 있다니,

가슴이 더 훈훈해졌던 이유 중 하나. 둘 중 하나라도 죽었으면 시니컬함이 더욱 심해졌을지도.


p.s.2. 그런 의미의 애국심이면 그래도 참아주고 인정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지원이 그의 나라,

북한에 쏟는 헌신과 애정이 그렇듯,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게 각별한 사람들이 있는 땅이어서 사랑하고 아끼는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 그건 다른 곳과의 경쟁심이나 우월감을 수반하지 않는 '나라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러닝타임이 무려 162분이던가, 두시간 사십여분짜리 영화란 걸 알고 대번에 툴툴거리고 말았다.

대체 요즘 영화들은 왜 이렇게 길게만 만드는 거야, 좀처럼 덜어낼 줄도 모르는 욕심쟁이들 같으니라구.

아무리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의 전작들, 에이리언이니 타이타닉(195분)이니 전작들이 모두 러닝타임이 대체로 

길었다고는 해도, 또 그의 검증된 '능력'을 신뢰한다 해도 부담스러운 길이의 영화임에는 틀림없었다.


엊그제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바로 리뷰를 쓰고 싶었다. 워낙 요새 개봉한 영화 가운데서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는데다가, 대체로 영화에 대한 상찬 일색이었던 판이어서 나도 뭔가 말을 보태 그 '아바타

신드롬(?)'이라 할 만한 것에 묻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달까.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엇을 딱히 짚어서 이야기할 만한 건더기를 결국 못 찾고 말았다. (사실은 이 영화에 대해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발견하니 어쩌니 말은 많지만, 결국은 '현질'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다. 카메론 감독이 공들여 묘사해낸 외계 행성의 비쥬얼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황홀할

정도로 환상적이었고 전투신 등은 박진감 넘쳤으며, 스토리 역시 길고 긴 러닝타임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탄탄했지만, 무엇보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영화였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비쥬얼과 스토리 모두

빠짐없이 구비한 데다가 명감독의 능력까지 더해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된 셈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비쥬얼이나 이야기 모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비쥬얼만 따져보자면 공중에 떠있는 '할렐루야 산'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성 라퓨타'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몇 점을 그대로 영화화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고, 공중 전투신은 스타워즈에서 보았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외계 행성에 있던 '생명수'의 이미지라거나 그들의 '자연친화'적인 삶의 이미지 역시

어디에선가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났던 그런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친생태 유토피아'의 모습인 거다. 딱 잘라

말하자면 적잖이 진부한 비쥬얼이란 거다. 딱히 새롭게 상상력을 자극한다거나 전혀 참신하고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스토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바타'라는 존재를 통해 지구인과 외계인의 존재를 매개한다는, 그리고 결국 어떤

육체에 실려있을 때가 자신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은 일견 참신해 보인다. 그렇지만 매트릭스 이후, (사실은

'13층'이란 영화 이후) 모든 SF가 다루고 있는 건 일종의 탈근대적인 자아 정체성 찾기의 문제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로서 규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마주한 시공간이 현실/진실일까" 따위의 철학적

문제, 동양적으로는 일종의 '호접몽'을 제기하는 건 이미 답도 없고 진부하기만 한 관념적 유희가 되어버렸을

정도다. 거기서 더 나아가려는 영화적 시도들이 있고, 실제 그런 영화들이 개봉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제와

또다시 '이 몸이 정말 나인가 저 몸이 정말 나인가' 같은 류의 화두를 꺼내다니 조금 아쉽다. 물론, 영리하게도

감독은 이런 난해하고 오래묵은 문제를 파고들지도, 치열하게 대면하지도 않는다. 단지 영화를 맛깔나게 하는

하나의 씨즈닝처럼 살짝 얹어놓을 뿐.


결국 영화는 종을 넘어선 사랑이야기다. 생태에 대한 이야기, 인류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 인간적 신뢰와

휴머니즘의 이야기, 혹은 지구적 차원에 빗대어 선진국 대 제3세계 간의 갈등이야기 등은 하나의 양념이나

데코레이션처럼 영화를 풍성하게 하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카메론

감독이 정말 '나비'족의 생태철학과 생명존중문화를 중요한 주제로 여겼다고 생각한다면 몇 가지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적장의 가슴에 화살을 두 발씩이나 박아넣던 여자가, 처음 등장할 때엔 어쩔 수 없이 생명을 해치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그 여자라는 걸 기억하는지. 생명을 최대한 불필요한 괴로움없이

사그라뜨리려던 건 '나비'족의 어른이 되기 위한 요건이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증오'와 '분노'를 배운 셈이다.

또, 마지막 장면에 '나비'족이 포로들을 지구로 돌려보내던 장면에서 지구인들의 무기로 무장한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 그들은 지구인의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채, 지구인들의 또다른 침공을 대비하거나 혹은

자신들끼리 전쟁을 벌이게 될 거다. 그들이 지구인들에 비해 '야만'이었던 혹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인류'였던,

이제 그들도 오염되기 시작하는 건 아닐까.


뭐, 심각하게 따지고 보자면 그런 거고, 역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로 보아야 할 거 같다. 그다지

새롭거나 실험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지만, 이미 오락성이 검증된 몇 가지 이야기와 소재들을 잘 버무려서

만들어낸 전형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랄까. 어쨌건 그 스펙터클함은 영화관에서 봐야 제 맛인.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선혈이 낭자했다. 실감나게 토막나버린 팔다리는 말할 것도 없이, 동강난 머리통과

허리째 베여나가 무슨 햄덩어리같은 인체의 신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중에는 그냥, 영화배우 '레인'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썰려나가는 적들의 몸뚱이를 보면서 정육점의 전동회전칼이 생각났다. 윙~ 소리나는

그것에 큼직한 고기를 갖다대면 살이고 뼈고 거침없이 썰려나가는. 아, 물론 약간의 김칫국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효과와 외마디 비명소리 정도는 추가되어야겠지만.


액션 영화의 스토리란 거야 뭐, 뻔하니까 딱히 기대하는 것도 없었지만 영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딴 생각이었다. 이 영화에 비, 혹은 레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구가 생겼을까.

그러니까 이 영화가 관객들, 최소한 국내 관객들에게 '소구'하는 요소는 레인이 주연으로 나온다는 점

이외에 뭐가 있었을까 싶었다. 적어도 난 그랬다. 딱히 액션을 다른 장르에 비해 즐기지도 않고, 새빨갛고

끈적한 느낌의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기는 비쥬얼이기만 하면 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무슨 흡혈귀도 아니고.
 

영화만 놓고 보자면 그냥 그랬다. 그다지 여운이 크지 않았던 그야말로 살짝 얹힌 드라마, 뻔하고 간결한

스토리, 만화같은 액션, 과도하다 싶을만큼 잔인하게 선정적으로 묘사된 죽고 죽이는 장면들. 결국 그 비쥬얼에

집중해서 그걸로 승부를 보려한 영화였던 것 같지만, 킬빌에서 보였던 핏빛잔혹한, 그렇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마저 들었던 영상미보다는 많이 모자라 보였다. 훨씬 잔인하고 리얼하게 많이 죽어나갔지만 뭐랄까,

아무리 대량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져도 부담감과 속의 메슥거림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다.


아름답지 않았다.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서일 거다. 숱한 고비를 넘기고 그야말로 혈겁의 전투를 계속해온

레인의 몸에 남은 상흔들이 처절해보이고 그래서 아름답고, 그런 종류의 미감을 끄집어내기보다는 그저

너덜너덜해진 '걸레'처럼 보였던 건. '핏빛 아름다움', 뭐 그런 류의 미감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가 적들과 주고

받는 합들 사이로 번져나가는 붉은 피에서는 그다지 그런 미감이 건드려지지 않았다. 영화가 끝날 즈음 성한곳

하나없이 신체의 전면과 후면 모두 커다란 칼에 뜯긴 자국이 몇개씩 생겨난 레인이 우뚝 선 모습은 징그럽기만

했다.


레인의 연기가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액션 영화에 액션 이외 연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 영화가 추구했던 '미감'의 문제 아닐까 싶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그런 '핏빛 미학'을 추구한 게

아니었던 거다. 그저 난도질하고 죽이고 피가 사방에 적나라하게 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뭐,

그렇다면 기존 헐리우드 영화가 '동양적 소재'에 기대어 그려내려 했던 '핏빛 아름다움'의 정형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시도가 되는 셈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냥 좀 생각없이 만든 삐급영화였던 게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번에 전지현이 일본식 교복입고 칼휘두르던 '블러드'를 보면서도 느꼈던 거지만, 배우 한 두명이 헐리우드

작품에 나간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 배우로서의 대표성을 갖는 건지, 헐리우드에서 그들이 '한국' 배우로서

인정받는 건지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들은 이를테면 '배우 올림픽'에 한국이라는 나라 국가대표로 나간 게

아니라, 그냥 헐리우드에서 필요한 동양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일개 배우인 거다. 괜히 한국 배우의

헐리우드 진출, 이렇게 대서특필하고 주목하고 자랑스러워할 게 아닌 거 같은데. 오히려 헐리우드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소비하고 왜곡해 나가는 '동양', 혹은 '한국'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만 쓰이는 소모품이 되는 건

아닐까. (배우 본인들은 헐리우드 진출의 후광을 업고 돈도 벌고 명예도 얻겠지만.)


이 영화만 해도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동양의 이미지들이 덕지덕지 포장된 거다. 그건 영화가 어색한 이유 중

다른 하나일 수도 있겠다. 한국인 관객들에 익숙한 '동양'의 이미지와 컨텐츠가 왠지 익숙한 듯 낯선 모습으로

헐리우드에서 재구성되고 있으니, 도무지 몰입이 안 되는 거다. ('동양'에 대한 백지 이미지를 가진 미국이나

서구에서야 그냥 그런가부다 하고 흡수되는 이미지겠지만 말이다.) 주로 일본에서 연원하는 국적 불명의

동양적 이미지들, 상당히 강조되어 노출되는 레인의 '동양적 생김새', 가족을 중시한다 여겨지는 '동양적

가치관', 게다가 영화를 보면서 이건 일본관객들이 불쾌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동양적 복수'의

방식, 묶어놓은 사람에 복수를 한다고 칼질을 하는 것까지.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세탁소의 한국인 주인은

차치하고라도, 마이크를 쥔 힘센 '서양' 헐리우드가 동네방네 '동양'은 이런 곳이야 떠벌리는 꼴이다.


물론 한 술밥에 배부르랴, 는 지적이 나오리란 거야 빤히 예상되는 바이지만, 요는 그거다. 한국배우 한두명의

진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한국의 국격이니 위상이 중요하다 생각한다면) 헐리우드에서 한국을, 동양을

다루고 소비하는 방식의 단무지스러움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한국배우들의 헐리우드 진출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리고 그게 이슈가 되어 해당 영화가 쉽게 홍보된다고 해서 이득보는 사람이 누굴까.

결국 레인이 나온다는 사실만 빼고나면 전혀 잘 만들었단 생각이 안 들었던, 딱히 인상적인 것도 없고 울림이

남는 장면도 없던 별볼일 없는 영화였다고 고백하는 셈이다.




날것의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쉼없이 쏟아져나오는 육두문자와 걸레 물고

내뱉는 온갖 말들조차 세련되었다거나 세련되어서 어색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김기덕의 영화들에서 나왔던

막말들보다도 더욱 강하고, 진짜같았다. 리얼했다. 여기서 '리얼했다'는 말은 흔히 조폭 코미디나 깡패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관용어구'같은 욕들과 억양이 아니라, 정말 진짜로 '마음을 담아' 욕을 하고 있어 보였단 의미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경찰을 폭행하고, 거침없이 욕을 달고 살며, 아버지를 밟아 짓이기고, 길가는 여자에 침을

뱉으며, 여자에 주먹질도 서슴치 않는 사채 해결사.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다. 대화와 소재와 주제, 스토리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막장인데 대체 '세련되다'는 느낌은 어디서 왔을까. 세련된 거라 함은 보통 디테일까지

은근하지만 꼼꼼하게 안배되어 있으며, 어거지스럽거나 촌스러운 부분을 최대한 배격한 것을 이르는 것 같다.


아마 그런 부분 아니었을까. 남대문시장에 여자와 아이와 함께 놀러나갔던 남자, 그전까지 항상 쉼없이 담배를

뻐끔대던 남자의 입에 물린 담배가 불이 붙지 않은 채 빙빙 돌고 있던 어느 스쳐간 장면. 또, 아이와 여자가

금세 친해지고 살짝 겉도는 느낌을 받은 남자가 어색하게 주머니에 쑤셔넣은 손을 아이가 슬그머니 끌어당겨

잡아주는 장면. 여자가 남자의 이복 누이의 집에서 서둘러 일어나려는 남자에게 "갈테면 혼자 가"라는 식으로

당돌하게 말하면서도 문 앞을 가로막은 채 주저앉아 양파니 파를 다듬는 장면. 그리고..남자가 손목을 그은

아버지를 들쳐업고 뛰면서 내뱉는 헉헉 끊어지는 단어들, 중간중간 미처 뱉어지지 못한 채 삼켜진 단어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 남자가 입안가득 피를 머금고 꾸륵꾸륵대며 던지는 몇마디 짐승소리 같은 그것들.

너무나 함축적인데, 그러면서도 또 너무나 생생하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 역시 굉장히 좋았다. 양익준의 눈빛은
 
특히나.


세련되다는 느낌은 무엇보다 선정적이고 표피적으로 동원해낸 막장스러움이 아니라 그냥 진정한 막장을

보여준 데서 나온 것 같다. 왜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듯이, 극단으로 밀고 간 막장은 오히려 극단의 세련됨과

통하는지도 모른다.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우물쭈물하는 게 아니라, 거침없이, 끝까지 보여주면서

꾸미지 않는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욱 이야기에 흡인력이 생기고 '진심'이 담겨 버린 게다. 이 영화, 어정쩡한
 
자세로 보면 왠지 한 대 호되게 두들겨 맞을 만큼의 서늘함과 기백을 품고 있다. 실제로 양익준은 이 영화를

자신의 지난 시절을 해소해내기 위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거나 굉장히 날것이면서도 굉장히 세련된 이 영화는, 결국은 사람을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어버렸다. 아니,

그보다는 '굉장히 우울함'이라는 연못에 빠졌다가 흠뻑 젖어서 기어나온 느낌이랄까. 써늘하고, 소름이 돋고,

너무 먹먹해서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가 끝났다는 것만으로 왠지 따뜻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심마저

들게 만드는 영화다. 이 영화의 단점이랄까, 나무랄데없이 행복해보이는 풍경과 최악의 상황을 맞바로 붙여

놓는 거침없는 모양새와 비쥬얼과 사운드를 필요에 따라 드문드문 생략한 채 어느 하나에 집중시켜 버리는

영리한 머리씀씀이. 그런 것들이 일종의 뒤집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망가지고, 이렇게

형편없어져도 괜찮구나. 그래도 어엿하게 살아갈 수 있구나, 하고. 그건 분명 단점이라면 단점이고, 또 분명

장점이라면 장점인 게다.


내가 너무 쉽게 예상해 버렸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뻤던 장면 하나.

(한참 골몰하던 남자,) "야 한연희, 두년희, 세년희, 네년희 이 썅년아, 이 미친년아." "아씨 이 미친놈 진짜."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골목에서 남자가 여자에 침을 뱉고 주먹을 날렸을 때만 해도, 남자가

그녀 앞에서 이렇게 나름의 농담을 던지려고 애쓸 줄은, 그래서 귀여운 모습을 보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문장을 보는 것으론 느낄 수 없는 맛, 그리고 둘 사이의 내밀한 교류를 모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맛. 저런

대사들이 난무하는 사이에서도 그들의 눈빛만 좇을 수 있다면, 비위가 약해도 한번쯤 꼭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꽤나 컸던 영화, 기대 이상이었다. 김기덕의 은퇴 후, 이런 감독이 나타난 건

축복이다.






* 스포일링의 가능성은 최대한 비켜내고자 하는, 영화를 보고 삐쭉삐쭉 뻗어나간 사변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은 비켜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에 반대하지만 자칫-아니 백방-구구절절히

사형을 반대한다고 처벌에 반대한다거나 정당한 죗값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라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주렁주렁 엮여야 할 것은 뻔하니, 그냥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고 싶다.


사람을 죽인다. 냉정하게 말하건대 별 거 아니다. 실수로, 사고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심지어 스스로

목숨줄을 놔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 생명이란 게 얼마나 취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여느 영화에서처럼 목 한번 돌려주거나 숨통에 바늘 하나 꼽는다고 켁, 나자빠져 버리지야 않겠지만 그냥 목에

밧줄 한번 감아서 땡겨주거나 전기로 지지거나, 여차하면 독액이 든 주사액을 주입해버리면 그뿐이다. 실제로

사형은 그런 식으로 집행된다. 어쩌면 흔히 벌어지는 일들과 같이 차에 치이거나 높은 곳에서 밀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수고로울지 모른다.


죽이는 건 별 거 아니다. 사람의 육신을,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건 쉽다. 문제는 그 임팩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밖에서 보기엔 법원의 판결이, 공문 한 장이, 국가의 이름 하에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거였지만,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아무리 국가의 공무(公務)라는 휘광 뒤에 숨으려 해도, 사회의 법과 정의를

위해서라는 대의를 내세우려 해도, 혹은 피해자의 아픔과 가해자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인 공명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건 사람이다. 비록 그게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거라 해도,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신성하고 지고한 '초인간적인' 국가 따위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는 부르조아

소위원회..한줌의 사람-그들 역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과격한 거일라나.)


갈림길이 나온다. 이사람은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보이)고, 죄값도 치렀(다고 생각하)으며, 결과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사람은 죄를 뉘우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고, 사회에 돌아가면 계속 죄를 저지를

(처럼 보)이고, 갱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람을 살릴지 저사람을 살릴지,

누굴 죽여도 되고 누굴 안 죽여야 할지의 갈림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신'의 갈림길이다. 앞선 문장

중간중간을 얼기설기 묶어둔 괄호들, 그게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징표들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오바하는

걸까. 다른 생명을 판단하고 소멸시키는 건 신, 혹은 만물을 주재하는 운명 따위가 존재한다면 그가 맡을

역할이지, 동일한 생명, 인간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저사람을 죽일 때의 죄책감이 다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리 강호순 사건 때나

조두순 사건 때 골프장 갤러리들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쳐죽일 놈, 광화문 네거리에 육시를 할 놈, 어쩌구

막말을 내뱉던 사람들도 밝고 맑은 정의로움과 숭고함을 유지하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을 거다.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니까 막말을 하고 저주를 내뱉고 '죽여라'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다. 설혹 '내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해도, 또 설마 실제로 직접 손을 써 죽여버린다 해도, 영화 속 집행자들처럼 뭔가가 하나둘씩

무너져버리고 말 거다.


처음에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형제도를 건드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을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 그간 주목받지 못해온 사형제도의 비인간적인 한 측면인 거다.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집행'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상한 게 있다. 왜,

집행의 선고자들, 이 사회와 제도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가. 저승에 있다는 

길고 긴 젓가락을 휘두르듯, 그렇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들어 '집행'시키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격무에

시달리거나 피곤해서는 아닐 텐데. 


"우리는 망나니였어" 어쩌구 하는 대사가 있었다. 사회를 위해 법을 집행하는, 좀더 적나라하게는 살인을

떠맡는 존재들. 사회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그들 안의 무엇인가는 어쩌면 사회로부터 죽임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걸 또 다른 '살인'이라 부르기는 무리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버리는 건 틀림없는 거다.



* 고백 하나, 사실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순간은 꼭 정말로 사람을 죽일 때만은 아닌 거 같다.

거리에서 전경들과 마주 선 채 투석이 난무하거나 파이프를 맞대고 있을 때, 전쟁터와 같은 그런 상황에서 역시

분노와 공포, 혹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 뭔가

눈먼 야수같은 광기가 뿜어지는 듯한 감각은 두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단지 문제가 사형이

살인인지 아닌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을 조장하는 시스템, 문화, 분위기, 그리고 감수성의 차원까지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이야기다. 꼭 생명을 말그대로 끊어버려야 살인이 아닐 거다.

(물론 당연히도 이른바 '폭력집회'가 잘못되었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과 정책의

문제를 틀 내에서 해결치 못하고 거리에서 파열음을 내게 만드는 기제 자체가 비인간적인 상황을 이끈다는

말이다. 2미터 앞에서 돌을 던지는 보호장구 완비한 전경들이나, 자위적 차원에서 무장을 한 시위대, 문제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故장자연이 카섹스신과 자살신에 등장한다며 마케팅을 펼쳐 다소 물의를 빚는 영화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 영화가 이 영화였는 줄은 모르고 봤다. 꽤 긴 러닝타임, 그녀의 카섹스와 그녀의 자살은 흐름을 받치는 꽤나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생각했고, 아마 그녀의 분량을 덜어냈다면 영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겠다 싶었다. 비록

가고 없는 고인이 영화속에서 싱싱한 육체를 흔들며 신음소리를 내뱉고, 욕조 속에서 손목을 그은 채 죽어있다

해도, 그녀는 연기자로서 마지막 필모그래피를 해낸 거 아닐까. 마케팅에 의도적으로 동원한 측면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그녀의 죽음을 팔아 선전하는 거겠지만, 그녀의 자연스럽고 그럴 듯한 연기는 나무랄 데 없었다.


영화는 다소 가지가 많달까, 좀 많이 쳐냈어야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러닝타임도 길고, 너무 잡다한 상념과

너무 힘이 들어간 상징들이 즐비하다 싶어, 좀더 밀도있게 응집시켰어야 했다 싶은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꽤나 상류의 삶을 영위하는 30대 초반 세친구들이 보이는 현실적인 삶과 더불어, 장혁의 환상과 상상을

이미지화하여 스크린에 쏘아내면서 영화는 좀 종잡을 수 없이 흐르거나, 때로 관객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던
 
거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견디다 못해 나가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걸 테고.


'펜트하우스 코끼리'. 아마도 '펜트하우스'가 세 친구 그들의 부족할 것 없는 삶, 허영에 찬 삶을 상징한다면,

때로 구름 위에서 네다리를 휘젓고 혹은 벽면에서 3D 영상으로 나타나는 '코끼리'란 녀석은 그들의 환상이자
 
막연한 지향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묘한 제목은 그렇게 현실과 환상을 병치시키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내용은 크게 두 개의 흐름이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채 조울증에 시달리는 장혁의 뇌까림,

코끼리만 찾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탄식. 그리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상황에서, 다시

장님 코끼리 만지듯 무언가 막연한 걸 잡고 일어서는 모습. 농도짙은 섹스신과 야하고 야비한 농담들,

그로테스크하고 시니컬한 장면들은 덤이다.


장혁이 어렸을 적 사람이 붐비는 동물원에서 엄마와 했던 약속, 혹시 손을 놓치면 코끼리 우리 앞으로 오라던.

코끼리만 찾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코끼리 우리도 너무 크고, 주위엔 사람들도 많고, 코끼리란

자식 역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며, 인생을 통틀어 가장 두려웠던 기억이라 장혁은

고백하는 장면, 난 여기서 영화가 끝나는 걸까 생각했다. "코끼리만 찾음 되는 건줄 알았는데." 그 말의 울림이

가히 엔딩 수준이었단 말이다. 대학만 가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직장만 잡으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결혼만

잘하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돈만 많이 벌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사랑만 하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나이 삼십 넘어서 이렇게 후지게 살 줄은 몰랐어."라는 대사가 꽤나 와닿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전부 후지게 살고 있었다. 코끼리 따위는 대마 연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세상, 펜트하우스의

재력으로도 별 수 없는 거다. '가을을 탄다'라는 표현이 내면의 파르르 떨리는 마음을 가을 한철로 몰아넣고

말아버리듯, '사춘기'라는 표현 역시 심약하고 가파르며 위태로운 내면의 풍경을 특정 나이대의 특징인 양

구별짓고 떠밀어버린다. 사실은 '나이 삼십넘어서'도, 혹은 '평생'(이라 해도 좋을만큼의 시간동안) 한결같이

쭈욱 가을을 타고 사춘기/오춘기에 시달리는 건지도 모른다.


제길, 코끼리만 찾으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코끼리만 찾으면 되는 게임이면 참 쉬울 텐데. 어쨌거나 문득

동물원에 가보고 싶어지게 만든 영화였다.





* 스포일러 없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만..


어느 예술작품이나 그렇지만 특히 SF나 환타지류의 작품들은 특히나, 현실에 대한 은유와 시사점이 더욱

눈에 밟히게 마련이다. 맨 땅에 헤딩하듯 백지에서 뻗어나온 상상력이 아니라 감독,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소구할 수 있는 특정한 현실을 울룩불룩 비틀고 치환했기 때문에 그럴 거다. 이미 이 외계인'떼'가 등장하고

거대한 우주선이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떠있는 굉장한 스케일의 SF영화 역시, 빈부격차, 철거민, 성적 소수자에

이주노동자, 심지어 '호모 사케르'(이미 서평을 올린 적 있다.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라는
 
개념까지 동원해서 해석되고 있다.



워낙 다 맞는 지적들이다. 영화 중 드러나는 외계인과 인간의 대치 상황, 역관계를 고려하면 외계인은 구조적

빈민, 철거민, (지탄받는) 동성애자라거나 이주노동자, 그렇게 이 사회에서 밀려나고 배제당한 사회적 약자의

뚜렷한 상징이 분명하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받고 도외시되는 2등 국민인 거다. 피가 튀고

살점이 씹히고 하는 화면도 걸쭉하니 살벌하지만, 그보다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용병에게 사냥당하는 그들의 처지가 더욱 살벌하게 와닿는 이유다.
 

새삼 말을 보탤 필요도 없이 다양한 해석들이 설득력있게 나왔지 싶다. 하나만 딴죽을 걸자면, 외계인의 처지는

현실세계의 '2등 국민', '호모 사케르'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비록 지도층이 지구 착륙시 대부분 사망해버려

무질서한 군집을 형성한 채 지구인으로부터 천대받고 살지만, 그들이 가진 과학기술은 인류보다 월등한 것이
 
분명하고 정신문명 역시 최소한 낮지는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그들은 원래 (지구인에 비해)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20년동안 멈춰있던 우주선 덕분에 사람들의 두려움과 일종의 경외감 역시 화석처럼 딱딱해져 버린

건지, 다행히도(?) 지구인들은 그들의 약자에 대한 잔혹함을 외계인들에게 여지없이 발휘한다. 덕분에 영화는

3년 후를 기약하는 장면으로 거침없이 내닫을 수 있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외계인들을 돕는 주인공 남자,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키를 쥔 쪽은 외계인임을

깨닫게 된다. 남자는 끊임없이 비열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계산적으로 행동해 왔지만, 그 계산과 복잡한 속셈은

모두 '인간>외계인'이라는 부등호 위에 버티고 서있었던 건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외계인이

수송선을 숨겨두었다는 걸 알게 된 즈음일 게다. 과거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엑스칼리버'같은 그것.) 그는

이제 외계인이 자신의 명운을 쥐고 있음을, 또 자신과 다른 외계인들의 복수를 해줄 것임을, 그럴 수 있는

힘과 의지와 '선의'를 갖고 있음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을 향해 입을 벌렸던 부등호가 등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건 그거다. 3년 후, 외계인들이 돌아왔을 때 남자는 인간으로 남기를 고집할까. 선택권이

그에게 남아있기는 할까. 우연찮게도 3년 후, 영화가 개봉한 해를 기준으로 하면 2012년인데, 또다시 2012년의

대재앙을 예고하는 영화인건 아닐까 싶다. 그가 되찾고 싶었던 과거는 사실 그의 아내, 그녀의 사랑 그자체다.

어쩌면, 변신이 완료된 그의 절절한 소원을 뿌리치지 않을 만큼 '인류애, 휴머니즘'을 가진 듯한 외계인들의

배려 덕분에 인류 마지막 아담과 이브가 되어 새로운 별로 이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이제 인류, 라기보다는

'인류였던' 남녀 한쌍이 되어.


사실 어느 순간 '외계인'이라는 단어가 혼란스러워진지 오래다. 그들은 외계에서 왔지만 지구에 거주 중이다.

그들과 우리, 가 칼로 자르듯 더이상 산뜻하게 갈라지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외계인'이란 존재를 철통처럼

포박한 채 물 위의 기름처럼 분리시키고 있던 그 온갖 제재와 표식들은, 그 부적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무작정 밀쳐버리고 떠밀기만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대책없이 소멸될 예정이다. 단, 외계인이 힘을 회복했을 때.



이순재 대통령이 펼쳤던 '동아일보',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제호 아래 떡하니 버틴 오자, '당청금'. 특정 신문사

혹은 하향평준화되어가는 언론계 맞춤법 실력을 풍자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장동건이 참모와 나눈 대화 중

'시장나가고 떡볶이 먹으면 서민정책이야?' '보여주는대로 믿습니다'란 대사야 너무하다 싶게 노골적이었지만,

보통 가정을 꾸리고 사는 최초의 여성대통령 고두심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모습은 왠지 조금많이 에둘러서

'같기도 안같기도 한' 누군가의 처지를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달려들고 싶지는 않고 그냥, 어렸을 적 잠깐 품었던 '대통령'의 꿈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야 워낙 어렸으니 별 생각없이 과학자 되겠다는 짝궁 이겨먹겠다고 난 대통령이나 될까, 서울대 가겠다는

짝궁 이겨먹겠다고 서울대는 시시하고 하바드나 갈까, 이런 식이었던 것 같지만. 조금 머리가 굵어지면서

대통령이란 자리는 뭔가 내가 손을 뻗을까, 생각해 볼 만한 '직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한줌 정치인들만의

정략적인 계산 결과 얻어지는 자리라 여기게 됐었다. 어쩔 수 없이 뒤가 구리고, 거짓말을 직업적으로 하고,

조선시대 왕과 같은 그런 존재라고.


근데, 이런 대통령도 꿈꿔볼 수 있었던 거다. 이순재 같은 대통령, 장동건 같은 대통령, 고두심 같은 대통령,

그들 역시 별 수 없이 노회하고 얄미운 정치인이고, 각자의 정견에 따른 요상한 정책들을 펼치겠지만, 그래도

꽤나 인간적이지 않은가. 사실은 꽤나 '훌륭'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꽤나 훌륭한' 대통령을 여태

현실세계에서 만나보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뭐, '적당히 훌륭한' 대통령은 한두명 만난 거 같긴 하지만.

웃으라고 만든 영화인 거 같은데, 별 수 없이 자꾸 현실과 비겨보게 된다. 젠장.


한가지, 장진 감독의 작품이란 걸 몰랐다면, 제목만 보고서는 그다지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동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왜 이렇게 얌전하고 무색무취한 제목을 달았던 걸까. 좀더 매력적인 문구 없었을까. 이를테면, 음..

음..쉽지 않구나. 그냥 뭐, '이쯤되면 막가자는 대통령질'이라거나, '당선은 됐지만 대통령은 아니더라'. 뭐 요런

제목? 아님 '개나 소, 그리고 대통령' 이런 제목은 어땠을지. 개나소나 다해먹는 대통령질이라는 의미로다가.

이 영화를 보고는 나조차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하고 대통령의 꿈을 한번 꿔볼 수 있는 영화였으니 말이다.








수십명 남녀의 난교, 여성의 자위, 남성의 아크로바틱한-스스로의 입을 사용한-자위, 남자들/여자들의 동성애, 남자들의

쓰리썸, 관음증에 S/M까지. 왠만한 성인영화나 포르노물에서도 한꺼번에 다루기 힘든 소재들이다.

그런 이슈들을 한꺼번에 다룬 '발칙한' 영화, 그래서 한국에 수입될 때 이런저런 말들도 많고 제약도 적잖았던 영화,

숏버스. Short Bus. 숏버스란 '능력있고 결함있는' 자들을 위한 뉴욕의 어느 모임 공간의 이름.


제이미와 제임스를 넘나드는 주인공 남남 커플의 이야기가 중심축이랄 수도 있겠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겨졌던

장면은 스무살 어간의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청년-그것도 모델출신-이 숏버스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낯익은 할배와

조우하는 장면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 내가 뉴욕시장이었으니까."


희끗희끗 헐벗은 머리에 쭈글쭈글한 얼굴을 가진 그 뉴욕 전 시장 할아버지는, 알콜 기운도 없이, 맨 정신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물론 한쪽 방에선 벌거벗은 젊은 남녀의 난교가 질펀하고, 대마 연기 자욱하게 피어올려지는

공간에선 여지없이 남녀/남남/여여/혹은 '창의적인 방식'의 교합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이긴 하다.) 자네는 무슨

잘못을 하고 여기에 왔는가. 별거 아닌 거였겠지. 고향이란, 자신의 정서적 보금자리라 여겨지는 고향이란, 때론 무지하게

가혹하고 냉엄해질 수 있다네. 그게 뉴욕처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오랜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세상에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이라 해도 말일세.



잘못이란 건, 자신이 저지른 것일 수도, 혹은 누군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각인시켜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뇌와

클리토리스를 연결해 오르가즘을 만들어낸다는 일종의 마법회로처럼, '나'와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알기
 
힘든 블랙박스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임스(혹은 제이미)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성적

가혹행위나 매춘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다. 외견상 문제될 게 크게 없는 커플 상담가/섹스 카운셀러

유부녀는 엄격한 동양적 가정교육과 아버지의 도착적이다시피한 감시로 인해 정작 오르가즘을 못느끼는 석녀란다.

새디즘을 만끽하며 가죽옷과 채찍에 탐닉하는 '제니퍼 애니스톤'은 정작 자신의 이름조차 철저히 숨겨온 여리고

상처투성이인 영혼일 뿐이고, 주인공이랄 남남 커플의 일상을 쉼없이 따라가는 스토킹행위로 관음증적 욕망을 해소하는

맞은 편 집의 남자는 사실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는 것조차 숨막혀 하는 순둥이다. 그런 식이다. 뭐 때문에 뭐, 이렇게

단선적으로 말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백퍼센트 자신의 모자름이나 부족함 때문이라 말하기도 힘든 상황,

그래서 블랙박스, 마법의 회로일 게다.


섹스야 제각기 침대 속의 내밀한 이야기이듯, 사실 이 영화에서 각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블랙박스'의 해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자살시도라는 격하고 돌출적인 행위를 통해,

혹은 반편향의 과도하고 도발적인 성적 탐닉을 통해, 혹은 스스로 흘러내리는 껍질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등의 방식이 있겠지만, 해결책이야 각자가 꼬여있는 방식이 다른 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고, 심리적인 문제가 으레 그렇듯

겉으로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다. 제각기의 방식으로 제각기 맞닥뜨려야 할 문제.


정작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 그들이 문제에 직면하는 방식이었다. 뉴욕의 시장이었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중후한 연세의 '아저씨', '아줌마'이든, 남녀노소 미추를 불문하고 각자의 '계급장'과 '사회적 자본'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막혀버리고 뒤틀려버린 감정선을 되찾겠다 나서는 것, 그리고 전 뉴욕시장 할배가 그랬듯 얼마나

나이가 들었고 외부의 평판을 쌓아놨던 간에 스스로의 결핍과 부족함을 자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건 '여태 경험치

못한 오르가즘을 되찾는 모험'일 수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는 무작정한 몸부림(자살까지 감수하는)'일 수도,

'한평생 쌓아올린 경력과 평판보다 스스로의 가치와 취향을 지켜내려는 자존감의 싸움'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럴 수 있을까. 성적 쾌락에 대한 탐닉과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 성적 흥분의 인과를 차갑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렇게

벌거벗은 상태로 스스로를 응시하고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결국은 스스로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를 지켜내고
 
있을까. 그 시험대가 대마초 연기 자욱하고 아마도 땀내와 정액냄새 질펀할 그런 공간이란 건 딱히 중요치 않다.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억눌리고 비틀린 욕망을 마주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곳이란 '그럴듯한 포장'도

가능할 거고, 간단하게는 그저 '어디라도 상관없었다'라는 식의 빗겨나감도 가능할 거다. 어디서든, 그게 성당의 고해소가
 
되었건 사랑하는 이의 품속이 되었건 온갖 욕망과 희열이 둥둥 떠다니는 성적 해방구가 되었건,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되는 거다.


아마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의식한 듯한 그 할아버지 캐릭터는, 그런 혼몽하고 '난잡한' 분위기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멍하니 휩쓸리지 않고 되려 중심을 잡은 채 스스로를 건져내고 지켜내러 그곳에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 궤적을

좇는 다른 몇몇 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단순히 살색 그림-검은색이던 분홍빛이던 노란색이던-만

노출되었던 다른 수많은 영혼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중심을 잡으러 왔는지 휩쓸리러 왔는지. 그것 역시 실은 지극히도

개인적인 영역,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영역인 게다.


다만, 나이가 몇이 되었건 사회적 지위와 성취가 어찌 되었건, 그들은 뭔가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찾으러

움직일 만큼의,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다 벗어제낄 만큼의 용기와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꼭 섹스여야 하는지, 동성애나 SM이나 관음증이나 쓰리섬이나 난교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결핍과 결락감을 인정하고 새롭게 (되)찾으려 드는 그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육체의 리드미컬함은 아니었다.


사실 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도 생각한다. 꽤나 멀리, 그리고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른바

'시초축적'이 시작되고 역사가 시작된 건, 자유로운 성욕을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끄러매면서부터

비롯한 건 아닐까 하고. 사랑할 만큼만 먹고 살면 되었을 세상이, 누군가를 먹여 살리고 안정적이고 반영구적인 잉여를

남기기 위해 사랑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린 건 일종의 비극일지 모른다고.


총구에 장미꽃을 일일이 꽂아주었던 68혁명의 정신, 히피의 정신이란 게 그런 건 아니었을까. 생명살상을 위한 총알이
 
발사되는 총구가 상징하는 차갑고 흉폭한 남성성에 여리고 섬세한 장미꽃,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 그걸 가능케 하는

세상의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 개인적으로도 직면하기 쉽지 않은 자각의 순간, 다 벗어던지고 알몸의 스스로를

새삼스럽게 쳐다볼 수 있게 해주는 '숏버스'.
 

거긴 머물러 살 곳은 아니지만, 최소한 잊지 않고 가끔씩 들러줘야 하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김현중이 신종 플루 확진을 받았다고 하는데, 오늘 '코코 샤넬'을 보려고 영화관에 갔다가 내가 앉았던 자리가 바로 F4.

김현중이 완쾌할 때까지라도, F4의 멤버로 활동을...? (퍽퍽;;; )


코코 샤넬은 어느 자의식 강하고 자존심센, 그리고 패션 감각이 탁월했던 여성의 일생을 그린 영화였다. '샤넬'브랜드와는

별로 관계치 않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질투로 말미암아 사랑하게 된' 남자와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제약당한 채

사랑하는' 남자 둘과 벌이는 사랑이 주된 뼈대가 되는 이야기랄까. 프랑스 영화스럽게 잔잔하고 차분하면서도 곧잘

배우들의 연기로 화면이 꽉 들어차는 장면들이 와닿았다. 근데 그 여주인공, 오드리 투투 인가, 강혜정하고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일까.


강혜정한테 예전에 싸인 받았던 게 어딘가 있을 텐데, 못 찾겠다. 그거 찾으면 포스팅해서 저도 결혼식 가고 싶어요~라고

징징댈라 했는데.ㅜ 타블로와의 결혼, 축하합니다~^^



* 저는 진심으로 김현중씨의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오해 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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